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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한계(욥9;1-10) 200426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20. 4. 27. 09:37


 

 
2020-04-26 14:59:11조회 : 20         
   인간의 한계 200426 이름 : 이근호 (IP:119.18.87.190)   

인간의 한계(욥기 9:1-10)

음성      동영상 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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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호 20-04-26 15:50 

인간의 한계

2020년 4월 26일          본문 말씀: 욥기 9:1-10

(9:1) 욥이 대답하여 가로되

(9:2) 내가 진실로 그 일이 그런 줄을 알거니와 인생이 어찌 하나님 앞에 의로우랴

(9:3) 사람이 하나님과 쟁변하려 할지라도 천 마디에 한 마디도 대답하지 못하리라

(9:4) 하나님은 마음이 지혜로우시고 힘이 강하시니 스스로 강퍅히 하여 그를 거역하고 형통한 자가 누구이랴

(9:5) 그가 진노하심으로 산을 무너뜨리시며 옮기실지라도 산이 깨닫지 못하며

(9:6) 그가 땅을 움직여 그 자리에서 미신즉 그 기둥이 흔들리며

(9:7) 그가 해를 명하여 뜨지 못하게 하시며 별들을 봉하시며

(9:8) 그가 홀로 하늘을 펴시며 바다 물결을 밟으시며

(9:9) 북두성과 삼성과 묘성과 남방의 밀실을 만드셨으며

(9:10) 측량할 수 없는 큰 일을, 셀 수 없는 기이한 일을 행하시느니라

욥이 친구보고 하는 오늘 본문의 내용은 나중에 하나님께서 욥에게 나타나실 때 하시는 말씀과 너무나도 유사합니다. 특히 하늘의 별이 언급되는 대목은(욥 9:9) 욥기 38:31-32에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과 같습니다. ‘인생이 어찌 하나님 앞에 의로우랴’라는 것은 네 번째 친구인 엘리후가 욥을 지적하면서 그대로 욥에게 적용하고 있습니다. (욥 33:12)

따라서 틀리지 않는 ‘올바른 말’을 가지고 하나님을 표현하고 고백하고 묘사한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자동적으로 인정해주시는 것은 아닙니다. 옳은 소리만 나열한다고 해서, 그리고 사람들로부터 칭찬받는다고 해서 하나님께서도 그 사람을 의롭다고 인정해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똑같은 단어와 톤으로 자신의 마음을 묘사해도 그것은 정답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신에 대해서 정확히 아는 바가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자아라는 것은 그동안 걸쳐온 관계성을 통해서 정리됩니다. 즉 ‘내가 누구누구와 관계 맺고 사느냐?’를 통해 자신을 정립하게 마련입니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자기만의 전문분야가 있습니다. 그 분야에서만 본인은 총명하고 활기 넘치고 일처리가 원활하고 자연스럽습니다.

하지만 조금만 자기 전문 분야가 아니면 그 사람은 어쩔 줄을 모릅니다. 이처럼 자아라는 본인이 걸치고 있는 관계 안에서 옳음과 그름, 진리와 거짓을 일방적으로 정리하고 있습니다. 지금 욥이 친구들에게 하나님에 관해서 자신만만한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것이 자신의 전문분야처럼 간직하고 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경향이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입니다. 흔히 정통개혁주의 사상은 ‘하나님 절대주권사상’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 ‘신 절대사상’은 이슬람이라는 종교에서 극단화되어 있습니다. 신 앞에서 인간은 한없이 보잘것없이 낮아져야 하는 존재라는 겁니다. 신의 절대성 아래서 인간은 그저 복종 이외에 할 게 없다는 겁니다.

즉 인간들이 스스로를 낮추므로서 상대적으로 신을 높일대로 높여보는 것으로 신을 즐겁게 해주겠다는 겁니다. 이런 사상이 욥기에게도 나옵니다. 그런데 이런 사상들의 문제점은, 낮출 수 있는 그 대상을 본인이 조절이 가능하다고 보는 겁니다. 즉 인간은 스스로를 이미 죽은 자로 간주하지 않고 있는 겁니다.

조금이라도 살아 있다고 여깁니다. 따라서 조금이나마 살아있다면 이 살아있는 존재로서 신을 높일대로 높이면 그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일 것이라고 여깁니다. 그러나 인간이 이미 죽은 존재라면 신을 높이려고 시도하는 주체마저 존재하지가 않는 겁니다. 지금 욥은 친구들과 자신과 경쟁하고 다투고 있습니다.

욥의 관계는 욥의 친구와 맺고 있습니다. 따라서 친구들보다 더 나은 신앙고백을 하는 것이 곧 하나님이 원하는 바일 수 있다는 생각으로 욥은 자신이 알고 있는 신에 관한 것들을 쏟아놓습니다. 제 3자인 우리가 봐서라도 어디 흠 잡을 데서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나중에 하나님께서 욥에게 직접 찾아오니 욥은 할 말을 잃고 고개도 쳐들지 못합니다.

우리 인간이 찾아내지 못하는 그 허점을 하나님께서는 찾아내시는 겁니다. 그 허점은 바로 ‘관계’입니다. 기존의 관계를 유지하면서, 그 관계를 통해 자아가 이 정도라고 따로 챙기면서 아무리 하나님을 극상으로 높인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반기지 않습니다. 훌륭하다고 칭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관계를 끊을 놓을 필요가 있습니다. 인류는 꾸준히 자기의 위상을 넓히기를 원했습니다. 고대로부터 모든 민족과 종족들과 씨족들은 끊임없이 다른 관계를 맺고 넓혀왔습니다.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모든 종족들에게서 발견되는 예외되는 원칙은 ‘근친상간금지’이라는 규례입니다.

즉 ‘가까운 일가친척끼리는 혼인하지 않는다’는 원칙입니다. 그 이유는, 자기 집안의 여인은 다른 집안 대 집안의 만남에서 호의적인 관계를 엮기 위한 선물용이요 상품(商品)용이 되기 때문입니다. 주위에서 탐낼 만한 상품이 되기 위해 자기 집안의 남자들은 그 여자를 건드리지 말아야 하는 겁니다.

자기 집안의 여자를 두고, 다른 집안의 여자를 데려오는 겁니다. 교차혼인 방식으로 다른 집안 끼리의 유대를 강화하는 겁니다. 이 유대가 강화되면 부질없는 전쟁보다 모두가 원하는 평화를 지속할 수 있다고 보는 겁니다. 하지만 이러한 이방민족들 사이의 입지 넓히기는 이스라엘에게는 통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은 이 세상에 없는 민족입니다. 오로지 숨어계신 하나님의 사랑으로만 지상에 나타난 특이한 민족입니다. 사랑이 지극히 봉쇄적입니다. “내 여자 건드리면 누구든 죽여버린다!”라는 정신으로 임하면 할수록 사랑의 강도는 셉니다. 출애굽기 20:2-3에 보면,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의 하나님 여호와로라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방민족과의 교류를 애초에 하나님께서 차단시키신 겁니다. 즉 이스라엘은 오직 하나님만이 관계를 맺으면서 그분을 증거하라고 역사적으로 실제로 나타난 국가가 이스라엘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타민족과 경쟁하거나 비교할 필요조차 없습니다. 그들 민족보다 더 낫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더욱 이스라엘을 사랑해주는 것이 아닙니다.

가장 이스라엘이 이스라엘다운 것은, 이스라엘이 스스로 ‘내기 존재가 있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하는 겁니다. 마치 마태복음 5:23-24에 나오는 계명과 같습니다.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와 같습니다.

‘원수를 사랑한다’는 것은 ‘적을 사랑한다’는 말입니다. 우리 인간들이 아무리 원수가 원수로서 유지시키려 해도 어느 새 주위 사람들의 여론이나 우리 자신의 마음으로 인해 ‘원수’가 소멸되는 경우들이 생깁니다. 지속적으로 원수가 원수로 남는 것은 우리 예수님 뿐입니다. 십자가 관계 안에서 인간은 이미 의인은 없이 죄인 뿐입니다.(롬 3:10)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모든 인간으로부터 원수가 되신 겁니다. 따라서 기존의 인간 관계입장에서는 주님을 사랑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죽입니다. 그리고 그 안에 함께 계시므로서 그 사람은 ‘예수님 자신의 것’으로 삼으십니다. 그리고 난 뒤 그 ‘예수님의 것’을 ‘예수님의 것’으로 바꾸십니다.

즉 십자가 죽으심에 함께 하셔서 부활에서 함께 하십니다. 이것이 ‘주 안’이라는 새로운 관계입니다. 이 관계로 인하여, 이 주 안에서 자신의 죄인됨을 인정하는 힘으로 ‘그 어떤 원수마저도 사랑’하게 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의 십자가 안에서 세상을 다시 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28강-욥기 9장 1~10절(인간의 한계)20200426 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욥기 9장 1~10절입니다. 구약성경 769페이지입니다.

“욥이 대답하여 가로되, 내가 진실로 그 일이 그런 줄을 알거니와 인생이 어찌 하나님 앞에 의로우랴, 사람이 하나님과 쟁변하려 할지라도 천 마디에 한 마디도 대답하지 못하리라, 하나님은 마음이 지혜로우시고 힘이 강하시니 스스로 강퍅히 하여 그를 거역하고 형통한 자가 누구이랴, 그가 진노하심으로 산을 무너뜨리시며 옮기실지라도 산이 깨닫지 못하며, 그가 땅을 움직여 그 자리에서 미신즉 그 기둥이 흔들리며, 그가 해를 명하여 뜨지 못하게 하시며 별들을 봉하시며, 그가 홀로 하늘을 펴시며 바다 물결을 밟으시며, 북두성과 삼성과 묘성과 남방의 밀실을 만드셨으며, 측량할 수 없는 큰일을, 셀 수 없는 기이한 일을 행하시느니라”

욥이 하는 말을 들어보게 되면 하나같이 옳은 말만 하고 있습니다. 책잡을 일이 하나도 없어요. 우리가 하나님이라도 욥이 내뱉는 고백들은 정말 귀하고 참으로 신앙적이고 경건한 그러한 이야기만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욥이 욕을 얻어먹죠? 욥기를 보는 사람들이 완전히 멘붕(멘탈 붕괴)에 빠지는 이유가 여기 있어요.

하나님 입장이라고 생각한다면 욥 친구의 말도 최고 믿음의 고백을 하고 있고 거기에 대해서 우리가 욥이라면 동의할 것은 동의해야 하고 옳다 하는 것은 옳다고 해야 하는데 극구 욥은 친구들이 신앙적인 이야기 하게 되면 할퀴듯이 죽으라고 그건 또 아니래요. 제3 자가 들어보면 너무나 신앙적인 고백을 하고 있는데 말입니다.

그렇게 아니라고 하면서 욥의 내놓는 말을 들어보게 되면 욥의 친구 하는 말이나 욥이 하는 그 말이나 차이점을 발견할 수가 없습니다. 둘 다 하나님 없이는 못살 정도로 둘 다 하나님 앞에 납작 엎어졌어요. 그러면 그 가운데 있는 하나님 같으면 “둘 다 착하다”라고 말씀하시면 되는데 둘 다 안 착해요. 둘 다 안 착하거든요. 둘 다 인정을 못 받는다는 이 말이죠.

그러면 버릴 것 같으면 둘 다 버리든지. 욥의 친구와 욥을 둘 다 버려야지 마지막에 하나님이 욥에게 나타나서 하신다는 말이 욥의 친구들은 욥처럼 옳지 못하다고 하시거든요. 그러면 욥의 친구가 욥처럼 옳지 못하다면 하나님께서는 욥의 편을 들어줘야죠. 욥을 거들어야 한다는 말이죠.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욥을 거드는 것이 아니라 욥을 나무라기는 얼마나 나무란다고요.

아주 실랄하게 “욥같이 악한 자가 있느냐”라는 식으로 하나님께서 욥보고는 그렇게 질타를 하신다는 말이죠. 그런데 욥이 질타를 받아야 한다는 것을 우리는 하나님 편에 섰다고 치고 욥이 질타받아야 하는 이유를 우리가 욥이 하나님을 만나기 전에 욥기 9장을 통해서 신앙을 들어보게 되면 우리가 시험문제 출제자라면 우리가 뭐 아니라고 할 게 없어요. 전부다 백점이에요. “참 잘했어요” 도장 찍고 싶어요.

한마디 한마디가 오직 칼빈 말처럼 ‘하나님 제일주의, 하나님 우선주의, 하나님 주권 주의’ 같아요. 그런데 하나님 주권 주의라는 것이 기독교 개혁주의만 있는 줄 아시는데 이슬람교를 공부해보면 거기는 어떤 형상도 만들지 않습니다. 마호메트 그림 같은 거 없어요. 전부 다 형상을 없앤다고 오직 문자와 말씀으로만 모스크(회당)를 만들어요. 철저하게 형상을 배격하는 겁니다.

그 형상을 배격하는 근거는 출애굽기에 나오죠. 다른 형상을 만들지 말라는 신의 음성, 신의 지시에 철저하게 따르는 겁니다. 그들은 철저하게 따라서 철저하게 지옥 가고 있는 거예요. 그들의 모토는 뭐냐 하면 신의 주권입니다. 하나님만의 주권. 그래서 그들은 예수그리스도를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아요. 선지자로는 인정하지만, 메시아로 인정하지는 않습니다.

왜? 하늘의 태양은 둘이 될 수 없고 오직 하나이기 때문에. 예수님도 그저 하나님의 종이듯이 마호메트도 하나님의 마지막 종이라고 그렇게 보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이 도대체 인간에서 나올 수 있는 아이디어가 어디까지 나오느냐를 그리고 그 모든 아이디어가 이유를 막론하고 작살난다는 거예요.

같은 인간들 보기에 믿음 좋은 고백이라 할지라도 막상 하나님 나타나게 되면 모조리 다 하나님께서 인정해주지 않습니다. 왜냐 하면 십자가 앞에서 모든 인간은 죽어 마땅하기때문에. 의인은 없고 죄인밖에 없기 때문에. 그렇게 하시는 이유가 뭐냐 하면 좀 어렵게 말씀드리면 하나님께서 우리와 예수님 자신을 바꾸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 자신의 것을 예수님 자신이 바꾸시는 거예요.

그 경로가 십자가 안에 들어있습니다. 사도바울은 이걸 알았기 때문에 구원받을 때 “내가 구원받았다”라고 하지 않고 “예수 안”이라는 어려운 말을 새삼 끄집어내었고 십자가 안에서 구원받는다고 이야기한 거예요. 따라서 내가 주님께 모든 것을 바치고 참된 고백을 하고 하나님에게 신실한 마음을 드린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그것을 수리하고 개선해서 받아주시는 것이 아니에요.

일단 인간의 모든 것은 죽음으로 처리해 버립니다. 그러면 인간은 뭐냐 하면 죽은 존재가 되죠. 그래서 우리가 욥기를 볼 때 어떤 식으로 보느냐 하면 욥의 문제점이 뭐냐 하면 욥이나 욥의 친구 둘 다가 본인이 ‘있다, 존재한다’라는 것을 포기 못 하고 지금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여러분도 한번 생각해 보세요. 십자가 앞에서 우리가 죽었다면 우리가 없다고 여기고 이 성경을 다시 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없다고 여기고.

그러면 뭐가 쉽게 다가오느냐 하면 ‘내가 없으니까 나 할 것도 없으니까 구원문제에 대해서는 내가 손댈 것이 없으니까 살아계신 주님이 살아계신 주님께서 알아서 일해서 없는 우리를 새로운 피조물 만들어서 구원하신다’라고 이렇게 생각할 의향은 없습니까? 그렇게 생각해 볼 의사가 없어요?

내가 여기 있는데 없다고 치자는 말이죠. 그러면 어떻게 없다고 칠 수 있느냐. 살아봐야 몇백 년을 못살 거든요. 내가 죽어 없다고 했을 때 내가 태어나지 않는 순간과 그리고 내가 늙어 죽어서 이 땅에 존재하지 않는 그 순간에도 주께서는 무슨 일을 하는가를 생각해 보자는 말이죠. 주께서 자기 백성이 없다고 해서 빼먹습니까?

주님이 내가 죽어서 명단이 빠졌다고 해서 주께서는 자기 백성을 안 건질까요? 건져내시는 거예요. 괜히 우리가 호들갑을 떠는 겁니다. 평생 동안 교회 다니면서. 쓸모없다고 알리기 위해서 교회 오게 했는데 교회 오면서 자기가 계속 쓸모 있으니까 교회 오게 하셨을 거란 생각을 계속하는 거예요. 그렇게 있다고 출발을 하게 되면 이슬람교가 되어버려요.

있는 내가 할 도리가 뭐냐. 오직 주님의 주권만 높이면 된다는 거예요. 청교도 개혁주의 신학이 그거잖아요. 피조물인 인간이 하나님을 높이면 된다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십자가가 아무짝에 쓸모가 없어요. 그래서 오늘 본문에 욥이 어떤 이야기를 할 때 인간들 보기에 하나님께 인정받는 고백이지만 전혀 하나님께서는 이 고백을 주께서는 인정을 안 합니다.

어느 정도로 인정하지 않는가를 봅시다. 1절부터 보면 “욥이 대답하여 가로되, 내가 진실로 그 일이 그런 줄을 알거니와 인생이 어찌 하나님 앞에 의로우랴, 사람이 하나님과 쟁변하려 할지라도 천 마디에 한 마디도 대답하지 못하리라”라는 이 이야기를 욥이 하나님 만난 후에 한 이야기가 아니고 만나기 전에 이야기했어요.

만나기 전에 하신 욥의 이 이야기를 누가 그대로 사용하셨느냐 하면 욥에게 나타난 하나님이 욥에게 이걸 그대로 사용하신다니까요. 신비롭지 않습니까? 참 신비롭죠. 하나님이 나를 내치려면 아예 내쳐야 하는데 내가 평소에 내가 한 일을 가지고 주께서는 “네가 그런다고 해서 구원받아? 이 못된 인간들. 의롭지 못한 악한 인간들. 저리 가! 그런 식으로 고백해서 네가 구원 못 받아!”라고 내쳤으면 내가 하는 말도 내쳐야 하는데 “그런 식으로 고백해서 네가 구원 못 받아!”라고 해놓고 ‘제가 무슨 소리 했더라. 옳지 하나님 앞에 의로운 사람 없다고 했지. 고거 괜찮네’라고 하시며 그걸 빼내서 누구를 치느냐 하면 그 이야기를 한 욥을 공격한다고요.

욥의 마지막 친구도 마찬가지고 하나님도 마찬가지고요. 네 번째 친구도 이 말로 욥을 공격했고 하나님도 공격했어요. “욥아 네가 잘난 것도 없으면서 왜 네가 내 앞에 의롭다고 했느냐”라고 하시거든요. 그러면 우리가 욥 같으면 뭐라고 구질구질 변명하겠습니까? “주님 잠깐만요, 그 이야기 제가 했잖아요. 제가 주님 앞에 했잖아요. 주님 왜 이러십니까. 지금 주님께서 제가 한 말을 가지고 저를 공격하시면 그때 주님께서는 제가 그런 말 한 것을 좋게 생각하셨다는 뜻 아닙니까? 그러니까 그걸 채택했죠. 그런데 제 한 말을 가지고 저를 공격하시면 저는 섭섭합니다”라고 이렇게 나왔겠습니까? 아니면 욥은 고꾸라졌겠습니까?

욥이 아무 소리 못 하고 재를 뒤집어쓰면서 “잘못되었습니다”라고 한 거예요. 그러니까 욥기에서 여러 가지로 어렵지만 그중에 하나가 욥이 하나님 만나고 잘못되었다고 할 때 왜 잘못했는지 우리가 납득하기가 굉장히 곤란해요. 그렇게 잘못되었으면 친구들이 지적할 때 좀 입 다물고 있지 9장 보면 얼마나 긴지 그리고 10장도 길고 계속 욥이 말이 많아요.

계속 욥이 말이 많다고요. 그런데 그 많은 말이 네 번째 친구 엘리후와 하나님 나타났을 때는 입이 쑥 들어갔어요. 주둥이가 들어간 거죠. 아무 소리 못 했어요. 마치 십자가 앞에서 우리는 아무 소리 못 하는 것처럼. 그러면 오늘 본문의 욥이 3절에 보면 “사람이 하나님과 쟁변하려 할지라도 천 마디에 한 마디도 대답하지 못하리라, 하나님은 마음이 지혜로우시고 힘이 강하시니”라고 했는데 왜 욥의 이 바른말도 주께서 인정하시지 않는가.

이것은 욥의 관계성이 아직도 살아있는 친구와 관계를 맺음으로써 자기가 충분히 살 가치가 있음을 유지하려고 했던 겁니다. 지금 친구와 대화하거든요. 친구와. 제가 잘 알고 있는 예를 한번 들겠습니다. 우리 어머니가 살아계실 때 편찮아서 하나부터 열까지 제 아내가 다 돌봐야 했었어요. 돌보면 우리가 우리 마음 같으면 “고맙다. 많이 힘들지. 내가 너 때문에 산다”라고 말을 해야 하는데 그렇게 돌보고 해도 꼭 끝에 뭐를 하느냐 하면 시어머니 값을 한다는 겁니다.

관계가 뭐냐 하면 아무리 며느리에게 혜택을 입어도 한번 시어머니는 영원한 시어머니여야 한다는 관계를 본인이 놓지를 못했던 거예요. 그래서 그런지 얼마 전에 제 아내 꿈에 어머니가 나왔어요. 그 꿈의 내용이 또 시어머니 값을 하는 거예요. 이제 병원에 계셔야 하는 입장인데 “야야, 집에 가자! 병원 귀찮다. 짜증 난다. 집에 가자”라고 하시는데 여기 계셔야 한다고 하니까 “집 놔두고 내가 어딜 가노”라고 하시는 거예요.

여러분도 많이 들었죠. 이 말은 앞으로 우리들도 누구나 할 수 있는 소리예요. 지금은 멀쩡해서 여기 앉아 계시는데 10년만 지나면 상황이 어떻게 바뀔지 몰라요. 누구나 자기 집 놔두고 남의 집에 왜 있느냐는 말을 하게 됩니다.

인간의 관계가 이렇게 이미 관행적으로 엮어진 관계를 떼지를 못합니다. 여러분은 잘 모르시겠지만 저는 수십 년 동안 알고 있는 어떤 여자분이 있어요. 이름이 조혜연 9단입니다. 얼마 전에도 대주배라는 바둑대회에서 남자 선수랑 해서 우승했거든요. 제가 바둑에 관심이 있으니 수십 년 동안 그 사람을 쭉 봤다고요. 그런데 그 사람이 1년 동안 스토킹을 당했다는 겁니다. 어떤 남자로부터.

보통 바둑두는 여자 기사는 인기가 있어서 시집을 빨리 가요. 어른답다고 해서 빨리 가는데 그 사람은 아직 안 갔어요. 스토킹을 당했는데 조혜연 9단은 바둑을 둘 때 남자든 여자든 경쟁을 하는데 평생을 바둑두는 것으로만 경쟁했지 인간대 인간으로 경쟁한 적이 없어요. 그 말이 뭐냐 하면 그 사람은 바둑밖에 몰라요. 오직 바둑밖에 모른다고요. 관계가 바둑 관계예요. 바둑 관계인데 어떤 남자가 술 먹고 들어와서 ‘너는 나와 결혼했다’라고 행패를 부리는 거예요. 망상증 환자죠. 이렇게 오니까 이 관계를 바둑만 경쟁적으로 한 사람이 이 관계를 처리할 수가 없어서 결국은 청와대 청원까지 넣었어요. 경찰에 신고해도 벌금 5만 원만 받고 풀어주니까.

이게 뭐냐 하면 그동안 ‘나’라는 것이 어떻게 구축되었느냐 하면 내가 잘 할 수 있는 것을 가지고 나를 구축한 겁니다. 내가 잘하는 거. 그걸 전문 분야라고 해요. 사람은 전문 분야에 빠져버리면 그 전문 분야 말고 다른 관계가 왔을 때는 어떻게 대처할지를 모르는 거예요.

욥의 전문 분야가 뭐냐 하면 다른 사람보다 더 낫기예요. 다른 사람보다 더 훌륭하기. 다른 사람보다 더 의롭기. 한 번도 하나님을 직접 본 적이 없어요. 이게 인간의 한계입니다. 인간의 한계이면서 다른 사람보다 더 낫기하면서 만들어 낸 것이 뭐냐 하면 하나님은 인간과 견줄 수 없을 정도로 진실로 하나님 앞에 의로운 사람 없다는 그런 규정을 본인이 이렇게 만든 거예요. 정해버린 겁니다.

이게 대인 관계이고 사회성이라고 하거든요. 인간의 문화와 역사를 연구하는 문화 인류학자들이 그동안 오랫동안 연구해도 밝혀지지 않는 한 가지 일이 있었어요. 수천 년 동안 그걸 밝힌 사람이 아무도 없었어요. 그게 뭐냐 하면 모든 민족에 공통점이 있는데 그건 근친상간 금지예요. 자기 집안에 여자 남자와는 혼인하지 않는다. 왜 그럴까.

누가 정답을 적어서 삐라로 뿌린 것도 아닌데 어떤 작은 미개사회라 할지라도 어느 사회에서 조사를 해봐도 반드시 거기에 법칙이 있는데 뭐냐 하면 같은 종족, 가까운 친척끼리는 혼인하지 않는다. 왜 그럴까. 아무도 밝힌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1900년 초반에 레비스트로스라는 사람이 그걸 처음으로 밝혀냈어요.

구조주의라고 하는데 레비스트로스가 연구하고 연구해서 전 세계에 모든 민족들을 다 조사해서 내린 결론은 이렇습니다. 그 집안의 여자를 다른 남자가 건들면 안 되는 이유는 여자는 상품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거예요. 상품 또는 선물. 그게 뭐냐 하면 인간은 사회성을 구성할 때 선물을 제시하든지 그들이 원하는 상품을 제시함으로써 비로소 민족과 민족, 종족과 종족끼리, 씨족과 씨족끼리 연결이 될 수 있다는 거예요. 연결되고 이어질 수 있는 거예요.

이 말은 선물 없이는 어떤 경우라도 호의적인 연결이 안 된다는 거죠. 그런데 인간은 폐쇄적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고 항상 선물을 주고받으면서 계속 자기의 입지를 키워나가는 본성은 모든 민족에게 다 있다는 것을 밝혔습니다. 바로 모든 민족에게 다 있는 그 원칙 사회성을 넓혀가는 그 원칙이 이스라엘에게는 허용되지 않았던 겁니다.

그게 바로 출애굽기 20장 2~3절에 보면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의 하나님 여호와로라,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라는 이 말은 이스라엘 자체적으로 봉쇄되고 폐쇄되는 겁니다. 왜냐 하면 이스라엘 나라는 애초에 이 지구상에 없던 민족이기 때문에 그래요. 어렵지요?

이스라엘은 없던 나라예요. 모든 있는 나라는 옆에 나라와 화친하고 평화롭게 살기 위해서 선물을 주고받는데 이 이스라엘만큼은 철저하게 다른 민족과 모든 관계를 차단시켜 버렸어요. 아주 특수한 겁니다. 특별한 거예요. 그러니까 이스라엘은 그 가나안 땅에서 쉽게 이방민족화 될 수밖에 없었던 거예요.

자기 본성은 그게 아닌데 하나님께서 강제로 다른 민족과 교류를 못 하게 혼인을 못 하게 만들어 버렸어요. 주고받는 선물도 안 되고요. 왜냐 하면 하나님의 율법에 허용될 수 없다는 거예요. 율법에 허용될 수 없다는 말은 이 지구상에 없는 민족을 내가 계획하고 만들고자 했는데 너희들은 그걸 위반하고 있다는 겁니다.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것은 네가 네 자신의 입지를 넓히기 위한 어떤 수작을 벌이지 말라는 겁니다. 거의 자폐증 수준이죠. 그래놓고 성경에서 하는 말이 그게 뭐냐 하면 사랑이라는 겁니다. 여러분 어렵더라도 감당하셔야 합니다.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강력한 봉쇄조치가 사랑이에요.

뭐냐 하면 ‘내 여자 건드리면 죽여버린다’라는 이게 사랑이에요. 이게 사랑이라고요. 자기 아내가 조수석에 타서 가고 있는데 나란히 가고 있던 옆에 차 사람과 막 시비가 붙었어요. 시비가 붙었는데 저쪽 운전사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 김정은이 죽었다고 하고 내 아내는 안 죽었다고 그런 시비가 붙었다고 칩시다. 예를 들어서.

아내가 평소대로 막 고함지르고 저쪽 운전사는 막 기죽어 있고 할 때 운전하는 남편이 “여보 좀 고만해라. 대충해라. 이제 문 올릴게. 그 뭐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랑 싸워야 되겠나”라고 했을 때 그 아내가 하는 말이 뭐겠습니까? “당신이 내 편 안 들면 누가 내 편 드나”라고 하는 거죠. 옳고 그름이 아니에요. “나 누구보고 시집왔는데. 당신이 지켜줘야지. 당신이 내가 어떤 짓을 해도 지켜줘야지. 당신이 저 남자 편을 드나”

사랑은 철저한 봉쇄입니다. 왜냐 하면 그 관계는 특별한 관계이기 때문에. 이 세상에 있을 수 없는 관계이기 때문에 그래요. 여러분은 사랑한다고 하니까 아무나 사랑이 될 줄 아십니까? 사랑이라는 것은 기적이에요. 잠언서에 나오죠. 아무리 많은 성을 빼앗는다 할지라도 인간의 마음을 여는 것은 하늘이 허락해야 합니다. “이 사람은 내 사람이다. 이 사람은 내 여자라고 왜 말을 못 해”라는 유명한 대사 있죠.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노력하고 선물갖다가 바치고 하는 것은 이방 민족 관계이고 하나님의 사랑은 너무나 하나님 보시기에 너무나 소중하고 너무 가치 있기에 이 귀한 사랑을 쓸데없이 너의 육적인 본성 가지고 아무 때나 그런 것 가지고 개에게 던지지 말라는 거죠. 내 사랑은 내 사랑답게 하라는 겁니다. 마태복음 5장 43~44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주께서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신 이 말씀은 원수를 사랑하려면 이 원수가 일단 만들어져야 해요. 일단 원수가 만들어지고 그 원수를 향하여 내가 사랑해야 합니다. 나의 원수가 만들어지고 그 만들어진 원수를 사랑해야 하거든요. 그러면 원수가 알아서 원수 되기를 풀어버리면 안 돼요. 이게 해리되거나 깨지면 안 된다고요. 원수는 계속 원수다워야 해요.

원수 다울 때 그때 그 원수마저 내가 사랑이라는 그 봉쇄적인 마음과 만나야 한다는 말이죠. 그런데 인간들은 원수를 사랑하는 순간 그다음부터는 원수가 사라져버려요. 그러니까 원수 사랑하기가 실패하는 거예요. 어렵기 때문에 다시 설명할게요. 원수가 되려면 내가 원수를 사랑하려는 마음 까지 원수다워야 한다니까요. 적 다워야 해요. 이 말씀은 마태복음 5장 6장 7장 말씀은 인간의 힘으로는 성사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이 말씀은 어떻게 성령을 통해서 성사되어야 하느냐 하면 예수님이 우리의 원수가 되어버려요. 예수님이 원수가 되어 버리면 어떤 인간도 예수님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너무 원수 같고 나를 죽이려고 하고 있는 나도 없다고 해버리니까 얼마나 원수다워요. 그 원수인데 사랑할 수 없음을 분명히 해놓고 그다음에 성령이 와서 “제가 바로 주님을 미워했던 주님을 적으로 간주했던 천하 죄인이 바로 접니다. 나입니다”라고 했을 때 그게 바로 주님을 사랑하는 게 돼요.

그 주님 사랑 안에 주님만 사랑한다면 까짓것 원수 같은 거 얼마든지 사랑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게 바로 십자가를 경유 해서 나오는 성령의 선물이에요. 그러니까 이 욥기에서 하나님께서 욥과 욥의 친구를 치열하게 싸우게 만들어요. 원수인데 그 원수 관계, 그 관계를 유지하는 거예요. 그 관계 유지하면서 ‘네가 잘났나. 내가 잘났나’를 계속 부추기는 겁니다.

그런데 둘 다 하나님의 원수예요. 나중에 욥이 하나님을 만나고 난 뒤에는 어떤 “하나님은 한계가 없다. 하나님 앞에 우리는 의롭지 못하다”라는 그 개념. 의롭지 못하다는 그 개념조차도 제대로 알아서 그 개념을 사용한 것이 아니고 저 사람이 알고 있는 것보다 내가 더 나으니까 나는 저 사람보다 더 나은 개념을 사용하니까 하나님께서 내 편을 들어주겠지 하는 것이 욥이 지금 사용하는 단어들이에요. 그 의미들이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교회 나오셔야 해요. 그리고 싸워야 해요. 가족끼리 싸우는 것은 자주 있지만 아들하고 딸하고 자꾸 싸워줘야 하나님에게 책망받는 욥이 다른 사람이 아니고 바로 나라는 사실을 알아요. 왜냐 하면 우리는 기존의 관계가 나를 만들어 주기 때문에. 나는 기어이 죽는 사람 되기 싫어요. 왜? 그동안 내가 투자한 것이 많아서.

기어이 나는 살아서 그것도 입맛 살아서 “하나님 보세요. 제가 이렇게 신앙고백 잘하고 있습니다”라고 되지도 않는 곡해를 하면서 계속 나발을 불어줘야 해요. 그러다가 가끔 십자가 만나서 “주여, 죄인입니다”라는 소리가 나오죠. 사람의 관계라는 것은 무서워요. 이것은 남들이 평가할 수 없습니다.

‘스톡홀름신드롬’이라는 말이 있어요. 스톡홀름신드롬은 심리학 용어인데 누가 자기를 납치했어요. 납치당해서 주위 사람들은 납치한 사람에게 학대받아서 빼빼 애비고 굶고 얼마나 얻어맞았을까 걱정하고 빨리 구해줘야 한다고 경찰을 독촉해서 내 딸을 빨리 구해내라고 하고 청와대 청원 넣고 하면서 그렇게 납치범 있는 곳에 가니까 뭐 둘이 죽고 못 살고 살림 차린 거예요. “당신 없으면 나도 없어요. 당신이 최고예요” 이러면서 너무 친하게 지내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학자들은 그걸 스톡홀름신드롬이라고 해서 너무 위급한 상황에서는 납치범이라고 해도 가장 가까운 보호자, 부모가 된다는 이런 심리를 내놓았습니다. 이 말은 틀린 말이고요, 정답은 뭐냐 하면 인간의 관계란 누구도 장담할 수 없어요. 드라마에 보면 맨날 부모 없이 혼자 큰 아이가 문제아가 되는 경우가 많이 나오지만 실제로 대다수는 부모 있어도 문제아 많아요. 더 많을걸요? 이걸 특화시키니까 이런 오류를 범하는 거예요.

사람이 본인이 욥처럼 자꾸 살아있다고 존재한다고 그래서 신앙 좋다고 이렇게 되면 이게 바로 인간이 하는 바보 같은 짓이에요. 왜냐 하면 공격을 받게 되어 있어요. 사람이 뭔가 잘난 구석이 있다고 한다면 다른 주위 사람들이 그냥 두지 않습니다. 계속 그 사람을 깎아 내리고 공격하고 그런 일이 벌어지는 것 자체가 본인에게도 이유가 있어요. 본인도 제공자예요.

“나는 죄인입니다. 나는 죽은 자입니다”라고 하면 되는데 꼭 잘난 체를 한다고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성도라는 것은 앞으로 네가 너를 자꾸 변호하려고 하지 말고 주님께서는 네것을 가지고 조작하는 것이 아니고 이미 죽은 자로 간주하고 너의 속에 나를 집어넣어서 주님께서 함께 죽었고 아버지는 예수님 부활할 때 함께 죽었다는 조건하에 주 안에서라는 조건하에 주안에서 그 사람을 부활하는 시키는 거예요. 로마서 6장에 나옵니다.

자꾸 욥처럼 ‘저 어때요? 저 어때요?’라고 하지 마세요. 관계라는 것은 남들 보기에 자꾸 괜찮은 존재로 비치는 사람들만 만난다는 말이죠. 마지막으로 이 말씀 드리겠습니다. 유명한 대사에 나오는 건데요. 어떤 애 엄마가 갓 결혼한 여자와 싸우고 있습니다. “너 내 남편 빼앗아서 사니까 기분 좋으냐?”라고 물으니까 여자가 “빼앗겼으면 빼앗긴 거지 왜 자꾸 싸웁니까?”라고 말하니까 김희애가 하는 말이 “너랑 싸우는 것이 아니고 모르는 것을 알려주고자 하는 것이다. 너는 네 남편이 어떤 남자인지 몰라”라고 합니다.

지금 욥은 친구와 싸웁니다. 그런데 왜 그걸 하나님께서 계속 지켜보십니까? “나는 인간과 싸우지 않는다”라고 하시는 거예요. 인간은 없는 존재예요. 싸우는 존재가 아니에요. 우리에게 헌금 받고 우리에게 찬송 받고 그런 분 아니에요. 율법을 주신 것은 우리를 죽이고자 함이죠. 있어도 없는 존재로 만드시려고 율법 주시고 십자가 주신 거예요.

싸우고 누가 이겼느냐 그거 보는 게 아니라 네가 모르는 것을, 네가 악마에 속했다는 그 모르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주께서는 사랑으로 그냥 방치해 주는 겁니다. 그리고 사랑의 끝은 봉쇄조치로써 오직 욥에게만 찾아오신 거예요. 우리 자신이 성령을 받고 난 다음에는 미래에서 다시 이것을 본다면 아 욥에게 이런 부족한 점이 있다는 그것이 바로 오늘날 우리의 경솔함이라는 것을, 경거망동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관계가 문제였습니다. 얽히고설킨 게 문제였습니다. 우리를 쳐다보고 있는 많은 시선과 거기에 눈치 보며 살아가는 것이 너무나 힘들었습니다. 주여 우리를 죽은 자로 보시고 우리 속에서 일을 벌이시는 주님만 쳐다볼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