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방진 훈계
2020년 10월 18일 본문 말씀: 욥기 15:7-16
(15:7) 네가 제일 처음 난 사람이냐 산들이 있기 전에 네가 출생하였느냐
(15:8) 하나님의 모의를 네가 들었느냐 지혜를 홀로 가졌느냐
(15:9) 너의 아는 것이 무엇이기로 우리가 알지 못하겠느냐 너의 깨달은 것이 무엇이기로 우리에게는 없겠느냐
(15:10) 우리 중에는 머리가 세기도 하고 연로하기도 하여 네 부친보다 나이 많은 자가 있느니라
(15:11) 하나님의 위로와 네게 온유하게 하시는 말씀을 네가 어찌 작다 하느냐
(15:12) 어찌하여 네가 마음에 끌리며 네 눈을 번쩍여
(15:13) 네 영으로 하나님을 반대하고 네 입으로 말들을 내느냐
(15:14) 사람이 무엇이관대 깨끗하겠느냐 여인에게서 난 자가 무엇이관대 의롭겠느냐
(15:15) 하나님은 그 거룩한 자들을 믿지 아니하시나니 하늘이라도 그의 보시기에 부정하거든
(15:16) 하물며 악을 짓기를 물 마심 같이 하는 가증하고 부패한 사람이겠느냐
욥의 친구는 바른 소리만 합니다. 하지만 그의 문제점은 단독적이라는 사실입니다. 이미 본인이 알 것은 알고 정리할 것을 다 정리했기에 굳이 자기의 미흡함을 채워줄 다른 이가 필요가 없다고 보고 있습니다. 욥의 친구의 주장은 이러합니다. “우리 인간이 신이 아니기에 우리가 진리를 다 아는 것을 한계가 있고 그래서 우리는 더러운 죄인이다”는 겁니다.
이게 정답입니까? 신약적 입장에서 정답은 ‘홀로 살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아무리 겸손하게 신 앞에 엎드려고 홀로 스스로 엎드리는 것이 교만입니다. 욥은 곧 욥의 친구들의 한계입니다. 욥의 친구들이 아무리 하나님을 높이고 자신을 늦추어도 욥에게 일어난 낯선 현상이 이해못한다면 그들은 진리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르는 겁니다.
같은 인간의 입장에서 욥의 친구의 주장은 주위 사람들로부터 어디 하나 흠잡을 데 없고 티 잡을 데 없는 것처럼 보일 겁니다. 욥의 친구의 시도하는 논리는, 평소에 인간들이라면 동의하지 않을 수밖에 없는 주장들만 징검다리로서 깔아놓습니다. 일단 옳다면 그 다음 논리로 넘어가는 것에 시비걸지 말라는 태도를 보입니다.
예를 들면, 오늘 본문 7-8절의 경우 같은 겁니다. “네가 제일 처음 난 사람이냐 산들이 있기 전에 네가 출생하였느냐 하나님의 모의를 네가 들었느냐 지혜를 홀로 가졌느냐?” 즉 어느 누구가 감히 자신을 신이라고 자처하고 나설 수 없을 것이라고 여기면서 자신있게 자신의 논리를 전개합니다.
그런데 만약에 이 말을 들은 욥이 “이 세상은 내가 홀로 다 만들었는데?”라고 대꾸한다면 욥의 친구들은 놀라 나빠질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이 세상 그 어느 누구도 자신을 신이라고 할 수 없다!” 바로 이 논리로서 예수님에게 핍박받으신 겁니다. 즉 왜 인간들의 상식에 벗어나느냐고 하면서 공격합니다.
이처럼 욥의 친구들의 주장은 참으로 신앙심이 깊은 데서 나오는 것처럼 보이지만 어디까지 욥이라는 인간이 당하는 고난에 막혀 그 너머로 나아갈 수가 없는 겁니다. 홀로 있으면서 하나님과 함께 있기에 알 수 있는 세계의 비밀을 욥의 친구들은 알 길이 없습니다. 여기에 비해 욥은 하나님에게 간곡하게 요청하고 있습니다.
내가 모르는 그 뭔가를 원하고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욥은 신약과 구약 그 경계선에 있습니다. 신약에 오게 되면 성도는 성령이 와서 가능합니다. 마태복음 10:19-20에 보면, “너희를 넘겨 줄 때에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치 말라 그때에 무슨 말할 것을 주시리니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자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신약의 성도는 본인들의 말이 우세가 아니라 그들 속에 있는 성령님의 말씀이 우세합니다. 곧 신약의 성도는 홀로 살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완성단계에 놓여 있습니다. ‘본인의 완성’이 아니라 ‘주님의 완성’입니다. 자, 무엇에 대한 완성일까요? 욥의 처지를 우리는 보고 있습니다.
욥은 욥기 1장에 나오는 하나님과 악마의 내기에 대해서 전혀 아는 바가 없습니다. 욥의 고통이 이 악마와의 내기에서 비롯된 것임을 욥은 모르고 있습니다. 즉 욥의 운명이 욥 본인의 착함이나 성실함과 무관하다는 사실을 그는 짐작 조차 못합니다. 그러면서도 욥은 본인조차 있는 것으로 진리가 충족되지 못함을 잘 압니다.
이 점에서 욥은 친구들과 차이납니다. 욥은 자신에게 주어진 이 고통도 자기의 잘못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관된 계획에 의해서 그래야만 했음은 압니다. 하지만 이 계획에서 왜 자신이 굳이 고통당하는 역할로 등장해야 하는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욥 시기에서의 ‘하나님과 함께 하심’과 신약 시대의 ‘힘께 하심’에 차이가 있습니다.
신약에서의 ‘함께 하심’에 구약에서 미리 예언되어 있습니다. 아가 5:2에 보면, “내가 잘지라도 마음은 깨었는데 나의 사랑하는 자의 소리가 들리는구나 문을 두드려 이르기를 나의 누이, 나의 사랑, 나의 비둘기, 나의 완전한 자야 문 열어 다고 내 머리에는 이슬이, 내 머리털에는 밤 이슬이 가득하였다 하는구나”고 되어 있습니다.
즉 신약에서는 사랑의 차원입니다. 구약에서 질문이 된 것이 신약에서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해답이 주어집니다. 이 사랑이 어느 정도인가 하며, 별 한 것도 없이 일방적으로 ‘완전한 자’라는 칭호를 받으면서 다루어집니다. 성도가 밤에 잠을 잘지라도 그 성도의 내부에서는 하나님의 심장이 뛰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성도 안에서 살아 움직이십니다. 욥은 바로 이런 사랑의 차원을 아직 접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랑이란 나를 위한 질문 자체가 하나님에게는 전혀 먹히지 않게 하는 원리입니다. 즉 인간 쪽에서 진리를 추궁하거나 탐색할 필요조차 없게 만들어 버립니다. 인간은 모르는 상태에서 주어지는 것이 사랑입니다.
이는 곧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독자적으로 가치를 부여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사랑하시는 바로 그 사랑 자체에 의미를 두십니다. 단지 성도는 이런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내는 표적지에 해당됩니다. 이처럼 인간의 세계는 철저하게 닫혀 있고 갇혀 있는 세계입니다.
이 닫혀 있는 세계로 유지시키시는 것도 하나님의 일방적 사랑을 강조하시기 위함입니다. 이 말은 곧 욥의 친구처럼 아무리 신에 대해서 연구해봤자 하나님께서 욥같은 존재를 통해서 거절하고 거부하시는 겁니다. 요한복음 8:56-58에 보면,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유대인들이 가로되 네가 아직 오십도 못되었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느냐 예수께서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기존의 인간들이 진리에 대해서 아는 바가 없음을 나타냅니다. 반면에 신약 성도를 보면, 하나님의 감추어진 비밀에 대해서 화답하게 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 3:9에 보면,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신약 성도의 당당함은 그만큼 자신의 영을 통해 사랑을 이해하는 천국백성을 생산해놓으신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을 통해서 주님의 말씀만 터져 나오게 하옵소서. 우리 자신도 모르고 튀어나오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53강-욥기 15장 7~16절(건방진 훈계)20201018 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욥기 15장 7~16절입니다. 구약성경 774페이지입니다.
“네가 제일 처음 난 사람이냐 산들이 있기 전에 네가 출생하였느냐, 하나님의 모의를 네가 들었느냐 지혜를 홀로 가졌느냐, 너의 아는 것이 무엇이기로 우리가 알지 못하겠느냐 너의 깨달은 것이 무엇이기로 우리에게는 없겠느냐, 우리 중에는 머리가 세기도 하고 연로하기도 하여 네 부친보다 나이 많은 자가 있느니라, 하나님의 위로와 네게 온유하게 하시는 말씀을 네가 어찌 작다 하느냐, 어찌하여 네가 마음에 끌리며 네 눈을 번쩍여, 네 영으로 하나님을 반대하고 네 입으로 말들을 내느냐, 사람이 무엇이관대 깨끗하겠느냐 여인에게서 난 자가 무엇이관대 의롭겠느냐, 하나님은 그 거룩한 자들을 믿지 아니하시나니 하늘이라도 그의 보시기에 부정하거든, 하물며 악을 짓기를 물 마심같이 하는 가증하고 부패한 사람이겠느냐”
방금 한 이 이야기가 욥이 이야기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에게 책망받게 되는 욥의 친구 대만사람 엘리바스가 한 이야기입니다. 누가 이야기했는지를 딱 감추고 이 대목만 따서 이 멋지고 신앙에 깊이 있는 말씀을 만약 우리 주변에 어떤 사람이 한다면 저 사람은 성령 받은 사람이라고 아주 단언할 만한 그러한 내용으로 되어 있지요.
그 내용은 7절부터 쭉 보면 ‘네가 하나님이야’라는 이야기예요. “네가 제일 처음 난 사람이냐 산들이 있기 전에 네가 출생하였느냐”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뒷부분은 무슨 이야기냐 하면 “네가 인간이기에 네가 세상일을 다 모르잖아. 그런데 시건방지게 누구를 가르치려고 하느냐. 여기 나이 많은 사람 중에 너의 아버지보다 나이 많은 사람도 있다. 이게 어디서 배운 버르장머리야”라는 이런 식이죠.
“너희 아버지보다 더 나이가 많은 사람인데, 인생을 살아도 너보다 훨씬 많이 살았어. 그런데 인생을 별로 살지도 못한 네가 어떻게 이 어르신네, 나이 65세 이상 어르신네를 훈계하려고 어디서 훈계질이야. 네가 나를 훈계하려고 해? 민증 한번 내보자. 누가 나이 많은지”라고 이런 식으로 구박을 합니다.
14절에서는 “사람에게서 난 사람 치고 깨끗한 사람이 누가 있겠느냐. 누가 자신만만하게 의롭다고 할 수 있느냐. 우리가 살아가는 것은 우리는 부족하고 오직 의로우신 하나님 믿고 살아가는 것이 우리 인간의 참 도리다. 욥아, 내 말에 틀린 말 있느냐? 없거든 동의해라”라는 식으로 욥의 친구 엘리바스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말에 동의해야 합니까? 수십 번 이야기하지만, 다시금 말씀드리면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구약입니다. 신약이 아닙니다. 구약이고 신약이 아니라는 말은 구약에서는 개개인과 인간 대 인간관계로 굳어지지만 그게 한계지만 신약에 오게 되면 하나님과 함께 있는 자를 성도라고 이야기해요. 홀로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과 같이 있습니다.
따라서 그 신약 성도를 두고서 만약 대만 사람 엘리바스가 하는 말이 “네가 처음 난 사람이냐?”라고 물으면 “그래, 처음 난 자다” “이게 나이가 몇 살이야. 네가 아브라함보다 나이가 많아?”라고 하면 신약 성도는 “아브라함이 있기 전에 내가 있었다”라고 나오는 거예요. 그러면 지금 엘리바스라는 사람이 욥이 추궁해 들어갈 때 나름대로 계획이 있어요. 거부할 수 없는 이건 누가 봐도 동의할 수밖에 없는 공리 같은, 수학의 공식 같은, 모든 사람이 동감하는 이야기를 앞에 탁탁 깔아놔요.
그걸 징검다리처럼 깔아놓고 “요거 네가 맞다고 생각하지. 그러면 그다음 진도 한번 나가보자. 요거 맞지? 그다음 더 논리적 진척을 해 볼까? 맞지? 그러니까 네 말은 틀리고 내 말은 맞잖아”라는 논리를 펴는 겁니다. 제일 먼저 7절에 보면 “네가 제일 처음 난 사람이냐 산들이 있기 전에 네가 출생하였느냐”라고 추궁하는 것은 ‘너 하나님 아니잖아’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너 하나님 아닌 거 맞지? 그렇다면 내 말이 맞고, 내 말은 이제 맞는 말만 시작하는 거야. 말부터 스타트를 하니까 말 끝나고 난 뒤에 너는 나에게 굴복해”라는 식이죠. 그런데 이 이야기를 예수님에게 해 봅시다. “네가 제일 처음 난 사람이냐” “그래” 처음 난 사람보다 더한 분이죠. “산들이 있기 전에 네가 출생하였느냐” “그래, 산은 내가 만들었다”라고 나오시는 거죠. 잠언서 8장에 보면 지혜가 있어서 지혜가 모든 천하를 다 만들었어요.
그리고 예수님은 아담이에요. 두 번째 아담입니다. 아담을 아담 되게 하신 아담이에요. 그러면 이게 욥의 친구들이 놓친 게 있죠. 신약적 지혜, 신약에 창세 전에 감추었던 비밀이 신약에 나타나는데 창세 전에 감추어진 그 비밀에 대해서 엘리바스는 경계선 밖에 있는 거예요. 그런데 욥은 자신도 분명히 구약 사람이기 때문에 신약에 와야 비로소 밝혀지는 그 비밀의 진리에 대해서 자신도 밖에 있으면서도 욥은 그냥 밖이 아니고 다리를 걸치고 있어요. 경계선에 있습니다.
내 인생인데 욥의 친구는 내 인생은 내 인생으로 다루고 있는데 욥은 분명히 내 인생인데 장차 오실 예수님이 욥의 인생을 다루게 되면 이게 겹쳐지는 부분이 있어요. 중복된다고요. 욥 본인도 그 점에 대해서 어떻게 이런 사태가 죄는 안 지었는데 벌은 받는 이런 이상한 질서가 상황이 나에게 왔는지 욥 본인도 궁금하다는 거죠. 그래서 구약은 질문입니다. 궁금해. 궁금하다. 신약은 답변, 답변, 답변이에요.
수학 정석 보면 질문 있고 해답은 제일 끝에 보세요. 제일 끝에 신약 성경이 있고 거기에 답이 있어요. 그런데 어떤 사람은 답지만 보는 사람이 있어요. 답지만 봐서는 이게 왜 답인지를 몰라요. 1번에 가, 2번에 나, 3번에 6, 4번에 8... 답은 아는데 이게 어디서 6이 나오고 8이 나오는지 몰라요. 구약을 보고 그 구약에서 진리에 대해서 목말라하고 진리에 대해서 고민하는 사람의 견해, 욥이죠, 욥기, 시편에 이런 견해를 우리가 알고 그다음에 신약에 와서 답지를 봐야 해요.
예수님의 말씀과 예수님의 십자가 의를 이렇게 연결시켜야 한다고요. 그러면 질문이라고 함부로 질문하면 안 되겠지요. 욥의 친구 엘리바스가 하는 질문에 대해서는 우리가 오히려 비평해야 합니다. 질문하려면 모르겠다가 되어야 하는데 오늘 본문에 대만사람 엘리바스는 본인이 얼추 안다는 거예요. “내가 아니까 나보다 젊은 너에게 이야기한다. 우리 중에는 머리가 세기도 하고 연로하기도 하여 네 부친보다 나이 많은 자가 있느니라”라는 말은 아마 엘리바스 본인을 두고 한 이야기가 아닌가 짐작이 갑니다.
“내가 너보다 나이 많다”라고 직설적으로 이야기한 것보다 “우리 중에 너보다 나이 많은 사람 많이 있거든. 까불지마. 세상 얼마 살지도 않은 게. 까불지마. 어디 건방지게 어른을 훈계해”라고 나이 많은 사람이 있다고 언급하는 자체가 본인이 가장 연로한 사람이 아닌가 생각이 드는데 그건 중요한 문제가 아니죠. 중요한 것은 엘리바스가 나이를 언급한다는 것은 너는 해답 모르지만 나는 해답 안다는 자신감을 드러내고 있는 겁니다.
그러면 엘리바스에게는 신약이 필요 없어요. 신약과 연결이 안 된 거예요. 지금 이 상태라면. 그래서 욥기 마지막에 보면 오히려 엘리바스를 누가 책망하느냐 하면 하나님이 책망합니다. 엘리바스는 하나님에 대해서 온갖 존대와 찬미와 가장 좋은 것을 하나님께 돌림으로써 “지금 하나님과 나는 같은 마음입니다. 갖은 편입니다”라고 다른 사람에게 과시하고 있는데 주님께서 뒤통수를 치시면서 “이게 어디 나를 개뿔도 모르면서 함부로 나를 너의 편이라고 하느냐? 언제 내가 네 편인데. 나는 욥 편이야. 네가 공격하는 욥이 내 편이지 너는 내 편 아니야”라고 하실 때 욥의 친구들이 얼마나 황당하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욥 친구의 말도 귀담아 듣고, 그것도 내 모습이고, 욥도 내 모습이고, 신약에 와서 예수그리스도의 영을 받은 그 모습도 우리 모습이고 그것 때문에 우리는 성경 말씀이 우리 속에 같이 있다는 것을 말씀을 통해 확인하는 그런 순간순간들이 되는 겁니다. 인생을 살면서. 아침에도 이야기했지만, 인생을 살면서 어떤 순간이 오면 나는 결정적으로 잘된다고 보지 마시고 이미 결정된 것을 매일의 삶 속에서 확인하는 거예요. 조금씩 매일 살면서 확인하는 거예요.
‘아, 내 행함과 관계없이 내 운명은 내 팔자는 확정 났구나’라는 그걸 느긋한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겁니다. 그걸 어떻게 확인할 수가 있는가. 이 세상 우리가 부닥치는 이 현실감과 그리고 성경 말씀이라는 이 정답과 비교하면서 그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께 다시 한번 영광을 돌릴 수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만 엘리바스와 엘리바스의 문제점은 혼자 잘났어요. 혼자 정답을 다 안다는 이게 문제가 됩니다.
그러면 욥의 문제는 뭐냐. 혼자 분명히 정답은 알고 있는데 뭔가 필요로 한다는 거예요. 어떤 게 필요하냐. ‘하나님이여, 내 말이 내 선에서는 맞다고 생각하는데 주님 생각은 어떻습니까’라고 물을 수 있는 여지가 있다는 게 욥과 욥 친구의 차이에요. 그 차이에요. 욥의 친구는 ‘나 다 안다’라고 끝나버렸어요. “우리는 인간이니까 부족하다. 반대하려면 반대해봐. 욥아, 내 말 반박해봐. 안되지? 봐봐. 그러니까 나는 정답을 알잖아”라고.
욥은 하는 말이 “당신이 아는 정답을 나도 알고 있는데 그렇게 당신같이 나도 몸이 건강했으면 그게 정답이라고 내가 성급하게 내리겠는데 그 정답을 알고 있는 당신이나 나나 내가 지금 이유도 없이 아프다”라는 거예요. 그리고 이 아픔이 단순히 아픈 것이 아니라 이게 뭔가 하나님이 나를 압박하는 아픔이고 이건 뭔가 우리가 모르는 게 있다는 것을 욥은 친구들에게 이야기하고 있는 거예요.
“친구들이여, 너무 장담하지 마시고요. 우리가 모르는 것이 있다고 생각해 봅시다”라고 하면 욥의 친구들이 “그 말이 그 말이잖아. 내가 그 말이잖아. 우리는 이미 아는데 너만 모르고 있어”라고 하면 “아니요, 그게 아니고 우리들이 알고 있는 그 경계선 바깥에 뭐가 있다니까요”라고 하는 거예요. 있긴 있지요. 악마와 하나님이 이야기한 것을 욥은 모르고 있으니까 지금 욥이 문제 되는 거예요.
욥을 두고 악마와 하나님이 내기했잖아요. 그 사실을 욥이 모르고 있는 거예요. 그 여파로 지금 욥이 아픈데. 혹시 여러분이 몸이 아프거든 나는 잘못한 것이 없는데 지금 하나님께서 악마에게 슬쩍 건드려 보게 한 것일 수도 있어요. 사람 일은 누가 장담 못하기 때문에. 그렇다면 여기서 중요한 것은 겹치기예요.
만약에 욥에게 예수님이 함께 계시다고 한다면 여기 욥의 친구 하는 말이 “네가 제일 처음 난 사람이냐 산들이 있기 전에 네가 출생하였느냐, 하나님의 모의를 네가 들었느냐 지혜를 홀로 가졌느냐”라고 윽박지를 때 욥은 “그래 나다. 내가 하나님이다”라는 소리를 안 하고 싶은데 욥은 가만히 있는데 욥을 통해서 툭 튀어나왔어요. “내가 그렇다. 내가 하나님이다”라고 해놓고 욥이 있다가 말하기를 “그래 내가 하나님이야. 산들이 있기 전에 내가 산을 만들었어”라고 하다가 갑자기 욥이 ‘내가 지금 무슨 소리 하는 거야. 내가 미쳤나’라고 생각하면서 “미안합니다. 죄송합니다. 제가 갑자기 정신이 나간 모양입니다”라고 이럴 거란 말이죠.
마태복음 10장 20절에 보면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자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라고 할 때 내가 하는 말이 성령이 하시는 말이니 믿으라는 것이 아니고 말하는 본인이 화들짝 놀란다니까요. “죄송합니다. 제가 이런 의도로 한 것이 아닌데. 속에 있으신 분 가만히 있으세요. 왜 이래요. 가만 가만.”라고 본인이 깜짝 놀란다니까요. 본인이. 그런 일 여러분들이 많이 경험 안 했어요?
추석날 설날 이렇게 모였을 때 어떤 훌륭한 목사가, 정말 훌륭하기 곱하기 훌륭하기, 존경하기 곱하기 존경하기인 목사가 “한국 교회 개혁되어야 해. 한국 교회 너무 돈만 사랑하고 교회당만 사랑하고 말씀으로 가지 않고 왜 교회당을 사랑하고 교인들 숫자만 헤아리느냐”라고 할 때, 이 시대 존경할 유일한 목사는 그 사람밖에 없다고 하는 그 사람이 말했을 때 어떤 친척분이 그 사람 설교를 듣고 “야, 아직도 우리 한국교회 안 죽었어. 그런 분이 살아 있다니”라고 하면, 나이가 70쯤 되었는데 지금은 몸이 아파서 퇴직했지만 아직도 설교는 하고 있어요, 아무튼 그렇게 이야기할 때 갑자기 “그 사람 이단인데요”라고 튀어나오는 거죠.
“아니, 한국 교회를 이렇게 생각하고 오직 말씀으로 돌아가라 하고 한국 교회는 교인 수만 자랑하는데 우리는 삶으로써 신앙심을 보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인데”라고 누가 말하면 갑자기 “그 사람 이단이에요”라고 튀어나오는 거죠. 본인도 모르게 성령께서 확 이야기하게 하시는 거죠. 본인도 모르게. 남들은 다 속아 넘어가죠.
꼭 욥의 친구 같아요. 하나님은 위대하고 하나님은 주권을 갖고 있고 우리는 부족한 죄인이고 세상에 이런 완벽한 복음이 어디 있느냐고 욥의 친구는 들이대고 있는 겁니다. 과연 이게 욥에게 먹힐 리가 없고 하나님에게도 먹힐 리가 없죠. 함께 있다는 것은 이미 구약에 함께 있음의 그 모습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아가서 5:2에 보면, “내가 잘지라도 마음은 깨었는데 나의 사랑하는 자의 소리가 들리는구나 문을 두드려 이르기를 나의 누이, 나의 사랑, 나의 비둘기, 나의 완전한 자야 문 열어 다오”라는 아가서라는 그 사랑의 책에 나는 밤에 잠을 잘지라도 내 심장은 펄떡펄떡 뛰고 있다는 겁니다. 내 안에 하나님이 계셔서 내 심장을 뛰게 하신다는 겁니다.
아가서에서는 뭐냐 하면 나는 잘지라도 내 남편인 신랑 맞을 준비를 다 하면서 내 마음이 팔딱팔딱 안 자고 살아 있다는 거예요. 밤에 오시더라도 밤 중에라도 내가 마중을 나갈 수 있도록 그 마중 나갈 요소를 신랑 쪽에서 나에게 집어넣은 거예요. 이게 신약 성도입니다. 말하는 것은 엉망이고 행동도 엉망인데 심장은 주님의 심장이에요. 성령입니다. 성령은 주님의 영을 말하고 주님의 마음을 말합니다. 그 마음이 우리 속에 들어온 거예요.
이게 함께 있음이에요. 함께 있다고 해서 정신 차리고 바르게 사는 게 함께 있는 것이 아니고 내가 무슨 기찬 짓을 해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나의 사랑, 나의 삐둘기, 나의 완전한 자”라고 하세요. 우리보고 완전한 자래요. 세상에 이런 황송한 말을 누구에게 듣습니까. 무슨 짓을 잘했다고 완전한 자예요. 완전한 자여. 이게 사랑의 효과입니다. 사랑의 혜택이에요.
악마가 이걸 가리기 위해서 애를 쓴 거예요. 한국 교회 바르게 해야 한다고 어떤 이단 짓도 하는데 그런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복음은 그런 걸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바르게 하고 바르게 하면 교회가 인정을 받아서 사람들이 몰려온다는 그런 소리가 아닙니다. 교회에서는. 성도 안에 살아 있는 주님의 심장 이야기하는 거예요. 성령 이야기, 십자가 이야기하는 거예요. 십자가에 다 이루심 이야기하는 거예요.
지금 욥은 경계선에 있어요. 분명히 그런 것이 있는데 ‘주님 무슨 연유로 나에게 고통을 줍니까’라고 지금 이 상황에서 욥만 깨어있어요. 친구들은 지금 자기 잘난 척한다고 바빠서 모른다고요. 친구들 수준이 어떤 수준이냐면 이런 겁니다. 제가 TV에서 언뜻 봤는데 어떤 아줌마가 이런 소리 하고 있어요. “각시는 밥하고 남자는 돈 벌어 오고 하는 것이 사회적 합의 아닙니까?”라고.
각시는 밥하고 남자는 돈 벌어 오고 하는 것이 사회적 합의라는 거예요. 물론 이 안에 복음이 전혀 섞이지 않았어요. 복음이 섞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각시는 밥하고 남자는 돈 벌어 오고 하는 것이 사회적 합의가 아니냐’라는 말에 우리는 갑자기 고개를 끄덕이고 싶어요. 그러니까 욥의 친구 수준이 뭐냐 하면 ‘인간 대 인간에서 상식만 있으면 언제든지 좋은 사회, 평안한 인생을 보낼 수 있습니다. 사회적 합의만 있다면 불편 없이 인생을 편하게 그리고 정당하게 살 수 있습니다’라는 그 수준이에요. 그 수준. 욥의 친구들 레벨이 그 레벨이라고요.
욥의 친구 이야기가 우리는 매일 같이 파편처럼 날아옵니다. 우리 성도에게. 뉴스를 통해서 사회를 통해서 긍정할 수밖에 없고 상식적으로 합당한 이야기가 매일같이 날아와요. 매일같이. ‘교회 때문에 코로나 퍼졌으니까 교회는 단계 높이면 모이지 말아야 합니다. 거기에 대해서 반박해 보세요’라는 이런 식으로. ‘반박해 보세요’라는 말이 뒤에 붙어 있는 한 계속 날아옵니다.
그러니까 사회에 모든 사람은 고개 끄덕이면서 동의할 수밖에 없죠. 그러나 그것은 가짜입니다. 전부 다 엉터리예요. 왜? 나 잘난 맛에 나 혼자 살 수 있다는 것이 그들의 진리이기 때문에. 나만 잘하면 나는 살 수 있는 세계. 세상, 사회, 눈에 보이는 것이 그것밖에 없어요. 그러나 욥은 지금 갈등을 일으킵니다. ‘주여 어떻게 해결 좀 되지 않겠습니까. 좀 오셔서 제 형편을 설명해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이야기합니다.
그게 나중에 욥에게 하나님이 찾아와서 이런 식으로 이야기하죠. 욥이 말하기를 “주님이여, 이제 주님을 보는군요”라고 했을 때 하나님은 이런 차원입니다. “나는 벌써 너를 봤다”라는 차원. 우리는 새삼스럽게 본다고 생각하고 주님은 벌써 보고 있었어요. 제가 강남강의에서 어떤 노래를 말하면서 이 대목을 설명했습니다.
“그대는 나를 알아도 나는 기억하지 못합니다. 주님 언제부터 저를 봤어요. 저는 기억지 못해요”라고. 이문세가 불렀던 ‘사랑이 지나가면’이라는 노래입니다. 그 노래 가사에 보면 그래요. ‘그대 나를 알아도 나는 기억을 못 합니다’라는 내용이 나와요. 주님이 욥에게 찾아올 때 너는 나를 이제 보지만 나는 애초부터 너를 보고 있었다는 거예요.
그런데 신약에 오면 그런 사람들이 나만 아니고 여기저기에서 막 일어나게 되어 있어요. 그걸 마태복음 3장 9절에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돌들이 부르짖는다고 나와요. 돌들이.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여러분들이 고요한 아침에 운동 삼아 산속으로 산책하게 되면 여기에서 뻐꾸기가 “뻐꾹” 하면 저쪽 계곡에서 “뻐꾹” 하지요. 화답하지요. 주의 말씀에 화답하게 되도록 창세 전부터 이미 주께서 알고 계시는 분들이 복음만 전해버리면 저기 미국에서 뻐꾹, 여기에서 뻐꾹 합니다. 하찮은 돌들이 화답한다고요. 반응을 나타낸다고요.
수십 명 모여서 태극기 흔들고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흩어져도 화답할 때는 화답하게 되어 있는 이 세상, 그것은 우리 쪽에서 구원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 쪽에서 익히 안다는 그 결정적 결론을 우리는 성령이 올 때 그제 서야, 우리는 확인하고 또 매일 매일 그걸 확인할 수가 있는 겁니다. 누구를 우리가 남들 앞에서 내 믿음 좋다고 그걸 자랑질해야 합니까, 아니면 나는 믿음 없다를 자랑질해야 합니까?
나는 믿음도 없고 가질 필요도 없고 ‘주께서 이미 아신다’라고 하는 것이 주님을 증거 하는 겁니다. 요즘 비행기 뜨지 않아서 사람들이 항공사들 어렵다고 하는데 싱가포르, 대만에 어떤 항공사는 싱가포르는 비행기 떠서 한국에 안 가고 인천공항 위로 갔다가 다시 돌아가고 태국에 비행기는 아예 비행장에 비행기가 있어요. 있고 기내식만 제공한답니다. 무려 50만 원인데 30분 만에 그 상품이 완판되었답니다.
기내식, 뭐, 라면 하나 주고 그게 뭐라고 그 기내식 먹고 싶다고, 거기서 또 승무원들이 제복 입고 비행기 안의 풍경을 체험하는데 30만 원 받는다는 거예요. 비행기는 날지도 않아요. 꼭 오늘날 교회 같아요. 전혀 천국 갈 생각도 안 하고 천국이 뭔지도 모르고 그냥 시늉만 하는 거예요. 그냥 폼만 내는 거예요. 비행기는 떠야 맛인데 뜨지도 않고 비행장 내려놓고 이제 집에 가서 월요일 되니까 볼일 보고 또 일요일 되면 멈춰진 교회 와서 폼내고. 이건 혼자 사는 생활이잖아요. 혼자.
마지막으로 시편 24편 7절을 제가 보겠습니다. 장차 오실 것이 구약 시편에 예언되어 있습니다. 여기 보면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라고 되어 있어요. 이게 뭐냐 하면 이 세상은 문들로 인해 이미 갇혀 버렸어요. 비행기는 뜨지 못하고 땅에 지상에 있는 채로 갇혀 있는 거예요. 그냥 욥의 친구처럼 인간들 수준으로써는 그게 전부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인간은 죄인이고 하나님은 거룩하시고 여자에게서 난 사람이 어떻게 완전할 수 있는가. 그래 우리는 많이 겸손해서 부족한 자라고 여기자’라고 백날 그런 소리 해 봐야 전혀 실제적이 아니에요. 그냥 연출한 거예요. 연출. 위대하신 하나님 앞에 우리는 그냥 주눅 들어 살면 하나님께서 겸손하다고 봐주겠지. 아니에요. 신약에는 돌들이 부르짖어요.
그게 뭐냐 하면 7~9절에 “영원한 문들아 들릴찌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가시리로다, 영광의 왕이 뉘시뇨 강하고 능한 여호와시요 전쟁에 능한 여호와시로다,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찌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찌어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드디어 모든 것을 완성하시고 예루살렘 문에 들어갈 때 문들은 그분을 거부할 수 없어요. 닫힌 문이 아닙니다. 활짝 열린 문이에요.
주님께서 친히 들어가서 완성한 천국의 문으로 주님께서 우리를 이끌어 가십니다. 그런데 욥의 친구 같은 세상 사람들은 뭐냐 하면 끝이 없는 길이에요. 계속 끝이 없는 길인데 성도는 뭐냐 벗어난 길이에요. 끝이 없는 길이 아니고 김밥 옆구리 터진 것같이 다른 길로 가버렸어요. 다른 길로. 가봤자, 가봤자, 인생 40, 50, 60, 70 살아봤자 그날이 그날이고 뭐 별거 없어요.
교회 오면 자버리고 집에 가면 그만인데 끝이 없는 길이 아니고 하루를 살더라도 벗어난 길, 바로 내 인생이 아니고 지금까지 주께서 우리 안에서 나로 하여금 말씀을 토해내게 하는 거예요. 아가서 말씀을 시편 말씀을 예수님 십자가 이야기를 토해내는 그 작용은 우리의 능력이 아닙니다. 지금 우리와 함께 있는 주님의 능력으로 본인도 깜짝 놀라요. ‘어떻게 내가 이런 말씀을’이라고 본인도 놀라듯이 그 말이 토해집니다.
바라기는 매일매일이 주님에 의해서 깜놀, 깜짝 놀라는 생활의 연속이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참 똑똑하고 훌륭하고 신학 많이 알고 경우 있고 예의 바르고 그런 사람들이 얼마나 지천에 많은지요. 백날 해야 그들이 죽은 자라는 것을 저희들이 발견하게 해 주시고 우리도 역시 죽은 자에 불과하지만 주님심장으로 하여금 우리가 동행하는 가운데서 그저 천국 이야기만 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