값 치른 생명
2021년 5월 30일 본문 말씀: 욥기 24:22-25
(24:22) 그러나 하나님이 그 권능으로 강한 자들을 보존시키시니 살기를 바라지 못할 자도 일어나는구나
(24:23) 하나님이 그들을 호위하사 평안케 하시나 그 눈은 그들의 길에 있구나
(24:24) 그들은 높아져도 잠시간에 없어지나니 낮아져서 범인처럼 제함을 당하고 곡식 이삭 같이 베임을 입느니라
(24:25) 가령 그렇지 않을지라도 능히 내 말을 거짓되다 지적하거나 내 말이 헛되다 변박할 자 누구랴
욥은 강자에 대한 세상적인 부러움과 그 의미를 존중하지 않으려 합니다. 이는 세상사람들의 염원과 희망이 강자에 벌써 담겨져 있어서 진정한 하나님의 뜻을 왜곡시킨다고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욥은 욥의 친구들을 설득할 수가 없습니다. 욥이 아무리 옳은 이야기를 쏟아내어봤자 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 정도는 우리도 안다”
따라서 여기서 욥의 고난의 취지를 달리 정립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운명’이 ‘개인의 본성’을 어떤 식으로 변경시키느냐 하는 겁니다. 욥의 고난은 운명입니다. 욥이 사전에 미리 예측하거나 요청한 것이 아닙니다. 일방적으로 하나님께서 집어넣어주신 겁니다. 여기서 욥은 반발합니다. “왜 하필이면 저에게?”
욥은 자기에게 찾아든 고난을 수긍할 수 없는 지식체계가 구비되어 있지 못합니다. 자신의 지식체계가 감당못하면 단순히 지식 체계가 깨어지는 것이 아니라 욥의 자아 전체가 혼란스러워지는 겁니다. 즉 무엇이 진리이고 무엇이 비진리인 지를 결정할 판단 기준 자체가 의심스럽게 되어버립니다.
욥의 친구들은 욥에게 찾아온 고난을 기존의 인간들이 이해하고 있는 지식체계로 충분히 설명할 수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 바탕에는 ‘별난 인간은 없다’입니다. 즉 “나보다 더 특별난 존재라고 대우받아야 될 가치있는 인간은 내가 용납 안 한다”주의입니다. 욥의 친구들은 욥에게 지기 싫은 겁니다.
그냥 상호 대단치 않다는 존재라는 선에서 마무리 짓자는 겁니다. 그러나 욥은 친구들의 의도를 압니다. 그들의 주장처럼 자신에게 찾아든 고난을 이해하고 싶지만 고난받고 당시자 입장에서 아무리해도 그건 아니라고 여겨지는 겁니다. 자신과 자신의 친구들도 해결못하는 난제로서 고난이 박혀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운명’을 어떻게 인간으로서 설명할 것이냐와 관련지어집니다. 인간들은 운명이 인간들에게 골고루 내려줄 정도로 평등하다고 여깁니다. 즉 너의 운명이나 나의 운명이나 다같은 운명의 질(質)을 지니고 있다고 믿고 싶어합니다. 어느 한쪽이 다른 사람의 운명보다 우월한 경우를 인간들은 생각조차 하기 싫어합니다.
욥도 일반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모든 인간들은 다같이 평범하고 평등하다고 외치고 싶어합니다. 결코 욥은 ‘나는 너보다 더 나은 운명자야’라고 하고 싶지를 않는 겁니다. 하지만 다른 인간들이 욥을 닦달한다고 해서 욥이 자신의 고난을 순순히 이해하지를 못합니다. 그것은 기존 자아상에 운명이 찾아온 것이 아니라 운명이 욥의 기존의 인간상을 바꾸어주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바뀔 것인지에 대해서 욥이 알 길이 없어 답답합니다. 이 답답함은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 풀립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친히 함께 동행하시기 때문입니다. 욥의 친구 입장에서 욥의 그들의 우정 공동체에 말썽꾸러기로 작동한다고 불평하지만 욥은 그러고 싶어서 그들의 의견에 반대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또한 이질적인 운명의 여파입니다.
동일한 경우게 이스라엘에게도 있고 오늘날 우리에게도 얼마든지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민수기 16:1-3에 보면, “레위의 증손 고핫의 손자 이스할의 아들 고라와 르우벤 자손 엘리압의 아들 다단과 아비람과 벨렛의 아들 온이 당을 짓고 이스라엘 자손 총회에서 택함을 받은 자 곧 회중 가운데에서 이름 있는 지휘관 이백오십 명과 함께 일어나서 모세를 거스르니라
그들이 모여서 모세와 아론을 거슬러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분수에 지나도다 회중이 다 각각 거룩하고 여호와께서도 그들 중에 계시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총회 위에 스스로 높이느냐” 욥의 친구나 오늘날 민주주의를 주창하는 정치인으로 봤을 때, 고라 자손의 주장은 참으로 하자없는 주장처럼 들릴 겁니다.
즉 고라 자신이 주장은 이러합니다. 모세와 아론은 하나님께 돌릴 영광을 일부 그들이 지도자 자격으로 누리므로서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 간의 평등을 깬다고 보고 있는 겁니다. 대단히 하나님만 높이는 것처럼 들릴 것입니다. 특별난 능력자가 없고 하나님만이 모든 능력을 갖고 계시다는 생각이 올바른 믿음처럼 오인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모세와 하나님 사이에 어떤 한지를 모릅니다. 모세가 이해하는 하나님과 일반인들이 이해하는 하나님이 상호 다릅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영광을 본 사람입니다. 이는 곧 자신이 얼마나 하찮은 죄인인가를 아는 것을 의미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자기 이해는 자신을 천하의 몸쓸 사람으로 보지를 않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솝 이야기와 같습니다. ‘여우와 두루미’ 이야기에서 간사한 여우가 두루미에게 한턱을 내겠다면서 접시에다 스프를 담아냅니다. 그리고서 자신만 맛있게 음식을 먹습니다. 골탕을 당한 두루미는 반대로 여우에게 자기쪽으로 음식을 내겠다고 합니다. 음식을 주둥이가 긴 항아리에 담아 냅니다.
이처럼 인간들의 삶이 비록 형편 따라 다 다르지만 결국은 사람 사는 것은 동일하니 이 세상은 평등하다는 것이 맞다는 논리를 펼칩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역사에서 모세는 일반인들과 다릅니다. 모세와 아론은, 자진해서 온유해질 수밖에 없는 분을 만났습니다. 인간들 끼리의 평둥 주장이 참으로 자기 주제를 모르고 하는 인 것을 모세와 아론은 압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피를 생각할 때, ‘값없이 주신 은혜’로 이해합니다. 하지만 진정 값이 없어 값는 은혜가 아니라 누가 그 엄청난 값을 대신 치러주셨기에 값없는 은혜입니다. 아무리 빵집에서 새로 갓 만들어진 빵이 엄청나게 진열되어 있더라도, 그리고 우리 자신이 배고프더라도 어디까지나 주인입장에서는 돈을 내고 먹어야 합니다.
우리의 사정이 딱해서 주인이 그저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대신 값을 치른 분의 가치를 위하여 우리에게 거저 주신 은혜가 찾아온 겁니다. 평등이 아니라 특혜입니다. 이 특혜의 특징은 인간들이라면 감히 자기 앞에 붙일 수 없는 것이 붙는 것을 용납되어야 하는 특혜입니다. 그것이 바로 ‘불의한 나’입니다.
누가복음 16장에는 ‘불의한 청자기’ 이야기가 나오고 누가복음 16:9에는 이런 말씀도 나옵니다.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불의한 정지기는 남의 돈을 자기 돈처럼 마구 써버린 자입니다. 착해서요? 아니요. 퇴직 때까지 자기 잘남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 아닙니다. 그저 불의하기에 불의하게 행동하는 겁니다.
즉 이 사람은 자기 앞에 ‘불의한 존재’가 붙는 것을 기꺼이 용납하는 자입니다. 바로 이런 점을 여전히 욥과 친구들은 모르고 있습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너무나도 큰 희생을 치뤘기에 그 큰 희생 앞에서 우리는 아뭇 소리말고 그저 감사만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85강-욥기 24장 22~25절(값치른 생명)210530 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욥기 24장 22~25절입니다. 구약성경 785페이지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 권능으로 강한 자들을 보존시키시니 살기를 바라지 못할 자도 일어나는구나, 하나님이 그들을 호위하사 평안케 하시나 그 눈은 그들의 길에 있구나, 그들은 높아져도 잠시간에 없어지나니 낮아져서 범인처럼 제함을 당하고 곡식 이삭같이 베임을 입느니라, 가령 그렇지 않을찌라도 능히 내 말을 거짓되다 지적하거나 내 말이 헛되다 변박할 자 누구랴” 지금 욥이 이런 이야기하는 것은 친구들 앞에서 하는 이야기입니다. 따라서 욥의 입장을 이해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이 말을 듣는 욥 친구들의 입장에 우리가 서 있다고 해봅시다. 욥 친구들의 입장이라면 왜 이런 말이 기분 나쁘게 들릴 수밖에 없을까요. 이것을 우리가 파악해 내야 이 본문이 이해가 되는 겁니다. 욥의 친구들 입장과 욥의 입장의 차이에서 어떤 점을 욥의 친구가 자꾸 오해하느냐 하면 욥 친구들은 욥과 우리가 친구란 말이죠. 친구는 곧 평범이고 평등이죠. 그런데 욥의 하는 이야기가 족족 뭐로 들리냐 하면 ‘나는 너보다 똑똑하고 나는 하나님에 대해서 알고 너희는 하나님을 모른다’라고 이야기하는 것처럼 자꾸만 들리는 겁니다. 욥은 친구보다 내가 더 낫다고 교만 떨고 싶어서가 아니라 자꾸 욥의 친구들이 그걸 부추겨요. 욥은 뭐가 답답하냐 하면 같다고 생각했는데 갈수록 점점 달라지는 겁니다. 갈 길이 서로 다른 겁니다. 그래서 욥은 솔직하게 이야기합니다. “너희들의 가는 길과 나의 길이 다르다”라고 이야기하니까 욥의 친구들이 “너 언제부터 그렇게 시건방졌느냐”라고 대꾸하는 거예요. 이 둘 사이에 옛날 평등한 사이로 돌아갈 여지가 완전히 와해 되었습니다. 이제는 막가자는 이야기죠. 아무 말이나 막 내뱉는 겁니다. 이러한 욥과 욥 친구의 논쟁 속에서 우리가 처해있는 이 환경을 다시 한번 정리할 수있는 기회가 되길 바랍니다. 이 평등이라는 거, ‘인간은 똑같다. 사람 별거 없어. 그쪽이나 이쪽이나 사람이 밥 먹고 사는 것은 마찬가지고 인생이 뭐 있겠어. 그렇고 그런 거지. 유별난 인생은 없다’라는 식으로 우리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특출난 사람이 있다면 그건 잠시 부자고 잠시 잘나고 똑똑하고 강해 보이는 거죠. 그것이 22절에 나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 권능으로 강한 자들을 보존시키시니 살기를 바라지 못할 자도 일어나는구나, 하나님이 그들을 호위하사 평안케 하시나 그 눈은 그들의 길에 있구나”라는 이 말은 뭐냐 하면 너희들 보기에 부러움을 살만한 위대한 영웅들이 나타나지만, 권능 있는 자로 대우를 받지만, 하나님께서는 끝까지 그들의 앞길을 주목하는데, 주목해 보니까 그들은 위대한 자도 아니고 대단한 자도 아니고 보통사람인데 그것이 어떠냐 하면 “곡식 이삭같이 베임을 입느니라”라고 욥은 지금 이 세상에 잘난 사람들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이야기했거든요. 하니까 욥의 친구가 뭘로 들었느냐 하면 그걸 ‘네가 잘난 사람을 그렇게 깨부수는데 그러면 너는 잘난 사람보다 더 잘났나’라는 식으로 이렇게 반발하고 싶은 거예요. 욥의 친구와 욥 사이에 도대체 뭐가 문제인지를 우리가 찾아내지 아니하면 우리는 지금 말장난 속에 시간만 낭비하는 게 되는 겁니다. 1648년 베스트팔렌조약이 국가와 국가 최초의 조약입니다. 그것은 평등 조약이에요. 어떤 조약이냐 하면 스페인이라는 구교 국가와 네덜란드라는 신교도, 루터교인 개신교를 믿는 나라 사이에는 서로의 주권이 동등하다는 이야기를 한 겁니다. 이것은 얼마나 힘이 세냐, 얼마나 인구가 많으냐, 경제력이 대단하냐, 군사력이 대단하냐, 이런 것은 일체 상대방에게 서로 종속된 나라라고 생각하지 않기를 조약 맺은 최초의 나라입니다. 동등한 주권. 베스트팔렌이라는 곳이 지금의 벨기에 지역 거기쯤 되는데요. 그런데 이 평등이 나중에 전쟁하면서 다 깨집니다. 생각해 보세요. 평등한데 평등하다고 생각하고 나중에 평등이 깨지는 것을 전쟁이라고 한다면 우리가 욥의 입장을 이해하려면 이렇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개입한 자는 절대로 평등하도록 방치하지 않습니다. 평등한 존재로. 우리는 평등 하고 싶어요. 유별나기 싫어요.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유난 떨게 만들어요. 개코도 없으면서 유난 떨게 만든다고요. 인간세계는 별난 인간 없다고 자꾸 평등을 강조합니다. 인간은 각자 사는 조건들이 다 다르기 때문에 이쪽의 약점이 저쪽에 장점이고 저쪽에 장점이 이쪽에는 약점이 되기 때문에 빼고 더하기 하면 인간은 똑같다고 보는 것이 그게 인간들이 이 세상에서 정서적으로 안정되게 사는 유일한 방법이에요. 남을 해석한다는 것은 내 정서가 안 다치고 싶고 내 정서가 흔들리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어떤 안정된 정치를 원하는 겁니다. 이준석처럼. 보다 쪽수가 많고 힘 많은 쪽이, 일등 하는 쪽이 나라를 맡자는 민주주의 방법이요, 다수결의 원리가 진리가 되는 원칙, 이게 바로 욥 친구들의 세계입니다. 같을 수가 없죠. 차이 납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인간의 사고방식이 잘 나타난 것이 이솝우화에 보면 있어요. 여우와 두루미라는 이야기가 있는데 여우가 아주 간사하죠. 이 간사한 여우가 한 턱 내겠다고 두루미를 초청해서 한 턱 내는 건지 약 올리는 건지 모르겠는데 수프를 만들어서 납작한 접시에다가 줍니다. 여우는 좋다고 접시에 있는 것을 맛있게 핥아 먹죠. 두루미는 긴 부리 가지고 콕콕 찍다가 볼일 다 봤어요. 거기에서 이솝이 하는 이야기가 내 쪽의 조건은 타인에게 그대로 적용할 수 없다. 그래서 불평등한 것이 아니고 그래서 평등하다는 겁니다. 이솝이야기는. 그러고 나서 이번에는 두루미가 여우를 초청합니다. 전에 너무 맛있는 음식을 줘서 내가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서 자기도 한 턱 내겠다고 하죠. 여우가 좀 미안하기 하지만 초빙에 응했죠. 이번에는 수프를 담아주는데 호리병처럼 주둥이가 긴 그릇에 담아줬단 말이죠. 두루미는 좋다고 쪽쪽 빨아먹었죠. 입을 빨대처럼 사용해서. 그런데 여우는 그릇 주둥이만 핥다가 볼일 다 보고 왔어요. 이게 바로 어떤 인간도 내 조건에 내가 맞다고 해서 타인보다 우세하거나 우열하다고 생각하지 말라는 거죠. 인간은 평등하고 그렇고 그런 존재뿐이라는 겁니다. 이게 바로 인간세계에서 이것이 하나의 교훈으로 가르치는 겁니다. 남을 지배하지 말고 학대하지 말고 사람을 존대하고 공통적이다. 이 정도는 욥도 알고 욥 친구들도 아는데, 문제는 하나님이 개입해버린 겁니다. 하나님이 개입해버리면 뭐가 깨지느냐 하면 현실 자체가 깨져버립니다. 평등이라는 현실 자체가 깨지면서 접시 위에 사람이 있다면 접시가 깨지면 그 위에 있는 사람들도 다 와장창 다 깨지는 거예요. 이것은 뭐냐 하면 운명이라는 불평등입니다. 여러분들이 오늘 아셔야 할 것은 운명의 불평등성입니다. 이것만 알면 됩니다. 내가 예수 믿는 것은 내 뜻이 아니야. 그럼 네 뜻도 아닌데 어떻게 예수를 믿게 되었는가. 이게 주님이 조성하신 불평등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우리가 그 불평등이 나라는 본성을 어떻게 변화시키느냐는 그 점에 대해서는 욥도 모르고 욥의 친구도 모릅니다. 지금 욥 안에서는 그걸 해결할 길이 없어요. 그러면 그건 어디서 해결하느냐. 이것은 바로 이스라엘 역사에서 해결하는 겁니다. 욥의 설교를 계속하면서 하나의 패턴이 있어요. 그건 뭐냐 하면 욥이 지닌 모습은 오늘날 우리의 일반적인 삶에 보통 삶에 모습을 보여주는 동시에 그게 한계다. 그런데 그게 한계면서 여기서 이상한 징후가 등장하는 겁니다. 내가 알고 있는 하나님, 내가 알고 있는 인간, 내가 알고 있는 세상, 이 모든 세상에 하나님이 개입하면 이게 찢어지고 깨어지고 균열이 일어나는 거예요. 균열이 일어났으면 균열 그 자체로써는 욥은 해결책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 욥기가 바로 구약성경에 들어있거든요. 이스라엘 역사와 나란히 같이 들어있다는 말이죠. 그렇다면 이스라엘 역사에 나타나지 않는 해답은 욥에서 풀 수 있고 욥의 해답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찾을 수 있는 겁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역사는 이 문제를 이 불평등을 어떻게 해소하는가. 오늘 본문 욥에 나오는 이러한 다툼이 똑같이 그게 이스라엘 역사에서도 그대로 나타납니다. 민수기 16장 1~3절에 보면 오후 예배라서 찾아보시라는 말하기가 싫어요. 안 그래도 피곤하신데 여러분에게 고충을 더하고 싶지 않습니다. “레위의 증손 고핫의 손자 이스할의 아들 고라와 르우벤 자손” 보세요. 벌써 모르는 이름이 계속 나오잖아요. “르우벤 자손 엘리압의 아들 다단과 아비람과 벨렛의 아들 온이 당을 짓고”라고 여기 당을 짓는다고 나오죠. “파당을 짓고 이스라엘 자손 총회에 택함을 받은 자 곧 회중에 유명한 어떤 족장 이백오십 인과 함께 일어나서 모세를 거스리니라, 그들이 모여서 모세와 아론을 거스려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분수에 지나도다 회중이 다 각각 거룩하고 여호와께서도 그들 중에 계시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총회 위에 스스로 높이느뇨”라고 나오는 겁니다. 오늘날 욥과 너무나 유사한 모습이 벌어졌죠. 쉽게 말해서 고라 자손이 당을 짓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우리가 출애굽 할 때 대장 없이 나왔다. 우리의 믿음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끌어냈기 때문에 대장질 그만해라”라고 하는 거예요. 욥에서 친구들 있는데 욥에게만 하나님께서 특별한 계시를 주었어요. 고난을 주었단 말이죠. 그 고난에 대해서 누구도 해명 못 하고요. 욥 본인도 해명을 못 하고요. 그렇게 할 때 고난의 입장에서 내가 지금까지 알고 있던 하나님과 다르다고 하니까 욥의 친구들이 “너 그렇게 유난 떨지 마. 너나 나나 똑같아. 고난받았다고 우리가 모르는 계시를 더 알 수 있을 것 같아? 몰라”라고 이렇게 다툼이 계속되거든요. 마찬가지로 민수기 16장도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끌어 줬는데 모세 네가 이끌어 줬냐?’라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문제죠. 십자가 지신 주님께서 우리를 용서했는데 네가 뭔데 네가 돛대 짓 하느냐? 이 말이 갑자기 정당화되는 것처럼 느껴지지 않습니까? 그래서 목사도 필요 없고 장로도 필요 없고 집사도 필요 없고 나는 집에서 동영상이나 볼 거라는 이것이 얼마나 정당화될 수 있겠습니까. 고라 자손이 모르는 것이 있습니다. 뭐를 이 사람들이 모르느냐면 제가 쉬운 예를 들겠습니다. 어떤 빵집 가게아저씨가 빵을 많이 만들어서 가게에다 진열했어요. 학교 앞에 새 빵 냄새가 피어나오니까 아이들이 학교 마치고 우르르 빵집에 와서 “야, 빵이다. 나는 이거 먹을래. 나는 이거 먹을래”라고 할 때 주인이 “스톱! 돈 내고 먹어야지”라고 했어요. 돈 내고. 지금 사람들이 교회만 쳐다보고 “목사 네가 최고야? 장로 네가 뭔데?”라고 될 때 뭐를 모르느냐 하면 우리가 값없이 은혜를 받았는데 사실은 그 값없이 가 값이 있어요. 값이 있는 겁니다. 빵을 먹을 때 돈 내고 먹어야 해요. 주님께서 우리에게 영생을 줬으면 이걸 돈 내고 받아야 하는데 그 돈을 다른 분이 치른 것이지 값이 없는 것이 아니에요. 값이 있어도 너무 귀한 값이죠. 성도의 자유라는 것은 값을 치렀다는 것과 중심이 되어야지 어떤 존재를 걸고 시비 걸면 안 됩니다. “네가 뭔데?”라고 이렇게 나오면 안 돼요. 값있음에 대해서 피 흘림 있음에 대해서 목사가 또는 목사의 존재가 그것을 가린다면 그것은 천하의 이준석이라도 작살 내야 합니다. 누가복음 16장에 보면 구원받은 사람의 모델을 이야기하는데 그 본보기가 불의한 청지기라는 사람이에요. 회계장부를 맡아놓고 그 불의한 청지기가 뭘 하느냐 하면 남의 돈을 내 돈같이 쓰는 사람이 불의한 청지기예요. 자기 돈 아니에요. 회사의 돈이에요. 회사의 돈을 자기 돈처럼 쓰고 있는 배짱을 보이는 겁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것을 가지고 착한 청지기가 아니고 부지런한 청지기가 아니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불의한 청지기예요. 그러니까 주님께서 내가 너희에게 불의함이라는 단서를 달 때 그걸 네가 용납하게 되면 그게 성도가 되는 거예요. “이 천하의 죄인아, 막 먹어라, 생명수”라고 하시는 거예요. “이 천하의 나쁜 놈, 뻔뻔스러운 인간아, 천국 오너라”라고 되는 거예요. 앞에 불의함을 다는 거예요. 그런데 고라 자손이나 욥의 친구나 욥도 마찬가지고 앞에 뭐를 못 붙이느냐 하면 자력으로는 그 나는 모든 것이 거짓되고 엉터리고 사기고 죄인이라는 사실을 자기 앞에 커다랗게 붙이지를 못하는 거예요. 부산의 야구팀이 있는데 이름이 롯데 자이언트죠. 그래서 부산 은행에서는 롯데 자이언트가 가을 야구에서 다시 5등 안에 들면 이자를 높여주는 그런 상품을 부산 은행에서 개발해서 내놓았습니다. 희망 없습니다. 뭐, 야구를 잘해야죠. 그러면 진정 롯데 자이언트를 응원하는 사람은 “이겨라. 힘내라. 가을에도 야구 잘하자. 우승까지 내다보자. 파이팅!” 이런 거 하지 말고 “만년 꼴찌 롯데 자이언트!”라고 이걸 붙여야 해요. “만년 꼴찌, 야구 해도 소용없는, 그냥 시간만 낭비하고, 중계료만 낭비하고, 선수들 월급만 축내는 롯데 자이언트, 힘내라!”라고 이렇게 이야기해야 해요. 이게 불의한 청지기입니다. 내가 인생 살면 살수록 왜 값을 치를 수 없는 존재인지를 날이 갈수록 더 크게 확산시키는 거, 이게 복음을 아는 사람이죠. 욥은 아직 그걸 모릅니다. 앞에 내가 불의하다가 안 돼요. 욥이 욕설하는 그 나쁜 놈이, 악인, 그게 본인인 줄을 모르는 거예요. 이삭같이 베어진다고 할 때 그 이삭이 본인인 것을 모르는 거예요. 세상에 대해서 이 욥의 세상, 이게 오늘날 우리 세상이거든요. 욥의 세상에 대해서 날마다 우리는 날카롭게 이스라엘과 대비해봐야 합니다. 아까 이야기했던 민수기로 다시 돌아가서 마저 이야기하게 되면 그렇게 모세에게 대들다가 다 죽었어요. 고라 자손들 250명 다 죽었습니다. 주님께서 조폭같이 그들을 죽은 것도 아니고 산 채로 파묻었어요. 그러니까 욥에게 대드는 것은 자기를 파묻을 삽을 자기가 들고 있다고 보면 되는 겁니다. 모세가 잘난 것이 아니고 모세는 하나님 앞에서 자기가 얼마나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인 것을 아는 겁니다. 더 어렵게 말씀드려서 고라 자손은 현실을 바라보고 모세는 꿈같이 현실을 해석하는 거예요. 이게 꿈이라는 거예요. 현실에서 아무리 해도 알 수 없는 꿈같은 현실 속에 모세는 지금 보내고 있습니다. 오늘날 성도도 마찬가지예요. 어떤 청년이 대학교 2학년인데 이병 입대통지서를 받았어요. 입대하라는 통지서를 받아 보니까 내일모레, 그러니까 월요일 같으면 수요일에 논산훈련소로 머리 깎고 들어가는 통지서를 받았어요. 그런데 그걸 모르는 친구들이 이번 주말 토요일에 캠핑가자고 연락이 왔습니다. 이 기분은 군에 가본 남자들은 다 알아요. 방위는 잘 몰라요. 들어갔다 나왔다 하는 사람은 잘 모르는데 현역으로 간 사람은 다 알아요. 차라리 이병 입대통지서가 안 왔으면 캠핑 즐겁게 준비할 수 있을 것이고 만약에 이병 입대통지서가 오더라도 캠핑 가자는 이야기가 없었으면 갈 수 있는데 갑자기 이병 입대통지서도 받고 이번 주말에 여자랑 소개팅 겸해서 기타치고 캠핑가는 자기의 소원이었던 그런 소식이 들어오는 순간 가장 나쁜 소식과 가장 좋은 소식이 함께 있을 때 그 청년은 무엇이 깨지는 순간이냐 하면 내가 알던 현실이 한계가 있다는 사실에 깨지는 거예요. 현실에 한계가 있는 거예요. 왜냐 하면 청년은 누구의 말을 안 듣거든요. 부모 말도 안 듣고 자기 멋대로 놀러 가면 놀러 가고 공부하면 공부하고 자기 맘대로 사는데 왜 일평생 스무 살 때까지 마음대로 산 내 마음을 이병 입대통지서가 뭐길래, 이등병 그 이병열차가 뭐길래, 그게 뭐라고 그게 허구고 이념인데 그게 나로 하여금 주말에 캠핑 간다는 소식이 오늘따라 왜 너무 아프게 들리는지. 가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은데 뭐가 못 가게 만들어요. 그때 이렇게 말합니다. 이게 꿈이었으면 좋겠다. 실제로 암에 걸려서 병원에 입원해서 누워계신 분이 꿈에 자기가 멀쩡하게 돌아다니는 거예요. 차라리 그런 꿈을 안 꾸었으면 좋았는데 아침에 깨보니까 이제 두 달 남았다는 통보를 받아요. 욥은 그 현실보다 더욱 현실보다 더더욱 현실보다 더 센 현실을 욥이 만난 겁니다. 내 마음대로 하고 나는 잘났다고 나는 하나님을 전한다고 나는 신학 도사라고 나는 바르게 살았고 해코지한 적 없다고 하는 이게 다 헛방이고 헛수고이고 아무짝도 쓸모없는데 그게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착하게 살았다고 고난 안 옵니까? 착하게 살았다고 안 아픕니까? 아프다는 이 현실을 누가 부인해요. 본인이 부인할 수 없어요. 자기의 의지와 희망과 자기 나름의 이상이 현재 주어진 이 냉혹한 현실을 어떻게 부정합니까. 이 아프다는 것을, 내가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부정합니까. 그럴 때 주께서 웃습니다. 너의 그 현실을 누가 조작하고 누가 꾸미느냐. 다 네 중심이었잖아. 하나님은 살리기도 하고 죽이시기도 하고 아프게도 하고 건강하게도 하고 부하게도 하고 가난하게도 하는데 너는 지금 네 앞에다가 나는 잘났으니까 이런 복을 받는다고 하는 네 자체가 너에게 허위였고 거짓이었다는 사실을 냉혹한 현실을 주면서 파악하게 하시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런 불의한 청지기가 앞에 뭘 뺐는냐 하면 나는 이 회사를 착실하게 다녔기 때문에 내가 회사 퇴직할 때 끝까지 나는 이 착실한 내 명예에 먹칠하는 짓은 하지 않겠다는 겁니다. 주님께서는 놀고 있네. 네가 그렇게 잘났어? 네 앞가림이나 해. 너 짤리면 갈 데 없어. 앞가림이나 하라고 하죠. 물론 주님께서 그렇게 시킨 것은 아닌데 청지기가 뭘 알았느냐 하면 ‘아, 정신 차려. 현실을 알아야 해’라고 하는 거죠. 현실은 뭐냐. 착한 나 라는 이게 꿈이었어요. 이게 망상이었습니다. 절대 착하지 않아요. 어떻게 하느냐. 남의 돈 횡령하는 거죠. 남의 돈 횡령했으니까 주님께서 너는 불의해. 너는 불의한 존재야. 그런데 네가 지옥 가는 사람이 아니고 네가 지옥 가는 사람보다 낫다. 지옥 가는 사람은 자기가 누구인지 분수도 모르기 때문에. 자기가 살 가치가 없다는 사실을 그들은 조금도 생각 못 한 거예요. 감히 생각 못 한 거예요. 살 가치가 없다는 사실을. 이걸 어렵게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주님께서는 욥에게 고난을 주었는데 그것이 뭐냐 하면 우성이었어요. 우성의 반대말은 열성이고 이건 멘델의 강낭콩 실험에서 나온 겁니다. 인간에게는 표현되는 유전자가 있고 감추어진 유전자가 있는데 표현된 유전자는 우위에 있다고 우성, 감춰진 유전자는 이건 유전형, 이렇게 표현형과 감춰진 내장된 것이 잠재적으로 있는 유전형이 있어요. 그래서 욥으로 하여금 표현형이 되는 거예요. 하나님이 보시기에 인간은 어떤 고난을 받아도 아무 소리도 하지 말아야 하는 그런 하찮은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 욥아 너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욥을 통해서 보여준 겁니다. 이 신약시대는 누구를 통해서냐 하면 예수님을 통해서 보여준 거예요. 그러면 욥에게 달려든 인간은 바로 예수님의 선지자를 비난하고 박해하는 자예요. 그건 유전자형이 달라요. 지옥 갈 유전형이죠. 예수님을 하찮게 보고 예수님이 십자가 죽는 모습이 내가 몰랐던 그동안의 진짜 내 모습이 그 저주받는 모습이고 십자가에 달려서 극악한 사형을 당해도 우리는 마땅한 조치를 당한 게 맞습니다. 하나님 잘하셨다고 고백해야 하고 “아버지여, 그렇게 하는 것이 아버지 뜻이라면 이 잔을 마시겠나이다”라는 이 이야기가 우리가 이야기해야 할 것인데 우리는 ‘내가 뭐 잘못했는데’라는 이런 식이란 말이죠. 그러나 예수님은 아담의 표현형입니다. 진짜 우리 속에는 십자가 들어있으면 우리 이 땅에 나타날 때 모든 일에 범사에 감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게 바로 이스라엘 통해서 알려준 겁니다. “고라 자손아, 모세는 이 세상에 어떠한 사람보다 더 마음이 겸손한 사람이다”라고. 그것은 착해서가 아니라 엄청난 분을 봤거든요. 엄청난 분, 하나님을 봤거든요. 그분의 영광을 봤어요. 감히 나는 괜찮은 사람이라는 말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모세는 온 천하보다 온유한 사람이고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라는 겁니다. 그 모세 안에 주님이 주신 십자가라는 그런 유전인자가 들었듯이 저와 여러분도 성령을 통해서 들어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과 비교하지 않게 하옵소서. 잘난 나와 나의 꿈과 비교하지 않게 하옵소서. 십자가 지신 주님과 비교하면서 항상 나의 위치와 본분을 늘 생각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잊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