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오후설교

세상 시스템

아빠와 함께 2020. 7. 13. 09:20

허망한 사람

2020년 7월 12일            본문 말씀: 욥기 11:12-20

(11:12) 허망한 사람은 지각이 없나니 그의 출생함이 들나귀 새끼 같으니라

(11:13) 만일 네가 마음을 바로 정하고 주를 향하여 손을 들 때에

(11:14) 네 손에 죄악이 있거든 멀리 버리라 불의가 네 장막에 있지 못하게 하라

(11:15) 그리하면 네가 반드시 흠 없는 얼굴을 들게 되고 굳게 서서 두려움이 없으리니

(11:16) 곧 네 환난을 잊을 것이라 네가 기억할지라도 물이 흘러감 같을 것이며

(11:17) 네 생명의 날이 대낮보다 밝으리니 어둠이 있다 할지라도 아침과 같이 될 것이요

(11:18) 네가 희망이 있으므로 안전할 것이며 두루 살펴보고 평안히 쉬리라

(11:19) 네가 누워도 두렵게 할 자가 없겠고 많은 사람이 네게 은혜를 구하리라

(11:20) 그러나 악한 자들은 눈이 어두워서 도망할 곳을 찾지 못하리니 그들의 희망은 숨을 거두는 것이니라

세상은 자기 혼자 사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혼자 행복하면 좋은 세상 되는 것이 아닙니다. 전체 사회가 엮여져 있는 체제를 알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소발의 이야기는, 그 당시 사회나 오늘날 사회에도 기본 정신을 보여줍니다. 즉 ‘개인적 의로움’에서 더 나아가 ‘집단적 의로움’을 유지할 수 있는 원칙을 인간들이 신의 뜻이라고 여깁니다.

쉽게 말해서, 선하면 복받고 악하면 벌받는다는 겁니다. 선하면 비록 도중에 잘못 생각해서 죄를 짓더라도 다시 그 죄가 죄임을 인정하기만 한다면 어두움에서 빛의 세계로 다시 나올 수 있다는 겁니다. 소망이 생긴다는 겁니다. 소발이라는 친구가 이러한 사실을 어디서 알게 되었을까요?

소발이나 그가 속해 있던 세상에서는 ‘이런 선악 원리는 선한 신의 바른 뜻’이라고 이구동성으로 동의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이 이런 철석같이 이런 세상관에 빠져 있기에 그들은 욥을 통한 특이하고 낯선 하나님의 드러냄을 그들이 이해하지 못하고 오해하고 있는 겁니다. 사람이란 서로 통하는 것이 있을 때 그 공동체가 유지된다고 여깁니다.

이 사회는 역사와 전통이 내려오고 있습니다. 즉 과거에 경험한 것들과 더불어 그 과거를 해석하는 원리도 같이 내려옵니다. 그러나 과거는 어디까지나 지나 간 일입니다. 지금, 현재 욥은 고통 받고 있습니다. 지금 이순간의 욥의 고통에 대해서 욥이 친구 소발은 헛된 해석을 내리고 있습니다.

이 헛된 해석이 단지 소발이라는 개인의 의견이 아니라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 시대 정신을 반영해주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세상 이해란, 지금의 자신들의 단체가 정당화하기 위한 시도입니다. 이 시대를 같이 살고 있는 여럿 사람들의 생각들도 개인적으로도 보다 자신이 정당화될 수 있는 기준이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모두 자신이 멀쩡하다 라는 사실은 요지부동 부인 못할 사실이라고 우기면서 제시된 기준으로 여깁니다. 자신이 욥처럼 심하게 안 아프고, 욥처럼 가산이 기울어지지 않았다는 점에서 자신들은 욥보다는 더 선하고 바르게 살았다는 근거잡기에 욥의 처지를 끌어당기고 있는 겁니다.

욥을 걱정하기 이전에 자신의 우월함을 자랑하고 싶은 겁니다. 이처럼 인간들이란 타인을 통해서 그때마다 자신을 정립하게 됩니다. 마치 복선 철로 위에 서로 자신의 노선 위로 열심히 달려오면서 스쳐 지나갈 때, 상대편 차에 타고 있는 승객의 눈동자 속에서, 그 사람을 지켜보는 자신의 눈을 발견하고 다시 그 장면을 나에게 회수하는 것처럼, 사람은 타인 없이는 자기 정립을 못합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욥의 친구 눈 앞에 욥을 두시는 겁니다. 그 낯섦과 함께 말입니다. 그러면 욥의 친구들은 이런 욥의 처참한 형편을 보고서 뭔가를 말해야만 합니다. 이 말을 통해서 인간들은 평소에 자신이 어떤 식으로 살아가고 있는지를 노출됩니다. 아무리 감추고 싶어도 제 3의 타인의 형편을 평하는 것 가운데 자신의 생활 기준이 나옵니다.

이처럼 세상 시스템이 어디까지나 일단 ‘나는 잘났다’는 어떤 경우도 잊지 않습니다. 그런데 신약에 와서 갈라디아서 3:28에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여기에 나오는 집단 구분은 이 세상에서 사람들이 전통 속에서 나온 겁니다.

인간들은 서로를 보면서 자기 자신의 위치를 정립합니다. 따라서 구분되는 것이 지극히 당연하고 필연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시스템이 예수님께서 일하심 속에서는 다 와해됩니다. 갈라디아서 3:27에 보면,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예수님께서 욥의 입장처럼 이 마지막 때에 등장하신 겁니다. 욥 시대에 욥이 욥의 친구들로부터 모욕과 오해를 받는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이 시대의 모든 이로부터 무가치하다는 평과 함께 모욕당하셨습니다. 소발이 욥에 함부로 평하는 이유는, 인간의 시작과 끝이라는 근원적인 문제를 빼놓고 세상을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욥에게 고통을 주시는 가운데서, 인간은 왜 태어나야 하는지, 그리고 왜 꼭 죽어야 하는지에 관한 질문까지 욥의 입에서 튀어나오게 하십니다. 소발과 욥의 차이가 무엇일까요? 욥이 현재 자기 처지에서 자신을 돌아볼 때에, 자신의 경험과 과거로서 제대로 파악이 되지를 않습니다.

욥에게 회고(回顧) 영상이란 소용없습니다. 그것은 현재란 인간에게 없고 곧바로 과거나 미래로 갈라져 미끌어져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지금’을 주관하십니다. 인간들이 감히 만들어 낼 수 없는 이 ‘현재’라는 것을 만들어내십니다. 쉽게 말해서 욥은 그 어느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삶을 보내고 있습니다.

이로서 욥 주변 인물들은 본인들이 과연 하나님 앞에서도 정당한지를 다시 생각하게끔 합니다. 욥의 생각에 합류하지 못함에도 과연 자신이 제대로 살아가고 있다고 주장할 수 있을까? 또한 욥처럼 고통을 직접 당하지 않고서도 욥의 생각에 들어갈 수 있을까요? 없습니다. 지금의 시대는 시작과 끝을 모르면서도 자신이 옳게 산다고 우기기만 하는 세상입니다.

성도의 처지는 지금 욥과 같은 처지입니다. 비현실적인 충고들로부터 공격을 받고 있는 처지입니다. 성도들만이 압니다. 이 세상에는 진리가 없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리고 본인이 결코 진리가 아니라는 것도 말입니다. 사람들은 직장에서 공격을 받으면, 그 자리를 피하기 보다는 자기 주변에 대해서 복수할 생각을 갖게 됩니다.

왜냐하면 정당하기 짝이 없는 자신에 대해서 본인이 기대한 것과 못한 대우을 받는 것에 대해서 복수를 하므로서 여전히 본인이 정당한 존재임을 나타내고 싶은 겁니다. 즉 이 세상에 십자가가 없으니 자꾸만 인간하고 상대해서, 상대적으로 자신이 못나지 않았음을 증명하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십자가, 곧 이 시대의 욥이 우리 눈에 앞에 등장한다면 우리는 어떤 식으로 그 십자가와 욥의 처지를 해석해야만 합니다. 그 욥과 나 사이에 누가 과연 하나님 보시기에 정당한 인간인지를 말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앞에 십자가가 등장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39강-욥기 11장 12~20절(세상 시스템)20200712 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욥기 11장 12~20절입니다. 구약성경 771페이지입니다.

“허망한 사람은 지각이 없나니 그 출생함이 들나귀 새끼 같으니라, 만일 네가 마음을 바로 정하고 주를 향하여 손을 들 때에, 네 손에 죄악이 있거든 멀리 버리라 불의로 네 장막에 거하지 못하게 하라, 그리하면 네가 정녕 흠 없는 얼굴을 들게 되고 굳게 서서 두려움이 없으리니, 곧 네 환난을 잊을 것이라 네가 추억할지라도 물이 흘러감 같을 것이며, 네 생명의 날이 대낮보다 밝으리니 어두움이 있다 할지라도 아침과 같이 될 것이요, 네가 소망이 있으므로 든든할 지며 두루 살펴보고 안전히 쉬리니, 네가 누워도 두렵게 할 자가 없겠고 많은 사람이 네게 첨을 드리리라, 그러나 악한 자는 눈이 어두워서 도망할 곳을 찾지 못하리니 그의 소망은 기운이 끊침이리라”

이것이 욥의 친구 소발이 이야기한 건데 소발이나 욥의 친구들이 이야기할 때는 전혀 어려운 것이 없습니다. 왜냐 하면 우리의 기본이 착한 일 하면 복 받고 나쁜 일 하면 벌 받는다는 우리가 익히 알고 우리 태생적으로 박혀 있는 삶의 원칙을 우리를 대신해서 펼쳐주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오히려 이해하기 힘든 것은 욥 친구들의 말이 아니고 욥의 말이 힘들어요.

오늘 본문에서 욥의 친구가 이야기하는 취지가 뭐냐 하면 이렇습니다. 12절부터 쭉 보게 되면 “허망한 사람은 지각이 없나니”라고 합니다. 쉽게 말해서 철이 나지 않았다는 말이죠. 마치 뭐와 같으냐 하면 자기 마음대로 날뛰고 자기밖에 모르고 설치는 들나귀 새끼와 같다는 겁니다. 막되어 먹었다는 겁니다. 가정교육을 잘 못 받아서 훈련되지 않을 때는 그 사람이 들나귀처럼 설친다는 옛말이 있다는 겁니다. 따라서 욥이 힘들게 살아가는 것은 들나귀 새끼와 같이 네 마음을 똑바르게 정하지 않아서 그렇다는 거죠.

따라서 소발이 말하기를 “네가 마음을 바로 정하고 주를 향하여 손을 들 때”라고 합니다. 들 때 주의할 것이 있는데 네 손에 죄악이 있거든 그것은 하나님께서 안 들어 주니까 떨어버리면 하나님께서 들어준다는 겁니다. 네가 착하면 복을 받는데 복을 못 받는 것은 악하기 때문에 복을 못 받는다. 지극히 상식적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미리 말씀드리면 12장에 보면 다음 주에 나올 거지만 미리 말씀드리는 것은 제가 다음 주까지 살지 못 살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1절 2절에 뭐라고 되어있느냐 하면 “너 참 상식적이구나. 총기가 넘치는 거 봐라. 대단하네”라고 욥이 비꼬고 있습니다. “내가 모르면 너에게 감동 먹겠는데 다 아는 이야기를 하고 있느냐. 왜 이래?”라는 식이죠.

오늘 본문 14절을 다시 보면 죄악이 있으면 빨리 죄를 씻어 버리면 그러면 착하신 하나님께서 복을 주신다는 말이죠. 15절에 보면 “네가 죄가 없으면 네가 깨끗하게 될 것이고 흠 없는 얼굴이 되면 네가 더 이상 협박받을 일이 없기 때문에 두려움이 없을 것이다”라고 하고 16절에 보면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간 네가 손해 보고 손실 본 거 경제적이고 가정적으로 어려움 받은 거 다 보상해 주실 것이다, 그리고 옛날에 어려웠던 일은 하나의 추억이 될 뿐이다, 그리고 추억은 마치 물이 씻겨 내려가듯이 다 씻겨 내려가니까 너는 이제 어두움에서 벗어나서 대낮같이 환하게 밝아질 것이다”라고 그렇게 17절까지 이야기합니다.

18절에 보게 되면 “소망이 있는 방법을 내가 너에게 이야기해 줬다. 그게 바로 소망이다. 우리 인간으로서는 하나님 앞에 바르게 살고 착하게 사는 것이 소망이다”라고 하고 19~20절에 보면 “그렇게 되면 누워도 너를 협박 공갈하는 사람 없겠고 많은 사람들이 너에게 첨을 드린다”라고 합니다. ‘첨’이라는 말은 도움을 준다는 말이에요. “너를 서로 도와주려고 애를 쓸 것이다”라는 뜻이죠.

“그러나 만약에 내 말을 안 들으면 그건 악한 자가 되는데 그 사람은 눈이 어두워서 도망할 곳을 찾지 못하리니 그의 소망도 끊어진다”라고 소발이 욥에게 그렇게 충고를 합니다. 이 충고를 한다는 것은 지금 소발 본인이 그런 식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뜻이에요. 성도들끼리 서로 대화하고 서로 이야기할 때 안 들키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그냥 객관적으로 딴 이야기할지라도 ‘나는 평소에 이렇게 살아간다’라는 것이 그대로 노출되게 되어있어요.

“직장 어떻습니까?” “나라에서 다 해줍니다” “아, 좋겠네”라는 대화가 뭔 뜻이에요. 나도 나라에서 다 해주면 좋겠다는 뜻이거든요. 자신의 기대와 본심이 이야기하는 가운데 상대에게 다 들통나게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욥의 위치가 그렇게 중요해요. 서로서로 위선 떨면서 잘난 체하는 친구들로 하여금 욥이 그들의 예상 밖의 상황에 처하게 함으로써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한소리 하게 만들어요. 그들이 한소리 하는 가운데서 ‘나는 이렇게 살아간다’라는 것을 다 들통나게 하는 겁니다.

군에 간 사람들은 알죠. 훈련병으로 있을 때 생각하며 지금도 악몽을 꾸는데 훈련받을 때 제일 듣기 싫은 이야기 중 하나가 ‘기준’이라는 거예요. 한 손 올리면서 ‘기준’이라고 하는 거. 하나님께서는 욥을 통해서 두 가지의 기준, 하나밖에 없다고 여기는 것에 두 가지 기준을 내세웠습니다. 그리고 두 가지 기준이 합치되지 않아요. 의견 통합이 되지 않게 만들어요.

욥을 통해서 낯선 기준을 내세움으로 말미암아 세상 모든 사람은 똑같이 살아간다고 여겼던 사람들이 욥을 통한 기준에서 떨어져 나가 있음을 그들로 깨닫게 하는 거예요. 그들에게 알려주시는 겁니다. 그들이 해명하지 못하고 도저히 해석하지 못하는 욥에게 일어나는 특수한 상황을 통해서 그 친구들은 이만하면 내가 사는 것은 정상적인 길로 간다고 여기고 주님까지 거론하고 또 주님은 어떤 분이라고 하느냐면 선하신 분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주님은 선하시니까 우리가 선하게 살면 우리와 주님 사이에는 아무런 하자 없고 문제없다고 생각했던 그 기준이 이제는 욥의 등장으로 무용지물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을 통해서 소발이 하는 이야기가 어떤 점에서 문제가 있는지를 우리가 찾아내야 해요. 소발이 하는 이야기가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너무나 상식적입니다. 상식적이라는 것은 보통 사람들도 다 이야기하는 거예요.

여기서 주님이 나오고 선함이 나오고 악함이 나오고 여기 흠 없음이 나오고 단어들이 계속 보면 “환란을 잊을 것이다”, 소망이라는 말 나오고, “아침같이 밝을 것이고 하나님이 많이 도울 것이고 나중에 악한 자는 끊어진다”라는 말에서 쓰고 뽑아내는 단어들이 굉장히 종교적이고 경건한데 어떤 바탕을 깔고 거기서 단어들을 엮어 놓고 조직을 했고 구성을 했느냐를 우리가 봐야 해요.

교회 와서 성경 말씀 좋은 소리 다 하는데 목사가 어떤 소리를 할 때 그 목사의 단어 선정이 어느 바탕 위에서 선정되는지를 알아야 해요. 퀴즈를 하나 낼 테니 알아맞춰 보세요. 여기 있는 모든 사람들이 다 쓰는 일기를 무슨 일기라고 합니까? 제가 답변할게요. 전원일기. 맞죠? 전원이 쓰니까 전원일기. 그러나 최불암이 나오는 드라마를 안다면 용어 자체는 전원일기인데 그 전원일기를 보게 되면 사람들은 뭘 생각하느냐 하면 MBC 드라마를 생각한단 말이죠.

마찬가지로 모든 인간이 하나님에 대해서 이야기해 보라고 한다면 전부 다 나는 이렇게 살아간다는 것을 안 들키는 척하지만 다 그것을 깔고 주님의 용어를 다 심어가지고 ‘나는 하나님을 이렇게 생각하다’라고 제시하게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갈라디아서 3장 28절에 보게 되면 신약에 와서 그것이 전부 다 가짜로 드러납니다. 갈라디아서 3장 28절에 보게 되면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27절에 보면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그다음에 나온 말씀이 방금 읽었던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라고 갈라디아서 3장에서 복음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러면 이 복음을 사람들은 자기가 평소에 알고 있는 하나님에다가 이 본문을 거기에다 무작정 이렇게 딱 심고자 하겠죠. 그러나 갈라디아서 3장 28절에 말하는 것은 평소에 여기에 자유자나 종이나 남자 여자라고 하는 말이 뭐냐 하면 그냥 지금 있는 현실 자체가 남자와 여자 종과 자유자 헬라인이나 유대인 그런 것을 철저하게 구분 짓는 시스템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고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그런 시스템, 남자나 여자나 종이나 자유자나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미국 같으면 흑인이나 백인이나 신종코로나 걸리나 안 걸리나 이런 것을 이미 구분을 하고 있다는 말은 지금 내가 생존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가치 있는 존재라고 인정했기 때문에 이만큼 살아 있고 저 사람이 종이 되는 것은 내 기준에 봤을 때 저 사람은 나보다는 하나님 앞에 나쁘고 싫어 버린 바 되었기 때문에 나처럼 자유인이 아니고 노예 생활하고 있다고 여겼던 사회 시스템 안에서 ‘나’예요.

그러니까 이 ‘나’에다가 갈라디아서 3장 28절을 바로 연결시키면 안 돼요. 그 시스템 자체에 소속되어 있는 나를 해체 시켜 버려야 합니다. 없애 버려야 합니다. 없애는 방법을 알려 드리겠습니다. 없애는 방법은 간단하면서도 어려워요. 무엇이 간단하냐 하면 인간에게는 과거와 미래만 있지 현재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 점을 먼저 알아야 해요.

현재가 뾰족하게 각을 세웠다는 겁니다. 북유럽에 있는 지붕들처럼 뾰족하게 세웠어요. 북유럽의 지붕들은 눈이 많이 오기 때문에 눈이 오면 지붕 양편으로 경사진 곳으로 흘러내리기 위해서 지붕을 뾰족하게 만들거든요. 지금 소발이 욥을 보고 “너는 이렇고, 너는 이렇게 고생하는 것은 뭔가 하나님 앞에 손에 죄가 있기 때문에 그렇다”라고 하는 것은 어떻게 본인이 아느냐 하면 과거에 자기가 경험한 것에 그걸 누적해서 그걸 종합해서 아는 거예요.

그런데 욥이 고통받는 것은 과거 문제가 아니고 현재 진행 중입니다. 현재 일이에요. 현재 일을 평가할 때 친구는 “내가 왕년에 옛날에 이런 것을 아는데 이걸 그대로 현재 고통받는 너에게 적용하고 싶다”라고 해서 지금 증거 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나 현재는 없습니다. 현재라고 여기는 것은 현재라고 하는 순간 이미 과거가 되어버리고 미래라 하는 것은 어디서 생기느냐 하면 과거에 있는 것을 근거로 해서 상상해서 미래를 꿈꾸는 거예요.

미래는 원래 없죠. 오지도 않았는데 알 수가 있겠습니까?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말이 현재는 없는 거예요. 현재 욥의 고통을 설명할 수 있는 어떤 과거의 진리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친구 소발은 그 점을 모르고 있는 거예요. 이게 어려우면 좀 더 쉽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름이 최숙현이라는 경주지방에 철인 3종경기에 여자선수가 있는데 선배들과 자격들도 없는 팀닥터와 감독에게 술만 먹으면 폭행당하고 해서 자살했어요.

술 먹으면 때린다는 것은 옛날에 군대 생활한 사람들은 늘 겪는 거예요. 고참들이 집에 가고 싶은 스트레스를 풀 때 술 먹고 들어와서 후배들 잠 깨워서 패는 것이 그들의 스트레스 푸는 방법이었어요. 그래서 저는 그런 것을 많이 겪으면서 다짐에 다짐을 했습니다. 다시는 없도록 이 악행을 내 손에서 끊어야 하겠다 싶어서 제 뒤에 온 사람은 일체 저에게 큰소리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 “대충하고 집에 가자. 열심히 하지 말자”라는 식으로 했어요. 너무나 매일 반복되는 짓이거든요.

이 세상의 시스템은 진리라는 것이 없어요. 여기 역사 검열이라는 책이 나왔는데요 최지영씨가 편집을 했어요. 편집하면서 딱 보니까 표지에 문장 하나가 딱 보이는데 “진리가 말씀 안에 있기에 진리가 세상 안에는 없다”라는 문구가 있어요. 그래서 물었어요. 이것은 내가 기억이 잘 안 나는데 이 문장이 어디 있었느냐고 물으니까 이 책 안에 있다는 거예요. 최지영씨는 이 문구를 뽑아내기 위해서 이 책을 다 읽어요.

딱 보니까 제가 이 말을 했다는데 제가 보니까 이 세상 안에 진리가 없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말씀으로 역사를 검열할 수 있는 겁니다. 진리가 없는 거예요. 지금 무엇이 궁금하냐 하면 우리네 상식은 이래요. 상식은 그렇게 선배들이 때리면 그 직장을 그만두면 되지 않겠느냐. 물론 처음에는 한두대 맞을 수도 있어요.

직장 생활이라는 것이 어디 가도 마찬가지고 가정에서는 나 하나 믿고 공부시켰는데 내가 이것도 못 견딘다고 하면 가정에서는 ‘아이고 그래, 그것도 하나 못 견디나. 직장 생활 다 그렇지. 참으면 나중에 빛 볼 날이 있을 것이다. 메달 하나 따라. 그러면 될 것이다. 어느 직장 가도 마찬가지야. 참아라. 참아라’라고 부모들은 그렇게 할 거예요. 부모들은 다 큰 아이에게 자기들이 생활비 줄려고 하니 힘드니까 슬쩍 미루죠. 너 배운 게 그것밖에 없으니까 열심히 하라고.

문제는 그 자살한 사람이 얻어맞고 결국 자살 지경까지 이르면서도 그 직장을 그만두지 않았다는 거예요. 왜 그러냐. 다른 시스템을 생각을 못 한 거예요. 이 세상에 자기 자리가 여기 말고는 없다고 생각한 겁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착하면 복을 주고 나쁜 짓 하면 벌을 준다는 그 시스템 외에 다른 시스템이 없다고 소발은 그렇게 믿고 있었던 거예요.

이게 얼마나 황당한 이야기입니까. 신약적으로 보게 되면. 본인은 안 아프거든요. 본인 시스템에는 본인이 맞아요. 내가 착한 일 해서 복 받는 게 아니고 복 받을 만해서 나는 지금 너처럼 아프지 않고 멀쩡하다는 겁니다. 지금 내 기준에, 내가 안 아프다는 기준에 준해서 그것을 중심으로 해서 세상을 재편한 거예요. 재편성한 겁니다. 나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이게 바로 소발의 주장 바탕에 있는 본색이고 본심입니다. 나는 너에게 말한다. 왜? 나는 옳기 때문에. 그거잖아요. 교인과 교인의 대화에서 반드시 자기의 본색을 드러낼 수밖에 없어요. 십자가 있는 사람은 십자가 이야기할 수밖에 없다고요.

여러분 이런 걸 한번 상상해 보세요. 두 고속 열차가 경부선 복선을 서로 스쳐 지나간다고 할 때 우연히 지나가는 기차 창가에 있는 어떤 손님의 눈동자 속에서 자기가 그 사람을 보고 있는 그 눈동자를 발견한 적이 있습니까? 이것이 바로 인간의 ‘나’라는 것은 거울을 통해서만 비로소 알 수 있다는 원리입니다. 뭔가 거쳐와야 해요. 내가 누구냐는 내가 안 보여요.

상대의 멱살을 잡고 흔들든지 상대를 평가하든지 해야 해요. ‘죽기는 왜 죽냐고. 그것도 관악산 기어들어 가서’라고 평가할 때 그 평가 속에 내 모습이 들어있다는 겁니다. ‘역시 나는 잘나고 나는 멀쩡하지. 한번 보자. 나는 누구 추행한 적 없는지. 없지. 안심이다’라는 이런 거. 자기 자신의 정당성을 그 어떤 경우를 만나더라도 포기를 못 하는 거예요. 인간은.

그런데 주님께서는 욥을 딱 배치하셨다는 말이죠. 요새 말하면 십자가 지신 주님을 앞에 딱 배치한 거예요. 그러니까 거기에 대해서 친구니까 만나기는 만났고 요새 말하면 십자가 지신 예수를 만나니까 십자가에 대해서 뭔가 자기 나름대로 아는바 느낀 점을 이야기해야 하지 않습니까. 하면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너는 저주받아도 마땅해”라는 말을 소발이라는 친구가 이야기하는 겁니다. “너 아픈 거 보니까 너 나쁜 짓 했어”라고 말하면서 “내 식대로 살게 되면 하나님께 복 받아서 나처럼 이렇게 편안하게 살 수 있어”라고 이렇게 조언이랍시고 조언하는 거예요.

자, 그러면 소발이 모르는 게 있는데 그게 뭐냐 하면 아까 시간 이야기했지만, 처음과 끝을 모릅니다. 눈에 보이는 중간 과정만 달랑 떼 낸 거예요. 중간 과정만. 거기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욥에게 강제로 욥으로 하여금 ‘내가 어디서 태어났으며 내가 어디서 죽습니까?’라고 시작과 끝에 대해서 서술하게 하는 거예요. 왜? 중간 과정이 기대할 게 아무것도 남기지 않는 방식으로.

하나님께서 성도를 다를 때 ‘나는 어느 학교 나왔고, 출신지 어디고, 고향 친구들이 몇 명이고, 우리 아버지 뭐 하는 사람이고’라는 것을 전부 다 Delete(삭제)하는 거예요. 지워버리는 거예요. 쓸데없는 그러한 과거 존재로 지워버리는 거예요. 왜냐 하면 그것은 우리가 익히 아는 이야기, 기껏 과거 그것도 기억나는 과거만 대충 추슬러 가지고 그걸 편집해서 그게 나라고 여기면서 자랑질하면서 떠벌이는 그런 모습이거든요.

주님께서 욥을 통해 이야기하는 것은 그것들이 세상 사람들 다 하는 짓이라는 거죠. 그렇고 그런 다 하는 짓이에요. 욥에게 주어진 것은 위기입니다. 과거에 아는 식으로 내일 살려고 하니까 내일이 위기가 오는 거예요. 그러면 여기서 반성이 일어납니다. 내가 하는 짓이 무엇이 잘못되어서 미래가 꽉 막혔느냐. 미래가 아슬아슬 하느냐. 잘하면 굶어 죽는 수가 있겠다.

그러면 과거에 뭔가 내가 아는 ‘나는 이렇게 살아왔다’라는 것이 정답인 줄 알았는데 막상 어떤 위기적 상황이 왔을 때는 그 정답이 아니라 그건 뭔가 다른 요소가 빠져 있다는 것을 알려주게 되면서 재편성되게 되어있어요. 옛날에 알았던 내 인생관, 원리원칙, 그것은 날마다 재편성하게 되어있어요. 그 재편성 할 때 인간이 하는 것은 거울을 통해서 자기를 본다고 했죠.

지나가는 기차에 우연히 만난 사람의 눈동자 속에 그 사람을 쳐다보고 있는 내 눈동자를 내가 다시 회수해서 바라보면서 나 자신을 정립하는 방법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소발에게 욥을 보게 하신 겁니다. 세상 사람들 같으면 십자가 같은 것은 신경 안 써도 되거든요. 교회 문 닫으라고 하는 사람이 너무나 십자가를 알기 때문에 하는 이야기일까요? 십자가 아는 충성심에서 교회 문 닫으라고 했을까요?

아닙니다. 그 사람들은 과학적 인식이에요. 과학이라 하는 것은 어디서 시작되고 어디서 끝나는지를 몰라요. 눈에 보이는 것을 질서 있게 정리하는 것이 과학의 전부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예요. 쉽게 말해서 지상 천국 이루는 것이 그들의 소망이에요. 지난 시간에도 이야기했지만 지금 하나님께서는 소발을 나무라고 있는 겁니다. 누굴 통해서? 욥을 통해서. 모르면 가만히 있으라는 겁니다. 왜 아는 척하느냔 말이죠. 물론 아는 척하라고 욥을 보내긴 했지만.

욥은 물 젖은 개예요. 물 젖은 개. 물 젖은 개가 젖은 상태로 있던 가요, 아니면 혼신의 힘을 쏟아서 후다다다닥 털어버리던가요. 주인이 있든 말든 방인지 밖인지 구분 안 하고 짜증 나니까 물을 터는 거잖아요. 십자가 앞에서 우리가 안다는 것을 십자가와 일치되기 위해서 우리의 모든 것을 털어버리는 겁니다. 성질 급한 저는 그런 거 잘해요. 후닥닥 털어버려요. 잘난 거, 못난 거, 다 털어버리세요. 못난 것도 털어버리세요. 잘난 것도 터시고.

주께서 십자가 증거 하라고 우리 성도 인생을 소급해서 과거로부터 이렇게 오게 한 겁니다. 여러분 우리가 강도보고 뭐라고 할 수 있습니까? 강도보고 뭐라고 할 수 없어요. 욥은 자기의 모든 걸 다 털리는 겁니다. 그런데 소발은 뭐냐 하면 자기 안에 금 송아지 있어요. 혹시 여러분 집의 금송아지는 누구입니까? 여러분 집에 금송아지가 어떤 것이 금송아지일까요?

여러분의 자존심을 집대성한 것이 뭐가 있을까요. 끝으로 다시 시간론 이야기하고 마치겠습니다. 뾰족한 지붕처럼 각을 세운 과거 현재 미래에서 이게 고체 같으면 우당탕탕하고 떨어지겠죠. 액체 같으면 한쪽은 과거 한쪽은 미래로 그냥 흘러내리며 소멸해서 없어집니다. 없어지고 난 뒤에 이게 과거로 없어진 것은 딴딴하게 고체가 되어버리죠. 그래서 인간은 그렇게 고체 된 것이 나인 줄 알고 있어요. 내 기억이 나인 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일하시는 분은 부지런히 일하시는 분은 내가 일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일하세요. 우리가 주님에 대해서 뭔가 이야기할 것이 있어야 해요. ‘예수님은 누구십니까’라는 질문에 말을 할 수 있어야 해요. 십자가 그딴 거 필요 없고 예수님 꺼지라고 그러지 마시고 나 여기 있고 나만 편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누구십니까? 나를 지금 이렇게 만드는 분이.

왜 만드셨으며 무엇 때문에 나로 하여금 이렇게 살게 하십니까?’라는 그 질문은 바로 욥이 하는 질문인데 욥의 친구는 그걸 못 알아듣습니다. 가는 방향이 다르기 때문에 그래요. 우리가 주님 계시는 방향으로 가신다면 우리는 우리 입에서 나를 털어버리고 ‘주님은 오늘도 무슨 지시의 숙제를 내리실 겁니까’라고 주님과 교제하면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괜히 욥을 준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괜히 욥의 친구를 준 것이 아님을 저희들이 알게 되었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아는 척하면서 십자가를 논하는 저희들이 욥의 친구들과 같지 않은지 우리가 잘난 체하는 것을 다 물 털 듯이 털어버리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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