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오후설교

지시대로

아빠와 함께 2020. 11. 11. 05:41

지시대로 

2020년 11월 8일                  본문 말씀: 욥기 15:26-35

(15:26) 그는 목을 굳게 하고 두터운 방패로 하나님을 치려고 달려가나니

(15:27) 그 얼굴에는 살이 찌고 허리에는 기름이 엉기었고

(15:28) 그는 황무한 성읍, 사람이 살지 아니하는 집, 돌 무더기가 될 곳에 거하였음이니라

(15:29) 그는 부요하지 못하고 재산이 항상 있지 못하며 그 산업이 땅에서 증식하지 못할 것이며

(15:30) 흑암한 데를 떠나지 못하리니 불꽃이 그 가지를 말릴 것이라 하나님의 입김에 그가 떠나리라

(15:31) 그는 스스로 속아 허망한 것을 믿지 말 것은 허망한 것이 그의 보응이 될 것임이라

(15:32) 그의 날이 이르기 전에 그 일이 이룰 것인즉 그 가지가 푸르지 못하리니

(15:33) 포도열매가 익기 전에 떨어짐 같고 감람 꽃이 곧 떨어짐 같으리라

(15:34) 사곡한 무리는 결실이 없고 뇌물을 받는 자의 장막은 불탈 것이라

(15:35) 그들은 악한 생각을 배고 불의를 낳으며 마음에 궤휼을 예비한다 하였느니라

사람은 자기를 평가하는 기준으로 남들을 보게 마련입니다. 인간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한없이 자애롭고 순합니다. 자기 자신을 좋게 됩니다. 따라서 자기 처지와 비슷하고 수준과 비숫하면 동지애를 느낍니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자기보다 못하면 신나서 어쩔 줄을 모릅니다. 그것은 늘 자신을 높이 측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욥의 친구들은 도리어 욥으로부터 자신의 허망성이 노출당하고 있음을 모르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욥에 대한 욥의 친구에 대해서 저주는 그대로 말씀 성취 차원에서 예수님에게 다 입혀졌습니다. 그러니까 그 당시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해서 전혀 모르게 됩니다.

욥으로 오신 예수님이십니다. 자처해서 조롱거리가 되게 오신 것입니다. 이로서 기존 인간들이 자기 자신에 대해서 터무니없는 견해를 갖고 있음을 폭로시키시는 겁니다. 근거없이 자신을 좋게만 보려는 그 의식은 인간 세계에 욥같은 인물이 등장해야 밝혀집니다. 욥은 예외존재입니다.

인간류에 흡수 통합이 불가능한 인물입니다. 욥은 인간이면서도 인간들로부터 배제되는 인물입니다. 이점에서 그들 고장과 시대에 메시야입니다. 사람들을 사정없이 타인을 저주하는 이유는, 자신은 그렇게 되지 않음에서 오는 희열을 맛보기 위해서입니다. 누가복음 18:10-13에 보면,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하나님의 계시전달 방법은 동일하게 느껴지지만 실은 본질상 전혀 다른 두 사람들의 차이를 통하는 방법입니다. 사람들은 같을 것이라고 짐작하지만 전혀 다른 본질로 인하여 아무리 많은 대화와 논쟁을 해도 이야기가 합치될 수 없습니다. 합치될 수 없다면 여기에 핍박이 가해집니다.

사람들의 견해는 항상 자신의 단단함과 절대함에서 시작합니다. 즉 “나는 무조건 옳아야 한다”는 겁니다. 반면에 홀로 있지 않고 하나님과 같이 하는 사람은, “왜 나는 모르는 방식에 의해서 지시받아야 하는지 그것을 모르겠다”하는 식입니다. 홀로 사는 자들은 자기를 지키기 위해 끊임없이 지식을 끌어모아야 합니다.

복음에 관한 지식, 하나님에 관한 지식도 끌어모음의 대상이 됩니다. 그러나 지식을 가지고서는 근원적인 상실감을 갖지를 못합니다. 지금 자신이 아는 만큼 보람을 느끼게 됩니다.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희망만큼은 여전히 유효하다고 믿게 됩니다. 반면에 하나님과 동행하는 욥의 입장에서는 억울함과 비참함을 느낍니다.

자기보다 실력이 모자라는 자에게 훈계를 받고 꾸중을 당하는 것이 엄청나게 자존심 상하는 짓입니다. 바둑 9단이 바둑 9급에게 훈수 받는 기분입니다. 육에 속한 사람과 영에 속한 사람은 상호 대화가 될 리가 없습니다. 신약에 와서 성령님이 오시게 되면, 예수님의 낯설음을  알립니다.

성령이 임한 자들은 오늘 본문에 나오는 욥처럼 이 시대의 욥이 됩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시므로서, 하나님과 함께 하지 못하는 자들은 죽었다 깨나도 알지 못하는 현상을 보이게 됩니다. 지금 활동하시는 성령님의 지시가 그러하기 때문입니다. 늘 낯섦과 지적함으로 움직이십니다.

그렇게 되면 이 세상 자체가 불신의 세계인 것이 폭로됩니다. 성령받은 자들이 이 세상을 산다는 것은 마치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악마를 만나 시험받는 것과 같습니다. 오늘날 성도가 만나는 되는 모든 평범한 자들은 전부 악마의 1/n의 존재자들입니다. 즉 누구를 만나고 그 입에서 악마의 주장만 나옵니다.

오늘 본문, 29절에 보게 되면, “그는 부요하지 못하고 재산이 항상 있지 못하며 그 산업이 땅에서 증식하지 못할 것이며”라고 했습니다. 즉 악인이 악인답다고 평가할 수 있는 확실한 기준은 가난하게 산다는 겁니다. 이 말은 곧 부유하게 산다는 것은 그 어떤 경우든지 악인이 아니라 의인이라는 겁니다.

이런 주장은 어느 개인의 주장이 아니라 보편적인 모든 인류의 주장입니다. 이 말은 모든 인간 존재의 뒷면에 다 악마의 생각들이 들러붙어 있다고 보시면 됩니다. 즉 누구를 만나도 동일한 견해가 나온다는 말입니다. 이는 예수님에 대해서 알아 본 자가 아담의 후손 가운데 아무도 없다는 말이 됩니다.

즉 인간이 홀로 사는 동안에는 악마의 지배에서 벗어날 수 없는 마음씨로 세상을 보고 남을 보고 자기 자신을 본다는 말입니다. 이런 인간들만 있는 것이 당연한 이 세상에 왠 현상이지 주님이 함께 하시는 자가 등장하게 되면 그만 사람들은 사람들의 낯선 말과 삶을 이해하지 못하게 됩니다.

동시에 사람들은 자신의 의로움을 유지하기 위해 하나님과 함께 한 그 사람을 구박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욥의 입장에서 볼 때, 혹은 성령의 입장에서 볼 때에 인간들의 주장의 정당성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인간들은 지금 평생을 통해 공연중입니다. 무대에 옮려진 채로, 제한한 삶의 현장에서 쇼를 하고 있습니다.

인간들의 인생이란 곧 농담입니다. 가볍다는 겁니다. 아무리 남들을 따라잡기 위해 애쓰고 노력해도 여전히 그 무대 밖으로 못나갑니다. 제자리를 계속 뛰고 달릴 뿐입니다. 홀로 사는 마귀의 습성으로서는 ‘하나님과 함께 있음’의 경우를 재현할 수가 없습니다. 각 시대에서 선입견과 편견으로 난무하지만 무엇이 편견이냐에 대해서 인간들 자체적으로 정할 수가 없습니다.

이미 인간의 진짜 모습은 십자가로 확정났습니다. 처참하게 망하져 십자가에 못박히 그 모습만이 곧 우리의 진짜 모습입니다. 달리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달리 생각하는 것은 다 악마쪽에서 제공한 망상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마음껏 삶의 현장에서 주님의 지시만 드러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56강-욥기 15장 26~35절(지시대로)20201108 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욥기 15장 26~35절입니다. 구약성경 774페이지입니다.

“그는 목을 굳게 하고 두터운 방패로 하나님을 치려고 달려가나니, 그 얼굴에는 살이 찌고 허리에는 기름이 엉기었고, 그는 황무한 성읍, 사람이 살지 아니하는 집, 돌무더기가 될 곳에 거하였음이니라, 그는 부요하지 못하고 재산이 항상 있지 못하며 그 산업이 땅에서 증식하지 못할 것이며, 흑암한 데를 떠나지 못하리니 불꽃이 그 가지를 말릴 것이라 하나님의 입김에 그가 떠나리라, 그는 스스로 속아 허망한 것을 믿지 말 것은 허망한 것이 그의 보응이 될 것임이라, 그의 날이 이르기 전에 그 일이 이룰 것인즉 그 가지가 푸르지 못하리니, 포도 열매가 익기 전에 떨어짐 같고 감람 꽃이 곧 떨어짐 같으리라, 사곡한 무리는 결실이 없고 뇌물을 받는 자의 장막은 불탈 것이라, 그들은 악한 생각을 배고 불의를 낳으며 마음에 궤휼을 예비한다 하였느니라”

욥의 친구들이 욥을 모델로 해서 저것이 저주받는 전형적이 모습이라고 자기가 믿는 신에게 거의 찬양하다시피 지금 욥을 평가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 약이 있다면 저 모습이고 망하는 자가 있다면 저주받는 자가 있다면 바로 저 모습이다. 따라서 죄인을 죄인답게 저주하신 하나님의 하신 조치에 대해서 욥의 친구들은 지금 욥을 보며 즐거워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신나고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자기가 안 망하고 남이 망했으니까 기뻐 어쩔 줄을 몰라서 지금 노래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욥의 친구들이 하는 이야기가 바로 예수님 보고 하는 이야기라면 욥 친구들의 운명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 성경에 욥 친구들이 하는 저주를 그대로 말씀 성취 차원에서 자기 몸에 입혀버린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님을 못 알아봤죠. 알아보지를 못했습니다. 인간들은 본인에 대해서 모르고 있으면서도 나는 나에게 잘 안다고 치고 내가 나를 아는 그 기준에 준해서 예수님을 살폈던 거예요. 예수님을 평가한 겁니다. 물론 욥의 친구들은 그 당시에 예수님이 없었고 욥이 예수님의 이미지를 가지고 욥 친구들 앞에 등장했습니다.

자, 그럼 오늘 이 시대에는 예수님의 이미지를 가지고 누가 우리 앞에 등장하겠어요. 성령께서 하시는 일의 특징은 예수님 당시 사람들이 못 알아본 예수님의 이미지를 그대로 예수님 부활 승천하시고 그 후대에 오늘날 역사 끝날까지 우리에게 적용시키는 일을 성령께서 하십니다. 네가 잘못 생각하고 있다. 남들이 보는 것도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일 뿐만 아니라 근본적으로 네가 너 자신에 대해서 모르고 있다는 겁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해서.

우리는 우리가 아는 그 기준을 동원해서 남을 평가하거든요. 그런데 우리 자신을 안다고 하는 그 평가 기준 자체가 벌써 성령에 의하면 잘못된 겁니다. 제가 그렇게 단언하는 이유는 간단해요. 예수님에 대해서 어느 누구도 못 알아봤다. 예수님 당시에 누구도 예수님을 몰라봤다는 그 기준을 그대로 예수님 후대에 있는 우리에게 똑같이 적용시킵니다.

“그때 그 당시도 예수님 못 알아봤지? 너도 마찬가지야”라고 우리에게 지적해주는 것이 성령입니다. 욥 시대 역시 예수님 오시기 전에 욥을 통해서 욥에 대해서 잘못된 평가를 하고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욥은 대단히 억울합니다. 아무것도 안 했어요. 한 짓도 없는데 여기 29절에 보면 “그는 부요하지 못하고 재산이 항상 있지 못하며” 좀 있다 하면 거덜 나고 좀 있다 하면 거덜 나고 “그 산업이 땅에서 증식하지 못할 것이며”라고 하며 저주의 모델을 욥에게서 찾는 겁니다.

“욥 봐. 자식들 다 죽었잖아. 그리고 사업 망했잖아. 뭐라고 해석할 건데. 욥 네가 너 자신이 망한 것을 차마 네 입으로 네 말로 설명 못 하지? 내가 해줄게. 너의 친구인 내가 해줄게. 네가 망할 짓을 했기 때문에 망했다”라고 하면 그 말은 뭐냐 하면 “내가 아직 너처럼 안 망한 것은 너보다 우수한 삶을 살기 때문에 지금 그만큼 착함 때문에 안 망하고 있다는 이게 팩트(사실)야. 이 욥아”라고 지적질을 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나 신약에 와서 다시 욥기를 보게 되면 욥의 친구들이 여러 가지 모르는 것 중에서 뭘 모르느냐 하면 마태복음 4장에 나오는 광야에서 예수님이 누구를 만났다는 사실을 욥의 친구들은 전혀 모르고 있어요. 예수님은 광야에서 누구를 만났느냐 하면 악마를 만난 겁니다. 악마를 만났을 때 어떤 녹색 얼굴을 하고 뿔 달리고 자꾸 그렇게 괴상망측한 괴물을 만났다고 생각하시기 쉬운데 그냥 이 땅에 있는 사람 중에서 아무나 꼭 찍어서 만나면 그건 악마 만난 거예요.

아무나 꼭 찍어서 만나면. 왜? 다 공통점이 있어요. 모든 인간은 예수님 빼놓고 한통속입니다. 예수님 빼놓고 한 아담 속에서 공통성을 갖고 있어요. 악마 붙들고 이야기하면 광야에서 시험당하는 그 현장입니다. 뭐라고 하느냐 하면 “사람은 돈 있어야 사는 거다. 돈 없으면 죽는 거다. You know?. 당신 그거 알아? 이의 있으면 말해. 없지?”

 “사람 나고 돈 난 게 아니야. 돈 나고 사람 났어”라고 하는 것은 얼마나 돈 나고 사람 난 것이 치사해 보였으면 흔히들 사람 나고 돈 났다고 우격다짐을 하겠느냐. 사람 좋다고 취직시켜주고 사람 좋다고 대우받는 그런 세계가 아닌 것을 너도 알고 나도 알고 다 아는 이야기예요. 돈 나고 사람 난 거예요. 돈이 우선이에요. 돈이 없으면 그러니까 돈이 없다는 말은 악마의 말이 없다면 악마가 우리에게 심어주는 그 돈이 최고라는 그 진리, 그 진리는 모든 인간의 이면에 뒤에 달라붙어 있습니다. 모든 인간에게.

화투가 요란스럽고 이쁘지만, 뒷면을 보게 되면 칙칙한 적색 색깔로 똑같아요. 전부다. 뒤집어 보면. 모든 인간이 ‘응애~’하고 태어났으면 뒤에 달라붙는 게 뭐냐 하면 악마의 사고방식이 이미 딱 달라붙어 있어요. 남의 뒷면 보려고 하지 말고 여러분 뒷면 보세요. 저도 제 뒷면 볼게요. 남 보지 말고 본인 뒷면 보라는 말입니다. 뒷면. 자식이 잘되었다는 말이 뭔 말입니까. 취직되었다는 말이에요.

그러니까 인간성이 좋다는 말은 하지 말고 취직되었으면 좋은 자식이에요. 취직되었으면. 왜? 아버지에게 손 안 벌리니까 잘된 겁니다. 아무나 찍어서 이야기해보세요. 아무나 찍어서. 광야에서 마귀가 예수님을 시험할 때, 달리 말하면 보통 인간이, 평범한 어떤 어르신이 예수님 만나서 광야에서 시험할 때 그 악마 아저씨 입에서 나오는 이야기가 뭐냐 하면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나온 거예요.

그건 뭐냐 하면 나의 소망은 말씀대로 지키냐에 따라서 말씀대로 지키면 순종하면 내 소망은 이루어지고 말씀을 위배하게 되면 나는 망한다는 말이 아무나 찍어서 이야기해보게 되면 그 이야기 나와요. 물론 교회 안 나온 사람은 말씀이라고 하지 않죠. 자연의 이치, 인간의 도리, 짐승 말고 인간의 도리답게 살고 바르게 살게 되면 복은 저절로 오게 되어 있다는 것이 어떤 인간을 만나도 그게 나온단 말이죠.

그 복이 뭐냐 하면 그 복이 29절에 나오는 것처럼 부유하게 부자 되는 거예요. 달리 이 땅에서 착하다는 것을 부자 말고 달리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이 땅에서는 부자 말고는 없어요. 그래서 사람과 이야기할 때는 항상 뒤쪽에 ‘얼마 줄 테니 얼마 내 놀래?’라는 식으로 뒤에 돈을 붙이고 이야기하고 그렇게 안 하려거든 이야기하지 마세요.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셨습니다’라는 설교를 목사가 할 테니까 여러분 얼마 줄 거냐는 그런 거. 앞에 어떤 그럴싸한 교훈, 어떤 말이 붙더라도 뒤에는 돈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자, 그렇다면 신약적으로 예수님 쪽에서는 뭐가 문제냐 하면 예수님 입장에서 인간 쪽의 문제가 모든 생각이 본인부터 출발한다는 그 자체가 문제예요. 예수님부터 출발해야 하거든요. 예수님은 우리의 창조주고요. 창조주의 생각부터 들어와야 하는데 창조주와 인간 사이에 악마가 치고 들어와서 끼어드니까 창조주로부터 오는 생각은 막혀 있고 악마로부터 주어진 생각만 우리가 완전무장되어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내가 알고 있는 지식이 나를 살린다. 결국 마지막은 나를 살린다가 되죠. 내 지식이 나를 살린다. 신약을 보며 사람들이 제일 많이 오해하는 것이 뭐냐 하면 복음을 소지하면 구원받는다는 건데 복음은 우리가 소지하면 안 됩니다. 복음은 예수님만 소지해야 하고 우리는 그 지시를 따라야 해요. 복음을 내가 소지해서 이것 가지고 무슨 짓을 하려고 합니까? 무슨 반지의 제왕이에요?

최후에 반지를 손에 넣은 자는 온 천하를 손에 넣을 수 있다는 이게 악마의 생각이 아니고 뭡니까. 복음이 좋으니까 내가 소지하겠다는 거예요. 그걸 활용해서 내 이익을 추구하겠다는 겁니다. 인디아나존스 영화 시리즈에 보면 언약궤를 독일 군인들이 차지하려고 하다가 언약궤 뚜껑을 열어서 해골 되어버렸는데 그게 영화에 나오거든요. 그 언약궤를 왜 차지하려고 했는가. 그 언약궤가 성경에 보니까 제일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보물이 언약궤거든요.

지금 천주교는 뭘 찾고 있느냐 하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입던 옷이 있다는 것을 조사해서 예수님 당시에 십자가 지시기 전에 입었던 그 옷이라는 겁니다. 그 옷을 왜 갖고자 하는 겁니까. 초월적 신적 권력을 가진 자가 최고의 자리에 앉기 때문에 그래요. 그게 악마의 생각이 아니고 뭡니까. 그게 악마의 생각이에요. 그거 해서 독립하겠다는 겁니다. 너는 너대로 나는 나대로.

지금 욥은, 욥의 고통은 뭐가 문제냐 하면 독립이 안 되어요. 하나님의 권한 밑에서 빠져나갈 수가 없어요. 하나님의 주신 징계 밖으로 못 빠져나오고 있어요. 친구들은 잘도 희희낙락거리면서 놀리고 있고 웃으며 자기가 아는 책을 말하면서 자기 배운 것을 가지고 이야기하는데 욥의 친구는 홀로 있지만 욥은 혼자 있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거기서 억누르고 있습니다. 완전히 전기밥솥이에요. 꽉 눌러버리고 있어요.

‘주님이여, 이런 나에게 당한 이 인생은 이것은 내 지식에 없는 겁니다’라는 거죠. 나중에 하나님이 욥에게 찾아옵니다. “네가 왜 지식을 네가 알아야 하지? 너는 창조자가 아닌데 네가 창조자의 지식을 왜 알아야 하느냐?”라고 하시며 이거 아는지 저거 아는지 막 물으시는 거예요. 욥이 “모릅니다. 모릅니다..”라고 밖에 할 말이 없으니 하나님이 “그래, 그 모르는 게 너의 역할이야”라고 하시는 겁니다.

“나는 모릅니다. 주님의 지시가 여기에 와서 도착했을 뿐입니다”라고 하는 것이 예수님의 증인 되는 거예요. 이게 성도입니다. 성도는 복음을 가지고 있으면 안 됩니다. 복음대로 움직일 뿐이에요. 가라 하면 가고 오라 하면 오는 거죠. 뭐, 백부장이 그렇게 지식이 많은 겁니까. 백부장이 나중에 신학 박사 됩니까. 욥은 아직 하나님을 안 만났기 때문에 욥의 친구가 이런 이야기할 때 굉장히 창피함을 느껴요.

사람이 죽는 것보다 더 싫은 것은 비참하게 죽는 겁니다. 그런데 그 비참하게 욥이 친구들 앞에서 처참하게 되는 거는 죽기보다 더 괴로운 일입니다. 마치 자기가 프로 바둑 9단인데 기원에서 9단인지 모르고 9단 앞에 9급짜리가 바둑 가르쳐준다고 할 때 얼마나 그게 비참하겠어요. 네 수 뻔하고 네가 아는 거 나도 아는데 “수를 모르니까 너는 나처럼 부자 못 되었잖아”라고 놀리는 방법도 가지가지예요. 그렇게 계속 놀리는 거예요. 조롱하고 있는 겁니다.

그걸 당할 때마다 욥은 처참함을 느끼는 겁니다. 침통함을 느끼고 비참함을 느끼죠. 그냥 곱게 죽이지 왜 비참하게 사람을 처참하게 만들어 죽이느냐. 그것은 바로 십자가라는 체험은 지식으로 다가설 수 없는 체험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빼앗기지 않고 강제로 아무 영문도 없이 다 날아가지 않고서는 우리는 십자가라는 말을 입에 담을 수가 없어요.

억울함이라는 것이 그거예요. 억울한 체험이 아니면 십자가라는 체험을 우리가 했다고 할 수 없습니다. 물론 억울함에 대한 규모가 각기 다를 수가 있어요. 분명히 미장원에서 머리 기대했는데 머리가 잘 못 나왔을 때 돈 3만 원 준 것이 얼마나 억울하겠어요. 그런 남들 보기엔 작은 억울함이지만 예상도 못 한 억울함은 크게 느껴지고 “저 미장원에서 머리 이렇게 나왔으니까 나 그냥 콱 죽어버릴까, 여보?”라는 식으로 되는 겁니다.

어떤 뉴스에 보니까 아내가 남편에게 이혼을 요구했어요. 이혼 요구 사유가 뭐냐 하면 남편이 변기에 서서 오줌을 싸는 것 때문에 이혼을 요구해요. 화장실 청소도 안 하고 서서 오줌 누기 때문에 이혼하자고 정식으로 재판을 요구했어요. 그 남편도 웃기지. 앉아 누면 될 거 아닙니까. 그런데 남자의 가오가 있다는 겁니다. 그게 뭐라고. 뚜껑 여는 절차가 귀찮거든요. 자기는 안 튄다고 생각하죠. 냄새 다 튀었는데.

그것 가지고 이혼한다는 말은 아직 큰일을 안 당해봐서 그래요. 그것이 묻힐 정도로 큰일을 안 당해 본 거예요. 묻힐 정도로. 둘이 오줌 누는 것 때문에 이혼하려고 하다가 만약 누가 남편 욕하면 아내는 갑자기 남편 편들 거예요. 우리가 이렇게 될 수는 없다고 나서서 한 편 될 거예요. 그렇게 되면 갑자기 대동단결해서 언제 이혼 이야기했는지 헤어질 마음 없어집니다.

가장 심각한 것을 사람은 경험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는 자기 자신을 비참하게 보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나 자신을 그럴싸하게 괜찮은 존재로 계속해서 잘못 해석하고 있는 겁니다. 우리 자신을 잘못되게 해석한 거예요. 성령은 십자가를 경유 해서 엑스레이 사진 들고 와서 이게 너의 모습이라고 이야기하는데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남에게 지기 싫어하는 그 상상의 모습이 내 모습이라고 장착했기 때문에 그 엑스레이 사진을 밀쳐버립니다.

그건 비현실이라고 밀어붙이고 현실은 뭐냐 내가 구상하고 상상하는 그게 현실이라고 상상합니다. 그런 인간들이 성도도 마찬가지거든요. 그래서 성도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는가. 욥의 답답함이 뭐냐 이러한 구박과 비난 그 속에서 갈수록 자기 가슴에 처참과 비참을 느끼게 되죠. 욥 같은 경우에. 오늘날 우리들은 이렇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인생 자체가 따지고 보면 하나의 공연입니다. 인생 자체가 쇼 벌이는 거예요.

사는 게 진지한 것이 아니고 주님 만나는 것이 진지하다면 사는 것은 그냥 농담입니다. 농담 삼아 사는 거예요. 왜냐 하면 언제까지 살지 모르기 때문에. 내가 2년까지 살지 내일까지 살지 보장 없어요. 그러면 우리 사는 것을 농담으로 여기고 가볍게 여겨야 합니다.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중요한 것은 주께서 오늘 하루를 뭘로 채우도록 나에게 지시했느냐입니다.

무슨 이야기를 듣게 만들고 무슨 이야기를 하게 만들었느냐입니다. 누구를 만나게 했고 무슨 일을 하게 했느냐를 지시하는 거 그 현장에서 내리시는 지시가 복음보다 더 중요해요. 복음보다. 복음은 항상 들으면 이 지식으로 남았기 때문에 이건 교만만 높일 뿐이지 현장에서 실제 움직이는 것은 상상하는 나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 아등바등 애를 쓰고 아주 자기 자식을 학대하고 있는 거예요.

농담인데 사는 게 이게 진담인 줄 알고 여기서 승부를 해결을 다 보려고 한단 말이죠.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라는 미국의 수학자가 쓴 유명한 소설에 이런 게 있어요. 거기서 토끼가 주머니에서 시계를 하나 끄집어내요. “내가 왜 이렇게 늦지. 오늘 또 늦었네”라고 열심히 재촉하면서 뜁니다. 뛰는데 제자리를 뛰어요. 시계를 늘 끄집어내서 보면서 “내가 왜 이리 늦지”라고 하면서 뛰고 또 뛰고 또 뛰고 하는데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습니다.

계속 그 자리를 뛰고 있는 거예요. 왜? 공연 무대 장소가 그 자리거든요. 이것이 뭐냐. “빨리빨리”라고 하지만 우리는 내 자리에서 벗어난 적이 없다는 교훈을 주는 겁니다. 인간은 백날 돈 벌고 애써봐야 돌아오면 바로 주님이 지정한 그 자리 십자가, 네가 이렇게 해도 이미 십자가로 확정 났음을 네가 자꾸 부정하고 저 사람처럼 남들처럼 되겠다고 설치는 거 그게 바로 광야에서 우리가 수시로 만나는 악마의 1/N들이에요.

모든 인간은 악마 소리를 하기 때문에 만나면 “네가 부자 되게 해줄게. 네가 인기 얻는 사람 되게 해줄게. 사람이 돈이 있어야 떡을 먹고 밥을 먹고 사니까 떡 먹을 수 있게 해줄게”라고 하며 전부 다 우리는 그게 인간 사는 거라고 그 이야기만 이거는 진짜 인생 내내 듣는 이야기는 그 이야기밖에 없어요.

어디서 들어도 주님의 이야기는 안 들리고 악마의 이야기만 들려오고 있습니다. ‘그래. 나는 너처럼 따라 붙일래’라고 하면 따라 붙이면 허리 나가고 그런단 말이죠. 그때마다 기준이 바뀌지만 여기에 오늘 본문에 보게 되면 악인의 특징이 26절에 보게 되면 “그는 목을 굳게 하고 두터운 방패로 하나님을 치려고 달려가나니, 그 얼굴에는 살이 찌고 허리에는 기름이 엉기었고”라고 되어 있어요.

악인의 특징이 둔하고 자만에 빠졌다는 것을 허리에 기름이 엉겨있다고 본 거예요. 시대마다 악인의 스타일에 차이가 있는 모양이에요. 허리에 기름 차 있습니까? 악인입니다. 얼굴이 김정은처럼 살쪄있어요? 악인입니다. 얼마나 편파적이고 편견입니까. 욥의 친구들이. 예수님의 인상은 최적화되어 있어요. 그 시대에 아무도 그를 흠모할 것이 없는 요소로서 장착되는데 최적화입니다. 왜? 모든 이로 하여금 오해하게 하기 위해서.

말을 다시 하겠습니다. 모든 악마의 1/N들이 다 어느 누구도 못 믿도록 믿을 수 없도록 그렇게 오신 분이 예수님입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이야기하는 오늘날 이 시대에 예수님의 1/N인 성도들도 남들 앞에는 전혀 부럽지 않은 모습으로 우리 곁에 나타납니다. 우리를 지적하기 위해서. 우리의 잘못된 편견과 선입감을 지적하기 위해서 그런 분들을 우리에게 배치하죠.

그리고 상대적으로 나는 너처럼 안 돼서 다행이라는 그런 생각을 들게 만들고 다시 나 자신을 강화시키고 나 자신을 붙드는 그런 본색을 드러냅니다. 해봐야 그러니까 제자리지. 백날 뛰어봐야 그건 제자리에서 가는 거예요. 이 세상 사람들 사이에 이런 말이 있어요. 뭐냐 하면 ‘남자란 자기를 믿는 사람에게는 목숨을 바치는 존재다’라는 말. 남자의 객기입니다. 여자는 그걸 이용하겠죠.

허풍과 허세. 아무리 이성적으로 해도 뭔가 나의 가치를 알아준다면 내 가치를 높일 수 있다면 무모한 짓도 하는 것이 인간이라는 겁니다. 이게 바로 인간이 미처 모르는 초과적인 괴물 악마의 생각이 들어간 거예요. 더 가져야 하고 더 높아야 하고 더 승진해야 하고 더 많아야 하고 그러한 것에 진짜 미처 돌아가고 있습니다.

자, 그러면 성도는 어떻게 하느냐. 설사입니다. 주께서는 설사해서 속을 다 비우게 만들어요. 설사를 보고 시원하다고 안 그러죠. 쫙 빠져서 힘이 다 빠지게 하죠. 지시에 따르도록 그것마저 주의 지시의 일종이라는 것을 받아들이도록. 복음을 알아서 방어하고 이런 짓 하지 마세요. 복음을 알아서 재앙을 대비하고 하는 그거 다 마귀 짓입니다.

대비할 생각하지 말고, 나를 지킬 생각하지 말고, 우리는 확정 났습니다. 난데없는 주님의 뜻을 주님과 함께 같이 있다는 이 체험은 이 비참한 체험은 돈 주고도 살 수 없는 하나님의 십자가 체험입니다. 도리어 부러워해야 하죠.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오만할 때 설사하게 해주시고 스스로 자기에게 실망하는 복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주님을 믿어야 될 것을 주님 믿는 나를 믿었던 이 오류를 이제는 성령을 통해서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