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가적 계시
2021년 9월 12일 본문 말씀: 욥기 30:16-23
(30:16) 이제는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녹으니 환난날이 나를 잡음이라
(30:17) 밤이 되면 내 뼈가 쑤시니 나의 몸에 아픔이 쉬지 아니하는구나
(30:18) 하나님의 큰 능력으로 하여 옷이 추하여져서 옷깃처럼 내몸에 붙었구나
(30:19) 하나님이 나를 진흙 가운데 던지셨고 나로 티끌과 재 같게 하셨구나
(30:20) 내가 주께 부르짖으오나 주께서 대답지 아니하시오며 내가 섰사오나 주께서 굽어보시기만 하시나이다
(30:21) 주께서 돌이켜 내게 잔혹히 하시고 완력으로 나를 핍박하시오며
(30:22) 나를 바람 위에 들어 얹어 불려가게 하시며 대풍 중에 소멸케 하시나이다
(30:23) 내가 아나이다 주께서 나를 죽게 하사 모든 생물을 위하여 정한 집으로 끌어 가시리이다
욥은 자신이 죽어가면서 그 과정과 심리적 변동에 자세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욥 자신과 대화를 끊었다고 말합니다. 대화를 끊은 이유는 욥의 현재 생각과 하나님 생각이 같지 않기 때문입니다. 욥은 홀로 답답해합니다. 욥의 잘못은, 하나님을 자신의 여분의 존재로 생각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즉 자기에게 있어 자신이 주인공이고 이 주인공되는 의로운 자신을 하나님께서 주위에서 잘 보호해주고 있다는 구조로 생각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나 신약에 들어서면 이런 구조가 아니라는 점이 밝혀집니다. 하나님께서 주인공이고 우리 성도가 주변인이 되는 겁니다. 보조자가 되는 겁니다.
내가 주인공이 아닌 이상, 우리 자신에게 일어난 일에 대해서 우리가 생각을 달리할 필요가 생긴 겁니다. 이렇게 되면 ‘죽음’이라는 것도 내가 염려하거나 걱정할 문제가 아닌 겁니다. ‘죽음 사건’이 ‘나의 사건’이 아닌 겁니다. 그러나 욥의 입장에서 본인 자체에서 죽음 현상이 벌어지니 결코 나의 사건이 아닐 수가 없는 노릇입니다.
욥은 ‘같은 공간에 중첩된 현실’이라는 신약의 상황을 상상도 못하고 있습니다. 욥은 자신에게 찾아든 죽음의 본질이 멀리 신약 성경에서 일어난 사건과 연류되어 있음을 감 잡을 수가 없는 노릇입니다. 그 이유는 바로 인간들의 계시관은 항상 과거에 주어진 것에 대해서 최선을 다하여 바르게 살면 된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항상 계속 계시를 추가적으로 덧붙여주십니다. 그 덧붙여준 추가적 계시로 인하여 선지자들은 그 시대의 사람들로부터 비난과 모욕과 서러움을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역대상 16:22에 보면, “나의 기름 부은 자에게 손을 대지 말며 나의 선지자를 해하지 말라 하셨도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만큼 각 시대만큼은 선지자와 기름부은 자들이 외침의 내용이 낯설은 내용이다는 말입니다. 계시가 생소한 내용이 되는 이유는, 과거만 생각하고 사는 인간들에게 하나님께서 포착되지 않기 위함입니다. 만약에 하나님에게 포착이 되어버리면 여기에서 ‘상처’가 발생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사랑을 원합니다. 과거에 준해서 사는 사람들은 타인에 의해서 자신을 건전하게 유지하려고 합니다. 즉 자기가 자기를 지켜나가는 방식을 인간들은 결코 포기할 수가 없는 겁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상처를 원하지 않습니다. 이는 여전히 내가 나에게 ‘주인공’이라는 의식을 버리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선지자나 기름부은 받은 자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흔들기를 하십니다. 즉 자아에 대해서 둘로 갈라져버리십니다. 이극성이 생깁니다. 극이 두 개가 되어버립니다. 즉 내가 아는 나와 내가 모르는 ‘나’가 새롭게 생겨버린 겁니다. 내가 나에게 낯설어 버린 존재가 된 겁니다. 즉 내가 되고 싶은 나가 아닌 나가 나에게서 튀어나온 겁니다.
사람들은 과거로부터 유지되어 온 나를 지켜서 그 나를 참된 나로 간주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그런 나에게 위기가 찾아와서 뭉개져 버립니다. 사람들의 모든 몸짓과 행위는 나를 지키려고 하는 겁니다. 옷이라는 점은 그동안 자신이 평생 지켜왔던 그 결과로서 벌거벗은 자아를 대체해서 드러냅니다.
그런데 욥은 오늘 본문에 그 옷이 낡아졌다는 겁니다. 이 옷의 낡음은 곧 그 옷과 밀착되어 있는 몸의 낡음을 나타냅니다. 즉 욥은 그동안 자신의 잘남을 지켜온 모든 것들이 낡아지는 것을 지켜보고 있는 중입니다. 여기서 그 어떤 해답이나 해결책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욥은 답답해합니다.
여기에 주님의 찾아오심은 욥이 감히 상상도 못한 흔들기를 제공하십니다. 예를 들면, 피아노곡을 어린애가 치게 되면, 그 아이는 악보에 적힌 음표를 그대로 옮겨치면 그것이 잘 쳤다고 여깁니다. 그런데 피아노 연주자가 그 어린아이에게 다음과 같이 조언해줍니다. “너의 음을 네가 듣고 쳐라”
이 말은 타인들이 자신에게 무어라고 좋게 보느냐에 관심을 끊고, 그 곡을 자신의 음악으로 바꾸어야 된다는 조언입니다. 즉 한 음 한 음 칠 때마다 그 음과 화음을 네가 새롭게 창작한다는 뜻으로 연주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피아노 건반 위에서 자신의 새로운 음악이 춤을 추는 바가 됩니다.
이러한 전문가의 조언처럼 우리네 인생에 대해서 우리 인간은 애초부터 자신의 것이고 자신을 위한 인생이라고 생각합니다. 즉 “내 잘 되면 그만이다”는 식으로 인생을 사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자연스럽게 우리네 인생은 내가 주인공이 되고 나의 것이 되는 겁니다. 여기에 주님의 흔들기가 투입됩니다.
이 흔들기는 이극성(두 개의 극성)을 발생시키므로서 이극성이 될 수 없는 단극성(갈라지지 않는 영원한 속성)이 따로 있음을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그 단극성은 히브리서 7:24-25에 나와 있습니다. “예수는 영원히 계시므로 그 제사장 직분도 갈리지 아니하느니라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 계셔서 그들을 위하여 간구하심이라”
이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서 상처를 남겼습니다. 그 상처부터 나오는 새로움은 우리 인간이 예상이나 예측도 못한 내용입니다. 이처럼 상처로부터 나오는 음성이 새로운 단극성으로 우리 인간을 이끕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는 ‘주님의 여분의 것’이 됩니다. 즉 주님이 ‘우리의 여분의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단극성에서 나온 내용은 무엇입니까? 그것이 바로 로마서 8:30에 나옵니다.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즉 주님의 기도, 혹은 성령님의 기도는 우리 성도로 하여금 오로지 하나님께서 다 완성시킨 그 일을 확인케 할 뿐입니다.
우리 성도는 세상에 살면서 과거에 자신이 잘나가던 그때 자아성을 쉽게 포기하거나 잊을 수는 없습니다. 즉 자기 자신을 잘난 존재이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주님의 일관성 있는 기도는 우리 성도로 하여금 오로지 예수님께서 확정지은 그 코스에만 속해져 있음을 보고 감사하게 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둘로 나뉘어졌다가 항상 하나뿐인 주님의 다 이루심을 바라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100강-욥기 30장 16~23절(추가적 계시)210912 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욥기 30장 16~23절입니다. 구약성경 787페이지입니다.
“이제는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녹으니 환난 날이 나를 잡음이라, 밤이 되면 내 뼈가 쑤시니 나의 몸에 아픔이 쉬지 아니하는구나, 하나님의 큰 능력으로 하여 옷이 추하여져서 옷깃처럼 내 몸에 붙었구나, 하나님이 나를 진흙 가운데 던지셨고 나로 티끌과 재 같게 하셨구나, 내가 주께 부르짖으오나 주께서 대답지 아니하시오며 내가 섰사오나 주께서 굽어보시기만 하시나이다, 주께서 돌이켜 내게 잔혹히 하시고 완력으로 나를 핍박하시오며, 나를 바람 위에 들어 얹어 불려가게 하시며 대풍 중에 소멸케 하시나이다, 내가 아나이다 주께서 나를 죽게하사 모든 생물을 위하여 정한 집으로 끌어가시리이다”
욥이 바로 특별한 점이 이런 점에서 나타나는데 어떤 점이 특별하냐 하면 자기가 하나님께서 자기를 죽이는 과정을 일기장처럼 순간순간의 자기감정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하나님께서 성경에 기록하게 하셨다는 겁니다. 이 말은 뭐냐 하면 인생이라는 것은 자기가 좋은 기억만 남아서 남에게 전하는 것이 인생 스토리가 아니라 하나님이 특별히 나에게 관여했던 그 순간에 인간 핵심과 본질이 다 담겨있다는 사실을 욥을 통해서 우리에게 나타내 보여주고 있습니다.
인간은 왜 행복해야 하는 가가 아니라 인간은 왜 죽느냐, 왜 하나님은 우리를 이렇게 죽게 하시느냐, 하나님은 인간을 어디에 몰아넣느냐를 욥을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특히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죽이시면서도 그 죽이시는 이유를 언급해 주지 않으십니다. 20절에 보면 “내가 주께 부르짖으오나 주께서 대답지 아니하시오며 내가 섰사오나 주께서 굽어보시기만 하시나이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뭔가 공통점이 있으면 통하는데 하나님께서 욥에게 고통을 주시고 죽음으로 몰아넣으실 때 하나님께서 아무 말씀을 안 한다는 것은 지금 욥이 내뱉고 있는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뜻과 합치되지 않는다는 그 사실을 지금 욥을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는 겁니다. 그러니까 인간들은 살아가면서 죽을 때까지 일방적으로 자기 뜻, 자기 생각, 자기 의미만 계속해서 하나님을 향해 일방적으로 방출했던 겁니다.
그게 바로 오늘 본문을 통해서 보면 다 헛것이 된다는 거죠. 헛것이 될 때 여기 16절에서 17절, 18절에 보면 옷이 되는데 “하나님의 큰 능력으로 하여 옷이 추하여져서 옷깃처럼 내 몸에 붙었구나” 욥은 자기 옷을 뭐로 생각하느냐 하면 일평생 나의 나 됨을 밖으로 표현해 준 것이 바로 옷인데 옷이 하나님이 나를 저주하는 능력에 밀려서 내 몸과 떨어졌던 옷이 이제는 내 몸과 하나가 되게 밀착한 거예요.
밀착하면서 옷부터 썪어들어간다는 말은 그다음 차례는 뭐냐 하면 옷과 붙어있던 내 신체가 썪어들어간다는 겁니다. 욥은 사정없이 이런 과정을 낱낱이 느껴지는 대로 다 표현하고 있어요. 그게 사실은 하나님이 원했던 바고요. 인간은 왜 멸망 받을 수밖에 없는가를 과정 하나하나를 쭉 이야기하는 겁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할 중요한 사실은 욥이 죽음과 가까이하면서 자기가 멀쩡하게 살아있을 때, 아프지 않을 때 느꼈던 그 하나님과 전혀 다른 하나님으로 여기서 전개된다는 겁니다.
이극성(dipolarity)이라는 것이 있는데 극이 두 개로 나뉘는 거예요. 인간이 아무 일 없으면 모든 것이 단조롭고 평온하게 되면 항상 단극성(monopolarity), 항상 자기만 챙기면 됩니다. 뭐 아프카니스탄이 뭘 하든, 미국이 뭘 하든, 북한이 뭘 하든, 선거에 누가 되든 상관없이 자기 몸만 챙기면 이것은 자기에게는 아주 정상적인 삶이라고 그렇게 간주할 수 있습니다.
이게 자기에게는 단극성이라서 움직임이 없지요. 어떤 움직임이든지 자기를 위한 움직임이기 때문에 단일적인 움직임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 진짜 살아계신 하나님이 개입했다면 이 단일성, 단극성이 깨어지게 하는 움직임을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거예요. ‘하나님, 왜 이러십니까?’라고 하기 이전에 자기가 자기에게 너무나 실망스럽지요. ‘내가 왜 이래. 멀쩡한 내 몸이 왜 이래. 어~~~~~’라는 거 있잖아요. ‘어, 어, 어’
오늘 설교를 하면서 결론 부분의 도출이 너무 난해하기 때문에 미리 결론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욥이 무엇을 모르느냐 하면 욥은 자기 단일성이 있고, 자기가 있고, 그다음에 하나님이 기뻐하는 관계로써 섬기면 되지 않느냐고 하는 거예요. 자기의 여분의 요소로써 하나님을 생각한 겁니다. 그런데 신약성경에 오게 되면 인간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해서 나를 위해서 하나님의 여분의 준비된 것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여분의 것으로써 죄인을 거기에다 끌어당겼다는 사실이에요.
네가 아는 하나님은 단극성 하나님이지만 진짜 하나님은 하나님 내부가 갈라진, 이극성(dipolarity)로 갈라진 하나님이라는 거죠. 세상에서는 내가 멀쩡하고 내가 바르게 살면 하나님도 그것을 인정해 줄줄 알았어요. 남들은 하나님을 위해 살지 않는데 자기는 하나님을 위해 사니까 얼마나 생각만 해도 자기가 멀쩡합니까. ‘이렇게 착한 사람 있으면 나와보라고 해’라고 자랑하고 싶어요.
욥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나를 변호해주시는 분이다. 하나님은 나를 위로해주시는 분이다. 항상 하나님을 뭐로 보냐 하면 내가 여기 있고 그 여분의 것으로 하나님을 보호자로 이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런 인간과 하나님이 대화할 때 하나님께서 입을 다물었습니다. “나는 너와 이야기 안 한다. 나는 너와 이야기할 거 없다” 그럼 뭐가 잘못되었습니까 물으면 “말 안 해줘” 나중에 끝에 보면 찾아오시죠.
주인공이 바뀌어야 한다는 겁니다. 주인공이. 주님이 주인공이고 나는 부수적인 거예요. 부수적이라도 아예 하나님께서 둘로 갈라지셨거든요. 하나님이 아버지와 아들로 둘로 갈라져서 아들 되시는 분은 아무것도 모르는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신 거예요. 그렇다면 그다음부터는 나의 이야기는 날아가 버리고 누구 이야기냐 하면 예수님 이야기만 성경에 적혀 있고 그 예수님 이야기를 일찌감치 욥을 통해서 선지자를 통해서 우리에게 미리 보여준 겁니다.
역대상 16장 22절에 보면 말씀이 나오는데 제가 이 말씀을 어느 교회에서 본 적이 있어요. 큰 기둥 두 개가 솔로몬 성전처럼 세워있고 그 기둥에 이 글씨를 크게 써놓은 것을 보고 ‘아 말씀은 정말 살아있구나’를 느낀 적이 있습니다. 지금 약간 비비 꼬는 느낌 오시죠. 말씀 보면 “이르시기를 나의 기름부은 자를 만지지 말며 나의 선지자를 상하지 말라 하셨도다”
그 기둥에 이걸 써놓은 취지가 뭘까요? 천당 가려면 알아서 기라는 이야기처럼 해석이 됩니다. 천당 가려면 알아서 기어. 기름부은 자, 선지자 자체는 그 시대에 대우받으려고 오신 분들이 아니에요. 오히려 그 시대상 때문에 상처를 받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투입 시킨 사람이 그 시대에 선지자이고 기름부은 자입니다.
역대상 16장 22절에 말씀은 계속해서 사람들은 ‘아, 어떤 선지자가 그런 모양이다. 아니야 그 뒤에는 선지자가 이런 모양이다’라고 이렇게 오해와 오해를 자꾸 유발시키면서 어디 끝까지 계속 가느냐 하면 예수님 십자가까지 가서 아무도 선지자와 기름부은 자를 제대로 알아보지 못했다는 결론이 도출되어야 해요. 아무도 없어요.
구약성경의 특징을 말하자면 계속 계시가 추가된다는 거예요. 추가되고 선지자와 기름부은 자는 왜 그렇게 서러움을 받고 밉상을 받는가. 그것은 같은 공간에 다른 현실을 구성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걸 십자가로 비유하면 이렇습니다. 사랑보다 깊은 상처. 사랑인 줄 알고 덥석 물었더니만 그 안에 상처가 있었던 거예요.
상처가 없이 겉면으로써는 내가 원하는 사랑은 ‘하나님, 은혜 주시고, 나를 지켜주시고, 보호해 주시고, 나를 안 다치게 해주시 뭔가 내가 원하는’ 이런 식으로 내가 주인공이 되어서 하나님은 변죽이고 하나님은 나의 여분의 것으로 나를 지켜준다고 생각해서 덥석 물었는데 욥도 그렇게 생각했는데 그 안에 욥이 난데없는 상처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주인공이 바뀐다는 것은 아프카니스탄 사태를 통해서 잘 알 수 있는데요. 이슬람 율법에 보게 되면 여자들은 눈만 빼놓고 전신을 가리라는 법이 있어요. 머리에만 쓰는 것을 히잡이라고 하고 눈 빼고 다 덮어버리는 것을 부르카라고 하는데 그 제도를 텔레반이 시행할 때 제가 가슴 아픈 것은 왜 그런 짓을 하느냐 하면 여성에 의해서 남성이 유혹받게 되면 남성들이 자기 천당 가는데 지장이 되어서 그렇다는 거예요.
제가 이슬람을 공부하면서 그걸 봤거든요. ‘남성을 유혹하지 않도록 전신을 다 가려라’라고 나오는데 저는 생각을 좀 바꿔봤어요. 남자가 부르카 쓰면 어떠냐. 여자가 벗고 다니든 어쩌든 ‘안 볼란다’라고 하면서 자기들이 다 가리고 눈도 가리고 그러면 안 됩니까? 신장개업할 때 춤추는 풍선 띄우고 나래이터 모델들이 있지요. 그 모델들이 실제로 그런 멘트를 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들리는 소리에 의하면 “제 다리만 보지 마시고요~~~”라고 다리를 내놓고 그러고 있단 말이죠. “다리만 보지 마시고 신장개업하는데 물건 하나씩 사주세요”라고 하는 거예요.
남자들이 얼마나 자신감이 없어요, 그래. 자기들은 편하려고 하고 남은 힘들게 하고. 그게 바로 타인에게 상처를 주는 겁니다. 이 세상에 주님의 뜻은 이거예요. 상처 없는 구원은 없다. 상처 없는 구원은 없다. “내 창 자국과 못 자국을 봐라” 이 상처가, 하나님 몸에 상처가 난다는 것이 이게 무슨 뜻일까요. 전부 다 거짓되었다는 겁니다. 인간 자체가 근원적으로 이건 하나님이 창조할 때 원한 그 인간이 아니라는 거예요.
어떤 사람은 말씀대로 순수하고 순진하게 말씀을 지키면 되지 않느냐고 하는데 주님에게는 그것도 교만이에요. 왜냐 하면 추가적인 계시가 남아있는데 기존에 있던 문제 가지고 그것을 자기에게 다 적용시켰다고 그걸로 구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계속 추가적인 계시가 있다는 거예요. 이스라엘 역사가 그것 때문에 망한 겁니다.
인간은 자기 자신을 더 남보다 낫게 하기 위해서, 자기 존재를 지키기 위해서, 아까 텔레반 남자들처럼 결국 자기 하나 지키기 위해서 타인을 짓밟을 수밖에 없는 범죄자입니다. 인간은 이 땅에 태어나서 존재하는 그 자체가 죄입니다. 사는 거 자체가 남에게 피해를 줍니다. 그래서 강남강의에서 사는 게 화근이라고 했지요. 어떤 사람은 그 이야기 듣고 자기 이름을 화근으로 바꾸겠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는데.
아침에도 선악 체제 이야기했지만, 선악 체제가 얼마나 나쁜지 이런 생각을 하는 거예요. ‘하나님, 제가 나쁜 짓 하면 제가 알아서 저를 칠 테니까요, 알아서 저를 징벌하고 때리고 할 테니까 그런 마음가짐만큼은 좀 알아주시면 안 되겠습니까’라는 이게 교만이에요. 자기가 자기를 패고 책벌하겠다는 거예요. 그 모습을 주님 앞에 고상하게 보여주시면 주님께서 얼마나 기뻐하시겠나, 이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여전히 자기가 주인공이고 여분의 것이 하나님이에요. 이게 안 바뀌고 있는 겁니다. 리스트가 작곡한 ‘라캄펠라’라는 유명한 곡이 있어요. 그 곡을 어떤 러시아 유명한 피아니스트가 우리나라 9살짜리 피아노 영재에게 레슨 해주는데 그 방법이 저에게 굉장히 좋게 들렸습니다. 그 아이가 9살인데 그 어려운 곡을 음 하나 안 틀리고 쫙 쳤어요. ‘라캄펠라’가 한양음대 입시 곡 수준이거든요.
다 듣고 나서 “Bravo, Genius(천재), Amazing(놀라워)”라고 칭찬 실컷 해줘요. 정말 음 하나 안 틀렸어요. 그것도 독학으로 유튜브 보면서 그 어려운 곡을 그대로 쳤어요. 그런데 그 피아니스트 하는 말이 “너는 그 음을 네가 만들 줄 모른다”라고 했어요. 악보 보면서 쳤는데 그게 문제라는 겁니다. 네가 말씀대로 사는데 그게 문제라는 거예요, 하나님 지시대로 사는데 그게 문제라는 겁니다.
왜 너는 그걸 춤추듯이 거기서 새로움을 만들지 않느냐. 너는 왜 너의 음악을 들으면서 그 곡을 치지 않느냐고 하는 거예요. 왜 너의 음악이 되지를 못하느냐. 9살 아이에게 너무 심하죠. 요새 9살 아이들이 얼마나 머리가 좋은지. 자기의 음 하나하나를 들으면서 치라는 거죠. 남들이 내 음악을 어떻게 들어주느냐를 생각하지 말고 내가 나의 음을 한번 들으면서 치면서 즉석 해서 나의 기뻐하는 음을 춤추듯이 만들어봐라.
그래서 무용수는 춤을 추는 것이 아니고 춤추는 것 자체가 그 사람의 춤이 되는 거예요. 지금 욥이 모르는 것은 욥에게 고난이 온 것이 자기 잘못 때문이 아니고 자기가 죄를 지었기 때문이 아니에요. 자기 안에 장차 오실 메시아, 예수님께서 춤을 추고 있는 거예요. 춤을 추는데 그 춤의 내용이 뭐냐. 사랑보다 깊은 상처. 오늘 박정현이 한번 불러내야 할 것 같은데.
사랑의 노래만 듣지 말고 상처가 너를 호출하고 있는 그 상처의 노래를 들을 줄 알아야 해요. 상처의 노래를. ‘왜 저에게 이런 시련을 주십니까’라고 하지 말고 그 시련 자체가 주님의 시련에 동참하라고 주는 시련이라면 너는 너무 땡큐고 정말 감사해야 한다는 겁니다. 아침에도 그런 이야기 했습니다만 여러분이 성도라면 성도에게 늘 생각해야 하는 것은 주님의 위치가 어디있는지입니다. 나의 위치가 어디인지를 생각하지 말고 주님의 위치가 어디있는가.
주님의 위치는 항상 내가 위치하는 위치를 빼앗아 버립니다. 이렇게 말로 하면 어려우니까 실제로 성경을 찾아보겠습니다. 히브리서 7장 24~25에 보면 여기에 갈리지 않는다는 그런 구절이 나옵니다. “예수는 영원히 계시므로 그 제사 직분도 갈리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 하심이니라”
지금 욥은 자기를 위해서 자기가 기도하고 있잖아요. 이게 갈린 거예요. 욥만 기도합니까. 구약 역사에 보면 제사장들이 얼마나 기도했습니까. 그러나 제사장 기도가 전부 거부되는 이유가 뭐냐 하면 그 제사장의 모든 기도는 자기를 주인공 위치에 두고 기도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형식으로는 하나님 이름으로 기도한다고 하고는 실제로는 전부다 누구 좋으려고 누구 이름으로 하느냐 하면 나 좋으라고 내 이름으로 기도하는 거예요.
내가 주인공으로 기도하는 거예요. 내가 주인공으로 기도하면 안 되고 주님의 이름으로 주님이 주인공이 되어서 주님의 이름으로 아버지께 기도하는 그 기도를 해야 된다는 말이죠. 그러면 무슨 수로 그 기도를 합니까? 기도 시작하면 전부다 내 이름으로 하는데요. 이 앞에 서서 하잖아요. 오늘 마스크 했어요? 그거 궁금해서. 자기 기도를 한단 말이죠.
그 기도를 어떻게 해야 하느냐 하면 기도하는 가운데서 완료, 그러니까 이극성이 아니고 그냥 종결성으로 혜택을 받는 거예요. 이런 기도하게 된 것도 결국 주님의 기도에 결과물로 제가 이 기도를 받는다고 이렇게 기도하면 된단 말이죠. 그렇다고 그대로 베끼지 마시고요. “뻬끼지 마시고요~~” 나의 나 된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게 굉장히 간단한 문제거든요.
문제는 우리가 이것을 안다는 겁니다. 이걸 알기 때문에 이걸 아는 범위에서 스톱이 되니까 주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답답해서 기도하게 해놓고 기도하는 가운데 그걸 바꿔버려요. 네 기도 응답을 바라는 그 자체가 주님의 기도로부터 이게 거부당한 사실을 보여주는 겁니다. 성경 한 구절 더 찾고 마치겠습니다. 8장 27절부터 성령이 기도하는데 성령께서 왜 기도를 하느냐 하면 그 이유는 일단 우리 기도를 안 받는다는 데서 명백하게 성령께서 기도하셔요.
문제가 굉장히 간단한 거예요. 이게 복잡한 문제가 아니에요. 어떤 사람은 ‘그럼 기도 안 하면 되겠네’라고 하지만 주인공이 내가 아니고 주님이기 때문에 답답하면 기도하도록 주님께서 사태를 일으켜버린다니까요. 입술을 깨물고 ‘내가 기도할 줄 아느냐. 절대 기도 안해. 죽어도 기도 안 해’라는 이게 기도예요. 답답한데 기도 안 할 수 있습니까.
주께서 이렇게 움직이게 해요. 욥을 움직이 듯이 원망 불평을 하게 해요. 그러면서 우리가 기도하도록 하면서 기도하는 우리에게 입 다물래. 방금 기도 시켜놓고. 입 다물게 하고 성령께서 친히 기도하는데 그 기도 내용이 뭐냐 하면 로마서 8장 30절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라는 일은 이미 확정되었다는 그 확정 안에서 지금 확정된 것을 주인공으로 드러내기 위해서 부수적으로 너를 이 땅에 흙으로 태어나게 해서 지금 활용중이라는 말입니다.
이미 확정된 거. 악마가 자꾸 추가적인 내용을 언급하는데 추가적인 내용은 없어요.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라는 이 스케줄은 이미 끝났어요. 현대자동차보면 공장에 생산라인이 있잖아요. 이 생산라인은 끝났어요. 그 라인 따라가면 제품 하나 나오는 겁니다.
그런데 그 라인이 누구 라인이냐 하면 예수님께서 기도로 다 퍼붓고 완성한 라인이란 말이죠. 이게 성령의 기도예요. 성령의 기도는 뭐냐 하면 우리가 세상에 정신없는 중에 성령께서 마치 어떤 건장한 분이라면 우리가 정신없이 비틀거리고 있는데 “마약하지마. 세상 마약하지마. 정신차려. (뺨을 막 때리면서) 정신 바짝 차려. (얼음물 막 퍼부으면서)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알아 들었어?”라고 하시면 “옛썰!” “똑바로해. 차렷, 열중쉬엇, 차렷,...이미 영광스럽게 했느니라” “옛!”
이래놓고 또 성령께서 잠시 놔버리면 헤벌레하면서 세상적인 거 찾고 있어요. ‘교회 폐쇄되는 거 아닌가’ 벌벌하고 ‘여기까지가 끝인가보오’하면서 찔찔 울고. 정신 좀 차리란 말이죠. 정신. 이미 주인공이 네가 주인공이 아니고, 사적 구원이 주인공이 아니에요. 그런 사적 구원은 없어요.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구원받은 건데 그 구원을 받을 때 지금도 주님의 기도가 우리에게 퍼부어지는 거예요. 매일 같이. 우리는 감각이 없어요.
감각이 없으니 주께서 사태를 일으켜서 당황스러운 일, ‘우짜노, 우짜노’라고 걱정 근심 할 일, 이래 저래 안 되면 ‘주여~!’라고 새벽제단 하며 부르짖고 하죠. 그러면 주님께서 “무슨 일 있나?”라고 물으시면 “제가 일이 많아요. 욥 보세요. 죽어가고 있어요”라고 하면 주님은 “죽어라”라고 하시죠. 역대상 29장 15절에 보면 다윗이 이런 이야기합니다. “주 앞에서는 우리가 우리 열조와 다름이 없이 나그네와 우거한 자라 세상에 있는 날이 그림자 같아서 머무름이 없나이다”
계속 컨베이어 시스템에 우리는 하루하루 매일 실려가고 있습니다. 그 영광의 나라까지 확정된 그 영광의 나라에 확정하셨다는 점을 계속 확인해 가면서, 머무름이 없이 주님께 감사하면서, 계속 주께 기도의 응답을 받으면서, 혜택을 입으면서, 고마운 것 외에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에 기적을 원하고 부귀영화를 원하지만, 막상 성경을 펼치면 바로 내가 주인공이었습니다. 이 고질병, 무좀균보다 더 지독한 이 고질병. 주께서 파내려가서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상처를 주시옵소서. 상처가운데서 주님 상처의 혜택이 얼마나 놀라운지를 깨닫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