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이 없는 인생
2021년 7월 11일 본문 말씀: 욥기 27:20-23
(27:20) 두려움이 물 같이 그를 따라 미칠 것이요 폭풍이 밤에 그를 빼앗아갈 것이며
(27:21) 동풍이 그를 날려 보내며 그 처소에서 몰아 내리라
(27:22) 하나님이 그를 아끼지 아니하시고 쏘시나니 그가 그 손에서 피하려 하여도 못할 것이라
(27:23) 사람들이 박장하며 비소하고 그 처소에서 몰아내리라
사람이 주변 상황을 나름대로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해 사물이나 현상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인간 본인이 과연 ‘제대로’가 성립되는 지를 알지 못하고 단지 자기가 필요로 하는 정보만 빼내고자 합니다. 그것은 자신이 실수를 안 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실수를 하지 않는 자아’ 아무래도 악인쪽으로 분류될 가능성이 적다고 여기는 겁니다.
그리고 난 뒤, 자기쪽에 같이 있지 못하는 자에 대해서는 사정없이 악인이라고 규정해버리는 겁니다. 왜 그렇게 하느냐 하면, 적을 적이라고 규정하므로서 자신을 마땅히 선한 쪽이라고 확인하고 싶어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인간은 늘 자기 걱정과 자기 염려를 놓지를 못하고 삽니다.
물론 이러한 판단이 부정확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욥의 판단도 마찬가지입니다. 욥은 지금, 자신이 서슴없이 규정한 그 악인들과 이별할 마음 준비를 다 갖추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 보시기에 인간 대 인간 사이에 이별은 성립되지를 않습니다. 모두들 같은 가마솥에 다같이 놓여 있습니다.
즉 피한다고 해서 내마음대로 피할 수 있는 사이가 아닙니다. “나는 너랑 안 놀아”라고 일방적으로 선언했다고 해서 자기 인생에 그 사람이 안 엮이는 것이 아닙니다. 왜 사람들은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자들과 같이 있기 싫어할까요? 그것은 오늘 본문에서 욥이 악인들에게 퍼붓는 저주 안에 들어 있습니다.
즉 악인들에게 ‘두려움’이 늘 수시로, 흔하게 들이닥친다는 겁니다. 본인이 요청할 때만 두려움이 오는 것이 아니라 요청하지도 않았음에도 두려움이 몰려 온다는 겁니다. 욥이 친구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이 두려움에 대해서 본인이 경험하고 있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자, 그렇다면 두려움은 왜 찾아오는 걸까요? 그것은 차이를 통해서 규정해놓은 그 규정이 훼손될까봐 두려운 겁니다. 그 차이남이 깨어지는 것이 왜 두려운 겁니까? 그것은 수치심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즉 인간 세계에서 사람들은 자신의 돋보임을 증명해줄 것은 타인과의 차이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너와 나의 차이에서 자신을 자체적으로 수치되는 것을 정리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부실함을 감추기 위해, 자신이 세상 진리에 대해서 정리되지 못한 것을 감추기 위해, 사람들은 부지런히 자신의 정당성을 보장해줄 구역을 따로 만들어 나갑니다. 계속 악인들을 생산해냅니다.
당연히 자신은 그 악에게 포함되지 않습니다. 이처럼 인간들은 이런 식으로 인생을 삽니다. 하지만 모든 일의 시작은 ‘외부의 선택’, ‘외부의 자극’에서 비롯됩니다. 이 선택과 자극은, 인간 세상에서 같은 인간이 인간을 평가하는 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용납하지 않습니다. 즉 인간은 타인간을 통해서 자신을 파악하는 것은 의미있는 것으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지금 욥은 아직 하나님께서 직접 욥에게 찾아오기 전이라서 여전히 자기 규정의 한도를 보여줍니다. 하나님이 찾아온 자신과 그렇지 못한 친구들과 욥은 차이난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신약성경에서 보면, 이런 구역설정은 용납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죽으심은 곧 모든 인간의 죽음이기 때문에 그러합니다.(고후 5:1)
즉 인간은 죽기 위하여 이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죽기 위하여 태어났기에 나름대로 스케줄이나 인생 계획이라는 것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죽음의 보편성’은 그 죽음 안에서 일어나는 인간의 모든 행위에 아무런 가치를 부여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곧 나와 너의 구분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당연히 죄인의 의인의 구분도 있을 수 없습니다. 죄인과 의인의 구분은 인간들의 바람이지 주님의 바람이 아닙니다. 주님은 세상 모든 인간과 오로지 예수님 자신과 비교하실 뿐입니다. ‘아담 안’이나 아니면 ‘새 아담’이냐의 구분뿐입니다. 따라서 인간들 끼리의 그 어떤 사적인 차이성이 하나님의 일에 끼어들 수가 없습니다.
인간 세계를 일괄되게 그렇게 보시는 이유는, ‘아담 안’의 이러한 원칙이 새로 오신 두 번째 아담이신 ‘예수님 안’의 세계가 그러하기 때문입니다. 즉 아담 안에서는 모든 인간이 죽은 것 같이, 예수 안에 있는 모든 자는 다 삽시다.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이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롬 5:17-19) 이런 상태를 로마서 3:22에서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곧 ‘차별이 없다’는 겁니다. 이것이 천국 생활의 원칙입니다.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이유는 차이남에서 오는 소외감입니다. 그러나 천국 생활의 복음은 자기 사람들로 하여금 일체 두려울 것이 없게 하십니다. 두려움이 없다는 말은 곧 ‘부끄러울 게 없다’는 말이 됩니다.
왜냐하면 내가 한 행동을 측정해서 타인과 비교하는 식의 원리가 아니라, 모든 인간에 속한 자들은 모두 죄인이라는 점에 차이가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보내신 취지는, 가장 궁극적인 죄를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 그 죄는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받아들이지 않는 겁니다.
정말 십자가를 받아들이게 되면, 자신이 이미 죄로 죽은 자임이 드러나서 더는 자신을 부끄럽게 할 것들이 남아 있지 않게 되고 그렇게 되면 더는 두려워할 필요도 없게 되는 겁니다. 욥이 풀 수 없었던 것은 욥이 인간의 한계를 벗어날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에서는 하나님께서는 그 민족을 광야로 보냅니다.
광야를 죽음의 영토입니다. 자력으로 사는 게 없기에 자기 노력을 알아달라고 요청할 여지조차 전혀 없습니다. 타인과의 차이남도 없습니다. 그저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만 받고 삽니다. 그래서 그들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없기에 타인 앞에서 부끄러움이나 두려움도 없습니다. 이것이 ‘저주 안에서의 은혜성’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그 누구도 나의 잘남을 증명해줄 타인은 존재하지 않음을 받아들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91강-욥기 27장 20~23절(차이없는 인생)210711 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욥기 27장 20~23절입니다. 구약성경 787페이지입니다.
“두려움이 물같이 그를 따라 미칠 것이요 폭풍이 밤에 그를 빼앗아갈 것이며, 동풍이 그를 날려 보내며 그 처소에서 몰아내리라, 하나님이 그를 아끼지 아니하시고 쏘시나니 그가 그 손에서 피하려 하여도 못할 것이라, 사람들이 박장하며 비소하고 그 처소에서 몰아내리라”
욥이 악인이 받을 저주에 대해서 과감하게 그 결말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러한 악인들이 받을 저주에 대해서 주저 없이 이야기한다는 말은 욥 자신은 이 저주받을 부류에 속하지 않고 있다는 그 자신감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욥의 잘못이 뭐냐 하면 인간 대 인간 사이에서 차이를 발견하고 있습니다. 나와 다른 너, 그런데 나는 지금 의인이고 나와 다른 너희는 나와 다르다는 이유 때문에 악인이 되어야 한다는 그 주장을 계속해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욥의 이러한 자기 입장, 자기주장은 성경에 이 내용이 나오고 욥의 의사가 나와 있는 것은 모든 인간은 자기 밖으로 자기가 벗어날 수 없는 한계를 갖고 있다는 점을 욥이 대신해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욥이 자기 한계를 벗어나려면 나중에 누가 와야 하느냐면 하나님이 직접 나타나셔야 해요. 그래서 마지막 때, 구약 욥기에서는 개인적으로 사적으로 욥에게 나타나지만, 나중에 신약에서는 모든 인간에게 하나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모든 인간에게.
심지어 예수님을 믿지 않는 유대 사회에서 예수님 자신을 드러내셨습니다. 드러내실 때 세례요한이 그렇게 이야기했거든요. 심판 날이 가까웠다고 내 뒤에 오시는 분이 심판한다고 그렇게 힘주어 이야기했지만, 사람들의 생각은 ‘내가 판단하겠다’라는 거예요. ‘알았어, 알았어. 어쨌든 간에 내가 판단할게’ 내가 판단해서 내가 믿을 만하면 믿고 안 그러면 안 믿겠다는 겁니다.
여러분 가까운 식구나 친척들에게 예수님을 권하고 복음을 전해보게 되면 들려오는 반응은 딱 한 가지입니다. ‘알았어. 알았어. 내가 알아서 믿을 게. 다 때가 되면 믿겠지. 네가 마음 쓰는 거 다 이해하고 있으니까 내가 알아서 할게’라고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욥이 그런 점에서 선지자라고 할 수 있어요.
악인들에게 그들의 저주스러운 이야기를 해도 그들은 결국 돌아서지 못할 것을 욥은 지금까지 욥기의 내용을 쭉 전개해 볼 때 이런 막가는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너희들은 안 돼. 내가 그렇게 친절하게 이야기했잖아. 봐. 안 믿기잖아. 그러니까 너희들의 마지막은 결국은 하나님 앞에 이렇게 저주받는 거 외에는 없어’라고 하죠.
오늘 본문에 의하면 “두려움이 너희를 덮칠 것이다. 동풍(폭풍)이 와서 그 처소를 날려 보내고 하나님이 너를 버리시고 아끼지 아니하신다. 그리고 피하려고 해도 하나님의 심판에서 피할 수 없고 다른 사람들은 너의 멸망에 대해서 아주 통쾌하다고 기뻐할 것이다. 이게 악인이 받을 마지막 결말이다”라고 욥은 계속해서 밀어붙이고 있습니다.
그러면 욥의 생각이 지금 하나님 만나기 전이거든요.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이것이 인간이 가지고 있는 한계입니다. 지금 욥의 문제점은 뭐냐 하면 자꾸 친구들과 헤어지려고 해요. 이별하려고 합니다. 이건 은근히 내가 말해도 안 먹히니까 ‘에라이, 모르겠다. 네 갈 길가고 내 갈 길 가버리자’라고 그렇게 단정 짓고 싶어요. 왜냐 하면 그렇게 해야 ‘거봐. 내가 말한 것이 옳잖아. 내가 하는 말이 다 맞는 말이잖아’라고 그걸 현상적으로 증명하고 싶은 겁니다.
역시 나는 옳았어. 나는 실수가 없었어. 그러고 싶은 겁니다. ‘그러니까 너희들은 필히 지옥 가야 해’라고 밀어붙이고 싶은 겁니다. 욥이 하나님 빼놓고 인간 대 인간에서 자꾸 헤어지기를 원하는데 실제로 이 세상에 보게 되면 인간은 인간과 헤어질 수가 없습니다. 안 헤어집니다. 아무리 밀어붙여도 다시 만나게 되면 만날 수밖에 없어요. 내 중심으로 ‘너는 나와 빠이빠이다’라고 일방적으로 선언해봤자 어느 시간, 어느 장소에서 나타날지를 아무도 장담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욥은 일방적으로 나 있는 쪽과 너희들은 헤어지면 그만이라고 그렇게 밀어붙이고 있습니다. 욥이 이러한 헤어짐을 기대하고 있는 근거가 뭐냐 하면 너희와 내가 차이가 난다는 확신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신약에 와야 욥의 한계에서 벗어난 사람들의 이야기, 사도바울이죠, 사도바울은 이런 욥이나 한계에 갇힌 일반인들에게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로마서 3장 22절에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라고 나옵니다. 모든 인간은 누가 누구보고 비난하거나 정죄하거나 판단할 수 있는 권한자가 없어요. 차별이 없습니다. 왜냐 하면 죽음 안에는 차이가 없기 때문에. 예수님이 죽으신다, 이 땅에 오셔서 여러 가지 말씀을 하실 때 사람들이 ‘나는 그 말 알아들어. 알아들어. 너는 못 알아듣지? 그러니까 나는 주님 편이고 너는 주님 편 아니야’라고 말 알아듣는 것 가지고 주님 편인지 아닌지 가르고 싶지만 그런 편 가름, 패 가름을 무효화시켜버립니다.
모든 인간은 죽는 것에 있어서 어떤 차이를 두지 않습니다. 이 말은 모든 인간은 죽는다는 점에서 모든 인간이 가지고 있던 어떤 계획이나 스케줄도 이건 의미가 없어요. 왜냐 하면 인간은 죽기 위해서 만들어졌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욥은 지금 그 사실을 몰라요. 욥은 지금 자신이 인간이라는 이유 때문에 저주받는다는 사실을 몰라요. 구약이기 때문에.
욥은 지금 사람과 상대하고 있어요. 나는 이러이러한데 너는 이러이러하다고 하고 있습니다. 지난 수요일에 그런 이야기 했습니다. 사람 살아가는 것이 참 차이나고 다양하다고 생각하죠. 그러나 어떤 가정이라도 뿌리를 파보게 되면 똑같은 동일한 토대에서 나왔습니다. 그렇고 그런 거예요. 인생이라는 것은 그렇고 그런 거. 어떤 차이가 없습니다.
여기 오늘 욥기에 보면 뭐라고 되어있느냐 하면 “저주받은 사람은 두려움이 물같이 그를 따라 미칠 것이요”라고 되어있어요. 두려움이 흔하게 흔하게 어디를 가도 그냥 물 흐르듯이 따라 다닌다고 하는데 이 두려움은, 욥이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은 욥 본인이 뭔가 두렵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쉽게 말해서 인간이 어떤 이야기를 할 때는 자기 자신이 정리가 안 되었기 때문에 자기 자신이 정리 안 된 것을 감추기 위해서 자기 정리 안 된 것을 남에게 뒤집어씌우는 식으로 대화해요.
“너 복음에 대해서 정리 잘 안 됐지? 그지?”라고 닦달 내는 이유가 본인 자체가 지금 정리가 안 된 것을 마치 정리가 된 것처럼 위장하기 위해서 하는 겁니다. 정리가 된 사람 같으면 이렇게 이야기하죠. “당신이나 나나 똑같습니다. 차이 없습니다. 열심히 뭐 복음대로 살았고 복음을 위해서 살았다고 하는데 다 헛방이었습니다. 다 부질없는 짓이었습니다. 글 올리고 하는 거 다 부질없고 아무짝도 소용없는 짓이었습니다. 그랬다고 하나님이 뭐 더 알아주는 것도 아니고...”
왜 인간 대 인간으로 차이를 두려고 합니까. 본인이 그러고 싶은 거예요. 본인이 자기 한계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자기는 남보다 차이나는 인간이 되고 싶은 겁니다. 욥은 지금 몸부림치고 있는 거예요. ‘너 무섭지? 무섭지?’라고 하는 것은 본인이 지금 ‘나는 무섭다. 무섭다’라는 것과 똑같은 이야기예요. 인간이 태어나서 부여받았던 그 환경은 똑같은 환경이에요.
차이나는 환경이 아니고 똑같이 차이가 없이 예수님을 죽게 만드는 그 환경을 똑같이 부여받았습니다. 똑같이 안에 살고 있습니다. 거기서 인간은 너도 너 나름대로 밥 먹고 살려고 애썼고 나도 나 나름대로 밥 먹고 살려고 애썼다는 점에서 모든 인간은 숙련공입니다. 숙련공. 자기가 부여받은 환경 내에서 숙달하고 숙련하는 거, 그것으로 두려움을 못 이겨요. 그것으로 죽음을 못 이깁니다.
예수님이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모든 인간은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이 확연하게 드러났습니다. 그리고 그다음에 인간이 각양각색으로 살아가는 것은 다가오는 죽음을 피하기 위해서 온갖 몸부림치고 있는 그 모습만 완전히 노출되지요. 그게 바로 자기에게 현혹되는 겁니다. 자기가 자기에게 반해버린 거예요. 그래서 괜찮아진 자기를 지키기 위해서 어떻게든 남을 발길로 차서 너와 나는 어쨌든 간에 뭔가 차이가 난다는 점을 부각시키려고 한다는 겁니다.
욥이 성경에서 이렇게 고백할 때 욥도 뭐 별거 없다고 그렇게 생각하지 마시고 욥도 두려움에 대해서 협박을 받고 있었다는 그 점에 대해서 우리와 다를 바 없다는 그 점을 하나님께서는 욥을 앞장세워서 하나님 만나기 전에 욥은 이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는 것을 우리를 대신해서 그대로 보여주는 겁니다. 지금 욥은 타인과 이별하려고 합니다. 소위 자기가 악인이라고 규정한 그 사람과 이별하려고 하는 겁니다.
그러나 아담 안에서 이별은 없습니다. 아담 안에서 이별이 없다는 이 말이 슬픈 말이 아니고 이 말의 확실한 현상을 사도바울은 로마서 5장에서 이렇게 변경을 시켜줘서 우리에게 기쁜 소식이 되게 합니다. 그게 뭐냐 하면 아담 안에서는 어떤 인간도 피할 수 없다는 겁니다. 어떤 괴물을 만날지 이건 아무도 장담 못 한다. 결국 내가 기피하고 밀치고 버리고 싶은 인간이라도 어느새 내 인생 한구석까지 나를 찾아와서 나를 괴롭힐 수 있다는 이 가능성을 우리는 떨쳐버릴 수가 없어요.
우리는 내가 싫어하는 사람과 헤어지고 좋아하는 사람과 가까이 하고 싶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네 생각이고요, 우리는 아담 안에서 누구를 만날지 우리가 결정할 수 없습니다. 그걸 가지고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인생의 시작은 외부의 선택에서 온다. 내 인생 내가 시작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시작한다고 생각했다면 그건 너무나 잘못된 생각이에요.
로마서 5장에서 사도바울은 이것을 이렇게 변경시킵니다. 17~19절에 보면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이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아담 안에서 모든 인간은 같이 갇혀 있고 묶여있고 한통속이지만 예수 안에서 성도는 하나나 되어있다는 겁니다. 아담에서 일어났던 그 원리원칙을 그대로 새로운 아담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그대로 적용시켜버립니다. 그러면 아담 안에서는 등수도 없고 석차도 없고 계급도 없어요. 하나님의 의는 차별이 없는 겁니다. 지금 욥은 그 상태를 전혀 예상도 못하고 있는 겁니다.
어떻게 인간과 인간 사이에 차별이 없습니까. 오히려 의아해하는 겁니다. 욥은 악인에게 두려움이 온다고 악담과 저주를 퍼부었지만 두려움은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내가 남들처럼 될까봐에서 오는 차이성 때문에 두려움이 오는 거예요. 그걸 로마서 1장에서는 수치라고 하는 거예요. 사람이 혼자 있을 때 옷 벗는 거는 그렇게 수치를 느끼지 않습니다. 그러나 남이 오게 되면 아주 화들짝 놀라죠. 남이 오게 되면.
자기 몸은 변함이 없는데, 혼자 있어도 그냥 가볍게 입었는데, 그 가볍게 입은 것이 누가 문이 열려있어서 “택배요!”라고 들어오면 “어~왜 이러십니까? 아저씨, 왜 이러십니까?”라고 나오는 거예요. 제가 예를 하나 들테니 여러분들이 이것이 옳은지 나쁜지를 한번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서울에 한 요양병원에서 영양사를 뽑는데 그 원장선생님이 하는 말이 면접 보면서 “우리가 당신에게 바라는 것은 없고 그 노인네들 한 끼에 350원에 맞춰서 식단 짜주세요”라고 한 거예요. 500원도 아니고 350원. 3500원이 아니고 350원.
그러니까 그 영양사가 그렇게 해주면 뭐 해줄 거냐고 되물었죠. 그러니까 원장선생이 50만 원 월급 더 준다고 한 거예요. 그래서 그 영양사가 “나에게 50만 원 더 줄 생각하지 말고 그 남는 돈 가지고 노인네들 식사나 제대로 차려줘라”라고 한 거예요. 350원 같으면 뭐 줄 수 있으냐 하면 밥에 간장 내주면 끝나요. 이게 실제 이야기입니다.
정말 이건 고발감이에요. 이 요양병원은 고발감이에요. 요양병원 지었다고 은행 대출받아서 이자 많이 나가니까 그랬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이건 고발감이에요. 그러나 이 350원에 이러한 말도 안 되는 차이성, 이 수치스러운 현상이 언제 수치가 날아가느냐 하면 바로 6.25 전쟁 때 날아갑니다. 전쟁 중에는 350원짜리 밥에다 간장만 줘도 좋고 간장 없이 밥만 줘도 돼요.
밥 푸던 주걱만 줘도 그 주걱에 밥알로 행복해 하는 아이가 있어요. 멀리 있는 게 아니고 우리 외손자 이야기지만. 밥만 있어도 좋아요. 그러니까 전쟁 중일 때 사도바울이 고난의 길을 갈 때 350원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내가 과연 3500원짜리인가 350원짜리 인가 그 차이 때문에 수치를 느끼는 거예요. 그 차이 때문에.
로마서 1장 16절에 보면 이런 말씀 있습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믿는 자에게는 일체 그 사람의 아담 속에 있었던 지위와 위치를 묻거나 따지지 않습니다. 새로운 아담의 원리원칙만 적용할 뿐이에요. 네가 이 땅에서 350원짜리 먹었는지 3500원짜리 먹었는지 그건 묻지를 않습니다. 어쨌든 저쨌든 간에 차이가 없어요. 일체 차이를 두지 않습니다.
차이가 없을 때는 서로가 서로에게 부끄러움이 성립하지 않고요. 부끄러움이 성립하지 않으면 뭐가 없느냐. 주 안에서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 오늘 본문에서 욥은 지금 자기가 무서우니까, 자기가 상상만 해도 끔찍하니까, 저주받은 사람은 이런 벌을 받을 거라 믿으니까 본인이 저주받을까봐 두려워서 오히려 그것을 어디에 되돌리느냐 하면 저주받을 악인에게 그것을 되돌려 버리는 겁니다.
‘네가 가진 것이 없어지고 나중에 네가 비웃음이 될 거다’라는 식으로 같은 인간 대 인간 세계에서 어떤 차이를 발생하는 그것이 인간에게는 이미 공포가 되고 압박감이 된다는 이 자체가 지금 인간은 이 땅의 생활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그러면 이 해결점은 뭐냐? 이건 한두 번 한 것도 아니고 이제 수백 번 한 거 같은데 이스라엘로 돌아가야 해요. 이스라엘로.
욥은 지금 해결점 없습니다. 그냥 악담만 퍼부을 뿐이에요. 나는 잘났다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욥은 지금 자기가 뭐가 잘 못 되었는지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신약에 와서 잘못된 것은 뭐냐 하면 예수님 십자가 안 믿는 죄보다 더 큰 죄는 없어요. 왜냐면 예수님이 십자에서 피를 주고 그 피를 안 받아들이면 여전히 본인은 어떤 자기중심의 차이남을 또 개시해요.
저 사람은 나보다 예쁘나 안 예쁘나, 나보다 옷 잘 있었나 안 입었나, 나보다 돈 많나 안 많나, 교회에는 교인이 나보다 몇 명 더 오나, 이런 식으로 맨날 차이를 느껴서 자기 스스로 올라오는 수치심을 승리감으로 덮으려고 애를 쓰는 겁니다. 저 집 아이는 공부 몇 등했나 하는 그런 거요. 이것을 세상적으로 보게 되면 이렇습니다.
인간은 어떤 사물이나 현상을 볼 때 자기 필요한 정보만 뽑아내요. 그래놓고 뭐라고 우기느냐 하면 자기는 전부 다를 안다고 우기는 겁니다. 그러면 공포는 어디서 생기는가. 바로 UFO(Unidentified Flying Object) 미확인 비행 물체가 딱 떴을 때 나는 어떤 사물을 통해서 내가 원하는 정보만 빼냈는데 만약 이 지묘동에 커다란 UFO가 등장하게 되면 우리는 거기서 공포와 두려움을 느끼는 거예요.
왜냐 하면 내가 파악하지 못한 내가 알지 못한 정보가 저쪽에 남아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통해서 정보를 어떻게 하느냐 하면 인간들이 갖고 있는 정보로써 본인이 밥 먹고 살려고 만드는 것이 아니고 일단 우리의 정보를 끊어버리는 겁니다. 이걸 의미 없고 소용없게 만드는 겁니다. 이게 광야입니다.
주일학교에서도 했습니다만 이스라엘 백성은 반드시 광야를 거쳐서 요단강을 거쳐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들어와야 해요. 반드시 순서가 그렇게 되는 겁니다. 신약같으면 반드시 십자가에 우리가 죽었다는 것을 거쳐서 그래야 우리가 살아서 이렇게 생각해야죠. ‘죽는 것은 당연한 거고 우리가 왜 살고 있지’라고 사는 것을 신기하게 여겨야 합니다. 사는 것을 이상하게 여겨야 해요.
사람이 사는 것도 이상하지만 살아있으면서 입에서 복음이 기어나온다는 거, 이거는 더 신기한 이야기예요. 그 돈도 안 되는 그 이야기가 왜 입에서 튀어나옵니까. 뭐 자기가 의롭다는 자랑용입니까. 복음지식 말고요, 복음이 나오는 것을 언급하는 겁니다. 복음 지식 나부랭이 말고 복음이 나오는 거, 나는 그 어떤 인간과 비교하거나 차이둘 이유가 없다는 거, 그리스도 안에서는 차별이 없다는 거, 누가 누구를 비난하고 비판할 수 있는 평가할 수 있는 자격이 없다는 거, 그런 이야기가 서슴없이 나오는 거, 여러분 그게 참 신기하고 이상하지 않습니까.
남이 그 사람을 약을 올릴 수가 없어요. “에고, 뒤에 머리 다 빠졌네요”라고 하면 ‘아, 빠졌구나’라고 생각하면 되는데 주변에 머리카락 잡아당겨서 가리고 그럴 필요 없어요. 상대방이 나를 약 올릴 여지가 전혀 없게 만들어 버리는 거예요. 그걸 저는 알기 쉽게 말해서 바퀴벌레라고 하는데 바퀴벌레는 피하면 됩니다. 바퀴벌레 오면 피하면 되는데 인터넷은 피할 수가 없어요.
바퀴벌레 반대말이 인터넷이에요. 그냥 이 세상은 가만있어도 들이닥칩니다. ‘백신 언제 언제 맞으세요’라고 들이 닥칩니다. 가만있어도 자꾸 와요. 피할 수 없어요. 내 잘남을 유지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됩니까, 목사님. 미치겠지요? 상대방은 복음 안에 있지 않잖아요. 이건 보니까 주변에 두려움이 몸부림치고 있어요. 이럴 땐 방법은 하나밖에 없어요. 더 미치면 됩니다. 인생 살기 쉽지요.
멀쩡하려고 하니까 욥처럼 되는 겁니다. 여러분 복음인 척 말고, 진짜 복음 아십니까? 미친것보다 더 미치면 됩니다. 멀쩡하기를 포기하면 됩니다. 세상은 미쳐라. 나는 멀쩡하다는 식으로 살게되면 진짜 미쳐버려요. 욥의 지금 태도 보셨잖아요. 친구들은 다 엉터리고 자기는 옳다는 거예요. 지금 욥이요, 좀 있다가 하나님 만나고 나면 이게 어떻게 확 바뀌는가 보세요. 욥이 선지자 됨은 바뀌는 데 있어요.
우리의 성도 됨은 지식 아는 거 아니고 뭔가 바뀌었다는 그것을 증거 하는 것이 바로 우리가 성도 됨이에요. 나는 전에 이랬었는데 지금은 바뀌었다. 전에는 남이 욕만 해도 분이 나는데 지금은 그런 소리 하면 내가 더 미치고 싶더라. 내가 너보다 더 미쳤다고 그걸로 그냥 가는 거예요. 안 미치려고 하기 때문에 여러분 인생이 힘듭니다.
사람 사는 것이 이건 뭐, 견디는 것이지 정말 산다고 할 수가 없습니다. 운동화 안 맞는 거 신으면 발등에 혹나요. 우리 인생은 온통 혹 투성이예요. 맞지도 않는 거. 주님은 죽으라고 인생을 살라고 하시는데 우리는 악착같이 살아보려고 하니까 나이가 들면 들수록 온 천지 안 아픈 곳이 없고, 멍들고, 팔다리 쑤시고, 아침 되면 손에 약 한 움큼 쥐고 약과 약이 충돌해요. 효과 있는지도 모르겠고.
그냥 이 땅에서 우리는 사는데 숙련공 되려고 하다가 실패한 겁니다. 원래 인간은 할 수 있는 재주가 미치는 것밖에 없다고 생각하시고 남들이 뭐라 하면 ‘그래, 원래 나는 당신보다 더 미쳤다’라고 그렇게 살면 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뭔가 돋보이려고, 자기만은 건지려고, 자기만 이 세상 구원받으려고 노력하는 거 때문에 우리는 오히려 우리 자신에게 현혹되어 갇히고 말았습니다. 남들과 차이 나는 것을 통해서 자기 증명한다는 그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지를 깨닫게 해주시고 십자가 앞에서 모든 인간은 죄인이요, 십자가 믿는 자 앞에서 의의 차별이 없음을, 그게 천국의 원칙임을 이제는 기쁨으로 감사하게 하옵소서.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