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두움의 한계
2021년 5월 16일 본문 말씀: 욥기 24:13-17
(24:13) 또 광명을 배반하는 사람들은 이러하니 그들은 광명의 길을 알지 못하며 그 첩경에 머물지 아니하는 자라
(24:14) 사람을 죽이는 자는 새벽에 일어나서 가난한 자나 빈궁한 자를 죽이고 밤에는 도적 같이 되며
(24:15) 간음하는 자의 눈은 저물기를 바라며 아무 눈도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고 얼굴을 변장하며
(24:16) 밤에 집을 뚫는 자는 낮에는 문을 닫고 있은즉 광명을 알지 못하나니
(24:17) 그들은 다 아침을 흑암 같이 여기니 흑암의 두려움을 앎이니라
욥은 세상을 빛의 구역과 어두움의 구역을 나눕니다. 그렇게 나누어야 될 필요성이 있었을까요? 욥의 이러한 세상 보기는 오늘날 보통 인간들이 평소에 태도를 그대로 반영해주고 있습니다. 선한 자들에게는 비난할 것이 없는 자들이고 악한 자들은 비난할 것이 있는데 그 악한 자들은 타인을 괴롭히는 자로 규명합니다.
즉 밤이 되면 모든 인간들이 활동하지 말아야 하는 시기인데 불구하고 그 밤에 움직이는 자들은 수상한 의도가 있다는 겁니다. 도적질하고 강도질하고 간음하고 품치고 자신의 얼굴을 변장하면서 순수하게 자기 뜻을 드러내지 못하고 있다는 점을 욥은 감안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욥의 이러한 평가의 문제점은 그가 사람을 상대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욥은 지금 하나님하고만 상대해야 합니다. 그에게 고난을 주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괜히 타인들 분류해서 악한 자를 지목한다고 해서 그만큼 고통받는 자신이 정당화되는 것이 아닙니다. 빛과 어두음의 구분은 나중에 예수님께서 오실 때 제대로 드러납니다. 빛과 어두움 사이의 구분은 빛에 속한 분의 고유한 몫입니다.
요한복음 12:35-36에 보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직 잠시 동안 빛이 너희 중에 있으니 빛이 있을 동안에 다녀 어둠에 붙잡히지 않게 하라 어둠에 다니는 자는 그 가는 곳을 알지 못하느니라 너희에게 아직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 그리하면 빛의 아들이 되리라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떠나가서 숨으시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은 ‘너희들 모조리 어두움이다’는 겁니다. 곧 인간은 어두움에서 스스로 벗어날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인간 세계에서 외부에서 인간 세계로 침투했을 때, 비로소 이 세상은 어두움으로 나타난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이 어두움에 충실하게 되는 것이 마땅한데 왜냐하면 그래야 예수님이 만이 오직 빛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처해있는 인간 세상에서 인간의 보고 듣고 마음의 깨달음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하십니다. “이렇게 많은 표적을 그들 앞에서 행하셨으나 그를 믿지 아니하니 이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이르되 주여 우리에게서 들은 바를 누가 믿었으며 주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나이까 하였더라
그들이 능히 믿지 못한 것은 이 때문이니 곧 이사야가 다시 일렀으되 그들의 눈을 멀게 하시고 그들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으니 이는 그들로 하여금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닫고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하였음이더라”(요 12:37-40) 곧 인간의 눈은 빛을 보지 못하기 위해 달려 있고 인간의 귀는 빛의 말씀을 듣지 못하기 위해 달려있고 인간의 마음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기 위해 작용되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서 피흘리시고 돌아가셨습니다. ‘피’라고 할 때에 이 개념으로 이해하시면 쉽습니다. 즉 “깨어짐”입니다. 하나님과 인간 관계가 깨어졌다는 증거가 피흘리심입니다. 이것은 곧 더 이상 하나님께서 인간을 인간으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뜻이기도 하십니다. 그러면 천국의 백성은 어떻게 형성이 가능한가요?
욥이 제대로 빛도 어두움도 모르는 것은 지극히 당연합니다. 욥은 지금 인간의 막다른 길에 직면해 있습니다. 이 점에 있어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차이점이 있다면 이스라엘에게는 그 막다른 길이 하나님에 의해서 뚫였다는 점입니다. 어떻게 뚫였을까요? 하나님의 지시에 의해서 히브리인 앞에 선 모세와 아론은 되레 자기 백성들로부터 천대를 받습니다.
이는 히브리인들에게 현 애굽나라의 국가 체제 외에 다른 대안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있어 애굽이라는 대국은 자신들을 살리기 위해 적절한 환경이라고 보았습니다. 쉽게 말해서 히브리인들은 그저 살고 싶었을 뿐입니다. 이왕 사는 것 덜 힘들지 않는 삶이 보장되기를 바랄 뿐입니다.
따라서 이 점에 있어 히브리인이나 욥이 별반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 히브리인들에게 빛의 세계로 빠져나가는 길을 만들어주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피’입니다. ‘어린 양의 피’입니다. ‘피’란 하나님과 인간의 사이가 깨어졌음을 알리는 표시입니다. 이 표시를 하나님께서는 히브리인들 전체에 일괄적으로 덧입히시기를 원했던 겁니다.
이미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관계가 깨어졌기에 인간 세계가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혹독한 저주를 받는다 할지라도 하늘을 향해 원망할 권한이 없음을 나타내는 증거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허락하신 겁니다. 반면 애굽인들에게 이 ‘깨어짐의 증거’가 없습니다. 애굽인들 중에도 얼마든지 선한 성품을 지니고 친절하고 부모에게 효도하고 불의한 이웃을 도와주는 식으로 살아온 사람들이 많을 겁니다.
하지만 그들이 징집되어 이스라엘을 쫓는 부대로 참여하고 홍해 작전에 투입되었다면 그들은 모두 하나님에게 몰살당하게 됩니다. 도대체 그들이 무엇이 문제입니까? 이것은 그들 안에,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깨어졌음’을 담지 않은 채 세상을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자신들이 ‘어두움’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 겁니다.
그렇다면 히브리인들이 어린 양의 피를 바른다는 의의는 신약에 와서 어떻게 마무리될까요? 마태복음 8:2-4에 보면, “한 나병환자가 나아와 절하며 이르되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하거늘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시니 즉시 그의 나병이 깨끗하여진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삼가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고 다만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모세가 명한 예물을 드려 그들에게 입증하라 하시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문둥병자는 자신의 요구에 대해서 예수님이 들어주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생각을 가진 문둥병 환자를 고쳐주고 후에 불러 세워서 다음을 당부했습니다.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모세가 명한 예물을 드려 그들에게 입증하라”는 겁니다. 이는 레위기 14장에 나오는 문둥병 환자가 완전히 나은 후 하나님께서 감사하는 제사를 뜻합니다.
예수님의 병 고침에 대해서 마태복음 8:17에 잘 나와 있습니다.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에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 즉 문둥병자는 자신의 문둥이병이 들린 육체를 자신의 육체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육체를 자신의 육신으로 삼으시고 그로부터 시작해서 건장한 몸으로 바뀔 때에 투입된 그 제물까지 모두 자신의 생애를 채울 일이라고 여겼던 겁니다.
그래야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가 성립합니다. 예수님께서 환자의 병을 자신의 병으로 가져오시는 의사이십니다. 그렇게 되면 자신의 생애를 문둥병부터 시작하시려는 겁니다. 이로서 ‘대신 죽으심’이 효력을 발생하는 겁니다. 환자였던 사람은 절대로 건강한 몸을 자신의 몸으로 간주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게 빛이 내장된 성도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안에서 우리 자신의 것으로 채워지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83강-욥기 24장 13~17절(어두움의 한계)210516 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욥기 24장 13~17절입니다. 구약성경 783페이지입니다.
“또 광명을 배반하는 사람들은 이러하니 그들은 광명의 길을 알지 못하며 그 첩경에 머물지 아니하는지라, 사람을 죽이는 자는 새벽에 일어나서 가난한 자나 빈궁한 자를 죽이고 밤에는 도적같이 되며, 간음하는 자의 눈은 저물기를 바라며 아무 눈도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고 얼굴을 변장하며, 밤에 집을 뚫는 자는 낮에는 문을 닫고 있은즉 광명을 알지 못하나니, 그들은 다 아침을 흑암같이 여기니 흑암의 두려움을 앎이니라”
욥이 생각하는 이 세상이라 하는 것은 같은 인간들의 사회입니다. 남들은 어떻게 행동하느냐죠. 남들은 어떻게 행동하고 나쁜 사람은 어떻게 행동하고 나쁘지 않은 사람은 어떻게 행동하고 나는 둘 중에 어느 편에 속하는가. 여기에서 자기 자신을 규명해서 나는 여기라고 생각하고 싶어 하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들을 뭘로 나누려고 하느냐 하면 광명, 대낮에 살아가는 사람과 흑암, 어두운 곳에 살아가는 사람으로 욥은 오늘 본문을 둘로 나누고 있습니다.
밤중에 사는 사람은 낮에 잠을 자다가 밤에 일어나서 남들이 자고 있을 때 나쁜 짓을 골라 하는 그런 사람은 어두움에 속하고 광명에 속한 사람은 잠들 때 잠자고 정상적인 자기 활동을 하는 사람, 밤에 활동하는 사람과 다른 삶을 사는 사람이 광명이라고 판정을 누가 내리냐 하면 욥 본인이 판정을 내리는 겁니다. 그래서 욥은 이렇게 판정을 내리면서 자기의 고통 가운데서 자기가 품고 있던 자기 속마음을 하나님이 유도하는대로 다 털어놓고 있습니다. ‘나는 이렇게 살았습니다’라고.
그 당시 입장에서는 그것이 인간의 한계였죠. 이렇게 제대로 광명 쪽에 속한 욥은 왜 하나님으로부터 그렇게 심한 아픔과 병과 고난을 받는지에 대한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해결되지 않는 욥의 입장에서 선과 악을 나누는 태도는 오늘날 교회 다니면서도 여전히 해결될 수 없고 해결 받지 못하는 그러한 자신의 한계를 욥이 대신 보여주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욥이 신약과 비교해서 성경에 구약 이스라엘과 비교해서 욥의 문제점이 어디 있는가 우리가 그 문제점을 모르면 안 되죠. 모르면 욥의 딜레마에 같이 합세한 바가 되기 때문에 곤란합니다. 욥의 잘못은 사람을 상대한다는 거예요. 분명히 자기 고통은 하나님에게서 왔기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따져야 하는데 하나님은 침묵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쪽에서 침묵하고 막히니까 어디에서 출구를 트려고 하느냐 하면 사람들 사이에 옳고 그름을 판단해서 자신의 고통 문제의 원인을 찾으려고 그렇게 생각했는데 그러나 욥은 지금 육신의 사망, 곧 죽게 될 자신의 육신만 한계가 아니라 자신의 정신까지 막다른 쪽으로 내몰리고 있습니다. 욥이 주는 우리에게 있어야 할 귀한 지혜는 바로 그가 인간의 막다른 길을 발견했다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인간은 앞길이 막혀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이스라엘의 특징이 뭐냐 하면 안 막혀있다는 겁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것에 대해서 전부 감사해야 해요. 애굽 사람이나 이방 사람들은 여유롭게 살고 풍족하게 살고 부유하게 살지만, 인생 자체가 막혀있다는 것은 이건 재벌이라도 해결점이 없으니까 막혀있는 거예요.
온갖 것들 하며 골프도 쳐보다가 차도 바꿔보고 돈 못 써서 환장하거든요. 해외 다 돌아다녀 보고 명품 사보고 뭐 아무리 해도 갈급하고 메말라가는 자신의 마음에 허전함을 메꿀 수가 없습니다. 욕망은 채워봤자 얼추 채웠다고 하는 그 순간 욕망이 또 약을 올리죠. ‘이거는 해봤나? 이것까지 해봤나?’라고 계속해서 욕망이 우리를 약을 올리고 있어요.
끝까지 갈수록 인간의 갈급증, 영혼의 갈급증은 오히려 채워지지 않고 더 증가하죠. 그래서 욥의 막혀있는 이 딜레마는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서 또는 신약의 성도를 통해서 이게 뚫리게 되어있습니다. 어떻게 뚫리는지 출애굽을 통해서 알 수 있는데요. 출애굽을 통해서 뚫려요. 오늘 본문에서 욥이 중요한 단어를 언급하고 있어요. 인간들을 상대하면서 인간의 두 상반되는 서로 차이나는 상황을 뭐로 표현했느냐 하면 하나는 광명, 빛이라고 하고 한쪽은 어두움으로 본 거예요.
그래서 이렇게 보시면 됩니다. 사람과 상대하다가 이제는 사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사람이 있는 자리가 중요하고 그 사람의 자리는 달랑 두 종류밖에 없다. 하나는 빛이고 하나는 어둠이다. 이 이야기는 우리가 출애굽기 보기 전에 먼저 요한복음부터 보게 되면 거기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을 사람들은 잘 못 알아들었는데 그 말씀을 제가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요한복음 12장 35~36절에 보면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직 잠시동안 빛이 너희 중에 있으니 빛이 있을 동안에 다녀 어두움에 붙잡히지 않게 하라 어두움에 다니는 자는 그 가는 바를 알지 못하느니라, 너희에게 아직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 그리하면 빛의 아들이 되리라”
어두움이라서 사방이 막혀있어요. 어두움은 길이 없어요. 막혀있고 갇혀있다는 거죠. 그런데 빛이 있다는 말은 어느 쪽인가 어두움에 어떤 구석이 빈자리가 있다는 거예요. 빛이 침투했다는 것은 어두움이 온전한 어두움인데 그 어두움과 빛의 연결고리가 비로소 이 어두운 상황에서 이게 생겨났다는 겁니다. 엄청난 것을 예수님께서 이야기하는 거죠.
그런데 사람들이 이것을 못 알아본 이유는 그 당시 유대인이나 제자들이나 자꾸 누구 붙들고 자기 자신의 잘남을 증명하고 싶으냐 하면 같은 인간들 붙들고 증명하려는 거예요. 내가 너보다 낫다. 너는 나보다 낫네. 한 수 배울까. 나는 너보다 훌륭해. 자꾸 사람 붙들고 사람을 상대하며 피곤하게 자기 자신은 이렇다 이렇다고 우기는 겁니다.
똑같은 어두움에 속한 인간이 똑같은 어두움의 사람 붙들고 뭘 해봐야 그건 해답이 안 나오죠. 어두움 바깥에 계신 분이 어두움 속에 들어올 때 이 어두움은 어두움으로 발각되고 바깥은 빛으로 형성되고 정해집니다. 그러니까 우리 성도로 하여금 사람과 상대해서 사람의 모임, 사람의 공동체가 전부인 줄 아는 우리가 우리 안목이 어디까지 넘어가야 하느냐 하면 ‘사람들이 있다. 사람이다’라는 것에서 더 넘어서서 빛과 어두움으로 구분되는 그 세계까지 눈이 뜨여야 해요.
나는 사람이라고 우기지 말고요, 내가 있는 곳은 빛의 자리냐 어두움의 자리냐 거기까지 나가야 해요. 그 빛의 자리에 있는 사람의 특징은 뭐냐 세상을 어둡게 보는 것이 자기는 빛에 있다고 확인될 수 있고 증명할 수 있어요. 세상 자체가 어둡다. 그러면 어둡다는 것을 요한복음 12장 39~40절에서 이렇게 표현했어요. 어둡다는 것은 “저희가 능히 믿지 못한 것은 이 까닭이니 곧 이사야가 다시 일렀으되, 저희 눈을 멀게 하시고 저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으니 이는 저희로 하여금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닫고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눈을 만드신 것은 보지 못하라고 눈을 만들었고 듣지 못하라고 귀를 만들었고 깨닫지 못하라고 마음을 만든 거예요. 이것은 인간들이 인간 사회에 살면서 파악할 수가 없어요. 왜? 서로 잘 통하니까.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통한다 싶으면 우리끼리 하나로 한편 먹자는 이런 식으로 같은 마음 통하는 사람이라고 이렇게 자부하니까 인간이 어느 구석에서 봐서 내가 눈이 멀었다를, 귀가 어둡다를, 마음이 고장 났다를 파악할 수 있는 계기를 인간은 만나지 못한 것이 인간의 불행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뭐냐 하면 나를 만나서 너의 눈은 망가졌고 너의 귀는 엉망이고 네 마음은 죄악이라는 것을 내가 십자가 앞에서 그걸 발견하라는 거예요. 이 비슷한 이야기가 출애굽에 나옵니다. 출애굽 사건에서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오기 전에 먼저 뭘 알아야 하느냐 하면 애굽에 있는 히브리인들이 어떤 마음가짐을 가지고 모세와 아론을 대했는지가 상당히 중요한 겁니다.
우리는 성급해서 히브리인들이 모세 아론 만나서 그냥 살았다. 끝. 이렇게 쉽게 정리하는데 그렇게 하면 안 되고 히브리인들이 모세 아론 만나기 전에 얼마나 극렬하게 반대했습니까. 모세 아론에게. “당신은 우리를 살려주려고 하는 거예요? 죽이려고 하는 거예요?”라고 이런 식으로 대들었단 말이죠. 오늘날 복음 전하면서 나타나는 현상과 똑같은 현상입니다.
‘당신은 매사가 왜 부정적이야? 맨날 입만 떼면 죄고 맨날 죽으래. 그래서야 교인 하나 건지겠어? 뭐가 먹혀들겠어? 좀 더 잘 된다. 나중에 부자 된다. 잘 먹고 잘살 것이다. 하나님이 복을 채워주신다’라는 이런 희망적이고 낙관적인 이야기 좀 하면 어디 덧나나? 덧납니다. 그게 바로 넓은 길로 가는 사람의 특징들이고 공통점이에요. 안 망하려고 아주 환장을 하고 있습니다.
출애굽 되기 전에 히브리인들이 왜 그렇게 모세와 아론에게 달려드느냐 하면 그들은 자기가 나약하고 미약하기 때문에 자기를 지켜줄 든든한 국가 체계가 시스템이 없으면 본인이 살 수 없는 거예요. 그런데 모세와 아론이 하는 이야기가 그거예요. 살려고 생각하니까 국가를 의지하게 되는데 하나님께서 너를 이미 죽은 자로 간주한다고 생각해 봐라.
그러면 그동안 너에게 협박과 공갈의 대상이 되었던 이 국가 자체가 더이상 거기에 주눅 들지 않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출애굽 되기 전 히브리인들은 국가니 애굽이니 모세가 하나님을 거론은 하지만 가장 기본은 뭐냐 하면 ‘나 좀 삽시다. 그동안 자식 키운다고 애먹었는데 여기서 죽으면 너무 내 인생이 공들인 것이 아까워서 여기서 내가 인생 계획 포기 못 합니다. 좀 살려주세요’라고 비는 거예요.
제가 언제 강의에서 그런 이야기 했어요.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을 상담가로 이해하고 있어요. 상담이 뭡니까? 죽으려고 상담 안 하잖아요. 살려고 상담하는 겁니다. “우리 아이가 폭력적이에요, 사자머리 오 교수님. 어떻게 교육하면 우리 아이가 폭력적이지 않습니까?”라고 상담받고 하는데 결국 나중에 오 박사가 하는 이야기가 전부 다 부모 탓이에요. 부모가 자기 위신부터 먼저 챙기고 하니까 가정교육이 될 리가 있습니까. 자기 위신 체면을 먼저 챙기니까.
그리고 출애굽 나서기 전에 히브리인들이 그저 모세 아론을 반대하면서 나는 너같은 인간 오라고 하나님께 기도한 적 없다고 이런 식으로 대들 때 우리는 뭣과 대비를 해야 하느냐 하면 다니엘 세 친구와 대비를 해보세요. 다니엘 세 친구가 국가 고급 공무원이면서도 나라에서 금신상에게 절 안 하면 불에 집어넣는 것을 뻔히 알고 있어요. 알고 있으면서도 그들은 우상에 절 안 했습니다.
답답해하는 것은 누가 답답해하느냐 하면 임금님이 답답하고 법을 세운 사람들이 답답해서 “너 그러면 진짜 죽는다”라고 협박하니까 “죽더라도 주께서 어떻게 살리겠죠. 그리고 죽더라도 할 수 없지요”라고 나오는 게 다니엘 세 친구잖아요. 참 다니엘 세 친구가 숫자는 세 명이지만 주님 말씀대로 두세 명이 나와 함께 있으면 그것이 바로 교회 아닙니까. 참 교회 간판이 아까워요. 정말.
간판은 교회인데 안쪽은 절간이라. 이게 뭐 맞질 않아요. 교회라는 것이 뭐냐 하면 더 이상 살 생각이 없는 사람들의 집합이에요. 살 필요가 없어요. 살 이유도 없고. 내가 살 근거가 다 날아간 겁니다. 요한복음 2장에 나오면 가나안 혼인 잔치가 나오는데 그 혼인 잔치에서 예수님께서 물과 포도주를 만들었단 말이죠. 물은 H2O로 수소 원자 2개에 산소 원자 1개가 결합 되어서 물이 H2O거든요.
그러면 포도주는 뭐냐. CH3CH2OH예요. 에탄올 5.2%가 담겨있거든요. 그러면 과학자들이 H2O에서 어떻게 에탄올로 바뀔 수 있는가. 그것도 순식간에. 그냥 물을 갖고 걸어가는데 이게 술로 바뀌었어요. 물이 술로 바뀌었습니다. 주님께서 이야기하는 것은 뭐냐 하면 물은 혼인 잔치라는 예수님이 계시는 혼인 잔치에 전혀 필요치 않아요. 하나님은 자기가 필요한 사람은 자기 속에 있는 능력을 집어넣어서 물같은 존재를 포도주같이 맛있는 것으로 전환 시키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분이 예수님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꾸 버티는 거예요. 물이 되어야 한다는 거예요. 왜냐 하면 남들이 나를 그렇게 본 것처럼 남들이 나를 본 것을 유지하는 것이 남에 대한 예의고 배려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어두움이 어두움으로 보면 우리가 어두움 되어야 합니까. 굳이? 세상이 어둡다면 같이 어두워야 하는 거예요? 빛 되면 안 됩니까? 뭐 따돌림당한다고요? 둘 중 하나는 미쳤지요.
왜 안 미치려고 하는 겁니까. 왜. 뭐가 잘났다고 안 미쳐야 해요. 우리는 미친미친 제곱을 해도 괜찮아요. 뭘 해도 우리는 죄인이기 때문에 어떤 상황이 되어도 우리는 군소리 하지 말아야 해요. 불만 없어야 해요. 지금 출애굽기에 히브리인들은 살려고 해요. 주님은 너를 살리기 위해서 출애굽 한 것이 아닙니다. 거기에 어린양의 가치를 집어넣기 위해서 출애굽 사건을 만든 거예요.
어린양이 그냥 죽었습니까? 어린양을 그냥 바쳤습니까? 피를 내서 자기 손으로 피를 문설주에 발랐잖아요. 피라는 의미를 생각할 때 이거 하나만 생각하세요. 피는 관계 깨어짐이에요. 모든 게 깨어져야 해요. 접시 깨질 때 쨍그랑하고 산산 조각나잖아요. 하나님과 인간의 세계는 이 접시처럼 다 깨어졌음을 알려주는 것이 피입니다.
애굽 사람들은 이 깨진 관계를 몰라요. 출애굽기에서 히브리인들이 홍해 바다를 건너서 무사히 탈출했죠. 모세가 지팡이를 대니까 양쪽에 갈라져서 벽이 되었죠. 벽이 되고 그사이에 길이 나서 무사히 이스라엘 백성은 통과했고 그 뒤에 왕의 지시를 받고 따라오는 애굽 군사들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어느 쪽을 생각을 해보느냐 하면 그 애굽 군사 중의 하나가 일 년 전에 군대 갔던 내 자식이라고 생각해 보세요. 내 아들이라고 생각해 보세요.
내 아들이 군에 갔다. 해병대를 가든지 UDT를 가든지 가서 타어어 잡아당기기 대회를 하든지 빡세게 훈련받는 군인이란 말이죠. 군인이면 아버지 입장에서 그 아이는 착하고 성실하고 어질고 모범적이고 인격적이고 남 배려할 줄 알고 막돼먹지 않고 생각이 있는 아이인데 그리하면 뭐합니까. 홍해 바다 빠져 죽었는데. 홍해 바다에 빠져 죽었어요. 애굽 군인들 몽땅 다 전멸했습니다.
하나님이 그 착하고 어진 애굽 군인으로 징병당한 그 아들을 하나님이 왜 죽입니까? 왜 죽이죠? 방금 제가 이야기했잖아요. 인간은 자기 한계를 모르는 거예요. 어질고 착하고 인격적이고 배려하고 공부 잘하고 부모에게 효도하고 하는 그 애굽 군인들 안에 뭐가 없느냐 하면 쨍그랑하고 깨지는 것이 없어요. 깨질 피가 없어요. 유월절 피가 없다고요.
하나님과 인간은 연결될 수 없는 다른 세계에 따로 놓여있다는 것을 담을 수 있는 증거가 없는 거예요. 인간에게는. 그동안 살아온 것도 그것만도 감사하란 말이죠. 물은 물이지 포도주가 될 수 없어요. 주님께서 애초부터 아무도 몰래 본인이 가서 물 가지고 포도주를 만든 것이 아니고 일부러 항아리에 물을 담게 했습니다. 그 항아리를 제가 봤어요.
그 가나안 혼인 잔치했던 곳에 가면 항아리 만들어 놨어요. 항아리 6개. 물론 그 항아리는 아니겠지만 예수님 당시 그 유적지에 항아리가 있어요.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고 했을 때 채운 사람들도 분명히 알아요. 이게 물을 집어넣은 것을. 마리아는 포도주 달라고 했는데 예수님께서는 물로 시작하는 거예요. 물로부터 시작할 때 마리아가 하는 말이 군소리하지 말고 우리 예수님이 시키는 대로 하라고 한 거예요.
그래서 군소리 없이 물을 들고 갔죠. 집었을 때 물이었습니다. 들고 1.245 미터 갔을 때 물이었어요. 2.67 미터 갔을 때 물이었습니다. 뚜껑이 달렸으니 계속 물로 알고 있죠. 그런데 막상 도착해서 뚜껑 열고 보니까 그게 포도주란 말이죠. ‘이게 언제 물이 포도주 되었습니까?’라고 묻지 말고 ‘예수님은 누구십니까?’라고 물어야 해요.
이 세상은 어둠이고 나는 빛의 세계에서 왔다. 그래서 어두움은 어두움이어야 하기 때문에 너희로 하여금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고 마음이 있어도 깨닫지 못하게 그렇게 만들기 위해서 내가 왔다는 겁니다. 이제부터 중요합니다. 욥의 한계가 그거예요. 내가 이미 있으니까 내 쪽에서 어떻게 새로운 지식을 알아서 하나님과 만나 볼까 하고 애쓰는 것이 욥인데 그 욥은 지금 문제 있어요.
내 쪽에서 아무리 좋은 지식을 갖고 있더라도 우리는 하나님을 만날 수가 없습니다. 욥은 그걸 모르고 있어요. 지금 아무리 애써도 주께서는 응답이 없어요.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욥의 지시 따라 움직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욥은 모르고 있단 말이죠. 제가 말씀 쉽게 드리면 이렇습니다. 여러분들이 불신자에게 잘해주세요. 참 잘해주셔야 해요.
왜 잘해주셔야 하느냐 하면 우리가 불신자에게 참 친절하게 잘해주고 격려하고 사랑을 베풀고 그렇게 해줘야 그 사람이 기어이 지옥 가는 것은 주님의 개입이 있어야 하는 거예요. 너는 지옥 갈 인간이니까 나는 너랑 안 논다고 이래 버리면 이건 주님의 개입이 아니고 일방적인 나의 개입이 되어버려요. 이건 뭐 내가 메시아도 아니고 재판장도 아니고 왜 그래요? 내가 그럴 필요 없어요.
여러분들에게 불신 적인 친구들이 별로 없겠지만 옛날 고등학교 동창생들 있잖아요. 잘해주시고 이뻐해 주시고 반갑다 친구야 하면서 잘 해주시는데 결국 지옥 가더라. 바로 그 모습은 그분을 지옥 보내는 주님의 개입이 나는 아무것도 잘한 것이 없는데 일방적으로 천국 보내주시는 그 계획을 오롯이 감사하게 됩니다. 나의 잘함이 섞이지 않은 채 오롯이. 이건 주님이 혼자 하신 결정입니다.
출애굽에서 예수님의 깨어짐, 하나님의 깨어짐을 신약 마태복음 8장 1~4절에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 산에서 내려오시니 허다한 무리가 좇는지라 한 문둥병자가 나아와 절하고 가로되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 하거늘” 이 문둥병자가 오해했죠. 예수님은 자기를 깨끗하게 해주시는 분이고 나중에 깨끗하게 된 자기 자신을 예측했겠지요.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 가라사대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신 대 즉시 그의 문둥병이 깨끗하여진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삼가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고 다만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모세의 명한 예물을 드려 저희에게 증거하라 하시니라” 내가 문둥병인데 주께서 깨끗하게 하실 수 있다고 생각한 그 순간에 너는 뭔가 놓친 것이 있다는 겁니다.
뭘 놓쳤는가. 레위기 14장에 나오는 하나님의 희생제물을 놓친 거예요. 이것은 주님께서 문둥병을 낫게 한 것은 문둥병자가 원해서가 아니라 주님 자신이 문둥병이 되기 위한 자기 소원을 문둥병부터 출발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주님의 자기 자리예요. 문둥병이 자기 자리가 되어야 그 문둥병부터 제물을 통과해서 하나님의 세상 죄를 지고 가는 그 과정이 카펫에 제일 먼저 문둥병부터 깔아놓는 거예요.
문둥병 몸을 예수님 자기 몸으로 인수인계하는 겁니다. 그러니 너 도망가지 말고 나에게 와는 겁니다. 왜? 너의 몸이 아니고 나의 몸이니까. 그게 마태복음 8장 17절에 나옵니다.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에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라고 나오거든요. 예수님은 의사가 아닙니다.
의사는 환자의 몸을 대신 지는 사람이 아니에요. 목사도 물론 아니지요. 신부도 물론 아니지요. 신부에게 상담받으러 가면 삐딱하게 앉아서 노크하면 문 열고 눈을 안 봅니다. 눈을 보면 사적 감정 생길까 싶고 이쁜 사람 같으면 괜히 잘해줄 거 같아서 안 바라보고 묻지요. “왜 왔는데?” “제가 6개월 동안 성당을 안 갔습니다” “그래요? 주기도문 3번하고 헌물 50만 원 내시면 됩니다” 처방전 끝. 식후 30분 후에 하루 세 번. 이런 식으로 처방 내리면 끝이에요.
예수님은 그런 목사나 신부가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그런 신부 그런 목사를 자기 사람으로 받지를 않았어요. 예수님은 망가졌다는 사람을 자기 몸으로 삼는 겁니다. 그래야 대신 짊어짐이 대신 짊어졌단 말이죠. 나의 고민이 나의 고민이 아니고 주님의 고민으로 알아듣는 사람이 주와 이미 시작된 사람이에요. 내 인생 없어요. 주님이 시작한 인생입니다. 따로이 내 인생을 골라내면 안 됩니다.
욥이 지금 착각한 것이 그 점이에요. 내 인생 내 인생 하는데 내 인생이 아니에요. 이스라엘 역사에서 출애굽은 어린양의 인생입니다. 이스라엘을 몰고 다닌 것이 아니고 어린양을 몰고 다니면서 어린양의 희생을 모르는 사람은 다 탈락시키는 식으로 어린양만 오롯이 끄집어내겠다는 것이 출애굽 정신이에요. 지금의 십자가 정신이 바로 그겁니다.
그러니까 쉽게 말해서 우리들의 현 인생을 스스로 처절하게 서글프게 보지 마세요. 주께서 적절하게 합당하게 알맞게 그렇게 만든 겁니다. 자기 자신을 너무 의식하지 마세요. 제가 요새 넥타이를 못 매요. 왜 못 매냐 하면 넥타이 맬 때 어떻게 매나 하면서 매니까 넥타이가 안 매이는 거예요. 그런데 넥타이 맬 때 딴 생각하니까 넥타이가 매여요. 이것이 항상 버릇이 되어서 넥타이를 이리 돌리고 저리 돌리면 넥타이가 안 매이는데 딴 생각할 때 넥타이가 저절로 매이는 거예요. 우리 생각하지 마세요. 이미 십자가로 접수당한 주님께 빼앗겨버린 우리 인생입니다. 내 인생 도로 찾지 마세요. 내 인생 없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있지도 않은 내 인생, 이미 피 발린 내 인생인데 그래서 따로이 내 인생 찾지 말게 하옵소서. 내가 나를 스스로 행복하게 살려는 시도를 하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