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뺀 삶
2021년 6월 13일 본문 말씀: 욥기 26:5- 14
(26:5) 음령들이 큰 물과 수족 밑에서 떠나니
(26:6) 하나님 앞에는 음부도 드러나며 멸망의 웅덩이도 가리움이 없음이니라
(26:7) 그는 북편 하늘을 허공에 펴시며 땅을 공간에 다시며
(26:8) 물을 빽빽한 구름에 싸시나 그 밑의 구름이 찢어지지 아니하느니라
(26:9) 그는 자기의 보좌 앞을 가리우시고 자기 구름으로 그 위에 펴시며
(26:10) 수면에 경계를 그으셨으되 빛과 어두움의 지경까지 한정을 세우셨느니라
(26:11) 그가 꾸짖으신즉 하늘 기둥이 떨며 놀라느니라
(26:12) 그는 권능으로 바다를 흉용케 하시며 지혜로 라합을 쳐서 파하시며
(26:13) 그 신으로 하늘을 단장하시고 손으로 날랜 뱀을 찌르시나니
(26:14) 이런 것은 그 행사의 시작점이요 우리가 그에게 대하여 들은 것도 심히 세미한 소리뿐이니라 그 큰 능력의 우뢰야 누가 능히 측량하랴
욥은 시간을 포기하고 단숨에 세상 돌아가는 것을 공간적으로 표현합니다. 즉 개인적으로 ‘나는 나중에 어떻게 될까’가 아니라 지금 하나님께서 이 확정적으로 구조잡힌 공간에서 무슨 일을 벌리고 계시는가가 중요하다는 겁니다. 이 공간에는 인간은 빠집니다. 구름을 기준으로 해서 이 공간은 하늘쪽과 땅쪽으로 구분됩니다.
다음에 나오는 경우를 생각해보시면 쉽습니다. “이 말씀을 마치시고 저희 보는 데서 올리워 가시니 구름이 저를 가리워 보이지 않게 하더라”(행 1:9) 즉 구름을 통해서 제자들은 더 이상 예수님으로 가신 공간에 더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이처럼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공간은 자연세계을 전적으로 ‘구름 아래’의 세계로 봅니다.
그리고 이 ‘구름 아래’의 세계는 완전히 하늘의 위세에 눌려 있습니다. 땅에서 행사하는 하늘의 힘은 악마의 힘입니다. 인간들은 인간 세계에 찾아든 악마의 힘을 이길 수가 없습니다. 요한계시록 12:7-9에 보면, “하늘에 전쟁이 있으니 미가엘과 그의 사자들이 용으로 더불어 싸울새 용과 그의 사자들도 싸우나
이기지 못하여 다시 하늘에서 저희의 있을 곳을 얻지 못한지라 큰 용이 내어 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단이라고도 하는 온 천하를 꾀는 자라 땅으로 내어 쫓기니 그의 사자들도 저와 함께 내어 쫓기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늘에서 일어난 분란으로 인해 애꿎은 땅에 있던 인간들이 심하게 시달리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인간들이 자기 인생을 해결하는데 있어 이 악마의 존재를 피해서 해결할 길이 없습니다. 차라리 자기 인생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것 자체를 포기하는 것이 낫습니다. 시도해봤자 줄기차게 악마에게 농락당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욥이 말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하나님이 악의 무리를 척결하시는 그 활동을 믿자는 겁니다.
사적인 내 인생을 내 손으로 개선하려고, 혹은 더욱 행복하려고 시도하지 말라는 겁니다. 땅의 모든 분야에서 악마의 영향력이 없는 곳이 없습니다. 따라서 악마를 찾아내고 처벌하는 것은 인간이 할 수 있는 바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연 자체를 흔들어버립니다. 악마가 더는 숨을 곳이 없게끔 말입니다.
그렇다면 악마의 특징은 무엇일까요? ‘높은 곳에 떨어진다’는 겁니다. 즉 높은 곳을 선호하고 그것을 탐내는 것이 악마의 특징입니다. 실제로 교회마다 노리는 것은 천국에 있다는 그 구원의 자리를 경쟁적으로 노리는 겁니다. 구원의 좌석 확보에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천국에 자기 자리를 잡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 기울립니다.
하지만 천국은 인간들이 우후죽순처럼 하늘을 향해 맹렬한 시도를 한다고 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악마가 떨어져나온 그 노선을 따라 심판 형식으로 추격하시는 그분이 오신 경로를 따라 하늘로 올라갈 수가 있습니다. 그 내용이 요한계시록 11장에 나옵니다. 거기에 두 증인이 등장합니다.
그들의 지상 운명은 다음과 같습니다. “저희가 그 증거를 마칠 때에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오는 짐승이 저희로 더불어 전쟁을 일으켜 저희를 이기고 저희를 죽일 터인즉 저희 시체가 큰 성 길에 있으리니 그 성은 영적으로 하면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니 곧 저희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니라”(계 11:7-8)
이들 두 증인들은 사적인 영달이나 편안한 삶을 기대하면서 산 사람이 아닙니다. 그들이 당한 바는 마치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서 당하셨던 삶을 되풀이하게 됩니다. 그들의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을 전파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외쳤던 그 복음의 내용대로 지상에서 이루어졌습니다.
그 길이 바로 십자가의 길입니다. 빌립보서 3:18에 ‘십자가의 원수’라는 말이 나옵니다. 그들이 이렇게 사는 자들입니다. “그렇다면 ‘십자가의 원수’가 아닌 자는 다음과 같이 삽니다. “저희의 마침은 멸망이요 저희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저희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빌 3:19)
반면에 십자가의 원수가 아닌 자는 다음과 같이 삽니다.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빕 3:20) 이처럼 요한계시록 에 나오는 두 증인의 끝은 하늘에서 땅으로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땅에서 하늘로 올라가는 삶입니다.
“하늘로부터 큰 음성이 있어 이리로 올라오라 함을 저희가 듣고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니 저희 원수들도 구경하더라”(계 11:12) 즉 성도는 땅에서 하늘로 올라가지만 마귀에 속한 자들은 하늘에서 도로 땅으로 처박히는 식의 삶이 됩니다.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너 열국을 엎은 자여 어찌 그리 땅에 찍혔는고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별 위에 나의 보좌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좌정하리라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 지극히 높은 자와 비기리라 하도다 그러나 이제 네가 음부 곧 구덩이의 맨 밑에 빠치우리로다”(사 14:12-15) 그러니까 성도는 이 땅에서 힘을 빼고 살아야 합니다.
오늘날의 자연과학적 입장에서 이 우주공간을 설명하게 되면 그 설명의 바탕은 꼭 다음과 같은 정신으로 작용합니다. “우리 인간들끼리 지혜를 모으고 힘을 모아서 오로지 인간들만의 안정적인 삶의 터전을 만들어보자”는 겁니다. 그러나 사무엘하 22장에 나오는 다윗의 예언에 의하면 이 세상은 벌써 심판주가 강림하여 세상의 왕인 악마 체포에 나서고 있습니다.
사무엘하 22:8-12에 보면, “이에 땅이 진동하고 떨며 하늘 기초가 요동하고 흔들렸으니 그의 진노를 인함이로다 그 코에서 연기가 오르고 입에서 불이 나와 사름이여 그 불에 숯이 피었도다 저가 또 하늘을 드리우고 강림하시니 그 발 아래는 어둑캄캄하도다 그룹을 타고 날으심이여 바람 날개 위에 나타나셨도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이미 이 세상을 흔들기에 나섰습니다. 악마를 체포해서 이 세상에서 더 낮은 지옥불에다 집어넣고자 하십니다. 따라서 성도는 이 세상에서 개인적으로 자기 미래나 계획에 몰두하는 삶이 되면 아니됩니다. 순교한 두 증인처럼 이 공간에서 일을 벌리시는 하나님의 계획에 전적으로 의지하면서 사적인 생각은 잊어야 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이 벌리시는 모든 것이 이 세상 심판을 전제하는 일임을 믿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87강-욥기 26장 5~14절(힘뺀 삶)210613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욥기 26장 5~14절입니다. 구약성경 786페이지입니다.
“음령들이 큰 물과 수족 밑에서 떠나니, 하나님 앞에는 음부도 드러나며 멸망의 웅덩이도 가리움이 없음이니라, 그는 북편 하늘을 허공에 펴시며 땅을 공간에 다시며, 물을 빽빽한 구름에 싸시나 그 밑의 구름이 찢어지지 아니하느니라, 그는 자기의 보좌 앞을 가리우시고 자기 구름으로 그 위에 펴시며, 수면에 경계를 그으셨으되 빛과 어두움의 지경까지 한정을 세우셨느니라, 그가 꾸짖으신즉 하늘 기둥이 떨며 놀라느니라, 그는 권능으로 바다를 흉용케 하시며 지혜로 라합을 쳐서 파하시며, 그 신으로 하늘을 단장하시고 손으로 날랜 뱀을 찌르시나니, 이런 것은 그 행사의 시작점이요 우리가 그에게 대하여 들은 것도 심히 세미한 소리뿐이니라 그 큰 능력의 우레야 누가 능히 측량하랴”
욥이 하나님의 능력을 받아서 예언하시는데 그 예언하는 모습이 미래에 될 일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시간을 이야기하는 것도 아니고 이미 확정된 공간 안에서 활동을 이야기합니다. 시간이라 하는 것은 점차 점차 나타나는 것이 아니고 그 확정된 공간 속에서 벌어지는 여러 가지 변화가 시간이라는 형태로 앞으로 전개될 것이라고 하는 겁니다.
욥이 보는 이러한 세상관은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오느냐 하면 너의 사적인 존재를 가지고 어느 특정 지점에 도달하는 것을 목표로 하나님 믿지 말라는 거예요. 사적이고 개인적인 공간을 위하여 주께서 공간을 만든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는 일단 인간을 빼버립니다. 인간을 빼버리면 음흉한 음령들이 남겠죠. 여기 라합 또는 날랜 뱀 같은 그런 것들과 그들을 상대하는 하나님. 하나님과 악마의 활동만 남습니다. 악한 천사들의 활동만 달랑 남아요.
그렇게 되면 그런 공간으로 이해하는 것이 왜 성도에게 필요하냐 하면 성도의 특징은 세상 사람들과 달라서 하나님은 일을 어떻게 하시는가에 관심이 있는 거예요.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내가 앞으로 무슨 좋은 일이 있겠는지에 관심 있는 것은 세상 나라입니다. 그렇게 관심사가 하나님은 일을 어떻게 하는 지이고 달리 말해서 하나님께서 어떤 공간을 갖춰놓고 그 안에서 일하시는지에 궁금해하는 것이 하나님께 관심 있는 건데 인간들은 지금 ‘내가 장차 무엇이 되겠습니까? 나는 천국 가겠습니까, 지옥 가겠습니까?’라고 나오는 거예요.
인간들이 자기 생각에 몰두하다 보니까 악마의 활동도 하나님의 활동도 없고 자기가 있는 이 공간에 대해서만 생각이 있고 전체 공간을 한 번에 보지 못하게 되는 겁니다. 마치 뭐와 같으냐 하면 회사로부터 과제를 한꺼번에 받고 재택근무하고 있는 어떤 회사 직원이 있다고 칩시다. 그 사람 집이 수풀로 가득한 어떤 물 흐르는 계곡에 있다고 칩시다. 그러나 그 사람은 자기 과제를 해야 월급이 나오기 때문에 거기에 매달리다 보니까 뭐가 안 들리냐 하면 계곡에 있는 물소리가 들리지 않는 거예요.
그런데 언제 물소리가 들리냐 하면 컴퓨터 고장 났을 때 정전되었을 때 ‘좔좔좔~짹짹짹~’물소리와 새소리가 들리는 거예요. 자기 생각에서 자기를 놔버릴 때 손을 놔 버릴 때 그때 뭐냐 하면 이 세상에 나를 위한 싸움은 없다는 겁니다. 나 잘되기 위한 전쟁도 없고 나를 위한 투쟁도 나에게는 필요치 않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미래라는 것도 없고 어떤 확정된 공간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변화는 하나님과 악마의 싸움에 의한 변화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이 교회에 와서도 욥과 같이 확정된 공간의 개념으로 보지 않고 자꾸 시간 생각하면서 나중에 몇 년 살다가 몇 년 뒤에 주님 재림하시고 몇 년 뒤에 천국이 오느냐 자꾸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어떤 집착에 빠져 있느냐 하면 천국이 있다는 그 구원의 자리를 치열하게 하염없이 노리고 있고 그 자리를 탐하고 있고 그 자리를 내 자리 만들기 위해서 모든 노력을 경주합니다.
물론 그 대표적인 것이 유대 사회죠.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보다 더 낫지 아니하면 천국에 못 간다는 이 말씀은 이미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하는 그들의 행동 하나하나가 ‘나 천국에 내 자리에 갈 거야’라는 그 하나의 집념 가지고 이 세상에 모든 자기의 행동과 태도를 조절하고 있었던 겁니다. 천국에 자기 자리 가겠다고. 그런데 오늘 본문같은 경우에는 이미 그게 없어요.
욥도 이미 자기 인생에 대해서 고난받으니까 곧 죽을 거라고 단정하고 있으니까 차라리 자기 자신에 대해서 포기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 나오는 이 본문을 보면서 이거는 하나의 공간, 현재 공간을 그냥 즉각적으로 여기에 뭐가 있고 여기는 뭐가 있고 이렇게 보면서 우리에게 사진을 찰칵 찍듯이 우리에게 그대로 보여주는 겁니다.
보여주면서 우리는 뭣과 비교하느냐 하면 현재 인간이 만드는 자연과학, 물리학, 생물학, 지질학, 화학, 그런 것들로 재구성된 자연의 변화 자연 세계와 비교를 한번 해 보시면 얼마나 차이가 나는지를 이 자연과학과 엄청나게 상관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 7절에 보면 “그는 북편 하늘을 허공에 펴시며 땅을 공간에 다시며, 물을 빽빽한 구름에 싸시나 그 밑의 구름이 찢어지지 아니하느니라”라고 되어있어요.
이 사실을, 욥은 지금 뭘 보고 무슨 이야기를 우리에게 전하려고 이런 식으로 우주를 표출하느냐고 궁금해하겠지요. 그 궁금증은 사도행전 1장에 보면 이 말씀 나오면서 욥의 말과 사도행전의 이 말씀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1장 9~11절 “이 말씀을 마치시고 저희 보는 데서 올리워 가시니 구름이 저를 가리워 보이지 않게 하더라, 올라가실 때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데 흰옷 입은 두 사람이 저희 곁에 서서, 가로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라고 되어있습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시는 대목입니다. 지금 예루살렘에 가면 예수님이 승천한 그곳에 예배당 지어놨어요. 승천 교회라고. 그 아무리 가서 찬양해봐야 그 흰옷 입은 두 사람 안 나옵니다. 그냥 상품이나 팔려는 팔레스타인이 흰옷 입고 장사하려고 나타나죠. 예수님께서 올라가시고 무엇으로 가리우느냐 하면 구름으로 가리운 거예요.
다시 욥기로 와서 구름이라는 이 사실은 인간들의 한계를 보여주기 위해서 존재하는 겁니다. 구름 위와 구름 아래쪽. 뭔가 하나님께서 감추고 싶으신 것은 구름 위로, 그 외에는 그 감추고 싶은 하나님의 계획에 근거해서 지상의 모든 변화가 일어나는데 하늘의 요소가 지상에 이미 와있다는 겁니다. 그게 바로 13절에 라합이고 날랜 뱀이에요. 악마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요한계시록 12장에 보면 그렇게 되어있어요. 뭔가 높이를 이야기하는 거예요. 지금 욥이 이야기하는 공간이라고 하는 것은 같은 지표면에서 지형적으로 여기서 몇 킬로냐, 우리가 있는 곳에서 몇천 킬로냐를 묻는 게 아니고 위와 아래만 가지고 공간을 설정하는 거예요. 위! 아래! 위위!아래! 그냥 위쪽과 아래쪽, 아래쪽은 위쪽의 원리에 의해서 철저하게 통제받고 지시받는다. 그래서 인간은 배제되는 겁니다.
원래 아래쪽은 인간들 사는 동네인데 요한계시록 12장 7절에 보게 되면 누가 도망을 왔어요. 요한계시록 12장 7~9절 “하늘에 전쟁이 있으니 미가엘과 그의 사자들이 용으로 더불어 싸울쌔 용과 그의 사자들도 싸우나, 이기지 못하여 다시 하늘에서 저희의 있을 곳을 얻지 못한지라, 큰 용이 내어 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단이라고도 하는 온 천하를 꾀는 자라 땅으로 내어 쫓기니 그의 사자들도 저와 함께 내어 쫓기니라”
이렇게 쫓긴다고 나와 있어요. 하늘의 구름 위에서 난 전쟁통에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진다고 전쟁통에 지상에 있는 사람들이 곤욕을 치르게 된 거예요. 이 지상에 있는 인간들이. 이것을 사진 찍듯이 찰칵 찍듯이 위!아래!위위!아래를 한꺼번에 다 보여주는 거예요. 지금 욥이요. 그렇게 보여줘서 우리에게 이익은 뭐냐. 사적으로 일어난 일은 아무것도 아니죠.
그러니까 뭐만 보면 되냐 하면 이게 오늘 설교 결론인데 미리 말씀드릴게요. 무엇이 떨어졌고 무엇이 올라갔는가. 단 그 두 가지만 아세요. 딱 두 가지만 아시면 되는 거예요. 누가 올라갔고 누가 내려왔는가.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그것만 아세요. 요한계시록 11장 12절 “하늘로부터 큰 음성이 있어 이리로 올라오라 함을 저희가 듣고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니 저희 원수들도 구경하더라”
이 사람은 이 세상에서 복음을 전하던 두 성도예요. 두 증인입니다. 이 땅의 증인은 하늘로 올라가고 하늘에 있던 용과 옛 뱀 또는 라합 또는 날랜 뱀은 원래 자리가 하늘이었는데 구멍을 뚫고 툭 하고 지상에 떨어지는 겁니다. 지금 오늘 본문은 높이를 이야기하는 겁니다. 높이. 지역의 면적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높이를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 높이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영적 세계의 비밀입니다.
영적 세계의 비밀은 높이로 설명하면 그게 끝이라는 겁니다. 네가 어디 가서 이민하든, 어디 가든, 러시아 가든, 북한 가든, 위로 올라가 수 있는 사람이냐를 우리에게 묻는 거예요. 위로 올라갈 사람이 있느냐. 그러면 어떻게 하면 됩니까? 물소리 들어야죠. 사적인 과제에 치이지 말고. 지금 이 세상에 있는 변화를 내 이익 중심으로 보지 마시고 나 빼고 세상을 보세요.
나 빼고 세상을 보게 되면 주님 일하시고 날랜 뱀, 용, 이것들이 인간들의 마음을 아주 혼란케 해서 난리도 아니죠. 제가 공부한 바에 의하면 이 세상에 모든 학문과 철학은 방향성을 갖고 있는데 그 방향성은 하나입니다. 인간들끼리 단결하자. 힘 모으자. 그 방향성이에요. 서로 싸우지 말고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리승만이 이야기한 그 사고방식 딱 그거 하나입니다.
지금 욥이 고난받고 있잖아요. 고난받는 것은 꼭 야곱과 마찬가지예요. 있는 힘마저도 다 빼게 하십니다. ‘있는 힘, 있는 지혜, 지식, 나는 선하고 의롭다, 악하다’하는 그거 주께서는 제발 네가 그거 신경 쓰지 말고 잊어버리라는 겁니다. 내가 어느 정도 대단하고 어느 정도로 착한 일 했고 얼마나 성실하냐는 이제 잊어버릴 때가 되지 않았느냐는 겁니다.
꼭 고난으로 얻어터져야 그것을 잊어버리느냐. 위!아래!위위!아래 왔다 갔다 하는 그 위아래만 생각하라는 겁니다. 빌립보서 3장에 보면 그런 말씀이 나와요. 십자가 원수에 대해서 빌립보서 3장에서 아주 단호하게 사도바울이 한마디로 이야기합니다. 십자가의 원수는 뭐냐? 3장 19~20절에 “저희의 마침은 멸망이요 저희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저희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빌립보서 3장에서 하늘에 있다는 말은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는 말이 아니고 너의 행한 것, 네가 이 땅에서 수고하고 애쓴 것을 생각하지 말라는 거예요. 십자가 원수가 안 되려면 그냥 십자가가 하신 일이 우리로 하여금 구름 타고 뜨게 만드는 거예요. 십자가의 능력이. 그러면 잊어야죠. 서른 되거든 스무 살 때까지는 잊어버리고 마흔 되거든 서른 때까지는 잊고 일흔 되시거든 예순 때까지는 잊고 여기에 아흔은 없으시지만 아흔 되시거든 다 잊어버리세요.
그리고 사람에게 기대를 거는데 사람에게는 기대 걸지 마세요. 왜냐 하면 사람들은 천국에 좋은 자리 자기 차지하려고 아주 치열한 경쟁자로 여기고 자리싸움을 벌이기 때문에 자리싸움 벌여서 애쓴다고 천국에 자리 주고 이런 하나님 아니십니다. 여기에 요한계시록 11장에 두 증인이 구름 타고 하늘 올라갈 때 그들이 이 지상에서 자기들의 힘을 모은 것이 아니에요. 단결한 것도 아닙니다.
그냥 힘 다 뺐어요. 힘 다 빼고 그리고 사람들에게 죽임을 당했습니다. “짐승들이 전쟁을 일으켜서 저희를 죽이고” 그러니까 예수님 죽였던 분이 안 풀려서 예수 믿는 사람을 지상에서 잡아 죽인 거예요. 그래서 그들의 시체가 큰길에 있고 아주 웃음거리가 되어있죠. 이 두 성도가. 요한계시록 11장 8절에 “저희 시체가 큰 성 길에 있으리니 그 성은 영적으로 하면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니 곧 저희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니라”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일을 어떻게 하시느냐 하면 위에 계신 분이 구름 아래 있는 지상에 악마가 쫓겨가는 것을 허락하시고 악마로 하여금 뭘 생산하도록 하시느냐 하면 주의 백성, 주님의 성도를 생산하게 만들도록 하나님께서 사탄을 잘 이용하신 거예요. 이 죽은 두 성도는 복음 하나만 생각하고 딴 거 아무것도 생각 안 한 거예요. 예수님이 뭔가를 하셨다. 끝! 그러니 자기 생각을 안 한 거죠.
이건 기존의 땅의 원리와 너무 안 맞기 때문에 땅에 사람들이 두 증인을 죽여버렸습니다. 땅에서 괴롭게 하고. 그 죽음을 보고 좋다고 서로 예물까지 교환한다고 요한계시록 11장 10절부터 쭉 나와요. 그리고 그들이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되었어요. 소위 말해서 어떤 구경거리냐 하면 우리 말을 듣지 않으면 땅의 말을 듣지 않으면 이런 처참한 꼴 나니까 각오하라는 식으로 한 겁니다. 그러나 그들이 놓친 게 있어요. 그것은 바로 두 증인이 구름 타고 예수님처럼 하늘로 올라간다는 그 사실을 놓쳐버린 겁니다.
그럼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목사님, 우리는 언제 하늘로 올라갑니까?”라고 묻겠죠. 뭐 1차 올라가고 2차 올라가고 백신 맞듯이 그렇게 올라가는가. 요한계시록에서는 그렇게 할 필요가 없어요. 왜냐 하면 거기에 144,000이라는 인을 가지고 박아버렸어요. 예수님의 도장을 그 이마에 찍어놓게 되면 그 도장은 어떤 경우라도 이게 주님이 찍었기 때문에 지워지질 않아요.
그렇다면 우리 육신의 껍데기가 어떻게 되든 간에 그것이 이 도장을 취소할 수가 없어요. 우리 육신에서 일어난 일을. 그래서 제가 이야기합니다. 여러분이 사적인 일을 그만 잊어버리세요. 주님이 나에게 뭘 했느냐가 이게 도장이 도장값을 하는 것이지 내가 나에게 잘하는 거, 그거 백날 해봐야 이건 갖다 버릴 쓰레기같은 것이라 그걸 미련 두고 쥐고 있으면 안 됩니다.
어떤 공군부대에 새로운 비행사가 들어왔습니다. 2차 세계대전 때입니다. 영국 비행부대인데 곧 독일 군중으로 출격을 해야 하니 얼마나 떨었겠습니까. 첫 출격을 앞두고. 그 상관이 불러요. “네가 첫 출격 앞두고 있는데 누구 생각하고 있느냐?”라고 물으니까 “어머님이 생각납니다. 기도해주는 어머님 생각합니다”라고 하니까 상관이 “어머님 생각하지 말고 아버지 생각해라”라고 말해요.
이게 뭔 뜻이냐 하면 “너의 아버지는 용감하게 죽었다”라는 말입니다. 네가 죽을 생각해야지 네가 살 생각하면 너는 아무 일도 못 해. 왜 이러한 조언이 먹히느냐 하면 이 땅이 예수님이 이미 죽었던 땅이에요. 예수님이 죽었던 땅이라는 말은 이 땅에서 살고자 하는 자들은 전부 다 천국을 넘보지 말라는 이야기예요. 이 땅에서 어찌어찌 살아볼까 생각하는 사람은 여전히 시간에 매인 사람이에요.
확정된 공간을 한꺼번에 볼 수 있는 사람이 아니고 내일 되면 내가 무엇이 되리. 맨날 자기 미래 생각하고 자기 앞일 걱정하고 있어요. 앞일 이루어 지면 걱정 없어집니까? 안 없어집니다. 없어지질 않아요. 여기서 욥이 생각했던 이 공간, 하늘과 땅, 하나님께서 땅에 쫓겨난 악마를 치신다고 이야기해드렸잖아요.
이걸 이스라엘로 옮겨 버리면 그 공간이 많은 내용으로 거기 채워집니다. 이스라엘 공간으로 한 것이 바로 다윗이 또 예언 받아서 사무엘하 22장에 보면 그 공간에 대해서 한꺼번에 이야기한 적이 있습니다. 사무엘하 22:8-12에 보면 “이에 땅이 진동하고 떨며 하늘 기초가 요동하고 흔들렸으니” 아까 욥이 본 것과 비슷하죠. “그의 진노를 인함이로다” 하나님의 분노하심, 더 구체적입니다.
그러니까 이 땅에 미련 두지 말라. 왜냐 하면 이 땅은 하나님의 저주와 진노와 심판이 결국에는 가득하게 어떤 피어오르는 연기처럼 계속 진노의 연기가, 무서운 연기가 계속 피어나오고 채워지고 있는 거예요. 이민 가는 것도 소용없습니다. 계속 어디를 가더라도 하나님의 진노가 오는 거예요. 특정 나라가 좋다는 그것도 소용없어요.
“그 코에서 연기가 오르고 입에서 불이 나와 사름이여 그 불에 숯이 피었도다, 저가 또 하늘을 드리우고 강림하시니 그 발아래는 어두캄캄하도다 그룹을 타고 날으심이여”라는 말은 천사를 비행기처럼 타고 구름 타듯이 천사를 타고 이 세상을 찾아오신다는 거예요. 이게 제가 아까 이야기한 남겨진 시간이 있는 것이 아니고 ‘찰칵!’하는 이 현상, 이 안에서, 확정된 공간 안에서 하나님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활동하시는가.
메시아가 심판하러 오셔서 천사를 자기 종으로 삼아서 싹쓰리, 자신의 심판과 저주를 이 땅에 기어이 해내신다고 되어있어요. 그 뒤에 여러 가지가 나오는데, 이 땅은 깜깜하고 흑암이 있고 14절에 보면 “하늘에서 뇌성이 발하시며” 15절에 “번개로 파하셨도다”라고 나오는데 오늘 욥기에서는 “우레 소리”로 되어있어요. 그리고 16절에 보면 “땅의 기초가 나타나고” 그리고 드디어 하나님의 원수를 체포하시는 겁니다.
뱀을 체포하시는 거예요. 악마를 체포하시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는 상관없어요. 우리가 뭘 열심히 하고 그런 데는 신경 쓰지 맙시다. ‘이거 뭐 이렇게 배짱부려도 되겠습니까?’라고 그렇게 이야기하는데 이 다윗의 이야기가 이사야 14장 12절에도 나와 있습니다.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그리니까 항상 높이를 이야기하고 수직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러면 주님께서 어떻게 오셨는가. 마귀가 떨어지는 그 코스를 밟아서 오셔가지고 그 코스대로 악마가 있는 곳에 정확하게 찾아가서 그것을 완전히 체포해서 무저갱이라는 더 낮은 곳에 땅보다 더 낮은 지하 음부에, 오늘 본문에 나온 지옥 음부에 집어넣고 가시면서 그냥 가시지 않고 자기의 택한 백성, 예수님의 택한 백성을 손잡고 그냥 데려가시는 그러한 과정을 하나의 공간에서 다 보여주시는 겁니다.
자, 그렇게 했으면 이제 마지막으로 우리는 어떻게 살면 됩니까. 시편 42편 1절에 보면 이 말씀이 이스라엘이 고난받을 때 나온 이야기예요.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시냇물을 찾음같이 찾나이다. 이것이 바로 이 땅에 성도가 주님 앞에서 어떤 자세로써 살아야 하는지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이 이야기가 시편 42편뿐만 아니고 시편 131편에도 나와 있습니다.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치 아니하고 내 눈이 높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일과 미치지 못할 기이한 일을 힘쓰지 아니하나이다, 실로 내가 내 심령으로 고요하고 평온케 하기를 젖뗀 아이가 그 어미 품에 있음같게 하였나니 내 중심이 젖뗀 아이와 같도다, 이스라엘아 지금부터 영원까지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어린아이로 돌아가는 거예요. 어린아이와 같지 아니하면 천국 못 간다 하니까. 어린아이처럼 아주 말씀으로 엄마가 주는 젖으로 만족하는 거예요. 만족하면서 그냥 여호와께서 하시는 일을, 주께서 하시는 일에서 나오는 젖을 그냥 먹는 겁니다. 그 여호와가 바로 예수님이잖아요. 낮에 이야기했던 것처럼 예수님의 살과 피. 마음을 교만치 말고 마음을 독자적으로 살지 마세요.
독자적으로 살지 말고 독립해서 살려고 하지 마세요. 그냥 엄마만 있으면 나는 족해. 그 여유로운 마음, 만족하는 마음, 그게 바로 세상을 이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그동안 세상 어떻게 보았습니까? 자꾸 장래에 계획 세우고, 스케줄 짜고, 그게 얼마나 부질없다는 사실을, 우리가 얼마나 자기 영혼을 괴롭게 한다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이제는 욥처럼, 다윗처럼, 한 컷에 모든 사정을 다 파악하게 해주시고 높이와 땅과 하늘에 일어난 일을 젖먹는 아이의 마음으로 복음을 아는 아이의 마음으로 넉넉한 마음으로 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