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오후설교

이방인의 지혜

아빠와 함께 2021. 7. 19. 06:36

이방인의 지혜 

2021년 7월 18일            본문 말씀: 28:1-11

(28:1) 은은 나는 광이 있고 연단하는 금은 나는 곳이 있으며

(28:2) 철은 흙에서 취하고 동은 돌에서 녹여 얻느니라

(28:3) 사람이 흑암을 파하고 끝까지 궁구하여 음예와 유암 중의 광석을 구하되

(28:4) 사람 사는 곳에서 멀리 떠나 구멍을 깊이 뚫고 발이 땅에 닿지 않게 달려 내리니 멀리 사람과 격절되고 흔들흔들 하느니라

(28:5) 지면은 식물을 내나 지하는 불로 뒤집는 것 같고

(28:6) 그 돌 가운데에는 남보석이 있고 사금도 있으며

(28:7) 그 길은 솔개도 알지 못하고 매의 눈도 보지 못하며

(28:8) 위엄스러운 짐승도 밟지 못하였고 사나운 사자도 그리로 지나가지 못하였느니라

(28:9) 사람이 굳은 바위에 손을 대고 산을 뿌리까지 무너뜨리며

(28:10) 돌 가운데로 도랑을 파서 각종 보물을 눈으로 발견하고

(28:11) 시냇물을 막아 스미지 않게 하고 감취었던 것을 밝은 데로 내느니라

욥은 자신을 선구자로 봅니다. 기존 자기가 기거한 세계에서 도저히 찾아낼 수 없었던 지혜를 찾으러 나선 선구자말입니다. 여기에 당연히 고통이 따릅니다. 오해와 모멸을 감수해야 합니다. 이것 외에는 달리 자기가 처한 입장을 합리적으로 설명할 길이 없다고 여깁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그 어떤 경우가 잘못이 없다고 단정해 볼 때, 욥에게 예상 못한 사명을 주었다고 자부합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숨겨놓으신 ‘지헤 찾기’입니다. 이 지혜 찾는 방식으로 사람들이 편하고 안일하게 여기는 방식은 안 통한다고 보았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욥 자신이 당한 고통이 흔하게 일어나는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기존의 그 어떤 논리로도 설명 불가능한 고통과 고난을 욥이 지금 당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런 고통과 고난은 ‘새로운 지혜 얻기’를 위한 필요하고 균형잡힌 대가지불이라고 욥은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 어떤 난관이 있더라도 ‘보물찾기’의 일념으로 자신의 안일함을 여지없이 포기하겠다고 결심합니다. 이런 자신의 마음을 적절하게 설명할 수 있는 것이 광부가 지하 갱도를 따라 내려가면서 값나간 광물질을 발견하는 것과 같다는 겁니다.

소위 모든 것을 위에서 내려다보니에 다 안다고 자부할 수 있는 매와 솔개의 안목으로도 욥 자신이 나아가는 곳까지는 도달될 수 없다고 합니다. 선각자, 혹은 선구자, 혹은 지혜 모험가라는 자세를 욥은 견지하면서 깜깜한 곳에 용감하게 감히 나서겠다고 다짐을 합니다. 보물이 있다는 저 지하에는 얼마 내려가지 않아서 불이 들끓고 있다는 겁니다.

그만큼 위험하지만 자신을 얻고자 하는 지혜는 그 정도의 위험도 감수할 정도로 가치있는 지혜라는 겁니다. 그런데 극한의 수고와 노력을 쏟아붓고도 욥은 다음과 같이 탄식합니다. “ 그러나 지혜는 어디서 얻으며 명철의 곳은 어디인고 그 값을 사람이 알지 못하나니 사람 사는 땅에서 찾을 수 없구나”(욥 28:12-13)

즉 있기만 하면 기어이 찾아낼 수는 없겠지만 진정 그 궁극적 지혜가 없다면 이 찾는 작업도 무의미해지는 것을 욥은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시도조차 안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시도조차 안 하게 되면, 난데없이 욥에게 덮친 이 고난을 해명할 길이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욥에게 온 고난은 욥에게 주님께서 숨겨놓으신 지식을 특별히 제공하기 위해 찾아드신 결과다”가 되어야 욥과 사람들은 만족할 것입니다. 고난의 보람까지 욥에게는 꽉 막힌 듯 보입니다. 신약에 와서 등장한 성도들 안목으로 볼 때에, 욥은 ‘이방인’입니다. 즉 하나님의 직접적인 계시를 받지 못하여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자의 한계를 보여주는 바가 됩니다.

마태복음 6:31-32에 보면, 여기에 ‘이방인’이 나옵니다. 즉 이방인들의 지혜나 지식에 관심은 무슨 의도 때문일까요?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즉 이방인들의 지식이나 지혜를 얻는데 어떤 방향성을 보이는데 그 방향성은 이 땅에서 생존하고 번영하기 위해서입니다. 여기서 ‘하나님과 함께’라는 의식은 없습니다. 단지 하나님께서 인간 생존을 위해서 숨겨놓은 지혜를 인간들은 필사의 노력으로 그것을 찾아내어서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하는 행위다고 여깁니다.

오늘날에 와서 모든 지혜와 지식은 자본시장에서 상품화되어 있습니다. 돈 가진 자를 만족시키는 지혜와 지식을 물고 와야지만 돈을 지불받습니다. 연구자나 과학자나 기술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을 향하여 돈이 투자되기를 희망하면서 연구에 매진합니다. 이것은 자본가의 눈치를 보는 행위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이방인이 아닌, 하나님과 동행을 하게 되는 이스라엘에게서는 세상 지혜는 무슨 의도로 얻어집니까? 그 당시 세상에서 가장 지혜로운 인물이라고 소문이 크게 난 자가 있습니다. 그 자가 바로 솔로몬왕입니다. 솔로몬 왕은 제한적으로 써먹는 그런 지혜에만 매달리지 않습니다.

지혜 중의 지혜로서 모든 지혜를 한꺼번에 알 수 있는 최종 지혜를 얻고자 했습니다. 신약에서는 이미 그런 지혜가 나타났고 그것을 아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영을 받는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 1:17-19) 솔로몬이 내놓은 최종 지혜는 전도서 1:2에 나옵니다.

“전도자가 가로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그냥 솔로몬이 명상 가운데 얻은 것이 아닙니다. 솔로몬은 평생 최종 지혜를 찾아 부지런히 연구에 몰입했습니다. “나 전도자는 예루살렘에서 이스라엘 왕이 되어 마음을 다하며 지혜를 써서 하늘 아래서 행하는 모든 일을 궁구하며 살핀즉 이는 괴로운 것이니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주사 수고하게 하신 것이라”(전1: 12-13)

이 최종 결론에 준해서 보면, 인생 자체가 바람이며, 헛된 것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이 사실을 모르고, 헛되지 않을 것이라고 여기면서 부지런히 잡아 자기를 위한 지혜로 활용하고자 합니다. 하지만 이로 인하여 인생이 더욱 피곤하고 그 피곤도가 이루 말할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신약에 나와 있는대로 하늘로부터 성령을 받게 되면, 과연 우리 인간 생존에 필요한 돈이 생길까요? 신약에 와서 하늘로부터 주신 복음적 내용은 최종적인 것으로 우리 인간이 죄인임을 밝힙니다. 따라서 성도는 이 세상에서 자신의 죄인됨을 계속 파고들어간다면 이 이방인들에게 마치 지식과 지혜를 지속적으로 제공해주는 호의로 여겨 돈을 가져다 주게 됩니다.

성도는 이미 자신이 죄인이기에 그 죄가 어디까지 파고들어갔는지 평생을 걸쳐 성령님의 인도함을 따라 알아갈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죄 용서를 받은 입장이기 때문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성령을 받기 전에 우리가 자신의 생존가치를 위해 계속 지식을 찾아다니고 있는 이방인이었음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92강-욥기 28장 1~11절(이방인의 지혜)210718 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욥기 28장 1~11절입니다. 구약성경 787페이지입니다.

“은은 나는 광이 있고 연단하는 금은 나는 곳이 있으며, 철은 흙에서 취하고 동은 돌에서 녹여 얻느니라, 사람이 흑암을 파하고 끝까지 궁구하여 음예와 유암 중의 광석을 구하되, 사람 사는 곳에서 멀리 떠나 구멍을 깊이 뚫고 발이 땅에 닿지 않게 달려내리니 멀리 사람고 격절되고 흔들흔들 하느니라, 지면은 식물을 내나 지하는 불로 뒤집는 것 같고, 그 돌 가운데에는 남보석이 있고 사금도 있으며, 그 길은 솔개도 알지 못하고 매의 눈도 보지 못하며, 위엄스러운 짐승도 밟지 못하였고 사나운 사자도 그리로 지나가지 못하였으니라, 사람이 굳은 바위에 손을 대고 산을 뿌리까지 무너뜨리며, 돌 가운데로 도랑을 파서 각종 보물을 눈으로 발견하고, 시냇물을 막아 스미지 않게 하고 감취었던 것을 밝은 데로 내느니라”

욥 자신의 현재 처지를 왜 다른 사람이 이해하지 못하느냐 하면 사람들이 감히 알지 못하는 깊이 있는 하나님의 숨겨놓은 지혜를 자기가 선구자적 입장에서 파고 들어가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자기를 이해 못 하고 있다는 겁니다. 보통 인간들은 눈에 보이는 것만 얻고 그것으로 나는 뭘 안다고 주장을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나 욥을 통해서 사람들이 미처 가보지도 못하고 사람들이 가기를 무서워하는 그 어두운 구석까지 파고 들어와서 그러한 남들이 하지 못한 체험 속에서 그래도 그 체험에 의미 있는 하나님께서 준비해 놓은 지혜가 있기에 하나님께서 나에게 그런 경험을 하게 했다는 겁니다.

그것을 욥은 마치 깊고 어두운 땅속으로 들어가서 광맥을 따라서 광석을 캐는 광부에 입장에 놓여있다고 표현하는 겁니다. 그렇게 힘들게 공중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으면서 저 더 어둡고 더 깊고 더 깜깜하고 더 알 수 없는 곳으로 내려가고 내려가서 하는 것은 6절에 보면 남보석도 있고 10절에 보면 귀한 보물을 발견하는 이러한 것에 보람을 갖도록 주께서 친히 이끄셨다고 친구들에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욥 자신의 이러한 선구자적인 사명을 이해하지 못하고 마치 그들이 솔개나 되는 것처럼 매의 눈이 되는 것처럼 딱 보면 안다는 식으로 함부로 내게 주어진 고통을 해석하는데 그것은 너희들인 감히 가지 못하는 모험적인 탐험가 처지에서 너희들에게 하나님이 숨겨놓은 지혜를 보물 찾아내듯이 찾아내기 위해서 이 어두운 고통의 지경까지 내려간다고 그렇게 자기를 변호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노력이 우리 신약적 입장에서 보게 되면 하나님의 지혜라는 것은 인간의 노력으로 얻는 것이 아니고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를 주셨다고 되어 있어요. 그게 에베소서 1장 17~19절에 보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성령이 와야 인간은 모든 지혜에 대해서 알 수 있다는 겁니다. 신약에서 이 말씀 하는 모든 지혜라 하는 것은 주기율표를 모두 외운다든지 암기왕이 되는 그런 지혜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에게 일어난 일을 알게 되면 그 사람은 그 어떤 경우에 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지혜에 편입된 사람으로서 하나님이 그렇게 인정해 주시는 겁니다.

가지고 있는 지식과 지혜가 효과 있으려면 그게 의미가 있으려면 하나님이 인정해 주는 지혜여야 해요. 인간들이 인정해 주는 지혜는 아무 소용 없습니다. 박사학위 서너 개 딴다고 해서 천국 넣어주는 거 아니거든요. 공부 못한다고 해서 지옥 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지옥 가는 사람 중에서 공부 못하는 사람 굉장히 많아요.

‘뭐가 아니다, 아니다’라고 하는 것은 그 아님을 붙들고 있지 말고 그렇게 이것 제치고 저것 제친다면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나님이 하시려고 하는가 하면 인간의 어떤 타고난 지혜도 하나님의 하늘나라에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겁니다. 지금 욥은 그 사실을 모르고 있습니다. 욥이 모르고 있는 이 욥기 28장을 굳이 우리가 봐야 하느냐고 우리가 그렇게 생각을 할 수가 있는데요, 이것은 인간들이 지혜를 모를 때 그리고 하나님에 대해서 모를 때 그들이 분투하고 노력하는 그 과정을 우리가 욥을 통해서 보여주시는 겁니다.

인간은 한 번도 가만히 있을 때가 없었다. 뭐든지 캐고자 하고 뭐든지 알고자 한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렇게 캐고 알고자 하는 것이 뭔가 구원에 도움이 되고자 하는 식으로 인생을 욥처럼 살아가고 있습니다. 인생이라고 하는 것은 매일같이 촛불을 새로 켜는 과정 같아요. 어제는 어제의 촛불을 켜고 오늘은 오늘의 촛불을 켜고 내일은 내일의 촛불을 켜고 그렇게 촛불을 켜는 과정을 연결시키면 그것이 바로 내 인생이라는 겁니다.

그것이 얼마나 아름답고 빛나느냐는 겁니다. 그런 식으로 자기를 미화하는 겁니다. 물론 촛불 켜는 대신 요새는 동영상 찍고 하죠. 아이 태어나기 전부터 뱃속에서 동영상 찍고 그다음부터는 집중 동영상이 한 살 때, 두 살 때, 행동 조금만 해도 마구마구 찍습니다. 그런 거 이사 한번 하면 한방에 다 잃어버리고 하죠. 그처럼 인간은 이러한 시도에 대해서 욥 나름대로 노력하고 있다는 점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면 과연 욥이 지혜를 얻었느냐. 그 뒤에 12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어요. “그러나 지혜는 어디서 얻으며 명철의 곳은 어디인고” 뭔가 노력은 하는데 대가가 없어요. 뭔가 결과가 시원찮아요. 그래서 욥은 뭔가 희망은 애써 가지면서도 늘 그 희망이 절망으로 계속 좌절되고 있습니다. 여기서 지혜라고 하는 것은 뭐 철을 어떻게 생산하느냐, 사금을 어떻게 캐내느냐 하는 그런 지혜 말고 궁극적인 지혜요, 한꺼번에 확 다 알 수 있는 지혜, 몽땅 다 알게 되는 지혜, 이거 알게 되면 어떤 공학 과학박사, 수학 박사라도 무의미 해지는 진짜 영원과 관련된 의미 있는 지혜는 얻지 못했다고 지금 욥은 자인하고 있습니다.

지금 욥 자신의 노력과 실패담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는데 이쯤 해서 나오는 패턴이 있지요. 욥은 실패했습니다. 욥은 실패했지만 성공한 사람이 있지 않겠는가. 성공한 사람은 어디서 찾는가. 그것은 하나님에 의해서 직접 지혜를 받은 사람은 실패가 없지요. 성공한 사람이죠. 그 사람을 제가 한 사람 소개하겠습니다. 솔로몬입니다.

솔로몬이 받았던 지혜는 전도서라는 책에 담겨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아까 보았던 욥의 이러한 시도, 분투하고 노력하는 거, 이것은 뭐라고 규정할 수 있는가를 신약에 오게 되면 그것을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것을 이방인이라고 합니다. 이방인.

마태복음 6장 31~32절에서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이것을 달리 늘여서 해석하면 이렇습니다. 이방인들이 어떤 방향성을 가지고 열심히 지식과 지혜를 끌어모으는데, 시험도 치고 합격했다고 좋아하고 뭐 또 시험이 있는데 그런 모든 노력이 어떤 방향성과 연결되어 있느냐 하면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와 연관되어 있다는 겁니다.

카페에 가서 어떤 커피를 고르느냐는 그 정도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커피가 맛있느냐, 어떤 케이크가 맛있느냐는 그 정도를 가지고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모든 인간이 지식탐구에 열을 내는 그 원천은 그 뿌리는 죽기 싫다는 겁니다. 나 살기 위한 지혜와 지식만 지혜와 지식으로 간주하지 나를 잃어버리게 하는 것은 지식과 지혜로 간주하지 않겠다고 누가 이야기하느냐 하면 이방인들이 이야기하는 겁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라고 말하는 이런 이방인의 배후에는 마태복음 4장에 보면 바로 악마가 있었던 겁니다. 악마는 광야에서 예수님에게 뭘 요구하느냐 하면 목회하라고 하는 겁니다. ‘네가 능력 있고, 네가 기도발 세면 이 세상에서 네가 하고자 하는 대로 목회 성공할 것이다’라고 악마가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그 악마의 제안에 대해서 거절했던 사람은 이 세상에 예수님 빼고 아무도 없었죠. 그래서 모든 인간에게 다 통하는 그 원리 원칙을 거침없이 예수님에게 쏟아붓습니다. 무엇을 입을까 먹을까 마실까만 의미 있고 그 외에는 무의미 하지 않느냐고 이야기했을 때 예수님께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를 일반 대중들이 원하고 있으니까 그들이 원하는 것을 채워준다면 그들이 분명히 너를 메시아라고 따를 것이라는 겁니다.

그들이 결핍된 거, 그들이 모자란 거, 그들이 아쉬워하는 것을 긁어주고 채워주고 넉넉하게 해준다면 너는 사람들에게 환영받는 목회자가 될 것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이 세상 모든 목회는 사기입니다. 그런데 사기 쳐도 목회가 안 되는 이유가 뭐냐 하면 같은 사기를 쳐서 그래요. 늘 식상하지 않는 새로운 사기를 개발해야 하는데 늘 같은 사기를 쳐서 교인들도 다른 사기 없는지, 자신들을 좀 현혹할 수 있는 멋진 사기 없는지 그걸 요구하는데 그럴 재주가 없어요.

말발도 안되지요, 공부도 안되지요, 자기가 말발 안 돼서 목회 실패해 놓고 자기는 복음 전해서 목회 실패했다는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대는데 목회 자체는 주님이 하시지 사람은 하는 것이 아니에요. 사도바울이 교인 몇 명 모았습니까? 사도바울이 그런데 관심이나 있었습니까? 없지요. 그래서 지금 목사도 속아 넘어가고 일반 교인도 속아 넘어가는 이유가 뭐냐 하면 교회는 있어야 한다는 그런 어처구니없는 발상 때문에 그래요.

교회가 왜 있어야 하는데요. 교회가 하늘나라 여행사입니까? 하나여행이에요? 무궁화 여행이에요? 요새 여행사들도 어려워요. 교회만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천국 보내준다고 중개소 역할 하고 커미션 챙겨 먹는 곳이 교회입니까? 사람들 요구하는 것이 천당 가는 건데. 계시를 받아보면 계시받은 솔로몬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전도서 1장에서 자신이 좀 괴롭고 수고하면서 공부 좀 했다는 겁니다.

전도서 1장 13절에 “마음을 다하며 지혜를 써서 하늘 아래서 행하는 모든 일을 궁구하며 살핀즉” 궁구한다는 것은 연구한다는 거고 살펴보니 요새 같으면 도서관에 가서 아예 살았다는 말이죠. 세상에 모든 지혜에서 하나 빠뜨림이 없이 그 지혜를 자기가 몽땅 알아서 어떤 성과를 내고자 하는 거예요. 백성들에게 “이겁니다”라고 내놓고 싶은 거예요. 그러면 가만있으면 안 되잖아요. 공부하고 노력해야죠.

그런데 14절에 내어놓은 결론이 뭐냐 하면 “내가 해 아래서 행하는 모든 일을 본즉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 여기서 솔로몬이 그 지혜를 잡는 것은 훅 지나가는 바람을 잡는 것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전도서를 좀 더 살펴보면 지식만 바람이 아니고 지식을 잡으려는 내가 바로 바람이에요. 내가 바람이에요. 내가 바로 바담~바담~바람. 내가 아무것도 아닌, 내가 뭘 잡으려고 해도 의미가 없어요. 네가 뭘 지식을 잡았다 치자. 그런 너는 무슨 의미가 있는데? 아무 의미 없어요. 바람이 바람을 잡는 거예요.

그래서 태어난 거 자체가 바람같은 바람의 일종이 아닌가. 바람이 있다가 없어지는 것처럼 내가 태어나서 살다 죽었다는 그 사실도 죽고 나서 몇 년 지나면 다 휙 하고 먼지나 흔적도 없이 ‘그런 사람 있었어요?’라고 다 지나가 버려요. 없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있기 위해서 태어난 게 아니고 없어지기 위해서 태어났다는 말이죠. 사라지기 위해서. 바람처럼 사라지기 위해서.

솔로몬이 연구해 보니까 어느 하나 고정된 것이 없어요. 다 바람이니까. 고정된 것이 없으니까 무슨 수고 헛수고하느냐 하면 어떤 것을 붙잡아 명칭을 붙이고 단어를 붙이고 기호를 붙이는 그 자체가 아무 의미가 없어요. 붙여놔 봐야 그 기호, 그 단어, 이름과 실체가 항상 맞지를 않아요. 자식 낳고 이름 지을 때 얼마나 좋은 이름 짓습니까. 영생, 구원, 이런 이름들 지어봤자 이름값을 못 하죠.

그리고 솔로몬은 1장 17절에서 더 나갑니다. 바람 잡는 것이 아니고 이건 미친 짓이라고 하죠. 다 미련하고 세상에 의미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는 겁니다. 전부 다 미쳤고 미련한 자들이라는 겁니다. 다들 정신병자 같아요. 17절에 보면 “내가 다시 지혜를 알고자 하며 미친 것과 미련한 것을 알고자 하여 마음을 썼으나 이것도 바람을 잡으려는 것인 줄을 깨달았도다”

그리고 전도서 1장 2절에서 최종 보고서를 제출합니다. 그 보고서가 다섯 가지의 헛됨으로 되어 있습니다. “전도자가 가로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이거 논문 통과되겠습니까? 이 결론, 책을 두껍게 썼는데 마지막 결론이 뭐냐 하면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심지어 이름을 붙일 가치조차 없을 정도로 헛되다는 겁니다. 장미, 코스모스, 코끼리, 이런 이름 붙이지 마.

그냥 바람 덩어리, 한때 훅 부는 바람이어요. 바람이려나? 그리고 그들은 그 헛된데 본인들은 그게 헛된 줄 모르니까 전도서 1장 8절에 보면 만물의 피곤함이 말로 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아로나민골드, 비타민 하루에 두 알, 박카스, 이런 것들이 소용없어요. 모든 것이 헛된 것을 헛되지 않은 것으로 착각한 그 자체가 스트레스받을 일이에요.

가게 열고 손님 들어오면 속으로만 ‘헛된 놈 왔구나’ “예~, 그 옷 입으시면 이뻐집니다” ‘다, 헛소리인 건 아시죠. 헛되지만 다음에 또 오세요’ 헛되지만, 자꾸 오면 기분 좋지요. 모든 것이 헛됨을 경험하기 위해서 인생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솔로몬의 결론, 솔로몬의 결론에 대해서 우리는 성경에 나와 있습니다. 하지만 전도서를 사람들이 안 보지요. 왜? 그들은 마귀를 통해서 이방인으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죠.

그래서 아까 마태복음 6장에서는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라고 되어 있는데 이걸 현대 용어로 바꾼다면 입을 것, 마실 것, 먹을 것을 교환하는 매개물이 있어요. 그걸 돈이라고 하죠. 같은 말로 화폐. 이걸 크게 이야기하면 자본이죠. 돈 될 수 있는 여지가 있는 물건, 부동산이나 동산 또는 펀드같은 이런 거. 결국은 이 세상 모든 지식은 무엇과 결부되어있느냐 하면 자본과 결부되어있어요.

과학자들이 열심히 연구해서 성과를 내고자 하는 것은 많은 자금이 자기에게 쏟아질 것을 기대하면서 많은 연구비와 투자비를 받을 수 있다는 그 희망 때문에 성과를 내고 논문도 조작하고 아무것도 아닌 것을 부풀리고 남의 것 베끼고, 이게 다 돈과 관련되어 있어요.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 마지막 내미는 카드가 뭐냐 하면 “얼마면 돼? 얼마 주면 이 교회에서 곱게 나갈 거야? 퇴직금을 도대체 얼마 달라는 거야? 월급을 얼마 올려주면 되겠어? 차 바꿔줘? 사택 사줘?”라는 이런 거. 우리 교회와 전혀 관계없으니 제가 맘 놓고 합니다.

이 모든 게 이방인과 관련된 겁니다. 이방인. 계시받지 못한 이방인. 그래서 이 세상 사람들은 모든 일에 대해서 어떤 의미에서 편해요. 돈만 있으면, 돈만 부자가 되면 못할 것이 없기 때문에 이미 헛되지 않아요. 솔로몬은 전도서에서 계시받아서 헛되다고 하는데 현대인들은 아무리 세상이 헛되다 헛되다 하지만 절대로 돈만큼은 헛되지 않습니다. 자식들 교육도 돈 버는 쪽으로, 그냥 대기업 취직해서 돈 버는 쪽으로 가야 해요.

그러면 이러한 모든 박학다식한 지식이 결국 돈과 관련되어 있다면 이 문제의 근원을 현대식으로는 어떻게 풀어야 하는가. 이렇게 풀면 됩니다. 인간의 지식을 한데 다 모으면 그릇이 있어요. 그 그릇이 뭐냐 하면 바로 시간과 공간이라는 그릇이 있습니다. 시간 공간은 어느 정도로 변동사항이 없고 영원하다고 보고 있습니다.

지금 자본이라는 것을 얻으려면 지식이 있어야 하고 기술이 있어야 해요. 지식과 기술은 가만히 있으면 안 되고 수집하고 배워야 하고 모아서 머릿속에 자꾸 담아야 해요. 그래야 나중에 자본이 돈이 되고 그 돈이 나를 살릴 수 있는 겁니다. 아무리 성경에서 헛되다고 해도 나는 헛되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어요. 헛되다고 이야기하면서도 그런 이야기하는 나는 안 헛되고 싶어요.

현대에서 그런 사례를 든다면 물리학에서 이렇게 이야기해요. 인간이 보는 것은 전부 다 색깔을 보는 것이다. 물리학 공부한 사람은 거기에 대해서 부정 못 해요. 맞지요. 색깔을 보는 거. 색깔은 거기에서 멈추지 않아요. 색깔은 파동으로 되어 있다. 맞지요. 파동의 차이가 색깔의 차이를 만들어내니까. 그러면 파동은 왜 생기느냐. 에너지의 변화 때문에 그렇다는 거예요. 그러면 그 에너지의 변화를 연결시키게 되면 결국 돈이 되거든요. 돈이 되면 나는 헛되지 않다.

그러면 에너지 변화를 어디서 구할 수 있느냐. 우리가 먼저 질서를 잡아야 해요. 세상에 모든 것을 가질 수 없기 때문에 내가 돈 되고 내가 내 돈을 지킬 수 있는 그것에 필요한 그 질서를 잡아야 합니다. 그 질서를 잡는 방법이 뭐냐 하면 그게 수학이에요. 수학적 공식을 세워놓고 그 공식을 가지고 있는 질서를 포착하게 되면 그거는 어느 상품화시킬 수 있는 거죠.

이렇게 하면 이런 이득을 얻는다는, 이렇게 이렇게 섞어 버리면 아주 향기로운 화장품이 되는, 이런 것들이 전부 다 따지고 보면 수학에서 나오는 거예요. 화장품을 포함해서 모든 제조는 수학에서 나왔습니다. 그런데 수학은 어디서 나왔는가. 수학은 인간에게서 나왔어요. 이 세상은 수학적으로 움직이지 않지만 중요한 것은 나에게, 우리 인간에게 필요한 것을 진리라고 주장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욥이 자기는 광부로서 파고 들어간다고 예를 들었는데 파고 들어갈 때 함부로 들어가지 않아요. 예측하고, 지나간 과학 지식을 총동원해서 함부로 파지 않고 어디서 광맥을 찾아 들어갈지 여기에 측량기계가 들어가고 그 기계를 만들려면 수학이 들어가고 하는 겁니다. 수학이라고 하는 것은 정보인데 인간의 상상을 극대화 할 수 있는 것은 수학밖에 없습니다.

왜냐 하면 수학에는 있다만 있는 것이 아니고 없다가 있거든요. 그걸 수학으로 ‘0’이라고 하고 없다보다 더 나아갑니다. 없기 이전의 것, 그것이 마이너스(-)고 마이너스만 있는 것이 아니에요. 뭔가 보이지 않는, 오늘 본문처럼 욥이 광산에서 금을 찾는다고 하는데 요즘 세상에서 수학자들은 허수를 찾아냈어요. 허수. 곱하면 마이너스가 되는 희한하고 있지도 않은 수. 그 허수를 찾았기 때문에 우주여행을 25억 주고 갈 수가 있게 된 거예요. 허수가 있어서.

세상에 모든 것은 인간이 아무리 성경에서 헛되다고 해도 절대로 나는 헛되지 않아를 증명하는 식으로 세상에 모든 학문이 펼쳐져 있습니다. 그거 하나하나 공부하려면요, 학교 다닐 때 그렇게 싫다는 수학, 물리학, 두 번 다시 물리학 보기 싫다고 하더라도 어느 회사든지 심지어 경영하든, 무엇을 하든 수학 없는 곳이 없고 상식적으로 물리를 알아야 학문 융합이라는 차원에서 그게 돈이 되는 거예요.

뭣 좀 알았다고 해도 노동 여건이 바뀌어 버리면, 그리고 무식하면 대번에 나가라고 합니다. 그러니 인간은 이래도 저래도 만물의 피곤함이 말로 다 할 수 없다는 겁니다. 내 말이 아니고 전도서에 나옵니다. 피곤함이 말로 다 할 수 없다고. 남편에게 돈 벌어오라고 해도 남편이 돈 벌어오려고 하면 공부를 그만큼 해야 해요. 가만히 있다고 돈 주는 곳 없어요.

공부해서 실력을 쌓아야 해요. 심지어 어떤 사람은 그러잖아요. 정치인 되어도 엑셀 정도는 해야 한다고. 엑셀은 셀을, 작은 셀들을 연결시킨 것이 엑셀이에요. 촘촘히 셀들을 연결시켜서 다루는 그 칸막이 칸막이를 다루는 것이 엑셀이에요. 아내는 남편보고 돈 벌어오라고 하는데 지금 나이가 칠십 중반인데 엑셀을 언제 배웁니까. 끝났다.

아내는 놀고 싶어 한다고 오해하는데 지금 돈 벌 수 있는 막대한 정보량을 자기 조그만 일 종사한다고 따라갈 수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게 뭐냐 하면 전도서 말씀대로 전부 다 미쳤어요. 미치고 미련하고 피곤한 거예요. 전부다. 그러면 성령 받아서 예수님에 대해서 알면 밥 먹여 줍니까? 여기서 중요한 거예요. 밥 먹여줘요. 조건이 있습니다. 내가 기껏 시도하는 것이 이방인들이 좋아하는 그것만 추구한다는 그 죄를 알기만 하시면 밥 먹여 줍니다.

그리고 지금 월급 한 150만 원 받는 거기에서 멈추지 마시고 내가 도대체 어느 정도로 이방인 적이며 어느 정도로 먹고 마시는 것에 환장했는지를 알기 위해서 도서관에서 파고 승진시험 쳐서 더해주면 250까지 올라갑니다. 그래서 계속해서 내가 죄인인 것을 알고 공부에 열중하면 300만 원으로 올라가고 임원 되면 천만 원까지 받을 수 있습니다.

조건은 단 하나밖에 없어요. 나는 죄인이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복음 알고 잘난 척할 것이 아니라 우리의 본성은 이방인이라는 것을 깨닫게 해주시고 아무리 성경에서 무의미하다고 할지라도 나의 본성은 나만 의미 있기를 요구하는 이 죄성을 주님 십자가 앞에서 그대로 토해놓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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