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20200910a슥3장2절(성전과 제사장)-이 근호 목사
오늘은 스가랴3장, 오랜만에 스가랴 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1장, 2장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가를 지난 시간에 한 거 그 내용을 잠시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스가랴하고 앞에 나와 있는 선지자 있지요. 학개. 이 두 사람은 바벨론이라는 나라에 이스라엘이 잡혀갔거든요. 잡혀갔을 때에 고레스 바벨론에 잡혀가고 그 다음에 세월이 많이 흘러야 돼요.
흘러서 그 다음 나라가 바사 나라가 돼요. 페르사, 바사 나라가 되고 그 바사나라에서 우호적인 왕이 등장해요. 고레스라는 왕입니다. 그 이름은 이사야에도 나와요. 고레스 왕이 정책적으로 종교에 대해서 상당히 자기 정복당한 사람들의 권익을 보장해주는 그런 왕이에요. 물론 그 마음도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렇게 마음을 조정했지요. 그러니 여러분들이 고레스 왕이 착하다. 훌륭하다. 그런 생각 마시고 바벨론 왕은 악하다. 그렇게 생각하지 마시고 모든 성경 중심은 이스라엘 중심입니다.
그 이스라엘 중심을 여기 스가랴, 학개 두 선지자가 스룹 바벨 그리고 여호수아라는 제사장과 더불어서 주도 인물이 4명입니다. 스룹 바벨 총독, 여호수아가 제사장 그리고 선지자 두 사람. 투톱이지요. 학개, 스가랴. 이 사람들이 포로이후에 586년에 망했는데, 538년에 48년 뒤에 본국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48년 뒤에. 그런데 그 역대하 마지막에 보면 하나님께서 약속하시기를 70년 되면 돌아온다. 그러셨거든요. 48년하고 70년하고 22년 차이가 납니다. 어쨌든 간에 가라고 할 때 목적이 있어요. 그냥 가라는 게 아닙니다. 성전지어라, 에요.
보통 사람들이 예수 믿으면 구원받는다 하잖아요. 그 구원이란 개념이 예수님의 구원 개념이 뭐냐 하면 이 개념이에요. 성전이 되어라, 이 말입니다. 성전이 되어라, 이게 구원이에요. 성전이 되어라. 신약에서는 바로 구원을 이야기하지만 구약에서는 구약 이스라엘을 통해서는 하나님께서 성전 지어라. 성전 만들어라, 라고 학개하고 스가랴 두 선지자를 보내가지고 재촉을 하고 독촉을 해요.
그럼 굳이 성전 지으라는 것을 선지자를 통해서 할 필요가 뭐가 있느냐, 라고 생각되시겠는데. 한 오만명 사만구천명이니까 한 오만명 끌고 스룹 바벨 총독이 되어가지고 고레스 왕이 총독을 지명해가지고 이제 약속의 땅으로 도로 돌아옵니다. 돌아왔을 때 구색을 갖춘 거죠. 총독은 일종의 왕이지요. 왕. 왕+여호수아. 여호수아는 뭐라고 했습니까. 제사장. 그 밑에 이제는 두 선지자. 두 선지자가 뭐냐 하면 학개 선지자, 스가랴 선지자. 한 4명이 주동이 되어서 고레스의 마음을 하나님이 움직여서 자기 고향으로 추방됐던 고향으로 다시 돌아올 때, 그들은 ‘이 땅에서 우리가 사는구나!’ 생각을 가지면 안돼요. 목적이 돌아오는 목적이 ‘그래, 옛날처럼 잘 먹고 잘 살아야지.’ 이게 목적이 아니에요. 지금 이게 목적이 아니에요.
애굽에서 나와서 광야 지나서 약속의 땅으로 가는 그 시기 아니에요. 그 기분 내면 안 됩니다. 성전을 지어야 돼요. 성전을. 성전 짓는 일군들로 그들을 세운 겁니다. 그럼 성전을 지어서 뭐하는데? 왜 성전을 지으라고 하느냐. 제가 어제 지난 수요일날 그런 이야기했어요. 성전은 뭐냐 하면 하나님의 거주지. 하나님의 아파트로 보면 돼요. 아파트. 하나님의 아파트에요. 이런 점이 하나님이 얼마나 낮추느냐를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거주지를 정할 때 이 죄 많은 땅에다가 거주지를 만들겠다는 겁니다.
이게 요한복음1장15절에 보면 말씀이 육신이 되는 거와 마찬가지에요. 이방인들은 하나님을 하늘에서 찾잖아요.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은 하늘에서 찾지 말고, 하늘에 있다가 땅에 내려온 곳에 주목하라. 그것을 주시하라. 그렇다면 신앙이 상상적이나 추상적인 내용이 신앙이 아니고 아주 너무 너무 구체적이죠. 구원이라는 게. 그냥 기도해서 은혜 받았다. 이게 아니라 굉장히 구체적이고 역사적이에요. 두리 뭉실 아니에요. 묘한 게 아니에요. 불확실한 게 아니에요. 확실한 이 지상에 증거를 남기는 겁니다. 확실한 증거를 남기는 거죠.
지상에다가 하나님의 거주지가 있다. 이걸 저는 뭐로 보느냐 이게 제목일 수가 있는데 뭐냐 하면 ‘위기’ 인간의 위기입니다. 인간들 사는 세계에 하나님이 왔으니까 사이좋게 지내면 되지 않겠느냐.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지요. 엄마 잃은 네 자녀가 있는데 엄마가 회개하고 다시 네 딸 보러 왔을 때 그 자식 네 명과 엄마가 만날 때 얼마나 상봉이 아름답고 감격스럽겠습니까. 뭐 그렇게 생각할 수 있겠지요. 부모가 없는 버려둔 네 명이 있는데 엄마가 와서 “미안하다. 내가 그 때 너희들을 돌보지를 못해서 미안하다. 이제 돌봐줄게.” 굉장히 감격스럽겠지요. 그리 생각하시면 안 되고요.
왜 위기냐 하면 인간세계에 이미 주인이 있어요. 이게 뭐냐 하면 악마가 있어요. 악마에 의해서 완전히 차단되어있어요. 악마가 주님의 말씀, 주님의 하는 계획을 알지 못하도록 모든 걸 강력하게 카바를 하고 있으니까 그 악마의 마음을 닮은 인간들이 하나님이 이렇게 오게 되면 자기가 생각했던 하나님하고 달라요. 너무 달라요. 이게 위기에요.
그래서 하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악마와 그 일당을 싸그리 이걸 진노의 심판을 하기 때문에 인간 세계에서는 하나님이 오시는 것이 뭐가 되느냐 하면 위기가 되는 겁니다. 그리고 위기, 다른 말로 하면 종말이에요. 종말. 저는 종말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서울의 달> 드라마에 보면 거기에 등장하는 막내 딸 이름이 종말이에요. 잊을 수가 없어요. 그 종말이 곽진영인가 그렇게 되지요. 이름이 종말이에요. 옛날 이름을 그렇게 지었거든요. 이제 그만 낳겠다. 이름이 종말인데.
주님이 오셨다는 말은 일체 이제는 인간하고 협상이나 의논은 하지 않겠다. 율법을 왜 안 지키느냐 닦달하지 않겠다. 왜냐하면 너희들의 바닥까지 실상까지 충분하게 아는 입장에서는 아무것도 너희에게 묻지 않겠다. 아무것도 묻지 않겠다. 이러한 종말의 대표적인 비유를 저보고 예를 들라면 저는 이 비유를 들겠습니다. 씨 뿌리는 비유. 종말의 특징을 아주 제대로 보여주고 있어요. 마태복음13장 씨 뿌리는 비유 있지요. 이 비유가 뭐냐 하면 농부가 씨를 뿌리는데 하나는 돌밭에 떨어지고 하나는 바위위에 떨어지고 하나는 가시덤불에 떨어지고, 네 번째는 옥토에 떨어져서 잘됐다. 이렇게 되어있지요.
이 씨 뿌리는 비유의 특징은 주님의 뿌린 씨앗이 말씀이니까. 뿌린 말씀이 모든 저항을 이긴다. 모든 저항을. 이것은 인간은 악마의 저항을 이겨낼 수가 없다는 것과 같은 뜻이에요. 씨를 뿌리는데 마귀가 와서 그냥 물고 가게 되면 인간은 어떻게 되느냐 하면 그냥 무능자에요. 아무것도 못해요. 마음만 옥토에 30배하고 싶지요. 그건 마음뿐이고. 악마가 와서 물고 가면 30배, 60배 없어요. 아무리 믿고 싶어도 고난이 와서 넘어진 자는 그 열매 없습니다. 아무리 먹고 싶어도 세상에 유혹에 빠져버리면 열매도 없는 건 마찬가지에요.
그러니 이것은 주님의 말씀이 그냥 모든 저항성을 뚫고 옥토 될 자에게 옥토 되게 하는 겁니다. 열매를 맺게 하는 거예요. 그러면 여러분들이 열매라면 평생 동안 이 열매가 겪어야 될 것은 뭐냐 하면 세 가지만 겪으면 돼요. 세 가지만. 첫째는 뭐냐 하면, 마귀가 와서 말씀을 잡아먹는 그런 경우를 경험하면 되고, 그 다음에 고난이 왔을 때 난간에 역경에 당해서 좌절될 수밖에 없는 경험을 가지고, 세 번째는 어떤 세상의 유혹과 세상의 욕심에 담겨서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이 세 가지의 경험을 이미 열매된 사람에게 주님께서 이걸 체험케 합니다.
“야~~ 말씀, 주님의 말씀의 위력이 이 세 가지를 다 뚫고 우리 코앞에까지 당도하셨구나!” “야~ 주님의 말씀은 정말 대단하다.” 예를 들면 삼풍백화점 무너져가지고 지하 3m에 20일 동안 갇혀 있던 사람에게 죽었다 싶어서 의식이 가물가물한데 나중에 한 20일 뒤에 삽질하는 소리가 들리면서 “거기 아직 살아계십니까?” 하고 보니까 그 사람이 살아났다. 20일은 너무하고 16일 동안 갇혔다가 살아난 사람이 있어요. 자기는 사흘 지냈는가 생각했는데 16일 지났데요. 그것처럼 기어이 찾아내는 거예요. 기어이. 발굴해 내는 거예요. 우리 옥토 여기 있지롱! 해서 찾아오는 거예요. 주님께서 찾아요. 내가 찾아가는 게 아니고.
주께서 찾아오게 되면, 왜 우리는 우리 힘으로 구원되지 못하는가? 막강한 이 세 가지 힘을 우리 힘으로 못 이기기 때문에 그렇다. 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거예요. 왜? 마지막 때는 인간에게 주께서 어떤 기대도 하지 않습니다. 본인이 본인한테 기대하지 마세요. 그 기대 안하려면 나 자신의 역량을 아예 포기해야 돼요. 그것을 어제 수요일날 그리 했지요. 내 의로 구원받지 못한다. 내 의로 구원받지 못해요. 그런데 왜 쓸데없이 자기 의를 쌓으려고 합니까. 자기 의로 구원이 안 되는데. 왜 자기 자신을 증거 해요? 뭐 복음 안다고 해놓고 지금 다른 교리를 지금 찾고 있는 거 아니에요? 왜 자기 자신을 점검합니까.
점검할 가치도 없는데. 점검 하나 안 하나 관계없이 우리는 안돼요. 우리는 되지를 않는다고요. 익명적 단체로 집단화 된 것이 유다나라입니다. 유다나라는 아들이 하나에요. 그 전체가 아들이지. 내가 따로 있는 게 아니에요. 전체가 하나의 집단적, 익명적 단체에요. 하나의 주체성을 가지는. 그 대표가 바로 하나님의 이름이 되는 겁니다. 자기 이름 다 버려야 돼요. 그것이 신약의 교회고, 성도입니다.
서로를 비교할 필요도 없어요. 둘 다 자기 의로 구원 안 되는 처지에 있는 사람들끼리 만나서 자기 자랑할 필요 없지요. 오늘 스가랴이야기는 종말에 이를 때까지 종말의 스케줄 중에 하나가 하나님이 이 땅에 거주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학개, 스가랴를 통해서 성전 지으라고 재촉을 한 겁니다.
자, 그러면 그들이 알아서 성전 지으면 되는데 왜 또 선지자가 와서 재촉을 해야 되는가, 그건 학개라는 그 앞에 보면 1장하고 2장이 두 장 밖에 없지요. 그 내용에 보게 되면 이 사람들이 성전 짓다가 태만한 이유가 있어요. 그건 뭐냐 하면 시험, 시험 지으면 되겠지. 이리 되는 거예요. 왜 그러느냐 하면 그 모습이 그들이 약속의 땅에 있다가 바벨론에 포로 잡혀 갔을 때 그 사고방식을 그대로 유지한 채 다시 약속의 땅으로 들어온 거예요.
본인이 편하게 살면 OK. 그게 자기의 존재의 이유인 줄 알았어요. 나 편하게 살면 되지 않겠느냐. 아까 제가 언급했지요. 구원된다는 것은 더 이상 나의 가치, 나의 의는 없고 그냥 성전 만들기 에요. 우리 몸이 하나님 성전 되기, 주께서 우리에게 성령오기, 전부 이건 옛날에 이스라엘이 율법대로 하지 못했던 그 정황. 집단적 독자 체제. 하나님의 이름으로 다 모여 있는, 주님의 말씀의 씨앗이 옥토 되게 하는 그 작업에 결과물. 주님의 작품이지요. 주님의 솜씨를 보여주는 거예요. 내 솜씨 말고 주님의 솜씨를 보여주는 거예요.
그래서 70년 만에 돌아온 것도, 사실은 70년이 안되지만, 48년 만에 돌아온 것도 이건 누구 솜씨입니까? 고레스의 탓이 아니고, 배후에 작용하시는 주님의 약속의 위력 탓으로 돌아온 겁니다. 돌아올 때 목적이 뭐냐, 성전 지어라. 그러니 에스겔 같은 경우에는 이미 그들이 이스라엘 망할 때 징후가 성전이 깨지면서 이미 그 나라는 끝난 거예요.
자, 성전은 뭐냐 하면 하나님의 거주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살고 싶은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방나라를 흠모해가지고 우리도 저 나라처럼 되자. 이렇게 되니까 하나님이 삐졌지요. 같이 있을 이유가 없는 거예요. 함께 살고 싶은데 다른 데로 눈을 돌리지요. 그래서 호세아에서는 그걸 뭘로 표현하느냐 하면 왜 본 남편 놔두고 다른 남자 찾아가느냐, 이 여성화된 이스라엘아! 이리 되는 거예요.
그걸 가지고 뭐라고 합니까? 간음한 이스라엘. 본 남편은 바알이 남편이 아니고 여호와가 본 남편이다. 광야에서 내가 다 키워줬잖아. 벌거벗은 너를 내가 다 입혀가지고 색시 만들어놨잖아. 그런데 왜 한 눈 파느냐, 호세아에서는 이렇게 이야기하지요. 본 남편 찾아오라. 이사야에도 그런 내용 있어요. 나는 내 색시하고 결혼할란다. 하나님께서 아예 노골적으로 혼인까지 하겠다고 이사야에 끝부분에 그렇게 나옵니다. 얼마나 인간적이에요. 하나님께서 굉장히 인간적이지요.
우리가 하나님의 색시가 되면 어떤 점이 좋으냐 하면 그 색시에 대한 자기 부인에 대한 모든 책임은 남편이 다 지게 되어있어요. 여자가 어떤 짓을 하던 간에 남편이 알아서 다 책임져요. 로마서7장에 보면 그게 나와 있어요. 학개 설교가 4개가 있는데요, 4개를 볼 때에 그들은 뭐 나 편하면 되지. 이렇게 하니까 학개가 나서서 “너희 집 꾸미는 것만 이것만 생각하고 성전은 그렇게 방치하면 되냐?” 해가지고 설교부터 시작이 되는 거예요.
그러니 하나님께서 48년 후에 오게 해가지고 성전 지으라고 넌지시 던져보는 거예요. 던져보니까 그 이스라엘 사람들이 성전 뭐 시간나면 짓지. 해가지고 관심사가 딴 데 있는 거예요. 옛날에 자기 행복과 자기 편하게 사는데 있던 겁니다. 그리고 16년 동안 방해 공작 있어가지고 또 성전을 못 지었어요. 그러다가 결국은 학개가 4번이나 설교하고 스가랴가 설교를 하고 독촉을 해가지고 결국은 515년, 586년에 나와서 515년에 몇 년입니까? 70년 만에 드디어 완공을 합니다.
이 70년 안에 수월하게 지나는 그냥 시간이 아니라 뭐에서 뭐로 바꾸느냐 하면, 내 행복과 내 평안한 중심의 하나님이 아니고 하나님의 계획에 그 계획을 따르는 그런 인간형으로 바뀌는 기간이 70년이에요. 이게 바로 구원입니다. 구원이라 하는 것은 나 혼자 사는 게 구원이 아니고 주님과 함께 사는 거예요.
자, 강의를 다시 해봅시다. 하나님과 인간이 함께 만난다는 것은 좋은 이야기거든요. 에덴동산에 의하면. 창세기2장에 보면 너무나 바람직한 사항인데. 그러나 지금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온다 할 때, 인간의 세계에서는 뭐냐 하면 위기인 거예요. ‘아이구~ 뭐, 하늘에서 그냥 사시지. 뭐 땀 시로 구차하게 이 더러운 곳에 꼭 굳이 살 필요가 뭐가 있습니까? 이제는 각자 독자적으로 하나님은 하나님끼리 살고 천사와 더불어 살고, 인간은 우리끼리 살면 됩니다.’ 라는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에 인간세계에서는 이걸 뭐로 보느냐 하면 위기로 보는 거예요. 하나님을 위기로 보는 겁니다.
하나님이 인간세계에 오겠다는 말은 벌써 인간 세상이 마음가짐이 옛날로 자발적으로 돌아갈 수 없는 마음으로 굳어진 거예요. 악마에 의해서. 완전히 콘크리트화 다 된 거예요. 딱딱해져 버린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걸 드릴로 공사를 두두두~~ 뚫는 거예요. 뚫는 겁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두꺼운 콘크리트의 장벽을 주님 쪽에서 두두두 뚫는 거예요. 뚫게 되면 여기에 비로소 길이 나오겠지요. 문이 나오겠지요. 좁은 길, 좁은 문이 되겠지요. 그러나 이것은 이 문은 주께서 뚫어놓은 길을 어떻게 뚫느냐 하면 일단 주님께서 오셔서 내려오면서 뚫는 게 아니고, 올라가면서 뚫어버려요. 올라가면서. 인간이 되셔서 다시 올라가면서 십자가 죽으심으로 이것을 뚫어버립니다.
왜 그러느냐 하면 십자가 죽게 되게 되면 4가지를 이긴 게 되거든요. 율법을 이겼고요, 율법으로 너를 탓하지 않겠다는 뜻이에요. 율법을 이겼고, 마귀를 이긴 겁니다. 마귀의 특징은 정죄에요. 수사관이 하나, 하나 빈틈없이 달달 털어서 고발하는 자라. 오늘 본문도 마찬가지입니다. 고발하는 자, 마귀에요.
그래서 로마서8장에 보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를 누가 정죄하리요, 하는 말이 있지요. 그리스도를 위해서 감히 죽었는데 누가 정죄하리요. 하나님이 내 사람이라 하는데 누가 내 사람을 건드리겠느냐, 이 말이에요. 그리고 하나님의 사람도 마찬가지에요. 예수님은 내 사람이다! 왜 말을 못해. 주님은 나를 위해 죽었다는 말을 왜 못해. 여러분들이 많은 사람들을 만나잖아요. 대화할 때, 그 대화의 바닥에, 엄마 까투리에서 나뭇잎 밑이라 했는데. 밑에 반드시 뭐가 있느냐 하면, 본인이 평소에 어떤 식으로 살아가는지 다 깔려 말을 하게 되어있어요.
“나는 지금껏 이 정도 나는 축적된 의로움과 정당함과 선행으로 나는 선교사 한다.” 이게 모든 말에는 목사 일을 한다. 모든 말에는 다 깔려있다고요. 내가 지금껏 정숙한 가정에서 출생해 가지고 아주 반듯한 대학에 나와 가지고 노력해가지고 이만큼 살았다. 할 때, 그 바닥에 뭐가 깔려있습니까? 자기 의가 다 깔려있는 거예요. 자기 의가. 자기 성실성, 착실함, 그리고 조심스럽게 인생을 살아가는 자기에 대한 철저한 자기 관리. 이런 게 다 깔려있다 말이죠.
여러분들이 아무나 대화해보세요. 남편하고 얘기 하던지, 애하고 얘기하던지, 대화할 때, 무엇이 깔려있는가를 보라는 말이죠. 그것을 어제 수요설교에서는 사람이 마지막에 무엇과 닿는가, 자기 자신과 닿는가, 아니면 피와 닿는가, 그러니 목사들이 목회할 때 교인들이 뭘 원하는지 알아요. “목사님, 제가 주님을 위해서 이렇게 애썼다는 것을 깔고 왔으니까 그거 칭찬해 주시오. 내가 교회를 위해서 이렇게 기도를 하고, 국가를 위해서 기도하는 그 점은 긍정적으로 봐주셔서 우리에게 사태가 호전되게 하옵소서.” 이런 게 깔려있어요.
그런데 그것은 율법을 다 지키지 않으면 진짜로 있는, 요새 찐이거든요. 찐 천국에서 안 받아줍니다. 받아주지를 않아요. 이런 율법을 지킨 인간들은 안 받아줘요. 그런 인간이 없는 걸 이미 다 뻔히 아는 상태에서 율법 지켰습니다. 받아주지를 않는다고요. 하늘나라에서는 서류 접수가 안 되는데, 밑에서는 서류 백통해서 들이미는 거예요. 억지를 쓰고 있는 거예요. 억지를. 누가? 교회가. 교회 안 받아줘요. 이런 식으로 받아주지를 않는다니까요.
율법을 이겼고, 마귀를 이겼고, 그 다음에 죄를 이기지요. 왜냐하면 죄라는 것은 율법을 이겼기 때문에 죄는 새롭게 개정됩니다. 뭐냐 하면 주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죄가 돼요. 주님에 대한 사랑이 없으면 죄가 되는 거예요. 주님을 사랑하게 되면 그건 죄가 없는 게 돼요. 그 다음에 죽음을 이기는 거예요. 죄를 이기고, 죽음을 이기고, 율법을 이기고, 마귀를 이기고, 이 4가지를 다 이기는 겁니다.
이기게 되면 여기서는 이긴 나가 아니에요. 이긴 나가 아니라, 이기신 분의 예속이 되고 이기신 분의 신부가 됩니다. 창세기2장에서 신부라 하는 것은 첫 번째 등장하는 존재가 아니에요. 두 번째 등장하는 존재가 신부입니다. 여자에요. 왜? 먼저 누가 등장했느냐, 남편이 먼저 등장하고, 그 다음에 여자가 등장하거든요. 그러니 이건 남자 없는 여자는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는 거예요. 그래서 여자가 좀 유리하다고 할 수 있지요. 왜냐하면 여자로 태어났으면 나를 찾는 남자 있을 건데. 생각할 여유는 있지만, 남자로 태어나면 본인이 최고가 되어가지고 자기 혼자 완전 자가 되어버려요. 완전 자.
여성은 미흡 자가 되고 남편감을 찾는데, 남자는 자기가 첫 번째 퍼스트기 때문에 스스로 완전체라고 여기는 겁니다. 그게 문제라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밑에서 십자가로 올라가면서 이 능력, 이 율법을 이기고, 마귀를 이기고, 죄를 이기고, 죽음을 이긴 이것을 죽음을 이겼으니까 부활될 거 아닙니까. 이것을 주님께서는 주시는 겁니다.
주실 때, 이미 그 주심으로서 열매가 있는 게, 아까 30배, 60배, 100배 열매를 맺는 거예요. 열매는 나는 이겼다가 아니라 주와 함께 산다. 신랑, 신부 함께 산다. 이게 뭐냐 하면 성전이에요. 성전. 하나님이 같이 기거하는 거예요. 혼자 사시는 게 아니고, 인간과 더불어 사는 거예요. 그래서 요한계시록에 보면 하나님 계신 곳에 하나님 안 계셔요. 그룹이 있고 4존재 그룹이 있고 그 앞에 보면 24장로들이 있어요. 이건 하나님이 하늘나라라는 것은 하나님 혼자 사는 동네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자기 백성들과 함께 있다. 4자로 임마누엘. 하나님이 함께 있는 요소가 예수라는 이름 안에 그 기능, 하나님 하실 기능이 이미 거기에 함축되어 있는 거예요. 임마누엘. 임마누엘이 없는 것은 그건 하나님이 아닙니다. 부채표가 없는 것은 활명수 아닌 것처럼. 임마누엘 기능을 하는 거예요. 하나님 혼자 사시는 게 아니고 자기 백성을 다 모으는 기능이 없는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니에요. 인간보고 오라고 할 수가 없어요. 인간은 여기에 완전히 마귀에 포로 잡혔기 때문에 안 되잖아요. 그러니 그걸 끄집어내시는 작업을 하시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신약에 먼저 제가 성전이라는 것은 신약적 개념을 먼저 말씀드리는 것은 학개나 스가랴에서는 그 중간, 그 이전에 신약 오기 이전에 마지막에 뭐냐 하면 이스라엘이 자기 고향으로 돌아와서 해야 될 기능이 무엇인가를 알려드리기 위해서 하는 겁니다. 그게 뭐냐, 성전 지어라. 만들어라. 너그 오랜만에 오니까 좋지. 응? 살기 편하지. 주인도 없고 모든 게 니 땅이라 좋지. 그러나 다시 옛날로 돌아갈 수는 없다. 성전 지어라. 라고 촉구하는 겁니다.
그러면 스가랴 1장과 2장을 보게 되면 1장에 보면 측량하는 사람이 있으며, 1장 8절, 9절에 화석류 나무에 천사들이 있지요. 이 사람들이 뭐하느냐 2장2절에 보면 “네가 어디로 가느냐 물은즉 그가 내게 대답하되 예루살렘을 측량하여 그 너비와 길이를 보고자 하노라 하고 말할 때에 내게 말하는 천사가 나가고 다른 천사가 나와서 그를 맞으며” 이렇게 되어있지요. 측량을 한다는 것은 이미 설계도 나왔다는 뜻이에요.
이 천사는 뭐냐, 설계사무소 직원이에요. 측량하러 왔어요. 다림질을 할 때에 이 바닥에다가 집 지을 때 먹줄을 하잖아요. 먹물로 이렇게 줄을 튕기면서 먹물을 깔고 다 그렇게 하는데 뒤에 보면 그게 죽 3장, 4장에 죽 보면 계속해서 성전 측량하는 겁니다. 그렇게 하게도 되고, 그리고 스가랴1장 18절에 뿔이 보이지요. 뿔 같은 이건 뭐냐 하면, 그동안 이스라엘과 유다를 아주 작살냈던, 박살냈던 이방민족이에요.
그래서 이 뿔들이 이리 보이는데 그 뿔들이 바로 대장장이거든요. 그 대장장이가 나타나가지고 이스라엘을 쳤던 그 뿔, 네 민족들을 대장장이가 박살을 내버립니다. 21절에 보면. 스가랴가 그러한 계시를 받아요. 이건 뭘 의미하느냐 하면 성전 지을 때, 그냥 짓지 않고 박살낼 걸 박살내는 과정과 함께 성전을 짓는 겁니다. 부술 걸 부수고 세울 건 세우는 거예요.
우리의 육체는 어떻게 세워야 됩니까? 박살나야 합니까? 우리의 흙에 속한 것은. 박살내야 되는 거예요. 우리 몸이 늙어 죽는 것은, 코로나 걸리는 것은 당연한 거예요. 절차상 당연한 겁니다. 손에 있는 것을 놔야 손에 뭐를 주실 게 아니겠습니까. 우리 자신이 우리 자신 것을 못 놓는 이유는 아까도 말했지만, 이게 자기 의로움 여기에 길들여서 그래요. 자기 잘남에 길들여져서 이걸 놓으려하니까 그동안 공들인 게 아까워도 너무 아까워요.
시험 친다 해가지고 밤샘했는데 그 다음날 시험하니까 요번 시험 없다. 공부한 사람은 손해 아니냐 이리 되겠지요. 주의 뜻은 뭐냐 하면 이겁니다. 니가 공부한 의도가 뭐냐, 그걸 문제 삼는 거예요. “왜 공부를 했느냐, 누구 좋으라고 공부했느냐?” “하나님과 합류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니가 박살나야 돼! 그게 마귀 생각이야. 하나님의 합류는 니 공부해서 훌륭한 사람이 되어서 합류하는 게 아니야.” 그게 박살나야 되는 거예요.
그게 박살내기 힘든 거예요. 그런데 이제 바사나라, 애굽나라, 바벨론, 앗수르, 이 네 뿔을 박살내는 이유가 그 나라를 얼마나 흠모하고 사모했거든요. ‘아~ 우리는 미국처럼 언제나 잘 사나?’ 자꾸 이 세상에 남하고 비교하면서 내 신세 저주하고 다른 가정 있잖아요. 특히 길거리에 파리바게트가 보통 길거리에 네거리에 모퉁이에 많이 있잖아요. 빠리바게트 이름이 빠리 거든요. 빠리 풍내고. 빠리바게트하는 그런 가정에 크리스마스이브 때 케익 만들어 식구 애들 둘하고. 둘이라도 딸 둘이 아니고 아들, 딸 하나 진짜 멋진 조화를 이루면서 하하 웃을 때.
그 장면을 보면 성냥팔이 소녀가 그 모습을 보고 얼마나 행복했을까요. 그 모습을 보고. 왜 아버지, 어머니는 일찍 돌아가셔가지고 나는 왜 저런 행복을 못 보느냐, 그게 뭐냐 아직도 여전히 자아가 살아있다는 겁니다. 자아가 있는 거예요. 하나님이 나를 위한 하나님이 되어버렸어요.
하나님 앞에 내가 흡수가 되어야 될 텐데 하나님 보고 내 소원을 들어주라고 이리 나오니까. 이게 발달된 게 기독교라는 종교가 그렇게 발달된 거예요. 나라 걱정해가지고 그렇게 광화문에서 데모한다. 나라 걱정해서. 그런데 예수님께서 분명히 십자가에서 했거든요. 여기 있는 나라는 내 나라아니다. 이 대한민국은 니 소속이 아니야. 너는 하나님 소속이야. 그렇게 이야기했건만 왜 그렇게 대한민국에 대해서 그렇게 미련을 갖는지. 소속이 어디인지 수상해요.
우리는 하늘나라 소속인데 눈에 보이지 않는 나라의 소속인데 눈에 보이는 나라를 위해서 순교까지 하겠다고 나서니 보통 문제 아니지요. 그것은 자기 자신의 안위적인 사고방식이 여전히 작동하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벌어지는 겁니다.
여러분이 이제 다 아시다시피 결국은 스가랴1장,2장 내용은 뭐냐, 성전 지어라. 성전. 성전을 짓는데 2장6절에 보면 성전을 짓게 되면 그 다음에 어떻게 되느냐 하면 내가 흩어졌지만 이제는 너희를 바벨론 성에 거하는 시온아 이제는 거기서 나오라. 바벨론에서 나와 가지고 너희를 노략한 열국으로부터 영광을 위해서 나를 보내셨나니 무릇 너희를 범하는 자는 그의 눈동자를 범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너희들은 너희 위치는 뭐냐, 내 눈동자에 있는 위치에 내가 너희들을 쏙 집어넣을 거야. 내가 불러온 백성은 나의 눈동자에 있는 그 지점에 합류케 할 것이다. 너를 건드리면 내 눈동자를 건드리는 것이기 때문에 내가 가만두지 않겠다.
그렇게 하나님께서는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10절에 보면 시온의 딸아! 시온의 딸이지요. 남자, 여자 관계없이 모든 것은 하나님이 남편이 되는 이상은 성별은 남편이 정하는 것이지 우리가 정하는 게 아닙니다. 남자, 여자 해도 나중에 갱년기에 호르몬 다 없어지면 남자인지 여자인지 구분이 안돼요. 전부다 흙이 되기 때문에 반짝할 때 여자지 나머지는 전부 다 그냥 사람이지요. 흙이지요. 그걸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아담의 형상이라고 해요. 아담의 형상은 결국 흙으로 환원됩니다. 찍어 발라봐야 소용없어요. 나중에는 찍는 화장품도 뚝뚝 막 떨어져요. 안 받아가지고.
그래서 여기 2장12절에 “여호와께서 장차 유다를 거룩한 땅에서 자기 소유를 삼으시고 다시 예루살렘을 택하시리니” 자, 예루살렘을 택한다 했는데, 예루살렘에 뭐가 있었습니까? 성전 있었지요. 성전이 있었던 거예요. 조금 더 설명을 하고 3장 넘어가겠습니다.
자, 성전이 있다는 것은 약속이 있는데 약속은 무슨 약속이냐 하면 다윗언약입니다. 다윗언약. 다윗언약은 성전 짓기에요. 성전 짓기와 관련되어있습니다. 다윗언약의 성전 짓기는 어떤 뜻이냐 하면 다윗의 혈통 속에 내가 거하겠다. 다윗의 혈통 속에 내가 거하겠다.
이리 되면 혈통이 두 가지 돼요. 하나는 뭐냐 아담의 혈통이 있고, 또 하나는 뭐냐 하면 하나님의 혈통, 다른 말로 하면 예수님의 혈통이지요. 여러분이 예수님의 혈통을 잘 알기 때문에 이름을 바꾸겠습니다. 하나님의 혈통. 더 멋지지 않습니까. 우리가 감히 하나님의 혈통을 이어받다니. 경주이씨 혈통 같으면 이건 쨉이 안되지요. 하나님의 혈통이다 말이죠. 신의 혈통이에요. 얼마나 대단합니까.
그런데 이 신의 혈통, 하나님의 혈통은 아담의 혈통을 여기다가 후벼 파야 돼요. 이게 아파요. 아담의 혈통을 끊어줘야 돼요. 아담의 혈통을. 그러면 아담의 혈통을 끊어주게 되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 요번 수련회에서 잘 아시겠지만. 아담의 혈통 노선이 있고, 이쪽에는 뭐냐 신의 혈통, 야~ 멋있네요.
신의 혈통을 올라가게 되면 이쪽에서 올라가는 방법은 뭐냐 아담의 혈통에서 죽어야 돼요. 아담의 혈통이 죽어야 신의 혈통에 올라가는 겁니다. 솔로몬이 재판하는 가운데서 두 아줌마가 있었지요. 애를 둘 다 동시에 낳았는데 밤에 자다가 뚱뚱했는지 애 하나가 죽고 나중에 결과적으로 못된 여자 애가 죽고 착한 여자 애가 있으니까 못된 여자가 자기애를 바꿔치기 해서 집어넣었습니다.
자, 그럴 때 이 착한 아줌마가 어떻게 자기애를 찾았습니까. 그것은 자기 아들을 포기했을 때입니다. 내 아들을 포기했을 때. 나를 포기하면 돼요. 아담이라는 내 혈통 자체에서 내가 빈 공터가 되면 돼요. 빈자리. 나의 자리가 빈자리가 되면 돼요. 이걸 죽게 만들어버리는 거예요. 죽는다고 해서 숨 끊어지는 게 아니고, 교체가 되어버리면 죽어요. 이제는 내 이름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주의 이름으로 살게 돼요. 내가 하는 일은 모든 것이 주의 일이 되는 겁니다. 대구강의에서 제가 그렇게 분명히 이야기했어요. 다 주의 일이 돼요.
주의 일이 아닌 게 없어요. 코로나 걸리는 것도 주의 일이니까 거기서 뭐 벌벌 떨고 하지 마세요. 어차피 죽은 자가 한 번 더 죽는다 해가지고 아쉬운 게 없잖아요. 어차피 이미 십자가로 임할 때, 십자가와 그리스도와 같이 동침했고, 같이 합해서 사랑이라는 게 동침이라는 뜻이거든요. 십자가에 사랑한다는 것은 같이 주님과 함께 껴안는 거예요. 물귀신 작전이라 하는데 같이 껴안고 죽었기 때문에 이미 하나님에 의해서 우리는 이미 함께 죽었기 때문에 신종코로나19가지고 죽는다 하는 것은 정말 신종코로나 걸렸다는 말은 무슨 죽음을 확인하느냐 하면 이미 내가 죽었음을 확인하는 거예요.
제가 왼쪽 이빨이 아파가지고 임플란트 처음에 할 때 아파가지고 너무 아프니까 ‘이건 뭐 이빨 뽑다가 죽겠다.’ 라고 생각하다가 0.2초도 안 걸려가지고 ‘참, 죽은 놈이 이빨 뽑는데 내가 왜 이렇게 신경을 쓰지.’ 십자가와 그리스도 죽을 때 함께 죽었다는 게 로마서 6장2절, 3절에 나오잖아요. 그게 세례 아닙니까. 성령 세례. 성령이 옴으로서 우리에게 그걸 네가 이런 입장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확인시켜 주는 게 성령이거든요.
주의 십자가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를 추후에 성령이 와서 우리에게 추후 통보를 해주는 거예요. 너는 이미 십자가에 죽은 몸이야. 그게 성령 받았다 말이죠. 죽은 자인데 곱게 죽이지 왜 뽑아서 아프게 죽이냐 말이죠. 그럴 때 생각나는 것이 주님은 더 아팠어. 니는 니 죄 때문에 아프지만, 주님은 죄도 없는 니 죄 때문에 니보다 더 아팠어. 아파봐야 죽기보다 더 하겠느냐. 그냥 죽었다 치고 견뎌라. 어쨌든 견뎠습니다. 뽑았는데. 앞으로 이뿐만이 아니고요, 육체적인 아픔뿐만 아니고 가족의 이별, 애가 죽는다든지 부모가 죽는다든지 또는 남편이 부도가 난 뒤에 모든 아픔이 왔을 거예요.
그건 왜냐 하면 바로 그 씨 뿌리는 비유에서 악마가 말씀을 가져가는 것도 경험해야 되고, 내가 복음을 몰랐으면 저 잘 먹고 잘사는 삼성그룹하고 똑같이 되지 않겠느냐, 저게 얼마나 불행한 일이냐 말이에요. 부자가 지옥 가는 것도 모르고. 집에 생수가 쟁여놔도 지옥에는 물 한 방울도 아쉬운 것도 모르잖아요. 코앞에 있는 것도 모른다고요. 언제 죽을지 모르기 때문에 코앞이라고 표현한 겁니다. 사람은 언제 죽을지 모르기 때문에.
복음이 없다면 아~~ 정말 보통 문제 아니잖아요. 그런 것을 경험케 하는 거예요. 그리고 고난, 무슨 수로 이깁니까. 고난 못 이겨요. 그런데 이기고 복음이 나에게 도달해 있잖아요. 그리고 세상의 유혹을 무슨 수로 이깁니까. 그런데 그걸 뚫고 가시덤불을 뚫고 복음이 찾아왔잖아요. 그러한 고마움을 겪기 위해서 우리는 수시로 말씀이 사라지고, 고난을 당하고, 세상의 유혹을 당하는 일들이 되풀이해서 반복해서 계속 우리 신세에 벌어지고 있는 겁니다.
따라서 스가랴1장, 2장에서 뭐냐 하면 이스라엘로 하여금 당하게 하는 거예요. 약속의 땅에서 좋다고 하는 걸 도리어 바벨론에 처참하게 망가지게 하는 거예요. 하고 다시 돌아오면서 정신 똑바로 차려! 너의 행복을 위해서 약속의 땅이 있는 게 아니고 하나님과 여기에 같이 사는 백성 되기 위해서 애초부터 애굽에서 불러내어서 이제야 정신 차렸느냐. 성전 지어. 그래서 학개서 1장, 2장이 있는 겁니다. 스가랴에도 마찬가지고, 예레미야도, 느헤미야도 마찬가지고요. 이래야 이제 신약과 연결됩니다.
자, 오늘 본문 3장 들어가 봅시다. 3장에 들어가 보면 여기서 여호수아 나오지요. 여호수아가 제사장입니다. 여기에 1장에 보면 여호수아가 섰고, 그 다음에 누가 나옵니까? 사탄, 악마가 나오지요. 악마가 지금 무슨 짓을 하느냐 하면 여호수아보고 여호수아가 더러운 옷을 입었다고 지금 고자질하는 거예요. 사탄이. 여러분, 사탄이 하는 일은 빈틈이 없어요. 백점 만점에 백점이에요. 다 아는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안 한 짓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고 다 아는 일을 고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사탄의 일을 책망하는 것은 하나님이 사탄을 책망한다고 우리가 사탄을 책망할 수 없어요. 왜? 우리가 한 짓을 그대로 이야기하기 때문에 우리가 책망할 건덕지가 없어요. 본대로 들은 대로 CCTV찍힌 대로 다 이야기하니까. 우리가 사탄에게 할 수가 없어요.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사탄이 있고, 여호수아만 있으면 문제 해결 안 됩니다. 이스라엘은 사탄에게 당해야 돼요. 이스라엘도 유다도 지옥가야 됩니다. 그런데 제3의 분이 계시지요. 누굽니까? 여호와 하나님께서 계셔요.
책망을 해도 누가 책망을 해야 돼요? 여호와 하나님이 책망해야 돼요. 그러면 우리 생각에는 그럼 사탄보고 책망하지 말라고 하지. 아니에요. 우리가 먼저 사탄을 악마를 겪어야 돼요. 그래야 우리 주제파악이 되지요. ‘아, 우리가 마귀한테 이길 수가 없구나!’ 정확하게 우리를 고소하거든요. 정확하게. 특별검사거든요. 눈치 안보고. 권력에 휘둘리지 않고 정확하게 우리를 정죄하는 기능.
이 사탄이 없으면 이 악마가 없으면 우리는 마치 구원될 자격이 있는 것처럼 그렇게 곡해할 수밖에 없어요. 사탄이 없으면. 뭐 이 정도 조심스럽게 인생 살았으니까 하나님은 봐줘야 되지 않겠나. 엉뚱한 소리를 하게 돼요. 사탄은 그걸 용납하지 않아요. 지금은 50%는 더럽지만, 나중에는 95%는 깨끗하다. 이런 식으로 나온다고요. 천국에는 흠도 티도 없어야 돼요. 깨끗한 자만 들어갈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 작업을 위해서 사탄은 항상 이 세상에 활동들을 해줘야 되고 끝까지 하나님 앞에 가서 우리를 고소하는 자로 있어야 돼요. 그러니 고소하는 자를 우리가 죽이면 안 됩니다. 사탄 니 죽여 버리겠다. 이러면 안돼요. 오히려 우리가 죽을 자에요.
사탄은 우리의 잘못을 이야기한 것들을 책망하는 것이 아니고 사탄은 뭘 모르느냐 하면요, 하나님께서 바로 이스라엘 택한 백성 편이라는 것에 대해서 지금 사탄은 시기하고 있는 겁니다. 이게 사탄이 지옥 갈 이유에요. 공정하지 못하다는 거예요. 불공평하다는 거예요.
오늘 제목은 가 제목은 “불공평을 이기세요.” “부당함을 수용하세요.” 내가 부당하게 인생을 현재 세월 보내고 있음을 본인이 인정하세요. 내가 사는 게 정당하지 않고 부당하다는 것을 인정하세요. 그래야 사탄을 이깁니다. 자기 의가 있으면 안돼요. 자기 의가 있으면 힘들어져요. 우리가. 자기 의가 있으면 진짜 김 수희 말대로 너무합니다. 너무합니다. 어떻게 날 괴롭혀도 이렇게 괴롭히십니까. 이리돼요.
우리가 이 땅에 사는 것은 악마의 부당거래에요. 자칫하면 금융감독원에서 올 수 있겠어요. 이 부당거래. 이건 지금 제대로 살 수 있는 권한이 없어요. 부정하게 사는 거예요. 부당하게 사는 겁니다. 왜? 우리가 악마와 한패이기 때문에. 그저 우리는 악마한테 쉿! 입 다물어라. 맨날 이 짓만 하고 있는 거예요. 주께서 다 아십니다.
다 아시고 그 더러운 옷을 입은 채로 이스라엘아! 유다야! 그냥 와! 그냥 와! 바벨론에 잡힐 만한 이것을 인정하지. 그냥 와! 불러내고 주께서는 신랑이 되셔서 어떻게 처리합니다. 어떻게 처리하는 것은 둘째시간에 합시다. 10분 쉬고.
안양20200910b슥3장2절(성전과 제사장)-이 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하겠습니다. 두 번째 시간에서 여기에 3장에 보면 사단 나오는데, 사단이 고소를 하고 여호수아가 여기 서있을 때, 이게 왜 중요하냐 하면 이제 더는 다른 약속이 없어요. 끝났어요. 약속이 마지막 최종에 도달했습니다. 마지막 최종 약속은 여호와께서 마지막으로 일방적으로 한쪽을 몰아버렸습니다. 일방적으로 편을 해버릴 때 끝났어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구원받았다는 느낌은 뭐냐 하면, 최종 약속을 받을 때 구원받은 겁니다. 뭐냐 하면 ‘편애’에요. 편애. 야, 이 제목 또 바뀌어야 한다.
부당한 사랑을 받을 때 더는 남아있는 약속은 없어요. 왜냐하면 다 사태를 알아요. 이 옷이 더러운 것을 알아요. 악마의 말이 하나도 틀린 말 없는 거 알아요. 아는데, 최종적으로 뭐냐 하면 사탄보고 내가 최종적으로 옷을 벗기고 다른 옷을 입혀라. 저는 이것을 예수님의 티셔츠라 합니다. 티셔츠. 예수님의 옷을 입는 거예요. 갈라디아서3장에 나옵니다. 세례 받은 사람은 남자, 여자 관계없이 전부다 뭘 입었다? 옷을 입는 거예요.
여러분들이 이제 오늘 교재 하는 걸 봐야 될 채비가 왔는데, 제사장이 훌륭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옷값 하는 사람이에요. 옷값. 옷값을 하기 위해서 옷이 주가 돼요. 옷값이 옷값 하라고 몸통이 들어가는 거예요. 그 옷을 가지고 제사장 옷을 언약을 모세언약이라 하거든요. 출애굽기에 보면 제사장 복장이 아주 막 상세하게 나와 있습니다. 이 말은 뭐냐 누가 이 옷에 합당한 몸을 갖추느냐 하나님께서는 그걸 계획 잡고 니가 와서 한 번 입어봐라. 아니다. 너 입어봐라. 너도 아니야. 죽어버리지요. 또 너도 아니야. 마지막 히브리서에 보면 마지막에 하나님 자신이 그 옷을 입어버리면 이게 최종 마감이에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옷을 입기 전에 여기 스가랴 말씀처럼 그냥 하나님께서 옷을 입은 게 아니고 더러운 옷이라는 것을 입게 더러운 이스라엘의 제사장들을 쭈욱 자기보다 먼저 밑에 깔아놨어요. 그러니 주님의 티셔츠를 입은 사람들이 계속 나오는 겁니다. 여호수아가 주님의 티셔츠를 입었다고 보면 됩니다. 예수님의 티셔츠.
노래 나오기 전에 먼저 다른 가수가 노래 부르는 거 있지요. 커버송이라 하는가 이렇게 정식 가수 말고 이 노래가 어떤 노래이고 인기 있겠는가 알기 위해서 미리 인기 없는 가수보고 한 번 불러보라고 하는 게 있어요. 견본으로 불러보는 거예요. 견본. 바로 견본이거든요. 이 구약에 있는 제사장이 전부 다 견본인데, 견본의 끝은 뭐냐 예수 그리스도와 닿게 되어있어요.
자, 교재 한번 봅시다. 족보인데. 레위지파가 나와요. 아까부터 강의 계속 강조하는데. 레위지파 하는 일은 뭐냐 하면 농사짓는 일이 아니에요. 고기 잡는 게 아닙니다. 고기 잡을 일은 없지만. 그 사람들은 뭐하느냐 옆에 네모 난 거. 레위 해놓고. 네모난 거. 성막이에요. 이게 뭐냐 하면 성막이에요. 성막, 성소. 성막, 성소는 거기에서 지성소에서는 누굴 만나는 장소입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 아~~ 이건 뭐 정말 창조주가 피조물과 만나는 장소에요. 창조주가. 인간이란 피조물. 천사는 하나님과 늘 만나지만.
인간이란 피조물은 그것도 지상에서 역사적으로 구체적으로 만나는 것을 다른 민족이 아닌 이스라엘 민족 내에 그것을 만들어놨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자부심은 자존심이라 하는 것은 대단한 겁니다. 너희들이 하나님 만나봤어? 이리 나온 거예요. 너희는 기껏 인간과 인간이 만났지? 징기스칸? 단군? 누구 만났어요? 하나님하고 안 만났지요. 하나님 만난 것은 이스라엘입니다.
하나님께서 시내산 위에 모세를 불러 세워서 성막에 대한 모든 설계도를 그의 머리속에 기억해 했습니다. 그러면 모세와 하나님의 만남이 성사가 된 거죠. 요 성사되는 조건이 뭐냐 율법대로 언약대로 될 경우에만 모세와 하나님이 만나듯이 그렇게 만나주는 겁니다. 만나주는 거예요.
그러나 아직까지 율법시대기 때문에 예수님의 티셔츠는 입었지만 예수님의 몸까지는 아직 안됐어요. 신약에 와서 되니까. 그 율법이란 몸을 걸치고 내려오게 되면 벌써 여기서 예수님의 티셔츠는 벌써 더러워지기 시작합니다. 더러워진 게 아니고 모세가 아주 티셔츠를 찢어버렸지요. 산 밑에서 우상 숭배하는 것을 보고 어떻게 하나님의 율법에서 지금 그냥 하면 너희는 다 죽어. 하고 죽기 전에 먼저 하나님의 계명부터 옷부터 벗은 셈이 되지요.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은 만나면 심판이기 때문에 그걸 사전에 예방한 거예요. 모세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만났듯이 모든 모세 따라 왔던 이스라엘 백성들, 애굽에서 나왔던 그 백성들도 그렇게 만나기를 원할 때에 하나님께서 특정 지정 장소를 만들었어요. 크기가 45m, 22.5m 동쪽, 서쪽, 북쪽, 남쪽, 요런 크기에요. 천막 쳐놓고 방을 두 개 쪼갭니다. 야전 사령부들이 주로 이래요. 안에는 침실, 대장 침실이 있고, 쪼개가지고 여기에 지성소, 우리 하나님 계시는 침실이 있고, 여기는 그냥 들어가면 안 되죠. 거룩한 분이라. 아련하기 위해서 여기서 코로나 방지하기 위해서 손을 소독하는 것처럼. 정화 작업할 수 있는 장치들이 있고, 여기는 제단이 있어가지고 정화할 때 나올 때는 그냥 우리는 소독제로 하지만, 여기서는 뭐로 하느냐 하면 피로해야 돼요. 피.
그러니까 제물을 잡아버리면 제물은 죽었지요. 죽고 난 뒤에 죽었다는 표시가 피를 흘리잖아요. 피와 기름이잖아요. 피와 기름을 해가지고 “저, 죽은 자 맞습니다. 죽었어요.” 하고 죽음을 몸에다가 바르고 난 뒤에 죽었으니까 이미 한 번 죽었으니까 또 죽을 일은 없으니까 죽음을 바르고 제사장들이 여기까지 들어가는 거예요. 이게 하나님 면접하는 순서에요. 절차에요. 죽지 아니하면 못 만나는 겁니다.
죽지 아니하면 못 만나요. 얼마나 하나님이 거룩한지 몰라요. 그래서 살아서 눈뜨고 하나님 만난다는 것은 이건 오만입니다. 그럴 수는 없어요. 이 모든 작업이 하나님의 마지막 더는 주지 않는 마지막 약속, 최종 마감 약속의 취지를 보여주기 위해서 이렇게 하신 거예요. 취지를.
더러운 것들은 오라. 다만 내 백성이잖아. 더럽던 어떻든 간에 내 백성이잖아. 내 백성이라면 더러워도 할 수 없어요. 내가 알 수 있으니까. 더러운 옷을 입은 인간들아 오라. 이 제단을 통해서, 이 피를 통해서 더러운 죄가 뭐로 바뀌지요? 하나님의 의로 바뀌는 거예요. 의로.
여러분, 이 두 가지를 구분하세요. 죄에서 무죄가 되는 겁니까? 죄에서 적극적으로 의가 되는 겁니까? 어느 쪽입니까? 죄가 무죄가 되는 것은 인간들의 생각에 한계에요. 죄 지었지만 없애주세요. 요게 인간들의 생각이에요. 그러나 인간들의 생각은 여기까지는 나갔는데 모든 종교가 이건 안돼요. 죄가 뭐가 된다? 적극적으로 긍정적으로 죄가 의가 된다는 이건 너무 황당한 거예요. 아니 내가 한 것이 의가 된다는 겁니까? 그래. 너무 놀라서 입을 다물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선지자의 요건 중의 하나가, 선지자의 요건은 계시 줄 때만 입을 열어라. 평소에 입 다물라. 그겁니다. 그냥 주저리 주저리 이야기하지 말고 함부로 입을 놀리지 말라 말이지요. 왜? 너무 엄청난 내용이 나오기 때문에. 죄인데 하나님 믿으면 죄 없어집니다. 이 정도 같으면 말을 해도 돼요. 그런데 죄가 의가 될 때에는 이건 인간의 모든 생각을 초과해버리지요. 성령 안 받으면 감당 못합니다. 너무 큰 것이라 감당 못해요. 너무 큰 것.
그 말썽꾸러기 아들이 돈 만원만. 친구와 술 먹는데 만원만 필요해. 이너무 자식이! 해가지고 대번에 방에 가가지고 몽둥이 들고 나올 줄 알았지. 방에 들어 가가지고 오만원짜리 다발을 이만큼 해가지고 오만원짜리 다발을 끄집어내가지고 귀싸대기 가지고 가! 가지고 가! 한 번 때릴 때마다 이백만원짜리. 가지고 가. 다가지고 가! 2억5천. 자기는 돈 만원 달라고 했는데 받은 것은 2억5천 받았어. 황당해도 너무 황당한 거예요. 인간의 윤리적 이성으로서는 도저히 상상이 안돼요. 너무 커서.
어떻게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넘칩니까. 이게 말이 됩니까. 죄가 있는 곳에 은혜가 넘친다. 하나님의 의가 왕 노릇하고 있는 거예요. 의가 의되기 위해서 죄 짓게 했다 이 논리거든요. 결국은. 그것도 내가 의도적으로. 안 짓고자 도망쳐도 죄 짓게 만들었다 이 말 아닙니까. 그러니까 니 일 없고 주의 일밖에 없지요. 이게 너무나 엄청난 거예요.
그래서 이러한 죄가 의되는 이 공식에 의해서는 뭐가 없어야 되느냐 하면 우리에게는 어떤 희망과 기대는 어줍짢게 갖고 있으면 안돼요. 이걸 없애야 돼요. 만약에 희망과 기대를 갖게 되면 이게 바로 죄가 되는 겁니다. 희망과 기대를 갖는다는 것은 내 생각의 범위 안에서만 하나님을 이해하겠다는 그 생각밖에 안되거든요. 아직까지 내 생각만 하고 있다는 것밖에 안돼요. 희망을 갖는 게 범죄입니다.
따지고 보면 그 말이 맞아요. 모든 범죄는 희망 때문에 생겼어요. 이 세상의 모든 범죄가 희망 때문에 기대 때문에 있는 거예요. 주신 것에 감사합니다. 먹는 거, 입는 것으로 족합니다. 이러면 범죄 안 생겨요. 코로나 재난기금 그걸로 감사합니다. 이리 되는 거예요. 자영업자 한 달 가게세가 한 이백만원 나가는데 나라에서 자영업자한테 여러분들의 짐을 덜어드리겠습니다. 십 만원 드리겠습니다. 실제에요. 실제. 고맙습니다. 이리 되어야 돼요. 적어도 1,990,000원 이리 되면 안돼요. 고맙습니다. 이리 되어야 돼요.
바로 이것을 저는 이렇게 표현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보낸 택배가 왔는데 택배를 보니까 아무것도 안 들었어요. 막상 드니까 너무 무거워요. 아무것도 안 들었는데 우리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너무 무거워요. 이게 최종 약속이 그래요. 이게 예수님이 하신 일이기 때문에 우리한테는 너무 무겁게 우리가 내가 감당하기에 무거운 거예요. 그러면 감당 안하고 눌리면 돼요. 끼이면 돼요. 거기에 끼어버리면 되는 거예요. 성도의 삶은 희망이나 기대 이것이 좌절당하면 되는 거예요. 왜? 뭘 해도 의가 되니까.
내 평가가 아닙니다. 내 평가가 아니라 주님의 평가에 눌려 살면 되는 거예요. 수요일날 제가 그런 이야기했잖아요. 거지 나사로. 거지 나사로가 평생을 자기가 살았는데 결국은 마감이 뭐로 마감되었습니까? 거지였지요. 끝부분에 어떤 귀인이 와서 도와주고 그런 거 없습니다. 끝까지 하나님께서는 거지 나사로를 실망하지 않고 거지로 살게 하셨습니다. 어떤 기회나 일말의 희망을 싸그리 어떻게 그렇게 정확하게 끝까지 희망 없게 만들어버려요. 없어야 천국다워요. 없어야 신앙인답다니까요. 내 희망, 내 뜻 이런 게 있으면 범죄에요. 아예 나를 철저히 밟아버려야 그게 하나님의 하나님다움이에요. 예수님이 바로 그런 분이었지요. 내 뜻대로 마옵시고. 끝까지 내 뜻대로 마옵시고. 마지막 십자가까지 내 뜻대로 마옵시고. 중간에도 내 뜻대로 마옵시고. 끝까지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내 뜻이 없는 거예요.
저는 이것을 달리 표현하겠습니다. 만두 없는 만두집. 어제 골목식당에 나왔어요. 간판이 만두 없는 만두집이에요. 내가 살다 살다 이렇게 난해한 간판 처음 봤어요. 만두가 없는데 어떻게 만두집이 될 수 있느냐. 이게 복음이냐. 고객 입장에서는 납득이 안돼요. 뭔가 사연이 있을 거 같아요. 그러나 그 사연은 만두집 빼고는 그 사연은 백종원도 몰라요. 왜 만두가 없는데 만두집이냐. 나중에 사연을 들어보니까 정말 별게 아니었어요. 간판을 안 바꿔서 그래요. 옛날에는 만두집을 했는데 이제는 만두를 안 하기 때문에 간판 바꾸려고 하니까 돈 드니까 만두집이라고 오시는데 만두는 없습니다. 백반 집으로 바꿨어요. 그걸 보면서 주님의 하시는 일을 왜 우리는 감당을 못하느냐.
우리는 주님의 티셔츠를 입었지만, 우리의 행함 때문에 연탄재 뿌려놓은 것처럼 시커멌어요. 스스로 자기 의로 한 번 살아보려고 천국 한 번 따내보려고 자기뿐만 아니라 여러 사람 천국 보내줘 보려고 모든 노력을 다했어요. 기도, 전도, 헌금, 예배참석, 온갖 이웃사랑, 성경에서 할 수 있는 대로 다했어요. 하지만, 그들이 누구냐 이스라엘이었습니다. 유다였습니다. 그들은 바로 깡그리 그들은 약속의 땅을 비워줘야 했습니다.
자, 여기에 레위지파 나오는데. 여러분들이 실력이 있으니까 어렵게 나가겠습니다. 레위지파에서 제사장이 나올 것 같으면 이렇게 굳이 4명이 딸 하나에, 아들 3명이 필요가 없어요. 왜 간편하게 하나에서 하나, 하나에서 하나, 하나에서 하나, 이리 나오면 되잖아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레위 아들 몇 명입니까? 3명이지요. 그러면 우리는 뭐냐 하면 숫자가 세 명이니까 3이 되겠지요. 주님께서는 3을 뭐로 보느냐 하면 0으로 봐요. 아무도 레위지파의 자식은 없다, 가 되는 겁니다. 아무도 없다. 아무도 없다가 돼요. 그런데 무슨 아무도 없기는. 고 핫이 혈통을 이어받았지 않았습니까. 라고 하는데. 요게 3에서 하나가 레위지파에 되려면 여기 언약의 개입이 있어야 돼요. 언약의 개입이라 하는 것은 아까 여호와 이야기했지요. 언약은 누가 관리하고 누가 개입시킵니까? 하나님이 개입하는 거예요.
모세가 허수아비지요. 모세가 지팡이에요. 진짜는 모세 자리에 하나님이 계시고, 바깥은 모세가 되지요. 그렇지요? 그래야 모세는 시키는 대로 해서 니 혼자 가는 게 아니라 내가 함께 간다 했으니까. 함께 가면서 일을 하듯이. 레위지파도 마찬가지에요. 아브라함도 마찬가지고. 이삭도, 야곱도 마찬가지고. 하나님께서 언약을 개입시켜 버리면 3명다 이게 제로가 됩니다. 그래서 제로 = 제로 맞아요.
그런데 3이라는 숫자를 0으로 만들 때, 언약이 와서 개입을 해버려요. 그러면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레위지파의 언약을 이어받을 위인은 아무도 없음이 당연해야 되고 그게 밝혀져야 됩니다. 밝혀지고 그리고 하나님이 아무나 선택해 버려요. 선택된 자가 0에서 나온 출현된 1이 되어버리는 겁니다. 이게 바로 인간이 성도되는 방법이에요.
아무도 구원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자격이 없음을 분명히 할 때 그래서 성도는 오직 하나님의 개입과 성령의 개입으로 택하심으로 일방적으로 찍은 거예요. 착해서 성도되고 없어요. 사전에 예비단계 있어서 그런 거 없어요. 그냥 찍어버려요. 사울에게 그냥 예수님이 찾아온 것처럼. 그냥 찍어버려요. 찍어버리면 찍어버린 이 사람은 없는데서 됐잖아요. 레위인의 후손이 됐지요. 그러면 이 사람이 뭐라고 고백하겠습니까? 나는 될 만해서 됐다. 아니면 하나님의 개입을 온 몸으로 품어지겠어요? 하나님의 개입으로 온몸으로 품어지는 거예요.
그러면 다시 스가랴3장 봅시다. 대제사장 여호수아가 여호와 앞에 섰는데, 거룩하지 않습니다. 옷이 더럽지요. 더럽다는 것은 사탄이 와서 분명히 증거 해줍니다. 했을 때에 천사 앞에 섰는지라. 4절에 여호와께서 자기 앞에 선자에게 명하여 그 더러운 옷을 벗기라, 하지요. 그럼 제사장 옷을 벗어버리면 이건 제사장 아니에요.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제사장은 완전히 옷 때문에 제사장이에요. 옷 때문에. 몸에 걸친 옷 때문에 된 겁니다.
그 옷은 모세가 하나님 앞에 가서 다 배운 대로 그대로 직조해가지고 짠 거예요. 속옷부터 해서 겉옷까지 전부다 장치가 있고 여기에 여러 가지 또 훈장처럼 달린 게 많아요. 흉배와 가슴팍에 단 것도 많고요, 열 두 아들의 보석을 또 이름 새겨가지고 앞에 달고 아주 복잡해요. 그 복잡한데 그 옷을 벗겨버리면 결국 이것은 제사장이 박탈된 겁니다.
그런데 뭐라고 하느냐 하면 여호수아가 더러운 옷을 입고 섰는지라, 명하여 옷을 벗게 하시고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 다음에 뭡니까? 죄를 제하여 버렸으니 이 아름다운 옷을 입히리라. 옷을 벗기고 다시 옷을 입히는 그 절차, 그 절차가 그 현장에 있었던 누가 아느냐, 당사자인 여호수아가 그걸 알았겠어요? 몰랐겠어요? 알았겠지요. 그것도 하나님으로부터. 그게 바로 최종적인 제사장의 위상입니다. 그걸 제가 지금 앞당겨서 이야기하는 거예요.
여기에 고 핫 중에서도 아므람이 나오지요. 레위 다음에 고 핫입니다. 고 핫 다음에 아므람이에요. 아므람 다음에 뭐가 나옵니까? 여기에 모세와 아론 나오지요. 드디어 아론 딱 등장하니까, 아~ 이 아론이 대제사장의 구체적인 역할을 부여받은 최초의 인물이 아론이 되는 겁니다. 자, 아론다음에 아들이 몇 명입니까? 4명이지요. 4명 중에서 나답과 아비후는 지워버리면 돼요. 왜? 술먹고 상피우다 죽어버렸어요. 그러니까 2명 죽고 난 뒤에 누구한테 가느냐 하면 세 번째 아들 엘르아살에게 가는 겁니다. 엘르아살 가고 그 다음에 누구냐 하면 바로 비느하스 나오지요. 비느하스. 여기서 비느하스에 대해서는 제가 언급을 해야 되겠어요.
민수기25장 11절 보세요. “제사장 아론의 손자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가 내 질투심으로 질투하여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내 노를 돌이켜서 내 질투심으로 그들을 진멸하지 않게 하였도다” 제사장 아론의 손자 엘르아살의 아들 그 다음에 누굽니까? 비느하스가 나의 질투심을 질투하여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나의 노를 돌이켜서 나의 질투심으로 그들을 진멸하지 않게 했지요. 왜냐하면 두 사람을 죽였으니까.
제가 아까 강의한 거 다시 한 번 여러분이 잊어버렸으니까 회상하겠습니다. 자, 요 원리입니다. 이 원리가 정확해요. 아담의 혈통이 있잖아요. 아담의 혈통. 그다음에 여기에 이름도 참 거룩한 신의 혈통이에요. 우리가. 혈통에 갈 때, 어떻게 들어간다 했습니까? 여기서 망하던지 죽던지 이게 살점이 푹 파이듯이 완전히 내 자리가 망하던지 죽던지 같은 말입니다만. 저주받던지 심판받던지 같은 말이에요. 파여야 신의 혈통으로 들어간다 했지요. 왜냐하면 예수님이 마련한 것이 요 파인 이 부분을 거룩으로 의로 채워주기 때문에. 요 파인 부분이 무슨 이야기냐 하면 죄로 말미암아 마땅히 저주받을 요 자리가 저주 자리가 뭐로 바뀝니까? 의로 바뀌어서 의로 채워주는 거예요.
그러하기 때문에 비느하스가 하는 일이 뭐냐, 이스라엘 사람들을 이스라엘 사람이 제사장이면서 이스라엘을 죽여 버렸어요. 그런데 죽인 것에 대해서 여기 민수기25장에 보니까 하나님께서 비느하스가 한 행동을 칭찬했어요? 아니면 책망했습니까? 아주 칭찬한 거예요. 나의 질투심으로 질투하여 그렇게 했다는 거예요. 요것만 생각하시고 그 다음에 출애굽기32장을 봅시다. 귀찮더라도 이 정도는 참을 수 있어야 됩니다.
출애굽기32장 26절을 보게 되면, “이에 모세가 진 문에 서서 이르되 누구든지 여호와의 편에 있는 자는 내게로 나아오라 하매 레위 자손이 다 모여 그에게로 가는지라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렇게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각각 허리에 칼을 차고 진 이 문에서 저 문까지 왕래하며 각 사람이 그 형제를, 각 사람이 자기의 친구를, 각 사람이 자기의 이웃을 죽이라 하셨느니라 레위 자손이 모세의 말대로 행하매 이 날에 백성 중에 삼천 명 가량이 죽임을 당하니라 모세가 이르되 각 사람이 자기의 아들과 자기의 형제를 쳤으니 오늘 여호와께 헌신하게 되었느니라 그가 오늘 너희에게 복을 내리시리라”
여기서 레위지파가 형제들을 삼천 명 가량 죽인 이유가 뭡니까? 산 밑에서 모세가 부재한 상태에서 우상 숭배했기 때문에 죽인 거죠. 그래서 모세가 죽일 때에 다 죽인 게 아니고 여기서 너희들이 잘못했다는 것을 인정하라, 인정할래, 안할래, 해서 인정 못하겠다고 버티고 있는 사람 삼천 명을 죽였잖아요. 그럼 물어보겠습니다. 이 사람들은 죽은 사람이나 산 사람이나 원래 하나님이 보시기에 죽은 자입니까? 산자입니까? 하나님이 보시기에. 다 죽은 자에요. 왜냐, 언약이 없으면 다 죽은 자에요.
요즘 말로 하면 예수님의 피가 안 나오면 죽은 자에요. 바닥에 어떤 행동이나 말에 그리스도의 의가 안 나오고 자신의 의가 깔려있으면 하나님의 의가 없는 사람은 천국에 가지 못하기 때문에 이미 사망한 자에요. 이미 죽은 자라니까요. 피가 생명이거든요. 생명이 받쳐줄 때만 산자지, 피가 없으면 죽은 자라니까요.
그래서 이 사람들은 삼천 명 안 죽어도 원래부터 이 사람들은 죽은 자에요. 다만 레위지파가 그 점을 알고 그 관점을 알고 어떻게 그 형제를 죽입니까? 살았다 하면 어떻게 죽이겠어요? 죽은 놈 죽인다는 마음으로 죽인 거예요. 이미 죽은 놈. 다만 무엇을 살리기 위해서? 율법이 살아있다는 것을. 인간은 죽이고 그 과정, 절차 가운데서 율법은 살아있고. 말씀만 살아있지 너희들은 죽은 자야. 이 말은 말씀이 임해야 너희는 죽은 자가 산자가 되는 그 원리를 하나님께서 언약을 통해서 주셨어. 그 이야기하고 싶은 거예요.
“아이구, 삼천 명 심하다. 어떻게 자기 친구를 죽이냐. 형제를 죽이냐” 이렇게 할 필요 없어요. 바로 이 정신, 언약이 살아있어야 되고, 말씀이 인간보다 더 중요함이 살아있는 것을 합류한 사람이 누구라고요? 비느하스에요. 그러니까 이 대제사장 계열은 이건 뭐냐 하면 모든 이스라엘 백성은 다 죽었어요. 여기에 이스라엘 나라를 이렇게 진을 원으로 그리겠습니다. 중간에 성전 있고, 성소 있고, 성막 있겠지요. 성전, 성소. 여기에 누가 관리하느냐 하면 레위지파와 제사장들이, 제사장은 레위지파에서 나왔으니까. 레위지파가 관리하고 있지요. 그럼 여기 농사 짓는 사람들은 뭐하는 사람들입니까? 죽은 사람들이지요. 죽은 사람인데 이 사람들이 제사를 온전히 드리면 제사의 효과가 여기에 농사 짓는 열 두 지파에 사람들이 농사를 지어서 거기에 알곡이 나오고 생산물이 나오게 되는 것은 제사가 흠향하게 되면 생산물이 나오고, 제사를 제대로 못하면 생산이 안 되고, 여기에 가뭄이 들어요.
그러면 곡식 없어 죽어요. 이러나저러나 레위지파 없으면 죽은 사람들이 이스라엘이에요. 레위지파 없으면. 그러니 죽은 이스라엘을 엔진 역할을 누가 한다? 강력한 엔진으로서 레위지파가 활동하고, 레위지파 우두머리는 누굽니까? 대제사장. 대제사장이 활동을 해줘야 비로소 이스라엘은 살아있는 나라가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방나라가 돼요.
그래서 살아있다는 말은 하나님과의 동행이 여전하다. 하나님과 함께 있음이 여전하다. 누구 때문에, 대제사장의 활동 때문에. 레위지파의 활동 때문에 그런 겁니다. 그러니 이 레위지파가 보통 중요한 것이 아니지요. 지난주일 낮 설교에 레위지파 숫자 이만이천 이야기했지요. 레위지파 한 사람이 다른 사람 한 사람을 일대일로 대응해서 살린다. 대속해서 제사를 드리게 되면 제사 덕분에 산다는 겁니다.
그럼 오늘날 신약 시대에 보면 히브리서에 보면 이 대제사장이 누굽니까? 예수님 덕분에 사는 거예요. 이 관계가 의의 관계이고, 이게 바로 생명의 관계입니다. 그래서 피가 나오지 않으면 그 사람은 죽은 자에요. 산 자가 아닙니다. 이 땅에서 사람 죽였다. 지옥 갑니까? 천국 갑니까? 사람 죽였다는 것 때문에 천국 못가는 게 아니에요. 이 땅에 사람 죽이느냐, 안 죽이느냐 상관없이 그리스도의 피가 안 나오면 죽은 자에요.
그 레위지파 삼천 명 죽일 때는 죄목이 뭐였습니까? 우상숭배였지요. 민수기에서는 뭐냐 하면 이방 신을 섬기면서 간음을 했기 때문에 죽은 거예요. 이방 신을 섬기던 간음을 했던 여기에서 우상을 섬기든 죄든 어떤 죄든 간에 그 죄 안하면 산다는 게 아니고 그런 거 아니하더라도 이미 죽은 자에요. 제사장 없으면. 그 막중한 제사장하면서 나답과 아비후가 술 먹고 제단의 불이 아닌 다른 중국산 라이터 불을 했는지 불이 나와서 높은 사람이라고 봐주는 거 없어요. 그냥 나답과 아비후의 면상을 때려가지고 죽어버리고 말았어요. 두 제사장이. 어디 겁나서 일하겠습니까. 직장 정말 극한 직업이에요. 잘못하면 산채로 불에 태워죽는 직업이에요. 이 직업이.
그래서 대제사장이 지성소에 들어갈 때는요,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기 위해서는 몸에다가 방울을 달아서 딸랑 딸랑 소리 들리면 아직까지는 안 죽었구나! 방울 달고 일했어요. 얼마나 무서운지 벌벌 떨 수밖에 없지요. 제가 지난 낮 설교에 했잖아요. 방안에 있는 것과 여론 안에 있는 것이 차이난다고요. 방안에 혼자 있으면 지가 무슨 짓을 해도 괜찮지요. 그러나 여론에 들어가면 그 다음부터는, 그러나 그 보다 더 무서운 게 뭐냐 하면 주 안이에요. 주 안인데 성령을 받아야 주 안에 있지. 성령 안 받으면 여론 안이 다에요. 교회 갈까요? 말까요? 지금 여론 보고 있는 거예요.
본인이 성령이 인도하는 대로 해라. 안 오면 또 목사님이 안 온다고 할까봐. 거봐. 그게 바로 여론의 안이다. 여론 안. 왜 기름부음이 니 안에 있으면 아무도 가르칠 필요가 없는데 니가 왜 발발 떨고 있느냐 말이죠.
그 다음에 비느하스 그렇게 되어있습니다. 그리하고 그 다음에 아비수아, 북기, 웃시, 스라히야, 므라욧, 아마랴, 아히둡, 사독, 사독 이거 놓치면 안 됩니다. 사독이 제사장입니다. 그러면 대제사장에서 제사장 홀로 있을 경우에 홀로, 이것은 제사장나라에요. 제사장나라. 제사장나라에는 뭐가 필요 없느냐 하면, 왕이 필요 없습니다. 왜 제사장 위가 뭐냐, 왕이 계시기 때문에. 이 왕은 보이지 않는 왕. 여호와 하나님이 왕이에요.
그러면 다윗시대는 어떻게 되는가, 다윗시대는. 요 위에 있는 왕이 위에 계시지 않고 나란히 제사장과 이게 결합이 돼요. 제사장과 왕이 결합이 된다고요. 요게 무슨 약속이냐 하면, 이게 바로 다윗에게 준 약속, 다윗언약입니다. 다윗언약. 언약은 뭐냐, 왕이 제사장 되는 것. 또는 다른 말론 제사장이 왕 되는 것. 베드로전서에 보면 왕 같은 제사장. 제사장 같은 왕. 왕과 제사장이 결합이 되는 이것이 요 약속을 다윗언약에서 하는 겁니다. 다윗언약에서. 다윗언약에서 한다는 말은 하나님의 스케줄이에요.
자, 그러면 이 제사장 이것은 왕이 오려면 제사장으로 온전했다면 왕이 굳이 제사장하고 결합될 권리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제사장이 온전했다면. 안 되지요. 그런데 사무엘상보면 제사장 계열에 보면 엘리 제사장 나와요. 이게 개판이라. 그래서 아무 나라에 맥을 못 춰요. 블레셋하고 전쟁할 때에 엘리 제사장의 두 아들이 있었지요. 홉니와 비느하스가 전사합니다. 말이 전사지 까불다가 죽었지요. 엘리제사장이 결국은 나중에 목이 뒤에 넘어가 죽어요. 비참하게 죽는다고요. 완전히 괴기영화처럼 죽었어요. 자기는 오래 살긴 살았지만, 비둔해서 죽었어요.
그러니 제사장 자체가 이렇게 이방나라에 힘을 못 쓰니까 백성들이 뭘 하느냐 하면 “아, 제사장 때려치우고 왕 달라” 고 했습니다. 왕 달라고 할 때에 백성들이 여호와의 왕보다도 이방나라처럼 눈에 제사장 같이 사람 모습으로 등장한 우리도 사람에서 뽑은 우리 중에서 뽑은 왕이 되기를 원했을 때에 하나님이 보시기에 바로 이게 뭐냐 하면 이방나라의 전형적인 표상이라고 본 거예요.
왕이 필요 없어야 되는데 왕을 달라는 것은 뭐가 필요 없다? 제사장 때려치우자 이 말입니다. 그럼 왕은 뭐냐, 왕의 특징은 영웅이거든요. 우리는 영웅을 원하지 우리 죄 때문에 대신 죽는 거 그러한 우리를 부정적으로 보는 제사장은 필요치 않다. 우리가 어떻든 간에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힘으로 박살내가지고 우리로 하여금 지금 형편에 어떤 형편에 관계없이 잘 먹고, 잘 살아라. 이렇게 해주는 그런 영웅을 우리는 원하고 싶다. 이리 되는 겁니다. 서서히 이스라엘이 죽을 이유를 자기 죄를 점차, 점차 한 꺼풀 두 꺼풀 발각되는 거예요.
아, 우리한테는 내 죄를 고발하고 죄를 대신 씻음으로서 자기가 늘 부인해야 될 그러한 상대자를 내가 원하지 않는다는 것. 내가. 사탄이 원하지 않지요. 악마가 원하지 않듯이 내가 그걸 원하지 않아요. 나는 긍정적이 되고 칭찬받기를 원하고 조금만 해도 잘한다, 잘한다, 그 소리를 듣기를 원하지. 니는 쓰레기야. 니는 지금 코로나 걸려서 죽어도 괜찮아. 니는 마땅해. 이런 소리 듣기는 내가 왠지 싫어. 왠지 오늘은 싫어. 나는 나를 긍정하고 싶어. 내가 마지막 목표라는 것은 나니까.
제사장이 하는 것은 피를 내는 건데, 그 피와 연결이 안 돼. 연결이 끊어졌어요. 왕은 힘이거든요. 왕은 힘이고, 제사장은 피고. 피 대신 힘을 원하고 있습니다. 서서히 맛이 가는 거예요. 이스라엘이 오래 진행되니까 맛이 간 거예요. 죄인 듣기 싫다 이 말이거든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느냐 이 이스라엘 왕 사울 왕을 이방나라 왕처럼 주께서 변모시킵니다. 처음에는 겸손을 떨면서 나 같은 것이 어떻게 왕이 됩니까, 이리 해놓고 막상 왕이 되고 나니까 천하의 자기 백성 그 성질 그대로 대변해주고 있습니다.
“이 나라는 내 거다! 나한테 무조건 복종해야 된다.” 그러니 자기 아들 요나단도 반항하고 하잖아요. 그런데 이 이방나라 왕을 주께서 세워주는 왕이 이방나라를 완전히 쳐버립니다. 사울은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다. 해서 열배나 해서 쳐버려요. 골리앗을 누가 이겼느냐, 누가 공로자냐, 보게 하면서 쳐버립니다. 칠 때, 차이점을 보라는 거예요.
사울 왕은 지가 왕 되고 난 뒤에 잘난 체하지요. 그런데 다윗은 내가 왕이다가 아니라 왕께서 나에게 일을 시켰습니다. 이리 되는 거예요. 왕께서. 이 왕의 자리가 기름부운 자리에요. 따라서 다윗은 사울 왕이 이렇게 괴롭혀도 사울 왕을 직접 안쳐요. 왜냐하면 사울왕은 하나님이 기름 부었기 때문에 기름 부은 그 자리가 중요하지 사울 안 중요하거든요. 그 자리가 인간을 만든다고 본 거예요. 이 생각을 다윗이 갖고 있어요.
내가 잘나서 골리앗을 이긴 게 아니고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선택한 거예요. 왕 되려고 한 게 아닙니다. 그냥 일방적으로 사무엘이 와가지고 참기름은 아니지만, 그냥 기름을 부어버린 거예요. 왕 되라고. 누가 와가지고 탁치고 가는 거예요. 이게 뭐가 묻었는가 딱 보니까, 당신은 차기 대통령입니다.
아니 내가 뭐 하려했어요. 무조건 해야 돼. 이게 열왕기상에 나옵니다. 예후. 무조건 예후는 왕 되어야 돼요. 예후는 본인이 왕 될 자격이 있는 줄 착각했어요. 왕 될 자격 없어요. 성령이 와서 “딱!” 뭔가 해서 보니까 “너는 성도다.” 주님의 왕 같은 제사장이야. 주께서 일방적으로 붙이고 가는 거예요. 내 스케줄 아닙니다. 하나님의 스케줄에 따라서. 그게 다윗이고, 다윗언약이에요.
다윗언약은 니가 비록 인간이라는 껍데기를 썼지만, 내용은 뭐냐 제사장도 예수님, 왕도 예수님. 왕 같은 제사장이 너로 하여금 이 땅에서 왕같은 제사장 노릇하도록 성도되게 했다는 사실을 성령을 통해서 알게 된 사람이 바로 성도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일은 없고 모든 일이 누구 일이다? 주님의 일이에요. 그냥 탁치고 가는 주님의 일이에요. 애들하는 숨바꼭질 놀이 같아. 술래잡기 놀이 같아. 날 잡아 봐라. 치고 도망가는 것 같아.
그러면 다윗이 왕이잖아요. 다윗이 왕 되었을 때에 그러면 여기 제사장은 아비아달 제사장인데 그 제사장은 잘립니다. 제사장 되지를 못해요. 왜냐하면 이 사람이 고생은 많이 했는데 다윗 왕 다음에 솔로몬을 하나님께서 찝었거든요. 왜냐 하면 솔로몬은 죽은 자가 아담의 죽은 자가 신의 가족이 되기 때문에. 혈통이 되기 때문에. 반드시 죽음이 있어야 돼요. 우리가 구원받는 것은 대신 죽은 분이 있어야 돼요. 나를 죄인이라고 지목하고 대신 죽으신 분이 있어줘야 우리가 신의 가족이 됩니다. 그런 사람의 특징이 뭐냐, 지 자랑 안하지요. 예수님 때문에, 예수님 피 때문에 그것이 어떤 행동과 모든 말, 모든 게 다 깔려있어요.
식당에 가서 떡 볶기 하나를 먹어도 말할 필요는 없지만, 아이구 못난 인간 살려내려고 떡 볶기 주시니까 떡 볶기 먹고 죽자. 아줌마 하나 더요. 하나 더 먹고 죽자. 악착같이 돈 벌어서 죽자. 이런 거요. 모든 것이 이미 죽은 자로서 이렇게 받쳐주잖아요. 그것처럼 다윗이라는 왕 되기 위한, 다윗을 왕이라고 득의한 새로운 제사장이 사독입니다.
사독은 아비아달 제사장을 교체해서 들어가는 거죠. 이 교체가 중요해요. 교체해서 들어가는 겁니다. 그럼 사독되겠지요. 사독 제사장 계열이 됩니다. 그 계열이 죽 나오잖아요. 그래서 나와서 여기 5페이지에 보게 되면 제일 끝에 여호수아 나오지요. 스룹바벨 성전 때. 여호수아 나오지요. 그 다음부터는 개판되어 버립니다. 그 다음부터 임명하는 사람들이 엉터리로 임명해요. 죽 죽 임명해가지고 계속 지 마음대로 정치적으로 합니다.
어딜 보셔야 되느냐 하면 주후26년 유대 총독 그라투스 임명되어있지요. 주후. 거기에 요셉 가야바 나오지요. 그 때 이 제사장이 예수님을 죽이는데 앞장 선 사람들이 돼요. 이제 인간의 제사장이 어떻게 점점 더 악해지는 걸 알겠지요. 인간의 종교라는 게. 형식. 형식. 오직 그래도 기독교. 그러니까 하나님이 율법 종교가 있어줘야 마음이나 편하지 않겠느냐, 라고 꾸역 꾸역 만들어내는 모든 것들이 종교라는 모든 것들이 예수님을 살해한 겁니다.
종교 만들어서 뭐할라고. 일부러 하나님과 인간이 만나는 장소를 인간 쪽에서 내세우는 고상함과 거룩함과 율법 준수가지고 그걸 형성하려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 인간 마음속에 하나님을 만날만한 자신의 의로움을 거룩한 장소를 누가 만든다? 인간의 아이디어로 만들려고 하는 거예요. 그게 바로 예배당 아닙니까. 파이프 오르간 예배당. 교회. 전부 다 그 아이디어에 뭐가 포함되어있습니까? 예수님을 죽였던 그 아이디어가 거기에 다 포함되어있는 거예요.
앞자리에 앉아야 은혜 받는다. 이런 거요. 거기서 파생되는 법들이 굉장히 많이 나오는 거예요. 해병대 찬양을 해야 은혜 받는다. 이런 거부터 해가지고. 십일조는 깨끗한 돈으로 해야 된다. 온갖 교회법들이 다나오는 겁니다.
그런데 이제 마지막으로 할 것은 3장에 보면 여호수아는 어떻게 됐다? 일단 하나님 앞에서 거지꼴로 나오세요. 부끄러워하지 마시고. 거지 아니라도 거지고, 깨끗해도 거지에요. 그냥 주께서 택해가지고 불러줄 때는 연탄재로 불러주시는 거예요. 우리가 내세울 것은 아무것도 없어요. 그리고 하나님께서 아예 받지도 않아요. 우리가 내세우는 것은 기도고 뭐고 아무것도 안 받습니다. 헌금도 아무것도 안 받아요.
오세요. 그리고 무슨 작업이 필요하냐, 악마가 지적하도록 지적하는 작업이 필요해요. 그 작업은 이미 시작됐습니다. 이 세상이 악마의 세계인데 우리는 가는 곳마다 지적 받습니다. 밥 먹는 거 흘리는 거 봐라. 칠칠맞게. 육개장 옷에 다 튀는 거 봐라. 저. 저. 아 하나 키우지도 못하고. 그냥 온갖 지적질은 다 받아요.
배후에 마귀가 그렇게 하게 하시는 것이 바로 주님께서 또 의도적으로 하십니다. 기도하라 하니까 15초도 안되게 예수 이름으로 끝내버리고 말야. 봐라. 저 기도하는 재주도 없잖아. 온갖 것은 전부다 하도록 하세요. 더 이상 남아있지 않은 최종 마감 계시가 있어요. 약속이 있어요. 그리스도로 실컷 더럽혀 놓고 옷 입어라. 저 가서 옷 갈아입으세요. 우리의 죄가 주님의 의가 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성전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바꿔치기로 성전 만들어지고, 성전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죄인이 의인되는 그걸로 하나님이 함께 계시는 절차인 것을 우리는 놓치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강의 전 질문>
아브라함 때는 하나님께서 천사를 통해서 약속을 주시는 거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그래서 하나님이 자기 이름을 구체적으로 알리지 않았지만, 모세 같은 경우에는 모세는 하나의 히브리서에 보면 종에 불과해요. 주인이 아니에요. 모세는 시나리오가 어떻게 짜였는지, 사태가 어떻게 되는지 전혀 모릅니다. 주어지는 상황이 어떤 상황으로 번질지를 모르지요. 그래서 모세한테는 하나님께서 자기 이름을 알려줍니다. 나는 여호와라. 여호와 뜻이 뭐냐, 나는 일을 내가 한다는 뜻이에요. 뭐 나 스스로 있다. 뭐 여러 가지 복잡한 거 있지만, 간단히 말해서 내가 던진 일은 내가 하는 것이지 니가 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모세가 지팡이를 들지만 사실은 지팡이 같은 입장이 모세고, 모세 입장이 바로 하나님입장이고 그래요. 모세는 그냥 종으로서 쫄랑 쫄랑 뒤에 따라가서 시키는 대로만 하면 되는 겁니다. 굉장히 편해요. 편한데 가끔 그 하나님이 안 보이는 백성들이 달려들기를 모세보고 달려드니까 짜증나는 거죠. 자기 잘못도 아닌데. 자기가 한 일이 아닌데 원망들을 하니까 모세도 나중에 성질나가지고 약속의 땅에 못 들어갔지요. 어차피 모세는 약속의 땅에 들어갈 수 없는 인물입니다.
어차피 성질내던 안 내던 상관없이 하나님께서 또 성질내게 만들어요. 일부러 만들어요. 그러나 모세가 약속의 땅에 안 들어갔다고 해서 구원 못 받은 것이 아니고 마태복음11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변화산에 모세와 엘리야 양쪽 다 있잖아요.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름이 있다는 말은 마치 투명인간인 것처럼 어디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이름을 언급한다는 것은 보이지 않지만 거기 있다는 뜻이에요.
거기 그냥 있는 게 아니에요. 활동하시면서 있는데 그 활동하는 모든 그 시나리오 계획은 여호와의 본인이 주신 스케줄대로 밀어붙인다. 그게 여호와의 이름이에요. 아시겠지요. 그 이름이 신약에 오게 되면 누구 되느냐 하면 바로 주님이 되지요. 주님의 이름. 주님은 자기 계획대로 밀어 붙어요. 인간의 어떠한 방해공작도 구애받지 않고 모든 것이 예스가 돼요. OK. 패스가 돼요. “일 잘 됐어! 아~ 일 잘했어.” “저 사람은 교회 안 나오는데.” “아이구, 잘하는 거야. 원래 하나님나라는 내가 이야기했듯이 들여보내는 작업이 있는 반면에 내보내는 작업도 있잖아. 본인이 나간 게 아니고 내가 내보냈어.” 천국 오지 말라고 내보내신 거예요.
그래서 주의 일에 대해서 항상 우리가 할 것은 범사에 감사하는 겁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