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오후설교

생명의 배선(욥기 15:23-25)음성 동영상 Youtube 링크 : https://youtu.be/LZDmVh05H5M,

아빠와 함께 2020. 11. 2. 11:17

생명의 배선

2020년 11월 1일                     본문 말씀: 욥기 15:23-25

(15:23) 그는 유리하며 식물을 구하여 이르기를 어디 있느냐 하며 흑암한 날이 가까운 줄을 스스로 아느니라

(15:24) 환난과 고통이 그를 두렵게 하며 싸움을 준비한 왕처럼 그를 쳐서 이기리니

(15:25) 이는 그 손을 들어 하나님을 대적하며 교만하여 전능자를 배반함이니라

욥을 악인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이제 그들에게 남은 것은 악인에게 주어질 모든 저주를 퍼붓는 겁니다. 왜 그렇게 해야 하느냐 하며는 그래야 ‘신의 정당함과 거룩함’이 살아나게 되고 이런 식으로 신을 변증하는데 협조한 자들이 진정 본인들이라고 증명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도리어 엉뚱한 사람을 건드렸다면요?

건들지 말아야 할 자를 하나님께서 이 지상에 세웠습니다. 그 사람이 욥입니다. 욥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이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진리관에 부합되지 않습니다. 이질적입니다. 이질적이라는 말은, 인간이 알고 있는 선과 악의 기준으로 판단되지 못하는 대상이라는 말입니다. 인간들의 지성은 항상 선과 악과 구별하는 작용을 나타냅니다.

이왕 알게 된 지식을 가지고 나름대로 선한 쪽과 악한 쪽을 구별해보자는 식입니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악이 자기 곁에 있는 것을 불편해합니까? 그것은 선과 악을 구별하는 것자체가 선하다고 자부하는 자신으로부터 밀어내기 위한 조치이기 때문입니다. 묻지도 따지지 않고 자신은 무조건 선하다는 겁니다.

자아의 선함의 가치를 보존하고 흠집내지 않기 위해서라도 쉬지 않고 악한 것들읋 찾아내서 그것들과 분리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자신의 행위가 궁극적인 절대선인 하나님부터라도 동의가 되는 일이기를 원합니다. 악인에 대해서 가차없는 저주를 퍼붓는 행위가 곧 하나님을 돕는 일이 되고 이로서 자신은 하나님과 같은 편임을 확인하고 싶은 겁니다.

그러나 욥의 친구들이 몰랐던 바는 욥의 이질성을 통해서 새로운 ‘선과 악’이 나온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기존의 인간들이 이미 안다고 여긴 선과 악의 기준을 하나님께서 거부하시는 바입니다. 만약에 참으로 하나님의 선하신다면, 선과 악을 제대로 분간못하는 인간에게 선하도록 무슨 비법이라도 알려주실 겁니다.

하지만 욥조차도 의아해 한 것은, 하나님께서 고통을 철회할만한 비법을 일체 욥에게 알려주지 않으신다는 점입니다. 만약에 욥이 나쁜 짓을 해서 고통이 왔다면, 고통 해소 차원에서도 욥으로 하여금 마음과 행위에 수정할 거리를 제공하시겠지만 이런 개선 여지가 욥에게 전혀 주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욥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알리고자 하시는 바는, 어두움은, 곧 악은 결코 홀로 나타나는 법이 없다는 겁니다. 새로운 악은 새로운 선과 의를 동반해서 드러냅니다. 왜냐하면 어두움이 있어야 빛이 빛답게 빛나기 때문입니다. 이는 기존에 악하다고 여기는 곳에 선이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낯선 악과 더불어 낯선 의도 같이 나타나는 겁니다.

이는 이 세상을 장식하는 인간들의 선과 지식의 배선을 다 갈아치우기 위함입니다. 생명과 연결되는 배선을 하나님께서 시작하시려고 합니다. 그 예가 이스라엘 역사 속에 나타납니다. 출애굽기 8:31-32에 보면, “여호와께서 모세의 말대로 하시니 그 파리 떼가 바로와 그의 신하와 그의 백성에게서 떠나니 하나도 남지 아니하였더라 그러나 바로가 이 때에도 그의 마음을 완강하게 하여 그 백성을 보내지 아니하였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애굽 바로왕은 자신이 마음이 그토록 완악하거나 강퍅해졌다는 생각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자신의 마음은 한결같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자꾸만 일을 만드십니다. 파리를 온 애굽나라에 퍼지게 하신 분은 바로왕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이질적인 일을 꾸며놓으시고 그 결과도 새로운 악과 새로운 의가 생겨나게 하시는 겁니다.

기존의 선악배선을 뜯어내시는 겁니다. 선악논리에 의하면 인간은 선과 악의 가치 대상이 되어버립니다. 하지만 생명나무와 연결되는 배선에 의할 것 같으면 인간은 그 자체로 선과 악의 가치 대상이 아니고 그냥 과정에 흡수됩니다. 전도서 1:6-8에 보면, “바람은 남으로 불다가 북으로 돌이키며 이리 돌며 저리 돌아 불던 곳으로 돌아가고

모든 강물은 다 바다로 흐르되 바다를 채우지 못하며 어느 곳으로 흐르든지 그리로 연하여 흐르느니라 만물의 피곤함을 사람이 말로 다 할 수 없나니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차지 아니하는도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인간은 이 자연 속에서 해체되고 해리되어져 버립니다.

이는 인간이 명사(名詞)가 아니라 동사(動詞)라는 말이 됩니다. 인간은 움직임 그 자체입니다. 대자연에 속해서 같이 쉬지 않고 변해가는 동사입니다. 여기서 ‘피곤함’이 발생됩니다. 인간이 나이 많아 늙은 것은 피고함의 표상입니다. 요양병원 침대에 누워 일생의 마지막을 맞아하는 노인네를 향하여 “엄마 힘내세요. 우리 자식들이 있잖아요”라고 응원해 봤자 소용없습니다.

인간은 멈춰 설 줄 모릅니다. 타의에 의해서 쉬지 않고 휘몰리게 됩니다. 대자연의 시간과 공간은 인간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스스로 행복하기 위해서 아무리 노력해도 대자연의 변화를 이겨낼 수가 없습니다. 욥에 대해서 그가 선하다거나 악하다거나 평가해서는 아니됩니다.

그저 하나님께서 심어준 변화에 휘말려 들어갔을 뿐입니다. 기존 인간의 가치평가 대상이 아니라서 이질적입니다. 자기만의 것을 따로 구축할 수 없습니다. 사람이 자기만의 것을 따로 구축하면 그것을 바로 의롭고 선하다고 자부하게 마련입니다. 이게 이질적 사건 앞에서 완강하고 강퍅이라는 평을 하나님으로부터 받게 됩니다.
인간들은 자신의 고민거리에 대한 해답을 자신이 가질 수도 없습니다. 해결책을 얻겠다는 것은 자기 인생에 대해서 본인이 책임지고 나서겠다는 겁니다. 하지만 가는 세월 누가 막을 수 있습니까? 누가 요양병원이 드러눕고 싶어서 드러눕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모든 자들이 자신을 ‘선한 존재’로 확립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이 죽는 것까지 ‘주의 일’이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살고 죽는 것 모두를 자신이 책임져야 할 일로 여기고 있습니다. 이런 자들에게 있어 ‘개선의 여지가 없는 욥의 고통’ 앞에서 할 말을 잃어버립니다. 욥의 고통이 없는 친구들에게는, 욥에게 일어난 고통을 해소할 그 어떤 해답도 갖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욥의 친구들은 자신들을 무조건적으로 정당하다고 자부하고 싶어서 욥을 악의 구체적 인물로 몰아세웁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욥의 친구들에게 완강하고 강퍅한 자로 규정해버리십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안에 더 이상 나의 것이 남아 있지 않음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55강-욥기 15장 23~25절(생명의 배선)20201101 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욥기 15장 23~25절입니다. 구약성경 774페이지입니다.

“그는 유리하며 식물을 구하여 이르기를 어디 있느냐 하면 흑암한 날이 가까운 줄을 스스로 아느니라, 환난과 고통이 그를 두렵게 하며 싸움을 준비한 왕처럼 그를 쳐서 이기리니, 이는 그 손을 들어 하나님을 대적하며 교만하여 전능자를 배반함이니라”

욥의 친구가 욥을 살펴보니까 자기와 공통점이 없거든요. 그러니까 이건 분명히 하나님께 대적하는 악인이라고 이렇게 단정 지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악인이라고 확정이 되었으면 남아있는 퍼부을 것은 간단하죠. 그것은 뭐냐 하면 모든 저주스러운 것을 욥에게 가합니다. 이것은 욥의 친구들이 알고 있는 하나님의 공의로움, 하나님의 정의로움, 하나님의 선하심을 자신들의 하나님의 편에 서서 변호하고 변론하고자 하는 의도가 강렬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자기가 지켜드리겠다는 거예요. 그걸 세자로 변증법이라고 해요. 하나님의 논리를 가지고 하나님의 정당함과 우수함과 위대함을 증거하게 되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 백성에 부합되는 태도라고 욥의 친구들은 그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욥의 친구들이 주장하는 이것이 욥기에 나와 있는 것에 대해서 우리는 굉장히 하나님께 감사하고 고마워해야 합니다.

오늘날 교회와 신앙이라는 것이 그리고 모든 철학이라는 것이 어찌 그렇게 욥의 친구들과 딱 사고가 맞는지 사고방식이 딱 들어맞게 되어 있어요. 이것을 신약에 와서 말씀하면 이렇습니다. 성령 없이 하나님의 신자인 척하는 자들의 본색. 성령을 받지 못하고, 성령은 바로 십자가 영입니다.

십자가 지고 난 뒤에, 십자가 이후에, 십자가 취지를 담아서 우리에게 찾아온 그 하나님의 마음이 없는 상태에서, 십자가가 빠져버린 상태에서, 십자가를 나 몰라라 하는 상태에서, 인간존재와 하나님 존재를 규정할 때는 인간은 어떻게 규정하는가. 선과 악에 대한 모든 이성적 논리를 다 끄집어내서 하나님 쪽을 하나님을 선하게 보고 악인들은 악 쪽으로 분리하면서 본인은 하나님 편에 속했다고 그렇게 주장할 수 있습니다.

그것을 욥을 통해서 그대로 다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면 욥기에 이런 욥의 잘못된 주장들이 나와 있는 것은 이걸 세상 끝날까지 마지막 심판 때까지 하나님께서 이 취지를 계속 끌고 가겠다는 겁니다. 악인의 진면목을 그들은 선악을 아는 그 자체가 악인데 그들은 그러지 않고 일단 선악으로 장착해서 그중에서 새삼스럽게 선과 악을 규정하겠다는 그것이 욥 친구들의 주장이고 욥 친구들의 주장이 그냥 가만히 주장만 하는 것이 아니고 어디를 공격하는 요도냐 하면 하나님과 함께 있는 욥을 공격하는 그러한 무기로 사용되어 졌습니다.

이 욥의 친구 이야기가 남의 이야기로 보지 말고 우리 자신의 옛사람이라고 이렇게 보시면 정확합니다. 우리가 성령받기 전에 육적인 존재였을 때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욥의 친구 말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욥 친구입장에서 욥은 어떤 처지에 있는가. 한마디로 말해서 이질적이다. 이질적이라는 말은 인간들이 잘했다 잘못했다는 것을 가지고는 분석이 안 되는 것을 이질적이라고 합니다. 낯설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럼 이렇게 이질적인 욥의 요소를 욥의 친구와 이렇게 만나게 한 것은 인간이 선악으로 이 세상을 지배했잖아요. 인간이 선악으로 아는 배선들을 다 뜯어내고 하나님의 장차 오실 메시아, 생명 되시는 예수님 배선으로 교체해서 깔기 위해서는 너무나 이질적인 것이 필요했던 겁니다. 선과 악으로 따지는 것에 대해서 욥의 친구들은 “우리 주장에 대해서 이의 없지? 하자 없지? 완벽하지? 완전하지? 내가 생각해도 정말 철저하잖아. 하나님이 내 편 들 수밖에 없어”라고 했던 그들이 육에서 영으로 넘어오지 못하는 육의 한계를 아주 낱낱이 깔끔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욥의 친구가.

그래서 우리가 해운대나 바닷가에 가야 어디서부터 땅이고 어디서부터 바다인지 나타나는 것처럼 욥의 친구와 욥을 만나 봐야 욥의 친구와 욥 사이에 있는 경계선, 그 경계선을 쭉 이어보면 그 배선이 바로 십자가 사건과 연결되어 있다는 거죠. 십자가 사건.

예수님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도 바리새인의 선악 요소와 예수님의 이질적인 것이 결합 되었다면 십자가에서 끝난 것이 아니고 십자가 사건 이후에 바리새인 적인 그런 상식적인 것과 성령 받아서 이질적으로 드러나는 새로운 생각이 우리 내부뿐 아니고 우리 주변에도 전부 다 마지막 세상 끝날까지 파급이 되는 거예요.

이게 얼마나 중요합니까? 욥 친구와 욥 사이에 서로 좋아질 수 없고 서로 통할 수 없는 날카로운 대립이, 그 대립이 오늘날 십자가 사건 안에 그 의지가 내용이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에서 욥의 친구가 이야기했기 때문에 욥 친구의 말을 이해해 봅시다.

욥 친구의 말은 악인들은 하나님에게 대적하기 때문에 필히 망한다는 주장을 했는데 정말 하나님이 악인을 치워준다는 그것이 정말 기분 좋은 겁니까? 아니면 본인이 불편해서 그런 거예요. 여러분 주변에 악한 사람이 있다는 것이 어떻습니까. 여러분 삶에 굉장히 껄끄러움과 불편함을 주지 않습니까. 불편하죠. 불평요소가 되는 거예요.

만약에 제가 사는 이 지묘동에 화장터 들어선다면, 안 그러면 이쪽에 대구시에서 쓰레기장 모자라서 쓰레기장 들어선다면 그러면 뭐 환영할 사람 없을 거예요. 만약에 동에서 주민들 모여서 “데모합시다. 하필 우리 동네냐. 데모합시다”라고 하면 얼른 데모하러 나설걸요. 냄새나고 모기 파리 다 끓고 그것이 불편하거든요.

삶이 불편하면 그것이 이 사회는 공정하게 계량화 측정이 가능해요. 집값이 내려가요. 결국은 뭐냐 하면 집값이 내려가는 게 문제예요. 그러면 시 당국에 이야기하겠죠. 시에서 쓰레기장을 철거하든지 아니면 보상금 주고 이사 가게 하든지. 이 보상금 주고 이사 가게 해달라는 말은 뭔 뜻이냐 하면 아쉬운 사람이 돈을 더 내야 우리는 떠날 용의가 있다는 그런 뜻을 내포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 이 욥의 친구 심정은 뭐냐 하면 날 좀 불편하게 하지 말라는 거예요. 나를. 자기 자신을. 서로 생각 같아서 같이 살면 얼마나 좋아요. 그런데 당신은 왜 우리와 생각이 다르고 이질적이야? 이질적인 그 자체가 기분 나쁜 거예요. 우리 선과 악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는 그 자체가 우리를 기분 나쁘게 하는 겁니다.

그것은 제가 말씀드렸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 선악이란 배선을 욥을 통해서 다 뜯어내고 이걸 생명 나무로 교체하려는 하나님의 의도이십니다. 그렇다면 욥의 친구가 욥을 악인으로 규정했다면 그러면 우리는 그것만 알아서는 안 되고 이번엔 욥이 생각하는 악인이 뭔지를 봐야 하겠죠.

욥이 생각하는 악인은 악 그 자체가 나쁘다 좋다가 아니라 의를 드러내기 위한 환경으로 동반해서 등장하는 것이 악이에요. 쉽게 말해서 어둠이 깊어져야 빛이 빛답게 가치가 높아집니다. 어둠이 깊어져야. 하나님이 악인이 있다는 말은 의인이 거기에 있다는 뜻으로 이해하자는 거죠.

악이 있다고 보지 말고 의가 거기서 나온다고 보면 나는 내 주변에 악한 사람이 등장하는 것에 굉장히 싫어하는데, 예를 들면 안산에 조두순이 출소한다고 안산 시내에 CCTV가 스물다섯 개가 설치되었다고 하는데 그게 욥 친구들의 사고방식이거든요. 난 선한데 악한 것이 들어오게 되면 내가 사는 데 불편하다는 말이에요. 불편하다는 말은 솔직하게 말해서 안산 집값 내려간다는 뜻이죠. 우리 집을 누가 살 거예요. 앞에 조두순이 살고 있는데. 집값 제대로 못 받죠.

그런데 욥은 그게 아니고 욥은 욥 친구들의 주장을 충분히 알아요. 왜? 옛날에 같은 생각을 공유했기 때문에 아는데 하나님께서 나로 하여금 저들이 보기에 악인으로 비치게 된 것은 내가 모르는 의를 하나님이 새롭게 생산하려는 의도가 있다고 욥은 생각하는 겁니다. 이런 경우에 욥은 본인이 생각해도 나도 내가 모르는 악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해야 해요. 이 자세가 중요합니다.

사는 데 불편하다고 하지 말고 우리 집 근처에 쓰레기장 올 만큼 우리가 그것밖에 안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여러분이 한번 해보시길 바랍니다. 그래서 욥은 빛과 어두움은 따로따로 생기는 것이 아니고 함께 생긴다. 빛이 있기 위해서 어두움도 새롭게 더욱더 짙어지게 되어있다고 그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그러면 이 악이라는 것과 의라는 것은 상당히 추상명사가 되는 겁니다.

추상명사가 되는데 이 추상명사를 실제로 드러내는 작업이 바로 이스라엘 역사 속에 있습니다. 제가 출애굽기 8장 32절과 9장 35절을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출애굽기 8장 32절에 “그러나 바로가 이때에도 마음을 완강케 하여 백성을 보내지 아니하였더라”라고 여기 바로가 완강케 했다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파리가 덮쳐서 온 애굽나라가 파리 천지가 되어도 약속을 지키지 아니해서 자기 백성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출애굽기 8장 31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모세의 말대로 하시니 그 파리 떼가 바로와 그의 신하와 그의 백성에게서 떠나니 하나도 남지 아니하였더라 그러나 바로가 이 때에도 그의 마음을 완강하게 하여 그 백성을 보내지 아니하였더라”라고 되어있거든요. 바로 마음이 절대로 완강한 것이 아닙니다. 바로는 예전처럼 그대로 살고 있어요.

갑자기 마음이 완강한 것이 아니고 전에 있는 마음이나 두 달 전 마음이나 삼 년 전 마음이나 지금 마음이나 자기는 똑같아요. 그런데 뭔가 새로운 하나님의 일이 벌어지니까 평범한 내 마음이 어떤 마음으로 변하느냐 하면 완악한 마음, 완강한 마음으로 새롭게 밝혀진 겁니다. 하나님이 일으킨 사건에 대해서도 그게 무슨 뜻이냐를 모르고 무슨 의미냐를 모르는 거예요.

출애굽기 9장 35절에 보게 되면 거기 애굽 나라에 비와 우박과 뇌성 이런 것이 폭발해서 떨어졌거든요. 우박이 내렸단 말이죠. 그러니까 바로 왕이 모세에게 어떻게 처리하라고 해서 이제 하나님께서 애굽의 비와 우박과 뇌성을 그치게 해줬거든요. 해놓고 난 뒤에 “바로의 마음이 강퍅하여 이스라엘 자손을 보내지 아니하였으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심과 같더라”라고 되어있어요.

방금 말씀 그대로입니다. 바로는 전혀 생각이 자신은 그렇게 나쁘지 않다고 그렇게 생각한 거예요. 그런데 신약성경에 와서 전체적으로 볼 때 로마서 11장 32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주님의 긍휼을 알리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함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은혜를 베풀려 하심이로다”라고 되어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인간의 마음을 강퍅하게 완강하게 어둡게 이렇게 하신 거예요. 이제 이렇게 완강케 하게 되면 이 배선은 어떻게 깔게 되는가. 그것은 바로 욥으로 하여금 인간들이 하는 모든 측정과 평가가 무용지물이라는 사실을 욥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욥에게 알게 하신다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욥을 통해서 욥을 중심으로 세상에 퍼져나가는 방법을 사용합니다.

그것이 바로 전도서 1장 6~8절에 보면 여기서 솔로몬이 두 가지 예를 들고 세상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두 가지 개념을 드는데 하나는 바람이고 하나는 강물이에요. 강물 또 하나는 바람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서로 표현할 때 눈에 보이는 실제적인 바람과 강물을 통해서 묘사해주고 알리고 있습니다.

“바람은 남으로 불다가 북으로 돌이키며 이리 돌며 저리 돌아 불던 곳으로 돌아가고, 모든 강물은 다 바다로 흐르되 바다를 채우지 못하며 어느 곳으로 흐르든지 그리로 연하여 흐르느니라” 그리고 그 뒤에 8절에 보면 “만물의 피곤함을 사람이 말로 다 할 수 없나니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차지 아니하는도다”

이것은 인간 자체가 액체라는 말입니다. 고체가 아니고 액체. 강물로 말하면 액체이고 바람으로 말하면 기체. 인간은 머무름이 없다. 머무름이 없고 돌아다니는데 그냥 돌아다니는 자체가 그 피곤함을 이루 말할 수가 없다는 거예요. 인간 정체성이라는 것은 구라이고 거짓말이라는 겁니다. 나는 이렇습니다는 말은 거짓말이라는 거예요.

왜냐 하면 강물 같은 것이 어두움이고 바람 같은 것이 하나님의 의가 되기 때문에. 이 세상에 의를 내가 손으로 잡을 수 없고 죄를 안 지으려고 도망칠 수도 없어요. 인간은 그 자체에 전부 다 해체되고 그 안에서 분해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가 악을 이긴다? 그럴 수 없어요. 우리가 어두움을 이긴다? 그럴 수 없습니다. 내가 의를 소유한다? 그럴 수 없습니다. 내가 착함을 유지한다? 그럴 수 없습니다.

인간은 그냥 하나의 바람이고 인간은 그냥 강물 같은 거예요. 전부다 해체시켜 버리는 거예요. 인간 자체 있음을 없음으로 만들어 버리는 거예요. 이점은 욥도 모르고 욥의 친구도 몰라요. 어떤 형체가 있으니까 너는 잘했다거나 못했다가 있지만 지금 본인 자체가 형체가 해리되고 전부다 스프처럼 되는 거예요. 여러분 게살스프 한번 보세요. 게살이 전부 다 찢어져 있잖아요.

게살스프처럼 전부 다 찢어져서 해체되고 해리되고 있는데 뭐를 잡아서 잘했다나 못했다가 어디 있습니까. 그래서 사람들은 뭐 잘못했다고 하면 학교에서 학생에게 뭐 잘못했다고 하면 “선생님, 저 잘한 것도 있어요”라고 이야기하죠. 그 말이 맞죠. 딱 하나를 규정해서 잘못했다고 전체를 규정하지 말고 잘한 것도 있고 잘못한 것도 있다는 거예요.

그 잘했다가 또 잘못할 수도 있고. 그러니까 이게 인간은 바람 같고 인간은 강물 같아서 어디로 튈지 모르고 어디로 헤어질지 모르고 본인도 그것을 장담할 수 없습니다. 본인 자체가 구체화 되지 않기 때문에 본인 자체에 대해서 어둠이다 빛이다 이렇게 규정할 수 없는 대상이에요. 우리가. 그런데 자꾸 우리는 나를 옳다고 생각하고 나를 정당하다고 생각합니다.

이걸 어렵게 이야기해서 ‘시간속에 들어간 모든 존재는 명사가 아니고 동사다’라고 합니다. 명사가 아니고 동사입니다. 그러면 인간은 뭐냐. 바람이 부는 이 커텐에 압핀을 꼽는 거예요. 어디 가서. 하나님께서 욥에게 또는 모세에게 아브라함에게 노아에게 에스겔에게 이사야에게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그 사람 이마에 압핀을 콱 꽂아버려요.

이사야가 ‘나는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선지자 될래요’라는 이런 거 없어요. 하나님의 말씀이 그냥 이사야에게 임해 버리면 그 순간 그냥 고정 점이 되는 거예요. 고정점. 이사야가 아니라 이사야 입에서 나오는 말씀이 그게 정답이 되고 그게 빛이 되는 거예요. 어두움밖에 없는 세계에서. 그러니까 배선을 깔 때 하나님께서 선악 구조가 되어서 인간은 요지부동 우리는 옳다 우리는 정당하다고 고집을 부리고 있는 거예요.

고집을 부리니까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느냐 하면 그 규정 자체에 포함되지 않는 그 규정의 대상이 될 수 없는 벗어나 있는 새로운 욥을 거기에 둬버립니다. 욥 본인도 몰라요. 내가 왜 욕을 얻어먹는지. 본인도 모른다고요. 내가 뭐 나쁜 일 해서 고생하는 것 같으면 겸손하기야 할 텐데 도대체 나쁜 일도 안 했는데 고생은 고생대로 하니까 그러면 내가 여기서 어떻게 더 선하게 일 할 수 있냐. 그것도 없어요.

이렇게 하면 고통에서 면제해 준다는 그 소리를 욥은 하나님에게 듣고 싶은데 하나님은 거기서 입을 다물고 이렇게 하면 내가 고통을 면제해 준다는 어떤 해결책을 제시한 적이 없어요. 욥에게. 우리에게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해결책은 이 땅에 없습니다. 헛꿈 꾸고 교회 오지 마세요. 내 문제 내 인생 해결하는 해결책은 하나님께서 아예 우리에게 준 적이 없습니다. 우리는 명사가 아니고 동사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께 연결된 어떤 긴 배선, 생명이라는 배선에 우리 시대에 압핀으로 이마에 꽂힌 거예요. 압핀이 아파도 그 정도는 괜찮아요. 참아야 합니다. 그냥 이 순간 잠시 태어났다가 사라지면서 그 순간 하나님의 의로움과 빛으로 그 자리에 그냥 꽂혀버린 거예요. 나를 위한 해답은 어디에도 없어요. 나 잘되기 위한 해답은 없습니다. 집값 올라가는 방법, 하나님께서 해결해 주지 않습니다. 데모해도 소용없어요. 데모해도 쓰레기장 옮기지 않습니다.

정답은 이렇습니다. 내가 죽는 것이 주의 활동이다. 내가 죽는 것이 주의 활동이라고 이해하는 수준에 이르시기 바랍니다. 내가 사는 것만 활동이 아니라 죽는 것도 주의 활동에 들어간다는 사실을 여러분 놓치면 안 돼요. 여러분, 죽는 것이 주의 활동이 될 때 비로소 눈이 확 뜨이면서 배선이 보입니다. 생명이라는 배선이 깔리고 있고 깔리는 중에 이게 웬 은혜인지 내가 거기에 포함이 되어버린 거예요. 마치 구약 이스라엘처럼.

자신도 모르게 하나님께서 만드시고 하나님께서 질질 끌고 다니시는 겁니다. 이스라엘을. 오늘날 성도를 끌고 다니듯이. 다시 정리합시다. 우리에게 인생의 해답은 없습니다. 직행 1번 앞에 선전하는 거 있죠. 그 아래 전화번호 적혀 있고. 고부갈등, 이웃 아플 때, 성적 안 오를 때, 이사 날짜 정할 때, 등등 열 가지 정도 적혀 있어요. 그리고 ‘이때는 전화하세요. 인생 해결책은 여기 있습니다’라고 나와요. 여러분들이 버스 타면서 그거 보셔야 해요. 물론 버스 안 타고 자기 차 타고 오지만.

어떤 해결책 자체가 어두움입니다. 성도의 일생이라는 것은 이런 식이에요. 기억하지 않아도 잊히지 않아요. 구태여 기억하지 않아도 주님이 나를 잊지 않아요. 슬픔 뒤에 밀려오는 그리움. 인생은 슬픈데 이건 내 인생을 내가 책임질 이유가 없어요. 아침에도 이야기했지만, 악마가 우리에게 얼마나 화살을 쏘아댑니까.

저 인간 저런 짓 했고 지난여름에 네가 한 일을 안다고 계속해서 악마가 화살을 쏘아대는 거예요. 네 인생, 네 가정 말아먹은 것이 네가 그때 사기당해서 그렇다고 온갖 화살을 쏘아대는데 그렇게 쏘는 것을 의식해버리면 우리는 명사가 돼요. 거기에 대해서 뭔가 대처를 해야 하고 그것은 마치 숙제처럼 내 문제를 내가 꾸역꾸역 내가 해결해야만 천당 가는 것처럼 그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소돔과 고모라 때도 그렇고 욥 때도 마찬가지고 악인들이 욥을 못 잡아먹어서 난리를 쳤어요. 욥의 내세울 수 있는 것은 뭐냐 하면 “이 문제가 내 문제가 아니야. 주님의 문제야”라고 아무리 해도 다른 사람들은 “그것은 너의 문제야. 네가 정신 차리고 네가 개과천선하면 지금이라도 옛날처럼 부자 될 수 있고 몸도 건강해질 수 있어”라고 하고 욥은 “아니야, 아니야. 그게 아니야. 나도 너희들 아는 거 다 알아. 하지만 내 인생은 흐물흐물한 게살 스프같아” 완전히 다 녹아져버렸어요. 호박죽이야 무슨 껍데기라도 있지. 게살스프는 껍데기도 별로 없어요. 물밖에 없어요. 점점 흐물흐물하다니까요. 흐물흐물.

요양병원에 있는 자기 부모보고 “어머니, 30대에는 이렇지 않았습니다. 왜 이렇게 힘이 빠져서 침대에 누워있습니까. 어서 후딱 일어서셔서 옛날 30대처럼 일어나서 우리한테 훈계도 하시고 돈 벌로 나가세요”라고 지금 누워서 뻗어있는데 그런 부모에게 그게 할 소리입니까? 부모가 다 해리되어 있는데. 완전히 찢어져서 몸도 맘도 자기 정신도 없는데.

그게 우리 모습이에요. 우리 모습은 어떤 모습이다? 내 인생에 내가 책임질 게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 내 인생에 대해서 아무것도 책임질 수가 없는 입장이에요. 명사가 아니고 동사니까. 바람의 일종이니까. 바람에 날려가는 낙엽 같아서 이 계절을 누가 이겨요. 바람을 누가 이기고 강물을 누가 이깁니까. 전도서는 솔로몬이 이걸 알고 정답을 안 거예요.

인간은, 그냥 인간은 뭐냐? 삶은 뭐냐? 계란입니까? 삶은 피곤이다. 삶은 그냥 피곤함이에요. 죽는 게 제일 낫다는 말이죠. 살아봤자 피곤해요. 참 이미 우리는 태어나면서 해리되고 죽을 수밖에 없는 입장이에요. 그러니까 자기 죽는 날에 제삿날에 생일잔치 벌이지 마세요. 그 순간도 자기 제삿날이에요. 생일날이 아니고.

중요한 것은 말씀이 우리 압핀처럼 말씀을 발견하는 거예요. “욥아, 네가 네 문제 해결하지 말고 말씀이 드러내기 위해서 말씀이 찾아와서 너로 하여금 이질적인 존재로 달라지게 한 것에 대해서 감사하라. 이게 장차 오실 하나님은 우리가 생각 못 한 이질적인 하나님으로 오신다는 징후를 욥은 그 증거를 갖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주님의 해석할 수 없는 인간의 힘으로 안 되는 십자가 증거로 품고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사는 것만 주의 일인 줄 알았는데 악착같이 버티는 것만 주의 일인 줄 알았는데 맥빠져 힘없이 죽는 것도 감사할 주의 일인 것을 그동안 몰랐습니다. 주님의 말씀이 어떻게 작동하고 인간이 살아있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살아있고 하나님의 의가 살아있고 십자가가 살아있고 주님이 살아있는 것을 증거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