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의 거짓됨
2020년 10월 25일 본문 말씀: 욥기 15:17-22
(15:17) 내가 네게 보이리니 나를 들으라 내가 본 것을 설명하리라
(15:18) 이는 곧 지혜로운 자들이 그 열조에게서 받아 숨기지 아니하고 전하여 온 것이라
(15:19) 이 땅은 그들에게만 주셨으므로 외인은 그들 중에 왕래하지 못하였었느니라
(15:20) 그 말에 이르기를 악인은 그 일평생에 고통을 당하며 강포자의 햇수는 작정되었으므로
(15:21) 그 귀에는 놀라운 소리가 들리고 그 형통할 때에 멸망시키는 자가 그에게 임하리니
(15:22) 그가 어두운 데서 나오기를 바라지 못하고 칼날의 기다림이 되느니라
현실을 현실답게 묘사하기 위해 동원되는 단어들은 다음과 같은 것들입니다. 토지, 건물, 기계, 기업, 주식, 채권, 특허, 가축, 금, 천연자원 그리고 노동력(노동지식)입니다. 이 모든 현실은 돈으로 교환이 가능하고 환산이 가능하다. 그러니 돈 되지 않는 것들은 현실 속에 있을 이유가 없으며 오로지 돈만이 현실에 살아 있습니다.
인간의 가치와 윤리나 존재 의미는 바로 이 현실에서 비롯됩니다. 즉 돈이 많으면 복, 돈이 없으면 저주로 간주되고 돈이 없다는 것은 신으로부터 벌을 받아서 그러하다는 겁니다. 저주는 그만큼 악하기에 벌받을 만해서 벌받아야지만 그래서 신의 정의로움과 진리성은 유지될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욥의 친구 엘리바스는 전통의 진리성을 내세우는데 그 내용 중에 심판자가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 심판하시는 자로 심판받을 대상자는, 바로 전통적으로 사람들에 의해서 진리라고 받아들여지는 그 밖에 사는 자, 곧 악인이라고 불리는 자들이라는 겁니다. 어떤 사람이 선하냐 악하냐는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굳어진 교리에 근거를 두는 겁니다.
인간은 역사적으로 곱게 조용히 흘러온 것이 아닙니다. 악한 것과 선한 것을 한시도 쉬지않고 재편해 가면서 왔다는 점을 욥의 친구는 주장합니다. 보다 선한 것들은 선한 것들끼리 따로 귀하게 모으고 이 선함에 맞지 않거나 모순되는 것들이 발견되는 그것을 발췌해서 제거하는 식으로 오로지 참된 것만 지켜왔다는 겁니다.
그러나 이 방식은 순전히 인간의 것들과 상호 비교하면서 정해온 것입니다. 즉 인간들이 지상에서 먼저 대다수가 동의하는 식으로 진리기준을 정해놓고서 그 내용들을 추후 신에게 허락받는 식으로 진리를 구축해온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서 역사가 흐르는 이스라엘에게서는 선지자가 다른 이야기를 내게 됩니다.
스바냐 1:18에 보면, “그들의 은과 금이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능히 그들을 건지지 못할 것이며 이 온 땅이 여호와의 질투의 불에 삼켜지리니 이는 여호와가 이 땅 모든 주민을 멸절하되 놀랍게 멸절할 것임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세상 나라에게 있어 현실이란 오로지 돈으로 해명이 됩니다.
이는 부자란 하나님으로부터 부자되게 하셨기에 선한 사람임에 분명하다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들이 선함의 증거라고 여기는 그 은과 금이 하나님의 분노의 날에 전혀 먹히지를 않는다는 겁니다. 그러면 스바냐 선지자에게 있어 심판의 결정하는 기준은 무엇일까요? 스바냐 2:15에 보면,
“이는 기쁜 성이라 염려 없이 거주하며 마음속에 이르기를 오직 나만 있고 나 외에는 다른 이가 없다 하더니 어찌 이와 같이 황폐하여 들짐승이 엎드릴 곳이 되었는고 지나가는 자마다 비웃으며 손을 흔들리로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모든 인간들에게 있어 이미 무엇이 진리인가 자리잡고 있다는 겁니다.
그것은 바로 ‘오직 나만 있고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다’는 겁니다. 이 땅에서 태어나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이들은 눈으로 보고 들으면서 이 사실을 계속 확인하게 됩니다. 즉 ‘나보다 더 소중한 것은 이 세상에 더는 없다’는 확신같은 것 말입니다. 이렇게 되면 이 세상이란 새삼스럽게 악인과 선인을 나눌 필요조차 없습니다.
시편 65:3의 말씀과 같습니다. “죄악이 나를 이겼사오니 우리의 허물을 주께서 사하시리이다” 즉 이 세상 그 어느 누구도 죄를 이긴 위인이 없다는 겁니다. 로마서 7장에서 사도는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3-24)
세상 자체가 이미 악뿐입니다. 미가 7:5-6에 보면, “너희는 이웃을 믿지 말며 친구를 의지하지 말며 네 품에 누운 여인에게라도 네 입의 문을 지킬지어다 아들이 아버지를 멸시하며 딸이 어머니를 대적하며 며느리가 시어머니를 대적하리니 사람의 원수가 곧 자기의 집안 사람이리로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성도는 도대체 어떻게 이 세상을 보내라는 말입니까? 미가 7:7에 나옵니다. “오직 나는 여호와를 우러러보며 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나니 나의 하나님이 나에게 귀를 기울이시리로다” 구약에 나오는 이러한 원칙은 신약에서도 지속됩니다. 도리어 본격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약은 마지막 때가 되기 때문입니다. 디모데후서 3:13에 보면, “악한 사람들과 속이는 자들은 더욱 악하여져서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하나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세상은 온통 속이는 것으로 가득차게 됩니다. 왜냐하면 모두들 본성상 자신을 최고 존재감을 떨쳐 버릴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신약의 성도에게 이 세상에서 처신하는 방법을 사도는 제시합니다. 고린도전서 6:7에 보면, “너희가 피차 고발함으로 너희 가운데 이미 뚜렷한 허물이 있나니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지 아니하며 차라리 속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고 되어 있습니다. 이미 악한 세상을 건너온 사람의 태도는 이러합니다.
성도의 이러한 초월함은 본인의 노력의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특별히 그 인간을 선택하셔서 자신의 일에 넣어주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제비 뽑힌 사람’입니다. 요나 1:7에 보면, “ 그들이 서로 이르되, 자 우리가 제비를 뽑아 이 재앙이 누구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임하였나 알아 보자 하고 곧 제비를 뽑으니 제비가 요나에게 뽑힌지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아무리 요나 선지자가 하나님을 낯을 피해 도망쳐도 이 인간 사회에서 살 동안에서 하나님의 일 때문에 선택당한 티를 내게 되어 있습니다. 욥도 그러했던 자입니다. 하나님과 악마의 내기를 위해 간택된 자입니다. 그런데 욥의 친구들은 욥에게 일어나는 이 일을 도무지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것은 그들이 한 번에 인생을 살면서 U턴 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삶의 방향이 전통적이고 정통적이라고 여긴 것으로 굳어져 버렸기 때문입니다. 욥을 인정해주신 주님께서 신약에서는 성도를 선택하셨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하시므로 더 이상 자기를 위해 살지 않고 자기를 위해 죽었다가 살아난 분을 위하여 살게 하십니다.(고후 5:15)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나의 뜻대로 말게 하옵시고 주님의 뜻대로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54강-욥기 15장 17~21절(전통의 거짓됨)20201025 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욥기 15장 17~21절입니다. 구약성경 774페이지입니다.
“내가 네게 보이리니 나를 들으라 내가 본 것을 설명하리라, 이는 곧 지혜로운 자들이 그 열조에게서 받아 숨기지 아니하고 전하여 온 것이라, 이 땅은 그들에게만 주셨으므로 외인은 그들 중에 왕래하지 못하였었느니라, 그 말에 이르기를 악인은 그 일평생에 고통을 당하며 강포자의 햇수는 작정 되었으므로, 그 귀에는 놀라운 소리가 들리고 그 형통할 때 멸망시키는 자가 그에게 임하리니, 그가 어두운 데서 나오기를 바라지 못하고 칼날의 기다림이 되느니라”
이것은 하나님께 인정받지 못한 욥의 친구 엘리바스가 하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 정답으로 수납되지 못한 주장을 펼치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거절당한 의견입니다. 진리가 아니죠. 진리가 아니면 이것은 거짓입니다. 그 거짓 주장, 인간들의 거짓 주장에 대해서 엘리바스가 뭐라고 하느냐 하면 전통적이라고 합니다. 전통적. 전통적이고 정통적이고.
어떻게 해서 전통이 정통이 되느냐. 정통적인 진리가 되느냐. 다수가 그리고 엘리트들이 공부 많이 한 사람들이 남들보다 많은 풍부한 자료와 논리성과 참고도서 책들 같은 이런 것을 수납해서 각양 모든 사람이 고개 끄덕이고 동의할 수밖에 없는 것을 엑기스로 뽑아서 역사적으로 계속해서 첨가해온 귀한 진리라 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 진리의 내용에 보게 되면 여기 뭐가 나오느냐 하면 21절에 멸망시키는 자라는 내용이 나옵니다. 이건 악인들을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의인도 있지만 악인도 있다. 그런데 이 악인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일평생 고통을 당하며 강포자의 햇수는 작정 되었으므로” 그다음에 나오는 것이 “멸망시키는 자가 그에게 칼날로 멸망시킬 그때가 온다”라는 겁니다.
그리고 그 악인은 누구냐 하면 여기 29절에 보면 외인인데 바깥사람인데, 외인이고 아웃사이더 바깥사람인데 그 사람은 뭐냐 하면 전통적이고 정통적인 것에 동의하지 않는 자, 이것을 엘리바스는 악인이라고 규정을 하고 그 사람에게는 멸망시키는 자가 심판 주가 심판자가 있어서 심판자가 그 인간에게 심판하도록 지금 칼을 준비하고 있다는 이론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런 이론의 틀을, 구조를 여러분 한 번 보세요. 소위 우리가 믿는다는 전통적으로 정통적으로 믿는다는 이러한 기독교계에서의 구조와 거의 똑같죠. 똑같은 겁니다. 이 전통적이고 정통적인 이러한 사상을 제대로 잘 볼 수 있는 것이 바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리게 한 유대교라는 것이 있어요. 그 당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과 열심 당원, 쿰란 공동체라고 해서 여러 파가 있지만, 그들을 결합해 보면 유대교입니다.
유대교는 한결같이 역사를 강조하고 전통을 강조하고 그들은 뭐만 추려서, 진리스러운 것만 추려서 모아 모아서 그걸 후대에 전해서 이것은 선배들이 그렇게 깊이 연구한 것이기 때문에 거의 진리에 근접해 있다. 그러니까 이건 안심 놓고 믿어도 된다. 많은 임상시험을 3차에 걸쳐서 다 했고, 수많은 임상시험을 해서 이건 하나님도 누가 와도 “그래, 그게 바로 진리야”라고 인정받을 만한 것들만 엑기스로 골라서 그들에게 전달한 그러한 집단이 유대교입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그러니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시기 전에 뭔가 계속 논쟁을 했죠. 계속 갈등 논쟁을 일으키는데 누구와 갈등을 일으키느냐 하면 귀신들린 자, 병든 자, 세리, 창기와 갈등 일으키고 논쟁한 적 없습니다. 논쟁은 주로 누가 했느냐 하면 우두머리들, 꼭대기에 앉아 있는 자, 바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과 서기관들과 논쟁을 했단 말이죠. 그들의 힘과 권세에 의해서 죽임을 당했거든요.
그러면 그 유대인들, 이스라엘이 그들인데 그러면 우리는 이스라엘과 상관없다고 하실지 모르는데 비행기 타고 대한항공으로 8시간 이상 가야 하고 먼 곳에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 직접 와 닿지 않는다고 하지만 그 유대인의 뿌리가 있어요. 그 유대인과 동일하게 작용하는 게 뭐냐 하면 기.독.교 입니다. 기독교는 역사적인 해석을 하고 루터로 인해 정통적이라고 하고 진짜 우리가 사도의 터지 위에 있는 유일한 진리라고 기독교 단체가 그렇게 이야기했습니다.
기독교 단체에서 우리나라에 있는 기독교 계파만 해도 250개, 별로 많지는 않지만, 250개 정도 있습니다. 장로교만 해도 200개가 넘어요. 괄호 열고 괄호 닿고. 어떤 건 합동, 전통 합동, 뭐 좋은 소리는 다 집어넣어 놔요. 이걸 교단이라고 하죠. 이도 저도 아닌 걸 독립 교단이라고 하는데 독립 교단만 해도 한 100개 넘습니다. 프랜차이즈가 그만큼 많다는 거죠.
처갓집 통닭, 비비큐 통닭, 그렇게 여러 가지 많은데 그들이 한결같이 주장하는 것은 뭐냐 하면 우리만이 전통적이라는 겁니다. 우리만 전통적이고 정통적이고 옳다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들과 유사한 점이 뭐냐 하면 악인은 벌 받고 선인은 복 받는다는 겁니다. 여기에 대해서 어떤 인간도 거기에 대해서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다 같이 따먹었기 때문에 ‘아니요’라고 가로저을 사람 아무도 없어요.
그렇다면 복이 뭐냐. 오늘 욥기에 보면 복이라는 것은 실질적으로 실효성 있는 그런 재산이 증가하고 건강하고 자녀가 잘되고 가정이 화목하고 국가가 부강하게 되는 거, 이걸 그들은 복된 상태라고 보고 거기에서 누락된 거, 거기 없고 작고 초라하게 된 것은 저주라고 표현하는 겁니다. 그래서 복된 사람은 착한 일 많이 했기 때문에 그런 복을 받을만했고 그런 저주받은 사람은 빌어먹을 짓을 했기 때문에 저주받는다는 거예요.
그들이 그 복과 저주를 어떤 경향에서 현실에서 밝혀냈거든요. 그럼 현실이 뭐냐. 제가 현실에 대해서 간단하게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현실이란 토지, 건물, 기계, 기업, 주식, 채권, 특허, 가축, 금, 천연자원에 더하기 노동력, 이게 현실이에요. 간단하지요. 이게 경제 아닙니까. 돈 경제, 돈으로 움직이는 경제, 이것보다 더 확실한 현실 있을까요?
산에 가서 도 닦으면 그게 현실입니까? 주머니에 얼마 있느냐가 현실이에요. 은행에 잔금 얼마 있느냐가 현실입니다. 교회 헌금 얼마 나오는지 이게 현실이에요. 뭐 “복음을 전합니다. 진리를 전합니다”라는 그딴 소리 하지 말고 복음을 전하면 그 복음을 전하는 것이 하나님의 복음답다면 하나님께서 그 교회에 재정이 바닥나도록 그냥 허락할 리가 없다고 되는 거예요.
복음을 전해도 헌금 없는 실효성 없는 복음 전함은 복음이 아니었습니다. 이런 거예요. 왜냐 하면 최종 측정을 알아듣는 측정을 하자. 우리가 납득이 가는 측정. 내가 평소에 전통적으로 정통적으로 복 받았다 할 때는 돈 번 것이 복 받은 거예요. 돈 벌었다는 게. 제가 어느 강의에서 그런 이야기 했거든요. 사람이 살아 있는 게 아니고 돈이 살아 있는 거예요.
돈이 없으면 그건 죽은 거고 돈만 살아서 움직인다를 증명하는 기능자들이 누구냐 하면 오늘날 인간들입니다. 북한이 유사종교단체거든요. 종교단체는 현실과 괴리되어 있어요. 그저 어버이 수령이 최고고 김일성 나라, 우리 사회주의, 복된 사회주의, 그것만 맨날 부르짖는 이유가 국민이 빌어먹거든요. 생계 대책이 안 돼 있어요. 생계 대책이 안 돼 있으니까 현실을 덮기 위해서는 추상적인 교리를 외칠 수밖에 없어요.
사상으로 무장하자. 전 국민의 신자 화. 외국에서 북한에게 경제적으로 도와준다고 해도 필요 없다고 해요. 왜냐 하면 자기들은 어버이 사상이 있기 때문에. 이것보다 더 확실한 종교단체가 어디 있어요. 종교단체는 대화 자체가 성립이 안 돼요. 완전히 미쳤고 완전히 돌아버렸거든요. 돈 없어도 우리 지도자만 있으면 행복하다고 이러고 있단 말이죠. 그게 얼마나 거짓말입니까.
이 욥의 친구는 한 번도 자기 인생에 유턴이라는 것이 없었습니다. 내가 살아왔던 그대로 돈 있고 가진 것 있고 가진 것 있는 가운데서 이왕 가진 것으로 안 되니까 착함으로 무장시킨 이것을 보태 가지고 이것이 바로 참된 복된 것이며 이거는 심판 주가 아니라 누가 와도 이거는 옳은 진리라고 주장하는 겁니다.
그러면 그들이 주장하는 진리는 뭐냐 하면 인간이 인간들끼리 물어봐서 얻은 거예요. 사람이 사람들끼리 물어봐서. 그 우열을 논해서 그중에서 괜찮다 싶은 것은 골라서 이게 전통적이고 정통적인 그들의 진리가 되도록 구축한 겁니다. 그러면 그 진리관 속에 분석해 보면 나의 것이 여기 있음. 그것이 진리거든요. 그러니까 진리라고 하는 것은 남들이 이렇게 하더라고 하는 것을 자꾸 진리라고 하지 말고 그들이 말하는 가장 진리라고 말하는 것이 뭐냐 하면 내가 여기 있음만이 확실한 진리가 되는 겁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묻고 싶어요. “강도는 나쁜 짓입니까?”라고 물으면 “아우, 강도는 나쁜 짓이죠. 벌 받을 짓이죠” “그러면 독립투사가 일본 군자금 열차를 탈취해서 강도질해서 훔쳐온 것은 나쁜 짓입니까, 좋은 짓입니까?” “그건 대한민국을 살리기 위한 투사니까 옳은 짓이죠” 그 대한민국에 누가 살고 있습니까. 니가 살고 있잖아. 네가 살고 있잖아요.
이등박문을 누가 죽였느냐? 안중근이 죽였다. 그러면 일본에서는 그게 대단히 잘한 거예요? 일본 사람들에게는 테러당한 거예요. 자기들의 총독을 테러한 거예요. 우리나라 대사가 베트남이나 캄보디아 가서 살해당하면 “캄보디아 독립을 위해 참 수고했습니다”라고 이야기하는 사람 아무도 없죠. 팔은 안으로 굽게 되어 있어요. 팔이 밖으로 굽으면 탈골 한 거예요. 이상 있으니 병원에 가봐야 해요. 팔은 항상 안으로 향하고 있다고요.
내가 살아 있는데 유리하면 그건 진리가 되고 내가 살아 있는데 손실이 되고 위태하면 그건 무조건 이유 없이 악마의 일이 되는 겁니다. 마귀의 일이 돼요. 인간으로서 이건 못 벗어나는 거예요. 뭐 어떤 사람이 그런 이야기 했답니다. 돈에서 맞춤법 하나 바뀌면 돌이 된다고요. 어떤 노래냐 하면 남에서 점 하나 빼면 님 된다는 그 노래 2절 가사에서 나와요.
돈에서 맞춤법 하나 바꾸면 돌이 된다고 쉽게 말하지만, 실제 성경에 나와 있는 심판, 성경의 욥 친구 말고, 성경에 나오는 심판은 어떻게 실시 되는 가를 우리가 살펴볼 필요가 있어요. 스바냐 1장 18절에 보게 되면, 스바냐가 선지자 정글에 빠져 어디 있는지 모르신다면 구약성경 1309페이지에 있습니다, “그들은 은과 금이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능히 그들을 건지지 못할 것이며 이 온 땅이 여호와의 질투의 불에 삼키우리니 이는 여호와가 이 땅 모든 거민을 멸절하되 놀랍게 멸절할 것임이니라”라고 나옵니다.
다시 욥기로 돌아옵니다. 은과 금은 축복의 증거입니다. 거지가 복 받았습니까? 아니요, 은과 금이 풍부한 사람이 복 받은 거예요. 왜? 그만큼 착한 일을 했으니까 하나님께서 복을 준 거예요. 다시 말해서 하늘의 심판 주는 은과 금을 가진 사람에게는 심판하지 않는다는 것이 그들의 정설입니다. 복을 줘놓고 심판할 리가 없다는 거예요.
부자를 왜 심판해요? 복 받았는데. 우리도 복을 못 받아서 환장하지요. 교회 장로님이 계신데 그 장로님이 너무 잘살아요. 그 장로님에게 사기당하지 않는 이상은 그 장로님에게 전부 다 존경의 예를 갖추시기 바랍니다. 예를. 존경의 예를. 그냥 부자가 아니에요. 헌금 좀 하는 부자죠. 그냥 장로 아니고 헌금 좀 하는 장로. ‘앞자리로 모시겠습니다’가 되는 겁니다.
왜 그러냐 하면 교회가 헌금이 나와야 복 받은 교회가 되거든요. 아까 말했지만 복음 전해도 헌금 없는 교회는 복 못 받은 거예요. 하나님께서 “너 교회 하지 마”라고 버리시는 내치는 교회라고 이구동성으로 동의할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입니다. 뭐 돈이 있든지, 아니면 아까 말씀한 항목인 토지가 있든지, 건물이 있든지, 주식이 있든지, 채권이 있든지, 특허가 있든지, 가축이나 금이 있든지, 천연자원이 있든지, 뭐 현실을 구성하는 요건들이 있는 교회가 교회답다고 누구든지 이야기하는 겁니다.
사람들이 개척교회 안 가려고 하는 이유는 딱 하나죠. 서글프거든요. 수요예배 이런 데 딱 가게 되면 벌써 형광등부터 감이 와요. 형광등 안 간 지 오래돼서 버뜩버뜩해요. 아무도 안 갈아요. 왜? 형광등 값은 얼마 안 하지만 만약에 누가 선 듯 형광등 갈아 넣잖아요? 그거 기다렸다는 듯이 필요한 것은 그 사람에게 몰빵을 시켜버려요.
개척교회는. “봉사 좀 하네. 그럼 이것도” “집사님, 이것도요”라고 이건 뭐 돈 되는 건 전부 다 맡겨버려요. ‘잘 걸렸다. 이 물주야’라고 하면서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거예요. 왜 성급하게 자기 패를 깠어요. 왜. 깐 게 문제라니까요. 안정된 직장을 가지고 돈 좀 있는 사람은 개척교회 하기 힘들어요. ‘사’자 있잖아요. 약사, 변호사, 의사, 이런 사람들 오면 골치 아파요. 완전 덤터기를 씌우니까.
여기 스바냐 1장 18절에서 돈과 금과 은이 하나님의 분노를 이기지 못한다고 했는데 여호와의 말씀은 뭐냐 하면 네가 가진 것으로 그걸 복이라고 해석하지 말라는 겁니다. 그건 진짜 해석을 오히려 방해하고 훼방하고 막는 겁니다. 스바냐 2장에 보게 되면 거기에 심판받는 이유가 2장 15절에 나옵니다. “심중에 이르기를 오직 나만 있고 나 외에는 다른 이가 없다”라는 이게 바로 심판받을 이유가 되는 겁니다.
아무리 부자가 되었든, 반대로 가난하게 되었든 관계없어요. 가난하다고 구원받는 것도 아니에요. 가장 중심을 보기 때문에 오직 나만 있고 다른 이는 나에게 의미 없다고 여기는 사람은 “이같이 황무하여 들짐승의 엎드릴 곳이 될 것이며 지나가던 사람이 다 조소하고 놀릴 것이다”라고 되어 있어요. 이런 말씀을 보면서 미가 7장 5절에서 더 노골적으로 아주 단호하게 미가 선지자는 이야기합니다.
이 말씀 들으면 정말 여러분 기분 좋은 말씀이에요. 들으면 성경이 우리 현실에 대해서 제대로 이야기한 적 있다고 느낄 겁니다. 여기 5~7절까지는 줄 그어놔도 괜찮아요. “너희는 이웃을 믿지 말며 친구를 의지하지 말며” 그다음이 더 결정적입니다. “네 품에 누운 여인에게라도 네 입의 문을 지킬지어다”라는 이런 말씀이 있다니까요. 네 마누라 믿지 말라는 거예요. 뭐 사랑한다는 그런 말 웃긴 겁니다. 사랑이 밥 먹여 줍니까.
친구 믿지 말고, 너의 애인 믿지 말고, 이웃 믿지 말고, 심지어 6절에 보면 더 가관입니다. “아들이 아비를 멸시하며 딸이 어미를 대적하며 며느리가 시어미를 대적하리니 사람의 원수가 곧 자기의 집안사람이리로다”라고 나와 있어요. 어디 무서워서 살겠습니까. 그러면 어쩌란 말이냐. 어쩌란 말이냐가 7절에 나옵니다.
“오직 나는 여호와를 우러러보며 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나니 나의 하나님이 나를 들으시리로다” 나는 오직 여호와만 쳐다본다. 그러니까 사람 대 사람의 관계에 기대 걸지 말라는 이 말이에요.
5. 너희는 이웃을 믿지 말며 친구를 의지하지 말며 네 품에 누운 여인에게라도 네 입의 문을 지킬지어다
6. 아들이 아비를 멸시하며 딸이 어미를 대적하며 며느리가 시어미를 대적하리니 사람의 원수가 곧 자기의 집안 사람이로다
7. 오직 나는 여호와를 우러러보며 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나니 나의 하나님이 나를 들으시리로다
미가서 7장 5~7절의 말씀이 신약에 오게 되면 여러 군데 나옵니다. 이 대목을 직접 이야기한 것은 마태복음 10장에 나오는 걸 여러분도 다 아시잖아요.
그거 말고라도 있어요. 디모데후서 3장 13절에 보면 “악한 사람들과 속이는 자들은 더욱더 악하여져서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하나니”라고 나와요. 그러니까 이 세상은 속고 속이는 세상. 속이고 속는 세상이에요. 그것뿐이에요. 그러면 “아직까지 안 속았는데요”라고 할 때 지금은 속을만한 대상이 못 되든지 지금 준비 단계 있다든지 예열 단계든지 슬슬 속아 넘어간다, 넘어간다, 넘어간다, 점점 속기 위해서 예열 단계이든지 그런 겁니다.
그럼 신약의 성도는 어떻게 했는가. 그 속고 속이는 세상을 아예 건너와 버리라는 거죠. 이미 그걸 건너온 거예요.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에 속고 속이는 세상에 그다지 미련 없습니다. 미련 없다는 것을 말로만 그렇게 하지 말고 그걸 현실로 보여주는 건데 그게 고린도전서 6장에 보면 나와요.
6장 6~7절에 “형제가 형제로 더불어 송사할뿐더러 믿지 아니하는 자들 앞에서 하느냐, 너희가 피차 송사함으로 너희 가운데 이미 완연한 허물이 있나니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지 아니하며 차라리 속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라고 나옵니다. 차라리 속아줘 버려라. 고소하지 말고 소송 걸지 말고 속이려면 많이 속여라 하는 식으로 살란 말입니다.
그리고 시편 65편에도 나오지만 시간 관계상 많이 읽지는 않겠습니다. 시편에 나오는 인간에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어요. 65편 3절 한 구절만 보면 “죄악이 나를 이기었사오니”라고 나옵니다. 욥의 친구 엘리바스는 자꾸 뭘 생각하느냐 하면 죄인 따로 있고 의인 따로 있을 수 있다는 것이 제대로 전통적이고 정통적인 해석이라고 이 세상에서 바른 해석이라고 보는데 시편에 하나님의 언약 백성에게는 그것이 아니고 항상 인간은 죄에게 진다고 나옵니다. 이게 우리의 모습이라고 나옵니다.
소크라테스 형이 ‘너 자신을 알라’고 했는데 소크라테스에게 받지 마시고 우리 자신을 아세요. 나는 어떤 인간이냐. 항상 죄가 나를 이기고 나는 죄에게 지는 거, 이 시편 65편 3절을 로마서 7장에서는 성령 받은 사도바울이 본인에게 적용시킵니다. “나는 선을 하고 싶어도 악이 나를 이긴다. 뭐 어쩌라고. 나에게서 나올 선은 없으니 나에게 요구하지 마. 선이고 의고 그런 거 나에게 없어. 자꾸 나에게 쓸데없이 기대하지 마. 나는 죄밖에 나올 것이 없어. 난 죄인의 우두머리야. 내가 죄인의 왕초야. 됐냐? 됐어? 나에게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
심판을 받아도 지옥을 가도 천 번 백번이라도 왔다 갔다 해야 할 나란 말이죠. 그러나 사도바울이 말하기를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 짙은 거예요. 은혜가 더하시는 겁니다. 누구에게? 누구에게만 되느냐면 모든 인간이 아니고 오늘 말씀의 결정적인 겁니다. 제비 뽑힌 사람입니다. 이게 욥 1장에 나온 이야기입니다. 내기에 접어든 사람.
구약 요나서에 보게 되면 요나서 1장 7절에 보면 유명한 말씀이 나옵니다. 요나가 도망쳤죠. 자기는 배 밑으로 가서 숨었고 이제 배 타고 가면 끝났다고 생각한 거예요. 철없는 자식이 촌에서 사고치고 고속버스 타고 서울로 가면 끝난다고 자유라고 생각했죠. 그런데 고속버스가 바람에 막 흔들리는데요. 그래서 고속버스가 차를 세우고 회의를 한 겁니다.
회의하면서 그 회의가 뭐냐 하면 1장 7절에 “그들이 서로 이르되 자 우리가 제비를 뽑아 이 재앙이 누구로 인하여 우리에게 임하였나 알자 하고 곧 제비를 뽑으니 제비가 요나에게 당한지라” 여기서 제비뽑기를 해요. 고속버스 운전사가 차 길가에 세워놓고 제비 뽑으니까 제일 뒷좌석 앉은 청년이 뽑혔단 말이죠. 아간도 제비뽑았잖아요.
제비를 뽑았다는 것은 내 인생을 내가 선택한 식으로 살아갈 수 없는 다른 우리 이전에 내가 전통적으로 정통적으로 옳다는 그 배후에 그 이전에 이미 진리는 정해진 것이고 이 세상에 갈 길도 정해진 거예요. 모든 계획도 인간 머리가 아니라 인간끼리 비교해서가 아니라 이미 누가 정해버렸어요. 하나님이 제비뽑는 식으로 자기 백성을 선택해 버린 겁니다.
에베소서 1장 4절 창세 전에 예수 안에서 이미 너를 택하여서 예수 안에서 택했다는 말은 그냥 택한 것이 아니고 예수 안을 집어넣는 것은 택한 이유가 그리스도의 선택에 종속되어 있음을 증거 하라고 택한 거예요. 나 천당 가라고 택한 것이 아니고. 너는 그리스도가 너를 대신한다고 너의 인생을 대신한다는 조건하에 선택된 거예요. 예수 안에서.
그러니까 그게 복이에요. 하나님과 예수님과 우리가 연결되어있는 것이 복이에요. 돈 많은 것이 복이 아니고. 몸이 아픈 것이 저주가 아니라 몸이 아프든 건강하든 환란이나 핍박과 곤고나 적신이나 위협이나 칼이나 무엇이 온다 해도 그리스도에서 끊어지지 않는 게 복이에요. 이건 어떻게 마귀도 못 끊어요. 그러면 마귀의 역할이 뭐냐. 우리는 성도면서도 자꾸 내 인생을 내가 꾸려가려고 하니까 하나님께서 마귀를 보내서 자꾸 제비 뽑히는 거죠.
선택적으로 주님께서 의도적으로 몰아세우는 일을 하라고 마귀가 있는 겁니다. 왜? 내 뜻은 모두 좌절되니까. 내 계획은 되는 게 하나도 없어. 되는 게 없는 이유는 그건 길이 아니었거든요. 내 뜻대로 잘 되면 마치 내가 축복받은 것처럼 착각하잖아요. 선택 안에는 생명이 들어오는 경로가 들어있어요. 그 선택 안에.
주님이 너는 그냥 선택이라고 너를 집어서가 아니라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무진 고생을 하시고 아버지에게 버림받는 그 자체가 선택 내용에 해당하는 겁니다. 그러면 선택받은 사람은 그 예수님의 체험과 같이 동행하면서 “내 뜻대로 마옵시고”가 이런 뜻이구나.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이라는 것이 바로 내 인생을 통해서 이게 발산되고 있고 드러나고 있구나를 늘 감사하게 되는 겁니다.
내가 예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고 주님이 사랑했고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니라 주님이 선택했습니다를 십자가 밖에 있는 사람은 몰라요. 욥의 친구들은 모른다고요. 지금 욥은 답답해요. 내가 원해서 고통이 온 것이 아니라고 아무리 이야기해도 친구는 “헐, 네가 나쁜 짓 해서 벌 받았다”라고 맨날 이런 식이에요.
그러면서 하는 말이 “심판 주가 오면 욥 너를 칠 것이다”라고 하는 거죠. 오히려 친구, 네가 당하죠. 네가. 욥은 지금 하나님을 인정하고 있는데. 하나님의 내기 속에 들어왔기 때문에. 제비 뽑혀서 그 많은 가운데 선택되어서 하나님과 악마의 내기에 말려들고 참여된 거예요. 우리도 예수님의 하신 일 때문에 우리가 간택되었고, 제비 뽑혔고, 선택된 겁니다.
그래서 남들에게 나오지 않는 이상한 소리,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이게 하나님의 은사예요. 그것이 믿음과 소망과 사랑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의 심판은 주님과 무관한 그것이 저주요, 심판인 것도 모르고, 세상은 좋은 차 타고 부자 되고 건강하고 화목하면 복 받는 것으로 착각했습니다. 주여,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가리는 방해하는 짓을 하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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