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오후설교

다른 하나님

아빠와 함께 2020. 7. 10. 11:08

디른 하나님

2020년 7월 5일               본문 말씀: 욥기 11:7-11

(11:7) 네가 하나님의 오묘함을 어찌 능히 측량하며 전능자를 어찌 능히 완전히 알겠느냐

(11:8) 하늘보다 높으시니 네가 무엇을 하겠으며 스올보다 깊으시니 네가 어찌 알겠느냐

(11:9) 그의 크심은 땅보다 길고 바다보다 넓으니라

(11:10) 하나님이 두루 다니시며 사람을 잡아 가두시고 재판을 여시면 누가 능히 막을소냐

(11:11) 하나님은 허망한 사람을 아시나니 악한 일은 상관하지 않으시는 듯하나 다 보시느니라

하나님에 대해서 인간 이해의 한계를 보여줍니다. 신은 너무나도 위대하셔서 인간의 이성을 초월하고, 뿐만 아니라 신은 모든 것을 아시기에 인간 내부에도 관여하신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런 규정이 과연 신이지 아니면 인간의 상시 잠재된 의식이지 판정내릴 방식을 인간에게는 없습니다.

즉 인간은 애초부터 정상이 아닙니다. 문제가 많습니다. 그런데 근원적인 오류를 지적할 기존을 인간 세계는 갖지 못하고 있습니다. 서울 가보지도 않는 자들 끼리 모여 들었던 이야기를 끄집어내어 아무리 나름대로 조립해봤자 그저 몽타주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환경이 먼저 마련되는 가운데 참된 하나님께서 등장합니다.

그래야 모든 주장을 일거에 잠잠케 할 수가 있는 겁니다. 그전까지는 아닙니다. ‘하나님이 크시고 위대하다’는 주장으로 얻을 수 있는게 뭘까요? 그것은 하나님을 하늘에 계신 분으로 올려보내고 이 땅에서 움직이는 인간 자신의 일에 대해서 자체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여지를 확보하려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재판하시는 분’이라는 단서를 소발이라는 친구는 붙이는 겁니다. 즉 땅에서 하나님이 하실 수 있는 일은 인간이 한 모든 일에 대해서 선과 악을 가름하고 평가내릴 준비를 갖고 있는 하나님이라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인간들은 정신 바짝 차려서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행동에 조심해야 한다는 겁니다.

재판을 하는 이유는 선한 자에게는 보상을, 그리고 악한 자에게는 징벌을 내리시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취지라는 겁니다. 그런데 이러한 의식은 따지고 보면, 인간 개인들의 여망이 아닐까요? 즉 인간들이 선한 일을 한다는 것은 본성을 무릅쓰고 하는 일이라는 힘들고 억지스러울 수 있다는 겁니다.

따라서 선한 일에 대해서 그동안 손실 본 것을 채우고 덤으로 넉넉하게 보상해주지 아니하면 아무도 선한 일에 나서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 인간의 염려입니다. 따라서 신이 참으로 정당하다면, 선한 일로 인해 피해본 그 피해보상과 그것을 넘어선 추상적 상까지 제공하는 신이야라만 인간과 신이 수월하게 통하는 사이가 되리라는 아이디어입니다.

사람들이 신을 찾는 것은 ‘자아성의 확대’입니다. 그래야 신과 자기 사이에 동질적인 연결선이 마련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신이 있더라도 자기와 통하지 못하는 신이라면 쓸모없는 신이라고 여깁니다. 그리고 신이 인간을 내치면 신에게 감사하고 동조하고 찬동할 자기 편이 없어질 것이니까 하나님께서 그렇게는 일하시지 않을 것이라고 여깁니다.

이러한 모호한 엉터리 신에 대한 해결책은 역시 이스라엘 역사입니다. 그 나라에 친히 하나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애굽에 있던 히브리인들을 모세를 보내신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서 자기 백성들이 하나님 계신 곳까지 오게 하셨습니다. 그곳이 어디입니까? 신명기 12장에서는‘ 하나님의 이름’이 계신 곳이라고 되어 있습니다.(신 12:5)

이로서 ‘하나님’과 ‘하나님의 이름’이 구분되게 됩니다. 이스라엘에게 있어 ‘하나님’은 없는 분입니다. 하지만 나타난 하나님이 있었으니 그 분이 바로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이는 곧 인간들이 생각하는 추상적으로 위대하고 절대신은 신이 아니라 ‘나타난 하나님’이 알려주시는 바로 그 하나님이 참 하나님이시라는 겁니다.

‘하나님 이름’께서는 이스라엘과 동석하시면서 철저하게 비밀에 붙여진 장소에 대열을 이동시킵니다. 광야를 같이 지내십니다. 매일같이 만나(양식)도 내려주십니다. 물도 주십니다. 이들 이스라엘은 어디로 갈까요? 지금 신약에서는 ‘하나님의 이름’이 하나님 우편에 계십니다. 즉 인간들이 같이 따라 간다고 해서 갈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이 땅에 없는 곳에 ‘하나님 이름’이 계십니다. 이로서 인간들이 생각하고 있는 ‘하나님’, 혹은‘ 신’은 그저 인간들이 머리로 지어낸 가상존재에 불과합니다. 즉 대자연은 저렇게 광할하게 펼쳐졌지만 누가, 누구를 위하여, 왜 만들었는지는 인간들로서 아는 바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나중에 욥에게 찾아오십니다.

이는 곧 하나님의 방문하심과 초월하심이 특정 인물, 특정 지점, 특정 시간에 맞추신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 오신 하나님을 마중하면 되지 않겠느냐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의 이름’의 오심은 그냥 곱게 오시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있는 모든 생각을 ‘어두움’되게 하시면서 오신다는 겁니다.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요 3:19) 빛과 어두움은 타협할 수 없습니다. 끝까지 대립하게 됩니다. 이 대립의 현장이 곧 하나님께서 진정 초월로 가신 지점입니다. 즉 내주하셔도 사람들은 못 알아먹었고 초월하셔도 사람들은 못 알아 먹습니다.

이는 평소에 인간은 ‘어두움’이기 때문입니다. 이 ‘어두움’은 안목에서 인간들은 그 어떤 신에 대한 아이디어를 다 끄집어낼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어두움이 어두운 값 한다고 기어이 오신 하나님을 죽여버립니다. 그래서 주의 이름은 지금 사람을 피해서 ‘하나님 우편’에 계십니다. (행 2:35)

세상 사람들이 주장하는 신은, 자신의 근원적인 죄성과 흑암을 말해주지 못하는, 있지도 않는 신입니다. 그들이 믿는 신은 곧 인간 자신의 능력을 믿는 것과 같습니다. 자기가 자신을 믿는 겁니다. 아는 평소에 사람이 이불을 덮고 잘 때, 자신의 몸의 성격에 맞는 쪽으로 이불을 덮는 것과 같습니다.

예를 들면, 이불이 ‘법’과 ‘십자가’로 구성되었다고 한다면, 성도는 십자가와 자신을 닿는 식으로 이불을 선택합니다. 십자가에서 흘러나오는 피로 자신을 적시면서 자신이 얼마나 큰 심각한 죄인인 것을 근원적으로 인정합니다. 예수님 당시에,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기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마 21:31) 세리와 창기들은, 본인들 입장해서 서글프기 짝이 없는 고된 인생을 살았지만 주님께서는 그들을 십자가가 보이는 통로나 경과로 사용하신 겁니다.

마치 비행기 동체에 올라 탈 때에, 지상에서 상당히 높습니다. 이 때 트랩을 동체 출입구에 대면 쉽게 탑승이 가능합니다. 이들 세리와 창기와 강도는 트랩 역할합니다. 그들 인생을 통해서 예수님으로 가는 출입구가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실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내세울 것이 없습니다.

바로 이 모습으로 예수님은 이 땅에 희생물 노릇하기기 위해서 오신 겁니다. 제 딴에 하나님을 안다고 여기는 자들에게 도리어 죽음을 당하는 식으로 참된 하나님을 보이신 겁니다.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 하였노라 하시니라”(요 6:65)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왜 우리가 어두움인 지를 늘 잊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38강-욥기 11장 7~11절(다른 하나님)20200705 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욥기 11장 7~11입니다. 구약성경 771페이지입니다.

“네가 하나님의 오묘를 어찌 능히 측량하며 전능자를 어찌 능히 온전히 알겠느냐, 하늘보다 높으시니 네가 어찌하겠으며 음부보다 깊으시니 네가 어찌 알겠느냐, 그 도량은 땅보다 크고 바다보다 넓으니라, 하나님이 두루 다니시며 사람을 잡아 가두시고 개정하시면 누가 능히 막을 소냐, 하나님은 허망한 사람을 아시나니 악한 일은 상관치 않으시는 듯하나 다 보시느니라”

앞에 이 말씀을 누가 이야기했느냐. 욥이 이야기했다면 우리가 받아들일 수가 있어요. 왜냐 하면 욥과 다른 친구들의 차이점이 있습니다. 나중에 욥도 이런 식으로 이야기하는데 욥은 하나님을 그냥 만났다는 그 정도가 아니에요. 하나님 앞에 굴복당했습니다. 그 정도입니다. 굴복당한 거예요. 누가 나를 굴복시키기 전까지는 내가 제일 높은 자리에 앉게 되지요.

그런데 하나님이 와서 내가 앉던 자리를 밀어버리고 주님이 거기 앉아 버리면 그다음부터는 ‘하나님이 내 자리 앉았구나’가 아니라 ‘내가 앉지 말아야 할 자리를 고집부렸구나’라는 마음이 듭니다. ‘참 시건방지게도 나처럼 시건방진 사람이 어디 있을까’라는 이것이 욥이 하나님 만나고 난 뒤에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한 이유가 그렇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하나님을 만나지 않은 소발이 건방지게 욥에게 하나님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욥 제일 마지막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평가내려요. “욥의 세 친구는 욥이 드리는 기도의 의미를 알라. 욥이 드리는 제물의 의미를 알라”라고 말씀하세요. 욥이 너를 위해서 용서 안 하면, 제사 안 드리면, 번제를 안 드리면, 너희들은 구원 못 받는다는 겁니다.

그 정도로 욥의 친구들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들은 다 헛소리가 되는 겁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서 여러분들은 모르겠습니다만 제가 보기에는 이거 불교입니다. 불교. 불교 미륵보살이 딱 이 주장을 해요. 부처가 여러 가지가 있는데 마지막 부처가 미륵이거든요. 처음에 부처 말고 부처보다 영향을 범주를 확장 시킨 것이 미륵보살이에요. 미륵보살의 개념이 지금 이 개념이에요.

인간치고 신을 안 믿는 인간은 없거든요. 불교도 미륵이라는 신이 있어요. 신이 있는데 그 내용은 소발이 대신해서 다 보여줍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나중에 복음을 알게 되는 욥과 인간이 복음을 모를 때 하나님을 만나서 자기 죄가 뭔가를 모를 때 그들 둘 사이에서 각각 내세우는 하나님이라는 개념의 차이는 무엇일까. 이것을 오늘 우리가 본문을 통해서 알면 되겠습니다.

복음을 알 때 하나님과 복음을 모를 때 하나님은 어떻게 차이나는 가. 이 차이 남은 그냥 흥미 위주가 아니에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왔을 때 그 당시 유대민족이 나름대로 여호와 하나님을 끔찍이 섬겼는데 그들이 섬겼던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이냐 하면 법에 Infra(기반)되서 섬긴 거예요. 뭐든지 법이에요. 모든 게. 환경 요건, 환경의 효과가 전부 다 율법적이었습니다.

그런 가운데서 의도적으로 예수님께서는 법 좋아하는 그들 속에 오셨지요. 그들 속에 오니까 그들의 결과는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죽으시면서 예수님이 하신 여러 가지 말씀 중에 이런 말씀이 있어요. “세리와 창기가 너희들보다 먼저 하나님 나라를 간다”라고 되어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세리, 창기, 강도, 병든 자, 절룩 발이, 이런 사람들은 어떤 통로나 십자가가 보이는 경로의 기능을 하게 돼요.

비행기 탈 때 보면 비행장을 안 가보고 비행기를 안 타면 어릴 때 자꾸 생겼던 의문점이 뭐냐 하면 비행기 몸통이 있는데 그 비행기 몸통을 어떻게 올라타는지가 어릴 때 의문점 중 하나였어요. 비행기 몸통이 큰데 땅에서 그걸 올라타려면 어떻게 턱걸이해서 올라가는지 그게 궁금했는데 나중에 대한늬우스에서 월남전에 대해 베트남 특파원이 보도하는 걸 보니까 맹호부대, 청룡부대가 비행기를 타고 가는데 트랩을 타고 올라가는 거예요.

그 트랩 역할을 하는 게 뭐냐 하면 세리와 창기와 강도예요. 본인들은 죽을 지경이에요. 팔자 참 사납고 더럽게 된 거죠. 그러나 주님께서는 세리와 창기가 먼저 천국 간다고 하시고 어린아이 같지 않으면 천국에 못 간다고 하시니까 그 잘난 사람들 앞에서 유일하게 사람들이 거부하고 찾지 않지만, 비행기에 올라타는 트랩 같은 통로 안으로 들어가면 십자가가 보입니다.

욥도 같은 처지에 있어요. 난데없는 고통을 당할 때 이러 따져보고 저리 따져봐도 도대체 왜 나에게 고통이 왔는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신약에 오게 되면 모든 성도가 이 욥처럼 하늘과 땅을 연결시키는 트랩으로써 기능하게 되어있지요. 그 트랩의 기능은 바로 자기 자신에 대해서 어떤 기대 같은 것을 하지 못하도록 자기 자신에 대해서 실망을 하도록 그렇게 이끄시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 이끄시는 실망 속에서 그 실망은 어떻게 형성되는가. 개코도 모르는 인간들이 하나님에 대해서 자꾸 언급하고 지적 질을 하는 거예요. 욥은 지금 당황스럽습니다. 본인이 하나님을 아는데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이 자꾸 지적 질을 하면서 네가 지금 잘못된 길을 가고 있다는 거예요. “네가 잘 된 길을 간다면 증거를 대봐라. 남들을 납득 시켜봐라.”라고 하는데 무슨 납득이 돼요.

본인도 납득이 안 되는데. 내가 천국 가는 것이 본인도 납득이 안 돼요. 이게 믿음이에요. 정말 남에게 설명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어요. 이스라엘이 답답한 것은 뭔가 설명을 해야 하는데 설명을 못 한다는 말이죠. 하나님께서 자기를 인도하는 것에 대해서 인간의 논리적으로 설명이 되지를 않으니까 말할 것은 없고 말은 해야 하고 그래서 제가 이스라엘 자체가 장애자라고 했거든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앞뒤가 안 맞는 장애자로 만들어 버렸어요. 논리도 안 맞는 장애자로 만들어 버렸어요. 배울 만큼 배워놓고 네가 어떻게 그렇게 바보가 되었느냐고 욕을 얻어먹을지언정 세상 사람들이 설득될 수 있는 것을 말할 수가 없어요. 그러면 안 하면 되는데 주께서는 안 하도록 놔두질 않아요. 트랩이니까. 길이니까. 찾는 자가 없는 좁은 길이지만 어쨌든 사용은 되거든요.

그러한 답답증, 그 답답증을 주께서는 이미 예고를 했습니다. 요한복음 6장 65절에 보면 제가 정말 좋아하는 말씀인데 너무 좋아해요.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 저는 이 말씀 보게 되면 혼절에 기절할 정도예요. 교회 설교 준비하고 어떻게 전도하고 복음 전해도 이게 소용없는 짓이 된다는 것이 이상하게 기뻐요. 이상하게 기뻐요. 수련회 열 명이 오든 세 명이 오든 백 명이 오든 그게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아버지께서 보내지 아니하면 아무도 올 수 없는데요. 왔다는 것이 수상해요. ‘이거 뭐, 이럴 순 없습니다. 올 리가 없는데. 아버지께서 진정 보내신 분 맞습니까’라고 생각하면서 다가서면 뒤로 물러가고 한 발짝 다가서면 또 한 발짝 물러가네. 그래서 물러가면 또 다가오네요. 같이 탱고 추는 것도 아니고 춤추는 것도 아니고. 아버지가 보냈다는 말은 예수님과 그 사람 사이에 어느 누구도 목사라도 개입할 수 없다는 겁니다. 그 인생에. 그 인생에 개입할 수 없는 거예요.

그런데 사람은 자기도 하나님 안다고 남의 구원에 개입을 시도하는데 그중의 한 사람이 소발입니다. 개입한 거예요. 따라서 욥의 입장에서는 ‘잘 걸렸다 인간아. 네가 아는 하나님이 얼마나 엉터리인지 내가 낱낱이 따져줄게’라는 식으로 완전히 먹잇감이 된 겁니다. 그럼 다시 오늘 본문을 통해서 소발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중요한 것은 이 이야기가 누가 이야기했다는 것을 종이로 가려 버리고 어떤 사람이 이런 이야기했을 때 이 주장의 문제점은? 요거 숙제입니다.

어떤 사람인지 모르겠는데 이게 욥인지 사도바울인지 베드로인지 성도인지 불신자인지 불교 신자인지 잘 모르겠는데 딱 어떤 주장만 나와 있다고 합시다. “네가 하나님의 오묘를 어찌 능히 측량하며 전능자를 어찌 능히 온전히 알겠느냐”, 지금 아멘이 절로 안 나올 수 없죠, “하늘보다 높으시니 네가 어찌하겠으며 음부보다 깊으시니 네가 어찌 알겠느냐, 그 도량은 땅보다 크고 바다보다 넓으니라, 하나님이 두루 다니시며 사람을 잡아 가두시고 개정하시면”, 개정이라 하는 것은 재판하는 겁니다, “누가 능히 막을 소냐, 하나님은 허망한 사람을 아시나니 악한 일은 상관치 않으시는 듯하나 다 보시느니라”라고 되어있어요.

여기서 일단 시공간적으로 하나님은 이 세상을 벗어나고 초월한다고 이야기하고 두 번째 인간에 관해서는 하나님이 개입한다고 했습니다. 신학적으로 따지면 초월하신 분이 내재한다는 겁니다. 그렇게 되는 거예요. 신학이라고 했지만 사실은 철학인데 초월하신 분이 내재한다는 것에 뭐가 빠졌느냐 하면 어떻게 초월하시고 어떻게 내재하시는가.

내재란 여기에 들어오신 것을 내재라고 하고 초월은 빠져나가는 것을 초월이라고 합니다. 손에 잡을 수 없는 것을 초월이라고 해요. 철학적 신학적 용어를 제가 그렇게 쉽게 풀이해 드리겠습니다. 그러면 저나 여러분에게 물어보겠습니다. 어디에 오십니까? 어디에 내재하시고 어디에 초월하십니까. 그 포인트 되는 지점, 그 지점을 이 소발은 몰라요.

따라서 주님께서 어디에 오실 건지 어디를 통해서 빠져나올 것인지 그걸 모르면 이건 하나님 모르는 겁니다. 이건 미륵보살이에요. 미륵보살은 인간의 이성과 인간의 상상력에서 충분하게 미륵보살 불교를 만들 수 있습니다. 불교에서 공부 꽤나 했다는 사람도 그걸 인정해요. 절에 안 나와도 부처라고 한 이유가 거기 있어요. 모든 인간에게 내재 되어있다는 거예요. 뭐냐. 그 미륵보살처럼 우주를 크게 생각하는 그러한 정도의 양식 상식은 모든 인간이 타고났다는 겁니다.

그래서 불교는 뭐냐. 새삼스럽게 신을 믿으라고 한 것이 아니고 당신 속에 있는 신을 장악하라는 것이 불교의 가르침이에요. 네 속에 있는 그것을 ‘참나(참된 나)’라고 합니다. 참된 나를 깨우치게 되면 세상은 아무것도 아닌 것을 알게 될 것이라는 겁니다. 또 이 소리 듣고 아멘하고 그러지 마세요. 불교입니다. 모든 인간의 상식이에요.

평생 70세까지 돈 벌다가 집에서 혼자 소주 먹고 누워서 눈감고 상상하게 되면 나오는 신이 이 신입니다. ‘그래, 신을 내가 부인하지는 않아’라고 하면서. 죽을 때가 가까이 오니까 슬슬 겁나는 모양이죠. ‘하지만 신은 내 마음에 있지’라는 소리나 하고 있고. 그게 불교라니까요.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중을 만나면 중을 죽이고 네가 부처라는 겁니다. 네가.

네가 부처인데 무슨 부처를 믿어. 믿지 마. 네가 부처인 것을 자각하라. 그게 곧 성불이다. 제가 지금 누구 전도하는 건지 모르겠는데 불교를 욕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가 똑같다는 겁니다. 교리가. 기독교와 교리가 똑같은데 뭐로 바뀌었느냐 하면 미륵이 성령으로 바뀐 겁니다. 미륵이 성령으로. 우리 안에 하나님 들어있다는 겁니다.

성령은 내 안에 하나님 있고, 있다는 것을 깨우치는 것이 성령의 역할이라는 거죠. 그래서 성령은 별다른 것이 아니고 그냥 자각하면 곧 성령 받은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겁니다. 이게 신의 내재예요. 내재설. 신은 우리 안에 있다.

여러분, 신은 우리 안에 없습니다. 신은 내재한 적도 없고 초월한 적도 없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하나님은 예수님으로 오셨기 때문에 예수님에 대해서 납득하거나 이해할 인간은 아무도 없음을 알려주시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모든 것은 어두움이기 때문에. 어둡다고 해서 신을 안 믿는 것이 어두운 것이 아니고 신에 대해서 너무나 연구하고 탐색하고 잘 아는 그것이 곧 어두움이었던 거예요. 그 어두움을 골라서 주께서 이 땅에 오신 겁니다.

하나님은 어디에도 있다는 것이 인간의 주장입니다. 예수님은 “너희들이 하나님은 어디에도 있다고 주장하니까 네가 하나님을 몰라”라고 외치시는 거예요. 왜냐 하면 하나님이라는 것이 보이지 않으니까 그냥 보이지 않으니까 생각하기 쉬워요. 하나님이 고체로 된 것이 아니고 어떤 특수인물에 모든 하나님의 뜻이 그 안에 집약된 것이 아니란 말이죠.

그러니까 하나님을 널브러지게 만든 거예요. 그러니 이야기하기 좋지요. 모든 것이 신의 뜻입니다. 신의 뜻입니다. 이슬람처럼. 모든 것이 신의 주권이라는 거죠. 내가 장사 못되어도 신의 뜻이고 잘되어도 신의 뜻입니다. 모든 것이 신의 뜻입니다. 이슬람교 자기들끼리 인사해도 그런 식으로 인사해요. 그런데 요한복음 6장 65절에 뭐라고 했습니까?

“아버지께서 내게 보내지 아니하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다”라고 하죠.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너희 속에도 없고 너희가 생각하는 하늘에도 없고 하나님은 독점적으로 예수님에게만 있는 거예요. 예수님에게만. 이게 인간이 인간 속에 펑퍼짐한 하나님, 위대하시고 절대적인 하나님이라는 생각이 아예 없으면 혹시 인간들은 예수님을 믿을 수가 있을 거예요.

그러나 이미 인간들의 신앙은 확고합니다. 신이라 하는 것은 기껏 인간들 모이는 것처럼 이렇게 아주 연약하고 나약한 인간 같은 하나님은 절대 하나님이 아닐 것이라고 이미 벌써 신앙이 꽉 잡혀있어요. 하나님은 모든 것을 만드셨고 위대해도 얼마나 위대할 것인가. 또 읽어보면 지루하겠지만 “하나님의 오묘함을 어찌 능히 측량하며 전능자를 어찌 능히 완전히 알겠느냐”라는 이 말은 알려고 애쓰고 측량하려고 애썼다는 거예요.

측량했는데 하다 보니까 능력이 달리잖아요. 달리지만 “하나님을 이렇게 인정하면서 알려고 애쓴 노력만큼은 하나님이 가상히 봐주세요. 최선의 노력을 다했습니다”라고 자기변명을 하는 겁니다. 누가복음 19장 40절에, 누가복음, 마가복음, 요한복음, 마태복음은 예수님이 이 땅에 있을 때 행적에 의해서 일어난 일이라고 보시면 돼요. 누가복음 19장 40절에 보면 예수님의 행적 가운데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 하시니라”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지를 것이라는 겁니다. 그 당시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의 제자를 책망하라고 하면서 자기의 갖고 있던 철저하고 완벽한 신학을 표현했습니다. 그럴 때 주님께서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지를 것이라고 하신 겁니다. 소리지른다는 말은 ‘왁’하고 고함지르는 거죠. 참을 수 없어서 고함치는 거죠.

그러니까 한국부터 해서 이 세상, 중국, 홍콩, 이 세상 모든 세계가 하나님을 허황한 하나님, 상상적 하나님으로 저 하늘로 다 돌려보냈어요. 하나님이 없기 때문에 혹시 있다면 정성이나 받아 달라는 마음으로 원 없이 높여 놓은 거예요. 너무 높여서 하늘로 보내버렸어요. 땅의 문제는 인간이 처리하고 모든 일에 대해서 인간이 관여하지 하나님은 개입할 것 없습니다. 하나님은 저 위에 계셔서 우리의 정성이나 받으라고 돌려보낸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은 뭐냐 하면 바로 이 돌들이 소리지를 것이라고 하신 겁니다. “네가 하는 그 짓거리가 너희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했지만, 이 돌들이 참을 수 없어서 비명 지를 것이다. 고발할 것이다. 고소할 것이다”라는 말이죠. 그래서 오늘 본문을 통해서 다시 한번 정리해 드리면 하나님이 내재하고 초월하는데 그 지점이 어디냐는 겁니다.

그 지점을 찾을 때 역시 해답은 구약 이스라엘의 언약에서 역사에서 찾아야 하겠지요. 이스라엘 나라에 있어서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고 어디로 빠져나가냐 하면 성전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아무 데나 있는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의 이름이 계실 곳을 친히 계획해서 애굽에 있던 이스라엘 자기 백성을 끌고 오는 데 광야를 통과해서 오는 데 진짜 모세보고 물을 수도 있겠지요.

“모세님, 우리 어디로 갑니까?”라고 물으면 모세의 답변은 모르겠다고 하지 않고 자기 받은 대로 이야기했겠죠. 신명기에 그게 나와요. “주의 이름이 계시는 곳이 거기가 도착지점이다”라고. 주의 이름이 계시는 곳이 도착지점이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주의 이름이 어디에 가 있느냐 하면 하늘에 가 있거든요.

우리가 성경 보고 하나님 믿으면서 우리가 소발 같은 그런 본성 있기 때문에 가장 궁금한 것이 과연 이 땅에 사는 우리가 하늘나라에 어떻게 갈 수 있느냐는 겁니다. 그러니까 아까 제가 어릴 때 이야기한 것처럼 비행기가 있는데 타고 가는 것은 알겠는데 땅에서 비행기까지 타는데 그걸 어떻게 타는지 그걸 모르겠다는 거죠. 천국 가면 좋은 걸 누가 모르겠어요.

그런데 천국에 올라타는데 거기까지 타는 방법에 대해서는 그냥 모르겠는 거예요. 알 수가 없는 거예요. 조근조근 설명을 해줘야 하는데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이 궁금증은 예수님의 열두 제자도 마찬가지예요. 베드로 하는 말이 “주여, 어디로 가십니까? 따라가겠습니다”라고 베드로는 따라갈 줄 알았죠. “오지 마라. 네가 갈 수 없는 곳에 간다”

베드로의 궁금한 것은 이거예요. ‘갈 수 없는 곳인데 갈 수 없는 곳에 가버리면 우리는 어떻게 뒤따라 갑니까’라는 생각에 예수님께서 더 어려운 말을 더 난처한 말을 했어요. “너희들이 기다리면 내가 다시 올게”라고. 그러니까 제자들이 수심이 가득했죠. “내가 고아처럼 너희들을 버려두지 않고 다시 올게”라고 예수님이 이야기했어요. 제자들은 그게 위로가 되지를 않았습니다.

새끼손가락 걸고 도장 찍고 백날 해도 안 오면 어떻게 할 겁니까? 안 오면. 안 오게 되면 두 가지 현상이 있어요. 안 왔는데 왔다고 우기는 경우가 생길 거고, 또 하나는 왔는데 계속 기다리는 경우가 생길 거예요. 왔는데. 그 두 가지 경우와 직접 온 것 과를 구분할 수 있는 식별 할 수 있는 방법은 또 무엇인가. 그러니까 또 무엇인가. 계속해서 과제가 발생 되는 거예요.

어제 토요일 오후에 집에 있었는데 오후 5시 20분경에 갑자기 전기가 확 나간 거예요. 전기가 확 나갔어요. 이런 경우가 별로 없는데. 일단 초를 찾기보다는 이럴 때는 신고를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서 한전 전화번호를 모르니까 114에 전화해서 번호 물어보고 신고를 했어요. 재미난 일은 그때부터 시작이 됐습니다. 우리 동네 빌라만 정전이 되었기 때문에 그다음부터는 사람들이 모여서 수군거리다가 범인 색출에 나선 겁니다. 범인.

그중에서 가장 용의자로 등장한 것이 뭐냐 하면 몸이 불편해서 휠체어 타고 다니는 어떤 할머니가 있는데 작대기를 기다란 걸 들고 있었던 겁니다. 이 할머니가 작대기 흔들면서 전선을 쳐서 그래서 전기가 나간 거라고 다들 합리적 의심을 한 겁니다. 가장 합리적 의심에 가깝다고 해서 웅성웅성 모여 있었던 겁니다. 신고할 생각은 안 하고.

나중에 한 시간 좀 더 되어서 전기가 들어왔어요. 그 고친 사람이 신고한 사람에게 이유를 설명해주죠. 까치가 건드려서 전기가 나갔다는 거예요. 그러면 그 할머니는 뭐예요. 그게 바로 희생물입니다. 인간이 안다는 거예요. 정전된 이유는 평소 할머니가 작대기 들고 갈 때 알아봤다는 겁니다. 불안불안 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정전이 된 겁니다. 옳다구나 정전되었구나 하면서 할머니 탓을 한 겁니다.

인간은 하나님에 대해서 나름대로 안다는 겁니다. 미륵보살이니까. 미륵이니까. 우리의 죄를 안다는 것이 뭡니까. 선악과 선악으로 따지는 하나님 충분히 알죠. 착한 사람 천당 보내고 나쁜 사람 지옥 보내는 하나님. 교회도 마찬가지예요. 다 그들도 알고 있어요. 선악적으로 알고 있는 주님께서 할 수 있는 것은 알아서 휠체어 타는 할머니 역할 하는 것밖에 없어요.

저 인간 때문에 우리 이스라엘 독립 안 된다고 돌에 맞아 죽는 그저 맞아 죽는 역할을 예수님이 할 때 그 예수님 앞에 모든 하나님의 뜻은 창세 전부터 그 안에 다 모아 있습니다. 그것부터 새로 시작해야 해요. 그것부터 새로 시작해요. 다른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쉽게 예를 들어서 보통 사람들이 휴대폰 들고 있잖아요. 휴대폰 들고 휴대폰 다룰 생각하지 말고 내가 휴대폰 안에 들어가는 거예요. 그게 천국 들어가는 것만큼이나 난해하고 불가능해요.

내가 휴대폰 속에 들어가는 거예요. 물론 우리는 방법이 없다고 하는데 다른 사람들은 방법이 있어요. 화상통화 하면 됩니다. 화상통화 보면 사람 얼굴 나오는데 휴대폰 들고 화면 안 보고 다른 쪽 보고 이야기하는 사람 없잖아요. 화면 보면 되잖아요. 휴대폰 속에 내가 보고 싶어 하면 들어있는 거예요. 바로 이런 방법을 하나님이 사용한 겁니다.

하나님은 십자가 안에 우리의 모든 것이 다 우상임을 알려주는 십자가가 있는데 십자가 바라보게 되면 나는 무슨 생각을 해도 이것은 터무니없이 엉터리라는 것을 알려 주잖아요. 얼마나 고맙습니까. 다른 방법 없어요. 욥이 무슨 수로 하나님을 알겠어요. 하나님이 나타났으니까 알잖아요.

말씀이 육신이 되어서 나타났잖아요. 그 앞에 뭐라고 되어있느냐 하면 “어느 누구도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단정 짓고 나오잖아요. “어느 누구도 하나님에 대해서 입 다물라. 미륵보살 같은 소리 하네. 입 다물라. 거짓말이다. 소발도 마찬가지고. 아무도 하나님을 모른다”라고 하시는 거죠. 모르면서 안다고 자꾸 우기니까 주께서는 말씀이 육신이 되신 겁니다.

그 육신은 죽기 위해 오신 분이에요. 죽음. 죽는데 휠체어 탄 그 할머니처럼 죽는 거예요. 모르면서 아는 척 해가지고 온 책임과 죄값을 혼자 지고 돌아가신 거예요. 그것보다 더 완벽한 하나님은 없습니다. 그분이 바로 하나님이에요. 그분이 바로 주의 이름이고. 성령 받은 사람은 예수님을 보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우리의 주여, 여호와여”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러면 이것을 평소 우리의 삶 속에서 어떻게 되는가. 삶 속에서는 이렇게 되는 겁니다. 바로 유대인의 법에 인프라된 환경 속에서 예수님이 오셨기 때문에, 법에 인프라되었단 말은 유대인들이 우리를 대표해서 묘사했거든요. 그러면 우리는 평소에 이불을 덮는데 복음으로 덮는 게 아니고 율법으로 덮어요. 그러면 안쪽에는 율법이고 바깥은 복음이란 말이죠.

바깥으로는 복음을 안다고 하지만 안쪽에서는 법으로 살아요. 자기 선악적인 법으로 산다고요.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 이불을 뒤집어야죠. 복음과 밀착해야죠. 죽어 마땅한 거. 진짜 거리에 돌이 소리 지를 수밖에 없는, 자기는 안다고 우기는 마음을 십자가 피로 적셔져야죠. 맨날 이불 덮을 때마다. 복음에서 스며 나오는 그 피로 우리 가슴을 적셔야죠.

오늘도 아무것도 아닌 나를 또 살려주셨구나. 그런 식으로 해야 해요. 그러면 뭐냐. 안쪽이 복음이라면 바깥쪽은 뭐냐. 율법이죠. 그 율법은 세상에 대한 정죄를 말합니다. 어느 누구도 하나님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전부 다 자기 법대로 자기들은 바르게 살았다고 우기는 인간들만 보이는 거죠. 내 쪽에서는 주님을 알고 바깥에 나오면 자기 착한 맛에 사는 자기 잘난 맛에 살아가고 이렇게 착하니까 설마 하나님께서 지옥 보내지 않겠지. 그것이 바로 거짓된 이 지옥 같은 세상에 사는 성도의 존재의 양식이고 존재의 모습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알던 하나님이 엉터리였다는 것을 저희들이 자백하게 해주시고 하나님 안다고 하지 말고 십자가를 통해서 모세가 들었던 그 놋 뱀을 통해서 우리가 뱀 같은 존재이고 우리가 주님을 죽인 존재이며 그것이 바로 천국 가는 트랩인 것을 그리고 우리가 세리와 창기 강도의 기능인 것을 이제는 기쁘게 흔쾌히 받아들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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