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오후설교

약속 중심

아빠와 함께 2021. 6. 7. 08:13

약속 중심

2021년 6월 6일                     본문 말씀: 욥기 25:1-6

(25:1) 수아 사람 빌닷이 대답하여 가로되

(25:2) 하나님은 권능과 위엄을 가지셨고 지극히 높은 곳에서 화평을 베푸시느니라

(25:3) 그 군대를 어찌 계수할 수 있으랴 그 광명의 비췸을 입지 않은 자가 누구냐

(25:4) 그런즉 하나님 앞에서 사람이 어찌 의롭다 하며 부녀에게서 난 자가 어찌 깨끗하다 하랴

(25:5) 하나님의 눈에는 달이라도 명랑치 못하고 별도 깨끗지 못하거든

(25:6) 하물며 벌레인 사람, 구더기인 인생이랴

욥의 친구 빌닷은 고난 받는 욥 앞에서, 욥에 대해서와 세상과 하나님에 대해서 아는 척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욥이나 욥의 친구나 욥의 고난이 품고 있는 비밀에 대해서 어떤 식으로 그 원인이 밝혀지지 않고 있습니다. 빌닷 그에게는 어떤 발언을 쏟아내어도 기본되는 의식이 있습니다.

그것이 욥기 8:7에 나옵니다.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 사람이 타인에게 조언을 한다는 것은 평소에 자신이 자신에 대한 삶의 방식을 그대로 연장해서 소개하는게 됩니다. 즉 빌닷은 세상 살이를 하면서 ‘나중에 창대하게 되고픈’ 본심을 지울 길이 없습니다.

그리고 이런 마음과 실제로 살아계신 하나님과 연계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신학이 되었든 인생관이 되었든 자신의 마음에 있는 불변 요소의 표출은 감출 수가 없습니다. 즉 빌닷의 주장에 의하면, 욥이 고난받는 것은 욥이 스스로 형편없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은 욥의 태도가 바탕이 되었다는 겁니다.

이 정도의 조언은 이미 욥이 스스로 자기에게 이미 적용한 바 있습니다. 하지만 그대로 고난의 비밀은 풀이지 않고 있습니다. 만약에 빌닷의 주장을 반대로 하면 어떨까요? 즉 “나는 지금은 창대하나 나중에는 심히 미약하고 싶어라”라고 말입니다. 하지만 이래도 소용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겸손 같으면 오늘 본문에서 빌닷이 언급했습니다.

즉 5,6절에서, “하나님의 눈에는 달이라도 명랑치 못하고 별도 깨끗지 못하거든  하물며 벌레 사람, 구더기인 인생이랴” 이래나 저래나 고난이란 나에게 달려붙는 것이 나의 본질과 적절하지 않다고 여기는 그 의식은 욥을 포함해서 모든 인간들이 태어나면서 지니고 있는 본성입니다.
“고난아, 제발 나에게 달라붙지 말라”는 식으로 조바심을 갖고 세상 사람들은 살아가고 있습니다. 고난은 비켜가고, 그 대신 열심히 하나님을 제대로 알고, 하나님 앞에서 철저하게 겸비하고 마음 낮추고 살면 그것이 구원이 아닌가라고 생각하고 싶어합니다. 욥의 친구나 욥이나 모두 하나님의 뜻인 약속과 그 성취가 어떻게 이루어지는 지를 모릅니다.

신약에 오게 되면, 마태복음 8:9절에,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고 되어 있습니다. 즉 신약의 성도는 스스로 도를 닦고 행복을 추구하는 자가 아니라 자신은 ‘누구의 밑’에서 일하는 것을 영광스럽게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일반인들은 자신이 독자성을 잃고 ‘누구 밑에서 일하는 것’을 수치스럽게 여깁니다. 자기를 위하여 살지 않는 것을 자기에 대한 최소한의 책임회피처럼 간주합니다. 욥이나 욥의 친구나 그들은 ‘약속’이라는 것을 모릅니다. ‘약속’은 이스라엘 민족에게만 내려준 겁니다. 욥의 친구나 욥은 하나님의 ‘약속’을 인간 대 인간들의 약속처럼 실행되는 것인줄 여깁니다.

즉 인간들 사회에서 약속 준수는, ‘약속’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제시한 인물의 의도를 간파해서 자기 쪽에서 최선을 다해 성의를 지켜주면 된다고 여깁니다. 여기에는 약속을 받은 인간의 의리와 성실함과 성의가 그 약속 안에 고스라니 다 녹아 들어가므로서 약속은 품위있게 성취된다고 보는 겁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약속하셨다면 그 약속은 어느 정도 인간의 참여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고 믿게 됩니다. 예를 들면, 젊은 남녀 사이에 언제가 성공한 후 다시 만나자고 굳게 약속했다고 칩시다. 남자를 기다리는 여인은 그 남자가 반드시 다시 자기곁으로 돌아올 줄을 믿고 매일같이 돌아오는 그 길목에다 손수건 걸어놓고 자신의 성의를 표합니다.

즉 자신의 성의가 약속 성취에 한 몫을 담당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여기는 겁니다. 10년을 지다리고, 주변 사람들이 다 그 남자가 변질했다고 비난을 할 때도 그 여자는 자기 눈으로 확인할 때까지 남자를 기다리는 결심에 변함이 없습니다. 세상적인 약속 성취는 야무지고 요지부동 바꾸지 않는 마음을 근거로 진행됩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생각합니다. 아마 하나님께서는 이런 식으로 상호 신뢰를 지키는 조건 안에서 약속이 성사되는 것으로 하나님의 정의로우심과 거룩하심을 유지된다고 여깁니다. 하지만 신약에 와보면 하나님의 약속은 전혀 그런 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죽은 자에게 송금하기’ 방식으로 이루어집니다.

죽은 자에게 송금을 하면 그 돈을 필히 돌려받지 못할 겁니다. 그 돈은 잃어버립니다. 그러나 이점을 하나님께서는 아시면서 죽은 자에게 귀한 것을 주십니다. 그것은 첫째, 그 보내준 약속으로 인해 인간은 이미 죽은 자임을 분명히 드러내고, 둘째로, 따라서 인간은 그 약속 성취에 아무런 기여를 못함이 분명하게 드러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점을 미리 아시고 약속과 더불어 약속 성취자를 같이 이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그 이야기가 요한복음 12:20-25에 나옵니다. “ 명절에 예배하러 올라온 사람 중에 헬라인 몇이 있는데 저희가 갈릴리 벳새다 사람 빌립에게 가서 청하여 가로되 선생이여 우리가 예수를 뵈옵고자 하나이다 하니 빌립이 안드레에게 가서 말하고 안드레와 빌립이 예수께 가서 여짜온대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

이방인, 즉 전혀 약속한 무관한 민족에 해당되는 자가 예수님으로 만나려 왔을 때, 예수님은 드디어 자신께서 이 땅에 죽어야 비로소 약속이 성취된다는 그 시점이 되었다는 겁니다. 이것은 이방인든 유대인이든 어느 누구도 약속 성취 당사자가 될 수 없고 오직 예수님만이 약속을 성취할 수 있다는 것이 확연히 드러나게 되는 그 순간이 찾아왔다는 겁니다.

사태가 이러니 구원받은 백성, 즉 ‘남의 밑에서 일하게 되는 자’는 ‘자기 생명을 미워해야 하는 자’라는 결과를 얻게 됩니다. 쉽게 말해서 ‘하나님의 대한 사랑’은 자기 백성들의 입에서 다음과 같은 고백이 나오므로서 성공된 겁니다. “나는 주님을 사랑한 적이 없습니다.”고 말입니다. (요일 4:10)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이미 모든 것을 다 이루어놓으셨으니 오로지 주님만을 위해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86강-욥기 25장 1~6절(약속 중심)210606 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욥기 25장 1~6절입니다. 구약성경 785페이지입니다.

“수아 사람 빌닷이 대답하여 가로되, 하나님은 권능과 위엄을 가지셨고 지극히 높은 곳에서 화평을 베푸시느니라, 그 군대를 어찌 계수할 수 있으랴 그 광명의 비췸을 입지 않은 자가 누구냐, 그런즉 하나님 앞에서 사람이 어찌 의롭다 하며 부녀에게서 난 자가 어찌 깨끗하다 하랴, 하나님의 눈에는 달이라도 명랑치 못하고 별도 깨끗지 못하거든, 하물며 벌레인 사람, 구더기인 인생이랴”

수아사람 빌닷은 어떤 사람이냐 하면 욥기 8장 7절에서 심지어 교회 다니지 않은 사람도 알고 있는 아주 귀하고 대단한 말을 남긴 사람입니다. 그 사람이 욥기 8장 7절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네 시작은 미약하나 나중은 창대하리라” 다단계에 있는 사람들은 다 아는 이야기입니다. 영업사원들도 다 아는 이야기예요. 이런 사람이 이런 사고방식을 가지고 욥에게 어떤 조언이라고 내놓는데 그것이 25장에 나오는 빌닷이 나름대로 알고 있는 하나님에 대해서, 세상에 대해서, 인생에 대해서 썰(說)을 풀고 있습니다.

이 본문을 빌닷이라는 말을 감추고 그냥 보게 되면 ‘하나님은 이런 분이다’라고 하는 말이, 6절에 보면 “하물며 벌레인 사람, 구더기인 인생이랴”라고 언급을 했을 때 ‘야, 이 사람은 진짜 신앙인 같다. 요즘에도 이런 신앙인이 있구나. 신앙생활 참 잘한다. 우리가 본받아야 해. 이렇게 자기를 낮추면서 겸손하게 하나님을 높이기 위해서 낮추는 이런 사람, 이런 사람이 천국 안 가면 누가 천국을 가느냐’라고 감탄에 감탄해 마지않을 겁니다.

바로 이런 사람들의 사고방식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는 것을 여러분은 믿으십니까? 빌닷이 이야기한 이런 내용이 서양철학에 보면 엄청나게 많이 나와 있어요. 유한자는 무한자 앞에 아무것도 아니며 무한자는 유한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이런 건 철학에도 나오고 다른 종교에도 나오는 거예요. 신의 체면과 위신을 세우기 위해서 인간을 한없이 밟고 낮추기 위해서 그 가운데서 진리를 발견하고 하나님의 진정한 뜻을 알아차리는 것이 여러분 보기엔 대단한 거 같지만 인간은 그 정도까지도 할 수 있습니다.

기도원에 간다든지 깊은 산중에 도 닦는 사람 보세요. 적어도 빌닷같은 이런 수준의 발언들을 쏟아놓습니다. 그래서 지금 이것이 문제가 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사고방식을 가진 자 가운데로 우리 예수님이 찾아오셨거든요. 그러니까 그 당시 유대인이나 바리새인이 어느 정도 수준이 되는 사람들이에요. 그들이 엄청 예수님에 대해서 아는 체를 했습니다.

“랍비여, 랍비여”라고 하면서 니고데모도 찾아왔지요, 수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시험하면서 한 수 배운다고 왔는데 사실은 테스트해보려고 많은 사람이 예수님에게 질문도 했는데 그게 뭐냐 하면 “예수님, 참 대단하십니다”라는 말을 하면서 사실은 속으로 예수님을 대단하다고 할 정도로 제가 예수님을 보는 안목도 뛰어나다는 자기 자랑하려고 그렇게 한 거예요.

그러니까 율법사들이 예수님 찾아와서 율법에 대해서 물어본 것이 한 두 가지가 아닙니다. “선생님이여, 당신같은 선하고 위대한 분은 처음 봤습니다. 성경을 요약하면 뭐가 됩니까”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사랑하라” “그러면 이웃이 누구입니까”라는 이런 질문을 했을 때, 다른 제3 자가 질문한 사람을 보기에 ‘와, 진짜 진리만으로 살려고 하는, 오직 경건만 찾는 분이다’라고 그렇게 생각을 하겠지요. 여러분 그런데 속아 넘어가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속아 넘어가지 말라는 말씀은 우리 자신이 우리 자신에게 속아 넘어가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주님을 아는 척해도 주님은 우리를 전혀 모릅니다. “주님, 복음을 전했습니다”라고 하면 “누구신가요? 누군데? 도무지 너를 알지 못한다” 주님께서는 굳이 인간을 알아야 할 이유가 하나도 없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정말 성도이고 여러분들이 진짜 성령 받았고 가짜가 아니고 진짜 신약의 백성이라면 타인들로부터 이러한 질책과 이러한 소리를 들어야 해요. “너 누구 밑에서 일하는데?”

“너 누구 밑에서 일하는데?”라는 소리를 들어야 해요. 본인이 도 닦아서 위대한 사람 되는 게 성도의 위대한 모습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기분 나빠하는 이유 중 하나가 내가 누구 밑에서 일한다는 이야기를 굉장히 기분 나빠해요. 나는 나야. 내가 누구 밑에서 일할 사람 아니야. 잠시 누구 일을 도와주긴 하지만 누구 밑에서라는 그런 경솔하고 무례한 질문은 나에게 하지마. 나? 나야~나야~나~ 노래가 나올 것만 같은데요. 나야~나!

빌닷이 그런 사람입니다. 시작은 미약하나 나중은 창대하겠다는데 그래 그렇게 해서 뭘 얻겠다는 거예요. 내가 너희들 보기에 보잘것없지? 하지만 나중에는 창대해. 그래서 이야기하겠다는 것이 뭡니까? 봐~나야 나! 내가 실력이 이정도야. 지금 그 이야기가 빌닷의 기본 사고방식에 깔려있습니다. 나도 하나님 믿어. 까불지 마. 지금 무슨 자기 대우받으려고 하나님 이야기를 하는 게 어디 있어요.

아무것도 모르고 철없는 20대 아이들이 애인을 만나든지, 남녀가 교제하고 할 때 자기가 아는 자기 자신을 소개할 때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나는 참 못난 인간이야. 난 20%는 천사고 80%는 악마야”라고 무슨 퍼센트를 따지는 게 있어요. 무슨. 20% 천사고 80% 악마인 게 어디 있습니까. 무슨 오페라 합니까. 가면 쓴 오페라의 악마예요?

지금 빌닷이고 엘리바스고 친구들은 욥을 보고 아는 척을 하고 있습니다. 욥은 자기 고난도 아는 척을 할 수 없어요. 고난이 왜 있는지 자기가 몰라요. 고난에서 자기가 고난받은 이유를 모르면 지금 하나님은 욥을 욥이 모르는 그런 하나님으로 찾아온 거예요. 무한자가 유한자에게 무한자를 모르는 식으로 찾아오는 겁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찾아올 때는 ‘내가 그럴 줄 알았어. 이럴 줄 알았어’라는 식의 이야기가 나오도록 찾아오는 것이 아니고 ‘이건 내가 예상한 하나님이 아니야’라는 식으로 찾아와요.

왜 그래야 하는가. 그래야 겸손 떠는 거, 신학 하는 거, 하나님 아는 거, 바르게 사는 거, 이 모든 것이 결코 누구 밑에서 일한 것이 아니고 자기 좋아라고 한 거예요. 복음 연구하고 성경 공부하는 것이 전부 자기 좋아라고 한 거예요. 이미 자기 좋아라고 하고 있으면서 ‘나는 벌레야. 나는 구더기같은 인생이야’라는 이게 자기 딴에 누가 뭐래도 하나님이든 우하나님이 와도 이게 정답이라고 여기죠.

그거 정답 아닙니다. 왜냐 하면 욥의 고난을 이해 못하기 때문에. 욥의 친구가 이야기하면 너 아는 척하지 마라. 나는 네가 아는 거 다 알고 있어. 네가 아는 레벨로 나는 다 알고 있는데 끝까지 내가 해석할 수 없고 해명할 수 없는 것은 뭐냐. 나에게 고난이 온 이유에 대해서 모르겠다는 겁니다. 욥도 모르죠. 친구도 모르죠. 하지만 우리는 오늘날 신약 성도잖아요.

우리는 십자가에 복음을 아는 사람같으면 욥이 모르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하고 욥의 친구가 모르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해요. 주님의 성령을 받지 않은 사람은 기껏 내놓는 신학의 한계가 딱 25장 수아사람 빌닷이 하는 이 수준 안에 그대로 놓여 있습니다. 아무리 빌닷이 겸손을 떨면서 하나님을 높여도 결국 그 내부에 내막에는 뭐가 있느냐. ‘시작은 미약하나 나중에는 창대하리라’ 이 사고방식과 모순되지 않는 하나님관을 갖고 있었던 거예요.

이거 보면 참 한국교회 절로 생각나지 않습니까? 한국교회 교인들 위한다는 목사들이요. 딱 까놓고 이야기하면 “너 교회 온 목적이 뭔데?” “하나님의 영광을 높이고 나는 많이 낮아지고”라고 하면 “아니 그거 말고. 그런 배운 거 말고. 네 속마음이 뭐냐고?” “시작은 미약하나 나중은 창대하리라” “바로 그거지! 바로 그거야!!” 다시 말해서 나는 창대하지만, 교회 다니고 나는 완전히 미약하게 되고 싶어서 환장해서 교회 온 사람 봤습니까? 그런 우리교회밖에 없어요. 갈수록 꼴아박아요. 갈수록.

빌닷이 하는 레벨 수준이요, 하나님이 생각하는 수준과 그리고 오늘날 진짜 성도의 수준과 어떤 점이 차이 나는지를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빌닷과 비슷한 이 수준은 온 이 세상 이방 민족, 빌닷도 이방 민족인데요, 이방 민족 모든 곳에 퍼져있어요. 강원도 화천군 화천읍 대이리에 보면 처녀 고개 전설이 있습니다. 여기서 쫙 음악을 깔아줘야 하는데 ‘전설을 찾아서~’라고 하면서.

전설이 뭐냐 하면 그 동네에, 화천군에 도령이 있었는데 아주 영특하고 똑똑해요. 물론 기본은 그 도령이 이뻐야 하고 잘생긴 것은 기본이고 똑똑해요. 못생기고 똑똑한 건 안 통합니다. 그래서 어떤 처녀가 반해서 둘이 약조를 했어요. 그 도령도 그 처녀를 굉장히 좋아해서 둘이 굳게 약속했습니다. 그 도령이 아가씨를 알고 난 뒤에 어떤 책임같은 것을 느꼈어요.

내 평생에 저 아가씨를 밥이라도 먹여 살려야겠다. 그러면 내가 할 것이 뭐냐. 시험 치자. 그래서 과거 보러 도령이 한양으로 갔어요. 가기 전에 도장 찍고 약속 찍고 손가락 죄다 찍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내가 반드시 과거 급제해서 돌아올 테니까 그때까지 기다려달라고 하고 서울로 갔어요. 왜 이리 잘 듣는지 모르겠네요. 이게 세상 이야기인데.

갔는데 은근히 그 처녀의 아빠 엄마도 도령 잘 만나서 우리 집도 출세하겠다 했는데 1년이 지나고 무려 십 년이 지난 거예요. 드라마 같으면 갑자기 ‘봄, 여름, 가을, 겨울’이 봄에는 꽃피고 갑자기 녹음이 우겨지고 낙엽 떨어지고 흰 눈 떨어지고 하는 장면이 열 번 바뀌어요. 4배속으로 해서 빨리빨리. 십 년이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아무 소식도 없어요.

인터넷이 되기를 하나, 휴대폰은 전원 꺼져있지, 되는 게 아무것도 없어요. 드디어 집안에서는 부모가 독이 올랐어요. 끝났다. 소문에 어떤 소문이 들리냐면 이미 그 남자는 영특해서 급제했는데 서울 가서 다른 여자와 이미 결혼을 했다는 장가갔다는 소문을 들었어요. 그게 강원도 화천군 화천읍 대이리에 쫙 퍼졌습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드디어 참지 못해서 딸에게 잊으라고 했죠.

그런데 그 딸은 10년 동안 하루도 빠지지 않고 매일같이 약속했던 그 고갯길에 가서 자기가 손수 수놓았던 손수건을 그 나뭇가지에 다 매달았어요. ‘Tie a yellow ribbon round the ole oak tree’라는 팝송처럼 온 나무에 매달았습니다. 그 아가씨는 맨날 수놓는 거 그거밖에 안 했어요. 보다보다 아버지가 화가 나서 “내가 오늘 나가지 말라고 했지. 네가 또 손수건에 수놓아서 거기에 가게 되면 이제는 내 집에 들어오지 마라”라고 너무 화가 나서 단언을 했어요.

그건데 그건 아가씨와 도령 둘만의 약속이었던 거예요. “아버지는 몰라요. 그 도령과 내가 약속한 것이 그냥 다른 사람 약속한 것과 달라요. 그 도령은 약조할 때 그 눈빛에 분명히 다시 온다는 약조가 있었기 때문에 내가 그 약조를 위반할 수가 없습니다”라고 아버지 말 완전히 무시하고 그냥 갔어요. 그다음 날 아가씨가 안 돌아왔어요. 그걸로 빠이빠이 했어요.

그런데 그 아가씨가 가버린 그다음 날 도령이 장원급제해서 찾아왔어요. 무슨 이런 죽일 타이밍이 있습니까. 참, 이 인간의 약속이라고 하는 게 내가 약속을 지킬 경우만 약속이 된다고 생각하는 이 어리석음이 있어요. 인간세계는. 이건 구약적이에요. 이방 민족적이에요. 그러나 여러분, 세차 해주기로 약속했는데 내일 세차한다고 약속했는데 오늘 밤에 비가 세차게 오게 되면 내일 아침에 기어이 세차해야 합니까? 그럴 필요 없잖아요.

하나님께서는 약조하라, 약조하라, 내 말을 지키라는 이 말은 너는 내 약속을 지킬 능력이 없음을 강조하기 위해서 그렇게 약조하시는 거예요. 안 지키면 너 지옥 보낸다는 이 말은 첫째는 네가 지옥 가 마땅하고 두 번째는 지옥에서 빠져나오려고 해도 나올 능력이 네게는 없고 살아있는 것은 약조, 약속만 살아있게 하는 거예요. 약속만. 이게 신약시대입니다.

그래서 이 전설의 뒷이야기가 있는데 애틋한 사랑을 한 그 처녀의 죽음으로 인해 그 해에 마을에 풍년이 들었다고 해서 그 마을 이름이 대이리에서 풍산리로 바뀌었다고 합니다. 별로 중요한 이야기는 아닙니다.

지금 이 시대가 신약시대예요. 이 시대의 복음이 기쁜 소식이에요. 지금 욥 같은 경우에는 그냥 고난이 온 거예요. 고난이 고난 되기 위해서 온 거예요. 그런데 욥이나 욥 친구들은 뭘 생각하느냐 하면 내가 그렇게 나쁜 짓 한 것도 없는데, 내가 그렇게 매 맞을 짓을 안 했는데 하면서 자꾸 약조와 자기 자신을 엮어서 감히 하나님의 작업에 자기가 끼어들 수 있다고 여기는 거예요.

여러분들이 죽은 자에게 송금했을 때 돈을 돌려받을 수 있겠어요? 한 달 전에 전화했어요. 전화해서 “물건 주시면 돈 송금해 드릴게요” 돈 보내니까 물건이 한 달 뒤에 왔어요. 일주일 뒤에 “아저씨 잘 계시죠?”라고 연락했어요. 어제 또 전화했어요. “아저씨 그 작물 아직도 재배하시죠?” “재배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내일 돈 보내드릴 테니 보내주세요” “네, 보내드리겠습니다”

그래서 오늘 돈을 송금했어요. 송금했는데 그다음 날 메시지를 보내니까 전에 같으면 ‘물건 보내겠습니다. 감사합니다’라는 문자가 왔는데 아무 소식이 없는 거예요. 나중에 그 사람이 친구의 친구를 통해서 알아보니까 그 사람이 죽었어요. 돈은 보냈는데. 그 사람이 죽은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내 돈, 보이스피싱도 아니고 내 돈을 다시 돌려받을 수 있느냐의 문제입니다.

못 돌려받죠. 죽었으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돌려받아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죄사함 줄게, 영생 줄게, 천국 보내줄게”라고 하셨는데 그게 하나님이 그렇게 약조한 대상자가 누구냐 하면 이미 죽은 자예요. 이미 죽은 자에게 그걸 이야기했습니다. “네가 이 복음을 안 믿으면 너 지옥 간다”라고 이미 죽은 자에게 이야기한다고요.

하나님은 죽은 자에게 이야기함으로써 그 이야기한 약조가 결국은 하나님의 의로, 하나님의 하신 일이 무가치하게 되지 않기 위해, 하나님의 하신 약속이 빈 껍데기로 되돌아오지 않기 위해서 그 약속과 더불어서 아무 연유 없는 이유 없는 고난을 받는 하나님의 메시아를 이 땅에 보내신 거예요. 인간세계에서는 그 고난받는 메시아를 해석할 수가 없어요. 해석이 안 돼요.

십자가가 해석이 안 돼요. 사람들은 그 십자가를 자기 약속인 줄 알고 십자가를 믿으려고 달려들어요. 십자가는 믿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의 피는 믿는 것이 아니에요. 그 피 앞에서 내가 죽은 자라고 확인하는 거예요. 죽은 자에게 송금하는 것이 인간은 어리석어서 확인 안 되니까 보낼 수 있지만, 하나님은 이미 죽은 자라고 알고 있으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죽은 자를 향하여 보내버린 겁니다.

그럴 때 천국 가는 사람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내가 약속을 지키는 자가 아니라 내가 약속의 내용물이 되고 말았네. 내가 세차를 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아예 깔끔하게 세차를 해주시네. 주님의 약속이 스스로 약속되기 위해서 죽은 자인 우리가 말려들었는데 나는 어떤 기능으로냐면 무능하기 짝이 없는 구원될 수 없는 무자격자로 그런 자로 우리는 자격을 갖춘 겁니다.

자격 없는 자로 자격을 갖춘 거예요. 지금 아무 말 대잔치 하는 거 아닙니다. 신앙 없는 자로 구원받은 거예요. 소망이 없는 자로 구원받았고 요한 1서 4장 10절 말씀처럼 “우리가 주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그러니까 뒷말은 들을 필요가 없어요. 맨날 성도가 하는 말이 ‘나는 주님을 사랑한 적이 없습니다’라는 그게 사랑이에요. 주님에게 일방적인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 그 사랑에 내 사랑이 안 섞이려고 애를 쓰는 거예요. 내 사랑이 섞이면 안 돼요.

내가 주님 사랑에 섞이면 안 돼요. 섞이면 그 사랑은 주의 온전한 약속을 방해하는 것이고 훼방하게 되는 겁니다. 욥은 이 사실을 몰라요. 욥의 친구도 이 사실을 모릅니다. 그저 자꾸 짜증만 내고 당황스러워하는 겁니다. 내 잘 나가는 인생이 왜 이리 망가졌습니까. 내 잘 나가는 인생이. 신약에서는 정답을 압니다. 나는 지금 주님 밑에서 살기 때문에 주님 밑에서 일하고 있는 겁니다. 약간 여러분 어렵겠지만 요것만 하고 설교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요한복음 12장에서 어떤 대목이 어렵냐 하면 20~25절까지 한번 읽어 볼 테니까 이게 왜 어려운지 한번 느껴보세요. “명절에 예배하러 올라온 사람 중에 헬라인 몇이 있는데, 저희가 갈릴리 벳새다 사람 빌립에게 가서 청하여 가로되” 그러니까 헬라인이에요. 유대인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메시아와 상관없는 자들이에요. “선생이여 우리가 예수를 뵈옵고자 하나이다 하니, 빌립이 안드레에게 가서 말하고”

여기서 안드레와 빌립이 유대인입니다. 유대인 아닌 사람이 지금 최측근에게 부탁을 하고있는 겁니다. 유대인 만나려고. “안드레와 빌립이 예수께 가서 여짜온대,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라는 이게 어려운 거예요.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헬라인들은 약속을 받을 대상도 아니고 이건 마땅히 지옥 갈 사람이에요.

마땅히 지옥 갈 사람이 자기가 메시아를 왜 찾아요? 메시아는 이스라엘에 약속에 의해서 오는 거예요. 약속 바깥에 노선 이탈된, 노선 밖에 있는 자가 예수님을 만나러 왜 옵니까? 그런 새로운 약속을 이루시기 위함이죠. 그러니까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다는 이 말이죠. 이런 말씀을 하시면서 구체적으로 뭐라고 하시느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라고 되어 있어요.

왜 이방인이 찾아왔는데 갑자기 주님이 자신이 죽는다는 이야기를 왜 하시는 겁니까. 죽으면 그동안 이스라엘이 추구했던 거, 우리가 하나님의 율법을 받았으니까 이거 지켜서 구원받는다는 모든 것이 다 무효인 사태로 최종 정리가 되는 거예요. 유대인같은 소리 하고 있네. 너희들은 이방인을 개라고 하는데, 아니야, 아니야. 이제 유대인이라는 구분 없어.

오직 한 알의 밀알이 죽고 거기서 열매가 맺히면 그게 이방인이든 유대인이든 누구든지 생명을 얻을 수 있는 새로운 시대가 열리는 거, 그것이 바로 유대인에게 밉상 받은 메시아가 드디어 존경을 받을 수 있는, 영광을 받을 수 있는 그때가 온다는 겁니다. 빌닷처럼 시작은 미약하나 나중은 창대하다는 자기 생각으로 신과 엮이는 것이 아니에요. 나 잘되기 위해서 하나님과 엮이는 것이 아닙니다.

이건 진짜 하나님을 몰라도 너무 몰라요. 내 소원과 주님과 아무 상관 없어요. 우리가 주님의 소원이 되어야 하지 내 소원 속에 주님을 집어넣으면 안 된다는 말이죠. 그다음에 25절을 보면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 이 세상에 아무도 자기 생명을 미워할 자는 없습니다.

그런데 미워하게 되는 그 세차, 그 약조, 과거급제, 그거는 바로 주님께서 미워하도록 그렇게 우리를 참여시킨 것에 대해서 주께 감사합시다. 왜? 우리 영광? 아니요. 인자이신 주님의 영광을 위해 초청받은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본래의 생각이 어떻게 이렇게 욥 친구를 통해서 친구의 말로 대변되어 있는지요. 하나님을 높이는 거 같지만 속셈이나 실속 차리려는 우리의 음흉한 생각을 날마다 들춰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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