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과 바리새인
2021년 6월 27일 본문 말씀: 욥기 27:5-12
(27:5) 나는 단정코 너희를 옳다 하지 아니하겠고 죽기 전에는 나의 순전함을 버리지 않을 것이라
(27:6) 내가 내 의를 굳게 잡고 놓지 아니하리니 일평생 내 마음이 나를 책망치 아니하리라
(27:7) 나의 대적은 악인 같이 되고 일어나 나를 치는 자는 불의한 자 같이 되기를 원하노라
(27:8) 사곡한 자가 이익을 얻었으나 하나님이 그 영혼을 취하실 때에는 무슨 소망이 있으랴
(27:9) 환난이 그에게 임할 때에 하나님이 어찌 그 부르짖음을 들으시랴
(27:10) 그가 어찌 전능자를 기뻐하겠느냐 항상 하나님께 불러 아뢰겠느냐
(27:11)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내가 너희에게 가르칠 것이요 전능자의 뜻을 내가 숨기지 아니하리라
(27:12) 너희가 다 이것을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주 허탄한 사람이 되었는고
욥의 자기 의에 대한 단호함과 욥기 처음에 등장한 하나님의 평가를 대비해보시기 바랍니다. 욥기 1:8에 보면,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유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욥은 순수하고 거짓을 모릅니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의 평가가 합당한 것처럼 보입니다. 욥이 스스로 자기를 생각하는 것과 하나님께서 욥을 보시는 생각하는 것이 같아 보입니다만은 현실 적으로 욥에게는 난데없이 ‘고난’이 개입되어 있습니다. 이 고난에 대해서 해명하면서 ‘욥 자신의 순전함과 의’는 무용지물이 되고 말았습니다.
즉 하나님과 인정하고, 욥 스스로도 자신의 의를 인정하기에 하나님과 욥 사이에 아무 것도 끼어들 여지가 없어 보이지만 참으로 이질적이게도 ‘고난’을 끼어 있어 그 둘 사이의 연결이 막혀있고 좌절되어 있습니다. 욥의 입장에서는 억울합니다. “제발 고난을 철회해주시면 아니되겠습니까”라고 외치고 싶을 겁니다.
왜 고난이 욥에게서 철회할 수 없는 걸까요? 그것은 인간을 통해서만 하나님께서 하나님다움을 성립되기 때문입니다. 인간들은 자신의 세계가 허구요 허상인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인간들은, 본인들이 사용하는 언어가 실제로 있는 사물이나 세상이나 인간이나 변화를 그대로 진실되게 묘사해주고 있다고 여깁니다.
예를 들면,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의(義)’라는 단어도 마찬가지입니다. 욥이 이 ‘의’를 이렇게 사용하고 있습니다. “내가 내 의를 굳게 잡고 놓지 아니하리니 일평생 내 마음이 나를 책망치 아니하리라”(욥 27:6) 즉 내가 나를 책망하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내 실력으로 획득한 의가 그대로 유지된다고 여겼던 겁니다.
그렇다면 그 의로 무얼하겠다는 겁니까? 어디에 써먹을려고 합니까? 그것으로 나의 나다움을 지탱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하지만 지금 욥은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것도 갑자스러움 죽음에 직면해 있습니다. 따라서 욥은 ‘의’라는 단어를 쓰면서 그 의미가 스스로 쓰게 되면 실제 자기에게 일어나는 일을 설명할 수 없다는 점을 모르고 있습니다.
인간 세계에서 사용하는 모든 단어와 의미는 도리어 인간 세계가 허구며 허상인 것을 증명합니다. 마태복음 13:13-15에 보면, “그러므로 내가 저희에게 비유로 말하기는 저희가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 이사야의 예언이 저희에게 이루었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 함이라 하였느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에 의할 것 같으면, 인간의 몸에 눈과 귀가 있음으로 인하여 인간은 실상을 보지 못하는 자임이 밝혀지는 겁니다.
왜냐하면 실상되시는 분이 오셔서 전혀 알아보지 못하는 그런 눈과 그런 귀를 달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은 곧 이 세상의 모든 의미와 개념은 예수님의 죽으심을 경유해야 해야 밝혀진다는 겁니다. 여기서 우리는 욥과 바리새인들의 차이점을 생각해 봅시다. 둘 다 자기 의로움을 내세운다는 점이 공통점이 있습니다.
하지만 바리새인은 집단적이지만 욥은 개인적입니다. 즉 바리새인들을 자기네들 끼리 공통성을 공유하고 있지만 욥은 아무도 욥의 사적 사정을 모르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진리가 한 개인에게 집중되는 방식으로 찾아든다는 점을 보여줍니다. 사람들에게 눈과 귀가 있더라도 이는 특정한 사람에게 일어나는 특이 사건을 해명할 능력이 없습니다.
이런 현상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모든 인간들은 허상을 실상으로 취급할 정도로 진리에 어둡다’는 점을 보여주십니다. 즉 하나님도 모르면서 하나님에게 대드는 그 양상은, 하나님에 의해서 고난받는 자의 사정도 모르면서 그 사람을 비난하는 현상이 나타나게 한다는 겁니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 모른다는 점은 욥이나 바리새인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욥은 사적으로 이스라엘 민족이 당하는 그 역사성을 닮은 경우를 갖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허구성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를 통해서 나타나게 됩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에게 물과 양식을 달라고 모세에게 분노하며 대들었습니다. 그들은 자신이 실상인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물과 기본 양식이 없으면 실상이 사라지게 된다는 겁니다. 그들은 매일같이 주신 만나를 양식으로 보았습니다. 하지만 신명기 8:3에 보면, “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이스라엘 백성들은 매일같이 떡은 먹은 것이 아니라 ‘말씀’을 먹은 겁니다. 말씀에 비하면 본인들은 실상이 아니라 허상이었던 겁니다. 인간들은 예수님의 죽으심, 혹은 욥의 고난을 겨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할 수가 없는 겁니다. 말씀 속에서 예수님께서 죽어 마땅함을 자신의 처지와 연관지어 이해되어야 했습니다.
인간은 허상이면서 실상 노릇하는 것이 죄였던 겁니다. 이러한 경우는 요한복음 8장에서도 나옵니다.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바리새인들을 잡아와서는 예수님에게 어떤 조치를 취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본인들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시행한다고 자부했습니다. 그럴 때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죄없는 자가 돌로 쳐라”(요 8:7)
바리새인들의 집단적인 합의에 의해서, 율법을 대하는 자신들은 잘못이 없다고 자부하고 있었습니다. 곧 ‘율법을 아는 것=의’가 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뜻은 이것입니다. 율법의 완성 차원에서 율법을 보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 어느 누구도 죄없다 할 사람이 없다는 겁니다.
시편 71:1-2에서는 이 점을 보여줍니다. “여호와여 내가 주께 피하오니 나로 영영히 수치를 당케 마소서 주의 의로 나를 건지시며 나를 풀어주시며 주의 귀를 내게 기울이사 나를 구원하소서” 여기에서 신앙인은 자기 의를 포기합니다. 그것은 고난과 의가 모순없이 결합된 분이 등장했기 때문입니다. 그 분의 의만 의지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성도에게 있어 사는 것 자체가 고난인 것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
89강-욥기 27장 5~12절(욥과 바리새인)210627 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욥기 27장 5~12절입니다. 구약성경 786페이지입니다.
“나는 단정코 너희를 옳다 하지 아니하겠고 죽기 전에는 나의 순전함을 버리지 않을 것이라, 내가 내 의를 굳게 잡고 놓지 아니하리니 일평생 내 마음이 나를 책망치 아니하리라, 나의 대적은 악인같이 되고 일어나 나를 치는 자는 불의한 자같이 되기를 원하노라, 사곡한 자가 이익을 얻었으나 하나님이 그 영혼을 취하실 때는 무슨 소망이 있으랴, 환난이 그에게 임할 때 하나님이 어찌 그 부르짖음을 들으시랴, 그가 어찌 전능자를 기뻐하겠느냐 항상 하나님께 불러 아뢰겠느냐,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내가 너희에게 가르칠 것이요 전능자의 뜻을 내가 숨기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다 이것을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주 허탄한 사람이 되었는고”
욥이 곧 죽어도 자기 자신감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욥의 이 고집스러움을 보고 신약에 놓여 있는 우리 입장에서는 인간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는 로마서 3장에 나오는 그 말씀을 근거로 해서 욥을 지적할 수가 있습니다. 욥의 한계를 십자가로써 충분하게 그 한계를 나타낼 수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욥이 하는 이 이야기를 전적으로 외면할 수 없는 이유는 욥과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과 어떤 차이점이 발견됩니다.
예수님을 비난했던 바리새인. 그런데 욥도 하나님을 비난하지는 않았지만 자기 의를 주장하거든요. 그런데 바리새인들도 보게 되면 하나님만을 위해서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신봉하고 그 율법대로 그대로 살기를 원하죠. 그런데 주님께서는 바리새인들을 악마의 자식으로 규정지어 버리고 욥은 하나님 자기 사람이라고 욥 1장에 보면 나옵니다. 욥만큼 신앙 있는 사람을 보았느냐 하고 아주 욥을 대놓고 하늘나라에서 자랑을 해주십니다.
그런데 실제로 욥이 하는 이야기를 들어보게 되면 우리가 약간 혼선이 오고 혼란이 오죠. 하나님이 그렇게 자랑할 만한 그러한 마음가짐이 되어 있는지, 하나님은 아는데 우리 쪽에서는 모르는 그런 무엇이 아직 욥에게 남아있는지 우리는 헛갈리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본문을 통해서 욥과 바리새인의 공통점과 차이점에 대해서 말씀드리고자 하는 겁니다.
첫 번째, 욥과 바리새인의 결정적인 차이점은 하나님께서 욥을 개인적으로 사용하신다는 거예요. 오늘 읽었던 본문에 보게 되면 본문에 11절 보면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내가 너희에게 가르칠 것이요 전능자의 뜻을 내가 숨기지 아니하리라”라고 되어 있어요. 욥은 자기 자신을 아무리 검토하고 자기 신앙상태를 아무리 조사를 해봐도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특별히 선택되었다는 생각을 지울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과감하게 “내가 너희를 가르칠 테니까 너희들은 입 좀 다물어 줄래?”라고 나오는 겁니다. 그러니까 친구들이 “네가 무슨 자격으로 우리를 가르치려고 하느냐”라고 하면 욥은 준비된 것이 있어요. “너희들은 하나님이 주시는 고난이 없고 나에게는 하나님이 주시는 고난이 있으니까 고난받은 자의 우열성, 인간 지식의 한계를 넘어선 어떤 증후같은 거, 시그널, 이것을 우리 가운데 나만 받았고 너희들은 그게 없잖아”라고 하는 거예요. 없는 거예요.
이걸 일반화시키면, 어렵게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존재하는 것들은 존재하지 않는 것들에 의해서 다 지워진다. 우리 안에 있다고 하는 것들은, 있네, 있네, 있네, 이런 것들은 ‘어, 새로운 것이 등장했네. 이건 없는 건데’라고 하는 것, 그런데 그냥 없음으로 등장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작전은 그 없는 것이 있는 것을 싹쓰리 해버린다는 거예요. 그게 바로 전쟁입니다. 그게 바로 영적 전쟁이에요.
전쟁이라는 것은 “있는 것들과 한패 먹어라. 그러나 있는 것들의 없는 것들로 내가 너희들을 다 쳐부술 것이다”라는 것이 하나님 일의 특징입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신앙이 있고 믿음이 있고 소망이 있다면 그것은 없는 소망, 없는 믿음, 없는 사랑에 의해서 여러분이 치이게 될 거예요. 그거 괜히 내가 갖고 있다고 소지할 생각하지 마시고, 이것은 나에게서 생산되지 않은 것인데 주께서 그냥 주신 것이니 욥의 법칙에 의하면 주신다는 것은 그 주신 분이 언제든지 되가져갈 수 있는 권한은 주신 분에게 있다는 이 욥의 원칙, 욥기의 원칙을 여러분들이 생각하시길 바랍니다.
우리가 여기 있잖아요. 여기 있는 것들은 천국 갈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우리가 여기 있음을 없음으로 바꿔주시는 거예요. 그렇게 없음으로 바뀌게 하시는 그분만이 우리를 천국으로 데려가는 겁니다. 이걸 쉽게 말하면 내 것이 주의 것으로 바뀌지 않는 한 우리는 천국 가는 법은 없습니다. 내 것이 주의 것으로 바뀌어야 해요. 내 것이 그냥 내 것으로 밀어붙이는 것은 용납이 되지 않습니다.
지금 그 과도기에 내 것이 내 것이라고 하는데, 지금 내 것이 없어질 그 경계선에서 욥은 죽음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아예 이 땅에 오셔서 죽으셨고요. 예수님을 앞당겨 보여주는 욥은 지금 죽을라고 죽을라고 하는 그걸 보여주는 겁니다. 욥이 자기 죽는 것은 분명히 아버지 뜻인 것을 알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없음의 세계에 대해서 가르칠 수가 있는 겁니다.
예수님은 완전히 돌아가셨기 때문에 있음의 세계인 우리에 대해서 제대로 진리를 한 수 가르칠 수가 있습니다. 뭐 한 수만 가르쳐 주시겠어요. 다 가르쳐주실 수 있습니다. 방금 이야기한 것을 지금은 아주 쉽게 제가 말씀드렸다면 이번에는 이것을 아주 어렵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인간의 모든 언어적 개념은 그 실체를 가지지 못한다는 겁니다. 이게 어려워요.
인간이 갖고있는 모든 언어와 사물의 이름들은 그 실체를 이 땅에서는 찾을 수 없다는 겁니다. 없다고 할 수 있어요. 그게 왜 어려우냐 하면 신약 마태복음 13장에 보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우리가 아는 언어를 가지고 딱 맞추어서 지시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비유로 이야기해요. 내가 여기 있다가 비유가 된다는 겁니다. 이게 얼마나 어려운 말입니까.
사진 찍어도 내 모습 나오고 거울 봐도 내 모습이 나오는데 그게 허상이라는 거예요. 실상이 아니고. 인간이 갖고있는 모든 개념이나 언어는 이 실상을 찾아내지 못하는 한계를 갖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13장 16~17절에 보면 이런 말씀 나옵니다. “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많은 선지자와 의인이 너희 보는 것들을 보고자 하여도 보지 못하였고 너희 듣는 것들을 듣고자 하여도 듣지 못하였느니라”
인간의 눈과 인간의 귀에 대해서 인간들은 보고 듣는 것에 대해서 자신감을 갖고있습니다. 내가 보고 있으니까 거기 있고 내가 들리니까 거기 있다고 하는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네 귀와 네 눈의 기능은 실상은 보지 못하고 허상만 보는 그게 전부라는 거죠. 그래서 13~14절에 보면 “그러므로 내가 저희에게 비유로 말하기는 저희가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라는 이 말은 너희가 눈이 달렸느냐? 그러면 너는 못 봐. 귀가 있어? 그러면 너는 천국에 대해서 못 들어.
눈이 있음으로써 못 보고 귀가 있음으로써 들리지 못하게 만드는 세계, 이게 인간 쪽에서는 감춰진 세계고 주님 세계에서는 인간 쪽이 허구의 세계고 허상의 세계입니다. 그러니 욥이 자기 고난을 설명 못 하는 거예요. 왜냐 하면 욥은 자기가 느끼니까 실상이고 자기가 몸이 아프니까 고름이 나니까 이게 실상인 거예요. 그러나 창세기 보면 인간에게 나오는 그 고름과 아픔이라고 하는 것은 자아를 통한 하나의 후유증, 죄악의 후유증이에요.
우리 인간의 존재는 아담이 죄지은 그 후유증을 보여주는 하나의 증세같은 거, 시름시름 앓아가는 이 모습이 네가 정상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는 그러한 증후로써 우리가 이 땅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증후라는 것은 그 자체가 본질이 아니라는 뜻이에요. 무엇무엇의 징조라는 뜻이에요. 무엇무엇의 그림자라는 뜻이라고요. 그러나 그 무엇이 무엇무엇인지는 욥도 모르고 그 친구들도 몰라요.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욥이 실수하기를 뭐라고 하느냐 하면 여기 5~6절에 보면 “나는 단정코 너희를 옳다 하지 아니하겠고 죽기 전에는 나의 순전함을 버리지 않을 것이라, 내가 내 의를 굳게 잡고 놓지 아니하리니”에서 욥이 하는 말이 나는 나의 의가, 내가 여기 실상이고 내가 생각하는 것도 실상이고 나는 그래서 착한 일만 했고 나쁜 일은 하지 않았고 그래서 내 의가 여기 있다는 것은 실상이라고 생각했을 때 너는 그 의를 잘못 생각했다는 겁니다.
하나님 측면에서 신약 측면에서 너는 의가 뭔지를 모르는 거예요. 모를 땐 어떻게 한다? 수백 번 패턴이 있지요. 욥기 하면서 수백 번까지 했는지 모르겠지만, 모를 땐 이스라엘 역사로 돌아간다는 거죠. 욥의 의의 개념을 어디서 도출해야 하느냐 하면 하나님의 계약에서 도출해야 한다는 거예요. 하나님의 언약에서 와야 해요.
그런데 유일하게 하나님 언약에서 나온다는 말은 유일하게 인간과 하나님이 동행하는 민족이 있어요. 그 민족은 이스라엘 민족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에서 하나님의 의는 수정작업에 들어갑니다. 내가 의를 행할 수 있다는 이 의는 잘못된 의고 인간은 의를 추구하고자 하는 그 자체가 오히려 자기 담겨있는 죄가 줄줄이 사탕 소시지처럼 줄줄이 꿰여 나오는 죄의 연쇄 고리에 지나지 않는다는 거예요. 인간이라는 것이.
인간이 행동해서 자기 딴에 의를 만들었다고 하는데 꺼내 보니 죄의 창자예요. 존재의 고름, 선악과의 후유증, 그래서 너는 죽어 마땅함, 이런 것들이 막 나오는 거예요. 그들 이스라엘 백성은 율법을 지켰다고 했어요. 주님이, 그 지킨 것이 지킨 것이라고 생각 하느냐? 생각합니다. 그러면 그렇게 지켰다는 인간이 저 모세 선지자의 말을 왜 이해 못 하느냐. 백성이, 뭐요? 우리가 뭐가 잘못됐는데요?
주님이, 물이 없다고 너희들이 원망했잖아. 그러면 백성들이 물 없으니까 원망할 만하잖아요. 주님이, 그러니까 너희가 율례를 몰라. 그리고 양식 없다고 원망했잖아. 그러면 백성이 양식 없는데 원망할 만하지요. 양식 주는데 원망했습니까? 없는데 해야죠. 주님이, 그러니까 너 자신을 몰라. 나는 너를 키우는 것이 아니고 변화된 너를 키우는 거고 썩어가는 네 속에서 안 썩는 너를 생산하고 싶은 것이 하나님의 동행이에요.
그 안 썩는 하나님의 모습이 바로 동행하는 주님의 모습의 복사판이 되어야 해요. 재현되어야 한다는 말이죠. 주님은 광야에서 물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아, 너희가 뭘 먹었지?” 백성이 “만나를 먹었습니다” 주님이, “진짜 만나를 먹었느냐?” 백성이, “먹었습니다” 주님이, “그러니까 네가 망해도 싼 거야. 너는 하늘나라의 개념을 이해 못 해. 떡이라고 하는 것은 비유야” 백성이 “그럼 본 모습이 뭡니까?” 주님이, “말씀이야. 말씀”
매일 같이 말씀 먹으라고 매일같이 만나를 준 거예요. 그 말씀이 실체화된 것이 예수님의 살과 피였고. 요한복음 6장에서요. 제가 이런 이야기 하면 ‘안 가르쳐 주니까 몰랐잖아요’라고 하신다면 잘 가르침 받았던 바리새인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분노했지요. 분노. “아이고, 한 수 배웠습니다”라는 것이 아니고 잘 먹고, 잘 살라고 요한복음 6장에 보면 떡을 먹은 그 많은 제자들이 다 가버리고 ‘노바디(Nobody)~노바디(Nobody)~’ 아무도 없어요.
그 가운데 아무도 없습니다. 주님의 주특기는 자기 주변에 알아서 온 사람들 다 가게 만드는 것이 주특기예요. 여기서 욥의 잘못도 드러납니다. 요한복음 8장에서 간음하다 잡힌 여인이 왔을 때 그 바리새인과 욥의 공통점도 있고 차이점이 있는데 이번엔 공통점을 보면 바리새인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 “율법에 의하면 이 여자는 간음했기 때문에 죄를 지었습니다. 랍비여, 맞아요? 틀려요?”라고 하는 거죠. 추임새 약간 넣어서.
이 여인이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혔는데 예수님보고 “스승이라고 자처하는 자여, 이 여인이 간음한 거 맞아요? 틀려요? 일단 이거 묻고 그다음 넘어가겠습니다. 맞지요? 그다음, 성경에 보면 간음한 자는 돌로 치라 했습니다. 이게 성경에 있습니까, 없습니까?”라고 묻고 들어갑니다. 완전히 대정부질문 질의 하듯이. “맞아요? 틀려요? 있지요? 그러면 이 여자를 돌로 치겠습니다. 그러니까 예수 당신도 우리와 합세해서 율법을 지킨다면 이 여자에게 돌을 던지겠나이까, 안 던지겠나이까?”라는 식으로 묻는 겁니다.
논리적으로 빼도박도 못 하게 궁지에 몰아넣는 거예요. 빼도박도 못 하게. “이 여인은 간음했고 율법에는 간음한 자를 돌로 치라 했고 실제로 돌로 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 것이 분명하다면 그 하나님의 뜻에 예수 당신이 우리와 같이 동참할 거요? 말 거요?”라고 바리새인들이 이렇게 주장할 때 바리새인들은 자기 허점과 문제점을 모르고 있는 겁니다.
제가 광주강의에서 그런 이야기 했습니다. 인간들의 문제는 자기가 저주받아야 할 이유를 본인들이 못 찾고 있다는 것이다. 찾아내지를 못하고 있어요. 바리새인과 똑같은 거예요. 그런 점에서 욥도 사실은 바리새인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욥에게는 어떤 차이가 있느냐 하면 분명히 내 생각은 그게 맞고 옳은데 문제는 그럼 이질적인 고난이 이렇게 착하고 이렇게 말씀대로 하나님의 양심대로 바르게 사는 의로운 나에게 찾아온 고난과 의과 연결이 안 되네요.
자기에게 오는 고통은 죄인에게서 오는 고통이고 자기는 아무리 봐도 하자가 없고 이 둘이 연결이 안 되는 겁니다. 뭐를 경유 했어야 하는데 경유 하는 당사자가 욥에게 현재는 빠져있어요. 장차 여호와께서 찾아오지만. 지금은 뭔가 인간세계와 하늘나라 사이에 뭔가 중보자가 빠져있어요. 그런데 이스라엘은 중보자가 왔습니다. 그 당시 요한복음 8장에 왔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율법이라는 글자,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언어를 보는 것으로, 자기는 율법에 대해서 알 만큼 안 다고 생각하는데 율법은 예수님과 만나서 예수님 하시는 일과 결합 되지 않으면 율법은 완성된 모습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그래서 반드시 모든 성경해석은 예수님의 죽음을 경유 해서 해석이 되어야 해요. 예수님의 죽음 안에 누가 들어있느냐 하면 성경 쳐다보고 있는 우리들의 죽음이 담겨있다고요.
나의 죽음을 경유 해보세요. 어떤 죽은 자가 남을 정죄할 수 있는지요. 그래서 예수님이 뭐라고 했습니까.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 만약에 그 장소에 지독한 바리새인이 있다면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 할 때 입에 침 바르고 후다닥 신명기에 그 대목 있는지 찾을 거예요. 그 대목이 없어요.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하는 대목이 없다고요. 창세기 어디에 그 대목이 나오질 않아요.
인간들은 하나님께 농락당한 겁니다. 아까 욥의 자신감 봤지요? 나는 의가 있다. 사람이 여기서 멈추는 인간이 아니에요. 인간은 내가 있다고 하는 순간 나보다 의가 없는 자는 꿇어!가 돼요. 이게 인간입니다. 나는 의롭다가 되면 이건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타인과의 비교에서 그런 거예요. 다시 말해서 욥과 바리새인의 문제점은 뭐냐 하면 주님이 나를 보는 그 관점을 내가 지니고 있지 않다는 것이 문제점이에요.
주님이 나를 보는 관점이 나에게 없고 내가 보는 관점이 곧 주님의 관점이라고 주제넘게 너무 오버해버렸어요. 내가 옳다고 하면 아마 주님도 나에게 옳다고 할걸. 이렇게 일방적으로 생각해 버린 겁니다. 그런데 욥의 차이점은 집단적으로 바리새인은 고난이 안 왔고 욥에게는 개인적으로 사적으로 고난이 왔잖아요. 그러니까 욥은 어떤 자격이 있느냐 하면 고난에 서있는 입장에서 친구들을 가르칠 자격이 있음을 나중에 하나님 오셔서 본격적으로 이루어지는 겁니다.
욥이 친구에게 가르칠 수 있는 것은 자기 착한 일 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내 안에 진짜 하나님의 고난이 내 안에 들어와서 그 순간부터 나는 인간도 아니라는 사실, 그냥 한 줌의 재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재를 뒤집어쓰는 거예요. 그 뒤집어쓴 타고 남은 재가 재인지 내가 재인지 분간 안 되고 섞여버려야 할 정도로 나는 아무것도 아닌 겁니다.
하나님께서 욥에게 찾아와서 하는 말이 황무지에 비가 내리는 이유를 네가 아느냐고 하실 때 네가 뭐 좀 안다고 친구랑 멱살 쥐고 싸우는 것이나 알지 네가 황무지 찾아가 본 적이 있느냐. 그 황무지에 아무것도 없는데 단비가 왜 내리겠느냐. 아무것도 없는데 왜 너를 빼고 이야기할 줄 모르느냐. 모든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하는 일이거든요.
그래서 인간이 언어를 이야기한다는 것은 꼭 그 속에 누구를 집어넣느냐 하면 내가 의롭게 되기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 뭘 해석을 하고 무슨 일을 해요. 인간들은. 버릇이 아주 고약해요. 이게 죄지은 인간이 자기 본때를 그대로 보여주는 겁니다. 이걸 아는 것으로 내가 얼마나 선해집니까, 하나님이여? 이런 논리 고리를 우리는 못 버리고 있는 겁니다.
내가 이걸 가지고 이걸 알게 되면 얼마나 남보다 더 뛰어납니까. 그거 뛰어나서 뭐 할건데요? 높이 뛰기 선수 할 겁니까? 뭐 할 건데요. 도대체 인간은 자기가 왜 사는지를 몰라요. 왜 여기 있는지도 모르고. 하나님이 욥에게 고난을 주신 그다음 이유가 뭐냐 하면 하나님의 복음과 관련 없는 것은 다 빼라. 이걸 욥이 모르는 상태에서 이미 주께서 손을 대고 실시를 해버리신 거예요.
더하기가 아닙니다. 아까 기도할 때도 이야기 드렸는데 소유가 아니고 소모예요. 더하기 아니고 빼는 겁니다. 너의 것, 너를 잘나게 만드는 모든 요소는 다 빼는 겁니다. 신약에 와서 사도 바울이 그걸 하나님에게 혹독하게 그 과정을 겪습니다. 내가 바리새인중에 바리새인이고 의인중에 의인인데 내가 그걸 다 뺀다. 빼니까 뭐도 빼지느냐 하면 자기의 의도 빠져버렸어요.
의가 빠지니까 뭐가 바닥에 드러나느냐 하면 자기가 죄인중에 괴수인 것이 드러났습니다. 그럴 때 시편 71편이 비로소 적용됩니다. 1~2절 “여호와여 내가 주께 피하오니 나로 영영히 수치를 당케 마소서, 주의 의로 나를 건지시며 나를 풀어 주시며 주의 귀를 내게 기울이사 나를 구원하소서”
“주의 의로 나를 건지시며”라는 말은 내가 갖고 있던 내 의가 의가 아니고 반대로 주의 의를 가리게 만든 악한, 정말 독하게 악마 짓을 하게 만드는 장애물인 것을 아는 거예요. 그동안 인간은 왜 사느냐, 자기 잘난 맛에 살았습니다. 아직도 내가 안 죽을 만큼 대단한 존재이기 때문에 살았다는 거예요. 인간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욥에게는 고난이 왔거든요. 그러니까 나에 대해서 잊을 수 없고 고난은 낯설게 찾아왔고 그 갈등 속에서 욥은 분열이 일어나죠. 정신분열이 일어날 정도로 정신을 못 차립니다. 여러분들 중에 가려움증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한번 보세요. 어디에서도 긁어요. 자기 몸이 가려우니까 긁을 수밖에 없지요. 이게 우리의 행동입니다. 인간은 어디에서도 이 행동이 나의 의로움에 보탬이 될까 아니면 나를 수치스럽게 만들까. 그것에 기준 해서 자기 몸에 계속 손을 대는데 그것이 인간의 행위요 사고고 마음가짐이에요.
어떤 사람이 기도를 가르쳐주는데 아이가 “아빠 기도는 어떻게 해요?”라고 물으니까 “기도는 네 마음속에 하나님과 이야기하는 것을 그대로 바깥으로 드러내면 그게 기도이다”라고 해요. 이게 영화 대사에 나와요. 분노의 질주 최근 작품 마지막에 대사가 이거예요. 자기 아들에게 기도를 가르쳐 줄 때 네 마음속으로 생각하는 것을 그대로 끄집어내면 기도라고 할 때 복음적으로 봐서 무엇이 빠졌습니까? 메시아의 고난이 빠진 거예요.
메시아의 고난. 욥은 아직 거기까지 모릅니다. 내 순진함을 그대로 바깥에 드러냈어요. 마음속에 하나님과 대화하는 것을 끄집어내면 그 대화가 하나님께 통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 대화 속에는 이 고난이 설득력 있게 참여하지를 못합니다. 그렇다면 욥은 이스라엘 입장에서 뭐가 잘못되었는가. 여러분, 이스라엘 역사는요, 홍해가 갈라지고, 태양이 멈추고, 이 말은 대자연 세계가 이스라엘과 동행하는 하나님의 언약과 동반해서 움직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기도는 가뭄이나 산불을 멈추는 것이 아니에요. 만약 기도해서 산불 멈추면 소방관이 필요 없습니다. 그리고 소방서를 만들어도 아무 소방장비 없이 오직 기도의 일꾼들만 모아놓고 소방관이라고 하면 돼요. 기도 오래 하면 소방령 하면 되고. 이 자연 세계는 모든 것이 비유입니다. 주께서 가뭄이든 산불이든 태풍이든 바다든 어느 것 하나 이 세상 자체가 메시아의 고난으로 야기된 무너질 아파트같은 곳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는 거예요.
본인 무너지면 되는데 안 무너지려고 간절히 기도한다는 거예요. 안 무너지려고. 자기 자신이 안 무너지려고. 왜 안 무너집니까? 나의 의가 있으니까. 아니야, 아니야, 너의 의가 무너져야 십자가의 의, 하나님 의가 그때 보이고 그 의만이 하늘나라에서 영원히 수치를 당하지 않습니다. 시편 71편에서 그걸 이야기하는 거예요. “내가 주께 피하오니 더이상 수치를 당치 말게 하옵시고” 다시 말해서 지금 수치스럽다는 말이거든요. 하지만 “주의 의로 나를 건지소서”
인간에게 박해받던 그분의 옳음으로 나의 옳음을 무너뜨려 주시고 나의 옳다는 것이 죄로 드러나게 하옵소서. 그때 비로소 우리는 신약에 와서 예수님의 의만 자랑하게 될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간절한 기도가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기도에 의해서 우리 선악과 따먹은 허물 많은 우리가 무너지는 가운데서 그동안 살아왔던 모든 것이 주님의 의에 기초한 선물인 것을 이제는 놓치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