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강의20210226b 마가복음16장 13절(의미의 마감)-이 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하겠습니다. 십자가와 부활은 인간이 속해있지 않은 그 무엇을 겨냥한다. 인간이 자기 눈에 보이는 것을 담으려 했는데 인간들이 구축한 현실에 미처 다 담을 수 없는 다른 것들이 튀어나오기 시작하는 거예요.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은 인간들이 다 안다고 여겼는데 놓치고 있는, 인간 속에 있으면서도 인간들이 파악하지 못하는 그것을 십자가 부활이 겨냥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나타났죠. 오늘 본문 16장 12절. 예수님이 나타나셨다. 모양으로 나타나셨죠. 그러면 눈에 보입니까, 안 보입니까? 보이죠. 그리고 마지막에 믿습니까, 안 믿습니까? 안 믿죠. 자 여기서 봅시다. 안 믿는다. 보이기 때문에 안 믿는다는 말은 예수님이 부활로 나타나셨다, 어떤 다른 모양으로 나타나셨다, 보인다. 지금 이렇게 할 때 제3자가 보면 예수님은 인간현실에 속해있습니다. 부활하셨으면서도 인간세계에 속했죠. 그런데 인간 속에 속하면서도 인간들이 모르고 있는 분으로 속했다는 말은 인간은 자기가 속해있는 현실조차도 자기가 다 모르고 있는 거예요. 그걸 겨냥하는 거예요, 예수님의 부활은.
믿지 아니했다 했잖아요. 그럼 인간이 예수님의 십자가 부활을 믿을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못 믿죠. 인간이 믿는 십자가라는 것은 똑같아요. 예수님이 나타나셔가지고 일하시고 십자가에 못 박혔다. 십자가에 못 박힌 모습, 이것이 십자가잖아요. 믿었습니까, 안 믿었습니까? 다 도망갔잖아요. 안 믿었잖아요. 분명히 보이는데 안 믿어지는 거예요. 그러면 여기 서로 통할 수 없는 두 세계가, 두 영역이 한 현실 속에 같이 있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부터 이 모든 오심은 결국 네가 안 믿게 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배후에 악마가 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그 악마의 모습을 주님 앞에서는 어떻게 나타냈느냐. 예수님 쪽에서는 부활의 모습, 십자가의 모습으로 나타났죠. 그럼 인간 쪽에서 악마에 속했다는 모습은 어떻게 나타납니까? 자아위주, 그리고 이 자아가 가만히 있지 않고 활동하면 그게 자기 의, 그 다음 거기서 구축된 것이 자기 이름.
그러면 예수님께서 악마에 속한 자를 구원하려면 자기 위주가 아니고 예수님이 그 안에 들어간 예수님 위주, 그 다음 자기 의가 아니고 예수님의 의, 자기 이름이 아니고 주의 이름. 그런데 이렇게 연결될 때 연결된 모습이 자아가 찢어진 모습, 아까 유리컵이 깨진 모습처럼 내 자아가 멀쩡하게 만나는 것이 없고 완전히 걸레조각처럼 너덜너덜하게 다 찢어지는 거예요. 예수님의 남은 고난을 내 안에 거두기 때문에.
그러면 아까 질문 다시 해봅시다. ‘주님을 어떻게 알아봅니까?’ 하는 이 질문. 이렇게 해도 또다시 모르겠죠. 주님을 어떻게 알아봅니까. 주님은 어떻게 자기 백성에게 찾아옵니까. 사도행전에 보면 성령이 임하면 누구의 이름을 부른다? 성령이 임하면 성령이 임한 자아에 변화가 생기죠. 어떤 변화입니까? 멀쩡한 자기 이름은 놔두고 자기 이름이 있는데 자기 이름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주의 이름으로 사는 거예요, 주의 이름으로.
“주께서 이렇게 살게 하셨잖아요.” 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옆에 사람이 너 누구보고 이야기하는 거야? 하면 넌 몰라도 돼. 가만히 있어. 나 지금 주님보고 이야기하는 거야. ‘주님이 나를 이렇게 살게 하셨잖아요. 주께서 오늘동안 살도록 힘 주셨잖아요. 모든 여건 조성해줬잖아요. 그것은 내 이름을 위함이 아니고 주의 이름을 위해서 주께서 친히 나에게 이런 삶의 조건을 마련해줬잖아요.’ 라고 하는 거예요.
이게 사무엘상에서 다윗이 시를 짓게 된 동기가 거기에 있어요, 모든 시가. 다른 사람은 그 시를 몰라요. 다윗과 하나님 사이에 서로 통하는 대화가 시가 된 거예요. 아버지여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 또는 여호와는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는 거예요. 주님이 언약으로 와서 나에게 기름부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기름부음이겠죠, 그 당시엔 성신이겠지만. 그 당시 왕직이지만 지금은 성령의 기름부음으로 자기 이름을 위하여 자기 의를 자꾸 드러내게 하는 거예요.
자기 의를 자기가 한다고 되는 게 아니고 나의 의, 나의 위조, 나의 이름은 늘 박살나는 겁니다. 그래서 깨진 파편조각 버리지 말라고 했죠? 깨질 때 신앙적인 당당함, 이것을 성경에서는 담대함이라 하죠. 신앙의 담대함. 주님의 고난을 즐겨 아주 흔쾌히 받아들이는 거예요. 왜냐하면 주의 일을 한다는 이 자부심은 세상의 어떤 직분보다 귀한 직분이 되기 때문에. 나 같은 인간이 과연 주님을 드러내는 일을 할 수 있다니. 이런 혜택, 이런 기회를 주신 하나님 너무 황공스럽죠. 너무 황공스러운 거예요. 너무 감사한 거예요. 인간들은 자기 라인 추구하기 바쁜데 성도만이 주님을 드러내니까.
그래서 부활이라는 것은 이처럼 이 인간세계와 단절되어있다. 그래서 믿지 않았다. 그것을 알기 위해서 우리가 알아야 될 것은 인간세계는 어떻게 체계가 구성되어 있는가를 알아야 되겠죠. 인간세계는 어떻게 구성되는지를 지금부터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인간의 두뇌를 제가 그리겠습니다. 두뇌를 그릴 때 아주 간단하게 그리는 방법이 있어요. 정육면체, 이게 두뇌. 간단하죠. 두뇌에 구멍을 뚫고 밑으로 쭉 내리면 이게 척수. 이것이 어디 안에 들어있는가. 더 큰 정육면체, 인간의 신체, 육체 안에 담겨 있어요. 그럼 여기 산이 있고 해는 방실방실 뜨죠. 그리고 저 뒤에 늑대 한마리가 우우~하고 짐승이 있습니다. 바깥 정육면체인 신체에 눈알 두 개가 이렇게 뽑혀져 나와 있어요. 이것이 짐승을 보고 해를 보고 감각신경이 들어옵니다. 들어올 때 인간의 두뇌에서는 점이 돼요. 인간의 두뇌 피질에서는 이 점이 이미지로 바뀌죠. 이것을 객관이라고 합니다.
자아는 어디 있습니까? 자아는 이 그림 속에 없어요. 왜냐하면 이 그림을 그리고 바라보는 이것이 자아이기 때문에. 주관은 없습니다. 자아도 없습니다. 그냥 이미지가 되고 이미지는 두뇌 안에 해마라는 곳에 축적이 돼요. 객관적인 이미지가 해마처럼 생긴 해마라는 곳에 축적이 되면 기억이 되잖아요. 이것이 주관입니다. 이게 자아에요. 장기 기억된 이것이 자아에요, 자아.
아까 첫째 강의에서 모든 단어의 의미의 마감은 십자가 부활이라고 했죠? 그것은 주님의 세계이고 인간세계에서 ‘본다’의 끝은 ‘보는 것을 보는 것’이에요. 이게 끝이에요. 내가 보는 것을 보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것을 보고 있는 내가 자아에요. 전형적인 자폐증이잖아요, 자폐증. 피터의 철학입니다. 인간은 자아뿐이라는 거예요.
문제는 이 세계가 인간 세계의 공동체험이 돼요. 이게 굉장히 중요합니다. 공동체험을 하고 있다는 거예요, 공동체험. 분명히 A, B, C 라인 달릴 때는 각자각자 놀았죠. 그런데 그 라인을 달리다 보니까 정이 들었는지 전부다 경쟁하는 체제를 서로가 지금 정당화하면서 공동의 장이 마련되어 있어요. 서로 경쟁자이면서도 경쟁자이기 때문에 더 원하고 있는 겁니다. 경쟁자이기 때문에 더 원하고 있어요.
싸울 때 그냥 치는 게 아플까요, 잡고 치는 게 아플까요? 그냥 쳐버리면 헛발질할 수 있고 피할 수 있고 타격이 적을 수 있는데 잡고 때려버리면 진짜 정통으로 때리거든요, 잡고 때리면. A, B, C, D 라인을 생각해보세요. 전부다 라이벌들이에요. 라이벌 공격할 때는 그냥 공격하지 않아요. 잡고 치는 거예요. 그러니까 어깨 위에 올라서는 게 라이벌이에요. 왜 그렇게 라이벌이 필요하냐 하면 공동체험에서 이 자아가, 주관적 기억이 무엇을 원하느냐 하면 갈 때까지 가보는 것, 최후의 기억이 무엇인지 궁금한 거예요.
내가 ‘본다’의 마지막이 내가 어떤 것을 봤을 때 마지막을 봤다고 할 수 있는지를 인간의 기억이 가만히 있지 않고 계속 부지런히 설칩니다. 부 축적의 끝은, 음악 높이의 끝은 여자 소프라노F까지 올라가는지. Una voce poco fa라는 노래가 있어요, <펜트하우스>에 보면 나와요, 어디 오페라에 나오는데, 지가 목이 상해서 노래를 못하니까 유진이 대역해서 노래 불렀다는 게 나오거든요. 라이벌을 이기기 위해서 분명히 목표가 있어야 돼요. 뭔가 인생의 목표가 있다는 말은 잡고 치려고 하는 거예요. 다이빙을 자기보다 더 잘하니까 모함해서 다이빙을 못하게 만드는 영화도 있었거든요.
그러니 뭐든지 내가 존재한다는 것, 내가 뭔가 본다는 것은 내가 누구를 치고 올라설 수 있는가가 그 순간 나의 삶의 목표가 돼요. 뭐 라이벌이 있어야 되고 잡고 칠 수 있어야 돼요. 그냥 추상적으로 누구를 치는 것은 소용없어요. 구체적으로 내가 사는 보람을 느끼려면 잡고 올라설 수 있는 대상을 찾아야 돼요, 우리가. 그걸 적폐라 했죠. 정치적 적폐라 하면 지들끼리 정치판에서 노는 거거든요. 내가 정통사극을 안 좋아하는 이유가 정통사극이 깡패집단을 미화한 거예요. 뭐 세종대왕부터해서 전부다 깡패집단이에요. 김재규, 차지철... 이 인간세계는 누가 다스리냐 하면 깡패가 다스려요. 그걸 좋게 말해서 힘이 진리를 말한다 뭐 그렇게 하지만 사실은 깡패입니다. 아까 인간극장에 나오는 62살 먹은 아줌마 꿈이 시의원 되는 거라고 했죠. 깡패 되고 싶어서 그러는 거예요, 깡패 되고 싶어서. 시의원을 없애버리던지 해야지. 무슨 민주주의입니까.
사람이 내가 멱살 잡고 어깨 잡고 때릴 수 있는 사람이 없으면 사람이 밥을 먹어도 밥맛이 나지를 않아요. 살 이유가 없다니까요, 살 이유가 없어요. 복음의 세계에서 누가 제일 높으냐. 잡고 팰 사람이 있어야 돼요. 그래야 이 복음을 공부하는 재미가 있어요. 짜릿한 흥미가 있다고요.
남자들이 제일 좋아하는 자기 부인상은 고분고분한 여성이에요. 그런 여성을 제일 좋아합니다. 그 말은 뭐냐 하면 남성들이 여성들에게 선방 날린 거예요, 그냥. 팬 거예요, 그냥. 너는 내가 준 돈으로 밥이나 먹고 살림이나 해라. 여자는 고분고분해서 칭찬받고 사랑받으면 그건 여자가 받을 수 있는 최고대우다. 그러나 여자는 자아가 있죠. 여자가 ‘나의 본다’의 봄의 끝을 보기 위해서 여자의 라이벌이 누구입니까? 바로 남편이 되는 거예요.
남자들은 여자들이 자기를 라이벌로 생각하는 줄 결혼 전에는 까맣게 몰랐어요. 여성스럽다는 말이 복수할 줄 모르는 줄 알았죠. 그러나 결혼하고 보니까 여성이 바깥의 다른 여성을 라이벌로 삼는 게 아니라 남편을 붙들고 패는 겁니다. 그러니까 결혼은 미친 짓이 아니고 결혼은 복수극이에요. 그 남자를 놓으면 안 되죠. 놓으면 내가 팰 데가 없으니까 그 남자와 이혼하면 안돼요. 그러면 남자 쪽에서는 가정의 화평을 위해서 얻어맞는 수 외에는 다른 수가 없어요. 패라. 나하나 참으면 가정이 화평하다. 그냥 참는 거예요. 그러니까 남자들이 몰랐던 것이 여자들이란 복수심이 아예 없고 처음 날 때부터 고분고분한 줄 알고 오해를 했다가 막상 결혼할 때보니까 나를 이기려고 패는데...... 아 우리 집 가정이야기 아닙니다, 절대로 오해하지 마세요.
인간이 내가 나의 절대성으로 내가 갈 때까지 가보겠다고 하는 이유가 있어요.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내가 모르기 때문에 답답해서 그러는 거예요. 두뇌는 갇혀있고 바깥세상에는 일어날 일들이 많고 내 두뇌에 있는 이 주관이 눈에 보이는 세계를 다 삼켜야죠. 가만있지 못하고 다 삼킬 때까지 나는 계속해서 눈에 보이는 가까운 것부터 해서 복수에 나서는 겁니다. 남자는 선방 때렸고 여자는 얻어맞고 그다음 얻어맞은 데서 복수극에 나서고. 그래서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를 계속 찾는데 딛고 일어설 수 있는 라이벌을 계속 만들어 낼 때 자기 하는 일에 바이탈, 생명력이 샘솟듯이 일어납니다.
우리 십자가 마을과는 관계없습니다만, 네가 50명 교회야? 난 60명이야. 조회수가 얼마야. 난 70이야 80이야. 난 100이야. 조회수 경쟁하고 있죠. 뭐 바둑은 중국이 제일 잘 둔다고? 까불지 마. 우리나라에는 이제 양신, 신진수, 신민준. 그 뒤에 박정환, 문민종, 심재익 있고 여자는 최정 있고. 중국을 완전히 신진수가 박살내놨어요. 커제 1등을 박살냈다고요. 이제는 엄마가 애 머리 좀 좋으면 뭐하겠습니까? 바둑 가르치는 거예요. 1년 수입이 10억이 넘으니까. 세계를 제패하니까.
박세리 나올 때는 골프 친다고 난리, 이세돌 나올 때는 바둑 둔다고 난리. 왜? 라이벌이 발생되었으니까. 야, 목표가 생긴 거예요, 목표. 내가 딛고 오를 수 있는 목표가 생겼으니까 치는 거예요. 그게 A, B 라인의 달리기입니다. 서로를 잡고 치는 거예요. 그걸 무슨 체험이라고 했습니까? 공동체험이에요. 공동체험은 누구도 우리가 뭘 원하는지를 모르고 그냥 박치기하고 치고 받고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면서 달려가는 거예요, 이 넓은 길을.
그러면 이러한 인간세계, 객관과 주관의 세계, 뭘 봐야 되는지도 모르는 그 세계에 비해서 십자가와 부활의 세계에서는 이미 원하는 것은 확정 났습니다. 정해진 것을 추구하게 되어있어요. 이것은 우리가 정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정한 게 아니에요.
내가 살아가는 것은 두뇌가 있는 이 세계, ‘본다’의 보는 것을 보고 싶은 거예요. 자신의 절대성, 자아가 보고 싶은 거예요. 내가 어디까지 위대한지를 보고 싶은 거예요. 그래서 뭐 하나 이루고 난 뒤에는 ‘오, 신이시여 과연 제가 이걸 했단 말입니까’ 굉장히 기뻐하죠. ‘유레카’ 하는 것 있잖아요. 뭐 발견하고 난 뒤에 좋다고 목욕탕에서 뛰어나오는 것처럼 뭐하나 안 풀리던 게 풀리면 갑자기 온 천하를 얻은 것처럼 기쁘죠. 그게 오래 갑니까? 오래 안가죠.
처음에 하고 난 뒤에는 주체할 수없이 눈물이 쏟아집니다. 눈물이 쏟아지고 다 같이 공동체험 everybody 찬양하고. 공동체험이니까. 전부다 찬양하고 집회하면서 주여, 감사합니다. 이렇게 난리 나죠. 그동안 깨진 파편 지가 다 끌어 모아가지고 스카치테이프 붙여놓고 제가 이렇게 찬양기도를 드립니다. 이렇게 헌신을 합니다. 이게 뭐냐 하면 백투더 예루살렘이라든지 애들 선교단체, 복음학교, 신천지 전부다 그런 류에요. 학교 때 공부 안하고 성경공부 하다가 학점 다 날린 애들 겨우 졸업해서 취직할 데 없으니까 그런 데 가서 간사해서 지가 당한 걸 고대로 후배한테 가르쳐서 부푼 꿈을 키워주는 거예요. 너는 될 수 있어. 세상을 네 품안에 품을 수 있어. 뭐 세상을 그렇게 품을 수 있겠어요. 품을 필요 없어요. 다 이 공동체험에서 놀아나는 거지.
이미 확정된 것은 의미가 마감된 거예요. 이미 주님은 확정시켰어요. 마감이거든요. 마감은 십자가와 부활이에요. 죽고 난 뒤에 살아난 그 모습입니다. 너는 나를 본받아.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예수님은 죽고 부활했잖아요. 그러면 이걸 어떻게 본받아요? 못 본받죠.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다른 모양으로 누구한테 나타났다고 했습니까? 제자들이죠. 제자들한테 가니까 제자들이 믿었어요, 안 믿었어요? 못 믿은 거예요. 믿을 수가 없죠. 서로 사는 세계가 다른 세계인데요. 인간세계는 뭔가 찾고자 하는 거예요. 뭘 원하는지도 모르지만 뭔가 계속해서 뭐든지 원해야 돼요. 원함이 없으면 내가 사는 맛이 없어요. 계속해서 목표 세우고 또 목표 세우고 하는 겁니다.
에베소서 4장에 보면 13절에,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데까지 이르리니”되어 있죠. 그 충만한데까지 이르는 방법이 뭐냐. 내 자아가 원하는 목표를 가지고 올라가는 게 아니고 완전히 주님의 확정된 목표가 나를 큰 프레스를 가지고 그냥 눌러버리는 거예요. 완전히 눌러버리는 거예요.
그러면 허상을 좇는 나는 완전히 찌그러지겠죠. 내가, 세상적인 옛사람이 주님의 형상을 그동안 가리워왔던 겁니다. 악마짓을, 마귀짓을 한 거예요. 주님이 하는 일을 훼방질 한 겁니다. 이것은 이미 최종마감이잖아요. 장성한 분량, 최종마감이란 말이죠. 우리는 계속 내 옛사람이 이것을 방해하고 있었던 겁니다.
이렇게 반대로 가줘야 되는데 이 대목을 하면서 신학교에 있는 사람들이나 지금 많은 사람들이 이걸 보면서 어떤 목표를 정하는 거예요. 이제 예수 믿고 성화단계에 돌입한다. 성화단계에 돌입해서 점점 더 잘되면 된다 이렇게 시도하는 거죠. 그런 성화단계에서 자아가 깨졌습니까, 아니면 자아가 멀쩡합니까? 자아가 멀쩡하죠.
고갯길을 올라가는데 자아가 멀쩡한 거예요. 늘 생각하는 거예요. 어디까지 왔나? 높이를 어디까지 왔나? 이게 각도 30도 되어버리면 올라간 지점과 높이비가 1/2이 돼요. 45도 되면 가 되고. 비례거든요. 인간은 욕심도 없어. 항상 비례된 만큼만 있으면 족하다는 거예요. 어디까지 왔나. 맨날 어디까지 왔나에요. 어느 정도 높아져 있나. 이것이 아까 라인, A, B, C 라인.
A는 일찍 시작하고 B는 늦게 시작하고 그럼 B를 가지고 A는 후배라고 합니다. A는 선배가 되겠죠. 어느 것이 살맛이 납니까? A가 살맛이 납니까, B가 살맛납니까? B죠. 왜? 라이벌 생겼으니까. 잡고 선배면 패면 되니까. 잡고 팰 데가 있잖아요. 그냥 패는 게 아니라 잡고 팰 데가 있다니까. 너만 이기면 된다고 팰 데가 있잖아요. 사는 보람이 있어요. 즐거움이 있다고요.
그래서 남편이 아내한테 너무 고분고분해도 아내는 불행해요. 쥐어 팰 데가 없어. 내가 어디까지 볼 수 있느냐를 네가 뭔데 내 욕망에 대해 그걸 충족 안 해주느냐는 말이거든요. 그런데 날이 갈수록 남편이 점점 선전해나간다면 어떻습니까? 맛있는 거, 두부찌개 해주고 좋은 거 다해주는 거예요. 여보, 걱정 마. 뒤에는 내가 있잖아. 누가 있으라 했어? 지가 알아서. 내가 있잖아. 팍팍 밀어줄게. 여고 때 날 무시했던 친구들 함 봐. 내 남편 이렇게 잘 키웠다고 자랑질을 하는 거예요. 그동안 B라인, C라인, D라인이 걸거쳤거든요.
따라서 제가 지금까지 강의한 것은 믿지 아니한다 했으니까 어떤 경우라도 인간이 자아를 벗어나서 주님의 부활을, 십자가를 믿을 수 있는 그러한 능력은 인간에게는 없습니다. 없어요. 믿는 사람 없다 이 말이죠. 믿지 아니하였다고 했으니까요.
14절에 봅시다. “그 후에 열 한 제자가 음식 먹을 때에 예수께서 저희에게 나타나사” 그 다음에 다같이 시작- “저희의 믿음 없는 것과 마음이 완악한 것을 꾸짖으시니” 아, 아까 제가 레위기 23장 29절에서 마음을 괴롭게 한다 했죠? 그러니까 주님 보시기에 우리의 주관과 객관이 꾸지람의 대상이 돼요.
우리는 우리를 절대로 꾸짖지 않습니다. 이만큼 살아온 것도 자기가 보기에 너무나 대단한 공로가 있기 때문에, 나한테. 이만큼 살아온 것도 내 역량과 내 희생정신을 생각한다면 눈물이 날 정도로 자기 자신이 자랑스럽죠. 저 태극기를 보라. 그런 거 있잖아요. 자기가 그렇게 자랑스러운 거예요. 주여 과연 내가 이걸 이뤘단 말입니까. 이런 거 있잖아요. 도대체 인간은 퇴보를 몰라요, 퇴보.
아까 그 악마의 모습, 정체 첫째는 자기 의, 두 번째는 자기, 세 번째는 자기 이름. 순서는 관계없어도 굳이 지형상 위치를 정해준다면 일단 자기는 안 보이죠, 안 보입니다. 자기는 뒤에 빠져있죠. 그 다음에 모든 삶의 동기는 자기 의로써 자기 잘나기 위해 하는 것이고 자기 이름은 결과죠.
이제부터 강의할 어려운 것은 뭐냐 하면 이 이름이 자기를 위해 붙이는 것이 아니고 남을 향하여 불러주는 거예요. 남이 나를 찾을 때 ‘내 이름을 부르면 내가 반응할게’라는 이 이름의 자리를 ‘기호’라고 합시다. 왜 제가 이름을 딱 짚느냐 하면 도저히 천국에 갈 수 없는 인간을 주님께서 이름이라는 것을 부르면서 비로소 우리로서는 안 되는 것을 되게 하시는 거예요. 우리 이름을 부르면서 자기 세계에 넣어주시는 거예요. 이 이름을 제가 기호라고 했죠. 또는 언어라고 얘기할 수 있는데 ‘기호는 사물 자체에 속한 것이 아니다’. 이 사물을 육체로 변형시키고 기호를 이름이라고 하면 ‘내 이름은 내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다’ 이 말입니다. 왜냐하면 이름은 남들이 나를 불러주라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래요.
타인과 내가 접선하는 유일한 장소를 이름이라고 하는 거예요, 이름. 이 사물의 이름이 지우개잖아요. 그런데 지우개라는 이름이 기억이 안 나잖아요. 나이 60, 70되면 아무것도 기억 안나요. ‘어, 이것 좀 줘.’ 전라도 같으면 거시기. 거시기를 번역하면 something이라 하거든요. ‘어이, 썸씽, 거시기’ ‘거시기가 뭔데?’ ‘몰라, 그거’ ‘그 여자가 왜 마음에 들었어?’ ‘거시기한데 거시기해가지고’ ‘뭐?’ ‘아 무조건 거시기. 몰라, 잘 들어봐. 하여튼 거시기해’ ‘뭐 어쩐단 말이야?’ ‘느낌적인 느낌.’ 느낌적인 느낌이 무슨 말이에요, feeling of feeling이에요 뭐에요? 무슨 말이에요 그게? 아니, 이름을 불러라 이름을. 이름을 부르란 말이죠. 문제는 이름을 부르는 순간 그 이름의 의미는 날라가 버린다는 거예요.
사물 자체가 품고 있는 그 모든 것은 손에 잡을 수 없어요, 이름을 부르는 순간. 왜냐하면 기호, 이름은 사물 자체에 속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러니까 이렇게 그림을 그려봅시다. 여기 지우개가 있으니까 지우개를 그려보면 이걸 ‘지우개’라고 부르는 순간 실제 지우개와 ‘지우개’는 같지 않아요. 같지 않고 네모난 카스테라와 카스테라 아닌 것. 이렇게 되는 겁니다.
기호의 의미라는 것은 지우개가 뭐냐 할 때는 지우개를 설명 못하고 아닌 것들을 대동해서 이것도 아니고 이것도 아니고 이것도 아닌 그 뭐시기. 그 무엇. 그렇게 설명할 수밖에 없어요. 나훈아가 사랑은 눈문의 씨앗이라 했죠. 그러면 사랑한다고 눈물 이렇게 모아주면 그게 사랑입니까? 이건 정신병자죠. 사랑은 눈물의 씨앗이라 했으니까 나 당신 때문에 울었어. 그건 당신의 눈물이고 당신의 소금기 있는 그 눈물, 화학식 조사해봐, 분자식 나올 걸. 그건 물체에요, 물체. 이 육체는 나야. 나니까 나라고 부르지 말고 너하고 다른 걸 부르면 너는 네 이름이 있고 나는 내 이름이 있으니까 내 이름을 불러줘. 할 때 그럼 이름을 불러주면 그 이름하고 내 육체하고 같습니까? 너가 아닌 육체를 나라고 이야기할 때 나라고 이름 붙이는 거예요, 너가 아닌 육체.
그럼 주님께서 우리를 부를 때 “내가 아닌 너야. 이리 와.” 이렇게 되는 거예요. 기준이 있어요, 표준이. 의미의 바탕이 있다고요. 그 의미가 시작의미이고 이게 원이니까 시작과 끝이 늘 뺑뺑이 돌잖아요. 한 바퀴 돈다고요. 늘 한 바퀴 돌아요. 여러분 학교 다닐 때 컨닝들 많이 해봤죠? 선생님께서 한 바퀴 돌 때 지나갔다고 치는데 원래 한 바퀴 돌고 15초 내에 와야 되는데 선생님께서 5초 내에 바로 와버리면 걸리잖아요. 주의해라, 나는 도사다. 눈이 열 개 있다. 해봐야 교실 한번 도는데 15초는 걸린다고요. 그럼 아이들은 시험 문제 풀 생각안하고 선생님 위치 파악한다고 바쁘다고요. 빨리 던져라, 갔어. 믿고 나한테 던져. 그런데 믿고 던졌는데 중간 타임에 선생님이 와서 걸리는 겁니다.
순환구조에요. 써클이에요, 써클. 순환구조라서 시작과 끝이 반복되어 빙빙 돌면서 떨어질 것들이 다 떨어진다고요. 처음을 보는 거예요. 주님께서 우리를 저주하시고 우리를 지옥 보내는 이유는 너는 내가 아니라는 거예요. 나처럼 십자가 안 졌고 나처럼 부활 안했기 때문에 너는 죽어 마땅하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유리잔이 진짜 깨어져야 되는데 청소하기가 힘들어가지고... 이 유리잔을 주님께서는 멀쩡하게 보시지 않는데 우리 자신이 멀쩡하게 보는 거예요. 그러나 우리 자신이 멀쩡하게 보는 것은 시작도 아니고 최종마감의 의미도 아니에요, 그냥.
B라인 달리는데 비슷하게 중간에 나는 C라인으로 뒤늦게 태어나서 태어나고 보니까 아버지, 엄마 인생 있고 그 다음에 나 태어나고 보니까 형님 태어나 있었고 시속 몇 키로해서 달리고 있는 거라. 그럼 그 동생의 라이벌이 누구입니까? 형이죠. 왜 세뱃날 형은 만원 주고 나는 오천원 줍니까? 벌써 세뱃날부터 삐졌어. 그 때 집안 어른들이 야, 형은 중학교 들어가잖아. 그러면 나도 중학생 들어가면 만원 줍니까? 그래 만원 준다. 에이, 형은 좋겠네. ‘좋겠네’라는 말은 형, 저거 죽어버려라. 자매 같으면 여동생이 언니 죽어버려라. 언니 죽으면 저 인형부터 잠옷 다 내 거 되는데. 침대도 나 혼자 쓰고. 언니하고 잔다고 발로 받쳐서 몇 번 넘어졌었는데 같이 안 써도 되고. 언니라고 좋은 옷만 입고 나는 맞지도 않는데 언니가 키가 커서. 죽여 버리고 싶은 거예요. 세상의 원수가 누구냐. 형이에요. 형은 동생이 쨉도 안되는 게 따라오는 게 얄미워. 저걸 밟아버려야 돼. 그러다 둘이 어른 되었으니까 어른된 양 참고 있죠. 최종 마감날이 아직 안 왔어요. 아버지, 엄마가 땅, 집 남길 때까지 둘 다 점잖은 척 하다가 만약에 부모님 죽고 난 뒤에 여차하면 조카까지 데리고 나옵니다. 이건 지금 다른 이야기이고.
십자가 부활은요, 우리가 속하지 않은, 우리가 파악하지 못하는 다른 주관이 있어요. 나를 나답게 하는 다른 주관이 있다고요. 마귀가 그동안 나를 나라고 계속 부추긴 거예요. 왜곡해서 허위로 너는 너야. 주님은 “아니야. 너는 네가 아니야. ‘너는 무엇이다’가 아니라 ‘너는 무엇이 아니다’가 되어야 돼. 그게 너다워. 너는 부활도 아니고 너는 진리도 아니고 생명도 아니고 너는 길이 아니야.” 이것을 증거 하라고 우리를 구원하신 겁니다.
주께서 우리 이름을 깨진 이름으로 삼았다는 말은 깨진 이름이 이 주의 이름 안에 네 이름이 들어있다는 겁니다. 너 때문에 죽었다는 겁니다. 네 깨진 이름을 위해서 내가 대신 죽었다는 말이에요. 그래서 14절을 다시 보면 왜 열한제자라고 하느냐면 가룟유다가 짤리고 없으니까. “그 후에 열 한 제자가 음식 먹을 때에 예수께서 저희에게 나타나사 저희의 믿음 없는 것과 마음이 완악한 것을” 꾸짖었죠. 꾸짖는 이유가 뭡니까? 이미 그들은 천국에 속했다, 지옥에 속했다? 꾸짖는 이유가 이미 천국에 속한 거예요.
이제는 누가 너라고 할 때 주눅 들지 말고 나의 당당함, 나의 이 자율성을 이제는 너희들이 닮아야 돼. 나처럼 되어야 돼. 나의 자율성. 나는 내 이름은 타인이 불러줄 이름이 아니고 또는 내가 부르다 죽을 이름이 아니고 주님께서 주님만 부를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겁니다. 그것이 이 육체가 나중에 영광스러운 육체로 교체되고 난 뒤에 그 육체에 해당되는 합당한 이름, 육체=이름이 최종의미가 되는 그 주의 이름으로 썩어질 이름 하에 주의 이름으로 감히 불리워지는 것이 오늘날 우리 성도의 모습입니다. 우리 성도의 위상이에요. 입장이에요. 감히 주의 이름으로 불리워지는 거예요. 우리는 주의 이름을 부르고 주님은 주의 이름으로 우리를 만나고.
보통 사람들은 부를 때 누구 이름을 부릅니까? 내가 ‘아무개야’라고 부르지만 이미 내가 부르는 내 이름을 훼손하지 않고 다치지 않고 그 이름을 부르는 거예요. ‘여보’라고 부를 때에는 부르는 나는 당신 앞에 작살나야 돼. 라고 부르지 않잖아요. 나를 인정해달라는 식으로 여보를 부르듯이 아빠를 부르듯이 부를 때는 부르는 당사자에게 유리하도록 어떤 실익이 있도록 부르잖아요. 그런데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나를 부정하는 의미에서 주의 이름을 부른다 이 말이죠.
오늘 제목을 <깨진 유리컵>으로 할까. 깨진 유리컵을 점잖케 말해서 책망 받는 유리잔으로, 믿음 없는 걸로 화끈하게 다 드러내주신 그 대상체로 불러주는 거예요. 아이고, 이 믿음 없는 인간아. 이미 그 관계는 주의 이름 안에서 믿음 없는 네 이름은 포기하고 믿음으로 주어진 주의 이름으로 합당하게 산다는 말입니다.
그럼 주의 이름은 부활의 영광스러운 부활체와 완벽한 일치를 이루는 주의 이름이에요. 최종 의미가 마감되니까. 다 이루었다는 그 영광된 우리의 부활체, 새 옷을 입는 부활체에 합당한 이름이 주의 이름으로 불리움을 받는 거예요. 내가 이름을 부르기 전에 주께서 주의 이름으로 우리를 불러 주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는 그에 반응해서 주의 이름을 부르는 거예요. 그러니까 주의 이름 자체가 공동 매개영역이 되는 겁니다.
14절 끝에 봅시다. “꾸짖으시니 이는 자기의 살아난 것을 본 자들의 말을 믿지 아니함일러라” 이제 꾸짖는 그 이야기하고 마치겠습니다. 아까 그림을 다시 그려보겠습니다. 작은 박스 있죠. 이걸 두뇌라고 했고 구멍이 있어서 척수가 나오는데 척수가 각 모든 신체의 큰 정육면체 안에 닿여져 있습니다. 근육들이 있고 눈알 두 개 있어서 바깥세상을 보게 되면 점이 있고 이 점을 이미지로 형상화시키는 데에는 기존의 장기기억을 가지고 스스로 판단해서 이미지화시키는 겁니다.
내 신체 유지에 유용성이 있는 쪽으로 이해를 하는 거예요. 이런 것은 심리적인 그림 가지고 이게 남자로 보이냐 여자로 보이냐 해서 여자로 보이면 뭐고 하는 그런 것들이 전부다 인간의 두뇌는 착오와 착각을 계속해서 유발시키는 거예요. 그래서 이 그림이 좋은 점은 뭐냐 하면 인간은 결코 현실 바깥으로 못 나간다는 거예요. 인간의 자아는 현실 바깥에 나갈 수가 없어요. 인간은 전부다 갇혀 있는 거예요. 갇혀 있는 것을 임의로 지 마음대로 해석하는 겁니다.
아내가 자기만의 세계, 절대적인 세계를 이미 구축하고 있는 거예요. 자아가 악마 아닙니까. 악마를 그대로 닮은 거예요. 자기밖에 몰라요. 그러니까 자아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까, 못 벗어납니까? 못 벗어나죠. 자아에서 벗어나봐야 상상계라 해서 백날 정육면체 만들어봤자 더 큰 박스 바깥에 더 큰 박스, 5호 박스, 10호 박스에 또 갇혀있는 거예요. 아무리 해도 이 현실은 나를 위한 현실이라는 자체가 잘못된 해석인 겁니다.
여기서 주님의 십자가 의미는 뭐냐. 꾸짖는 거예요. 꾸짖는다는 말은 꾸짖게 되면 이 모든 꾸짖음이 모든 영역에 있어서 엉터리 같은 작업이라는 거예요. 자아가 생각하는 모든 것은 죄 아닌 것이 하나도 없어요. 예수님을 못 믿게 만드는 것이 다 죄거든요. 그러니까 죄 아닌 것이 하나도 없는 거예요. 우리가 들을 수 있는 복음은 누군가 나를 꾸짖는다는 겁니다. 꾸짖을 수 있는 분을 만났다는 거예요. 내 이름은 부정당하고 그 분이 주의 이름으로, 이미 십자가 부활의 이름으로 우리에게 찾아와서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겁니다.
그러면 정리한다면 이렇습니다. 십자가 부활을 믿지 않는 것으로 제자들은 이미 정리정돈 되어있고 그 다음 여기 오순절 날 성령이 임하게 되면 성령은 ‘성령 왔다’가 아니고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는다”는 그 최종의미를 우리한테 부여하게 되죠.
그런데 아까 그 박스에서 이 말을 기존의 기억과 비교해서 청각으로 듣게 되면 이건 백날 주의 이름을 불러도 지옥 가는 거예요. 왜냐하면 내 주관에 입각한 객관이 살아있는 한 이건 깨진 게 아니고 새로운 정보를 하나 더 획득한 것밖에 안되기 때문에 전혀 꾸짖음이 안 되죠. 꾸짖음이 안 된다고요.
그러면 성령이 온다는 것은 우리를 꾸짖기 위해서 온 거예요. 우리를 부정하기 위해서 온 겁니다. 우리를 죄 되게 하기 위해서 온 거예요. 성령은 십자가를 앞장세워서 우리를 가해자, 다시 말해서 악마로 보는 거예요. 주님의 가해자가 누구입니까? 악마죠. 우리를 악마로 보는 거예요. 악마에게 그대로 놀아났다는 겁니다.
악마에 놀아난 그 모습을 우리가 버려야 될까요, 안 버려야 될까요? 안 버리죠. 포기를 못하죠. 있으면 아까 얘기했듯이 순환해서 다시 우리로 하여금 원래 우리 자리가 어디고 최종자리가 어디인가를 원 안에서 이제는 경쟁 필요 없이 주어지게 되면 내가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게 한 죄인이라는 것을 성도 같으면 기쁨과 그리고 자신감과 그리고 이런 일에 참여하게 된 것을 영광스럽게 생각하면서 누구에게 감사하겠어요? 주께 감사하겠죠.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을 알게 하옵소서. 우리 개인적인 구원을 추구한다는 것이 얼마나 악마적인가를 깨닫게 해주시고 그것을 꾸짖어주심으로써 우리의 구원이 아니라 이미 주의 구원에 합류해있음을, 주님을 증거하게 됨을 감사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