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20201008a슥3장8절(지정과 고정)-이 근호 목사
스가랴3장, 지난시간에는 제사장과 여호수아를 연결시켰습니다. 여기 3장1절에 보면, 대제사장 여호수아는 이렇게 되어있지요. 그런데 그 여호수아 대제사장의 의미는 뭐냐, 옷에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옷을 벗기라 하고 다시 입혔습니다. 이것을 이렇게 생각하시면 오늘 강의가 굉장히 쉬워져요. 최종자리. 또는 앞에다가 나의 최종자리로 붙어도 괜찮고. 최종자리는 옷 바꿔치는 자리. 이게 최종자리에요. 우리가 갈 수 있는 최종자리는 옷을 바꾸는 자리에요.
그러면 이 옷 바꾸는 것이 얼마나 소중하냐는 것은 무엇과 대비가 되느냐 하면 악마와 대비가 됩니다. 악마에는 하나님이 친히 입혀주는 옷이 없습니다. 악마는 그냥 있는 자기에게 있는 그 모습 그대로 그게 최종자리에요. 최종자리. 그런데 여호수아는 최종자리가 옷을 바꿔치기하는 그 하나님의 행하심이 담겨있는 자리가 최종자리, 마지막 자리입니다.
그러면 마지막 자리까지 이르는 옷은 더러웠지요. 이게 마지막 가는 자리까지 이어지는 것이 뭐냐 하면 바로 자아의 자리에요. 자아의 자리, 나. 내가 나에게 최종 됨으로서 우리는 최종자리를 가리고 있는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내가 나로 계속가면서 그동안 이 세상에서 입었던 우리의 옷이라는 것은 나를 대체하거든요. 나 자신을 표현하는 거죠. 옷은 자아표현형. 나를 표현하는 용도입니다.
그런데 이게 뭐냐 하면 더럽고 추잡하다, 이 말은 곧 내 자아가 나라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추잡하고 더럽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옷이 그렇게 내 자신을 가지고 있는 나를 대표하는 그 나가 더럽다면 여기서 나오는 인간이 하는 모든 해석이죠. 인간의 모든 말이나 세상을 보는 그 해석 자체가 더럽다가 돼요. 이건 하나님께서 받아주지 않는 더러운 해석이 되는 겁니다. 어쩠든 간에 이 여호수아에게는 최종자리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옷을 친히 바꿔주는 자리, 그 자리가 됩니다.
오늘 본문 한 번 봅시다. 지금 옷을 입은 상태에요. 옷을 바꿔 입은 상태입니다. 8절에 보게 되면. “대제사장 여호수아야 너와 네 앞에 앉은 네 동료들은 내 말을 들을 것이니라 이들은 예표의 사람이라 내가 내 종 순을 나게 하리라” 그렇게 되어있지요. 계속해서 옷을 입혀 놓고 옷 자체가 역사 속에서 쫙 펼쳐지게 돼요. 옷의 갖고 있는 의미가. 옷이 펼쳐지게 되면 여기에 하나님이 바꿔준 옷과 대제사장 입는 옷과 자아사이가 이렇게 벌어지게 돼요. 분리됩니다.
그러면 이건 무엇을 뜻하느냐 하면 이렇게 하면 돼요. 표현은 어렵지만, 들어보면 여러분이 아~ 그 뜻이구나! 아는 겁니다. “나는 나의 개념 외에 있다.” 외부에 있다. “나는 나의 개념 외부에 있다.” 가 이제부터 여호수아의 역사를 따라 가게 돼요. 여기에 ‘나는’와 ‘나의 개념’이 달라집니다. 나는 그냥 나가 있는 거고, 나라는 개념은 이건 뭘 하느냐 하면 최종자리, 인간은 더 이상 갈 수 없는 최종자리가 무슨 자리냐 하면 여호와 앞에 가요. 여호와 앞에 가서, 최종자리에서 아까 무슨 일이 일어났지요? 여기서 옷 바꿔치기가 일어났지요.
그러면 나는 그동안 더러운 옷이 뭐냐 하면 대제사장 옷입니다. 대제사장옷과 나는 그동안 일치가 된 거예요. 여호수아가 일치됐는데. 최종자리에 가보니까 그 옷 벗으라는 거예요. 그 옷 벗어라. 그러면 나와 이 제사장 옷이 일치와 합치가 됐는데 이걸 하나님께서 더럽다고 이야기한다면 그동안 하나님이 최종적으로 주신 이 나라는 개념. 나라는 개념과 나는 이게 처음부터 이건 합치될 수 없고 떨어져야 된다는 사실이 드러나지요. 그걸 주일날 설교에서 밀어낸다고 이야기했는데 나와 내 개념이 이게 꾸준히 떨어져 있어야 돼요. 떨어져 있다는 것은 우리한테는 정말 복된 소식입니다.
왜냐 하면 더 이상 내가 나에 대해서 신경 안 써도 되기 때문에. 나는 주님이 주신 개념 바깥에 외부에 있기 때문에 어차피 떨어져 나가야 돼요. 그러면 옷 바꿔치기를 여러분이 아는 용어로 바꾸겠습니다. 이것이 뭐냐, 약속이에요. 하나님의 약속. 하나님의 약속이라고요. 약속이 나라는 못난 인간을 통해서 나의 약속된 개념이 본격적으로 펼쳐지기 시작하는 겁니다. 나를 통해서.
그러면 그 과정에서 나의 역할은 뭐냐, 떨어졌다. 나는 그 개념과 상관없어. 외부에서만 계속 발설하면 돼요. 굉장히 이건 쉬운 겁니다. 더 쉽게 얘기해서 인간은 해낼 수 있는 어떤 해석도 하나님이 거부한다. 인간이 해낼 수 있는 어떤 해석도. 진정한 이 세상의 신학자 같으면 유일한 신학자는 누구냐, 악마입니다. 악마만 신학자에요. 왜냐하면 신학자는 신학 자체가 나를 고수하려하거든요. 나를 지키려고 하니까 성경 모든 개념을 나와 안 떨어지려고 하는 거예요. 모든 개념을.
구원, 천국, 율법, 좋다는 것은 ‘그거 내가 해야 돼!’ ‘내거 해야 돼!’ 약속. ‘아~ 그 약속 내거 만들어야 돼!’ 그렇게 생각하면 악마의 사고방식에서는 주께서는 친히 바꿔치기 한다는 개념이 스며들 수가 없어요. 바꿔치기 하는 개념이 들어가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이걸 뭐라고 함축해서 하느냐 하면 이걸 함축하면 이렇게 됩니다. ‘나의 동질성에는 기억이 무능하다.’ 나의 동질성, 내가 나답게 하는 데서의 나의 지난 과거는 아무 힘도 못써요. 무능하기 짝이 없는 거예요.
이 말은 달리 하면 내가 견고해질 필요가 없다. 내가 견고해질 필요가 없는 거예요. 더 노골적으로 이야기할까요. 나는 나의 보호가 필요치 않다. 이게 바로 복음 아닙니까. 이게 바로 복음이거든요. 내가 나를 보호할 필요가 없어요. 무엇 때문에? 최종의 자리 때문에. 그래서 이 개념은 어디서 나오는가, 오늘 제목 나갑니다. 이 모든 개념에서 나오는 건 뭐냐 하면, 자리. 자리에요. 자리인데, 이 자리라는 제목보다도 요걸 바꾸겠습니다. 뭐로 바꾸느냐 하면 ‘지정과 고정’ 지정과 고정.
고정은 내가 나를 보호하기 위해서 내가 견고해지기 위해서 나의 기억의 뭉치로서 지난번 나와, 나와 일치되기 위해서 세상 모든 것이 좋은 것들이 다 내 것이 되기 위해서 노력하기 위해서는 내가 한 장소에 고정되어야 되는 거예요. 고정. 그런데 고정된 것은 주께서 고정된 것은 바꿔치기가 없기 때문에 요건 누구와 최종 만나느냐 하면 악마와 한패인 것이 나중에 들통이 나요. 악마와 한패.
악마는 바꿔치기가 없어요. “그냥 가! 니 잘났잖아. 니 잘할 수 있잖아. 기도 잘 하되. 니 선교 잘해. 그냥 가!” 바꿔치기가 없어요. “그래야 니가 살아. 니 행함이 니를 살리는 거야. 너의 행함이 너를 살리는 거야. 기도하면 복 받고 기도 안하면 니는 작살났어. 끝났어. 하나님의 십자가? 그거 니가 믿으라고 한 거야. 니가 믿으면 니가 살고, 안 믿으면 니가 죽는 거야.” 모든 개념, 모든 성경 개념은 나와 합치시키기 위해서 그걸 통해서 내가 견고해지고 나의 모든 행했던 모든 업적과 기억들이 나와 이 개념과 동질시 시키기 위해서 노력했던 거. 그걸 통해서 내가 노리는 것은 뭐냐, 나는 나를 보호해서 그것이 나의 영원한 자리. 자리도 두 종류가 있지요. 하나는 지정된 자리와 고정된 자리인데, 고정된 자리에 묶여버립니다.
요 고정된 자리가 마지막 누굴 만나느냐, 하나님의 여호와의 회의 앞에 여호수아 맞은편에 쪽으로 가요. 여호수아 맞은편에 쪽으로. 제가 언제 설교할 땐가 했지요. 해운대역 지하철 엉뚱한데 나왔다고요. 자기는 해운대역 쪽으로 나온다고 보니까 나와 보니까 해운대역 맞은편에 나왔어요. 여호수아 맞은편에 누가 있습니까? 악마. 악마와 만나요. 결국 악마와 단짝인 것이 비로소 노출이 된 겁니다.
내가 나를 구원하려는 것이 이게 악마가 배후에서 시킨 일을 내가 하는 거예요. 그러면 내가 나를 보호하지 않으면 나는 어떻게 하나, 노출되면 되지요.
그러면 하나님이 주신 자리는 뭐냐 고정된 자리가 아니고 주님의 바꿔치기로 인하여 주어진 지정된 장소지요. 고정된 장소가 아니고. 고정은 내가 결정한 장소, 내가 영원하고 싶어 있는 장소는 고정된 장소고. 주께서 오늘 여기 살아라. 오늘 경기도 살아라. 서울 살아라. 이렇게 지정해 줄 때는 그 풍경이 그렇게 슬프지 않습니다.
참, 남자들이 가을되면 굉장히 가을을 좋아하고, 여자는 봄을 좋아하거든요. 그래서 우스개소리로 이런 농담도 있어요. 여자들은 주로 봄에 결혼하고 남자들은 주로 가을에 결혼한다.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데. 가을되면 왜 쓸쓸해지는 이유냐 하면 그 풍경이 그 풍경이라서 그래요. 나무 있다고 숲 있다고 좋다고 와보지만 몇 개월 안가서 지루한 일상을 반복되는 풍경이라고 하는데 새로움이 없는 풍경. 새로움이 없는 풍경에서는 굉장히 위험스럽게 되지요. 왜? 또 새로운 걸 하려면 모험이 필요하고, 특히 남자들은 직장 때려치우는 이유가 똑같은 풍경이기 때문에 그래요. 학교 가기 싫은 아이들이 월요일이 되면 월요병 걸려서 꾸리해가지고 학교 언제 졸업하느냐고, 언제 청소년길 끝나느냐 그것만 생각하듯이 학교 가듯이 남자도 마찬가지입니다.
남자나 여자나 새로운 것이 없으면 살맛이 없어요. 새로운 거. 그래서 교회의 목회자들은 프로그램을 왜 자꾸 짜내는 이유가 뭐냐 하면 교회 다니기가 지루하지 않게 만들어서 그 교회 발목 잡기위해서 그렇게 해요. 그거 못하면 목회자로서 장로한테 잘립니다. 계속 이벤트에 프로그램을 돌리고, 돌리고, 계속 돌리고, 돌리고. 1년 내내 돌아가는 거예요. 내내.
특히 서구 독일이나 프랑스나 이태리나 그런 데는 일 년 내내 성자들의 축일, 생일, 그런 것을 계속해서 놀고 또 놀고. 또 놀고. 카렌더 자체가 아주 성경 내용으로 꽉 차있어 가지고 계속 돌려가지고 기독교 문화를 계속 지속하려는 그 수법처럼. 교회가 그 시도를 하고, 교인들은 그것도 모르고 그거 다 따라가면 자기가 하나님을 만날 줄 아는데, 하나님까지는 가는데 누구와 만나느냐, 악마와 만나요. “반갑다 친구야! 잘 왔다. 그동안 니가 한 일은 내가 다 시킨 거야.” 성경개념과 나를 일치시키는 거예요. 합체 시키는 것.
그러면 이 새로운 개념은 어떻게 되느냐, 이제부터는 어렵습니다. 이건 아셔야겠어요. 제목은 지정과 고정입니다. 하나님이 지정한 곳은 거기에 새로운 시간과 새로운 공간을 할당받기 때문에, 배급받기 때문에 지금 있는 풍경이 나를 위한 풍경이 아니고 나를 노출시키는 풍경이 돼요.
성경을 찾아보고 좀 더 어려운 이야기를 해봅시다. 누가복음24장26절에서 27절.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이에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이 말씀이 뭐가 어려우냐 하면 하나의 개인이 있고 하나의 개인이 있다면, 그 사람 이야기는 그 사람에 해당되는 이야기만 우리가 들려질 때, 이게 상식적이지요.
그러나 시편이야기, 그리고 모세 율법이야기, 선지자 스가랴, 호세아, 아모스, 모든 이야기가 한 인간에게 다 담긴다는 것이 이게 믿을 수가 있느냐, 본인이 경험하고 본인이 체험했으면 당신 한 이야기만 하라고. 어떻게 저 미국에 있는 일이 당신에 관한 이야기야? 이건 말도 안 되는 이야기하지 마. 전 세계 아프리카에 있는 일이 나와 연루되어 있어. 이게 구라지요. 이건 말도 안 되거든요. 인간세계에서.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파리가 나는 거, 들풀이 꽃피는 거, 전부 다 예수님에게 해당되는 이야기를 다 담고 다 거기다가 소급시키고 거기다가 다 함축시킨다는 게 인간세계에서의 논리로서는 이건 터무니없는 거예요. 어처구니없는 거죠. 왜 그렇게 하시는가 이 말이죠. 모세는 모세 이야기뿐이지. 어떻게 모세 이야기가 당신이야기고, 아브라함 이야기가 당신 이야기고 이삭이 어떻게 당신 이야기냐. 그건 말도 안 된다. 그래서 아까 이야기했지만 인간의 모든 해석은 거부합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모든 해석은 거부하는 게 본인이 세상을 보는 풍경을 보는 것처럼 예수님도 그렇게 대해버리면 이게 어떻게 되느냐 하면 예수님의 맞은편에 서요. 자, 여기 하나님이 계십니다. 여기 악마가 있어요. 하나님께서 악마를 만드셨습니다. 그 맞은편에 누가 있었습니까? 맞은편에 여호수아가 있지요. 악마가 여호수아가 부러워서 하나 되자. 이렇게 제안했습니까? 아니면 고소했습니까? 고소했지요. 여기에 고소가 들어오고 고발이 들어왔어요. 더럽다고. 욥기에 보면 나오지요. 욥을 고소한 것처럼. 고소, 고발했다는 말은 결코 하나 될 마음이 전혀 없다 이 말이죠.
니는 니 쪽에서 나는 나 쪽에서 서로 마주보자는 겁니다. 악마의 제안이. 악마가 보기에는 여호수아는 개인이에요. 하나의 개체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옷을 입히는 순간 거기서 개체가 여기는 여기서 뭐가 발생되느냐 하면 스가랴3장 8절에 보면, 이들은 예표의 사람이라, 내가 내 종 순. 내 종 순을 나게 한다는 거예요. 여기서 어떤 생산이 일어나는 거예요. 여호수아에게 입힌 옷에서, 옷을 주신 그 약속에서 어떤 분이 생산되는 거예요.
생산되어버리면 이 분에 의해서 그 전에 일어났던 모든 시편과 모든 예언, 율법, 선지자의 모든 예언이 이 새로 생산되는 전적으로 전부다 이게 다 쏠리게 되어있어요. 몰리게 되어있다고요. 이게.
하나님께서는 최종자리에서는 누구 편을 드느냐, 여호수아 편을 들었어요. 여호수아가 훌륭한 게 아닙니다. 여호수아는 더러워요. 더러우니까 악마의 고소대상이 된 겁니다. 우리가 성도가 되었으면 남이 우리를 고소할 때 고마워해야 돼요. “그래, 니가 고소할만해. 그래 니가 보듯이 내가 어설프기 짝이 없어. 니가 보기에는 내가 허점투성이지. 바로 그거야. 내가 허점투성이인 거 맞아.” 악마는 여호수아 앞에서 타인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약속이 여호수아하고 타인이 아니고 여호수아 안에 약속이 스며들어와 버려요. 이건 동질입니다. 타인이 아니고 새로운 나로서 치고 들어온 거예요. 내가 있는데 이거 말고 새로운 개념의 나가 나를 대신하는 나. 나를 대신했던 나. 약속을 담은 새로운 나가 나의 자리에 치고 들어오시는 거예요.
그래서 나는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는 겁니다. 그러면서도 외형적으로 그걸 나라고 주님께서 나라고 지칭하는 겁니다. 아~ 정말 이건 신비로워요. 그러면 이걸 더 쉽게 이야기해서 차고 들어온 걸 약속이니까 이걸 뭐라고 하느냐, 무한으로 보는 거예요. 그리고 나는 어설픈 개인이니까 유한으로 보자 이 말이지요. 유한 속에 뭐가 들어온다? 무한이 들어오는 겁니다.
사도바울이 이걸 알게 된 거예요. 나는 유한한데, 무한이 들어오게 된 겁니다. 사도행전9장7절에 보면 같이 가던 사람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하여 말을 못하고 섰더라. 분명히 사울이란 사람은 주님하고 대화를 했어요. 대화를 했다고요. 대화를 했는데 말을 주고받았는데 같이 가던 동행들은 그냥 천둥소리 정도, 소리만 듣고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말도 안 들린 거예요. 같은 인간인데 왜 다르지요. 같은 인간인데.
하나는 자기 자리가 고정돼 있고, 또 한 쪽은 사울에게는 성령을 통해서 고정된 자리가 아니라 지정된 자리가 되고. 나는 고정된 자리를 고수해요. 내 안에 쓱 들어온 주님은 나로 하여금 잠시 있다가 가는 지정된 자리로서 전환시켜버린 겁니다. 그렇게 되면 나는 나를 표현하고 나를 나타내고 나를 증거 하는 그런 인생이 아니고, 약속을 증거 하는 사람으로 달라집니다.
그런데 그러한 약속은 뭐를 반복하느냐, 옷을 벗기고 다시 새 옷으로 갈아입는 사건의 반복으로서 계속 매일같이 또는 그냥 그것이 계속 반복하는 거예요. 보통 인간의 나라 하는 것은 악마는 유일한 신학자니까 신학자들이 추구하는 것은 뭐냐 하면 최상급이에요. 최상급. 최상급인 반면에 성령 받은 것은 초월입니다. 이걸 쉽게 이야기하면 이렇게 보면 돼요.
작곡자 가운데 가장 뛰어난 작곡자는? 베토벤이다. 베토벤 좋아하는 사람들은 되게 좋아할 거예요. 최고의 작곡자는 베토벤이다. 그런데 모차르트는 다른 작곡자다. 어느 게 높습니까? 다른 작곡자지요. 우리 나이 때에 한창 20대 때에 심심해서 막 싸우는 게 있어요. 나훈아냐, 남진이냐, 전라도 남진, 경상도 나훈아. 여학교에서는 서로 팬클럽하고요, 서로 싸우고 난리도 아니에요. 핑클이냐, 쿨이냐, 그런 거 있잖아요. 하는 것처럼. 라이벌 의식이 되어야 그 반복적인 학창시절이 심심하지 않습니다. 싸우는 가운데서.
최고라는 것은 인간의 해석 범위 안에 들어가요. 최고. 그리고 그 최고는 나와 연속되어있어요. 끊어지지 않고 있어요. 나도 노력하면 되는 것이 최고입니다. 그러나 그 선을 훌쩍 넘어가 버리면 그건 초월이지요. 이건 인간일 수가 없다는 거예요. 그게 바로 하나님께서는 사울을 동행자와 같이 가면서 하나님께서 배려해가지고 동행해 가지고 알아들으면 되는데 다른 사람은 배제시키고 사울에게만 하나님과 대화해버린 겁니다. 십자가 질 때 여러분들이 아시다시피 십자가 옆에 하나만 있는 게 아니고 두 개, 세 개였지요. 세 개인데 같은 강도들 다 구원할 수 있는데 하나님께서는 한쪽은 건지시고 한쪽은 버리시는 이유가 예수님 자신이 이 세상과 초월되어있다는 것을 두 강도의 비교로 표현하려고 하신 겁니다.
그렇다면 그 비교가 반복해서 악마 쪽이냐, 그리고 하나님의 여호수아 쪽이냐, 요 간격. 요 차이를 이걸 여호수아만 그런 게 아니고 요건 사건이니까 약속은 사건으로 구성되어있어요. 요 사건을 그대로 우리에게 집어넣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평소에 뭘 생각하느냐 하면 악마 쪽에 속해요. “나는 나다. 나만 보호하고 나만 챙기면 그만이야.” 라고 하지요.
그러면 여기 이제 주님께서 사건을 주게 되면 나 말고 나는 나의 잘남 덩어리 나에서 뭐로 전환되느냐 하면 주님이 구성한 사건에 의해서 나의 잘남 덩어리가 아니고 약속 덩어리. 약속덩어리로서 내가 되는 겁니다. 약속덩어리에 대해서 때가 되게 되면 이 약속은 나중에 마지막 때에 어떤 모습이 되느냐 하면, 어떤 모습으로 변형되느냐 하면, 약속이 인물이 됩니다. 사람이 돼요. 말씀이 육신이 된다고요.
사람이 육신이 되어버리면 나있을 때, 나는 남하고 타인하고 무슨 관계냐 하면 나와 타인은 나는 나고 타인은 타인이기 때문에 어떤 관계냐, 말의 관계에요. 언젠가 설교할 때 했지요. 말의 관계에요. 어떤 말을 해도 내가 나를 보호하기 위해서 나의 정당성을 지켜내기 위해서 우리는 하는 걸 말이라고 하는 겁니다.
이 말속에 뭐가 있느냐 하면 좋은 건 다 들어있어요. 십자가, 언약, 피, 하나님의 천국, 다 들어있는데 그렇게 하는 의도가 뭐냐, 내가 나의 가치를 고수하기 위해서 하는 거예요. 우리가 지난 강남모임일 때 악마가 말씀을 사용하는 걸 봤지요. 시편91편 그 말씀을 사용해요. 예수님한테 말씀가지고 하는 거 봤지요. 그 악마가 계속해서 교회 다니면서 말씀을 사용해가지고 그 말씀이 결국 어디로 나중에 최종 도착하느냐 하면 주님이 주신 지정된 자리가 아니고 고정된 자리로 와요. 나의 자리로 온다고요.
“그러니까 내 신앙이 맞잖아. 신앙이 맞는다고 박수쳐주고 인정해줘. 서로 서로 인정할 때 우리는 교회가 되는 거야.” 그런데 서로라 하는 것은 이건 하나일까요? 나와 타인과의 관계일까요? 서로가 서로에게 타인관계에요. 절대로 하나 되기 싫어. 하나가 되기를 싫은 거예요. 밀고 들어오잖아요. 밀어버립니다. 밀고 들어오면 타인을 밀어버려요. 요기까지. 넘어오지 마세요. 화낼 거예요. 요기까지. 여기까지 한계에요. 나, 신자 맞으니까.
그래서 이걸 가지고 어떤 철학자 표현에 의하면 이걸 아주 멋진 표현을 했어요. ‘뒤로 물러서기’ 공격을 하면서도, 한편으로 공격하면서도 하는 행위 자체가 나를 뒤로 빼돌리는 거예요. 자꾸 뒤로 빼돌리는 거예요.
초등학교 때 학우끼리 싸움하는데 갑자기 여기에 6학년 형이 딱 등장했다 말이죠. “어이, 너희들 뭐하는데?” 오게 되면 동생은 갑자기 어디로 갑니까? 뒤로 숨지요. 형은 앞장세우고 지는 뒤로 숨어버리지요. 뒤로 숨는 행위에요. 내가 그동안 모아놓은 모든 성경지식 뒤에 나를 숨겨버리는 겁니다. 그 성성지식이 얼마나 추잡하고 더러운 옷인지를 모르고. 특히 목사들이 이런 짓을 많이 하지요. 목사들이. 성경지식 앞에다가 뒤로 숨는 거예요.
그러나 목사들의 가르침은 뭐냐 하면 김유성이가 이야기한 것처럼 “니는 나처럼 하면 1주일하면 컴퓨터 뗀다.” 하는 것처럼 연속성을 제공해요. 연속성. 연속성을. 이건 나도 공부를 하니까 알아듣더라. 계속 연속성을 추가해가지고 나는 가르치는 자의 배운 자가 종속되게 만들어버리지요. 종속.
그런데 교인들이 목사한테 종속 안 됩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타고났으니까. 어떤 아무리 도와줘도 고맙다는 소리를 하지만, 여전히 나는 나지요. 타인관계를 이용가치가 있는 한도 내에서는 거리를 두면서 요새 사회적 거리두기 많이 하잖아요. 밀고 당기는 그런 사랑싸움처럼. 밀고 당기는 그런 사이지. 상대방에게 하지 않습니다. 왜냐, 나는 나를 보호하니까. 나는 나를 보호하는 것에 반대 격이 뭐냐 하면 말이 아니고 말씀이 되는 거죠.
말씀은 우리보고 뭘 하라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악마와 같이 있음을 노출시키는 겁니다. “목사님 신앙생활 어떻게 할까요?” 사람 말 앞에 노출하지 말고 말씀에 노출하면 돼요. 사람 대 사람관계 따지지 말고 주님 십자가 앞에서 나를 날마다 노출시키는 작업이, 약속 앞에 노출시키는 그 작업이 오늘 본문에 여호수아가 해야 될 일이에요.
그래야 여호수아가 구원받았다가 아니라 이런 사건이 있었다. 너희들은 모르지? 마지막 최종 자리는 여호와 앞에 설 때에 맞은편에 악마 있더라. 내가 봤다. 나도 악마와 한통속이었는데 주께서 친히 놀랍게도 옷을 갈아입혀줬더라. 내가 자랑할 것은 이 옷밖에 없어. 이 옷이 나의 전부야. 나는 옷을 위해서 나는 이제부터 옷을 벗긴 사건을 증거 하는 증거자야. 라는 최종이야기를 스가랴가 지금 외치고 있는 거예요.
마지막 오실 여호수아는 곧 순이 되고, 환상이니까. 사실 십자가는 육신이 오기 전에는 환상이잖아요. 십자가가 막상 떠버리면 이 말씀이 육신이 되어버리면 세상 자체가 교회가 환상이고 가정이 환상이에요. 실제는 뭐냐, 십자가만이 실제고, 유일한 실제로서 십자가고, 나머지는 전부 다 환상입니다. 왜냐 하면 마지막에는 십자가로 전부 다 쏠리기 때문에. 그게 예언대로 되기 때문에 그래요.
지금까지 한 거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마지막 자리가 우리가 죽어서 만나는 게 아니고 마지막 자리가 순으로, 종으로서, 이미 마지막이 돌아다니는 거예요. 마지막에 돌아다니는 거예요. 이것을 이렇게 이해하시면 쉽습니다. 쉽다는 것을 반복하는데. 모든 시편과 모든 선지자의 글과 율법이 예수님의 한 분한테 다 담긴다. 라는 사실을 인간의 힘으로서는 안돼요. 그런데 여기에 뭐냐 하면 카이로스라고 하는데. 카이로스. 역사가 이렇게 가게 되면 위에서부터 한 점을 형성하면서 순간적으로 모든 진리가 한꺼번에 쏟아지는 걸 카이로스라 해요. 우리말로 하면 때가 되매. 성경에 때가 되매. 그 타이밍이 되매. 타이밍 안에 모든 진리가 한꺼번에 다 쏟아져요. 모든 걸 안다는 뜻이 아니고 모든 진리가 한꺼번에 쏟아져 가지고 그 다음부터는 나의 운명이 전에 내가 알던 운명이 아니고 강제로 강제조치를 당한 겁니다.
그러면 이 자리는 누구 자리이냐 하면, 주님이 카이로스 말씀이 찾아올 때는, 성령이 찾아올 때는, 이건 흘러가는 시간이 아니고 누적된 시간의 중첩에 의해서 양이 질로서 도약되는 게 아니고, 그건 마르크스의 유물론이고, 양이 많아지면 그게 결국은 질이 바뀐다는 거예요. 종이학을 천 번을 접으면 뭐가 됩니까? 학이 됩니까? 그렇게 된다는 게 마르크스의 이론이에요. 마르크스 공산당 이론이라니까요. 공산주의 이론이에요.
그러나 우리의 경험은 풍경이 똑같아요. 행여나, 행여나, 행여나, 하다가 나이 60되고, 70돼요. 아무 변동 없어요. 그날이 그날이고, 그 인간이 그 인간이고. 주변의 친구들은 점점 죽고, 나도 죽어가고 있고. 죽어가는 모습을 보면서도 낯설지 아니하고 점점 낯설지 않아요. 왜? 전부 나이대가 비슷하니까. 내가 고등학교 나왔는데 자살한 아이가 있는데. “자살해? 그 나이에.” 하는데 우리는 약간 지연된 자살이지. 결국은 우리는 다 죽잖아요.
그러니까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모든 성경은 예수님의 한분에 십자가, 또는 한 분의 말씀이 육신이 되면서 다 이루었는데 우리는 그 내용을 가만히 있어서 지속으로 모르고 이제는 그 말씀이 우리로 하여금 그 지식이 우리를 하나의 마이크로 사용해서 우리의 삶을 통해서 퍼트리게 되는 거예요. 어떤 과정을 통해서? 나는 악마 편이었다, 라는 고백을 통해서. 편이었다고 과거완료를 이야기하는 거예요. 나는 악마 편이었어. 나는 나밖에 몰랐었었어. 모자라면 열 댓 개 더 붙이던지. 나는 나밖에 몰랐었었고. 내일도 그랬어야 될 걸. 왜냐하면 지나간 모든 과거와 현재와 미래는 어디까지나 이건 주님보시기에 진리 앞에서는 이미 전부 다 완료된 것이기 때문에.
제일 어려운 이야기죠. 앞으로 2050년도도 완료된 거예요. 이미 지나간 거예요. 왜? 초월의 입장에서는 백날 시간이 흘러봐야 그건 어차피 완료에 소급될 거니까. 이 주님의 말씀과 결국 마지막에 수평선이 결국 만나거든요. 모든 시간은 주님 몸에서 나왔다가 낚시대 돌리듯이 둘둘 감아서 주님 몸으로 전부 다 시간과 공간을 다 데리고 오는 거예요. 그러면 파리 잡는 거 찍찍이죠. 찍찍이가 한 5미터짜리가 있다 합시다. 더럽지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거기다가 둘둘 감아버리면 그 찍찍이의 표면이 두루마리처럼 감겨가지고는 주님한테 오는 거예요.
그럼 애초부터 파리 잡는 찍찍이는 주님 몸에서 나왔다고 보면 돼요. 그게 요한계시록에 두루마리를 누가 떼느냐 하는 겁니다. 그 봉인된 초로 파라핀으로 한 옛날 편지는 비밀 편지는 파라핀이 딱 떨어져야 그 안의 내용을 알 수 있거든요. 하나님의 그 날아가는 두루마리는 요한계시록 이야기는 그 전에 스가랴에서 다 나온 이야기에요. 스가랴에 보면 나옵니다.
하늘로 전국을 다 날아다니는 그 두루마리 하나님의 말씀이 결국은 그게 나중에 공기가 되어버리면 전부 다 예수님 중심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자기 자신의 했던 약속임을, 약속의 최종자임을 알리기 위한 세상의 시간 편성이 방송국 프로그램 시간편성이 다 그렇게 되어있습니다. 지난 수요일에 그런 이야기했잖아요. 수요일날 예를 들면서 컴퓨터 옛날 고전 게임에 보면 또르르, 또르르 해가지고 가서 500점, 300점, 톡 뛰어가지고 200점, 온 구석 구석 다 돌아다녀요. 로봇청소기처럼. 온 구석을 지가 알라서 충전하고 지가 알아서 돌아서고 다 돌아다니듯이. 이 스가랴에 나온 이야기에요. 천사 4명이 사방을 돌아다니면서 전부 다 샅샅이 어디로 회수하느냐 이 모든 것은 바로 여호수아. 여호수아가 누구냐 바로 예수님이에요. 합체하면.
예수 그리스도, 여호수아를 위해서 했다. 최종자리에서 예수님은 죄가 있지만, 주께서 의로 바꿔버린 거예요. 그것이 스가랴를 통해서 알려진 최종 마지막 드러난 진리 그 자체입니다. 죄를 의로 바꾸는 작업을 하나님께서 아들과 더불어서 창세전에 이미 기획하신 거예요. 그러면 예수님께서 그 약속이 말씀이 되었으면 예수님이 로봇청소기라. 예수님이 로봇청소기인데 그 로봇청소기 기능이 성령을 통해서 오늘날 성도한테 와버리면 성도가 로봇청소기에요.
나는 여기 산다, 가 고정된 자리가 안 되고, 주께서는 또 일이 있어가지고 저쪽 전라도 가서 살아라, 하면 그게 또 지정된 장소고. 강원도가라 하면 그거 또 지정된 장소고. 고정된 장소가 되어버리면 이건 나 자신이 표현이 돼요. 나는 이 동네에서 이렇게 살다 이렇게 죽는다. 자기 자신을 증거 하게 되지만, 지정된 장소 같으면 내가 이 동네 살 이유가 없는데 주께서 이 동네에 파견근무 시켰어. 이렇게 되어버린다고요. 그러니 인생을 살 때, 고정적으로 살거냐, 지정된 것으로 살거냐, 지정된 사람은 주와 하늘나라와 연결된 사람이고, 약속과 연결된 사람이고, 고정된 사람은 이거 뭐 하나님 만나기를 마음이 별로 땡기지 않고 나는 나대로 살래. 되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추가적인 하나님의 바꿔치기를 나는 원치 않습니다. 이게 내 생각입니다.’ 자기 생각인 줄 알았더니만 스가랴에 보니까 누구 생각이냐 하면, 악마의 생각이에요. “나는 이대로 좋으니까 여호수아나 옷 많이 바꿔주세요. 나는 이대로가 좋겠습니다.” 이게 악마잖아요. “그래, 니가 니다운 처우를 내가 지옥 불에서 해줄게.” 그게 지옥인 거예요.
천국과 지옥이라는 것은 약속이 없으면 지옥. 약속으로 무장되어 있으면 그건 천국입니다. 그 약속이라 하는 것이 우리가 찾아가는 게 아니고 이미 생산되는 게 있어요. 그 생산이 뭐냐 하면 카이로스. 중국의 연길에 갔을 때 묵었던 호텔 이름이 카이로스에요. 그 사람이 뭐 아는지 모르겠어요. 때. 때, 이러면 밍밍하지요. 결정적인 때. 이래도 밍밍하지요. 최종 순간. 최종 순간이 역사가 안 끝났는데 미리 성도에게 성령을 통해서 와버려요. 십자가로서 최종 순간.
최종순간이 와버린다고요. 그럼 우리는 사건 자체니까. 그러면 나는 구원받았다, 가 아니라 반응이 ‘도대체, 나는 무슨 사건에 휘말린 거야.’ 이리 되는 거예요. 어떤 사건에 휘말렸는가, 남들처럼 고정된 자리에서 평생토록 여기서 그냥 심심하던 말든 그냥 살고 싶어. 이사 가는 것도 지겨워. 14번 가니까 지겨워 죽겠다. 이런다고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고정된 장소가 아니고 지정된 장소로 가는 거예요. 지정된 장소라 하는 것은 고정성과 싸워야 될 문제에요.
고정성은 악마 쪽이니까. 고정적 이건 내거야. 요건 내 지갑이야. 요건 내 재산이야. 이 아파트 명의는 누구로 되어 있느냐 식으로. 모든 일이 고정되어있으면 이 자체가 우상이 되어버립니다. 우상이 되어버리지요. 이 고정적 중에서 가장 못 버리는 고정은 뭐냐 하면 교회라는 겁니다. 교회는 이게 허상이거든요. 교회에서 나가면 니 지옥 간다. 우리교회에서 나가면 지옥 간다. 이게 허상이라고요. 주께서 잠시 지정한 거예요. 고정이 아니고. 우리교회도 마찬가지고. 어느 교회도 마찬가지에요.
그리고 교회보다 더 고정을 고집하는 장소가 있었으니 그게 뭐냐 하면 가정입니다. 가정. 만약 어떤 사람이 저보고 “요새 사람들이 신앙생활 왜 안하고 성경 왜 안보고 기도할 줄도 모르고 왜 취미 생활하듯이 친목 놀이하듯이 왜 교회 와가지고 그렇게 합니까?” 이유는 딱 한가지에요. 교회가 고정이 아니고 내 집구석이 고정이기 때문에 그래요.
내 집구석이 고정이 될 때 이 고정과 고정은 나의 표현이에요. 나의 표현형이에요. 나는 내 가정이 있음으로서 나는 나다운 거예요. 특히 남자들은 그런 게 있어요. 못났던 잘났던 어떤 남자든 간에 애가 없고 지 맘대로 하는데, 애가 생겨버리면 그 다음부터는 막 죽기 살기로 돈 벌고 직장에서 고개 숙이면서 밑에 사람 콱 콱 밟아가면서 남이 죽든 말든 지 집구석만 살리면 그만이에요. 그게 아버지로 책임감이라는 거예요. 희생정신. 그리고 그 희생정신으로 생겼던 그 결실, 다시 말해서 아내가 방긋 방긋 웃으면서 앞치마 입고 저녁 때 된장찌개해주는 그것과 아빠! 하고 달려올 때 남자는 모든 직장의 피로감을 다 잊어버리는 겁니다.
그래서 남자는 책임감 때문에 결국 나이 40넘고 50되면 남자의 그 소박한 작은 소망도 남자는 꾹꾹 누르고 이렇게 버텨야 되는 거예요. 오죽했으면 남자의 소원이 뭐냐 하면 원 없이 울어보는 거예요. 남자라는 이유로. 담아둔 그 서러움을 언젠가 실컷 원 없이 울고 싶은데, 그동안 울지 못한 기간이 너무 길~~어요. 조항조에 의하면. 너무 길었어. 남자들 그 노래 들으면 안 우는 남자 없어요. 그동안 설움에 받친 설움 있잖아요. 이것도 참아야 되고. 남자가 그것도 못하나. 그 서러움. 나를 챙기고 싶은 게 본심인데 차마 챙기지 못하고 처나 아내한테 모든 걸 양보하고 또 양보하고. 양보했는데 또 양보해라해가지고 또 양보 더하고. 그게 얼마나 나의 악마적 본성을 억누른 거예요. 나는 나답고 싶은데.
하나님 앞에서 악마는 뭐냐 하면, “하나님 조치 필요 없습니다. 나는 나대로 삽니다.” 이게 오늘날 선악과 따먹은 우리들의 악마가 심어놓은 모든 자식들 공통점입니다. “나는 나대로 그냥 살래요. 아이고~ 복음이고 십자가고 다 귀찮으니까 나 이젠 내버려둬. 나 그냥 살래.” “여보, 교회 가자.” “아니야, 아니야, 니나 교회가. 집에 늦게는 오지 말고. 니 할 일은 다하고 교회가. 하지만 나보고 건드리지 마! 나 이대로 살래.” 이게 어떻게 낯설겠습니까. 우리가 사는 모습인데. 왜? 맞은편이거든요. 악마와 맞은편이에요. 오히려 악마가 생소한 것이 아니고 옷 갈아입혀주는 이 놀라운 카이로스적인 성령이 임함이 오히려 의아해하고 너무 감사하고 너무 놀라울 정도지요.
이 더러운 옷을 그냥 입어도 되는데 벗으라는 거예요. 그래서 말로 할 때는 서로가 옷을 안 벗어요. 지 잘난체한다고. 그런데 멋도 모르고 말씀 아는 사람이 여기도 말씀 안다싶어 들어가 가지고 자기는 홀딱 다 벗고, “나 이 정도밖에 아닙니다.”하니까 이 사람은 “어머야.” 하고 감당이 안 돼 톡 튀어 나갔어요. 우리는 서로 감추는 재미로 얼마나 교묘하게 감추는 맛으로 우리는 대화했는데 한쪽에서는 당신은 너무 공개해버리면 나는 감당이 안 되니까 나는 도망칠 친구가 없지 않습니까. 이리 되는 거예요.
누가 이런 잘못을 했느냐, 베드로가 했지요. “먹어라.” “못 먹습니다.” “먹어라.” “저 못 먹습니다. 내가 이 율법대로 지킨다고 의롭게 지킨다고 공들였는데 지금 율법에 위반되는 것을 먹어버리면 먹지 말라는 것을 먹어버리면 나는 뭐가 됩니까?” 이런 식이에요. 베드로가. 이게 바로 베드로 하여금 베드로 구원 받은 거 맞아요. 하지만 출발은 항상 뭐냐 하면 무한 반복을 하기 위해서 출발을 악마 편에 서서 또 다시 악마 편에 서게 하는 거예요.
눈만 뜨면 다시 악마 편에 서서 하루 일과 가운데서 어떻게 악마 편이 여호수아, 예수님 편에서 살아가는 그런 기능이 우리의 지정된 고정된 게 아니고 지정된 내 직장에서, 그러니 직장 오래 다닐 수 없지요. 지정된 거니까. 지정된 고정이 아니고. 지정된 장소에서 우리는 어떤 것을 증거 할 수 있느냐, 그런 식으로 우리가 다루어지고 있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 카이로스의 특징이 뭐냐, 아까 제가 마지막 때가 온다 하는데. 그게 정답이지요. 막지막이라는 말은요, 시간의 분량의 끄트머리가 마지막이 아니고 이 모든 것을 다 해석권을 가지고 있는 게 마지막입니다. 시간이 마지막이라면 앞에 있는 그 모든 일어난 일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권한이 있는 게 마지막이라면, 이 마지막이 아까 했지요. 역사 끝에 오는 게 아니고 성령을 통해서 수평적인 시간대에 수직적으로 오는 거예요. 이걸 가지고 예수님께서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 ‘침노’라고 해요. 침노.
완성된 하늘나라가 너희에게 침노할 그 때가 성령이 올 때다. 지금 초라해 보이는 내 모습을 너희가 부정해도 네가 용서를 받되, 마지막에 오는 영. 마지막 영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성령이라 해요. 마지막 영. 요한일서2장에 보면 마지막에 성령을 보이거든요. 마지막에. 인간에게 모든 것을 지시시켜 보게 되면 그들이 어설프다 하는 것이 다 들통 나요. 그러나 마지막에는 뭐냐, 아예 인간에게 기대를 안 해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는 겁니다.
사도바울은 성령 받고 난 뒤에 마지막에 해석을 하고 난 뒤에 내 속에 율법을 지키고 싶어도 내 자체가 율법을 지킬만한 오히려 율법을 방해하는 다른 악한 것이 있어서 내가 하나님이 원하는 온전한 사람으로 나 자신이 망가졌음을 성령 받고 난 뒤에는 망가졌음을 보는 거예요.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다. 그런데 갑자기 곤고하다가 뭐로 바뀌었습니까? 감사로 바뀌는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어떤 경우를 당하더라도 어떤 일이 있더라도 그걸 따져볼 때에 감사가 나오면 성령의 일이고, 열심히 잘하겠습니다. 나오면 그건 악령의 일이에요. 악마 편으로 가면 악마의 일이고, 주님 쪽으로 가면 감사지요. “저한테 이런 옷 바꿔주는 혜택을 주시다니 감사합니다. 이리 되는 거예요.
바로 우리로 하여금 늘 악마 편에서 다시 주님 편으로. 그 다음 하루가 또 생명을 주게 되면 그 다음 악마로부터 시작해서 또 주님 편으로. 계속 바꾸면 되지요. 왜? 그게 범주 안이니까. 약속이 그 안에서 움직이니까요. 10분 쉽시다.
안양20201008b슥3장8절(지정과 고정)-이 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하겠습니다. 여기에 스가랴3장8절에 “대제사장 여호수아야 너와 네 앞에 앉은 네 동료들은 내 말을 들을 것이니라 이들은 예표의 사람들이라 내가 내 종 싹을 나게 하리라” 나게 하리라. 태어나게 했다. 혈육에서 약속으로 바뀌는 지점에서 예언을 받은 거예요. 보통 혈육은 시간 따라서 혈육은 혈육을 낳고, 사람이 사람을 낳고, 자식은 부모가 낳지요. 그걸로 계속 갑니다. 가봤자 수평적인 거예요. 수직적이 아니고. 가봤자.
그걸 성경에서는 이사야나 갈라디아서4장에서는 이걸 뭐냐, 잉태할 수 있는 자들이 자식을 잉태하는 거예요. 잉태할 수 있기 때문에 자식들은 전부 다 악마와 한패가 되는 겁니다. 혈육이니까. 혈육에 속했으니까. 혈육을 확 형식을 빼버리니까 어디에 속했다? 육에 속했으니까. 그러니 성경을 보고 성령을 안 받으면 이해가 곤란해요. 왜냐, 전부 다 혈육 적으로 계산해버려요.
기도하라 해서 기도했으니까 우리 혈육 잘되겠지. 우리 가족 잘 되겠지. 이리 된다 말이죠. 혈육이 원수에요. 그런데 원수라는 말을 하려면 혈육 아닌 쪽에 서야 원수라는 말을 할 수가 있다 말이죠. 나는 혈육에 속하지 않고, 이런 말을 하려면 요한복음1장12절 말씀처럼 니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혈육에서 난 것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이라, 이리 되어있지요.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했다는 말을 하려면 그야말로 내가 부모로 태어났다는 이 자체가 부정적인 것, 이걸 부정하는 그 부정의 요소가 우리 안에 이미 들어와 있어야 돼요.
존재가 부정을 받아들일 수 있는 존재로 변환된 겁니다. 우리의 새로운 존재가. 새로운 피조물은. 새 피조물의 특징은 나를 부정할 수 있는 것을 품을 수 있는 존재. 야~~ 이거는 내가 나를 부정하는 것을 내가 품었다는 말은 이거는 그야말로 예수님이외에는 없지요. 왜? 죽기위해서 왔으니까.
그런데 성령이 오게 되면 이게 가능하고 감당이 돼요. 자기를 부인하고가 돼요.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를 부인하려면 내가 또렷하게 내가 누군지를 누가 이야기해주느냐, 내 안에 주께서 십자가를 통해서 내가 어떤 더러운 인간인 것을 배설물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또렷하게 각인시키는 사태가 매일같이 일어나줘야 돼요. 아~ 나는 철저하게 나를 지키고 사수하고 나를 견고하게 하는 그거 외에는 아무 생각이 없는 인간이구나! 하는 것을 날마다 또렷하게 이야기해줘야 돼요.
그래서 내가 잘났다, 할 때는 “니가 잘났다고 우기는 것처럼 나도 니하고 똑같아.” 가 돼줘야 돼요. 이건 뭐냐, 아까도 쉽게 지나갔지만 어렵게 이야기하면, “나는 너가 나의 남이야.” 다시 말해서 건너올 수 없는 간격유지가 되는 겁니다. 너는 내가 아니야.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 남이 되는 예수님, 여호수아를 내 안에 섞어버렸어요. 들어왔다 이 말이지요. 이게 인간의 논리를 초월합니다. 인간의 논리로서는 불가능해요. 본받는 건 돼요. 흉내 내는 것은 되는데 쓱 내 안에 들어와 버리면 이건 빙의가 된 거고, 이건 진짜 신 내림이죠. 성령으로 신 내림 당한 거예요. 이건 본인도 설명이 안돼요. 무당 신병내릴 때 설명 안 되듯이 이것도 설명이 안돼요.
무당은 신병 내리면 병은 낫기나 하지. 이건 병이 낫지도 않아요. 갈수록 더 복잡해요. 갈수록. 일단 들어왔기 때문에 쫓아낼 수도 없어요. 뭐가 들어왔는가, 모든 것이 들어왔어요. 무한이 들어왔어요. 무한이 유한 속에 들어왔어요. 그런데 우리가 아는 유한과 무한은 건너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건너가는 게 아니고 연속된 게 아니고 단절되어있어요. 단절되어 있는 무한이 내 안에 나를 부정하는 분으로서 이 땅에 온 거예요. “너, 아니야!” 이리 되죠.
그래서 예수님 말씀하실 때 항상 하시는 말씀이 먼저 아니오, 를 먼저 이야기해요. 자기를 부인하고 나를 따르라. 뭐 아니야. 처나 자식은 아니야. 사람은 돈으로 아니야. 이방인처럼 먹는 거, 마시는 거 그거 아니야. 너는 그 나라 의. 어떤 그 나라 의라고 할 때는 아니야, 가 되어야 돼요. 대구강의에서 제가 아주 강조한 게 있어요.
어떤 사람이 질문하기를 “목사님, 성령 받았는지를 안 받았는지를 어떻게 압니까?” 할 때, 고린도전서12장에 보면 성령을 받지 않고서는 예수님을 주시라 할 수 없다. 그 대목만 봐버리면 그 대목을 전혀 설명 못해요. 앞에 있어요.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모든 인간은 성령 받지 않으면 벌써부터 기본적으로 예수는 저주를 깔고 있어요. 저주라는 게 타인이거든요. 나 위주기 때문에 나를 섭섭하게 되면 당신을 밀어낼 거야. 라는 내 권리를 말하는 거예요. 내 권리.
악마가 주장한 것처럼 신이라도 나한테 터치하지 마세요. 나는 독자적으로 살 거니까. 이거다 말이죠. 고정은 나 홀로 살기위한 고정의 공간이에요. 지정은 주님과 더불어 살기 위해서 주님 쪽에서 딱 집어준 그 공간이 지정된 자리입니다. 어떤 지역도 말하지만, 몸 자체가 주님이 들어오는 성전이에요. 그것을 스가랴3장9절을 누가 한 번 읽어보세요.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너 여호수아 앞에 세운 돌을 보라 한 돌에 일곱 눈이 있느니라 내가 거기에 새길 것을 새기며 이 땅의 죄악을 하루에 제거하리라” 여호수아 앞에 세운 돌을 보라 했잖아요. 돌. 돌은 물체입니다. 딱딱해요. 인격이 없지요.
그런데 주님께서 사람들에게 뭐로 대우받느냐 하면, 이건 함부로 죽어도 되는 돌멩이 같은 존재로 취급받을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 돌에는 모든 지혜와 모든 예언과 모든 말씀이 똘똘 다 들어있습니다. 그 돌멩이가 모퉁이 돌이 되지요. 그런데 그 돌은 사람에게 어떤 돌이냐, 버림받은 돌이에요. 버림받은 돌.
그렇다면 여러분들이 제 말을 듣고 혹시나 싶어서 생각하는데 이런 오해를 하지 마세요. 나는 지금 여기 예수님하고 맞은편에 있다니까 악마하고. 악마는 하나님의 원수지만 예수님과 맞은편에 서게 했어요. 나는 예수님 편에 있기 때문에 악마 쪽이 아니라고 이렇게 생각하시면 내 구원을 내가 지키겠다는 악마에 하는 속성을 그대로 계속 반복하고 있는 셈이에요. 그래서 악마 편에 구원받았으면 악마 편에 누구라도 악마 편에 서세요.
악마 편에 서게 되면 악마는 자기 자신에서 여기서 뭐를 날리느냐 하면, 질문을 날립니다. 사람이 질문을 하는 순간 화투하다가 화투 하나를 담요 위에 낸다는 말은 자기의 패를 까는 셈이 되거든요. 질문을 한다는 것은 자기의 본질을 드러낸 거죠. 그러니까 이건 뭐냐 하면 드러낼 때, 질문을 할 때는 본질이라고 내놓는데 진짜 본질은 감추는 용도로서 질문을 던져요. 자기 것은 딱 움치고. 그렇다면 성도는 뭐냐, 성도도 마찬가지로 악마 편에 세웠기 때문에 매일 질문해요.
“하나님, 이럴 땐 어떻게 합니까? 왜 갑자기 아이한테 이런 아토피가 생깁니까?” 온갖 부터 해가지고 전부 다. “이웃집에 이사 온 이웃이 담배피우는 인간이 왜 왔습니까? 기도 많이 했는데 담배 피우는 인간이 와가지고 싸워야 됩니까? 올라가야 됩니까? 말아야 됩니까?” 올라가다가 또 칼 들고 와가지고 층간 소음 때문에 나 혼줄 나가면 어떻게 됩니까? 질문을 자꾸 한다고요. 그 질문 배경에는 뭐냐 하면 나를 지키겠다는 그게 나오지요.
그래서 우리는 성도는 질문을 시작해요. 기도도 마찬가지에요. 하다가 뭘 아느냐 하면 질문자가 아니고 직면자. 직접 면을 대하는 존재가 돼요. 질문은 재켜버리고 날아온 질문을 피해버리고 직접 우리가 질문을 하면서 숨겨놓은 것에 직접 주께서는 딱 마주치게 해요. 그러면 여기서 뭐가 생기느냐 하면 노출이 생기지요. 나도 몰랐던 근원적인 노출. 그 노출을 하시면서 하시는 말씀은 역시 똑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옷 벗어라. 이 더러운 인간아! 새 옷 갈아줄게.” 그래서 지금 주님은 늘 빨래감이 이만큼 쌓였어요. 온 자기 백성 다 돌아다녀가지고 옷 다 벗겨가지고 빨래를 해야 되니까. 그러나 그것이 영원한 나라에서는 피로 한꺼번에 완료되었으니까. 완성되었으니까. 이미 다 용서받았다는 그 사실에 입각해서 옷 벗어라 하는 거예요.
“괜찮아. 내가 준비한 게 있으니까. 니가 준비한 것보다 내가 준비한 게 훨씬 크니까.” 인간이 기다리는 것은 내 가치를 포기 안하고 인간은 뭐냐 하면 자기 존재의 자기 부정이 없을 거라고 여기는 거예요. 아까 했잖아요. 내 존재는 내가 많이 뽑아내기 때문에 내가 나쁜 짓을 많이 개선했기 때문에 대부분은 긍정적인 것이고 부정적인 것은 요만큼도 없을 거라고 하잖아요. 주님께서는 계속 부정을 넣는데, 그게 뭐냐 예수님의 피에요. 니 때문에 내가 피 흘렸다는 사실을 계속 집어넣게 되면 우리가 더 이상 나를 살펴볼 염두도 안 나게 만들어요. 뭐 볼 게 있어야 보지요. 가릴 게 있어야 가리지. 다 더러운데 어느 쪽을 가려야 돼요? 다 더러운데.
내가 가리는 이불조각은 요만큼인데 내 키는 이만큼 큰데. 어떻게 머리 덮으면 발 다나오고, 발 가리면 얼굴 다 나오고. 왼쪽 가리면 오른쪽 다 튀어나오고. 주님께서는 그저 부질없는 짓을 매일같이 우리가 하고 있다는 것을 아시고 그냥 옷 갈아입히러 오는 거예요. 그 사랑. 그 사랑이 매일같이 우리한테 계속 우려내는 겁니다. 누구 좋아라고? 우리 좋아라고 아니에요. 주님이 좋아라 우리를 지정했으니까. 우리는 고정자리가 없습니다. 우리 자리는 없어요. 아예 내 자리는 불로서 박살났어요. 이미 마지막 때 불 심판으로 내 자리는 벌써 다 타버리고 없어요. 내 자리가 없어요. 다만, 이 땅에 사는 것은 한시적으로 지정된 자리를 할당 받은 거뿐이지요.
어떤 가수가 있는데 그 가수가 자기를 소개할 때 이렇게 소개해요. 우려낼 대로 우려낸 진한 곰탕 같은 가수 홍자. 꼭 앞에 소개할 때는 이렇게 해요. 우려낼 대로 우려낸 곰탕 같은 지 집이 곰탕 하거든요. 저희 집 선전도 하고.
이건 아무리 살아도 또 우러날 수 있는 죄가 또 우러나요. 또 옷 벗어라, 그걸 계속 반복하면서 그 반복하는 것이 주님을 미안하게 하는 게 아니고 오히려 주께서 원하는 거예요. 사골은 계속 우려내야 사골 맛이 더 진하거든요. 찐! 찐! 찐하잖아요. 찐이야. 찐하게 계속 진하게 하는 거예요. 마음을 그만큼 낮추는 겁니다.
우리도 역시 돌아서면 나밖에 모르기 때문에 늘 질문을 해요. 우리의 질문은 어떤 질문이냐 하면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서 예수 자신이 함께 있음을 지정된 자로 드러내기 위해서 새로운 사태를 우리가 원치 않는 사태를 계속 만나게 해줘요. 우리는 그러면 다시 본성으로 여지없이 본성을 드러내가지고 “못살겠다. 너무 심합니다.” 그런 식으로 우리가 하게 되면 이 질문을 통해서 주님의 완료됨. 다 이루었음을 우리를 통해서 다시 드러내는 거예요. 두 번째 시간 본격적으로 하기 전에 먼저 첫째시간에 한 것을 정리해봤습니다.
그러면 오늘은 두 번째 시간에서는 본격적으로 뭘 하느냐 하면 성경을 한 번 찾아보겠습니다. 예레미야 23장5절요, 내가 지금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하느냐 하면, 혈육에서 약속이 갈라지는 길목에서 옷 갈아입는 일이 일어난다. 혈육에서 순이 나올 때, 순, 약속이 나올 때, 여기서 옷 갈아입는다. 다시 말해서 내가 타인, 이런 관계가 혈육관계인데 타인이 나를 덮쳐서 현장에서 접수해버리지요. 그러면 그 타인이 약속된 그 분이 우리에게 오는 거예요.
예레미야23장 5절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때가 이르리니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 그가 왕이 되어 지혜롭게 다스리며 세상에서 정의와 공의를 행할 것이며” 되어있지요. 여기 가지가 나오지요. 가지. 또는 비슷한 말이 순. 이것은 없던 데서 새롭게 돋아난 거예요. 없던 데서 새로 생겨나는 겁니다.
없던 데서 새로 생겨난다, 라고 한다면 여러분들이 아! 없던 데서 나는구나! 하는데 이 우리의 입장, 육의 입장에서는 없던 것을 뭐라고 이해해야 하느냐 하면 초라한 것, 외면하고 싶은 것, 별 볼일 없는 것, 아주 노골적으로 내게 전혀 이용가치가 없는 것, 나한테 보탬이 되지 않는 존재. 이게 바로 없음이라고 표현되는 거예요. 없음.
있어도 없는 쪽으로 분류를 시키는 겁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일을 하셔야 하느냐 하면, 인간의 없음이라 하는 것은 어떤 없음이냐 하면 바깥에 없다고 그렇게 이해하고 있거든요. 인간의 언어 논리구조에서는. 그런데 주님께서는 인간과 같이 같은 인간으로 섞여버렸다 말이죠. 섞어버리니까 섞어버린 입장에서 인간은 그걸 모르고 자꾸 없는 데를 찾는 거예요. 저 인간이 없는 저 하늘나라에 하나님이 계시다. 하나님이 바로 지 옆에 피부 부딪치면서 같은 인간으로 왔는데 가까이 있는 하나님은 못 알아보고 상상의 하나님을 생각하는 거예요. 상상의 나래가 결국 뭐냐, 있음을 포위하는 없음의 다른 넓은 범위를 하늘나라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양자물리학에서 또는 천문학에서 우주의 질량을 계산해 보니까 우주의 질량이 기껏 모든 우주의 천체별을 다 계산해 보니까 쉽게 해서 5%는 질량 총합이 나오고 95%는 없어요. 없는 걸 가지고 물리학자는 그걸 뭐라고 하느냐, 암흑물질이라 해요. 암흑물질. 암흑물질95%, 나머지 암흑 에너지도 몇%해서 100%다. 그러니까 없음을 없다는 걸 뭐냐, 있음을 출발점으로 해서 논리적으로 출발점을 해서 없음을 계산한 거예요. 왜 그렇게 하느냐 있음을 뭐로 보느냐, 그냥 있음이 아니고 유일하게 의미 있음으로 보기 때문에 그래요. 나 중심이니까.
“내가 여기 있는데 신은 나에게 뭘 도와줄 거요? 이 하나님 어르신네야.” 이리된다 말이죠.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인간의 있음과 없음. 존재와 무. 이것을 주께서 인정하지 않아요. 이 해석은 니 중심이기 때문에. 악마 편에서 나온 해석이기 때문에 인정하지 않아요. 예를 들면 만약에 있음과 없음으로 본다면 인간에게는 귀신도 없고, 악마도 없고, 역시 하나님도 없는 거예요. 그리고 없으니까 인간이 만들어내죠. 하나님은 내가 좋아하는 하나님. 만약에 나를 해꼬지하고 병들게 하면 그걸 뭐로 본다? 악마로 보는 겁니다. 악마. 악마로 보는 거예요.
나쁜 짓한 놈은 악마로 보는 거예요. 나쁜 짓하는 거. 세리와 창기. 악마로 보는 거예요. 이 의미 있음. 의미 있음에 의해서 나온 게 뭐냐 하면 바로 윤리라는 거예요. 윤리와 도덕이라는 겁니다. 윤리와 도덕. 바리새인들의 주특기죠. “여러분들이 착하게 하면 여러분들에게 돌아옵니다. 행했던 당사자에게 도로 돌아오게 되어있습니다.” 라고 율법을 그런 식으로 성경공부를 시킨 거예요.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교회 다녔던 그 교회들 보세요. 성경공부가 뭡니까? “여러분들이 행하면 여러분들이 손해 보지 않고 30배, 60배, 100배의 어떤 행한 보상으로 도로 여러분들에게 주어지니 이런 횡재하는 일을 여러분이 그냥 안할 수가 있겠어요? 해야지요.” 이리 되는 거예요.
“가정이 힘들어요? 어려워요? 아내가 바다에 빠져 죽었어요? 교회에 나오세요.” 교회 나오라는 행위를 하는 이유가 “교회에 나오게 되면 당신이 놓쳤던 모든 보상은 충분하게 하나님이 해주십니다.” 교회가 보험회사도 아니고. 그런 사고방식이 우리 성도라 하지만, 매일 아침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 말이죠. 아침에 눈을 뜨면 그렇게 시작해요. 오늘도 무슨 하나님이 행운을 주시렵니까. 이런 거요. 그럼 주님은 웃지요. “그렇게 행운을 받았다 치자. 니가 얻는 게 뭐냐?” “얻으면 저는요, 사람들에게 하나님 살아있다는 것을 증거 하지요.” 또 묻지요. “니가 증거 해서 뭐할 건데?” “증거 하면 하나님도 좋고, 나도 좋잖아요.” “니가 거기 왜 들어가는데.”
전혀 자꾸 부정적인 것을 빼는 쪽에 신경을 많이 써요. 부정적인 것에. 이게 선악과 따먹어서 그렇거든요. 선악과. 선악이니까 나는 선한 쪽이야. 라고 지레짐작 지가 선한 쪽에 자기가 고정 좌석을 만들어버렸어요. 고정석을 지가 만들었어요. 그러나 선악에 묻히면 묻힐수록 메이면 메일수록 점점 더 뭐가 멀어집니까? 생명나무는 까맣게 잊어버리지요. 하나님께서 생명나무 가는 길을 차단했잖아요. 선악에서는 생명이 나옵니까? 안 나옵니까? 백날 선해도 안 나옵니다. 마지막 만남은 악수해서 “아이고~ 주여!” 만났는데 보니까 “나, 악마인데. 그동안 내가 준 마음가짐가지고 니가 애썼다. 야야. 같이 가자. 손잡고. 니 끝났어. 끝났어. 내가 준 사고방식 외에는 없잖아.” 그러니까 내 운명과 같이 운명을 같이 가는 거예요.
악마의 자리에서 저쪽자리, 예수님의 자리로 건너갈 수 있는 어떤 방법이 악마에게는 없습니다. 그냥 나랑 같이 가자. 예수 욕하자. 어떻게 세리와 창기가 천당 가? 착한 우리 놔두고. 그 나쁜 짓만 하는 인간들 강도가 어떻게 천국에 가? 아니 말도 안 되는 소리. 강도가 가면 나도 가겠다. 니도 가자. 안 돼! 안 돼! 강도는 안 되고 내가 가야지. 왜? 나는 착하니까. 강도보다 착하니까. 강도 가는 곳에 나는 가기 싫어. 시누이가 미운 시누이면 시누이 천당 가면 나는 절에 갈래. 시누이 천당 가면 나는 지옥갈래. 이런 식으로.
아주 내 인생을 말아 먹인 인간이 있다고 칩시다. 그런데 그 인간이 예수 믿는다고 하면 천당 간다고 하면 아~ 갈등된다. 정말. 천국 가서 부부 생활 또 같이 해야 되나. 아~ 갑자기 천국 가는 것이 소름 끼치는 거 있지요. 안 가고 싶은 거 있지요. 혈육 속에, 혈육, 육 같은 말입니다. 육속에 누가 있습니까? 내가 있잖아요. 그래서 나에게서 뭘 뽑아낸다? 나에게서 약속을 뽑아내는 거예요. 어떤 분이 썼던 십자가마을의 글처럼 초식동물 위에 육식동물이 올라 타가지고 쪽쪽 약속만 빨아먹는 거예요. 초식동물이 죽든 말든 자기가 주신 약속만 뽑아내는 거예요.
약속을 뽑아낸다는 것은 약속을 물체라 보지 마시고요, 여러 번 이야기하지만 물체가 아니고 사건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사건의 결과를 받아내는 게 아니고 내 것으로 만드는 게 아니라 아예 사건으로 휘말리게 만들어요. 사건의 주인공은 주님이어야 되지 내가 시작한 유발자 되면 안 됩니다. 그냥 휘말린 거예요. 본의 아니게. 고맙게도. 그래서 처음에는 감사가 안 되더라도 나중에 십자가 사건을 드러내게 된 사건에 대해서 고마워하는 거예요. 나한테 이익이 있어서 고마운 게 아니고 내가 성화되어서 고마운 게 아니고 사건에 하나의 동원된 자체로서 주님의 종이 된 그 자체가 하나의 고마운 거예요.
그 종이 여기 나옵니다. 자, 봅시다. 오늘 본문 같이 봅시다. 오늘 아직 이야기할 게 많이 있어요. 스가랴3장8절에 보게 되면, 내가 내 종 순을 나게 하지요. 이 말을 이 종 순이 어려우니까 나의 종을 혈육에서 하나의 새로운 가지를 만들어서 뽑아낸다 이 말이죠. 그러면 원래 혈육은 어떤 혈육이냐, 이사야11장 1절을 크게 한 번 읽어보세요.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아~~ 이게 정말 어려운 이야기에요. 하나님께서 다윗이 그냥 태어났다고 하면 되는데 왜 다윗 이야기가 먼저 안 나오고 자기 아버지 이야기가 먼저 나오느냐는 겁니다. 이새가 뭐했다고? 이새가 이씨 집안입니까? 이새가 뭐했다고? 이게 왜 중요하냐 하면, 참 너무 중요해서 제가 지금 막 살이 떨리는데.
이게 왜 중요하냐, 자식을 통해서 비워있는 아버지가 채워지는 거예요. 자식을 통해서. 이 땅에 있는 하나님은 인간이 만든 개념이라서 그런 하나님은 없어요. 그런 하나님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없는 데서 만들었다고요? 아니에요. 있는 데서 만들었어요. 그런데 그 있음이, 하나님이 있는 데서 세상을 만들었거든요. 그 있는 게 누굽니까? 예수님이죠. 예수님이 새로 만들었는데, 그 있음이 인간 속에 섞였던 그 분이에요. 마지막 날인데 처음으로 나타난 분. 처음과 마지막이 한 육신에서 만나는 그러한 장면을 연출하신 분. 예수님이십니다.
인간은 시간관이 있어가고 창세기를 처음으로 보거든요. 왜? 성경책이 그렇게 되어있으니까. 천지에, 태초에 그렇게 되어있으니까. 그러나 인간이 생각하는 성경을 볼 때 나오는 시간의 시제. 이런 것은 내가 여기 있고, 우리보다 오래전에 옛날, 옛날 옛적에 once upon a time, 아주 옛날 옛적에 있었다. 자꾸 이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내 시간관을 놓고. 하지만, 그 처음은 그래서 니가 시간을 찾아간다고 처음이 아니고 처음은 니 곁에서 같이 니하고 밥 먹고 살았어. 그게 처음이야.
어제 수요 설교할 때 마지막 장면에서 이스라엘 찢어버리면 그 안에 뭐가 나온다고 했습니까? 새로운 시간과 공간 나온다고 했지요. 수요설교가 상당히 어려웠었어요. 어제. 특히 동위원소 이야기할 때. 생물이 살아있을 때는 에너지의 input, output가 들어오고 나오고가 있기 때문에 인간의 그 시간이라 하는 것은 그 유기체 개별적 시간이에요. 수명을 그렇게 한다고요. 나는 언제 태어났고, 몇 년 살았고, 수명을 자기가 납득이 되는 수명이지요. 그런데 진짜 수명은 그 인간들 입 다물게 만들어버려요. 죽어야 입 다물지.
그래서 십자가 안에서는 우리가 죽잖아요. 나는 죽고, 십자가에 같이 죽는 이유는 입을 다물어야 내 과거의 기억과 역사를 의미 있는 걸로 치지를 않아요. 모든 역사는 공허한 거거든요. 의미 없는 거예요. 과거. 오래 살았다고 천당 가는 거 아닙니다. 카이로스라니까. 아무리 나이 적다고 지옥 가는 것도 아니에요. 순간적으로 와버리면 한꺼번에 완료가 와버려요. 그러면 세상에 살아가는 내가 앞으로 살아남아 있을지라도 그건 과거완료에요. 내가 앞으로 더 살 것이다, 미래형이 아니고 앞으로 내가 살게 되는 일이 벌어졌다. 말이 참 이상하지요. 그런데 그 말이 이상한 게 아니라, 로마서8장에 나와 있습니다. 이미 아신 자를 부르시고 의롭다하셨느니라. 과거완료로 사용한다 말이죠. 과거완료로.
그 때는 시간을 쏙 빼자. 뽑아버리면 동사에서 시제를 빼버리면 이게 뭐냐 하면, to부정사 돼요. ~~이다, 가 되어버려요. 산다, 에서 ~~이다가 돼요. 이는 자꾸 이다, 임을 보여주는 한다, 가 계속 나오지요. 우리는 아버지가 있고 자식이 있다는 것을 우리 시간대에는 상식이지요. 그죠? 아버님 날 낳으시고 어머니 날 기르시니. 이리 되잖아요. 성경에서는 이걸 뒤집어라. 자식이 아버지를 새삼스럽게 의미를 부여한다는 거예요. 미래에서 부여한다. 마지막이 부여한다. 같은 말로 최초가 너희에게 의미를 부여한다. 같은 말로 마지막이 부여하는 거예요. 그 마지막은 기다리는가, 기다릴 필요 없어요.
마지막이 처음이 함께 같이 통합된 분이 이미 이 땅에 말씀이 육신이 되어서 왔어요. 뭐 조금 있다가 앞으로 5년 뒤에 신학교가가지고 복음 전하겠다. 이럴 필요 없어요. 그건 우리 시간대고. 지금 목숨 붙어있는 것이 누구 의지인데, 우리가 마음대로 5년 뒤라는 말을 함부로 사용해요. 이미 완료인데. 오늘 살고 죽어도 우리는 다 살았어요. 다 한 거예요. 여러분들이 노인네 죽을 때 소리가 뭡니까? 욕조에 물 빠지는 소리 나요. 쒹~~ 그리 죽어요. 쒸익~~ 입 맛 다시는 소리. 마지막 숨을 내쉴 때 입맛 다시는 거예요. 갔어요. 삐삐...
우리 어머니 돌아가실 때 의사랑 같이 있었거든요. 마지막 그 순간에. 의사는 눈꺼풀 하지만, 의사는 그걸 안 봅니다. 뭐만 보느냐, 그래프만 봐요. 산소가 뛰고 있는지. 왜? 세미한 파동은 인간의 힘으로 안 되니까. 그게 객관적이니까. 예수님의 십자가가 유일한 믿을 수 있는 객관이에요. 십자가에서 죽었으면 우리는 살아도 이미 죽은 거예요. 내가 사는 것은 그리스도 때문에 수명이 계속 연장되고 있는 거예요. 그 수명이라 하는 것은 바로 죽은 자를 활용해 주시는 주님의 호흡, 숨소리에요.
예수는 나의 소망이라 하는 가사가 나오지요. 언약의 시점에 호흡이 부활의 호흡이 시작되지요. 주님의 숨소리를 우리가 대신 휴~ 하고 있지요. 때로는 코로나 걸려서 헤헤~ 거리지만. 이 해석을 우리가 학교에서 배운 내 해석, 그 상식적인 인간들의 말의 연결고리에서는 이 해석이 나올 수가 없어요. 그야말로 사울은 들었는데 옆의 동행자는 이 말을 못 알아듣는 거예요. 그건 말이 아니고 막걸리지요. 그건 그냥 말의 관계에요. 지 잘났다. 더 이상 나한테 들어오지 마라. 그러니까 모든 말은 뭐냐 하면 나는 내가 보호할 테니까 니가 함부로 다룰 대상이 아니야. 이거 한다고요.
그러나 주님은 뭐냐 하면 이게 미쳤나. 언제 너를 다루라고 했어. 내 사건에 니가 휘말렸다는 말이야. 휘말렸는데 어떻게 휘말렸는가, 더러운 모습으로. 이 더럽다는 것을 죄를 지어야 아는 게 아니고 십자가만 바라봐도 온전한 더러움이에요. 우리가. 십자가에서 예수님 피 흘렸잖아요. 예수님께서 손에 못 자국 있었지요. 창 자국 있었지요. 그걸 누구를 위해서 그렇게 한 거라고 주께서 이야기합니까? 요한복음20장에서 누가 뒤늦게 왔습니까? 열한제자 가운데서 도마가 오니까 도마를 딱 불러 세웠어요. “도마야! 보이냐? 이 창 자국.” 만져보니까. “그럼 이 못 자국은?” “보이네요.” “자, 이야기해봐” “내가 주인이 아니고 판단의 주인이 아니고 주님이 제 판단의 주인입니다.”
내 판단은 기껏 보고 믿는 게 제 판단인데, 그게 제 한계입니다. 악마의 한계입니다. 주는 하나님이십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모든 계획이 이 못 자국, 창 자국에 이미 이 안에 이루었음 안에서 주께서 저를 호칭했습니다. 자기 일에 저를 지정해서 불러 세웠습니다. 제자로. 그걸 인정하는 거예요. 그럼 그 제자들이 밖에 나가서 누구 증거 하겠어요? 자기 증거 하겠습니까? 예수님 증거 하겠습니까? 예수님 증거 하지요.
물론 때로는 자기 증거하고 싶더라도 무엇이 생각나느냐 하면 그 못 자국과 창 자국을 생각해 볼 때 단절된 것을 타고 넘어오신 분은 완성된 마지막 주께서 다했던 그 마지막이 모든 단절을 넘어서서 자기 백성으로 건지신 거예요. 그래서 어제 수요일날 또 중요한 것은 뭐냐 하면 하나님은 모든 인류의 하나님이 아니라, 오직 자기 아들의 아버지로서만 일한다는 거예요. 아들의 아버지. 그런데 아버지의 특징은 뭐냐 하면 온천지가 시커멓게 불에 타서 방금 끄집어냈거든요. 지옥 불에서, 지옥에서, 더러운 데서, 사자의 꽉 무는 데서 방금 건져냈잖아요. 그러니 상처를 안고 있는 거예요. 예수님만 창 자국, 못 자국만 있는 게 아니고 내가 봐도 온 천지가 세상적인 사람이 되면서 살았던 모든 자국들이 우리에게 상처가 있는 거죠.
“건드리지 마라. 나는 예수님의 흔적을 가졌노라.” 사도바울이 이야기한 것처럼.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 )÷6=1...1일 때, ( )는 뭐냐? 7이죠. 나머지 1은 부활이라면 몫의 1은 뭐냐 하면 예수님의 죽음을 우리하고 똑같은 일반적인 죽음으로 간주합니다. 그 죽음을. 어디에? 육이라는 세상에. 세상은 죽여 놓고 끝났다는 거예요. 부활되리라는 것은 생각도 못한 거죠. 나머지 부활됨으로서 이것이 계산이 되어서 7이라는 숨어있던 것이 등장하지요.
그렇다면 주님께서 예수님은 안 보이고 보이는 우리만 세상에 깔아놓고 지정한 이유가 보이는 우리를 통해서 보이지 않는 분을 계산해서 드러내기 위해서 일합니다. 왜? 그래야 성령이 오지 않으면 천국 못 간다는 원칙을 고수하기 때문에. 이건 하나님이 카이로스, 완성된 의미가 부여되지 않으면 어떤 인간도 악마 편에 서있기 때문에 예수님 쪽으로 건너올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하는 거예요. 결국 마지막은 갈라짐입니다. 헤어짐이에요. 모든 부부도 결국은 헤어져요. 전부 다. 니는 니 인생이고, 나는 내 인생이에요. 우리가 갈라지게 하는 게 아니고 주께서 갈라지게 하는 거예요.
그래서 성경에 보면 복음 모르거든 그렇게 결혼에 대해서 미리 집착하지 마라 말이죠. 왜? 결혼이라 하는 것은 구원되게 하기 위한 증인으로서 보낸 것이지,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 부부된 건 아니거든요. 이건 결혼하기 전까지는 몰라요. 하고 난 뒤에 나중에 카이로스, 복음이 오니까 아~ 지난 모든 경험들이 악마 편은 어느 쪽이며, 예수님 쪽은 어떤 쪽으로냐, 그 차이점을 보여주기 위해서 차이 자체로서 우리가 이 땅에 움직인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갑자기 오늘 강의 제목을 로봇청소기로 하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아요. 비틀거리면서 안 돌아다니는 데가 없어. 그런데 가는데 마다 차이야. 차이남이에요. 그 차이남은 나와 나의 차이남을 우선해야 됩니다. 내가 나의 차이. 말과 말씀의 차이. 그런 차이. 어떻든 간에 계속 진도 나가겠습니다.
여기서 자식이 아버지를 만들어버리지요. 그러면 자식으로 온 사람이 누구냐, 다윗이에요. 다윗의 아버지가 아들이 성공하고 나니까 갑자기 모르는 아버지가 떠버렸네. “저 사람, 누구 아버지래.” “저 사람은 영탁의 아버지래.” 이래가지고 갑자기 영탁의 아버지가 몸이 아파가지고 하면서도 영탁의 아버지래. “임 영웅의 어머니래.” 임 영웅의 어머니가 포천에서 미장원한데. 갑자기 미장원 못하게 되었어요. 사람이 너무 많이 와가지고. 코로나 때문에 걸릴까 싶어서. 돈100억 벌어놨으면 미장원 안 해도 되지.
빈자리가 어떤 자리냐 하면. 다시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은 없던 분이 아니고, 항상 시작은 하나님이다. 라는 인식의 시작은 우리 곁에 있었네. 우리 곁에 있었네. 우리 곁에 오셨는데 우리가 나만 생각하기 때문에 나한테 도움 되지 않는 타인이라고 해서 우리가 밀어버렸어요. 마치 악마가 여호수아를 고발한 것처럼 고발해 버린 거예요. 제가 이야기하는 것이 뭐냐 하면 순은 어떻게 생산되느냐 하는 겁니다.
순은 없는 데서 있는 것이 아니고 비천한 자리, 사태를 만들어요. 비천한 사태. 인생 부도난 인생. 그게 뭐냐 하나님의 순을 이 땅에서 생산해 내는 자리에요. 예수님을 드러내는 자리다 말이죠. 예수님 보고 싶어요! 하지 마세요. 이 소자에게 한 것이 곧 누구한테 한 것이다? 곧 나한테 한 것이다. 나의 대행자가 니 곁에 있어. 가난하다고 예수님 아니에요. 없이 사는 예수가 아니고.
부자라도 복음 때문에 복음의 가치를 두고 살아가는 사람은 부자라도 그게 거지 나사로고요, 그 사람이 파출소 간적이 없어도 그 사람은 강도입니다. 바람 안 피워도 그 사람은 세리고 창기에요. 돈 안 밝혀도 세리 되고, 창기 돼요. 왜? 예수님이 바로 출발점이고, 그 출발점에 자기 백성을 합류시킨 겁니다. 죄 안 지었다고요. 율법 한 번 드리대 볼까요. 자기 사랑하는 것도 죄인데요. 죄 아닌 자가 어디 있어요.
여러분들이 회사 일해 본 사람은 알 수 있잖아요. 회사 조직이 사장부터 있지요. 있으면 나는 여기 대리로 일한다. 그러면 우리 생각에는 대리로 충분하게 하면 되지. 하지만 기획되는 모든 프로젝트가 계획에 이 계획과 연줄 된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그 계획 중에 하나가 같은 경쟁 업체에 비밀 액수 입찰가격을 따내는데 그 서류를 내가 타이핑하는데. 공범자 아니에요? 내가 타이핑한 것이 입찰할지 안할지 내가 꼭 알아야 돼요? 몰라야 되지요. 그 알아서 뭐 할 건데. 그 아는 것은 윗사람만 알면 되지. 시키는 대로 “미스 김 이거 타이핑 해줘” “예” 이러면 끝나지. 그런데 나는 아예 미스김 정도가 아니다. 나는 아예 초자 수습이다. 수습인데 선배되는 미스 김이 이거 입찰하는 비밀을 가라로 가짜로 서류를 치는 타이핑이 워드 치는데 그 선배 언니가 하는 말이 “김 양 커피 한 잔 타주세요.” 커피 타는 나는 뭐 돼요? 공범자지요. 공범자.
세상은 얽히게 되어있어요. 우리 아버지인데 직업이 이상하게 밤에 출근하고 낮에 쉬고 이상한 직업인데. 어쨌든 아버지가 수고해서 밥 먹고 산다. 근데 아버지가 저녁에 출근할 때, “아빠! 힘내세요. 우리가 있잖아요.” 했는데 아빠가 힘내가지고 가스관 타는 거예요. 고층 아파트에 스파이더맨 되어가지고 훔쳐가지고 그거 팔아가지고 애들 피아노 치게 하는데요. 가장으로서. 울고 싶어도 참으면서.
세상 전부 다 무덤이고 한통속이고 공범자들이에요. 모든 게 공범자들이에요. 몰라서 그렇지. 그래서 깊숙이 알려고 하지 마라 그러지요. 승진하면 승진할수록 점점 더 본의 아니게 그 지옥 구덩이에 점점 들어가는 거예요. 어디 공장이 돈 주는 줄 알아요. 공장이 돈 안 줍니다. 어디 회사만 그럽니까. 교회는 안 그런 줄 압니까. 세상 어디에도 순수한 자리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순수한 자리. 입사할 때, “입사만 시켜준다면 뭐든지 하겠습니다.” “니 뭐든지 한다고 했지? 앞으로 보자. 뭐든지.” 그 뭐든지에 영혼 팔아버리는데요. 인간은 영혼을 팔지 않으면 안 되는 세상에 우리는 태어났습니다.
따라서 나에게 필요한 것은 나를 위해서 이 더럽다는 내가 더럽다, 를 일러주는 다른 하나님의 아들이 필요한 거예요. 아들이. 아들과 이새는 보잘 것 없는 사람이에요. 보잘 것 없는 보통 혈육에서 놀랍게도 하나님의 다윗이 태어났다는 이야기를 이새의 줄기에서 또는 순으로 태어났다. 가지가 나왔다. 이사야11장에서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지요. 싹이 뭡니까? 하나님의 움이 텄다. 이걸 가지고 신약에서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 죽은 자리에서 첫 부활로 나왔다.
예수님이 죽은 데서 부활한 것이 아니고. 이런 게 참 중요하지요. 죽은 데서 부활한 것이 아니고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한 거예요. 따라서 부활했다는 말은 일단 너희는 다 죽었어. 이런 뜻이에요. 어디서 살 생각을 해. 어디서 천당 갈 생각을 해. 죽은 인간이. 이 부활에서 죽은 자까지 오는 것은 죽은 자에서 끄집어낼 때, 죽은 자에서 끄집어 낸 그 능력이 성령으로 택배 되어서 성령에서 모든 것이 담기는 거예요. 그걸 가지고 어려운 말로 뭐냐 ‘함의’ 의미가 모두 포함된 거예요. 의미가. 끝까지 다 포함된 거예요. 용서 정도가 아니고 용납되는 거예요. 지금 중요한 것은 내가 죄 짓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누가 너를 용납하느냐가 중요하거든요.
용납하신 분이 용납할 만한 일을 이 지상에서 과연 해냈느냐, 악마는 그렇지 않다. 예수님은 자기가 훌륭해서 자기가 구원받았다. 우리가 하는 것은 예수를 믿던지, 예수를 믿고 그 믿음을 유지해야 구원받는다고 자꾸 어떤 행함을 믿어야 된다는 행함을 자꾸 추가시켜 버리는 거예요. 그러면 모든 의미의 함의가 되지를 않아요. 니가 용서를 받았으면 정신을 차려야지. 이리된다고요.
그러면 주인공이 여전히 우리는 고정된, 내가 고정된 자리가 되지, 어떻게 할당받은 지정된 자리가 아니 되는 거예요. 그래서 여호수아로부터 순이 생산되어야 된다니까요. 원래 마지막에서 마지막 그 전의 모든 문제를 마지막부터 슬슬 풀리는 실타래가 풀리듯이 풀어 나와야 돼요. 나와야 우리가 현재 2020년도 일이 마지막 끝까지 붉은 줄로 엮여지지요.
여러분들이 여리고성에 갈 때에, 여리고성을 함락시킬 때에, 군사들은 하나의 규칙을 꼭 지켜야 됐어요. 뭐냐 하면, 빨간 줄. 빨간 줄을 놓쳐버리면 여리고성의 함락의 의미가 없습니다. 빨간 줄을 누가 창문으로 떨어뜨렸습니까? 기생 라합이지요. 빨간 줄 때문에 전쟁이 된 거예요. 빨간 줄. 빨간 줄 의미가 살아나기 위해서.
왜 그러느냐 하면 총 진격하는 이스라엘의 그 본질은 승리할 때는 도취해가지고 자기의 본질을 잊어버려요. 그런데 옛날 출애굽 때 구원될 자격도 없는 인간을 구원했다는 그 사건을 기생 라합의 구원 경로를 통해서 다시 한 번 그걸 다시 회생케 하는 거예요. 그걸 현재에 과거의 자신의 본질을 자기 본질을 지금 자기가 하는 행위 속에서 재발견시키는 겁니다. 그게 바로 기생 라합의 건짐이에요. 빨간 줄.
피의 붉은 줄이 어린양의 피로 구원받았다는 것을 되새겨 만들지요. 그런 사건이 매일같이 성도의 일상이 비로소 주께서는 제공했지요. 제공했는데 우리는 모르는 이유가 늘 우리 솜씨가 너무 좋아가지고 “주여, 이건 내가 알아서 합니다.” 말씀으로 해야 될 걸 지가 말로 다해요. 말로. 말씀이 아니고 말로 다 해버려요. 남하고 좋게 지내려고 하고, 우환이 없게 하려고 하고, 헤어지고 난 뒤에 좋은 인상을 남기려고 애쓰고, 그거 해서 뭐하려고. 이것이 얼마나 이 세상에서는 정상적인 인간으로 해석된다는 사실을 우리가 알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3장을 끝내야 되니까 해보겠습니다. 스가랴3장에 보면 여기 이런 말이 있지요. 3장10절에,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날에 너희가 각각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로 서로 초대하리라 하셨느니라” 요게 뭐냐, 처음에 에덴동산에 낙원에 정경이 끝에 최종 옷 벗기는 사건과 결국은 하늘나라에서는 같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거예요. 마지막 때에 괜찮은 그 살기 좋은 풍경이 처음에도 알려줬고 마지막에도 알려줬는데 그 처음의 에덴동산의 의미는 마지막 십자가의 의미에서 이렇게 연줄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주는 겁니다.
이 말은 쉽게 하면 뭐냐 하면 좋은 환경 찾지 말고 좋은 분 찾아라. 이 말이지요. 꺼진 불도 다시 보자. 표어처럼. 우리가 살기 좋은 환경을 찾지 말고, 좋은 분 만나면 그분이 새로운 시간과 공간을 따로 이미 마련해 놓고 있습니다. 다 준비해놨어요. 우리가 기다리는 것은 괴롭지만, 나중에 막상 만나보게 되면 기다리는 시간이 하나도 아깝지 않습니다. 아이구~ 더 기다릴걸. 너무 수월하게 얻는 거 같아요. 뭐 이런 식으로. 우리가 기다린 거 보다 너무 빨리 왔네요. 이리 되지요.
이 땅에서 수직적으로 카이로스, 모든 걸 이미 이룬, 모든 세상은 앞으로 모든 것도 과거 완료로 만들어버리는 이벤트가 성령이 옴으로 말미암아 이젠 한꺼번에 성경해석이 육의 해석이 아니고 예수님의 해석과 동일한 안목으로 세상을 보게 되면 안에서 우리는 바로 죄인이 되었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아는 감사가 나오게 되어있어요.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유도 묻지 않고 무조건 죄인으로 만들어주신 주님에게 감사합니다. 비로소 우리가 이제는 예수님 편에서, 여호수아 편에 서서 악마를 바라볼 수 있는 입장이기에 능히 악마 편에서 예수님도 같이 바라볼 수 있는 그러한 사건에 휘말리게 하여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