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의 주님
2020년 11월 22일 본문 말씀: 욥기 16:10-16
(16:10) 무리들은 나를 향하여 입을 벌리며 나를 천대하여 뺨을 치며 함께 모여 나를 대적하는구나
(16:11) 하나님이 나를 경건치 않은 자에게 붙이시며 악인의 손에 던지셨구나
(16:12) 내가 평안하더니 그가 나를 꺾으시며 내 목을 잡아 나를 부숴뜨리시며 나를 세워 과녁을 삼으시고
(16:13) 그의 화살들이 사방에서 날아와 사정 없이 나를 쏨으로 그는 내 콩팥들을 꿰뚫고 그는 내 쓸개가 땅에 흘러나오게 하시는구나
(16:14) 그가 나를 치고 다시 치며 용사 같이 내게 달려드시니
(16:15) 내가 굵은 베를 꿰매어 내 피부에 덮고 내 뿔을 티끌에 더럽혔구나
(16:16) 내 얼굴은 울음으로 붉었고 내 눈꺼풀에는 죽음의 그늘이 있구나
왜 하나님께서 나만 갈구는 것인지요? 욥은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고 있습니다. 사방에서 자기를 주목하고 있으며 자신이 철저하게 망가진 인생이기를 학수고대하고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마구 주변에서 달려들어 자기 자신을 짓이기고 짓밟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럴 정도도 당하는 것이 마땅한 존재임을 욥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이런 사태에 대한 해답은 신약에서 제공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2:23-25에 보면,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식후에 또한 그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살과 피를 흘리셨는데 그 생산의 장소가 바로 인간입니다. 예수님께서 죄 있는 육신의 모습으로 오셨을 때에 사람들은 자신의 육이 도대체 어느 정도로 악하고 더러운 가를 감잡아야 했습니다. 거룩과 육신의 만남이 처참한 살인사건으로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우리 자신에 대해서 우리가 너무 모르고 있었던 겁니다.
자꾸만 우리 내부에서 더러운 것들이 솟아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것을 처리하면서 기존의 악취를 덮고자 새로운 향을 뿌리는 식입니다. 이는 바로 인간들 사이에 보편적인 것이 진리라고 여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의 보편성의 문제점에 대해서 누가복음 8:30-31에 힌트가 나와 있습니다.
“예수께서 네 이름이 무엇이냐 물으신즉 이르되 군대라 하니 이는 많은 귀신이 들렸음이라 무저갱으로 들어가라 하지 마시기를 간구하더니” 즉 수많은 귀신들이 두려워하는 곳이 있습니다. 그곳은 무저갱입니다. 악마의 활동을 못하게 만드는 감옥입니다. 이 말은 그동안 귀신들이 이 인간 세계를 전부를 설치고 다녔다는 말이 됩니다.
인간 세계에서의 보편성이란 바로 이 귀신들의 활약상입니다. 귀신 활동의 열매입니다. 한결같이 인간들이 똑같은 사고방식으로 세상을 살아갑니다. 그래서 다수 의견의 진실성을 신봉합니다. 조금이라도 특이하거나 그들의 예상에 어긋나는 것이 보이면 늘 핍박할 마음자세가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활동은 이 보편성 판에 구멍을 뚫는 겁니다. 보편성에 포함되지 않는 특이성을 발생시킵니다. 마태복음 8:10에 보면, “예수께서 들으시고 기이히 여겨 좇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기이하 여겨’라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전혀 예상치 못했다는 것을 전하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모든 활동은 주변 제자들이나 사람들이나 세상에 대해서 판을 바꾸려는 의도를 가지고 활동하고 계신다는 점을 말해주시려는 겁니다. 기존의 세상에서는 도저히 찾을 수 없는 공간을 따로 만들려고 하시려는 겁니다.
마가복음 6:6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저희의 믿지 않음을 이상히 여기셨더라 이에 모든 촌에 두루 다니시며 가르치시더라” 일반적인 저들의 사고방식이라면 병고치고 귀신 쫓아내시는 분이 ‘메시야 맞다’고 받아들여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예수님에 대해서 심히 경계하고 있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사람들의 짐작을 의도적으로 비켜나가시려고 하는 겁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한 판단에 늘 미스가 있게 마련인데 그것은 자신들의 속마음이 지나치게 악하고 왜곡하고 쓰레기다 는 사실을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진정 예수님 활동의 완성은 그 쓰레기 장입니다.
요한계시록 3:20에서,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노크하시는 원리는 이러합니다. “지금 네 안에 나 없지?”입니다. 이점을 분명히 합니다. 따라서 인간 속에는 주님 없이 본인만 있습니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에 대해 오로지 자신이 처리해 나설 수밖에 없는 환경에 놓여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주님께서 노크를 하신다는 말씀은, “너의 자리가 내 자리가 되게 하겠다”입니다. 이렇게 되면 인간 속의 쓰레기 자리가 주님의 생명이 나오는 현장이 됩니다. 즉 자신의 내부가 예수님의 활동재료가 되십니다.
억울하게 보이는 욥과 그러한 욥의 억울함을 모르고 숱하게 쏟아대는 비난들과 예수님께서 한데 섞이는 겁니다, 거기서 발생되는 것은 욥의 죽음이 아니라 예수님의 죽음입니다. 요한복음 10:17에 보면,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사랑을 그렇게 이해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죽으므로서 그 자체가 새로운 생명을 얻는 과정이라는 겁니다. 그러나 욥은 이런 사정을 모르기에 발악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죽어가는 것을 파멸이라고 여기고 있고 그 파멸을 하나님께서 주도하고 계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즉 욥은 자신의 처지를 부끄러워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안의 그 부끄러운 자리가 이미 예수님에 의해서 접수당했음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정작 우리 자신의 어설픔에 대해서 부끄러하지 말고 그 현장에 주님이 이미 들어와 계심을 감사해야 합니다. 욥처럼 심한 곤궁에 빠지지 않고 있어도 욥과 같은 계열임을 아는 것은 자신의 부끄러움을 아는 자입니다.
누가복음 9:26에 보면,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자기와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으로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부끄러워하는 이유는 뭔가 여전히 자기 안에 지킬만한 가치 있는 것이 있다고 자부하기 때문입니다.
즉 이 보편적 세상에 나가서 다른 사람들에게 기죽지 않고 인정받을 그런 존재가 되고 싶은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죽으심을 앞장 세워 자신의 뜻을 전부 다 밝혀주신 성의를 무시하는 것이 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나의 자부심에 스스로 유혹되지 말게 하옵소서. 더러운 우리 안까지 들어오신 예수님의 자비하심을 자랑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58강-욥기 16장 11~16절(내 안의 주님)20201122 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욥기 16장 11~16절입니다. 구약성경 774페이지입니다.
“무리들은 나를 향하여 입을 벌리며 나를 천대하여 뺨을 치며 함께 모여 나를 대적하는구나, 하나님이 나를 경건치 않은 자에게 붙이시며 악인의 손에 던지셨구나, 내가 평안하더니 그가 나를 꺾으시며 내 목을 잡아 던져 나를 부숴뜨리시며 나를 세워 과녁을 삼으시고, 그 살로 나를 사방으로 쏘아 인정 없이 내 허리를 뚫고 내 쓸개로 땅에 흘러나오게 하시는구나, 그가 나를 꺾고 다시 꺾고 용사같이 내게 달려드시니, 내가 굵은 베를 꿰어 매어 내 피부에 덮고 내 뿔을 티끌에 더럽혔구나, 내 얼굴은 울음으로 붉었고 내 눈꺼풀에는 죽음의 그늘이 있구나”
욥이 자기 형편에 대해서 설명하는데 특이한 것은 분명히 자기 몸인데 자기 몸이 아니고 주께서 일을 벌이는 하나의 무대가 되고 말았어요. 그런데 그 무대가 하나님과 자기 사이에 관계로 국한되는 것이 아니고 친구들까지 연루된 그런 무대 장치로 자기 몸을 사용한다는 겁니다. 당연히 웃음거리가 되겠지요. 당연히 사람들에게 조롱거리가 되고 상당히 낯설게 느껴지는 것이 당연합니다.
사람들은 보편적이고 상식적으로 진행되는 것을 좋아하는데 그렇지 못하고 여기 오늘 본문에 보게 되면 의도적으로 하나님께서 공격을 가하는 목표가 되고 있습니다. 여기 12절에 보면 “나를 세워 과녁을 삼으시고, 그 살로 나를 사방으로 쏘아 인정 없이 내 허리를 뚫고 내 쓸개로 땅에 흘러나오게 하시는구나”라고 나오는데 나를 세워놓고 과녁을 삼으시고 많은 화살이 사방에서 나를 겨냥해서 날라오도록 하셨고 그 결과로 내게 주어진 것은 인정사정없이 내 허리를 뚫고 내 쓸개로 땅에 흘러나오게 하시는 이러한 사태가 일어났습니다.
이러한 사태에 대해서 이 내막, 이러한 구약에서의 연극무대 장치에서 벌어지는 이 실정의 결과는 어떻게 되느냐 하면 고린도전서 11장에 보면 나옵니다. 고린도전서 11장 23~25절에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가라사대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식후에 또한 이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라고 되어 있어요.
방금 읽었던 욥이 세상으로부터 시달리고 하나님께로 시달리는 그 일의 결과가 뭐냐 하면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면 너희가 영생을 얻는다”라는 거예요. 이러한 연관성, 관계성에 대해서 우리가 그냥 안다고 하면 우리는 하나의 관찰자가 되어버립니다. 이러한 노선에 우리가 끼어들지를 못하게 되면 우리는 구경꾼이 되어버리죠. 예수님 참 고생 많이 했다. 끝. 예수님 훌륭하시다. 끝.
이거는 철학자의 삶을 우리가 외부에서 관찰하면서 그 철학자 참 고생했다. 공부 많이 했네. 끝. 그것과 다를 바가 뭐가 있습니까. 욥은 실제로 당했잖아요. 그러면 우리도 실제로 이런 일을 당해야죠. 예수님 참 훌륭하고 예수님 살과 피를 먹고 마시고 성만찬하고 해서 구원받습니까? 포도주 마시고 카스테라 먹고 한다고 그게 구원받습니까. 아니거든요.
이런 과정이 너희 속에 발생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욥이 당했던 이러한 일들이 실제로 너희 속에 일어나야 한다는 겁니다. 일어나려면 어떻게 하느냐. 내 안에 누군가 들어오셔야 하죠. 그러면 주님이 우리 안에 들어왔다는 것을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그건 굉장히 간단해요. 뭐냐 하면 내가 나를 보게 되면 나는 괜찮은 존재예요. 훌륭한 사람이고 착한 사람이고 그다지 나쁜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데 주님이 우리 속에 들어오면 우리는 그 자체가 쓰레기입니다. 내 안에 내가 나쁜 짓 하는 것이 아니고 내 안에 뭐가 자꾸 나와요. 나쁜 생각이 나온다고요. 이것은 성령이 와서 내가 아는 나와 내가 모르고 있던 내부를 밝혀 보여주는 겁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찾아오시는 이유는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제가 말하면 ‘아, 그거’라고 대번 아십니다. 뭐냐 하면 말씀이 육신이 되신 거예요.
예수님께서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는 말은 그 육신은 아버지 앞에 저주받을 육신이거든요. 저주받을 육신인 줄 알면서도 예수님께서 우리 하나님의 아들께서 육신을 입고 오셨단 말이죠. 그렇다면 주님께서는 더러운 것을 찾아오시는 거예요. 더러운 거. 더러운 것을 찾아오셔서 더럽지 않다고 하는 자에게 찾아오니까 더럽다는 것을 깨달을 때 그 자리가 주님 구원의 자리입니다.
예수님의 살과 피를 마시라는 말은 그 살과 피 안에 무엇이 섞여 있느냐 하면 “너의 더러운 것 때문에 내가 죽었잖아, 인간아”라는 그러한 과거사가 들어있어요. 내 안을 우리는 들어오지 말라고 하며 내 안도 내 것이라고 우기고 싶죠. 주님은 그렇게 하지 않고 내가 들어가야겠다는 거예요. 네 것이라고 생각 하면 네 안은 건전하고 훌륭하게 돼요.
그러나 주님이 들어와 버리면 가장 더럽고 더러운 곳인 동시에 그 장소가 비로소 예수님의 살이 생겨나는 장소고 예수님의 피가 만들어지는 장소로써 쓰이는 겁니다. 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자리예요. 이 영광스러운 쓰레기 자리가. 요한계시록 3장 20절에 보면 여기에 노크의 원리가 있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노크한다는 겁니다. 노크한다는 뜻이 뭐냐 하면 내가 없는 그곳에 내가 들어가겠다는 겁니다.
노크의 원리가 현재 너의 속에 뭐가 없느냐 하면 두드리는 내가 없다는 겁니다. 네 속에는 내가 없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없는 거예요. 예수님이 없는데 주께서 노크해서 들어왔다는 말은 노크의 원리는 뭐냐 하면 원래 내 속에 없었던 분이 내 속에 들어왔다는 것을 주님께서는 노크하는 그런 모습을 통해서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원래 없었는데 내가 접수했잖아’라는 생각을 가지고 평생 살아가라는 말이죠.
그런데 너는 왜 자꾸 너의 몸을 너의 것이라고 생각 하느냐. 네 것이라고 생각 하는 것은 내가 없을 경우에는 네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내가 네 것이라고 생각 하는 그것에 내가 들어와 버리면 내 것 아닌 내 것 같은 내 것 아닌 것이 되고 이제 주님의 것으로 전환 된 내 것. 분명히 타인과 비교할 때 너는 너의 것이고 나는 나의 것이라는 그 말은 맞는데 남이 모르는 그것 내 것 안에 주님의 것이 들어왔다는 사실입니다.
그런 것을 통해서 요한계시록 3장 20절에 노크를 하는 이유가 처음부터 너는 내가 활동하는 영역이고 장소라는 이 말입니다. 그런 점에서 욥의 경우나 오늘날 우리의 경우가 실제로 같은 노선에 속했다고 감히 말할 수 있습니다. 욥처럼 이렇게 정신없이 병으로 아파야 하고 드러누워야 하고 그런 것도 필요하지만 때로는 그렇지 않고 내 것이지만 절대로 내 것이 아니라는 생각 그리고 내 안에는 왜 그렇게 되느냐 하면 내 안에 주님의 영생인 살과 피가 만들어지는 공장이니까요.
그렇게 장소로 제공되는데 우리는 그 장소로써 더는 나를 내 것이라고 할 수 없어요. 왜냐 하면 너무나 더러우니까. 더러운 것을 내 손으로 처리할 수 없잖아요. 사람이 자기가 더럽다는 사실을 알면 알수록 뭐든지 내가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어요. 사람이 내 것을 내 것이라고 하니까 주춤하게 돼요. 전 준다고 하죠.
이거 하면 나에게 얼마나 이익이 될까. 손실은 얼마 될까. 주저주저하게 되죠. 이게 뭐냐 하면 내가 막장 아니라는 뜻이거든요. 내가 잘 관리하는 여부에 따라 내가 괜찮은 존재로 될 수 있다는 그런 계산을 하기 때문에 자기 쪽에서 판단을 자꾸 내리는데 우리는 우리가 만약 쓰레기라면 그런 판단 내릴 자격조차 없습니다. 완전히 다 망가져도 괜찮습니다.
심리학에서 이걸 노출 치료라고 해요. 노출 치료라고 하는 것은 가장 악하고 극한 사태를 미리 예상해서 그보다는 낫지 아니한가를 생각하는 심리치료 비슷한 것은 있습니다만 주님께서는 우리를 볼 때 쓰레기 악함으로 이야기한단 말이죠. 그러면 쓰레기 악함으로 이야기한다는 것이 예수님께서 살과 피가 우리에게 올 때까지 예수님은 마태 마가 누가복음을 통해서 어떤 일을 먼저 순서를 잡아서 하셨기에 아까 고린도전서 11장의 말씀처럼 이건 내 살이라고 내 피라고 이렇게 하실 수 있는 최종적인 것이 되었느냐.
그걸 잠시 보게 되면 여기 누가복음 8장 30~31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지금부터 약간 난해한데요. 누가복음 8장 30~31절에 보면 무덤에 귀신들린 자가 있었어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귀신보고 나오라고 하니까 나왔습니다. 그러고 난 후에 귀신이 이야기하는 대목이에요. “예수께서 네 이름이 무엇이냐 물으신즉 가로되 군대라 하니 이는 많은 귀신이 들렸음이라, 무저갱으로 들어가라 하지 마시기를 간구하더니”
귀신이 예수님께 부탁하기를 “무저갱에는 들어가라고 하지 마세요”라고 부탁했고 예수님께서는 무저갱 말고 마침 돼지 떼가 있어서 돼지에게 들어가게 했거든요. 이 말씀이 상당히 엄중하고 굉장히 소중하게 다루어야 할 것은 모든 이 세상 인간들은 이 땅에 집착하는 이유가 바로 무저갱에 가기 전에 있는 귀신들에 의해서 통제받고 지배받기 때문에 그래요.
귀신들은 무저갱에 들어가면 활동을 못 해요. 활동을 못 하니까 무저갱 말고 그냥 이 세상에 돌아다니도록 허용해 달라고 부탁했고 그 허용한 귀신들이 모든 인간들 속에 들어가니까 인간들은 이 세상에 대해서 집착을 하게 되는 겁니다. 집착. 왜 성경을 이야기해도 강력하게 거부하는가. 집착하는 게 있기 때문에. 자기가 정들은 게 있기 때문에. 자기가 놓치기 싫은 게 있어요.
그 배후에 무저갱 가기 직전에 귀신들이 그렇게 했다는 사실은 모르고 그냥 이유도 없이 이 세상에 집착하는 겁니다. 그 집착 중에 가장 노골적인 것이 가족에 관한 집착, 가정에 대한 집착, 이게 가장 강렬합니다. 어떻게 뭐 남의 아이는 백날 사진 보내줘도 흥, 치, 퐁 하다가 자기 외손녀 삐딱거리면서 걷는 거 보면 삶의 피로가 다 풀리죠. 막 서서 손에 뭐 쥐고 있는 거 보면 ‘일어섰다. 일어섰다’라고 난리죠. 밖에 일어선 사람 많이 있는데 그건 뭐 아무것도 아니면서.
가족에 대한 집착. 그것을 계속하게 되면 그 집착으로 인해 거기서 빠져나올 수가 없어요. 그러나 그 집착보다 더 센 것이 뭐냐 하면 돈이었습니다. 아무리 가족이라도 돈 없으면 가족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죠. 돈도 없으면서 가족을 유지하려고 지키는 그런 사람들에게 대항하는 사람, 그런 사람들에게 집착하는 사람을 유교걸 이라고 합니다. 신종단어.
삼강오륜을 교육받는 걸(girl = 소녀)을 말합니다. 유교 걸도 있고 유교 보이(boy)도 있습니다. 단어가 참 멋있어요. 유교 걸. ‘걸’은 영어인데 유교 집안. 그러나 결국 그 유교 걸이 돈에게 지거든요. 그런데 욥도 마찬가지로 부자였잖아요. 주님께서 펀치로 돈에다 구멍을 다 뚫어버린 거예요. 그 구멍은 욥은 어디까지 갔느냐면 자기 몸에다 구멍을 뚫어버려요.
일종의 노크죠. 네 속에 내가 들어가서 나와 같이 죽자는 겁니다. 욥은 그 상황을 모르기 때문에 ‘왜 이러십니까’라고 나온 거예요. 왜 저를 이렇게 힘들게 하십니까.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네가 힘들다, 힘들지 않다를 언급할 가치조차 없다”라고 하시는 겁니다. 내 것을 가지고 일방적으로 네 속에 들어와서 너의 쓰레기 같은 그 안에 귀한 내 살과 내 피를 만들어 내겠다는데 이게 왜 ‘저만 이렇게 힘들게 만드십니까’라고 항거할 그런 근거는 전혀 없습니다.
그런데 제가 아까 말씀드렸듯이 욥에게 해당되는 것이 오늘날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겁니다. 자, 그 무저갱 이야기를 계속해보겠습니다. 그 무저갱이라 하는 것은 악마가 인간세계에서 활동 못 하도록 영원히 가둬두는 것이 무저갱입니다. 그런데 귀신은 그걸 알고 예수님께서 그걸 가두는 것을 알고 세상에서 활동하게 해달라고 했고 그 당시 돼지 떼에 가게 해달라 해서 돼지 떼가 다 죽었는데 이게 인간에게 오게 되면 인간은 결국 그 귀신에 의해서 같이 멸망 받고 죽습니다.
그렇다면 주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가 뭐냐. 인간 사고방식은 귀신이 다 지배하고 있으니까 통념상 상식적이고 납득이 되고 이해가 되는 그런 일만 예수님께서 해주게 되면 자기 자신은 그걸 믿을 용의가 되어 있다고 인간들은 그렇게 나옵니다. 그런데 마가복음 6장 6절에 보면 아까 어떤 분이 질문하셨는데 이런 질문을 했어요.
마가복음 6장 5~6절을 보면 “거기서는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어 다만 소수의 병인에게 안수하여 고치실 뿐이었고, 저희의 믿지 않음을 이상히 여기셨더라”라고 할 때 질문이 이겁니다. 예수님은 모든 것을 아시는데 어떻게 모든 것을 아시는 예수님께서 의아해하는 자기 예상밖에 일어난 일이 있다고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는가입니다. 모든 걸 아신다면 이상하게 여길 일도 없어야 하고 “내가 그럴 줄 알았다”라고 되어야 당연한데 이상히 여겼다고 하시니까 예수님이 모르는 구석도 있으셨는지 생각을 하십니다.
거기에 대한 해답은 마태복음 8장 9~10절에도 나와 있습니다. 백부장이 말하기를, 이방인이거든요, 이방인이 하는 말이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하면 하나이다”라고 하니까 10절에 “예수께서 들으시고 기이히 여겨 좇는 자들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 보지 못하였노라”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기이히 여겼다, 이상히 여겼다는 것이 어떤 경우냐 하면 모든 것이 전부 다 집단화된 똑같은 사고방식으로써 완전히 포장된 그러한 세계에서 구멍이 뚫려버리는 그러한 현상에 대해서 주님께서는 다른 제자들이나 다른 사람들에게 주목을 받는 발언들을 해내십니다. 주님의 순간적인 태도 변화를 보여주는 거죠.
제자들도 마찬가지고 세상 사람들도 마찬가지고 예수님이 이렇게 일하게 되시면 많은 사람들이 믿고 따를 것이고 역시 메시아가 왔다고 할 것이다. 그런데 어떤 지점에 와서 어떤 구석에 와서 반전되는 판이 바뀌어 버리는 이럴 수는 없다는 그런 경우가 생길 때 이것이 예수님께서 구멍을 뚫고 그 구멍 뚫린 그 자리가 예수님 자신의 자리인 것을 알려주는 그런 계기가 되는 사건이 있을 때는 주님께서 이러한 태도 변화를 보여준 겁니다.
“너희들 보기에 참 이상하지? 참 기이하지. 바로 이 일을 위해 내가 왔다”라고 하시는 거죠. 이거는 사람들과 생각을 같이 안 하겠다고 처음부터 노리고 들어오신 거예요. 인간들이 예상 못 한 기이하고 이상한 일을 주님께서는 앞장세워서 보라는 겁니다. 내가 하는 지점에서 너희들이 예상밖에 일이 일어나는 것을 내가 친히 가서 내가 그 지점들을 알려줄게. 그게 뭐냐 하면 집단 대 특정 개인.
백부장이 이방인이지만 예수님을 믿는 것이 기이하고 모든 인간이 예수님 하는 기적을 맛보면서 그 기적이 나에게 오기를 원했지만, 기적은 기적대로 받지만, 그 당신에 대해서 특이성을 갖지 않는 그 자체는 이질적인 겁니다. 이 세상 사람들이 아무리 노력해도 주님의 뜻을 알 길이 없게 되어 있어요. 누가복음 8장 17절에 보면 “숨은 것이 장차 드러나지 아니할 것이 없고 감추인 것이 장차 알려지고 나타나지 않을 것이 없느리라”라고 되어 있어요.
이 말을 가장 쉽게 알 수 있는 것이 뭐냐 하면 유튜브에 동영상을 업로드할 경우입니다. 업로드가 뭐냐 하면 내가 카메라로 찍은 필름을 유튜브라는 곳에서 전 세계 사람들이 모두 볼 수 있도록 올리는 것을 가지고 업로드라고 합니다. 올리는데 시간이 필요해요. 그 시간에 대해서 제가 다시 말씀을 읽어 보면 “숨은 것이 장차 드러나지 아니할 것이 없고 감추인 것이 장차 알려지고 나타나지 않을 것이 없느리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유튜브에 신청해서 등록하고 올리게 되면 좀 기다려야 해요. 기다리는데 어떤 고화질은 한 시간 또는 두 시간 걸려요. 특히 밤중에 인터넷 느릴 때는 세 시간까지도 걸리고 제가 최고 오래 기다린 것이 17시간 기다려서 나오게 한 적이 있습니다. 인터넷 사정이 안 좋아서. 그러니까 분명히 제가 올렸는데 뜨려고 하면 한두 시간 있어야 카메라 찍은 것이 나타납니다. 그때까지 계속해서 이게 플레이가 되는 거예요. 그때까지 이 필름은 열심히 올라가고 있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마지막 때에 이 세상을 심판한다는 것은 동영상 업로드한 거예요.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고 해서 주님께서 일을 시작 안 한 것이 아니에요. 시작해버렸어요. 그런데 가끔 그 징후와 징조를 보여줄 때 ‘기이하다, 이상하다, 이럴 수 없느니라, 이건 예상 밖이네’라는 그런 이야기가 툭툭 제자들 사이에 유포되기 시작합니다. 마가복음 6장 6절에도 기이하게 여겼다는 예수님의 그 태도가 그 당시 제자들과 사람들에게 널리 전파되면서 저분이 과연 누구인가를 다시 생각하게끔 그런 환경을 마련하는 겁니다.
그러면 그렇게 해서 그런 업로드가 다 끝났을 때 나타난 게 뭐냐 하면 요한복음 10장 17절에 보면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라는 겁니다. 이것은 이 세상 어떤 인간도 못 따라옵니다. 욥도 지금 이걸 몰라요. 욥은 지금 뭘 하느냐 하면 하나님이 자기에게 관여했다는 걸 알아요. 그리고 자기가 이상하게 남들 말고 자기를 표적으로 세워서 모든 비난의 화살이 그 미운 살이 전부 다 자기를 향하여 과녁으로 삼아서 향하고 있다는 이 기이하고 특이한 이상한 현상은 자기가 알겠는데 그래서 곧 자기가 죽어가고 있다는 것도 알겠는데 내가 왜 죽어야 해요.
내가 늙어 죽는 것은 이해 가겠는데 늙어 죽는 것은 기이한 것이 아니에요. 일반적인 거예요. 악마가 다스리는 세상에서 늙어 죽는 것은 당연한 겁니다. 그거 말고 악마가 지배하는 세상에 사람의 몸이 늙어 죽는 거 말고 특이하게 죽는 현상이 왜 하필이면 나에게 일어나야 합니까를 욥이 탄식하면서 부르짖고 있는 그 대목이에요. 아주 탄식을 해요.
오늘 본문 16절에 보면 “내 얼굴은 울음으로 붉었고 내 눈꺼풀에는 죽음의 그늘이 있구나”라고 자기 현상을 설명하는데 왜, 하필 왜, 하필이면 왜 내가 이렇게 당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설명을 못 합니다. 짜증이 나는 거예요. 그런데 신약에 와서 성령 받은 사람은 짜증이 나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노크 원리에 감사합니다.
내 것이라고 여겼는데 내 안에 이런 쓰레기가 들어있는 줄을 몰랐다는 거죠. 그러면 자기로서는 이미 끝나버린 거예요. 한 10일 전에 어떤 뉴스에서 우리나라에 마지막 남은 성냥공장이 문을 닫았답니다. 거기가 어디냐 하면 경기도 의성에 있어요. 의성에 가면 이제 성냥공장 없어요. 의성에 가면 이제 성냥공장 없습니다. 성냥공장 공장장 없습니다. 이제 끝났어요.
이 말이 뭐냐 하면 마지막 남은 내 것이 없어졌어요. 이제는 나보고 네 가치는 너의 중요함 그런 거 이제 묻지 말라는 거예요. 이미 주님이 와서 접수했으니까. 의성 하니까 갑자기 쓰레기 더미 생각나는데 쓰레기 더미 같은 내가 그전에는 쓰레기인 줄 몰랐죠. 내가 쓰레기이면 쓰레기일수록 주님의 피와 살의 생명의 가치는 오히려 더 높여지는 거예요.
주님은 의롭게 되고 나는 갈수록 더 죄인의 괴수가 되고 이렇게 짝이 맞잖아요. 이게 신랑과 신부의 짝이 맞아요. 신부는 더러운 신부, 호세아에 나오는 바람난 더러운 신부, 신랑은 깨끗한 호세아. 짝이 맞잖아요. 이게 하나님의 신부 신랑 짝짓기 원리 아닙니까. 내가 네 속에 들어갈게. 내 영을 너의 안에 넣어줄게. 네 인생에 대해서 더 이상 네가 고민하거나 신경 쓸 필요가 없다.
그런 겁니다. 욥은 아직 그걸 몰라요. 그러나 십자가에 의해서 살과 피를 먹는다고 할 때 이미 우리는 그걸 알게 된 겁니다. 그러면 그 과정 속에서 주님께서 누가복음 9장 26절에서 하신 당부를 제가 여러분에게 하는 당부로 그대로 드리고 싶어요.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자기와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으로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부끄럽다는 거예요. 이상한 거, 내가 이상하게 된 것을 부끄러워하고 수치스럽게 여기고 남들과 같이 섞여서 티가 안 나게 살면 좋겠다고 하면서 주님 들어오신 것을 부끄럽게 여긴다면 나도 너를 부끄럽게 여기겠다는 겁니다. 그러면 오늘날 이 상황에서 이 말은 어떻게 적용되는가. 이 말씀 하고 설교 마치겠습니다.
사람들이 코로나 19 유행 때문에 마스크를 쓰지요. 이 마스크를 쓰는 모습을 보니까 인간이 얼마나 마스크 의존적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야말로 마스크 끌어안고 자게 되었어요. 갈수록 더하게 되면. 사람과는 거리 두기를 하지만 마스크와는 거리 두기를 못 하잖아요. 이 말은 마스크가 뭘 이야기하느냐. 내 더러운 악취를 마스크라는 향기로 덮는다고 그게 덮힐까요?
마스크 하는 그 모습을 볼 때 인간은 평소에 어떻게 살아가는가가 더 적나라하게 드러났어요. 나는 나만 의존해서 살아간다. 나는 내 결정에 의해서 살아간다는 그것을 마스크 쓰는 사람마다 다 느끼는 거예요. 물론 저도 씁니다. 그러나 마스크가 그동안 숨기고 안 그런척하고 예수 믿고, 하나님 믿고, 복음 믿고, 좋은 이야기하는 그 모습 자체가 마스크를 들고 이제는 복음 없이 살아도 마스크 없이는 못 살겠다고 나서는 순간 얼마나 인간은 자기에게 집착하고 있는지를 마귀라는 것이 얼마나 독한 존재라는 사실을 우리 힘으로 우리가 치료가 안 된다는 사실을 마스크를 통해서 보편적으로 알게 된 겁니다.
만약에 유럽에 스웨덴, 이태리, 프랑스, 독일 같은 나라에서 정책이 마스크 쓰라고 할 때 ‘웃기고 있네’라고 하며 안 쓸 때 안 쓰는 사람들이 원래 민주주의 처음 등장해서 자율권 굉장히 강조하거든요. 그런데 요양 병원에 자기가 90쯤 되었는데 코로나 걸렸다고 할 때 자식 생각해서 이래도 내가 자식에게 짐 덜 들게 하고 내가 돈 적게 쓰고 자식에게 민폐 안 끼치고 먼저 죽어야 하겠다 싶어서 요양병원에 있으면서 마스크 의도적으로 안 써서 돌아가신 분 있다고 저는 믿습니다.
첫째는 지금까지 마스크 안 쓰고 살아온 세월이 90년인데 이제 와서 쓰겠다는 것이 꼴사나운 짓을 보여주는 것 같아서 자신이 용납 안 된다고 해서 귀찮아서 안 쓰고 두 번째는 이참에 잘 되었다고 코로나 걸려 죽자 싶어 안 쓰는 그런 사람 있을 수 있습니다. 마스크 쓰더라도 주님이 영원한 마스크고 우리가 의지할 분은 우리 안에 이미 들어오신 주의 살과 주의 피밖에 없음을 마스크를 쓰면서 느끼시길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이 마스크 쓰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처럼 주님이 우리 속에서 우리를 장악해서 날마다 십자가에 생명으로 기뻐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