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속자
2021년 1월 24일 본문 말씀: 욥기 19:23-29
(19:23) 나의 말이 곧 기록되었으면, 책에 씌어졌으면,
(19:24) 철필과 납으로 영원히 돌에 새겨졌으면 좋겠노라
(19:25) 내가 알기에는 나의 대속자가 살아 계시니 마침내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
(19:26) 내 가죽이 벗김을 당한 뒤에도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19:27) 내가 그를 보리니 내 눈으로 그를 보기를 낯선 사람처럼 하지 않을 것이라 내 마음이 초조하구나
(19:28) 너희가 만일 이르기를 우리가 그를 어떻게 칠까 하며 또 이르기를 일의 뿌리가 그에게 있다 할진대
(19:29) 너희는 칼을 두려워 할지니라 분노는 칼의 형벌을 부르나니 너희가 심판장이 있는 줄을 알게 되리라
욥은 자신이 하나님에게 당하는 그 모든 것을 기록으로 남겼으면 합니다. 보통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먼저 있고 그 기록된 말씀을 최대한도로 잘 지켜보기 위해 노력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요구사항과 자신이 행위가 최대한으로 일치시킬 때, 자신은 하나님에게도 인정받는 자가 된다고 여깁니다.
하나님은 이 우주의 최고되시는 분이니 그분으로부터도 인정받는 것이라면 인간으로 얻을 수 있다는 것은 모두 얻었다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욥은 그 정도를 뛰어넘습니다. 자신이 아예 ‘기록’이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기록’이 곧 자기 자신이라는 겁니다. 이 말은, 내가 고난 받기 전에 하나님의 기록이란 사실상 없다고 봐야 한다는 겁니다.
만약에 자신의 고난당하는 것이 기록되어진다면 이는 곧 이 기록된대로 믿지 않는 자는 심판이란 처벌을 피할 수 없다는 논리에 도달된다는 겁니다. 누가 봐서는 지금 욥은 대단한 자신감을 피력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주장은 욥이 원해서가 아닙니다. 고난받는 자신이 중요하다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고난을 내리시는 주님이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이 중요한 하나님의 뜻을 어찌 기록으로 아니 남기겠습니까? 욥은 줄곧 자신이 하나님과 함께 있다고 말입니다. 물론 하나님을 만나는 것은 자신이 죽고 난 뒤에 만나겠지만 그 안에 이유가 불명한 애매한 고난을 주시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하신 일이나 벌써부터 자신은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이 맞다는 겁니다.
이렇듯 자신과 함께 계시는 하나님의 인정치 않는다면 그 사람은 나에게 일어나는 하나님의 일을 믿지 않는 것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다고 욥은 단정합니다. 욥의 이러한 이야기는 신약에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을 닮았습니다. 요한복음 8:21,24에 보면, “다시 이르시되 내가 가리니 너희가 나를 찾다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겠고 내가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하였노라 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 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욥은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욥과 욥의 친구 사이에 공통점을 주지 않으려는 것을 말입니다. 욥을 따로 분리시키십니다. 이럴 때 우리들은 자꾸만 욥 쪽으로 서려고 하지 마세요. 반대로 욥의 친구 쪽에서서 그들의 심정을 이해하려고 해야 합니다. 왜 그런고 하니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욥의 주장을 그대로 듣고 있는 ‘욥의 친구’ 심정에서 욥의 주장을 다 들었다고 칩시다. 뭐라고 대꾸하시겠습니까? 이렇게 반박할 것입니다. “욥아, 너의 그 주장은 너의 일방적 주장일 뿐입니다. 네가 죽어서 하나님을 본다는 것을 미리 우리들에게 증명해다오. 그렇다면 네 말을 믿어줄게”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심판받는다는 것조차도 믿어줄 용의가 있다. 참으로 너의 주장이 실질적으로 사실 그대로 인 것을 우리에게 증명될 수 있다는 말이다”라고 나올 겁니다. 성경을 대하면서 우리는 자꾸만 우리 자신을 말씀에 반대편에 세우고 그곳으로부터 논리를 시작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힘으로 구원되는 것이 아님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나와 있는대로 날름날름 다 받아먹고 “믿습니다. 아멘 믿습니다”라고 한다면 이는 하나님의 여분의 것으로 개입된 없는 것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나를 믿는 것’이 됩니다. 내 실력과 내 능력의 잠재력을 내가 인정하는 셈이 됩니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의 일과 인간 사이의 단절성이 없이 바가 됩니다.
하나님의 뜻은 십자가 사건에서 “다 이루었다”가 됩니다. 이 외침 속에는 ‘인간들이 하나님을 구박하는 본질이 있음이 제대로 다 드러났다’가 됩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가 단절되어 있다는 사실이 밝혀진 겁니다. 따라서 이 단절성을 살리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일도 아니요 믿음도 아닙니다.
신약에 와서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이 예상 못한 공간을 하나 만들어내십니다. 그것이 ‘그리스도 안’ 혹은 ‘예수 안’입니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욥 1:4) 이 ‘예수 안’이라는 공간은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시작해서 자체적으로 범주를 정해진 영역입니다.
그러니까 시작을 ‘예수님의 죽으심’이니 살아 있는 그 어떤 인간도 이런 공간이 있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하는 겁니다. 인간들이 상상하는 것은, “내가 살아있으니 살겠다”는 정신에 입각해서 만든 천국입니다. 당연히 가짜이지요. 그렇게 되면 ‘예수 안’이 아니라 ‘나 안’이 되는 겁니다.
기독교와 복음의 차이가 이런데서 드러납니다. 기독교라는 것은 다른 여타의 종교와 비교해서 규정되는 힘의 결집체입니다. 그래서 “국가가 기독교나 교회를 핍박하지 말라. 우리도 살아야겠다”라는 문장들이 이 세상에서는 의미있는 것으로 사용됩니다. 그러나 국가는 결코 ‘예수 안’을 핍박하거나 구박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세계, 그런 공간 자체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미 인간들이 자신들이 ‘있다’고 여기기 때문에 ‘내가 있는 공간’과 ‘내가 속하지 않는 공간’ 정도로 구분짓습니다. 그런 구분에는 기독교도 있고 교회는 있을지 모르겠지만 ‘예수 안’은 없습니다. ‘예수 안’이라는 영역은, 사람들로부터 필요없다고 구박받고 죽으신 분에 의해서 시작된 곳입니다.
쉽게 말해서, 마른 풍선에 입대고 훅하고 불면 큼직한 둥근 풍선이 되는 것처럼, 주님께서 자체적으로 자신을 위한 범주를 만드신 겁니다. 십자가 공로를 훅 불어넣어서 말입니다. 이는 인간들이 자력으로 들어올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따라서 ‘예수 안’이라는 공간을 채우는 것은 오로지 예수님의 선택 뿐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본문에서 욥이 거론한 ‘구속자’ 개념입니다. 즉 자신이 구원할 자를 구원자가 알아서 뽑아넣는 겁니다. 구원되는 자이 사전에 허락이나 의견을 듣거나 그의 희망을 듣고 구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욥은 어디까지나 구약적 인물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기록을 자신에게 쏟아진 하나님의 조치에 대해서 기록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신약에 나오는 ‘예수 안’이라는 공간은 일체 인간과 의논하지를 않습니다. 하나님과 예수님과의 의논에 의해서 수립하십니다. 왜냐하면 모든 하나님의 말씀과 율법의 주인공은 욥이나 여타의 사람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사람이란 일방적으로 예수님의 이 단절의 취지를 받은 사람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지식의 결과는 거짓된 하나님과 거짓된 천국임을 알고 주님의 부르심만 드러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구속자
2021년 1월 24일 본문 말씀: 욥기 19:23-29
(19:23) 나의 말이 곧 기록되었으면, 책에 씌어졌으면,
(19:24) 철필과 납으로 영원히 돌에 새겨졌으면 좋겠노라
(19:25) 내가 알기에는 나의 대속자가 살아 계시니 마침내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
(19:26) 내 가죽이 벗김을 당한 뒤에도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19:27) 내가 그를 보리니 내 눈으로 그를 보기를 낯선 사람처럼 하지 않을 것이라 내 마음이 초조하구나
(19:28) 너희가 만일 이르기를 우리가 그를 어떻게 칠까 하며 또 이르기를 일의 뿌리가 그에게 있다 할진대
(19:29) 너희는 칼을 두려워 할지니라 분노는 칼의 형벌을 부르나니 너희가 심판장이 있는 줄을 알게 되리라
욥은 자신이 하나님에게 당하는 그 모든 것을 기록으로 남겼으면 합니다. 보통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먼저 있고 그 기록된 말씀을 최대한도로 잘 지켜보기 위해 노력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요구사항과 자신이 행위가 최대한으로 일치시킬 때, 자신은 하나님에게도 인정받는 자가 된다고 여깁니다.
하나님은 이 우주의 최고되시는 분이니 그분으로부터도 인정받는 것이라면 인간으로 얻을 수 있다는 것은 모두 얻었다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욥은 그 정도를 뛰어넘습니다. 자신이 아예 ‘기록’이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기록’이 곧 자기 자신이라는 겁니다. 이 말은, 내가 고난 받기 전에 하나님의 기록이란 사실상 없다고 봐야 한다는 겁니다.
만약에 자신의 고난당하는 것이 기록되어진다면 이는 곧 이 기록된대로 믿지 않는 자는 심판이란 처벌을 피할 수 없다는 논리에 도달된다는 겁니다. 누가 봐서는 지금 욥은 대단한 자신감을 피력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주장은 욥이 원해서가 아닙니다. 고난받는 자신이 중요하다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고난을 내리시는 주님이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이 중요한 하나님의 뜻을 어찌 기록으로 아니 남기겠습니까? 욥은 줄곧 자신이 하나님과 함께 있다고 말입니다. 물론 하나님을 만나는 것은 자신이 죽고 난 뒤에 만나겠지만 그 안에 이유가 불명한 애매한 고난을 주시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하신 일이나 벌써부터 자신은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이 맞다는 겁니다.
이렇듯 자신과 함께 계시는 하나님의 인정치 않는다면 그 사람은 나에게 일어나는 하나님의 일을 믿지 않는 것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다고 욥은 단정합니다. 욥의 이러한 이야기는 신약에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을 닮았습니다. 요한복음 8:21,24에 보면, “다시 이르시되 내가 가리니 너희가 나를 찾다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겠고 내가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하였노라 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 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욥은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욥과 욥의 친구 사이에 공통점을 주지 않으려는 것을 말입니다. 욥을 따로 분리시키십니다. 이럴 때 우리들은 자꾸만 욥 쪽으로 서려고 하지 마세요. 반대로 욥의 친구 쪽에서서 그들의 심정을 이해하려고 해야 합니다. 왜 그런고 하니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욥의 주장을 그대로 듣고 있는 ‘욥의 친구’ 심정에서 욥의 주장을 다 들었다고 칩시다. 뭐라고 대꾸하시겠습니까? 이렇게 반박할 것입니다. “욥아, 너의 그 주장은 너의 일방적 주장일 뿐입니다. 네가 죽어서 하나님을 본다는 것을 미리 우리들에게 증명해다오. 그렇다면 네 말을 믿어줄게”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심판받는다는 것조차도 믿어줄 용의가 있다. 참으로 너의 주장이 실질적으로 사실 그대로 인 것을 우리에게 증명될 수 있다는 말이다”라고 나올 겁니다. 성경을 대하면서 우리는 자꾸만 우리 자신을 말씀에 반대편에 세우고 그곳으로부터 논리를 시작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힘으로 구원되는 것이 아님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나와 있는대로 날름날름 다 받아먹고 “믿습니다. 아멘 믿습니다”라고 한다면 이는 하나님의 여분의 것으로 개입된 없는 것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나를 믿는 것’이 됩니다. 내 실력과 내 능력의 잠재력을 내가 인정하는 셈이 됩니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의 일과 인간 사이의 단절성이 없이 바가 됩니다.
하나님의 뜻은 십자가 사건에서 “다 이루었다”가 됩니다. 이 외침 속에는 ‘인간들이 하나님을 구박하는 본질이 있음이 제대로 다 드러났다’가 됩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가 단절되어 있다는 사실이 밝혀진 겁니다. 따라서 이 단절성을 살리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일도 아니요 믿음도 아닙니다.
신약에 와서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이 예상 못한 공간을 하나 만들어내십니다. 그것이 ‘그리스도 안’ 혹은 ‘예수 안’입니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욥 1:4) 이 ‘예수 안’이라는 공간은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시작해서 자체적으로 범주를 정해진 영역입니다.
그러니까 시작을 ‘예수님의 죽으심’이니 살아 있는 그 어떤 인간도 이런 공간이 있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하는 겁니다. 인간들이 상상하는 것은, “내가 살아있으니 살겠다”는 정신에 입각해서 만든 천국입니다. 당연히 가짜이지요. 그렇게 되면 ‘예수 안’이 아니라 ‘나 안’이 되는 겁니다.
기독교와 복음의 차이가 이런데서 드러납니다. 기독교라는 것은 다른 여타의 종교와 비교해서 규정되는 힘의 결집체입니다. 그래서 “국가가 기독교나 교회를 핍박하지 말라. 우리도 살아야겠다”라는 문장들이 이 세상에서는 의미있는 것으로 사용됩니다. 그러나 국가는 결코 ‘예수 안’을 핍박하거나 구박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세계, 그런 공간 자체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미 인간들이 자신들이 ‘있다’고 여기기 때문에 ‘내가 있는 공간’과 ‘내가 속하지 않는 공간’ 정도로 구분짓습니다. 그런 구분에는 기독교도 있고 교회는 있을지 모르겠지만 ‘예수 안’은 없습니다. ‘예수 안’이라는 영역은, 사람들로부터 필요없다고 구박받고 죽으신 분에 의해서 시작된 곳입니다.
쉽게 말해서, 마른 풍선에 입대고 훅하고 불면 큼직한 둥근 풍선이 되는 것처럼, 주님께서 자체적으로 자신을 위한 범주를 만드신 겁니다. 십자가 공로를 훅 불어넣어서 말입니다. 이는 인간들이 자력으로 들어올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따라서 ‘예수 안’이라는 공간을 채우는 것은 오로지 예수님의 선택 뿐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본문에서 욥이 거론한 ‘구속자’ 개념입니다. 즉 자신이 구원할 자를 구원자가 알아서 뽑아넣는 겁니다. 구원되는 자이 사전에 허락이나 의견을 듣거나 그의 희망을 듣고 구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욥은 어디까지나 구약적 인물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기록을 자신에게 쏟아진 하나님의 조치에 대해서 기록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신약에 나오는 ‘예수 안’이라는 공간은 일체 인간과 의논하지를 않습니다. 하나님과 예수님과의 의논에 의해서 수립하십니다. 왜냐하면 모든 하나님의 말씀과 율법의 주인공은 욥이나 여타의 사람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사람이란 일방적으로 예수님의 이 단절의 취지를 받은 사람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지식의 결과는 거짓된 하나님과 거짓된 천국임을 알고 주님의 부르심만 드러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