쪼개진 자아
2021년 8월 8일 본문 말씀: 욥기 29:1-7
(29:1) 욥이 또 비사를 들어 가로되
(29:2) 내가 이전 달과 하나님이 나를 보호하시던 날에 지내던 것 같이 되었으면
(29:3) 그 때는 그의 등불이 내 머리에 비취었고 내가 그 광명을 힘입어 흑암에 행하였었느니라
(29:4) 나의 강장하던 날과 같이 지내었으면 그 때는 하나님의 우정이 내 장막 위에 있었으며
(29:5) 그 때는 전능자가 오히려 나와 함께 계셨으며 나의 자녀들이 나를 둘러 있었으며
(29:6) 뻐터가 내 발자취를 씻기며 반석이 나를 위하여 기름 시내를 흘러 내었으며
(29:7) 그 때는 내가 나가서 성문에 이르기도 하며 내 자리를 거리에 베풀기도 하였었느니라
욥은 자꾸만 자기 변명으로 일관합니다. 달리 자기에게 난데없이 찾아온 고난을 설명할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은 결코 나를 떠나지 않고 자신은 누가 뭐래도 하나님을 떠날 수 없다고 장담합니다. 하지만 과연 욥이 이런 식으로 일관되게 주장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일까요?
아닙니다. 욥기 1장을 이미 알고 있는 우리 입장에서 욥이 놓치고 있는 게 있음을 제대로 압니다. 그것은 바로 악마로 하여금 욥을 치도록 하신 분이 욥이 그렇게 사모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왜 선하신 하나님께서 악마를 자신를 치도록 허락하셨는지에 대해서 욥은 수용할 수가 없을 겁니다.
이점은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예외가 아닙니다. 바르게 살아서 복받고 나쁜 짓하면 하나님을 벌받는다는 이 원칙이 얼마나 합리적으로 자연스러운 원칙이다는 생각에 우리는 철두철미하게 매여삽니다. 그런데 신약에 사는 우리들은, 악마가 없이는 메시야직이 형성되지 않는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욥은 이점에 어둡습니다. 그럴 필요가 없다고 여깁니다. 인간들이 하나님 앞에 바르고 정의롭고 착하게 살면 복받는 것은 자연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닌가 라는 식으로 이해합니다. 쉽게 말해서 왜 굳이 메시야의 존재가 필요한가를 인간의 인식으로는 충분히 도출될 수 없는 내용입니다.
이점으로 인하여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의 특수성이 확연해집니다. 세상 사람들이 상식으로 알고 있는 선과 악의 체제로서 설명이 불가능한 특별한 인물이어야 하는 겁니다. 이 세상과 차별화되는 요소가 발현해야 제대로 메시야로 더불어 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겁니다. 바로 이런 작업에 악마의 활동이 필수적입니다.
욥기 초반에 하나님께서 악마에게 욥이 처리하도록 허락하십니다. 이로서 욥은 장차 오실 예수님과 관련성을 맺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본격적으로 메시야일을 나서시기 전에 광야에서 악마에게 시험받는 절차를 맞이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악마는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신 그 현장까지 줄기차게 따라붙여서 예수님을 시험하십니다.
자, 악마가 인간들을 설득하는 내용은 무엇일까요? 악마는 하늘날에서 배신자입니다. 악마는 메시야가 어떤 식으로 생명나무의 과실을 먹게하는 친 백성을 만드는지 잘 알고 그것을 어떻게든 실패로 끝내기 위해 분주하게 설쳐댑니다. 그것이 바로 이 세상은 눈에 보이는 이 세상으로 국한 시키는 방식입니다.
즉 인간이 보는 그 한도까지를 유일한 현실 세계의 전부로 간주하게 만드는 겁니다. 따라서 이 눈에 보이는 세계로 한정 지어진 이 현실 속에서 잘 먹고 잘 살면 그것으로 하나님의 복이라고 간주하게 만들어버렸습니다. 예수님의 메사야적 고난 같은 것은 아예 안중에 안 들어오도록 여기는 겁니다.
나에게 충실하고 내 희망과 나의 기대에 부응하는 식으로 인생을 살면, ‘인생 그나마 잘 살았다’라고 보람을 느끼도록 악마는 세상을 그런 식으로 구조화했습니다. 즉 ‘메시야가 없는 세계’를 꿈꾸게 한 겁니다. 이는 곧 ‘외부 없는 스크린으로 둘러 친 그 자체의 세계’가 세상의 전부라고 통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장차 오실 메시야와 운명적으로 연결되어 버린 욥에게는 이 원리와 전혀 어울리지 않고 맹렬한 고난이 들이닥쳐버린 겁니다. 이것은 그동안 인간들이 안일하게 구상한 현실관에 뭔가 오류가 있음을 밝혀지는 요소이기도 합니다. 물론 이 시점에서 욥은 해답이나 해결책은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가만 두고 보지는 않습니다. 자신의 정당성을 욥기 27장에서 강렬하게 주장했고, 동시에 하나님도 의롭다는 사실을 부인하지 않겠다고 자부합니다.그러나 이 둘 사이에는 모순이 성립하고 맙니다. 그 사이에 끼인 ‘고난’문제가 해결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욥 자신과 하나님과 우정어린 사이라면 왜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죽으라고 고난을 주신 이유가 불명확해져 버립니다.
우리는 이 시점에서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자와 그렇지 않는 자를 어떤 식으로 차별지게 다루시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먼저 불신자들은 아무리 오랫동안 교회 다녀도 결국에는 자연인으로 되돌아오게 되어 있습니다. ‘원래대로 돌아온다’는 말은 복과 저주는 나 하기 나름이라는 원칙을 고수하는 것을 뜻합니다.
즉 하나님에게 잘해주면 결국 그 공이 나에게 되돌아온다는 원칙을 말합니다. 이렇게 되면, 연속적으로 인간은 자기 동질성이 유지되어야 할 겁니다. 과거의 했던 그 나와 다른 나가 되면 아니되는 겁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어느 가수가 팬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기다려 준 만큼 좋은 노래로 보답할게요”
즉 전에 나와 지금의 나와 동일한 나로 유지되고 있다는 겁니다. 하지만 하나님에 의해서 선택된 자는 그런 소리를 못합니다. 왜냐하면 끊임없이 하나님의 말씀의 침투를 받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15:10에 보면, “아브람이 그 모든 것을 취하여 그 중간을 쪼개고 그 쪼갠 것을 마주 대하여 놓고 그 새는 쪼개지 아니하였으며”
창세기 15:17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해가 져서 어둘 때에 연기 나는 풀무가 보이며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더라” 아브라함이 드린 제물은, 제물의 동질성을 허락하시지 않고 가운데가 쪼개지면서 그 쪼개진 양면이 서로 마주보도록 놓여져야 합니다. 그리고 난 뒤 밤이 되니 하나님께서 횃불이 되셔서 그 한가운데서 지나가십니다.
즉 나와 나 사이를 벌어져야 하고 그것을 새로운 방식으로 통합되어야 하는데 여기에 하나님의 약속이 삽입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즉 내가 죽은 자가 되는 방식으로 나는 새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될 때 내 안에는, 사망을 이기시고 죄를 이기신 하나님의 요소가 담기게 되는 겁니다.
인간과 하나님의 우정이란 그 가운데서 하나님의 아들의 희생이 필히 개입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께서는 다른 것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라 아들이 해내신 ‘하나님 의’만 받으십니다. 이로서 성도는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과 연계된 택한 자이기에 그저 그 나라와 의만 나오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95강-욥기 29장 1~7절(쪼개진 자아)210808 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욥기 29장 1~7절입니다. 구약성경 787페이지입니다.
“욥이 또 비사를 들어 가로되 내가 이전 달과 하나님이 나를 보호하시던 날에 지내던 것같이 되었으면, 그때는 그의 등불이 내 머리에 비취었고 내가 그 광명을 힘입어 흑암에 행하였었느니라, 나의 강장하던 날과 같이 지내었으면 그때는 하나님의 우정이 내 장막 위에 있었으며, 그때는 전능자가 오히려 나와 함께 계셨으며 나의 자녀들이 나를 둘러 있었으며, 뼈터가 내 발자취를 씻기며 반석이 나를 위하여 기름 시내를 흘려내었으며, 그때는 내가 나가서 성문에 이르기도 하며 내 자리를 거리에 베풀기도 하였었느니라”
욥이 하나님과 이웃에 대해서 자기가 항상 걸쳐있었던 그때 그 시절에 대해서 회상합니다. 하나님과 동무였던 시절, 하나님과의 우정, 같이 공감했던 그 시절이 지금 그립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지금 욥에게 무엇이 빠져있느냐 하면 욥이 지금 고난받는 상황이 악마에 의해서 지금 처벌받는 중이라는 사실을 지금 욥은 모르고 있어요.
욥은 무엇을 모르느냐, 악마가 욥에게 들이닥치도록 하나님이 허락한 이유에 대해서 모르고 있습니다. 나같이 괜찮은 사람에게 악마가 들러붙을 하등의 이유가 없다고 여기는 거예요. 그런데 악마라는 존재 자체를 생각하지 않고 단지 왜 이렇게 힘들고 모든 것을 상실한 상태가 되었는지는 모르겠고, 다만 아무 일도 없을 그때, 건강할 때, 모든 것이 정상으로 돌아갈 때 그때 그 시절이 그립다고 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욥의 사적인 입장에서 악마가 자기를 찾아올 하등의 이유가 본인한테는 없는 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악마로 하여금 “욥을 다루어라. 내가 허락할게”라고 하실 때 하나님이 악마에게 욥을 허락하는 하나님의 조치가 욥에게는 낯설기 짝이 없는 거예요. 왜 그래야 합니까? 왜요? 제가 악마에게 시달려야 될 이유가 뭡니까? 그걸 욥 자체로는 찾을 길이 없어요.
이럴 때는 이스라엘로 갈 것이 아니고 바로 신약으로 가야 해요. 신약으로 바로 가면 신약에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메시아를 규정하는 일을 합니다. ‘이 땅에 메시아가 왔다. 그분은 이런 모습을 이런 몰골을 하고 있다. 그분이 바로 메시아다’라는 하나님이 이 땅을 통해서 메시아 만들기를 시도한 겁니다. 이 메시아 만들기에 있어서 악마가 필수적이에요.
악마가 꼭 들러붙어야 해요. 예수님께서 일하기 전에 광야에서 악마를 꼭 만났어야 하는 겁니다. 그리고 악마에게 계속해서 시달릴 대로 시달려야 해요. 그것이 예수님이 당했던 고난이라는 겁니다. 그 메시아 상, 악마에게 시달릴 대로 시달리면서 예수님과 욥의 차이는 욥도 장차 메시아적인 요소와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난데없이 고난당 할 때 차이점이 뭐냐 하면 욥은 자기의 고통 속에서 예수님처럼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 이 뜻이구나’라고 돌파할 수 있는 어떤 근거가 없어요. 자기에게는.
자꾸 불평하는 거예요. ‘제가 뭐가 잘못되었습니까? 제가 어떻게 마음을 고쳐먹으면 되겠습니까? 제가 앞으로 행동을 어떻게 잘하면 이 고통이 나에게서 떠나겠습니까? 너무 사는 것이 힘듭니다’라고. 어느 정도로 힘드냐 하면 ‘죽이려면 아예 죽이시던지, 이건 죽은 것도 아니고 사는 것도 아니고 왜 이렇게 하십니까?’라고 하죠. 그래서 욥은 딜레마에 빠졌어요. 어떤 한계에 빠져버린 겁니다.
저는 이것을 가지고 ‘욥에게는 외부가 없다’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악마가 아담에게 찾아와서 취한 조치가 인간 외부를 없애버렸어요. 외부가 없는 스크린 그 자체가 이 세상이 되도록 악마는 그렇게 모든 것을 구조를 변경시켜놨습니다. 이 세상은 궁창이라는 것이 있는데 궁창 자체가 스크린이에요. 영화 스크린이고 하나의 장막의 막이에요. 그 막에 달과 별들과 해가 거기에 박혀 있어요.
그게 인간이 아는, 인간이 눈으로 보고 내린 모든 결론이 뭐냐 하면 우리는 이 세상과 더불어 함께 있다고 말을 좋게 하죠. 사실은 솔직하게 이야기하면 이 세상에 우리는 갇혀있고 이 자연 세계에 갇혀있다는 거고 저 자연 세계 밖에 대해서 우리는 아는 것이 전혀 없다는 것이 바로 악마가 인간에게 제시한 인간 지혜의 전부입니다. 그러니까 이 자연 세계에서 어떻게든 잘 먹고 잘살면 그만인 거죠.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니까요. 그 외에는 없어요. 그런데 욥은 눈에 보이는 세계 속에서 잘 먹고 잘살았습니다. 잘 먹고 잘살면서 이것은 하나님께서 내 믿음을, 내 의로움을 인정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주신 복이라고 이렇게 생각한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일하심을 어디서 규정했느냐 하면 이미 아담의 후손을 악마가 모든 주도권을 쥐고 있는 장막 스크린 안에 갇혀있으면서 그 안에서 욥과 모든 인간은 하나님을 그 범위 내에서 상상하고 창작해 낸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특별히 욥에게 메시아와 관련시켜 줬다고요. 욥은 이걸 나중에 알게 돼요. ‘야, 이거 내가 특혜받았구나’라고. 자연 세계 안에서 악마는 이렇게 보시면 됩니다. 악마는 하늘나라의 배신자. 조직의 배신자예요. 진리를 감춰 버렸어요. 생명 나무가 가둬져 있고 생명 나무가 따로 있다는 것을 왜 악마가 이야기하지 않느냐 하면 거기에 누가 가담되었느냐 하면 본인이 배신자로 가담되어 있기 때문에 그래요.
본인의 과오가 들통나기 때문에 절대로 그걸 인간에게 가르쳐 줄 리가 없죠. ‘그냥 살던 대로 살아. 세상 사는 거 뻔해. 다들 그렇게 살았어. 뭘 그렇게 유별나게 하느냐’라고 악마가 계속 인간들을 설득하고 죽을 때까지 설득해요. 이건 예수님에게도 마찬가지예요. 십자가 달릴 때까지 악마는 와서 예수님을 설득했어요. ‘그냥 한번 나댔다고 치자. 안 먹히잖아. 네 이론이 안 먹히고 지금 네 신세 좀 봐’라고 했고 옆에 있는 강도도 그렇게 말했어요.
이걸 저는 한마디로 이렇게 이야기하겠습니다. ‘거봐, 원래대로 돌아오잖아’ 교회 50~60년 다닌 사람들의 공통적인 고백이 그겁니다. 남에게 이야기하면 부끄럽고 벌써 목사, 장로까지 되었는데 남에게 이야기하기는 뭐하고 혼자서 생각하는 거예요. ‘나 원래대로 되돌아 왔어. 젊을 때 하나님께 봉사하면 하나님께 영광이고 자식은 잘되는 줄 알았지. 괜히 진지했잖아. 그때 괜히 진지했어. 마치 하나님 살아계신 줄 알고. 헌금하고 십일조 하면 복 받는 줄 알고 괜히 진지했어’라고 과거를 다시 한번, 지금 자기 입장에서 과거를 다시 점검하는 거예요.
그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과거의 이미지가 지금 지금의 내 욕망을 촉발시켜서 가능성이라는 순수한 미래, 순수한 내가 되고 싶은 겁니다. 나다운 나, 순수한 나, 가장 나의 본성과 같이 본성에 딱 맞춘 나, 그건 뭐냐 하면 개코고 하나님이고 일절 소용없고 나는 나 다운 거 그게 최고라는 겁니다. 지금 욥이, 곧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데, 하나님을 만나기 전에 27장을 다시 한번 보겠습니다.
욥기 27장 2~5절 “나의 의를 빼앗으신 하나님 나의 영혼을 괴롭게 하신 전능자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나의 생명이 아직 내 속에 완전히 있고 하나님의 기운이 오히려 내 코에 있느니라), 결코 내 입술이 불의를 말하지 아니하며 내 혀가 궤휼을 발하지 아니하리라, 나는 단정코 너희를 옳다 하지 아니하겠고 죽기 전에는 나의 순전함을 버리지 않을 것이라”
이게 하나님께서 악마를 욥에게 파견시킨 이유입니다. 나중에 하나님께서 오셔서 욥에게 이야기합니다. “네가 다 알아? 네가 알기는 알아? 하늘에 별 있는 거나 알지. 별을 누가 만들었어? 만들 때 있었어?”라는 식으로 따져나가시는 거예요. 이 ‘의’ 문제에 있어서 악마가 배신자였고 악마는 인간으로 하여금 네가 의롭다고 우리를 설득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하루도 쉬지 않고.
악마는 참 부지런하기도 해요. 항상 악마가 우리에게 하는 것은 뭐냐 하면 ‘너는 옳다. 너는 정당하다’ 입니다. 영화 삼백에서 아하수에로왕이 스파르타 사람들과 전쟁하면서 ‘나는 관대하다. 관대하다’라고 하다가 맞아 죽었죠. 나는 항상 어질고 양심적이고 그렇다고 내가 완전하다는 뜻은 아니고 나는 정당하다는 뜻이죠. 내가 할 수 있는 한 나는 곧고 바르게 살고자 하는 의지를 나는 포기한 적이 없습니다.
이게 욥이 하는 고백이고 그것을 그대로 닮은 우리의 고백이고 나중에 교회를 50~60년 다니고 죽기 전에 마지막 가기 전에 하는 고백이죠. “나는 최선을 다했습니다. I did my best. 내가 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나는 최선을 다하여 살았습니다”라고 이제 이 커튼이 젖히면 나의 인생은 끝이 난다는 식으로 흔하고 흔해 빠진 그 관계로 그쪽으로 전부 다 빠지고 마는 겁니다.
그런데 이게 욥 27장과 오늘 본문 28장에 보면 “하나님 저 알잖아요. 저도 하나님 알고 있어요. 그때 우정이 좋았잖아요”라고 할 때 욥을 신약으로 데려가게 되면 이런 판정이 대번에 나와요. 뭐냐 하면 인간이 말씀이 없어지게 되면 말씀과 멀어지는 현상이 뭐냐, 자기 쪽으로 자꾸 응축되고 자기 정당화를 기어이 사수하려는 티를 내게 되어있어요.
예를 들면 복음으로 목회하다가 목회가 잘 안 됐다. 그래서 ‘목사는 내가 할 일이 아니구나’라고 목사를 그만뒀다고 할 때 제가 보고 싶은 것은 그분들이 목회하고 그만두고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분들이 평소에 목회할 때부터 자기 정당성에 관심 있었는지 아니면 말씀에 관심 있었는지를 묻고 싶어요. 목사하고 목회하고 그건 아무 문제 아니에요. 꾸준하게 말씀에 관심이 있어 줘야 합니다.
말씀에 관심이 있어 줘야 하나님께서 욥에게 찾아오듯이 이 세상을 악마에게 넘겨준 이유가 드러나요. 내가 밥 먹고 사는 것도 죄가 되는 이유를 알고 밥을 먹든 말든 해야 할 것이 아닙니까. 덥다고 샤워하는 것도 죄예요. 악마에게 넘겨줄 때 악마는 네가 정당하고 네가 의롭다고 하는 거예요. 샤워하고 밥 먹고 살 때 자꾸 우리를 위로해줘요.
‘힘든데 밥 먹고 산다고 수고했다. 그 상태로 그냥 가는 거야. 최선을 다하는 거야. 인간이 할 수 있는 것까지는 해야지’라고 해서 그렇게 하게 되면 지금의 나의 정당성이 촉발돼서 과거도 재해석 돼요. ‘그때 참 열심히 살았다’라고 해석이 되고 미래는 뭐냐 하면 지금보다 더 순수한 나의 가능성을 내다보는 그런 재미로 내일을 기다리고 모레를 기다리면서 지금보다 더 나은 내가 되겠지.
그러니까 이 모든 이야기를 모아보면 말씀에 대한 내용,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내용이 아니고 메시아에 대한 내용이 아니고 전부 다 처음부터 끝까지 누구 이야기냐 하면 자기 이야기예요. 이건 자기변명입니다. 목사가 목회 안 돼서 다른 직업 구했다. 이게 뭐 나쁘냐? 주께서 목회 못 하게 하셔서 이렇게 하는데 내가 뭐 그렇게 잘못되었는가.
중요한 것은 처음 초신자들이 말씀이 너무 좋아서 말씀을 사모하는 그 사모가 목사라는 이유 때문에 장로라는 이유 때문에 교회 50년 다닌 집사라는 이유 때문에 그 기쁨을 다 상실해놓고 그걸 변명하고 있더란 말이죠. 자꾸 말씀이 떠올라야 하는데 말씀이 떠오르는 것이 아니고 ‘나는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고 있잖아. 더이상 뭐 어쩌라고’라는 이런 변명이 자꾸 나와요. 욥처럼.
정답은 없지요. 몸이 아파 사는 건 괴롭지요. 괴로우니까 ‘설마 죄지은 것은 아니겠지’라는 식으로 하나님 앞에 ‘이 정도 최선 같으면 하나님도 눈 감아 주겠지’라는 그런 것들을 자꾸 개발해서 머리에서 자꾸 끄집어내는 거예요. 아까 신약을 이야기했지만, 구약부터 이것이 작살납니다. 구약 창세기 15장에 보면 아브람이 밤중에 하나님을 만났을 때 창세기 15장 10절을 먼저 보면 “아브람이 그 모든 것을 취하여 그 중간을 쪼개고” 언약을 체결하는 장면입니다.
“그 쪼갠 것을 마주 대하여 놓고” 제물을 쪼개서 쪼개진 제물 사이를 빈 간격으로 딱 남겨놨어요. 아브람이 왜 그렇게 했는지 본인도 몰라요. 시킨 대로 동일한 제물을 둘로 쪼개서 서로 따로따로 놓지 말고 마주 보도록 놓으라고 하신 거예요. 그래서 아브람은 시킨 대로 했지요. 그다음 사태에 대해서 자기는 아는 것이 없어요. 그러고 난 뒤 17절에 보니까 “해가 져서 어두 때에 연기 나는 풀무가 보이며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더라”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갔어요. 하나님의 언약은 뭐냐 하면 불평불만하고 있는 우리 자신을 두 조각 내고 제물로 삼아서 그 가운데서 하나님 스스로가 이 땅에 이 세상을 방문하는 용도로 나는 너를 선택했다는 겁니다. 아브라함은 선택된 사람입니다. 선택이라는 이 사실은 선택되지 않은 사람과 하나님께서 인생을 달리 다루시겠다는 거예요. 그러면 선택되지 않은 인생은 뭐냐. 욥이 보여주죠.
자꾸 자기변명으로 일관하고 있습니다. ‘나는 의롭다. 나는 정당하다. 내가 불의하다고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 그리고 내가 고난받는 것은 내가 죄지어서가 아니라 뭔가 하나님의 뜻이 있겠지. 그 뜻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해명되고 설명되지는 않지만 어쨌든 그 뜻이 내 죄 때문에 발생 된 건 아니야’라는 식으로 계속해서 이야기합니다. 결론도 없고 해답도 없는데 인생은 괴롭지만 자기 정당한 것도 정답이기에 이것도 부정할 수 없고.
그러니까 욥의 이런 고통이 오늘날 모든 보편적인 사람들의 인생사는 고통입니다. 왜 사는지도 모르고 그냥 꾸역꾸역 먹기 싫은 음식을 강제로 입에 집어넣는 것처럼 세월이라 시간을 아침에 눈만 뜨면 시간을 또 자기 목구멍에 집어넣어야 해요. 또 살아야 하나. 또 하루 살아야 하지. 오늘도 그냥 사는데 사는 게 너무 힘드니까 뭐 재미있는 일은 없나. 여자 배구? 메달 하나 따려나? 남자 야구는 초장에 날아가고. 계속해서 뭐 또 재미있는 게임 없을까. 올림픽 때려치우고 프로야구나 계속하라는 식으로.
그저 재미있는 거. 너무 사는 게 힘드니까. 사는 게 원인도 모르고 이유도 모르고 해답도 없으니까. 사는 게 너덜너덜하니까 조금이라도 짜릿한 쾌감으로 채워보려는 거예요. 아브라함은 쫙 쪼개졌어요. 그 안을 누가 채우느냐 하면 주님의 자기 하신 일을 선택받았기 때문에 그 일을 꽉꽉 채우는 겁니다. 미국에 음식 체인점 중에 서브웨이(SUBWAY)가 있는데 거기서 기다란 샌드위치를 팔아요. 제가 미국 가서 또 먹어봤습니다. 참 색다른 맛이죠.
나중에 한국에 오니까 한국에도 체인점이 있어서 사 먹어 본 적이 있어요. 기다란 빵 두 조각 사이에 각양 채소와 여러 가지 다 집어넣었어요. 그런데 문제는 그걸 입에 쑤셔 넣는다는 거죠.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의 것을 나에게 채우라고 선택한 것이 아니고 나를 쪼개기 위해서 선택한 거예요. 나 자체를 쪼개는 거예요. 나 자체를 둘로 쪼개기 위해서 선택하신 겁니다.
뭐냐 하면 네 안에서 메시아를 끄집어내기 위해서 우리를 선택하신 겁니다. 아까 기도할 때 했잖아요. 그 나라 의를 보이라고. 내가 무엇을 어떻게 하면 삽니까. 내가 무엇을 먹고 입을지 제발 그런 것은 이방인에게 맡기고 지옥 갈 사람에게 맡기고 나에게는 주의 일을 하기 위해서 나를 선택했군요. 그리고 내가 나를 양생하고 생산할 것은 나의 의가 아니고 나는 불의하다는 그런거 말고 죄를 속죄 하는 데서 나오는 하나님의 의를 위한 죄인이 필요하신 거예요.
죄인이 필요하기 때문에 우리를 선택했고요. 죄인인데 죄인 맞는데 밥 먹는 것도 죄인이고 샤워하는 것도 죄인인데 그게 놀랍게도 의로 달라져서 그 의 때문에 영생의 나라, 악마가 가르쳐주지 않은, 악마가 철저하게 베일에 감추어둔 하나님만 사시는 그 나라의 의를 주님께서 이 땅에 미리 와서 우리에게 샌드위치처럼 안에 집어넣은 거예요.
하나님의 우정이라고 했는데 이 우정이라고 하는 것은요, 나중에 요한복음에 보면 예수님도 제자들에게 그런 이야기를 하셨어요. 요한복음 15장 14절에 보면 “너희가 나의 명한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여기만 보면 마치 막 먹어도 되는 관계처럼 느껴지죠. 그런데 그게 아닙니다. 진짜 친구는 친구를 위해서 자기 목숨을 버려야 한다고 하십니다.
“내가 내 목숨 바칠 테니까 이제 너희들은 너희를 위해 사는 거 없다. 나를 위해서 살아라” 이런 관계가 친구 관계예요. 그런데 욥은 그것도 모르고 ‘그때 너무 좋았잖아요. 행복하고 너무 풍성했어요. 너무 건강했어요. 하나님께서는 나의 의를 의대로 그대로 복을 주셨던 시절이 그리워요’라고 이러고 있단 말이죠. 그건 메시아가 아니죠. 내 착함으로 인하여 주께서 복을 줘버리면 그 안에 메시아적 기능이 다 없어져 버리는 겁니다.
그건 선악 체제예요. 그럼 선택한 사람은 뭐가 달라졌는가. 사람이 달라져야 하죠. 내가 착해서 복 받는 것이 아니라 나는 뭘 해도 복 받을 수 없는 자였어. 이렇게 자기 내부가 죄 덩어리가 가득 들어 있음을, 악마가 물론 그렇게 만들어서 이미 타고나서 어쩔 수 없지만, 그 어쩔 수 없음이 본래 내 모습인 것을 그대로 드러내는 겁니다.
따라서 진짜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에게 선택된 자는 원래대로 돌아왔다는 말은 원래 뭘 해도 지금까지 살아온 것도 주의 은혜다. 나는 살 가치도 없어. 이런 식으로 계속해서 나를 의 되게 하신 의가 나오는 그 말씀을 우리는 버릴 수가 없고 잊을 수가 없습니다. 50~60년 신앙생활 뭘 해도 마찬가지예요. 악마가 우리에게 준 것은 종교의 진정효과예요.
자기 자신의 가짜임을 자기의 변화가 없는 동일성을 계속 지속하도록 악마가 종교를 통해서 계속 격려하고 있습니다. 끝으로 이 말씀 드리겠습니다. 인간이 자기 변화 없이 중간에 단절함이 없이 동일성이 되면 이런 표현을 합니다. 가수들이 주로 많이 하는데. “오래 기다려준 만큼 좋은 노래로 보답할게요” 참 흔하게 들을 수 있는 말이죠. 오래 기다려준 만큼 좋은 노래로 보답할게요.
전에 당신이 알던 나와 좋은 노래 하는 나와 동일한 나입니다. 이것이 너무나 자연스럽고 인간세계에서는 “그게 뭐? 그게 뭐 문제인데? 우리도 다 그렇게 살잖아”라고 하는데 욥은 그리고 앞으로 우리 성도는 주님의 개입으로 말미암아 이 이야기가 바뀌어야 해요. 나는 전에 의인인척했지만 지금은 죄인입니다. 그 나라 의만, 주님의 의만 전달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한결같지 않기를 원합니다. 나 잘남이 유지되지 않기를 원합니다. 말씀의 능력이 임하셔서 내가 하는 모든 변명이 곧 마귀 이야기고 마귀의 사주를 받은 마귀의 발현인 것을 죄인 것을 마음껏 드러낼 수 있는 그런 자유가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