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오후설교

말씀의 부활(욥기 14:14-17)음성 동영상 Youtube 링크 : https://youtu.be/TunzoArd4tQ,

아빠와 함께 2020. 9. 27. 23:01

말씀의 부활

2020년 9월 27일            본문 말씀: 욥기 14:14-17

(14:14) 사람이 죽으면 어찌 다시 살리이까 나는 나의 싸우는 모든 날 동안을 참고 놓이기를 기다렸겠나이다

(14:15) 주께서는 나를 부르셨겠고 나는 대답하였겠나이다 주께서는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을 아껴 보셨겠나이다

(14:16) 그러하온데 이제 주께서 나의 걸음을 세시오니 나의 죄를 살피지 아니하시나이까

(14:17) 내 허물을 주머니에 봉하시고 내 죄악을 싸매시나이다

욥은 자기 죄 씻음 문제가 해결되기 전까지는 죽기 싫어서 하나님에게 하소연을 하고 있습니다. 평소에 자기가 자신을 돌아보면서 아무리 생각해도 딱히 죄다고 여길만한 짓을 안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죄인들에게나 해당되는 엄청난 고통을 당하는 입장에서 욥은 생각하기를 분명 내가 아직 알지 못하는 죄가 있을 수도 있다고 여긴 겁니다.

그렇다면 그 죄 문제가 해결되기 전에 내가 죽어버리면 자신은 거룩한 하나님과 함께 할 자신이 없는 겁니다. 따라서 죽기 전에 죄가 해결되든지 아니면 죽어도 다시 살아서 제대로 죄없는 삶이었다는 것을 하나님께서 보장해주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이러한 욥의 심정은 오늘 보통 사람들의 마음을 대변해주고 있다고 봐야 합니다.

왜냐하면 인간들의 관심사가 결국 자신에게로 귀환되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아무리 복잡하고 번잡하게 돌아가더라도 인간은 자신에 관한 문제만큼은 본능적으로 골라냅니다. 나의 이익과 관련있는 것과 없는 것을 구분해냅니다. 아무리 세상이 힘들어도 나만 힘 안들면 참 좋은 세상이요 신나는 세상입니다.

이처럼 부활에 관한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욥과 공통적인 심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평소에 마음자세가 무조적으로 나만이라 살아남아야 한다는 식으로 살아왔습니다. 따라서 성경에서 아무리 부활을 언급해도 사람들은 나만의 부활을 생각하게 마련입니다. 하지만 ‘내가 부활되는 것’은 성경에 없는 내용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부활은 ‘말씀의 부활’입니다. ‘나의 부활’이 아닙니다. ‘나의 정당성 보증’이 아닙니다. 이점을 파악하기 위해 다니엘 2:18-19을 보겠습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이 은밀한 일에 대하여 불쌍히 여기사 다니엘과 친구들이 바벨론의 다른 지혜자들과 함께 죽임을 당하지 않게 하시기를 그들로 하여금 구하게 하니라 이에 이 은밀한 것이 밤에 환상으로 다니엘에게 나타나 보이매 다니엘이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찬송하니라”

이 대목에 보면 ‘은밀한 것’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은 어느날 밤에 극히 사적이 꿈을 꿉니다. 참으로 중요하고 미래에 운명에 관한 꿈인 것을 직감했지만 잠에 깨고 난 뒤에 그 꿈의 내용을 잊어버렸습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신하들에게 어제 밤에 본인이 꾼 꿈을 알아내라고 닦달냅니다.

신하들은 기가찰 노릇입니다. 신하들은 정당한 대꾸를 합니다. “왕이시여. 남의 꿈을 알아내는 것은 신의 영역입니다”고 말입니다. 여기에 느부갓네살은 더 화가 났습니다. 즉 그동안 나라의 녹을 먹는 신하들이 기껏 인간들이 할 수 있는 일만을 하면서도 신의 이름을 들먹이면서 왕 자신을 속여온 것에 화가 난 겁니다. 다 몰살하라고 명령합니다.

다니엘의 지혜는, 인간들이 찾아낼 수 있는 지혜의 수준이 아닙니다. ‘은밀한 것’은 오직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실 때만 안다는 것은 다니엘 본인도 인정하는 바입니다. 욥이 부활에 대해서 어디까지 알고 있고 어디까지 모르고 있는지를 분명히 구분해야 합니다. 사람이 억울하게 죽은 자들에게는 다시 살려서 그 인간의 정당성을 인정받을 기회를 주어야 한다는 식의 부활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능력 안에서나 이해될 부활입니다.

하나님의 부활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다니엘 12:1-2에 보면, “그 때에 네 민족을 호위하는 큰 군주 미가엘이 일어날 것이요 또 환난이 있으리니 이는 개국 이래로 그 때까지 없던 환난일 것이며 그 때에 네 백성 중 책에 기록된 모든 자가 구원을 받을 것이라 땅의 티끌 가운데에서 자는 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깨어나 영생을 받는 자도 있겠고 수치를 당하여서 영원히 부끄러움을 당할 자도 있을 것이며”고 되어 있습니다.

즉 부활은 부활될 자만이 영광스럽게 부활되어야 하는데 이 부활은 오직 명단에 기록된 대로 시행된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부활은 개인의 여망으로 결정될 사항이 아닌 것입니다. 명단을 기록한 그분 소관입니다. 즉 개인이 부활하고 싶다고 영광스러운 부활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신약에 와서 보면, ①유일하게 부활이 된 분이 먼저 부활하셔서 ②그 부활의 영을 명단에 적힌 자에 국한해서 제공하게 되면 ③그 영이 그 사람을 접수하게 되고, 그 사람 속에 들어온 영의 위력으로 부활이 되는 겁니다.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말미암아 죽은 것이나 영은 의로 말미암아 살아 있는 것이니라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롬 8:10-11) 그렇다면 왜 인간들은 욥처럼 자신을 다시 살아나 자신의 정당함을 하나님 앞에서 인정받고자 하는 겁니까?

그것은 인간들의 육신 자체가 자신이 이해하는 방식으로 죽음으로부터 될 수 있는대로 피하고 싶어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재산 모으는 방식이고 놀랍게도 그 재산 가운데서 신(神)도 포함되는 겁니다. 창세기 31:34-36에 보면, “ 라헬이 그 드라빔을 가져 낙타 안장 아래에 넣고 그 위에 앉은지라 라반이 그 장막에서 찾다가 찾아내지 못하매

라헬이 그의 아버지에게 이르되 마침 생리가 있어 일어나서 영접할 수 없사오니 내 주는 노하지 마소서 하니라 라반이 그 드라빔을 두루 찾다가 찾아내지 못한지라 야곱이 노하여 라반을 책망할새 야곱이 라반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내 허물이 무엇이니이까 무슨 죄가 있기에 외삼촌께서 내 뒤를 급히 추격하나이까”라고 되어 있습니다.

라헬은 라반의 딸로서 이제 남편과 더불어 독립하려고 합니다. 남편 야곱에서 많은 재산이 있습니다. 하지만 라헬은 그 많은 재산을 유지하고 더 키울 수 있는 그 무엇이 있어야 했습니다. 그것은 재산의 일부로 신, 곧 드라빔이라는 우상이 목록에 들어갑니다. 즉 재산을 지키고 키워내는 그 신마저 자신의 소유 대상으로 여기는 겁니다.

왜 그렇게 합니까? 그것이 바로 자신으로 하여금 ‘죽음의 선험성(先驗性)’을 살아있을 때 느끼기 때문입니다. 즉 죽음을 알기에 전력을 다하여 그 죽음으로부터 더 벗어나고 더 멀어지고 싶은 겁니다. 재산 모으는 것이 가장 적절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위해 인간들은 자기로부터 개설된 관계망을 넓혀갑니다.

하지만 은밀한 관계망이 따로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부활에서부터 시작된 관계망입니다. 이 두 개의 관계망으로 인하여 이 세상에 ‘복음적 안목에서만 보이는 환란’이 들이닥치게 됩니다. 왜냐하면 부활에 이르신 예수님이 친히 당하셔만 했고 그 환란이 영광스러운 부활에 참여한 자에게 동일하게 관계망을 통해서 흘러들어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를 위한 나의 관계망이 유명무실해집니다. 라헬이 훔친 우상에 대해서 야곱은 참으로 억울합니다. 본인은 훔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게 오늘날 성도에게 주어지는 환란의 내용입니다. 예수님으로 흘러 들어오는 복음으로 인해 억울한 수난을 받는 것이 부활 관계망의 의 흐름입니다. 이 흐름으로 인해 성도의 모든 삶은 벌써 부활의 아름다움의 일부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삶에서 주님의 공로에 근거한 부활의 효과를 발견할 수 있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50강-욥기 14장 14~17절(말씀의 부활)20200927 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욥기 14장 14~17절입니다. 구약성경 774페이지입니다.

“사람이 죽으면 어찌 다시 살리이까 나는 나의 싸우는 모든 날 동안을 참고 놓이기를 기다렸겠나이다, 주께서는 나를 부르셨겠고 나는 대답하였겠나이다 주께서는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을 아껴 보셨겠나이다, 그러하온데 이제 주께서 나의 걸음을 세시오니 나의 죄를 살피지 아니하시나이까, 내 허물을 주머니에 봉하시고 내 죄악을 싸매시나이다”

욥이 자기가 죽게 된다는 것을 앞두고 다시 살고 싶어서 이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죽으면 그냥 죽으면 되는데 욥의 신앙 속에서는 천국과 지옥이 있기때문에 지금 자기가 이 죄를 해결하지 못한 상태에서 지옥 가기는 너무 억울한 느낌이 드는 거예요. 죄를 해결하지 못했다는 것을 욥은 어떻게 본인이 그것을 느끼냐 하면 죄 없는 자에게 이 정도 고통이 올 리가 없다는 거예요.

고통이 없다는 것은 아직 내가 모르는 고통이 남아 있다는 것이고 그 죄를 가지고 하나님 계시는 하늘나라에 그대로 들어가기는 만무하니까 어떻게 하나님이 나는 죄지은 거 없는데 주어진 고통으로 보니까 죄지은 게 있고 그렇다면 내가 모르는 그 죄를 하나님이 어떻게 좀 해결해 주시고 난 뒤에 나를 죽이든 살리든 좀 해주시면 되지 않겠느냐고 하소연하고 있는 그런 대목이에요.

욥기를 보면서 평소에 인간이라면 누구나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는 극한 인간성을 욥은 그대로 보여줍니다. 욥은 굉장히 솔직하죠. 순수합니다. 진심을 담고 있습니다. 그러나 진심은 진리가 아닙니다. 진심은 자기 안에 한계를 갖고 있어요. 그 테두리 안에는 자기가 진심이고 진심으로 진심으로 백날 진심으로 해 봐야 그것은 진리로 넘어설 수 없는 자기변명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건 자기연민이죠. 자기 자신을 불쌍히 여기는 겁니다. 사람이 누구든지 자기연민이 있기 때문에 때로는 울기도 하고 때로는 웃기도 하는데 울고 웃는 이 모든 것이 자기연민인데 어떤 사람이 방송에 나와서 자기 살아온 인생을 이야기할 때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내가 한 중년 남자로서 지금 이 시간에 공개적으로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내 아내와 내 가족이 있다는 것과 그들과 함께 사는 거, 그렇게 가족과 함께 살아온 여기에 대해서 나는 참 감사하고 있습니다. 내가 평생에 할 수 있다는 것은 가족과 더불어 아직 살고 있다는 것만은 내세울 수 있습니다”라고 눈물을 머금으며 ‘가족 최고’라는 마음을 가지고 하는데 그거 진심이죠. 진심인데 자기연민이고 자기 이기성이에요. 개별성이고. 천국과 아무 상관도 없는 겁니다.

성경에서 욥이 우리를 대표해서 부활에 대해서 죽고 난 뒤에 다시 살 수 없는지를 이렇게 나옵니다. “사람이 죽으면 어찌 다시 살리이까 나는 나의 싸우는 모든 날 동안을 참고 놓이기를 기다렸겠나이다, 주께서는 나를 부르셨겠고 나는 대답하였겠나이다”라고 14절에 이야기할 때 살고 싶다는 것은 누구나 갖고 있는 본성이기 때문에 부활을 그렇게 고대한다고 해서 그걸 으스대고 자랑으로 여기시면 안 됩니다.

이건 교회 다니고 안 다니고 간에 누구든지 살고 싶어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부활을 이야기할 때 제가 미리 결론부터 말씀드려서 부활은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내 안에 있는 언약이 사는 거예요. 복음이 살고 말씀이 사는 것이 부활이지 내가 사는 것이 부활이 아닙니다.

그런데 인간의 본능은 거울 앞에 자기만 보이니까 ‘아, 나 더 살고 싶어라. 주님 어떻게 좀 살려주시면 안 되겠습니까?’라는 식으로 하더란 말이죠. 제가 여러 번 이야기했지만 제가 아는 어떤 아시는 분은 “내가 죽거들랑 절대로 화장해서는 안 된다”라고 하셨어요. 왜? 화장하면 불탄 내 재를 끌어모으는데 얼마나 고생을 많이 하겠는가. “매장해라. 매장해야 무덤 팍 열면 바로 탁 부활해서 휴거가 빛의 속도로 이루어지고 새 예루살렘에 집결되도록 해야지”라는 거죠. 공연히 천사에게 힘든 일 만들어서 어디서 태웠는지 일일이 다 찾아가서 수증기 연기 다 구분해서 따로 조립하려고 하면 얼마나 천사들이 작업하는데 짜증이 나겠어요. 천사들이 파업하면 되지도 않을 일이죠. 천사들이야 말 잘 들어서 어차피 하겠지만 힘드니까 화장하지 말고 매장하라고 신신당부를 했습니다.

있는 그대로 문자 그대로 믿는 내 마음은 진심이라는 거죠. 진심 맞아요. 하지만 진리는 아닙니다. 나의 부활이라는 것은 아예 성경이고 어디에도 나의 부활은 없습니다. 내 안에 은밀한 것이 장착되어 있어요. 은밀한 것이. 다니엘 2장 28~29절에 보면 느부갓네살이 꿈을 꾸는데 억지도 이런 억지가 없어요. 꿈을 꾸는데 본인이 꿈꿔놓고 생판 남보고 “어제 내가 무슨 꿈 꿨는지 알아 맞춰봐. 맞춘 자에게는 상을 준다”라고 하는 정도 같으면 “아이고, 임금님 저는 포기하겠습니다”라고 하겠는데 그게 아니고 못알아 맞추면 다 죽여버리겠다고 한 거예요.

느부갓네살이 너무나 이건 이성적이 아닌 것을 알죠. 하지만 자기 안에 꿈이 자기를 괴롭히니까 본인도 그 고통에 참을 수 없어서 그냥 내뱉는 거예요. “누구든지 내 안에 있는 꿈, 내가 무슨 꿈을 꿨는지 알아내라”라는 세상에 이런 억지가 어디 있어요. 그러니까 신하들이 이구동성 이야기합니다. 왕이여, 말은 차마 못 하지만 ‘이 인간아 정신 좀 차려라. 그게 어디 인간이 할 일이냐. 신이 할 일이지’라는 분위기로 이야기를 하니까

임금이 그때 더 화를 내면서 “그러니까 너는 신을 빙자해서 돈을 삥땅해 먹었잖아. 너희들이. 평소에 하나님 하나님 그렇게 찾다가 정작 너나 나나 다 할 수 있는 것을 하나님이라고 빙자해서 받들어 놓고 이제 진짜 인간이 못 할 일을 제시하니까 나자빠져? 못한다고? 그러며 그동안 너희들이 나를 사기 쳤잖아. 지금 너희는 나에게 죽어도 할 말 없어. 여봐라, 이 점쟁이들 다 죽여라”라고 한 거예요.

점쟁이들도 이야기했지만 “임금님 무리한 요구입니다. 인간의 한계를 넘었습니다”라고 할 때 임금도 할 말이 있죠. 한계를 넘어서는 그 이야기하라고 내가 월급 주고 내 밑에 있었던 거잖아. 인간의 능력을 한계를 넘어서는 이야기하라고. 꿈꿔놓고 해몽하는 거 누가 못해? 무슨 구라를 떨어도 다 통하는데. 그런 거 말고 어젯밤에 내가 무슨 꿈 꿨어? 너희들이 이야기해주면 ‘아, 내가 그 꿈 꿨지’라고 상기될 것이라는 겁니다.

이건 세계에서 제일 어려운 문제예요. 수능에 나오면 아무도 못 맞춥니다. 세계에서 제일 어려운 문제예요. 어젯밤에 문재인 대통령이 무슨 꿈 꿨는지 알아 맞춰보세요. 정답 알려드릴까요? 잠자고 있었죠. 뭐. 자고 있었죠. 꿈은 무슨 꿈을 꿨겠습니까. 그것을 여기 본문에 보면 은밀한 것을 나타낸다고 나왔습니다. 29절에 “왕이여 왕이 침상에 나아가서 장래 일을 생각하실 때 은밀한 것을 나타내시는 이가 장래 일을 왕에게 알게 하셨사오며”라고 나오는 은밀한 것, 인간이 손 탈 수 없는 것, 인간이 아무리 신학 공부해도 알 수 없는 그 은밀한 거, 그 은밀한 것을 여러분이 사랑해야 합니다.

사람을 사랑할 때 은밀한 것이 없으면 사랑하지 마세요. 그 사람을 철저히 이용하는 거예요. 이 가짜 무당들처럼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서는 서로 이용하는 거 외에는 아무도 남을 상대하지 않아요. 그러나 성령이 임하면 은밀한 것, 성령, 그 성령에 대해서 사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비밀한 것, 그것만 사랑하게 되어있어요.

그래서 다니엘에 12장에 나오는 그 부활이라는 것이 딴 게 아니에요. 그 은밀한 책에 기록된 자들의 명단, 그 리스트대로 부활 될 거니까 명단에 없는 자는 입 다물어라. 부활 안 된다는 겁니다. 그리고 이것은 명단, 사람이 부활 되는 조건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부활 되는 그 사람의 됨됨이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은밀함, 그 책에 있는 은밀함, 그 은밀한 것을 제공하게 된 원천, 그 원천 되시는 어떤 인물이 부활 되는 거예요.

말씀은 예수그리스도를 증거 하게 되어있어요. 그 모든 말씀이 그리스도를 증거 하게 되니까 예수그리스도가 부활 된다는 말은 예수님이 첫째 부활이 되고 예수님과 같이 부활 되기로 명단에 있는 자들은 순서대로 그다음, 그다음 차례에 부활 되게 되어있습니다. 그러니까 이건 순전히 내가 부활하는 것은 없어요.

그리스도가 먼저 와서 그리스도가 우리를 접수해서 이제는 나의 것이라는 것이 소실되고 주님의 것으로 전환되고 난 뒤에 그 주님이 부활하셨기 때문에 주님의 것으로 된 자도 같이 부활 되는 거예요. 그렇다면 그런 성령을 받은 성도들끼리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으리오. 만약에 그런 성령 없이 접근하게 되면 그 사람은 그 사람을 가진 것, 이룬 것을 사랑한 겁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욥을 보면 이건 무조건이야. 나를 부활해 달라. 아까전에 말씀드렸듯이 내가 지금 죄 처리 안 하고서는, 죄 있는 것을 용서받지 않고서는 내가 여기서 죽으면 너무 억울합니다. 어떻게 좀 저를 죄 처리할 수 있도록 그래서 다시 살려낼 수 있도록 제대로 거룩하게 살 수 있도록 조치해 달라고 지금 기도하고 있으니, 제가 언급한 은밀한 것이 부활 된다는 것보다 이 욥의 하소연이 보통사람에게는 확 다가서지요.

그러면 이 욥 같은 인간의 본성이 신약에 와서 예수그리스도의 부활로 이어지려면 중간 과정에서 설명이 필요한 겁니다. 그렇다면 욥이 이렇게 자신이 다시 살고 싶어 하는 이유가 뭐냐 하면 꼭 죽어야 부활 되느냐. 아닙니다. 인간은 매일같이 자기를 살려내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이게 뭐냐 하면 자기로부터 개설된 관계망의 확산을 통해서 자기를 죽음에서부터 멀어져서 살 수 있는 나로 전환 시키고자 매일같이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걸 가지고 어려운 말로 뭐라고 하느냐 하면 죽음의 ‘선험성’이라고 해서 미리 경험하는 성질, 선험성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어요. 죽음이라고 하는 것은 죽을 때 경험하는 것이 아니고 먼저 경험하는 그것이 뭐냐 하면 살아보려고 애쓰는 것이 죽음의 선험성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뭔가 다가오기 때문에 벌벌 떨면서 악착같이 돈 모으고 살려는 거예요.

그 사는 방법은 뭐냐 하면 자기로부터 많은 자들, 자기에게 유력한 자들, 자기에게 힘이 되는 자들, 보탬이 되는 자들, 자기를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을 그 사람들에게 관계망을 확대하고 확산시키는 거예요. 그것이 바로 사회적 관계인데 사회적 관계가 끊어진 사람을 죽었다고 이야기해요. 이 사회에서는. 컴퓨터게임 하다가 그 컴퓨터관계망에 안 들어가면 그건 죽은 자예요. 다시 나타나면 산자고.

인터넷상에 등장하게 되면 산자고 안 그러면 죽은 자예요. 페이스북이라는 그 소셜인터넷 망에서 보게 되면 누구 생일이라고 떠요. 누구 생일. 어제 같으면 정석훈 생일이 떠요. 그러면 많은 사람들은 ‘아니고, 내가 아는 사람이 생일이구나’라고 하는 것이 관계망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꾸 걸쳐놓는 거예요. 될 수 있는 대로 많은 사람을 걸쳐놓는 겁니다.

걸쳐놓으면 거기서 생겨나는 것이 뭐냐 하면 재산입니다. 창세기 31장에 보면 인간이 살기 위해서, 그걸 달리 말해서 죽음에 대한 선험성, 달리 말하면 장차 오는 죽음을 미리 대비하기 위해서, 죽음에 쉽게 다가가지 못하도록 살 수있는 힘을 구축하는 그 부단한 노력 치열한 노력을 인간은 인생을 살면서 하게 되는 겁니다. 그게 인간들이 살아가는 방식이에요.

자꾸 죽음의 공포가 오니까 살 수있는 가능성을 높이는 거예요. 집에 천만원 있는 것보다 천억 있는 것이 사는 것에 더 유리하다고 여기는 것이 경험상 우리가 아는 겁니다. 천억을 벌려면 그만큼 관계망이 많아지겠죠. 인간은 그렇게 살아가는데 우리가 그렇게 상식적으로 아는 것뿐만 아니고 바로 성경에 보면 창세기 31장에 보면 야곱도 그렇게 살았어요.

창세기 31장 35~37절에 보면 이런 말씀 나옵니다. “라헬이 그의 아버지에게 이르되 마침 생리가 있어 일어나서 영접할 수 없사오니 내 주는 노하지 마소서 하니라 라반이 그 드라빔을 두루 찾다가 찾아내지 못한지라 야곱이 노하여 라반을 책망할새 야곱이 라반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내 허물이 무엇이니이까 무슨 죄가 있기에 외삼촌께서 내 뒤를 급히 추격하나이까 외삼촌께서 내 물건을 다 뒤져보셨으니 외삼촌의 가장집물 중에 무엇을 찾았나이까 여기 나의 형제와 외삼촌의 형제 앞에 그것을 두고 우리 두 사이에 판단하게 하소서”

여기 성경에서 이렇게 나왔을 때 여러분들은 이렇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인간이 스스로 자립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재물을 끌어모아야 사는 데 유리하다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고 또한 야곱의 본성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것과 오늘 본문과 무슨 연관이 있느냐. 좀 더 설명들이면 지금 재산이 없다면 돈이 없다면 매일같이 죽어갈 수 있는 것을 내가 재산을 모으게 되면 다시 죽은 나를 매일같이 살려낼 수있는 힘이 나에게 있다는 것을 자부심으로 여기며 인생을 살아가는 거예요.

우리는 나의 부활에 대해서 하루라도 죽음에 대해서 생각 안 하고 그냥 넘어가는 일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이 드라빔이라는 것이 뭐냐 하면 보통 신에 대한 우상인데 그 당시는 신마저 자기의 하나에 재산이었습니다. 신이 나의 재산이에요. 신이 나의 재산이라는 말은 좀 더 비약해서 말씀드리면 내 주변에 있는 시간과 공간도 언제든지 나를 살리는 재산으로 전환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시간과 공간이. 이게 내가 개설한 관계망이에요.

틈만 있으면 전화해서 아는 사람을 고객으로 단골로 계속 모집하는 거, 장사할 때만 단골이 아닙니다. 인생 자체가 단골 없이는 못 살아요. 나 아는 사람 없으면 외로워서 못 살아요. 여기에서 가장 단골은 뭐냐 하면 자식입니다. 내가 아플 때 누가 여러분을 위로합니까? 자식이죠. 그것도 아들 말고 딸자식. 자식 농사 잘 지어놓고 뭐 섭섭하다고 하지만 이렇게 추석 맞이해서 또 효도 티 낸다고 와서 간다고 하면 어머니가 “야야, 코로나 때문에 오지 말라고 하는 거 모르나. 정부 시책. 오지 마라”라고 하는데 이걸 번역하면 돈만 보내라는 뜻이죠. 제사 비에 교통비 더 추가해서 돈만 보내라는 뜻이죠. 말 해석을 좀 잘 알아들어야 해요.

너만 부활하지 말고 나도 좀 부활하자는 그 말 아닙니까. 그 말이거든요. 자꾸 죽음에 쫓기니까. 뭐가 있어야 살지요. 그런데 인간들은 생각하기를 내가 죽는 것에 대해서 왜 이렇게 본인이 섭섭해하는지 그 이유를 아직도 몰라요. 본능적으로 살고 싶어 하는데 왜 살아야 하는지, 다른 말로 하면 왜 너는 네가 죽으면 안 되는지에 대해서 해답을 갖고있지 않습니다. 인생이라고 하는 것은 해답이 없어요. 왜? 은밀한 것이 안 들어 왔거든요. 은밀한 것이.

거울에 비친 내 몸뚱아리, 손에 잡히는 내 몸밖에 없어요. 몸밖에 없으니까 신이라는 이미지를 상상할 때 사는 게 힘드니까 곧 죽으려고 하니까 신이시여, 뭐하십니까? 나를 살려내야지. 그래야 당신이 신답고 사랑의 하나님답잖아요. 내가 당신에게 갖다 부은 밑천이 얼마입니까? 헌금하고 예배드리고 기도하고 성경 읽고 얼마나 갖다 부었습니까? 그 신이 뭐냐 하면 드라빔이에요.

나를 살리기 위한 우상이에요. 우상. 드라빔 이었다니까요. 라반뿐만 아니고 야곱의 삼촌뿐만 아니고 모든 사람들이 신을 하나에 나를 지키는 수호신으로서 하나씩은 다 갖고 있는 겁니다. 야곱과 라반의 차이점을 창세기 31장을 통해서 보여주는 겁니다. 그런데 창세기 31장 35~37절에서 언급하는 게 스토리가 이상해요. 분명히 야곱의 아내 라헬, 아내도 그냥 아내가 아닙니다.

야곱에게 두 아내가 있었어요. 못생긴 아내와 이쁜 아내가 있어요. 이쁜 아내가 도둑질 한 겁니다. 이쁜 아내가 아버지의 재산을 도둑질 한 거예요. 아버지가 그 신을 섬김으로써 엄청난 부자 되었듯이 아버지가 섬기는 그 신을 우리가 가지면 우리도 아버지처럼 큰 부자 된다고 해서 라헬이 그걸 가지고 온 거예요. 자기 딸이. 이걸 가지고 딸이라고 하지 않고 딸년이라고 합니다.

시집간 딸이 친정에 가게 되면 눈에서 빛이 나오죠. 쫙 서치라이트가 나옵니다. 뭘 가져갈까. 혹시 오래된 골동품 같은 돈 되는 거 없을까 하면서 한번 훑고 지나가죠. 다락에도 한 번 올라가 보고. 뭣을 꼬불쳐 놨는지, 혹시 오래된 포도주 같은 거 없는지 올라가 보고 싹 훑어보고 “아버지 이거 가져갑니데이~”라고 가져가면 끝나죠. ‘아버지, 부모 할 일이 뭔데. 자식 사는 게 아버지 보람이잖아요. 그렇다면 내가 가져가도 아버지 이상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내가 가져갑니다’라는 식이란 말이죠.

그러나 라반은 대단히 화를 냈어요. 이건 사위가 가져갔구나. 얼굴도 이쁘고 착한 내 딸은, 얼굴 이쁘면 착하다고 오인하게 되거든요, 착한 내 딸은 그럴 리가 없어. 그래서 딱 살피는데 그 딸이 경수가 있다고 해서 엉덩이에 깔고 앉아서 일어나지 않았어요. 다른데 있을 리가 없죠. 분명히 라반 입장에서는 훔쳤고 야곱 입장에서는 억울하고. 이러한 이야기가 라반과 야곱 사이에 있던 이 이야기가 왜 이 성경에 펼쳐져 있는가.

그것은 인간이라는 관계망은 아무리 자기가 순수하게 살고 정직하게 살고 죄지은 게 없다고 할지라도 내가 연관된 관계망에 해당되는 자들이 어떤 식으로 나쁜 짓을 해서 나에게 수익을 창출하게 했는지 내가 모를 일입니다. 내가 모를 일.

회사 다녔다. ‘우리 회사는 참 착해요. 나쁜 짓 안하고 정직하게 사업합니다’라는 것은 있을 수 없어요.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수익 창출이 회사의 목적이라면 때로는 제휴하고 합병하고 통합하고 위탁하고 하면서 어떤 이윤 창출을 위해서 인건비를 줄이는 방향으로 공장을 베트남으로 옮기고 하는 모든 일, 이 모든 일은 지금도 경제 바닥에서 수시로 쉬지 않고 일어나고 있어요.

중국으로 갔다가 중국에서 빼고 베트남으로 옮기고 하면서 삼성이 그 일 하고 있잖아요. 엘지도 그 일하고 있잖아요. 어떻게 해도 직원들이 거기에 대해서 이의거는 사람 한 명도 없습니다. 왜? 죽음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나에게 재물이 필요하고 내가 살아야겠다는 이것이 누가 뭐래도 이것만이 정당하거든요. 내가 존재한다는 자체가 누가 뭐래도 이건 정당하 일이에요. 선한 일이고. 나에게 있어서는 이건 올바른 일이 돼요. 나의 관계망이니까.

나를 죽이는 일이 아니고 나를 살리는 일이라면 그 일이 어떤 일이든 간에 나에게는 좋은 일이 되고 착한 일이 되는 겁니다. 그런 식으로 부활하겠어요? 그런 식으로 부활 해봤자 지옥밖에 더 가겠어요? 인간은 그 한계, 나라는 한계를 벗어나지를 못합니다. 이런 문제를 하나님께서 어떻게 해결하느냐.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인간 부활이 아니고 그 속에 있는 은밀한 하나님의 말씀의 복음의 부활, 하나님의 영적인 세계의 부활을 하기 위해서는 주께서 이렇게 다니엘 12장에 1절에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미가엘이 일어날 것이요 또 환난이 있으리니 이는 개국 이래로 그 때까지 없던 환난일 것이며”

지금 욥은 하나님으로부터 환란을 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도 환란을 받고 있습니다. 환란이라는 말이 무슨 뜻이냐 하면 내가 나를 스스로 살리기 위해서 나를 스스로 부활시키기 위해서 애썼던 모든 것들이 공격을 받는 상황을 말합니다. 환란은.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너를 위한 환란이 아니고 예수그리스도를 위한 세상의 증폭적인 환란, 끼어들지 말아야 될 사람이 끼어들었다는 것을 악마가 눈치채고 “잡아 죽여라. 예수 그리스도와 그 집단, 그 작당들을”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성도가 받는 환란은 우리 때문에, 내 죄 때문에 받는 환란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예수님으로부터 개설된 생명책에 기록된 그 관계망 때문에 흘러들어온 환란을 우리가 접수하게 됩니다. 억울하지요. 나는 드라빔을 훔치지 않았는데 내 아내가 훔쳤는데 야곱은 자기 아내가 훔쳤다는 것을 몰라요. 그런데 삼촌이 와서 자기보고 닦달내는 거예요. 야곱아 네가 훔쳤지? 아닌데.

성도가 살면서 인생을 힘들게 사는 것은 ‘어, 이것은 내가 죄지어서 당하는 게 아닌데 누구 때문이지’하다가 나중에 알고 보니까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모든 십자가의 흔적, 예수 믿는 자들의 흔적을 싹쓰리 다 없애기 위해서 세상 전체가 다 들고 일어나서 주는 환란이라는 사실을 언약적으로 파악하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 사이에는 관계망이 형성되어 있고 거기서 하나님의 부활하신 주님의 다 이루심이 언약으로 흘러 들어오게 되어 있어요. 우리 관계망으로.

그러니까 나는 이 땅에 살면서 내가 이 땅에 잘먹고 잘 살기 위해서 개설된 관계망이 있고 주님은 주님대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주님 십자가에서 개설되어 흘러나오는 생명수의 관계망이 있고 여기서 우리는 바로 내가 스스로 살려는 이 모든 관계망 자체가 오늘 본문의 욥과 같은 것이지 신약적이 아니라는 겁니다. 말씀과 언약과는 상관없이 내 개인적 욕심에 불과하다는 것을 우리는 깨닫게 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부활을 통해서 세상에 있는 것들, 부활할 자격도 없으면서 부활하려는 그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는 폐기물로 봅니다. 그래서 우리는 날마다 배설물로 빠지죠. 그렇다면 하나님이 주신 부활은 뭐냐. 우리가 상상도 못할 정도로 아름다운 부활입니다. 아름다운 부활. 그러니까 이 아름다운 부활이 오늘날 우리에게 일어난 모든 것이 주님의 관계망으로 보게 되면 나에게 일어난 모든 것이 지극히 아름다운 거예요.

내가 재산 모아서 죽기전에 부활하려고 애쓰는 것처럼 주께서 우리를 부활의 영광의 나라로 가기 이전부터 하나님은 복음을 통해서 십자가와 말씀을 통해서 언약을 통해서 약속을 통해서 계속해서 아름다운 부활로 우리를 이끄시고 있습니다. 그래서 죄 없이 행동하는 모든 것에 죄를 묻지 않는 거, 문제삼지 않고 죄를 묻지 않는 거, 세상에 이것보다 더 아름다운 것은 없어요.

결혼식 하는데 코로나 때문에 손님들에게 식사도 대접 못했을 때 아름다운 일입니다. 왜? 이 세상이 결코 의지할 만한 세상이 아니구나. 내가 설치한 관계망이 이게 죽음으로 끝나는 구나. 그런데 부활에 이르는 관계망이 죽음으로 끝나도 괜찮거든요. 부활에 이르는 그 십자가 복음에 의해서 우리가 빨대처럼 꽂혀있다면 나에게 일어나는 내 뜻대로 안되는 이것 조차도 극히 좋은 일 정도가 아닙니다. 극히 아름다운 일이에요. 정말 흠모할 만한 일.

그것을 바로 우리의 예상을 넘어가는 우리가 영광으로 넘어가는 아름다운 일이 지금 우리를 휘감고 이끌고 있다는 거, 부활의 세계가 이끌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 달리 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부활의 눈으로 보게 하옵소서. 내 잘났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부활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얼마나 고귀하고 희생을 치뤘는가를 그걸 증명하기 위해서 우리를 사용하고 있는 그 관계망에 대해서 우리가 아름다운 고백을 내놓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