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오후설교

분석(욥8;11-15) 200412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20. 4. 13. 05:36
2020-04-12 14:53:12조회 : 23         
   분석 200412이름 : 이근호 (IP:119.18.87.190)   

분석 (욥기 8: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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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호20-04-12 15:52 
분석 

2020년 4월 12일                본문 말씀: 욥기 8:11-15

(8:11) 왕골이 진펄이 아니고 나겠으며 갈대가 물 없이 자라겠느냐

(8:12) 이런 것은 푸르러도 아직 벨 때 되기 전에 다른 풀보다 일찍이 마르느니라

(8:13)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자의 길은 다 이와 같고 사곡한 자의 소망은 없어지리니

(8:14) 그 믿는 것이 끊어지고 그 의지하는 것이 거미줄 같은즉

(8:15) 그 집을 의지할지라도 집이 서지 못하고 굳게 잡아도 집이 보존되지 못하리라

빌닷이 주장은 모든 불신자들의 주장과 동일합니다. 불신자라고 해서 신이라는 이념을 못 만들어내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인간에게 있어 신을 항상 지존자로서 그 이미지가 서려입니다. 이 ‘신’이라는 이미지는 인간을 아무리 몸부림쳐도 벗겨낼 수가 없습니다. 신은 영원히 인간의 라이벌로서 상상됩니다.

따라서 인간들이 수완은 이것입니다. 하늘에 계시다는 신을 지상에서 본인이 조정하는 방법을 창안하는 겁니다. 신을 수완껏 다루어보는 것으로 정리를 하고 싶어합니다. 이게 악마가 신에 대해서 취한 태도입니다. 신 앞에서 자신의 말발이 먹히게 하고자 합니다. 신도 자신의 의견을 차마 배격하지 못하도록 ‘참으로’ 신다움 제시하는 겁니다.

신을 한껏 높이므로서 신의 철통같은 완고함을 누그려뜨리고 싶은 겁니다. 마치 인간대 인간의 관계에서 먼저 선의를 베품으로서 상대방의 경계심을 완화하는 방식을 그대로 신에게도 적용시키고 싶은 겁니다. 만약에 “신은 없다!‘고 마냥 고집 부린다면 인간이 미처 몰라고 예상하지 않고 일들을 벌어지면 인간으로서 수습하기 곤란하기 때문입니다.

세상만사를 완전히 모를 바에게 차라리 성질 죽이고 들어가는 것이 장래를 위한 적절한 대비책이라고 여기고 싶은 겁니다. 빌닷의 제시하는 바는, 바로 신과 인간 사이에서 관계를 설명하는데 있어 어떤 것으로 채워넣을 수 있는지를 제시하고 있는 겁니다. 11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왕골이 진펄이 아니고 나겠으며 갈대가 물 없이 자라겠느냐”, 즉 갈대가 갈대답게 곳곳하게 자라나려면 물이 적절하게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만약에 물이 없다면 어떻게 갈대가 자라겠는가. 즉시 마르고 말 것이라고 말합니다. 갈대 입장에서 맞는 말이지만 물의 입장에서 기껏 갈대나 자라게 하려고 있는 게 아닙니다.

따라서 빌닷이 제시하는 의견은 ‘자기 긍정’을 목표로 한 왜곡된 현실 편성입니다. 물보다더 갈대의 존재를 들어야 될 근거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갈대를 못자라기 위해 물을 바짝 말라질 것을 시도했다’는 시도는 빌닷에 의해서 거부당한 의견일 것이 뻔합니다. 그러니까 빌닷이 분석은, ‘분석하는 본인은 옳다’는 전제로 한 겁니다.

그러다 보니 말하고 있는 자기 형편을 표준으로 맞추어 하나님과 인간 세계 사이를 연결지으려고 하고 있는 겁니다. 당연히 여기에서 욥은 배제됩니다. 고통받은 욥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들어설 수 없는 것이라고 빌닷이 일방적으로 우기는 바가 됩니다. 빌닷의 이러한 분석을 신약에 있었던 예수님의 십자가에다가 적용해보면, 예수님마저 마땅히 버림받아야 될 분이 됩니다.

즉 인간들이 자기 잘남을 전제로 해서 분석에 들어서다보면 필연적으로 예수님은 배척받기 마련입니다. 무조건적으로 인간은 ‘나의 구원은 마땅함’부터 출발하기 때문입니다. 차라리 하나님의 허락하신 악마의 공격을 받고 격추당하는 전투기처럼 하염없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욥이 더 다행스럽다고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더 이상 내 주장을 펼칠 수 없는 지경으로 하나님께서 욥을 몰아가는 겁니다. 즉 스스로의 지혜와 이성에 입각해서 아무리 궁리해도 자신에게 일어난 형편을 해석해낼 그 어떤 수가 보이지 않게 합니다. 반면에 빌닷은 자신만만합니다. 이 자신만만함에서 소위 ‘분석’이 감행하게 됩니다.

이 분석은, 욥처럼 특이한 고통 속에 있는 자에게는 먹히지 않는 법입니다. 즉 빌닷의 주장을 예수님의 십자가에 적용시켜 보세요. 그렇다면 예수님은 여전히 죽어 마땅한 존재가 됩니다. 빌닷은 욥의 과거에 살았던 형편을 잘 압니다. 그 집안이 얼마나 융성했는지도 너무 잘 압니다.

그랬던 그가 일거에 무너져내렸습니다. 그렇다면 답은 뻔합니다. 욥이 교만했다든지 까불었다든지 잘난 척 했기 때문이라는 뻔한 결론이 맺어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욥은 이러한 인간이 분석할 수 있는 그 한계 너머에 존재하는 인물입니다. 친구들도 그 한계를 못벗어나고 욥 본인도 그 너머에게 벌어진 사태에 자기 지혜가 따라잡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신약시대에 사는 우리들에게 가능합니다. 그것은 누가복음 15장에 ‘탕자 이야기’가 나오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그 둘째가 아버지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버지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그 후 며칠이 안 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낭비하더니”(눅 15:11-13)

둘째 아들은 아버지와 함께 사는 생활이 지옥같았을 것입니다. 아무리 아버지께서 풍족한 삶을 보장해도 만족할 수가 없었습니다. 둘째 아들의 소원은 홀로 사는 겁니다. 그는 홀로 있음 자체가 곧 지옥인 것을 몰랐습니다. 아버지로부터 떨어지는 것은 성공했지만 그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떨어진 것은 실패했습니다.

그는 아버지로부터 떨어지면서 비로소, 인간은 자기에게 몰입하고 칩거하고 함몰하는 것이 얼마나 큰 비극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둘째 아들이 다시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겠다는 것은 도로 아들 노릇하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곧 인간에게 ‘회복’이라는 것 자체가 용납될 수 없음을 말해주는 겁니다.

성경은 회복을 말하는 책이 아닙니다. 이미 끝장난 바를 확인시켜주는 책입니다. 실패한 것을 만회하는 기회를 주는 책이 아닙니다. 우리 자신은 아버지와 함께 있으나 홀로 있으나 우리는 망하는 존재임을 말해주는 책입니다. 이런 식으로는 어디를 가나 인간은 주인노릇을 할 수 없습니다.

자신이 외부의 것을 분석할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는 겁니다. 추락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런데 이 추락의 끝에는 아버지의 용서가 계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피가 있었던 겁니다. 결국 탕자로 하여금 아버지를 곁을 떠나도록 허락하므로서 가느다란 거미줄이라 할지라도 아버지와 연결되는 십자가 피와 연결된다면 그것을 족함을 말해주는 겁니다.

십자가라는 중심 자리에게 파급되는 진동, 혹은 파동, 그것으로 인하여 성도란 ‘피의 효과’로서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소위 ‘도닦는 식’으로 구원되는 것이 아닙니다. 피흘리심이란 가장 확실한 진실을 위하여 특이한 결론으로서 살아가는 자가 성도이고 이것이 욥에게 일어난 일의 해답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추락하면서 전에는 멀어져 보이던 십자가가 더욱 확실하게 다가오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근호20-04-12 20:47 
26강-욥기 8장 11~15절(분석) 20200412 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욥기 8장 11~15절입니다. 구약성경 767페이지입니다.

“왕골이 진펄이 아니고 나겠으며 갈대가 물 없이 자라겠느냐, 이런 것은 푸르러도 아직 벨 때 되기 전에 다른 풀보다 일찍이 마르느니라,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자의 길은 다 이와 같고 사곡한 자의 소망은 없어지리니, 그 믿는 것이 끊어지고 그 의지하는 것이 거미줄 같은즉, 그 집을 의지할지라도 집이 서지 못하고 굳게 잡아도 집이 보존되지 못하리라”

빌닷이 이야기하기 때문에 ‘아멘’하기가 굉장히 곤란스러워요. 하나님의 뜻에 위배 되는 사람이 자기 나름대로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 여기 빌닷이 약간 건방지게 이야기한 것이 나와 있어요. “하나님을 잃어버린 자의 길은 다 이와 같다”라고 하면서 하나님과 지상에 일어나는 일을 나름대로 연결점이 성사되어 있다고 주장하는 겁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과 지상은 어떻게 연결되는가. 빌닷의 주장을 따라가면 이렇습니다.

늘 푸르러야 하고 늘 왕골이 번성해야 하고 늘 소망이 계속해서 계획 잡으면 성취되고 계획 잡으면 또 계획대로 되고 만사형통하고 집구석이 잘되고 여기 15절에 보면 그 집에 날로 화목하고 번창하고 수입이 늘어나고 자손도 많아지고 자기가 하는 사업적 계획은 그야말로 거미줄이 아니고 단단한 동아줄이 되어서 사람들이 많이 엮이고 그렇게 단단하게 번창하고 부흥하는 것, 그것이 빌닷이 보기에는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지지 않는 사람의 모습이고 하나님을 잊지 않고 사는 사람들의 모습이라고 이렇게 자기 나름대로 분석치를 내놓은 거예요.

빌닷의 이러한 지상에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것과 이어진 사람을 나름대로 표준을 제시했는데 그 안목 가지고 십자가 달리신 예수님을 한번 적용시켜 봅시다. 이 빌닷의 기준이 제대로 먹히는가. 안 먹히겠죠? 먹히질 않는 겁니다. 도리어 빌닷의 이러한 기준은 오히려 예수님을 살해하고 예수님을 못 박아 죽인 그 유대 지도자에게 적절한 공통성이 있는 기준입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이 인정하지 않는 이 빌닷이라는 사람의 그 속마음을 왜 이렇게 성경에 기록해 놓았을까요. 정말 네가 하나님께 반대되는 하나님과 관계없는 자기 마음대로 주장하는 주장에 대해서 네가 반박할 수 있거든 반박해 보라는 말이죠. 지금 우리에게 숙제를 던지는 거예요. 반박해 보라는 말이죠.

하나님을 잊어버린 자는 이렇게 망하고 만사가 안된다는 것에 대해서 네가 이의를 걸 수 있느냐고 주님이 오히려 빌닷을 앞장세워서 우리에게 되묻는 겁니다. 11절에 보면 “왕골이” 왕골이라 하는 것은 갈대 비슷한 거죠, “왕골이 진펄” 진펄은 늪입니다, “왕골이 늪이 아니고서야 나겠으며”

그러니까 이 왕골이라 하는 것은 물에 의존적이다. 습기 찬 것에 의존적이라고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왕골이 하나 존재하기 위해서는 주변에 왕골을 받쳐주는 왕골 위주의 물이 있어야 한다는 거예요. 그런데 이것은 우리 보기에 너무 당연해 보이지만 이렇게 물을 수 있지 않습니까.

‘물이라는 것은 갈대 하나 키우려고 이 땅에 물이 있는가. 물이 있는 목적은 갈대 키우기 위해서 물이 있는가. 다른 목적은 없을까요’라고 생각해 볼 수 있다는 말입니다. 빌닷이 주장하는 것은 이겁니다. 세상만사 돌아가는 것은 해와 달과 별은 나 하나 우대하기 위해서 나 하나 괜찮은 우수한 존재인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세상만사가 그렇게 다 있다는 거예요.

참 하나님 보시기에 어처구니없지요. 하나님께서 “네가 뭔데?”라고 이렇게 나오시겠죠. 네가 뭔데. 그런데 빌닷의 이러한 터무니없는 주장이 사실은 욥이 하나님 앞에 고통받기 전에 가졌던 마음과 똑같은 마음이었습니다. 그래서 욥이 자기를 충고한다고 잔소리 늘어놓는 빌닷에게 이렇게 이야기한 거예요.

“네가 아는 거 내가 다 알고 있다. 뭐 딴 거 없나? 딴 거. 지금 내가 고통당하는 이것을 분석하는데 분석 기준이 고작 내가 아는 거 가지고 분석하고 있느냐. 그런 분석 같으면 네게 부탁하지 않아도 내가 알아서 내 자체를 분석했을 것이다. 그러나 해답은 없더라. 그렇게 해답 되지도 않는 것을 네가 퍼붓는데 이것은 나에게 전혀 해당하는 사항 아니다”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이 현장에 우리가 있다면 빌닷의 편을 들겠습니까? 욥의 편을 들겠습니까? 만약에 욥의 편을 든다면 여러분은 이렇게 되어야 해요. “모르겠다. 몰라. 몰라”라는 이게 바로 욥의 편을 드는 거예요.

그런데 “내가 모르는 것이 어디 있어. 죄 있는 곳에 벌이 있는 거야. 욥 너 벌받고 있는 거야. 만약 욥 네 말이 맞다면 모든 인간은 다 너같이 고통받아야 해. 봐. 고통 안 받는 사람이 태반이잖아. 하나님께서 특별히 너를 찍어서 너의 죄를 지적한 거야. 다른 사람은 너만큼 죄를 안 지었기 때문에 벌을 안 받고”라는 쪽으로 우리가 순응할 가능성이 굉장히 많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게 되면 아까 제가 말씀드린 대로 결국 우리는 “예수 믿는다. 예수 믿는다”라고 하면서도 “예수 믿고 새사람 되고 바른 사람 되어야지”라고 하면서도 내놓은 그 바른 사람이라고 내놓은 기준들을 이렇게 추슬러보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기준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나는 이것을 윤리적 도덕적 사람으로 내가 번창하는 데서 하나님과 나의 관계는 정상이라는 것을 증명하고 싶은 거예요.

욥의 주장이 아닌 빌닷의 주장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나는 진짜 예수 믿는 사람이 맞다고 이렇게 우기고 싶은 겁니다. 사람들은 교회에서는 신학에서는 이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회복이라고 해요. 성경에 회복이라는 말은 없어요.

뭔가 사업 망하고 난 뒤에 분해서 ‘하나님 안 믿는다고 나를 이렇게 때리시는 구나’ 일본말로 ‘요시(좋다)’ ‘내가 다시 하나님 믿고 내가 너에게 무시당하는 거 반드시 본때를 보이기 위해서라도 다시 일어서고 말리라’라고 하는 것은 믿음이 아니고 그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오기’라고 합니다. 오기.

오기는 불신보다 심한 것이 오기입니다. 난감해요. 정말 오기는 더 난감한 겁니다. 오기라는 것은 교회에서 얼마나 부추겨 줍니까. 대단하다고요. 이 분석에 있어서 우리는 이 빌닷의 분석이 어디서 잘못되어야 하는지 파악해야 하고요, 또 한가지는 욥이 왜 자기 자신에 대해서 제대로 분석 못 하는지도 알아야 해요.

그래서 오늘 설교에는 두 가지를 알면 되겠어요. 욥에게 있어서 분석이 잘못된 것은 인간이 추락해야 하는 것이 마땅함을 본인이 몰랐습니다. 내가 이렇게 자식들 10명 있고 잘 사는 것은 내가 이렇게 반듯하게 산 보상이라고 여겼던 거예요. 이게 무너져야 해요. 왜 그러냐 하면 장차 오실 메시아가 추락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것을 어떤 사람은 진리가 시간 속으로 퇴락한다는 표현을 했어요. 진리가 시간 속으로 추락한다. 이렇게 표현한 겁니다. 그걸 왜 그렇게 표현했느냐 하면 이 세상에서만 시간이 과거 현재 미래를 향하여 달려가고 있잖아요. 시간이 있다는 이것을 굉장히 수상하게 봐야 한다는 겁니다. 이것을 정상이라고 보지 말고 뭔가 시간 속에 있다는 것은 온전치 못하다고 봐야 합니다.

왜냐 하면 계속 변화를 요구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어제 수학 시험 쳤는데 90점이다. 잘했다. 하지만 다음에 칠 때 또 90점이라면 이건 엄마가 용납하지 않죠. 지난번에 90점 이번에 91점 그다음에는 더욱 분발해서 100점. 계속해서 분발을 요구하는 거예요. 그러면 100점 다음은 전교 100점, 그다음은 전국 1등, 그다음은 세계적인 노벨상 타는 거. 노벨상 타면 뭐 하겠노. 소고기 사 먹으면 끝나겠지.

그러니 도대체 이 시간이 인간을 자꾸 후달리게 만들어요. 본인이 후달리니까 자식까지 후달리는 겁니다. “엄마, 나 취직했어. 그래. 잘했어. 빨리 열심히 해서 승진해야지”라고 또 엄마가 자식을 후달리게 합니다. 동기생보다 더 빨리 진급해서 40대에 임원 해야 한다고. 자꾸 이렇게 차마 말로는 표현 안 해도 그저 몸만 건강 하라고 하는데 몸 건강 하라는 그 말은 몸 튼튼해야 진급 빨리한다는 의미가 깔려 있는 겁니다.

시간 속에 인간은 도대체 만족함이 없습니다. 갈대(왕골)가 물 위에 떴다고 하면 사람이 물을 보는 것이 아니고 그 물 때문에 생긴 갈대에 주목하고 갈대를 빌닷은 지금의 자기 자신을 일대일로 대응시키는 겁니다. 뭔가 잘되는 거 보면 잘되는 것과 나와 일치시키는 경향들이 있어요. 자기 잘되는 거.

방탄소년단이 인기 있으니까 공부하기 싫은 아이들 전부 다 춤 배우고 있는데 “너 뭐 될래?”라고 하면 “방탄소년단 될래”라고 해요. 뭔가 된다 하면 자기와 일치시켜서 “네 꿈이 뭐냐? 꿈을 키워야 한다”라고 자기가 원하는 것을 그런 식으로 따라 하는 경향이 있어요. 그런데 거기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초점이 잘못된 거예요. 추락하고 있는 욥에게 지금 있는 것도 그걸 소실하는 그런 욥을 봐야 해요.

어떤 분이 글을 썼는데 정말 내 맘에 드는 글을 썼어요. 여수에 계신 그분이 쓰신 글이 뭐냐 하면 “인생은 허비하는 것이다”라는 간만에 듣는 단비 같은 진리입니다. 인생이라는 것은 허비하는 용도로 주신 거예요. 허비하라는 거예요. 인생 허비해도 건질 것은 다 건졌다는 겁니다.

허비하지 말라고 하는 것은 누가 그렇게 우리에게 독촉하느냐 하면 빚쟁이 같은 사채업자 악마가 우리에게 그렇게 닦달 내는 겁니다. ‘제대로 살아야지, 바르게 살아야지, 착하게 살아야지’라고. 차카게 사는 것은 조폭들이 그렇게 살자고 해요. 자꾸 후달리게 만들고 애쓰게 만드니까 이게 달려가다 보면 자빠지고 엎어지고 코 깨고 난리도 아니에요. 그러니까 허겁지겁, 히딩크가 늘 이야기하던 “팔리 팔리”라는 말. 한국 사람들은 무조건 빨리 해야하니까. 우리는 누가 뒤에서 떠미는 거 같아요.

그러니까 뭐냐 하면 저 물이 있을 때 물이 있으므로 갈대가 버젓이 섰기 때문에 정말 나 잘되기 위해서는 어떤 것도 필요하다. 그런데 하나님을 잊어버린 자는 그 물이 바짝 마르게 함으로써 갈대가 다른 것보다 일찍 말라버린다는 그 이야기를 지금 11~12절에서 하고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런 이야기는 누가 하느냐 하면 제가 옛날에 봤던 책 카네기의 인생관, 인간관계에 대한 책인데. 부자 된 사람 말고 카네기라는 사람이 있어요. 그 사람이 쓴 책 중에 제일 많이 팔린 책이 인생관을 다룬 카네기의 처세술이에요. 이 세상에서 사람이 성공하려면 인간관계를 이렇게 해야 한다는 것이 바로 카네기의 처세술입니다. 교훈집이고 잠언집이죠.

우리 때는 그 책 많이 읽었는데요. 도서관에 가면 그 책이 제일 많이 읽혀요. ‘나’라는 인간이 세상에 던져졌을 때 나는 어떻게 하면 성공하는 인간이 되는가. 성공하는 방법과 처세 방법이 다 나와 있어요. 구구절절 고개 끄덕이면서 정말 ‘아멘’이 절로 나올 이야기예요. 그걸 그대로 베껴서 목사들이 설교하는 거예요. 사람들 지옥 다 보내는 거예요.

욥은 이야기 안 해요. 추락하는 이야기 안 합니다. 전부 다 성공하는 이야기만 하고 있어요. 희망적인 거, 긍정적 마인드, 적극적 사고방식, 그거 빼버리면 설교할 거 아무것도 없는데요. 신약성경에 예수님은 달리 이야기합니다. 항상 구약이나 신약이나 다 예수님의 이야기예요.

누가복음 15장 11~12절에 보면 “또 가라사대 어떤 사람이 두 아들이 있는데, 그 둘째가 아비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비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드신 이유는 인간들은 홀로 있기를 원하는 것이 인간이 이 땅에 죄악 중에 태어난 철저한 본성이라고 보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아들은 아버지와 함께 있는 것이 지옥 같은 거예요. 아버지와 함께 있는 것이. 아버지와 함께 있는 것을 더이상 못 견디는 겁니다. 그래서 자기는 어쨌든 간에 홀로 있고 싶은 거예요. 아버지가 무슨 뜻으로 그런 건지 “그래 유산 당겨서 줄게”라고 하면서 줬어요. 자기는 자유라고 좋다고 혼자 나갔거든요. 아버지에게서는 벗어났지만, 이 탕자는 자기 자신으로부터는 벗어날 수가 없었어요.

혼자서 친구 만나고, 기생에게 다 줘버리고 허랑방탕 다 써버리고 난 뒤에 비로소 자신이 추락한 상태에서 볼 때 천국이라는 곳이 바로 홀로 있는 곳이 천국이 아니고 아버지 덕분으로 아버지 은택으로 있는 관계가 바로 천국이고 이 천국의 초점은 나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그 초점이 내가 어떻게 성공하고 잘되고 내가 번듯하게 되는가가 천국이 아니고 이건 오히려 반대로 지옥이고 천국은 아버지만 바라보는 곳이 바로 천국이라는 것을 예수님께서 알려주시는 겁니다.

그러면 이걸 알려면 추락하는 관계에서만 가능하죠. 추락하면서 추락을 하는 증거는 뭐냐 하면 사업이 망하고 몸이 아프고 그게 아니고 추락이 뭐냐 하면 자기에게 칩거하는 거예요. 요새 칩거 많이들 하고 있죠. 자가격리. 칩거한다고 교회도 안 나오고. 칩거하는 거, 그게 바로 지옥이에요. 계속해서 자기 도 닦는 겁니다. 말씀을 가지고 내가 얼마나 절대자이고 완전할 수 있느냐를 스스로 자기에게 시험 치는 겁니다.

나 이 정도까지 완벽하게 거룩하고 완성된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시도해보는 거, 그게 자기 칩거예요. 자기에게 매몰되는 거라고 해요. 자아 매몰. 쉽게 말해서 도 닦는 거죠. 도 닦기. 그걸 누가 잘했느냐 하면 바리새인들이 잘했어요. 마태복음 8장 20절에 보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라고 되어 있어요.

이 대목에 나오는 예수님을 욥이라고 본다면요, 사실은 욥 속에 예수님 계세요, 욥이 선지자니까요. 그러니까 성경에 나와 있고요. 욥 안에 예수님이 머리 둘 곳도 없다고 나와 있어요. 그렇다면 예수님의 이 형편에 대해서 빌닷이 분석하고 평가한다면 뭐라고 평가하겠습니까? 예수님은 하나님 앞에 죄를 지어서 저렇게 거쳐 할 곳도 하나 없다고 비난하겠지요.

저런 사람은 우리가 없앤다 할지라도 그것은 마땅히 없앨 자를 없앴다는 그런 생각이 들 겁니다. 그러면 그렇게 한다는 이유가 그렇게 평가 내리는 본인은 뭐예요? 본인에게 스스로 매몰하고 칩거하고 본인이 본인을 평가해 볼 때는 그만하면 살만하니까 이거는 내가 복 받을 만한 자기 때문에 산다고 여기는 겁니다.

그게 바로 욥을 분석한 빌닷의 분석 안목이에요. 말씀을 처음부터 다시 돌아가 보겠습니다. 빌닷은 욥을 분석합니다. 분석할 때 어떻게 분석하느냐,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어떤 식으로 연결되느냐 그것을 나름대로 그 연결을 채우려고 했습니다. 뭐든지 하는 일이 잘되고 복을 받는 모습을 보이면 이거는 하나님을 안 잊어버린 자고 하나님을 잊어버린 자는 그 관계가 끊어져서 추락하고 완전히 집안 파탄난 걸로 그렇게 평가했습니다.

이 평가를 제가 둘로 나눠보겠습니다. 어떻게 나눠보느냐 하면 하나는 종교적 평가와 하나는 정치적 평가 이렇게 둘로 나누겠습니다. 종교적 평가라 하는 것은 하나님이 있다고 상상하고 그 상상한 하나님이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원활하게 뚫으려면 인간은 어떤 변화를 보이느냐를 연구하는 거,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인간이 어떻게 회복하느냐, 에덴동산을 회복하느냐에 필요한 각종 계층이나 그런 단위들을 인간 쪽에서 공들여 채워 나가는 방식이 바로 빌닷의 종교적 분석 방법입니다.

그 방법에 의하면 욥은 원래 잘 살았잖아요. 그런데 집안 망했죠, 자식들 다 죽었잖아요. 집안이 무너졌으니까 이건 누가 보더라도 종교적 분석에 의해서 하나님을 잊어버린 자고 하나님께 벌 받은 사람 맞다는 겁니다. 그렇게 내릴 수 있습니다.

두 번째, 정치적 분석이라는 것은 뭔 뜻이냐 하면 종교적 분석은 개인을 분석하지만, 정치적 분석이라는 것은 이거는 일방적으로 내 생각으로 너는 잘못했다가 아니라 우르르 다른 사람에게 다 물어보는 거예요. 내 생각은 뭔가 오류가 있을 수 있다. 이거는 내 생각만 옳다고 하면 안 돼. 이건 교만한 거야.

따라서 내 생각은 이런데, 다른 사람 생각은 어떤지 물어볼 사람에게 다 물어보는 거예요. 쭉 다 물어보는 겁니다. 다 물어보니까 한결같이 욥은 망해도 마땅하다는 결론이 내려질 때 이게 바로 정치적 분석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으면서 인간들의 분석치를 다 끄집어내는 것을 놓치지 않았어요.

인간들이 평소에 어떤 마음이 있는지는 예수님이 다가가서 빠져나오면서 인간들은 숨길 수 없을 정도로 자기의 본색을 다 드러낸 겁니다. 그렇게 해서 오늘 본문 가지고서는 하나님이 끊어진 이유도 안 나타나고 인간들이 분석하는 것도 오류가 있다는 걸로 나타났어요. 그런데 제가 미리 결론을 내린다면 우선 욥이 하나님에 의해서 모든 가진 거 다 빼앗기고 없어지고 추락한다는 그 점을 제가 일단 암시했습니다.

이 암시가 그냥 암시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바로 신약에 오게 되면 실제적 역사적 사건이 터져버려요. 그게 뭐냐 하면 십자가 사건입니다. 여러분들이 인생에 대해서 고민과 걱정이 있고 염려가 있고 특히 제일 괴로운 것은 뭐냐 하면 삶이 주는 공포가 있어요. 살아야겠다는 것에서 오는 공포, 알 수 없는 공포, 두려움, 이것이 제일 힘든 거예요.

힘들 때 해결하는 방법은 명백합니다. 십자가예요. 십자가 사건. 내가 힘들고 어렵다는 것만이 역사적 사건이 아니고 그 역사적 사건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에서 연결된 사건이거든요. 그게 오늘 본문에 봅시다. 그게 뭐냐 하면 거미줄인데 14절에 보면 “그 믿는 것이 끊어지고 그 의지하는 것이 거미줄 같은즉”이라고 되어 있죠.

만약에 중앙에 십자가가 있다고 한다면 십자가에서 스파이더맨처럼 내뿜는 거미줄도 십자가 만큼이나 가늘가늘해요. 자기 자신밖에 모르는 사람은 절대 발견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기가 모든 것이 무너지고 무너져서 이제는 스스로 마지막 자기 믿는 것도 포기하고 그야말로 아버지 집으로 도로 돌아오는 것처럼 ‘아버지가 천국이었구나’라고 돌아올 때 비로소 그때는 보이지 않던 희미하나마 거미줄 같은 것이 십자가 피로부터 뿜어져 나오는 거예요.

그걸 가지고 빈자리에서 나오는 진동이라고 하는데, 빈자리에서 나오는 파장이 있어요. 파. 예수님 십자가로부터 나오는 그 진동, 그 진동이 뭐냐 하면 피의 효과입니다. 피의 효과. 피를 발견하기 위해서 나로 하여금 이런 지경으로 몰아넣는 나의 그 형편, 내 형편이 실제 사건이라면 지금 내가 몸 아프고 힘든 것도 실제 사건이라면 십자가는 오죽 실제 사건이겠냐는 말이죠.

나를 통해서 다시 한번 십자가와 거미줄 같은 피의 효과에 링크(연결)가 이어져 있음을 발견해야 해요. 그럴 때 인간은 자기에게 칩거하지 않아요. 자기를 때리지 않아요. 자기를 닦달하지 않습니다. 자기를 책망하지 않습니다. 자기에게 책임을 묻지 않아요. 자기가 자기를 후달리게 매몰차게 심하게 학대하지 않습니다. 이것조차도 피의 효과거든요.

피의 효과. 피 때문에 살잖아요. 예수님의 살과 피 때문에 살잖아요. 이게 사는 모습이 그 모습이에요. 욥은 아직까지 그걸 몰라요. 지금 하나님 만나기 전이기 때문에 그 사실을 모릅니다. 본인은 해답이 없으면서 상대방은 해답이 아닌 것을 알아요. 그때 얼마나 답답한지요. 그러나 그것이 바로 모든 인간의 순서가 욥에서부터 시작해야 해요. 탕자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자기 자신이 해답인 줄 알고 혼자 사는 것이 천국인 줄 알고 갔다가 몽땅 다 털어먹고 그럼에도 뭔가 거미줄같이 아버지와 나는 이어져 있지 않을까 생각이 들지요. 안 이어져도 종으로만 사용해 주면 감사하겠다 생각하고 아버지에게 돌아가니까 돈 날린 거 일체 묻지않습니다. 복음이 따로 있습니까? 경제적 보험이 최고죠.

남편이 아내 말 듣지 않고 보증서서 돈 날릴 때 아내가 하는 말이 “죄짓는다고 수고했다. 일체 묻지않는다”라고 하면 세상에 이런 아내 있으면 나와 보라고 그래요. 혹시 그런 아내 있습니까? 다 털어먹고 돌아오는 것을 귀환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걸 집구석으로 돌아온다고 해요. 집구석에 거지가 되어서 돌아올 때 어깨 두드리면서 “내가 용서하마. 사실은 나의 전략이었지”

너 홀로 사는 것이 아니고 너는 나로 인하여 산다는 사실. 이 피가 주는 생명의 효과가 어떤 경우에도 성사가 되느냐를 보여주기 위해서 너로 하여금 네 맘대로 살게 해봤다는 겁니다. 그 과정이 예수님이 이 땅에 시간 속의 세상으로 다녀간 그 과정을 오늘날 성도의 인생 속에서 그걸 반복시킨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피흘림이 있고 우리는 생명의 효과로 살아가고 있고 우리 자신이 주의 모든 일의 결론인 것을 자꾸 깜빡깜빡 잊어버립니다. 자꾸 자기 자신이 남 앞에 잘되어 보이고 싶고 멋있어 보이려는 그러한 유혹을 받는데 주여 우리가 추락을 해도 십자가 피에 담긴다는 사실을 기뻐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