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오후설교

욥의 오해

아빠와 함께 2021. 5. 3. 10:57

욥의 오해

2021년  5월 2일                 본문 말씀: 욥기 23:10-17

(23:10)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 같이 나오리라

(23:11) 내 발이 그의 걸음을 바로 따랐으며 내가 그의 길을 지켜 치우치지 아니하였고

(23:12) 내가 그의 입술의 명령을 어기지 아니하고 일정한 음식보다 그 입의 말씀을 귀히 여겼구나

(23:13) 그는 뜻이 일정하시니 누가 능히 돌이킬까 그 마음에 하고자 하시는 것이면 그것을 행하시나니

(23:14) 그런즉 내게 작정하신 것을 이루실 것이라 이런 일이 그에게 많이 있느니라

(23:15) 그러므로 내가 그의 앞에서 떨며 이를 생각하고 그를 두려워하는구나

(23:16) 하나님이 나로 낙심케 하시며 전능자가 나로 두렵게 하시나니

(23:17) 이는 어두움으로 나를 끊지 아니하셨고 흑암으로 내 얼굴을 가리우지 아니하셨음이니라

욥은 이제 지쳤습니다. 욥은 자신이 알고 있는 하나님에 대해서 검사 맡는다는 심정으로 나름 제대로 고백했다고 자부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하시고자 하는 모든 일을 제대로 다 이루신다고 믿고 있다고 공개합니다. 하지만 더 이상 자기쪽에서 할 바가 따로 없는데 그 이유는 자기 쪽에서 처리할 수 없는 흑암이 자기를 둘러싸고 있다는 겁니다.

즉 욥은 자신의 괴로움을 솔직하게 토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솔직한 것이 하나님에게 전혀 의미없음을 욥은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욥은 여전히 자신이 실패해야 하는 자임을 인정하려 들지 않습니다. 다음과 같은 구절이 이런 포부를 보여줍니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 같이 나오리라”(10절)

즉 욥은 자신의 성공과 하나님 성공, 둘 다 다 챙길 수 있는 수가 있다고 기대합니다. 욥은 나름대로 목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목적이 사람을 바보로 만듭니다. 목적이나 목표가 사람에게는 필연적으로 나올 수밖에 없음을 인정하지만 그 또한 하나님에 의해서 무참하게 거절당한다는 사실도 받아들여야 합니다.

욥은 자신에게 들이닥친 환란이 자신의 찬란한 미래와 상관해서 무의미하게 소멸하리라고 믿고 싶지 않는 겁니다. 어떻게든 자신이 당하는 아픔이 자기 성공과 관련성 있기를 바랍니다. 따라서 10절의 말씀, 즉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 같이 나오리라”는 말씀은 이 세상 모든 인간들의 포부를 대변해주고 있습니다.

고생한 만큼 다 보상이 있을 것이라는 실효성있는 위로의 말로 쓰여지기를 모든 인간들은 여망합니다. 이런 인간들의 속셈이 욥을 통해서 그대로 표출된 겁니다. 아픔만큼 성숙하고 아픔 만큼 더욱 행복의 강도가 세지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이런 희망이라도 있어서 사람들은 내일을 기약하면서 지금의 고통을 승화할 수 있다고 보는 겁니다.

그런데 바로 이런 마음 가짐이 오해인 겁니다. 하나님의 뜻과는 전혀 상관없는 인간들의 보편적 본심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복이나 영생은 고생많이 했다고 해서 가능성이 커지는 것이 아닙니다. 근원적인 인간들의 한계만 노출할 뿐입니다. 그렇다면 욥 자신이나 욥의 친구도 풀지 못한 이 난제는 어디서 풀려야 할까요?

이스라엘 역사에서 풀려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인간의 머리에서 나올 수 있는 하나님의 뜻이 주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민수기 2:33에 보면, “레위인은 이스라엘 자손과 함께 계수되지 아니하였으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심과 같았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카운터가 되지 않는 자는 존재로 취급되지 못합니다.

레위인들이 하는 일이 죽음과 관련된 일입니다. 즉 인간 죽음을 외부에 표출해야 될 자들이 바로 레위인들입니다. 그래서 죽음과 관련된 일을 하지 않는 일반 사람들과 차별될 필요가 있습니다. 사람이 존재하겠다는 의지로부터 삶에 고민이 시작됩니다. 어떻게 ‘살까?’라는 식으로 고민합니다.

레위인들은 그런 고민을 하면 아니됩니다. 자신의 기능으로 인해 모든 시간은 항상 그대로 흘러가야 합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핵심부에 ‘죽음과 관련된 일 종사자’를 두시는 겁니까? 레위기 11:42-43에 보면, “곧 땅에 기어다니는 모든 기는 것 중에 배로 밀어 다니는 것이나 네 발로 걷는 것이나 여러 발을 가진 것이라 너희가 먹지 말지니 이는 가증함이니라 너희는 기는바 기어다니는 것을 인하여 자기로 가증하게 되게 말며 또한 그것을 인하여 스스로 더럽혀 부정하게 되게 말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땅쪽으로 기어다니는 것들을 부정되게 보시는 바는, 땅이 곧 죽음을 유발할 원인을 끊임없이 제공하고 있음을 나타냅니다. 이런 저주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바는 차라리 죽음을 발생시키는 작업입니다. 즉 ‘죽음으로 자신을 지우는’ 원칙을 적용시키시는 겁니다. 땅에 저주가 소멸되는 지점을 마련하는 겁니다.

욥이나 이방민족에게는 이런 생각이 나올 수가 없습니다. 그들이 주장하는 바는 ‘하나님도 승리하고 나도 승리하고자’ 하는 결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준비해두신 바는, 인간이 성공하느냐 실패하느냐와 상관없이 늘 하나님께서 승리하시는 결과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작정하심입니다.

즉 하나님의 승리에 인간이 감히 끼어들 생각을 먹어서는 아니되는 겁니다. 그것은 땅에 속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땅의 부정성을 요소로 해서 살아가는 자가 바로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이 부정성을 지어버릴 수가 없습니다. 욥이 자신을 둘러친 흑암을 벗겨낼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욥은 흑암을 이길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흑암 안에 살고 있으면서 나름대로 하나님을 추겨세운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욥의 시도를 완성도 있는 것으로 보지를 않습니다. 이스라엘 역사에 나오는 레위인의 위상과 욥이 접목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접목이 이스라엘 역사 내에 나오는데 그 인물이 삼손입니다.

삼손은 하나님이 주시는 힘으로 자신의 꿈과 욕망마저 성사시키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적에게 체포되어 눈까지 뽑히는 수모를 당했습니다. 그는 그것으로 모든 하나님의 일이 실패로 끝난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계획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삼손은 마지막 힘을 다해 자신을 죽였습니다.

그랬더니만 살아 있을 때 죽은 적의 수보다 그때 죽였던 적의 수가 많았다고 나옵니다.(삿 16:30) 삼손의 행동 여하에 상관없이 주님의 계획은 차질없이 성공했습니다. 따라서 정금같이 나온다는 욥의 미래는 오로지 주님이 가시는 길을 미리 보여준 예언이 됩니다. 예수님에 의해서 확정된 그 ‘순금의 길’은 신약에 와서 성령을 통해 성도에게 선물로 제공됩니다.

성도는 본래의 육적인 자신의 뜻과 고집이 엄연히 있습니다. 죽을 때까지 세상 사는 보람과 희망을 나름대로 꺽지 않으려합니다. 마치 욥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친히 작정하신 일, 즉 자기 성도를 정금이 되게 하시는 전략은 성도의 목적마저 여지없이 짓이겨버립니다.

로마서 5:3-4에 보면,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십자가란 자신을 부인하게 합니다.(마 16:24) 이 십자가 원칙대로 성도는 날마다 자신의 뜻이 무산되는 것을 도리어 즐거워합니다. 왜냐하면 내가 살아있는 것보다 주님이 살아계시는 것이 더 확실하기 때문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나의 뜻이 주님의 뜻에 의해서 무참하게 눌려도 도리어 새로운 감사가 터져 나오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81강-욥기 23장 10~17절(욥의 오해)210502 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욥기 23장 10~17절입니다. 구약성경 783페이지입니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 내 발이 그의 걸음을 바로 따랐으며 내가 그의 길을 지켜 치우치지 아니하였고, 내가 그의 입술의 명령을 어기지 아니하고 일정한 음식보다 그 입의 말씀을 귀히 여겼구나, 그는 뜻이 일정하시니 누가 능히 돌이킬까 그 마음에 하고자 하시는 것이면 그것을 행하시나니, 그런즉 내게 작정하신 것을 이루실 것이라 이런 일이 그에게 많이 있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그의 앞에서 떨며 이를 생각하고 그를 두려워하는구나, 하나님이 나로 낙심케 하시며 전능자가 나로 두렵게 하시나니, 이는 어두움으로 나를 끊지 아니하셨고 흑암으로 내 얼굴을 가리우지 아니하셨음이니라”

욥은 지금 자기가 어떻게 살 것이냐에 대해 고민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고민 가운데서 자기가 생각하는 것과 하나님이 생각하는 것을 상정해서 서로 비교하는 가운데서 나도 옳고 하나님도 옳다는 그런 원리를 정립하려고 지금 애를 씁니다. 왜냐 하면 지금 자기 자신에 대해서 아무것도 자책할 것이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내가 틀렸다고 하시는 것이 아니고 뭔가 다른 계획을 준비하셨겠지 하는 식으로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인정하고자 하는 겁니다. 그게 뭐냐 하면 하나님은 그가 하시고자 하는 것을 기어이 해내시기 때문에 나는 믿는다. 뭘 믿느냐. “하나님이 내게 작정하신 것을 이루실 것을 믿습니다”라고 욥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게 바로 구약의 한계입니다. 인간의 한계이기도 하고요. 하나님을 상대할 때는 하나님께서 제시한 어떤 분이 있어서, 메시아가 있어서, 메시아가 나를 어떻게 보느냐를 생각해야 할텐데 그 메시아가 빠져있는 상태에서 나와 하나님 둘 다 윈윈한, 둘 다 승리할 수 있는 그러한 어떤 하나님의 원칙을 찾아내고자 하는 겁니다. 이게 어떻게 욥의 속셈으로 마감되겠습니까. 욥의 속마음으로만 끝나겠습니까.

바로 오늘날 우리의 본심을 욥이 이렇게 정확하게 명백하게 이야기해 주는 구절도 별로 없을 거예요. ‘믿습니다, 하나님. 전능하시고 모든 일을 작정하신 줄 믿습니다. 하지만 그걸 믿는 나도 틀린 건 아니잖아요’라는 이거. 이게 바로 인간의 잘못된 생각이에요. 지금 욥은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라고 자부하고 단정을 했는데요.

저는 이 구절 있잖아요. 지금 세 번째 읽는데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라는 그야말로 순수한 순결한 금으로 나온다는 이것이 일반 회사 차리는 사람이든지 아니면 선수촌에 레슬링 선수라든지 지금 얼마 남지 않은 올림픽을 앞둔 국대, 국가 대표 선수급들이 노력하고 훈련하면서 스스로 자기를 되새기는 것이 이 구절이 될 거예요.

“내가 나의 가는 길을” 달리 말하면 “내가 금메달 따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내가 지금 훈련받고 힘들지만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 내가 금메달 딸 만한 기술과 능력을 발휘하리라. 이것은 바로 국가대표선수가 우리의 속마음을 노골화시켜서 표출해 주고 있다고 보시면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 문제를 욥이나 욥의 친구들이 이러한 한계 안에 있기 때문에 아무리 욥의 친구들이 설득하고 충고를 해도 욥은 요지부동, 도대체 마음이 달라질 수 있는 어떤 계기가 성립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도 ‘이루어질 줄 믿습니다’라고 하면서 기뻐해야 하는데 기뻐하는 것이 아니고 16절에 보면 “이는 어두움으로 나를 끊지 아니하셨고 흑암으로 내 얼굴을 가리우지 아니하셨음이니라”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어둠을 나에게서 거두어서 없어지게 하지 않았다는 거예요. 이러면 내가 기뻐해야 하고 내가 즐거워해야 하는데 그게 아니고 늘 어두움이, 이런 정도까지 하나님 앞에 신실한 믿음을 고백했으면 속이 풀려야 하는데 풀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 쪽에서 나를 흑암으로 완전히 둘러싸고 포위했다고 언급하고 있으니까 욥의 신세가 난감하죠.

지금 욥이 하는 이야기를 제가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욥은 지금 하나님 앞에 정숙하려고 합니다. 쉿! 하면서 입을 다물려고 해요. 다물려고 하는데 지금 말이 많죠. 하여튼 입을 다물고 입을 다문다는 것은 여기서 내가 할 수 있는 시간을 정지하고자 하는 겁니다. 스톱시켜요. 스톱시키고 지금껏 내가 할 대로 해 봤는데 나에게 오는 이 죽음의 공포를 내가 돌이킬 수는 없고 그저 맡기자.

하나님께서 나의 길을 아실테니까 결국 정금같이 나오게 해주실 것을 믿고 나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모든 일은 주님께서 계획한 대로 작정한 대로 나를 구원해 줄 거라고 믿고 자기는 스톱하려는 거예요. 더이상 할 게 없다고 나자빠지려고 하는 겁니다. 살아오면서 교회 내에서 이런 사람을 제가 얼마나 많이 보았겠습니까. 99.99퍼센트죠.

바로 욥이 하는 이 이야기를 욥기 23장에 나온 이 이야기를 얼마나 무수하게 많이 들었겠어요. 여러분도 많이 들었겠지만 같은 인간으로서 욥 친구의 한계처럼 우리는 무슨 말을 해주겠습니까. 이렇게 스스로 믿음에 섰다, 믿음 잘났다, 믿음 좋다고 자부하는데 거기에 무슨 말이 씨가 먹히겠습니까. 그러면 여기에서 해결점이 뭐냐. 역시 이스라엘 역사로 돌아갈 수밖에 없어요.

이방인이니까, 하나님의 계시를 받지 못한 이방인의 한계가 이 정도라면 이스라엘 계시에서는 뭐라고 하느냐. 민수기 1장 47~49절 “오직 레위인은 그 조상의 지파대로 그 계수에 들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레위 지파만은 너는 계수치 말며 그들을 이스라엘 자손 계수 중에 넣지 말고”라고 나옵니다.

레위인들은 숫자를 헤아리지 말라는 겁니다. 다른 사람은 숫자를 헤아려라. 그러나 레위인들은 숫자의 헤아림 대상이 안 된다. 그들만큼은 하나님이 계시는 성막과 가까이 있는 구역에 살아야 하기 때문에 숫자에 넣지 마라. 숫자에 없으면 제로가 되고 이건 곧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 됩니다. 레위인은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에요. 레위인이 하는 일이 늘 죽음과 가까이 있어요.

그러니까 욥은 뭘 모르느냐 하면 본인이 자기 죽음으로 자기를 지울 줄 모르고 있는 거예요. 이것이 아담의 한계이고 인간의 한계입니다. 자꾸 ‘죽는다, 죽으려고 한다, 죽음이 나에게 가까이 있다’라고 하지 죽음 너머를 욥은 지금 체험을 못 하고 있는 거예요. 이미 이왕 죽어버렸으면 나를 카운트할 필요 없어요. 나를 숫자에 넣을 필요 없어요.

주소? 없습니다. 나이? 없습니다. 성별? 이미 천사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되면 이건 뭐냐 하면 왜 이런 답변을 하느냐 하면 한마디로 말해서 내가 이 땅에 앞으로 남은 인생을 어떻게 살까 고민이 안 된다는 뜻이에요. 고민할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이건 더 나아가서 내가 더 잘한 것과 잘못한 것에 대해서 내가 신경 쓸 대상 자체가 아니라는 겁니다.

왜냐 하면 나에 대해서 신경 쓰실 분은 따로 계시기 때문이에요. 내가 내 인생을 신경 쓰면 안 돼요. 내가 내 인생을 수습하면 안 됩니다. 우리는 죽음으로써 주님을 죽음에 넘겼다면, 나는 그 죽음으로써 나를 지워나가는 일만 주께서 계속하실 뿐입니다. 오늘 본문처럼 이렇게 신앙 좋다고 자랑질했던 욥이 나중에 하나님 나타나니까 뭐라고 하느냐 하면 완전히 재를 뒤집어썼어요.

그러니까 이건 우스운 말로 자기 자신에 대해서 재를 막 뿌리며 “어~어~어~난 아무 말도 안 했다. 나는 아무 말도 안 했어요, 주님. 나는 아무 말도 할 줄 몰라요”라고 하는 겁니다. 욥의 잘못은 목적을 이미 정했다는 거예요. ‘나는 구원 받았다’라고. 목적을 미리 정한 사람을 바보라고 이야기합니다. 바보예요. 자기가 모순되는 거예요. 작정하신 분은 주님이라고 해놓고 작정하신 일이 나에게 유리하게 작용해야 한다는 목적을 본인이 지금 안 죽고 그대로 지탱하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께 모든 일을 맡기겠습니다”라고 말은 해놓고 뒤에 군시렁 군시렁 하는 것이 있어요. ‘맡길 테니까 저를 실망시키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라는 식으로. 하나님께서 “뒤에 뭐라고 군시렁 군시렁 하는 거 같은데”라고 하면 “아무 말도 안 했어요” 맡길 테니까 잘해달라는 말이 뭐 수선실에 바짓가랑이 수선 맡겼습니까? ‘제가 수선할 줄 모르니까 알아서 해주세요’ 아니면 ‘잘해주세요’

‘알아서 해주세요’라는 것과 ‘잘 해주세요’라는 것이 같은 것이 아닙니다. 참 우리 인간의 한계가 참 그런 데서 드러나는 거예요. 하나님 진리의 성취, 공의의 성취, 정의의 성취는요 우리 이 땅에서 우리가 실패해도 성공하게 되어있고 주님의 의는 성공하게 되어있고 우리가 성공해도 주님의 의는 성공하게 되어있는 그러한 조치가 마련되어 있습니다.

인간이 하는 어떤 행위로 인해서 하나님의 작정하심과 하나님의 의로움과 하나님의 정의로움이 손상되는 일이 없게 없도록 그렇게 조치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걸 이방인 욥은 모르는 거예요. 이스라엘은 뭐냐. 그걸 알려줬습니다. 레위지파로 하여금 숫자에 계산을 넣지 않게 했어요. 하나님과 함께 있다는 것은 곧 너는 숫자로 너 자신에 대해서 카운트할 대상이 아니라는 겁니다.

왜 하나님께서 자꾸 사람을 사람 취급하지 않는가. 그 이유가 레위기 11장 42~43절에 나옵니다. “곧 땅에 기어 다니는 모든 기는 것 중에 배로 밀어 다니는 것이나 네 발로 걷는 것이나 여러 발을 가진 것이라 너희가 먹지 말지니 이는 가증함이니라, 너희는 기는바 기어 다니는 것을 인하여 자기로 가증하게 되게 말며 또한 그것을 인하여 스스로 더럽혀 부정하게 되게 말라” 이 땅을 기어 다니는 것은 다 더럽다는 겁니다.

레위기 11장의 대목이 어떤 대목이냐 하면 이스라엘 백성이 먹어야 할 것과 먹지 말아야 할 것 이런 것을 구분하는 대목이에요. 거기 레위기 11장 23절에 봐도 “오직 날개가 있고 기어 다니는 곤충은 다 너희에게 가증하니라” 날개가 있는데 기어다는 곤충은 다 너에게 가증하다. 기어 다니는 것이 마치 누구를 닮았느냐 하면 뱀처럼 기어 다니는 것을 닮았어요.

땅과 밀착되어 살아가는 자들, 오직 땅뿐인 자들, 그것이 자신을 거기에서 모든 자아됨을 찾고자 하는 자들, 이런 사람은 하나님 보시기에 땅과 더불어서 그 사람도 사람 취급을 하지 않습니다. 죽은 자로 칠 수밖에 없어요. 저주를 뿜어내니까. 그래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하나님의 율법 기능이라고 하는 것은 장차 올 여호와 하나님께서 생명으로 통할 유일한 자리가 어느 자리인가, 바로 인간이 뚫을 수 없는 그 자리, 천국과 땅이 통하는 그 자리인 것을 알려주는 일이 바로 율법의 일이죠.

하나 예를 들게 되면 삼손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아시다시피 삼손은 머리카락 힘 가지고 얼마나 본때를 보이면서 으스대면서 그 힘 가지고 여자 밝히면서 자기 욕구와 욕망을 달성하려고 얼마나 설쳐댔습니까. 이거는 바로 그것이 삼손은 잡혀서 머리카락이 잘렸죠. 제가 이야기했다시피 삼손은 하나님의 구원자로서 실패한 자예요. 그런데 인간이 실패해도 여호와 하나님의 작정하심은 실패함이 없어요.

지금 오늘 본문에서 욥은 자기가 실패 안 하려고 하는 거예요. 내가 실패 안 해야 하나님도 성공한다고 지금 우기고 있는 겁니다. 말도 안 되는 자기중심이죠. 그런데 마지막에 삼손이 죽는 그 자리가 있어요. 다곤 신전에서 마지막 힘을 다해서 기둥을 당겨서 무너뜨리고 그때 죽었던 블레셋 사람들이 삼손이 살아서 죽인 사람보다 더 많았다고 했습니다.

삼손이 죽는 그 지점이 바로 여호와의 지점이에요. 하나님의 생명과 통하는 유일한 지점. 그것은 삼손은 자기가 힘으로 뽐내면서 나도 살고 누이 좋고 매부 좋고 이런 식으로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생각하는데 하나님의 뜻은 그게 아니에요. 그게 아니라는 말이죠. 하나님 자신이 사람이 되어서 와도 그 원칙은 고수합니다. 그게 인간이든 죄인이든 의인이든 하나님이든 누구든 이 땅에서 영생으로 통하는 자리는 죽는 자리밖에 없어요.

흔히 사람들이 십자가 십자가 안다고 하는데 십자가가 무엇이냐를 제대로 아는 사람은 십자가의 그 기능이 마태복음 16장 24절에 나오는 말씀처럼 십자가는 뭐냐 하면 나를 부인하는 거예요. 나를 부인하는 것을 집어 던져버리고 십자가 믿는다고 나오면 십자가 믿는 너는 누구냐. 나는 잘났지요. 지금 욥이 하나님 잘 알고 있다는 거예요. 욥의 친구도 잘 알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막상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은 자기 뜻을 꺾었어요. “주여, 이 잔이 설사 나를 죽인다 할지라도 제가 그 잔을 마시겠습니다” 그게 죄를 품은 자의 갈 길입니다. 다른 융통성은 애초에 없습니다. 죄를 지었으면 벌을 받아야죠. 정말 오랜만에 바른 소리 합니다. 아니, 죄를 지었으면 벌을 받아야죠. 자꾸 율법 지켜서 뺀질이처럼 빠질 생각하지 마세요.

‘주여, 법을 지켰잖아요’라고 하면 다른 법은? ‘아, 그거는 2개월 말미를 주시면 지키겠습니다’라는 게 성립이 안 돼요. 아무리 법을 지켜서 저 살고자 노력을 해도 계속해서 줄기차게 주어지는 이 율법 앞에서 어느 인간이 이것을 버텨낼 수 있습니까. 아무도 없죠. 오늘 본문에서 욥이 이야기한 이 대목,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라고 욥이 했는데 사실 욥이 했다기보다 소위 하나님을 안다고 여기는 인간들을 대표해서 욥이 이야기한 거예요.

주님께서는 “그 입 다물라”라고 하시죠. 그럼 “입 다물면 그러면 나는 내가 단련한 후에 정금처럼 안 나온다는 말입니까. 내가 실패한다는 말입니까?”라고 욥이 따진다면 욥이 뱉은 이 말씀은 하나님의 계시가 되고 예언이 돼요.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라고 할 때 나를 욥으로 하지 말고 욥을 뭐로 바꾸느냐 하면 예수님으로 주님으로 바꾸면 돼요.

그러면 욥은 하나의 예수님의 앞길을 이야기하는 예언자가 되는 겁니다. “주께서 가시는 길을 오직 하나님 아버지가 아시나니 아버지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라는 오직 예수님에게만 해당되는 사항이에요. 예수님에게만. 우리에게는 해당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죽었다가 부활하는 첫 열매의 대상이 우리가 아니에요.

주께서 내가 주님 잘 믿었기 때문에 나를 정금같이 나오게 해달라고 하면 주께서는 “그 입 다물라”라고 하시는 거예요. “그 입 다물라. 이 말씀은 내가 너에게 준 말이 아니야.” 욥이 그런 이야기 했다는 말은 바로 욥이 인간의 한계를 지금 몇 번째 하는지 모르겠지만 우리 속마음을 대신 이야기한 거예요. “하나님 쪽도 잘되고 내 쪽도 잘되고 둘 다 잘되면 낫지 않습니까”라고 하면 하나님은 “아니. 더 나은 것이 아닌데. 나는 죄 있는 자를 용납 못 하겠다.”

그래서 정금같이 나오는 이 길은 주님 가신 길이에요. 그리고 마지막 17절에 보면 “흑암이 나를 가리는구나”라는 말씀도 주님에게 주시는 말씀이에요. 따라서 어떤 인간도 자기를 가로막는 흑암과 어두움에서 커튼을 젖히고 빛을 볼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주님의 십자가는 나를 부인하는 거예요. 이걸 다른 말로 번역하면 주님의 십자가는 나의 모든 희망의 싹을 잘라버리는 거예요.

나의 목표와 목적을 잘라버리는 거예요. 네가 뭔데 너의 목표를 가지고 네가 뭔데 너의 목적을 왜 달성코자 하는 거냐. 그건 정말 오해입니다. 참, 우리교회에는 그런 분 없어서 너무 감사해요. 큰 교회 가면 조그만 사업체 사무실 하나를 빌딩 3층이나 4층에 얻어놓고 “목사님, 회사 하나 차렸습니다”라고 하면 내 귀에 뭐라고 들리냐 하면 “사기 단체 하나 차렸습니다”라고 들리는 거예요.

나는 회사 차리면 다 사기 단체로 알고 있어요. 얼마나 속여 먹어야 돈을 빼먹겠어요. 인간이 안 속이고 돈 빼먹는 재주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런 재주는 없어요. 장사하는 사람 없으니 제가 맘대로 이야기합니다. 인간 욕심이 한도 끝도 없는데 어떻게 안 속이고 장사합니까. 적당하게는 자기가 정한 적당이에요. 자기 혼자 정한 거. 5조 벌고 2000억 기부하고. 이건 말도 안 되는 겁니다. 그거 한다고 그게 착한 일 됩니까.

근원적으로 우리는 살 가치가 없어요. 나의 죽음으로 나를 지워야 합니다. 왜냐. 땅에서 기어 다니기 때문에 가증스럽고 부정하기 짝이 없고 수에 칠 가치가 없어요. 우리는. 하나님과 가장 근접해 있는 레위 지파가 그걸 이야기하잖아요. 하나님만 있으면 되지 내가 굳이 숫자가 되어버리면 내가 존재가 되잖아요. 주님 앞에서 내 존재가 나타날 이유가 없다는 겁니다. 내 단독적으로 내 개체적으로 내 존재로 살 이유가 없단 말이죠. 주님의 사건에 휘말리면 되고 함몰하면 되지요.

그래서 십자가라 하는 것은 자기를 부인하라는 겁니다. 주님만 있으면 된다는 겁니다. 굳이 네가 따로 독자적인 네 개체 네 존재가 있을 필요가 없다는 거예요. 욥은 아직 그걸 모릅니다. 그러면 신약에서 주님의 흑암, 주님께 있던 십자가라는 그 어두움, 악마죠, 악마의 마지막 그 모든 협박과 공갈. 주님께서는 죽음으로 그 커튼을 열어 재끼셨어요.

희망과 빛은 우리가 가질 권한이 없고 예수님이 따로 가져서 우리에게 선물로 줄 때 비로소 우리는 소망이라는 게 있는 겁니다. 보이는 소망은 소망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실 때 내가 기대했던 내가 목표로 했던 그런 소망 말고 낯선 소망, 내가 예상 못 한 소망, 그 소망이 오늘 나를 기꺼이 죽을 수도 있게 만들어요.

사람의 존재 무게는 자기가 안 죽으려고 하기 때문에 생기는 겁니다. 그러면 그렇게 해서 신약에서 성령 받은 사람은 이제는 나의 욕망이 아니고 예수님의 욕망이 나의 욕망을 대체해 버립니다. 주님의 의도와 기대가 내 안에서 작동하게 되거든요. 나에게 작동했단 말이죠. 작동했을 때 그다음부터 나에게 일어나는 나의 인생은 어떻게 되는가.

로마서 5장 3~4절에 나옵니다.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오늘 욥기 23장 7절에 나왔던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 같이 나오리라”라는 그것은 이미 예수님께서 다 마련하시고 선물로 우리에게 주시는 겁니다. 예수님의 코스를 우리에게 주셔서 우리가 가거든요.

그러니까 식구끼리 뷔페 갔을 때 세 번 네 번 가본 사람은 자기가 알아서 가져다가 먹지만 처음 가본 사람은 아버지가 하는 거 그대로 따라서 김밥 2개 넣고, 잡채 넣고, 초밥 세 개 넣고 하면 그 뒤에 부인과 자식도 아버지 하는 거 보고 그대로 따라 하잖아요. 주님 가신 길, 십자가의 길을 그대로 우리에게 주시게 되면 우리가 그 길에, 그 환란의 길에서 즐거워하게 되는 겁니다.

‘아하, 이 길이군요. 이 길. 아, 연단이라는 것이 이런 걸 연단이라고 하는군요. 아, 소망이라는 것이 이런 걸 소망이라고 하는군요’ 앞에 가신 주님의 그 길 따라 그대로 이것이 우리에게 선물로 주어져요. 그러면 선물로 주게 되면 뭐냐 하면 우리가 육신에 욕망이 있기 때문에 여전히 우리는 내 나름대로 타인이 나에게 요구하는 가족이 나에게 요구하는 어떤 기대치가 있을 거예요.

그것 따라 남들이 나에게 이걸 요구하니까 ‘하나님이여, 그걸 이루어 주옵소서. 그걸 원합니다. 속히 연단하여 정금같이 나오게 해주시고 사는 것같이 살게 해주세요’라고 하더라도 이것이 내부에서 주님 가신 길과 충돌을 일으킵니다. 그러면 십자가가 우세하거든요. 그럼 십자가는 뭐냐. 십자가는 나를 부인하는 거예요. 나의 목표와 목적을 날마다 차버리고 짓밟아 버리는 겁니다.

그 짓밟힘을 즐거워하라는 거예요. 기뻐하고 감사하라는 겁니다. 그 감사보다 그 기쁨보다 더 큰 기쁨은 없다는 겁니다. 그럴 때마다 주께서 백인 경찰이 흑인 모가지 확 밟아서 5분 동안 숨도 못 쉬게 죽여버리는 것처럼, 주께서 우리 목을 누르며 “이래도 너의 목적과 목표를 아직도 고집할래?”라고 밟아 버리시죠. 왜냐 하면 십자가가 우세하기 때문에. 십자가가 우세한 것을 즐거워합시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나름대로 삶의 희망과 나를 즐겁게 할 수 있는 포부 같은 것이 있었는데 그때마다 주께서 그것이 오해이고 그것이 너의 착오였음을 일러주면서 오직 좁은 길, 영생이 기다리고 있는 길, 그 길로만 이끌어 주심을 감사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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