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동자
2021년 5월 23일 본문 말씀: 욥기 24:18-21
(24:18) 그들은 물 위에 빨리 흘러가고 그 산업은 세상에서 저주를 받나니 그들이 다시는 포도원 길로 행치 못할 것이라
(24:19) 가뭄과 더위가 눈 녹은 물을 곧 말리나니 음부가 범죄자에게도 그와 같은 것인즉
(24:20) 태가 그를 잊어버리고 구더기가 그를 달게 먹을 것이라 그는 기억함을 다시 얻지 못하나니 불의가 나무처럼 꺾이리라
(24:21) 그는 잉태치 못하므로 해산치 못한 여인을 학대하며 과부를 선대치 아니하는 자니라
욥은 지옥문 찾기에 나섭니다. 악인들이 집결하는 곳을 발견하고 싶어합니다. 그렇게 하므로서 자신은 그쪽 동네에 속하지 않는다는 자부를 갖고 싶었던 겁니다. 욥의 이러한 시도는 실은 모든 인간들의 본성이기도 합니다. 자신은 지옥으로 빨려들어가지 않는 자임을 어떤 식으로도 확인하고 싶은 겁니다.
그 방식은 악한 자들이기에 벌어지는 나쁜 일들을 찾아가기만 하면 된다고 여깁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의 악한 자들을 그냥 보고 계시지 않으신 분이니 필히 그들에게 징벌을 그때마다 내릴 수 것이고 그렇다면 그 징벌이 내려지는 자들이 향하는 곳이 곧 악인들이 저주받기 위해 가는 곳이 될 수가 있다고 믿고 싶은 겁니다.
인간의 입장에서 이런 방식이 아니고서는 참조로 할만한 내용들이 없다고 믿고 싶은 겁니다. 그러나 욥에게 있어 참으로 중요한 것을 빠뜨렸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기 자신이 속해 있는 그 지평의 자리가 곧 저주의 자리인 것을 몰랐던 겁니다. 욥이나 욥의 친구들은 자신들이 복을 추구할 수 있는 그런 자라고 자부합니다.
예를 들면, 세상에서 ‘복’이라는 하는 것은 ‘복권’이라는 행운의 쪽지에서 잘 드러납니다. ‘복이 담긴 종이’가 참으로 당첨되었을 때에, 복이라고 주는 것은 뭘까요? 그것은 ‘돈’입니다. 즉 돈이 곧 이 세상에서는 복의 진수라고 보는 겁니다. 그래서 욥은 악인들의 인생에서 자꾸만 소유나 돈 되는 것이 날아가는 것을 가지고 ‘저주받았다’고 단정짓고 싶은 겁니다.
그렇다면 이런 형편에서 욥의 자아에 문제가 있음을 욥 스스로 시도에서 발견할 수 없음이 분명합니다. 악인들과 그들이 받을 저주를 논하고 싶은 것은 본인만큼은 그 저주의 길에 결코 접어드는 일은 있을 수 없다고 믿고 있습니다. 즉 욥은, ‘악인들의 형편’에서 논하고 있다는 그 자체로 이미 자신의 의인의 노선이 있다는 논리가 성립한다고 여깁니다.
이처럼 이방인 욥에게는 전혀 해결점이 보이지 않습니다. 아직 욥에게는 하나님께서 친히 찾아오시기 전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직접 하나님께서 찾아오신 이스라엘에게 있어 지옥문은 어디며 천국문은 어디입니까? 무엇이 복이고 무엇이 저주입니까? 그곳은 함께 계시는 하나님만 아십니다.
신명기 32:10에 보면, “여호와께서 그를 황무지에서, 짐승이 부르짖는 광야에서 만나시고 호위하시며 보호하시며 자기의 눈동자 같이 지키셨도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황무지는 욥기에서는 완전 저주스러운 환경입니다. 사람들을 살게 하지 못하고 죽게 하는 곳입니다. 황무지에서 인간은 그 어떤 식으로도 자기 가치를 발휘할 수가 없습니다.
그 황무지는 짐승이 부르짖는 곳입니다. 사람 살곳이 못됩니다. 사람이 살지 못한다는 말은 곧 저주받은 자의 최후의 거주지처럼 간주될만한 곳입니다. 자진해서 황무지를 자신에게 부합되는 적절한 삶의 터전이라고 나설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이 황무지로 몰고 가십니다.
이것은 곧 축복이라고 여겨지는 곳은 실은 축복의 땅, 반대편임을 말씀하기 위함입니다. 인간들은 스스로의 가치가 돋보이고 싶어합니다. 단독적으로 고유한 가치가 유난히 빛나기를 원합니다. 즉 인간 스스로 예상이 가능한 복을 실제로 만나보고 싶어합니다. 반면에 저주스러운 장소는 나쁜짓을 일삼은 그들의 거처라고 분류하고 싶어합니다.
그랴서 악인들을 자신들에게 떼놓은 그 순간부터 자신들은 자동적으로 의인의 집단이고 싶어합니다. 바로 이러한 기준에 의해서 인간 사회가 구성됩니다. 문제는 이러한 인간들의 다수 의견에 대자연은 부응하고 있느냐하는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인간들이 아무리 의로움을 주장해도 인간을 자연을 자신의 뜻대로 운용할 자격이 없습니다.
즉 자연은 인간말을 애초에 듣지 않음을 인간들은 모르고 있습니다. 자연을 내리시는 복은 사람의 말을 듣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과 계획에 의해서 실현됩니다. 따라서 복과 저주는 결코 인간의 판정대로 움직여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는 경우는 조건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눈동자’가 되는 경우입니다. 눈동자는 인간에게 있어 신체의 일부입니다. 그것도 제일 중요한 부위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눈동자는 앞을 주시하고 보는 기능을 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자신의 신체이 가장 중요한 부위에 이스라엘을 박아넣고 다니신다는 식으로 이스라엘 관계를 설명하십니다.
그런데 이 상황이 어떤 상황입니까? ①모든 인간들이 저주스럽다고 자부하는 환경 속에서 ②하나님의 눈동자로서 이스라엘이 지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신명기 32:10에서는 이런 표현이 나옵니다. “여호와께서 그를 황무지에서, 짐승이 부르짖는 광야에서 만나시고 호위하시며 보호하시며 자기의 눈동자 같이 지키셨도다”
즉 ‘호위하시며 보호하신다’는 겁니다. 인간들은 결코 단독 행위로서 복과 저주를 결정할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이스라엘은 철저하게 하나님에게 종속되어야 합니다. 복과 저주는 하나님에 의해서 점차 밝혀지게 됩니다. 쉬운 예로서, ‘광부의 모자’에 비유할 수가 있습니다. ‘광부의 모자’는 밝은 곳에서 쓰는 모자가 아닙니다.
그런 곳에서 모자쓰지 않더라도 자신이 가진 눈마저도 사물을 분간됩니다. 자기가 원하는 일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어두운 곳에 들어서게 되면 인간의 눈동자는 무용지물입니다. 그렇다면 그곳에서는 전깃불을 밝히는 모자를 쓰여합니다. 어두운 앞 길은 전깃불로 밝혀지고 전진할 수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에 의해서 저주스러운 환경인 황무지로 들어섰을 때에 그들이 얼마나 황당했을까요? 마치 열차가 사정없이 산뿌리를 향하여 돌진하는 무모함 같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산둥치 밑에는 터널이 뚫여 있어 무사할 수가 있습니다. 이처럼 영생이 기다리는 그 길은 단순히 고생많은 좁은길 정도가 아닙니다.
인간의 입장에서 아예 없는 길이라는 것이 적절합니다. 인간들 입장에서 누구도 “나 저주받았다구” 낙담할 만한 길입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하나님과 함께하는 길에서는 인간의 독자적인 자아는 동승하지 말아야 합니다. 손에 보면 손가락이 나와 있습니다. 그 손가락은 마치 하나하나가 독자적 존재라고 간주할 겁니다.
그러나 그 손가락들은 엄연히 하나의 손등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와 같이 인간이 저주처럼 여겨지는 바로 그곳으로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품고 거기서 축복의 땅을 열어주시는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선입견에 입각해서 주님의 계획을 원망하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84강-욥기 24장 18~21절(눈동자)210523 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욥기 24장 18~21절입니다. 구약성경 784페이지입니다.
“그들은 물 위에 빨리 흘러가고 그 산업은 세상에서 저주를 받나니 그들이 다시는 포도원 길로 행치 못할 것이라, 가뭄과 더위가 눈 녹은 물을 곧 말리나니 음부가 범죄자에게도 그와 같은 것인즉, 태가 그를 잊어버리고 구더기가 그를 달게 먹을 것이라 그는 기억함을 다시 얻지 못하나니 불의가 나무처럼 꺾이리라, 그는 잉태치 못하므로 해산치 못한 여인을 학대하여 과부를 선대치 아니하는 자니라”
욥은 지금 지옥으로 가는 입구를 찾고자 합니다. 하나님께 영원히 저주받는 집단체, 그곳이 분명히 어디에 있는데 그곳의 입구가 어디며 그게 있음을 확인하는 것이 왜 욥에게 중요하냐 하면 욥은 아무리 생각해도 자기가 지옥 갈 사람이 아니거든요. 지옥 갈 사람이 아니니까 나는 지옥 갈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는 방법들 중에 하나가 지옥 갈 사람들을 분류시켜서 저런 저런 사람들은 저주받고 지옥 간다고 자기 입으로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그러면 자동으로 지옥 갈 사람을 안다는 것은 자신은 하나님의 복 받는 사람이라는 것이 대외적으로 드러나는 겁니다. 이러이러한 사람은 지옥 간다고 본인이 규정한다는 것은 본인이 거기에서 빠졌다는 것을 스스로 자부할 수있는 기회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에서 욥이 그 지옥의 출입구, 지옥은 저주받은 사람들이 가는 것을 찾는 방법은 어떤 식으로 하는가 하면 나쁜 짓을 하는 사람들은 필히 하나님에 의해서 벌 받게 되어 있기 때문에 벌을 받는 사람의 일상을 추적해 보는 거예요.
어떤 일들이 벌어지는가. 나쁜 일을, 어떤 저주스러운 일을 따라가면서 추적해 가다 보면 그들 가운데 어떤 공통점이 있을 것이고 그 공통점을 보편화시켜버리면 ‘이러이러한 사람은 저주받는 것이 맞다’라는 결론 내릴 수 있다는 겁니다. 그 예가 21절에 나옵니다. “그는 잉태치 못하므로 해산치 못한 여인을 학대하여 과부를 선대치 아니하는 자니라”
어떤 여자가 아기를 못 낳으니까 성질나잖아요. 성질나니까 자기는 없으니까 이 분노를 어디에 해소하느냐 하면 “그는 잉태치 못하므로 해산치 못한 여인을 학대하여 과부를 선대치 아니하는 자니라”라고 이렇게 규정을 해버리는 겁니다. 그렇게 규정을 해버리면 본인이 해산 못 하는 것은 분명히 누가 봐도 해산 못 해서 저주받은 건데 그러면 자기가 지옥 가잖아요.
그러면 나 말고 같이 해산 못 하지만 나는 아기가 없지만 나 말고, 나는 가고, 너는 아기를 못 낳아도 너는 간다고 내 쪽에서 미리 결정지어 버리는 겁니다. 욥이 많이 성질이 난 거 같아요. 오늘 본문 18절부터 여러분 보셨잖아요. 19절 보면 “가뭄과 더위가 눈 녹은 물을 곧 말리나니 음부가 범죄자에게도 그와 같은 것인즉” 음부라는 것은 지옥이거든요.
요새 말로는 지옥이 찾아오게 되면 그 사람이 가진 모든 재산이나 명예나 그런 가치 있는 것들은 바짝 말라버리는 겁니다. 그래서 이것을 보면서 우리는 이걸 생각해야 해요. 지금 여기 나와있는 저주받는 모습이 욥 본인의 희망 사항인지 아니면 본인이 꼭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다고 지금 요구하는 것인지 실제로 욥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흘러가는 것인지 그걸 증명하는 방법이 없는 거예요.
욥은 그냥 성질나서 내질러 버리는데, 문제는 욥이 성질나서 내질러 버리는 이 이야기가 성경에 나와 있다는 말은 장차 오실 예수님께서 이 욥의 지옥 가는 자의 저주가 그대로 현실로 전환됩니다. 그러니까 욥의 이 말을 우리가 무시할 수가 없는 거예요. 어쨌거나 지금 욥이 궁금해하는 거, 다시 말해서 지옥으로 통하는 길은 어디 있으며 어떻게 찾을 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욥이 이 이야기를 끄집어내니까 관심을 두는 거 같지만 사실은 인간 내부 깊숙한 곳에 욥의 이러한 심정이 우리에게도 들어있어요.
지옥이 있다고 하고 지옥은 구더기가 죽지 않고 계속 고통을 받는다는데, 그 구더기 있는 지옥을 한 번 봤으면 우리가 덜 죄짓고 더 하나님께 충성하리라는 생각이 들겠지요. 여기 20절에 구더기라는 말이 나오지요. “태가 그를 잊어버리고 구더기가 그를 달게 먹을 것이라” 구더기가 사람을 달게 먹는 그 상태를 욥은 참혹한 지옥의 형벌이라고 보는 겁니다.
그래서 여기 18절 같은 경우에도 마찬가지죠. “그들은 물 위에 빨리 흘러가고 그 산업은 세상에서 저주를 받나니 그들이 다시는 포도원 길로 행치 못할 것이라” 그러니까 이 지옥 상태를 설명하면서 욥이 예상한 지옥이 뭐냐 하면 자기 소유가 완전히 다 말라버린 거, 없는 거, 그리고 어떤 희망이나 기대를 전혀 할 수 없는 거, 그게 사람들에게 형벌이 된다는 거예요.
그렇다면 우리 입장에서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 왜 형벌이 되지? 왜 그게 괴로움이 되지? ‘나는 아무것도 없다. 구더기가 내 살을 뜯어 먹는다’라는 것이 왜 우리가 슬퍼해야만 하는 일인지를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욥의 이 말은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반드시 전제되는 어떤 기대감으로 인하여 바탕을 두고 자기 자신을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욥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이제부터는 쉽게 가겠습니다. 쉬운지 어려운지 모르겠습니다만. 여기 저주가 나왔는데 저주의 반대는 복이죠. 그런데 여러분들이 ‘복권’할 때 그 복권이 복이 들어있는 어떤 권리를 보장하는 종이쪽지가 복권이잖아요. 당첨되면 복이 들어있는. 그 복의 내용이 뭐든가요? 그게 돈이죠. 복권 당첨되면 ‘당신은 이뻐요’라고 하면서 끝냅니까? 아니죠.
복권이라고 하는 것은 모든 인간이 공통적으로 인간이라면 다 공의 동감하는 것이 뭐냐 하면 이 복권 있으면 돈을 준다는 거, 돈이 들어온다는 거예요. 그러면 인간은 이미 전제가 뭐냐 하면 많은 소유가 복이라는 것이 자기 자신도 모르게 형성되어 있는 거예요. 얼마나 돈이 들어오기를 원했으면 노래에 ‘돈아~돈아~돈아’라고 했겠습니까. 돈을 부르는 겁니다.
제가 오늘 아침에 운동하는데 70 넘으신 두 분이 시끄럽게 이야기를 해요. 다 들려요. “김 사장, 니 백신 맞았나?”라고 그런 이야기 하고 있는데 그 소리를 딱 들을 때 떠오른 생각이 왜 ‘김 머슴’이라는 호칭은 기분 나빠할까. 왜 ‘김 사장’일까. 왜 김 머슴은 왜 안 되지? 동네 병원에 가서 김 박사라고 하면 기분 좋은데 김 간호사라고 하면 기분 별로 안 좋아요.
왜 김 박사는 기분 좋고 김 간호사는 별로고 김 사장은 좋고 김 머슴은 쉿! 하면서 말 못 하게 하고. 도대체 인간에게 형성되어 있는 것이 이게 뭐냐는 겁니다. 뭐길래 그렇게 지옥이 무서워서 지옥 입구를 찾고 왜 지옥 가는 사람을 따로 분류해서 ‘하나님, 나는 저쪽 아니죠?’라고 자꾸 우기고 싶은가. 이것은 욥이 구약적 인물입니다. 욥이 아직도 자기의 지평을 몰라요.
지평이라고 하는 것은 평지인데 끝에 지평선이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 지평선 너머를 가지를 못 한 겁니다. 그 테두리 안에서 사는 겁니다. 그런데 욥의 이야기가 무의미한 것이 오늘날 우리가 복권이라는 것이 복권하면 슬퍼서 우는 사람 없잖아요. 복권 20억 타고 엉엉 슬퍼서 울고 저주받았다고 하는 사람 없잖아요. 그러니까 이건 우리의 지평 자체가 저는 수상하다고 보는 겁니다.
이 토대 자체가 이걸 엎어버려야 해요. 이걸 반대로 엎어버려야 해요. 그러니까 지옥을 복으로 바꿀 수 있는 안목이 필요한 겁니다. 왜? 지금 인간들이, 아무것도 모르는 인간들이, 하나님 오시면 죽여버릴 그 인간들이 복, 복, 복을 외치고 있거든요. 그러면 우리는 반대로 나가야죠. 저주받은 사람들을 탓할 것이 아니에요. 그러면 이스라엘 역사에서는 어떻게 이야기하는가.
하나님께서 어떻게 지옥과 천국의 출입구를 찾는 방법을 이야기하시는지 이야기합니다. 신명기 32장 9~10절에 보면 참 이런 말이 어려운데요, “여호와의 분깃은 자기 백성이라 야곱은 그 택하신 기업이로다” 선택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선택에 대해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의 택하신 기업이로다, 여호와께서 그를 황무지에서 짐승의 부르짖는 광야에서 만나시고”
사람들은 황무지, 짐승들만 살고 있는 그 광야를 사람들은 절대로 복된 세상이라고 간주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누구나 저주받은 곳이라고 봐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하느냐 하면 자기 백성을 여기 10절 말씀에 보면 황무지에 집어넣고 짐승들이 부르짖는 곳으로 데려가요. 짐승들이 부르짖는 곳으로. 그게 너에게 딱 맞다는 거예요.
네가 기피 하고 싶은 네가 두 번 다시 생각지도 않는 이 환경이 너에게 적합하다는 겁니다. 네 주제 파악에 딱 맞다는 겁니다. 그 속에 집어넣은 겁니다. 그러면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 그 뒤에 보면 하나님께서 그다음에 뭘 하시느냐 하면 집어넣어 놓고 보호하십니다. 보호하시는데 어떻게 보호하시느냐 하면 자기 눈동자같이 보호하신다. 여기에 자기 눈동자가 나와요. 아침에 불렀던 찬송가에서 그 ‘눈동자’라는 단어가 나와요.
눈동자같이 자기를 보호하거든요. 그렇게 되면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내가 생각했던 내 자리, 내 위치, 내 토대가 한순간에 날아가 버리고 눈동자니까, 눈동자는 어떤 다른 큰 신체에 소속되어 있는데 그냥 소속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가장 귀한 존재로 소속되어 있는 것이 눈동자예요. 그러면 다른 것 찔러도 그렇지만 눈동자 찌르면 눈동자 근처에 모든 뇌 자극이 거기에 집중해서 즉각적으로 방어하게 하도록 자율신경이 조종되어 있거든요. 중요한 기관에 대해서는.
심장이나 이런 것은 자율신경계를 사용해서 딴 생각을 하면서 의식하지 않더라도 자체적으로 방어가 되도록 돼있어요. 이 눈동자도 그런 것 중에 하나예요. 눈 깜빡이면서 눈꺼풀이, 차단막이 내려와서 먼지로부터 날카로운 것으로부터 막도록 돼있어요. 이 눈동자처럼 지킨다는 말이죠. 그러면 이렇게 눈동자처럼 지켜버리면 이거는 이미 어떤 소속이 되어버려요.
그 소속되었다는 것을 뭐라고 표현하느냐 하면 신명기 32장에서는 선택받았다고 하는 겁니다. 선택받은 거예요. 저는 이것을 눈동자라고 하지 않고 다른 표현으로 해드리겠습니다. 광부의 모자. 광부의 모자는 다른 모자와 달라서 광부는 어디서 활동하느냐 하면 깜깜한 땅 밑, 지하 어두운 데서 일하는 사람이에요. 그러면 그들의 눈동자는 부차적이에요.
눈이 있어도 깜깜한 데서는 소용없습니다. 그러면 그들의 눈동자를 먼저 그들의 눈동자의 시선을 유발하기 위해서는 눈동자보다 더 중요한 것이 모자에 달려야 합니다. 그게 뭐냐 하면 전등이죠. 전등. 큰 신체 안에 눈동자가 되려면 큰 신체가 가는 그 위치가 흔히 사람들이 생각하는 복된 위치가 아니고 짐승들이 울부짖고 황무지인 곳으로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을 눈동자로 박아서 이끌어 주십니다.
그러면 그 등치, 눈동자가 이 눈동자라면 그 등치, 눈동자를 포함한 그 등치는 누구냐는 겁니다. 바로 동행하시는 하나님이 됩니다. 그래서 하나의 결합체가 되는 거예요. 지금 욥은 어떤 결합체라는 의식이 전혀 없어요. 하나님은 저기 계시고 나는 독립적으로 따로 있습니다. 그런데 이건 이스라엘과 달라요. 욥은 이방인지만 이스라엘은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 잠시만 수고해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손을 한번 내보시기 바랍니다. 손을 내보시면 여러분 손가락이...손 내밀라고 정말 내미는데 우리교회 교인들이 그런 교인이 아니잖아요. 뭐라 해도 끄떡도 안 하는데 언제부터 따라 했어요? 괜히 미안해지는데 저만 할게요. 손가락이 있으면 독립체예요. 고집들 있습니다. 자존심 셉니다. 자존심 세고 남에게 안 지려고 하고 코로나 백신 맞으라고 하면 후딱 맞아요. 전부 다 개개의 손가락들이 살려고.
그러나 이 손가락들이 손에서 같이 움직인다는 거예요. 이게 이스라엘이에요. 이게 이스라엘입니다. 이스라엘적 안목이 이 손이에요. 나는 거기서 삐져나온 손가락에 지나지 않아요. 삐져나오고 파생된 거예요. 부부가 싸운다. 손가락끼리 싸운 거예요. 그러면 화해는 몸통을 통해서 화해해야죠. 몸통을 통해서. “내가 또 잘난 체했다” “나도 잘난 체했다. 미안해요”라고 하면서요.
“미안했어요. 이렇게 같이 있어 줘서 감사해요” “나도 미안해요”라고 이제는 서로 미안하다고 또 싸워요. 그러다가 또 화해하고. 하나의 손에 우리는 지체거든요. 그중에 있으니 눈동자같이 지켜주는 거예요. 내가 나를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욥의 실수가 바로 그거예요. 본인이 본인을 지키는 것이 아닌데 자기는 친구랑 비교해서 안 지려고 친구보다 더 믿음 좋다고 하면서 자꾸 나와 한판 붙을 사람 나오라고 이런 식으로 자꾸 불러내는 거예요.
그렇다면 지금 이스라엘에 대해 방금 말씀드렸던 것처럼 이스라엘을 하나의 보석처럼 하나님 자기 몸체에 보석을 박아버려요. 그러면 하나님은 거대한 로봇이라고 보고 로봇에 이스라엘이라는 인간의 형식은 눈동자처럼 박혀있는 형식입니다. 박혀있는 형식인데 왜 눈동자냐면 광부의 모자에 달린 등불처럼 미래와 앞에 있는 모든 전개될 시간의 역사를 이스라엘 중심으로 이끄시는 거예요.
거대한 로봇이 걷는데 쿵!쿵! 걸으면서 새로운 현실들을 꾸려나가고 형성하고 없는 사건들을 이스라엘 중심으로 만들어 내면서 이 어두운 세계를 뚫고 가는 거예요. 그렇게 뚫고 가면 어디가 나오느냐 그게 바로 지옥이 나오고 천국이 나오는 겁니다. 이거는 인간들이 자기 자아 위주로 천국과 지옥 복과 저주를 찾아낼 수가 없어요. 어떤 경우라도 나는 지옥 안 가야지 나는 천국 안 가야지를 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생각하지 말고 어디에 박히세요. 박히고 정 안되면 광부의 모자를 쓰시고 주님의 모자를 쓰시고 ‘내 눈은 그야말로 맹인의 눈에 불과합니다, 주여. 그저 말씀으로 앞길을 비춰 주시옵소서’라고 주님의 말씀 권위에 이스라엘의 권위에 인도하심의 권위에 맡기세요. 맡겨야 합니다. 그렇게 가게 되면서 지금 벌어지는 사건, 사건이 주께서 거대한 몸집에 눈동자로 우리로 하여금 가게 하면 우리는 가는 모든 길이 우리에게는 생소하고 낯설기 짝이 없어요. 모든 일어나는 벌어진 일이. 예상 못 했으니까요.
제가 서울 가면서 기차를 타면서 늘 짜릿한 느낌이 드는데 구미에서 김천까지 고속열차가 달리거든요. 그런데 이렇게 바깥 풍경을 보면 고속열차 길이 구미에 있는 금호산 밑을 질주하듯이 충돌해서 들어가 버립니다. 차들은 국도를 따라 산 주위를 돌아서 가는데 기차는 용감하게 돌진해 버려요. 깜짝 놀라죠. 그런데 얼마 안 가서 그게 터널이 있다고요. 길이 나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주님께서 가신 그 생명의 길이, 좁은 길이 그야말로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이 아니고 고생한다고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우리로 하여금 네가 종속되어 있다는 거, 네가 결정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일깨우는 식으로 자꾸 사건, 사건이 터져버립니다. 내가 자꾸 해결해 보려고 나가버리면 그것은 우리에게 막강한 공포심이 확 밀려오죠. 거대한 공포심이.
그래서 우리는 거기에 손을 떼게 됩니다. 손을 떼면서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가. 내 예상과 내가 결합 되어있다가, 우리는 결합 되어있는 줄 몰랐죠, 그러나 주님께서 도발적이고 돌진하듯이 어떤 일을 통과시켜 버리면 나와 내가 어떤 상태냐 하면 결별해버려요. 그러니까 성도는 다시 한번 성도는 주님에게 눈동자로 박힌 사람은 전에 주님 없이 손가락처럼 독자적으로 있던 나와 늘 결별했고 이제는 헤어진 사이라는 것을 매 순간 그걸 느끼게 만듭니다.
‘세상이 내 뜻대로 안 되는구나’라고 항상 아찔한 경우를 계속 경유 하고 느끼게 만들어요. 한가지 예를 들게 되면 요새 뉴스에 보면 초장부터 맨날 무슨 이야기가 나오냐 하면 코로나 이야기가 나와요. 뭐 500 몇 명, 600 몇 명 하면서 코로나 이야기 나오는데 여러분들이 그걸 한 번 생각해 보세요. 가족끼리 자주 만나니까 어떻습니까? 사람이 아무리 가족이라도 자주 만나면 피곤해요.
그런데 돈은 아무리 만나도 피곤하질 않습니다. 이게 뭐냐 하면 인간이 얼마나 독자적 존재냐는 겁니다. 나밖에 모르는 존재냐는 겁니다. 이거 그냥 두게 되면 눈동자 아니에요. 혼자 따로 놉니다. 천당 가는 것도 자기가 천국 가는 길을 따로 연구하고, 성경 읽고 따로 연구하고 지옥 가는 길은 기피 하려고 따로 연구해요. 이래서는 전혀 이것은 천국이고 뭐고 소용없습니다.
이스라엘처럼 주님과 함께 결합 된다면 곧 그게 뭐냐 하면 내가 생각하는 장래와 결별해야 해요. 나와 헤어져야 해요. 내게 지금 일어난 일은 내 소망과는 아무런 상관없이 같이 결합 되어있는 주님의 무슨 계획이 있어서 뜻이 있어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다는 것을 소급해서 회고적으로 생각해 보시길 바랍니다. 그래서 어떤 일이 벌어지거든요, 여러분은 하나님 앞에 이렇게 이야기하세요. ‘하나님, 저 여기서 내려요’라고 이야기하세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래 네가 진작 독자적으로 했던 것은 이 천국 가는 길에서, 이 열차에서 네가 벌써 내려야 했었어. 너는 가고 이제는 주님과 결합 되어있는 모든 일이 감사할 수밖에 없는 주께서 뜻이 있어서 일으킨 일인 것을 여러분 동승 하시고 탑승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독자적으로 독립적으로 내가 잘나면 구원받는 줄 알았습니다. 이 얼마나 이방인 적이고 참, 하나님의 언약이 없는 사고방식이었습니까. 이 현실의 주인공은 주님께서 자기 백성을, 택한 백성을 거둬주는데 우리는 그것을 몰랐습니다. 이제는 주님의 계획이 지금의 나를 덮쳐서 나를 눈동자처럼 안에 포함시켰다는 사실을 놓치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