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강-욥기 5장 8~16절(나타나신 하나님) 20200126-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욥기 5장 8~16절입니다. 구약성경 765페이지입니다.
“나 같으면 하나님께 구하고 내 일을 하나님께 의탁하리라, 하나님은 크고 측량할 수 없는 일을 행하시며 기이한 일을 셀 수 없이 행하시나니, 비를 땅에 내리시고 물을 밭에 보내시며, 낮은 자를 높이 드시고 슬퍼하는 자를 흥기시켜 안전한 곳에 있게 하시느니라, 하나님은 궤휼한 자의 계교를 파하사 그 손으로 하는 일을 이루지 못하게 하시며, 간교한 자로 자기 궤휼에 빠지게 하시며 사특한 자의 계교를 패하게 하시며, 그들은 낮에도 캄캄함을 만나고 대낮에도 더듬기를 밤과 같이하느니라, 하나님은 곤비한 자를 그들의 입의 칼에서, 강한 자의 손에서 면하게 하시나니, 그러므로 가난한 자가 소망이 있고 불의가 스스로 입을 막느니라”
사실 “아멘”하기가 곤란한 것이 이게 욥의 이야기가 아니고 욥의 친구 이야기입니다. 지금 엉터리로 이야기하는 거예요. 엉터리로 이야기하면서 막상 우리 보도록 엉터리 이야기를 왜 성경에 기록되도록 했느냐 하면 사람들이 하나님을 제대로 모르면서 만나지도 못했으면서 자꾸 하나님을 거론하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에 대해서 설명해보라고 한다면 딱 지금 욥의 친구 엘리바스가 설명한 것처럼 이렇게 설명을 합니다.
8절에 보면 “나 같으면 하나님께 구하고”라고 그러니까 “기도하고”라고 되어있어요. 인간이 하나님과 관계가 유지되고 있고 희망이 있다는 말이거든요. 어려우면 기도하면 될 것이 아니냐는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있습니까? 하나님 봤어요? 이번 수련회 하면서 제가 분명히 언급했지요. 모르드개, 유대민족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존재하는 하나님이 아니라고요. ‘나타나는 하나님’이라고 했어요. ‘존재하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나타나고 난 뒤에 소급해서 ‘아, 계시는구나’라고 되는 거지 ‘하나님은 존재하신다. 그 존재하시는 하나님께 우리는 가까이 나아가야지. 좋은 관계 맺어서 복 받아야지’라는 이런 하나님은 애초부터 만들어 낸, 지어낸 가짜 하나님이에요. 그래서 출발을 뭐로 하느냐 하면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는다’부터 출발하는 겁니다. 불신자들이 자기가 하는 일을 변명하기 위해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자꾸 하나님께 책임을 떠넘겨요.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모든 일을 몽땅 나에게 맡겼다. 그래서 내 말을 들어라. 내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이다”라고. 교회에서 목사에게 많이 듣는 소리 아닙니까.
성경에 분명히 요한 1서 2장 27절에 보면 말씀 있거든요. “너희는 주께 받은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라고 나옵니다.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다고 했어요. 그래서 이렇게 시작하세요. 하나님은 없다. ‘주여 없는데 왜 자꾸 나에게 나타나십니까’라는 고백이 성도의 일상이 되어야 해요.
지식으로 하나님 존재하니까 도와준다는 말이 본문에 나오거든요. “하나님은 크고 측량할 수 없는 일을 행하시며 기이한 일을 셀 수 없이 행하시나니, 비를 땅에 내리시고 물을 밭에 보내시며”라고 이런 이야기를 한들 그 사람이 천국 가겠습니까? 나중에 천국 가서 “아이고 욥의 친구야, 네가 그 이야기 했나?” “했습니다” “아이고, 잘했다. 그러니까 천국 가야지”라고 받아주겠어요? 안 받아줍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모든 햇빛과 공기를 주시고 천지를 창조하시고’라는 이런 이야기 한다고 받아주겠냐는 겁니다. 그 이야기는 예수님을 죽인 상투적인 유대인들의 발언이었습니다.
모든 종교는 신이 있다고 했지요. 불교도 미륵보살이 신이라고 했지요. 부처는 신이 없었는데 그 뒤에 대승불교에서 미륵보살이라고 해서 나무아미타불이라고 해서 신을 만들어 놓은 거예요. 인간은 신이 없이는 안 된다는 것을 이미 고객 확보가 안 된다는 것으로 알아요. 신이 없으면. 전지 전능자에게 의탁하는 것으로 그들은 장사가 되어야 한단 말이죠. 그래서 하나님 믿는다고 하면 이단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하나님 믿는다 하면 그건 이단이에요.
진짜 성경은 ‘대한 하나님 교회’가 아니에요. 그건 순복음에서 그렇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순복음 명칭이 ‘대한 하나님 성회’예요. 장로교는 ‘대한 예수교’입니다. 존재하는 하나님이 아니에요.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유대인이 알고 있는 존재하는 하나님과 나타난 하나님과의 결정적인 싸움. 그것이 십자가 사건이에요. 하나님과 하나님의 대결입니다. 어느 하나님이 진짜냐는 겁니다.
하나님이 없다는 소리는 하지 말자. 그건 인간으로서는, 악마에 속한 모든 인간은 신을 인정합니다. 중들도 얼음에서 넘어지면 “아이고 하나님” 합니다. 모든 인간은 그 최종적인 논리를 이어가려면 신이라는 그 개념을 설정해 놓아야 모든 논리가 성립돼요. “너 왜 그렇게 하느냐?”라고 하면 “하나님의 뜻이다”라고 해야 자기 정당성이 된다고요. 욥도 그렇게 살아왔어요. 욥도.
하나님은 계시다고 생각한 겁니다. 그러나 내가 일찍이 알았던 하나님 계신 것과 나에게 나타난 하나님은 달라도 너무 달랐어요. 하나님이 계시다고 줄줄이 설정했던 그 신학 체계가 고난을 통해서 나타난 하나님과는 너무나 다른 하나님이에요. 그래서 욥은 계속해서 묻습니다. 하나님 맞습니까? 진짜 이게 주의 뜻 맞습니까? 자꾸 의심하고 묻는 거예요. 의심하는 데서 주체가 형성되거든요. 안 물으면 내가 정립이 안 돼요. 계속 묻는 거예요.
하나님에 대해서 설명하라고 할 때 굳이 다른 사람에게 마이크 들이대고 물을 필요 없어요. 지금 감사하게도 욥의 친구 엘리바스가 5장에서 아주 산뜻 말끔하게 설명을 해줍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거론했을 때는 어떤 주장들이 나올 수밖에 없는가. 이게 바로 오늘 우리가 본 본문이에요. 오늘 본문의 내용은 이겁니다. 쉽게 가겠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빙자해서 이상사회를 건설한다. 이상사회.
이상사회라 하는 것은 인간이 사는데 지장없는 사회. 생각이 모두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것으로 하나가 된다면 더할 나위 없이 모자람 없이 지상천국을 건설할 수 있다고 믿는 그 세계. 그것이 예수님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의 존재부터 시작하는 겁니다. 몰랐어요? 신천지가 여기서부터 시작하는 것 몰랐어요? 모든 교파가 여기서부터 시작하는 거 몰랐습니까? 왜 교회에서 예수님 이야기하고 하나님 이야기하는 것을 알겠습니까?
인간들이 하나님 아는 지식이 모든 사람에게 있다고 로마서 1장 21절에 분명히 이야기했거든요.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알아요. 하나님이 있다는 말은 곧 다른 말로 뭐냐 하면 우리는 이 지상에서 내가 이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는 권한이 내게 있다는 것을 하나님이 보장해줬다는 거예요. 내가 고생 안 하고 편하게 살 수 있도록 우리 자비롭고 사랑이 많으신 대자대비하신 우리 미륵보살께서, 아니죠, 하나님께서, 알라신께서 보장을 해줬다는 거예요.
그래서 나를 건드린 것은 신을 건드린 거예요. 이란의 국방부 장관을 죽인 것은 미국이 하나밖에 없는 신의 순교자를 건드린 것이라고 그들이 그렇게 설명하잖아요. 이란 국방부 장관 죽을 때 그렇게 이야기했어요. 그런데 이란에서 미사일 잘못 쏴서 민간 여객기 추락시킨 것은 누가 시킨 거죠? 얼마나 인간은 하나님을 빙자하는지 이쪽 나라도 하나님 믿는 기독교 국가 저쪽 나라도 하나님 믿는 기독교 국가 그런데 월드컵 예선전 티켓은 하나밖에 없는데 둘이 줄기차게 경기합니다. 도대체 누구를 응원해야 합니까. 누구 팀이 이겨야 하나님의 영광이 됩니까? 둘 다 기독교 국가라면.
중세 때 유럽 국가에서는 거기에 대해서 함구하고 입을 다물고 있어요. 영국 국가의 가사 내용은 뭐냐 하면 ‘하나님이여 여왕을 보호하소서’예요. 하나님이여 우리 여왕을 보호하소서. 독일 국가의 내용은 찬송가에 나옵니다. 루터가 작사했어요. ‘하나님이여 이 교회를 지켜주옵소서’ 그 국가 자체가 교회니까. 다시 말할게요. 그러니까 하나님을 믿는다는 말은 뭐냐 하면 이 지상에 살고 있는 내가 행복하게 살 권한을 신이 나에게 부여해 주었기 때문에 나를 건드리는 것은 곧 살아계신 신을 노하게 하는 일이니까 함부로 나를 건드리지 말라는 자기 정당성 확보에 있어서 신의 존재만큼 적당한 것이 없어요. 최고입니다.
그 비신앙적인 이야기가 왜 욥기 5장에 나왔느냐 하면 그것은 시작을 욥부터 시작하지 말고 욥의 친구부터 시작하란 말이죠. 욥의 친구부터 시작해서 욥의 친구 생각이 평소 우리와 건성건성 교회 다니는 우리와 어찌 그렇게 생각이 똑같은지 우리 자신을 다시 한번 보고 있는 내용이 여기 터져 나온 거예요. 욥의 친구가 말하는 이상 천국이 뭐냐 하면 가난한 자를 높이시고 가난한 자의 억울함을 들어 주셔서 인간으로 하여금 희망을 갖게 하는 내용이 뒤에 나옵니다.
12절에 보면 “하나님은 궤휼한(거짓된) 자를 반드시 처결해 주시고, 이 땅에서 사뜩한 자를 버리시고 그동안 그들을 위하여 힘들게 살았던 곤비한 자와 가난한 자를 손에서 벗어나게 해주신다”라고 합니다. 이 말은 뭐냐 하면 이 지상 건설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하나님 믿고 희망적 긍정적 사고방식을 가지고 살라는 겁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을 안 믿는 거짓 종들이 교회마다 매 설교시간에 내뱉는 소리가 이 소리예요. 보람찬 주일을 보내게 하고 낙관적인 희망적인 메시지를 제공함으로 수수료를 받아 챙기는 겁니다.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목사님, 그럼 그게 아니라는 뜻이죠? 진짜 하나님은 나타나신 하나님은 그게 아니라는 뜻이죠?”라고 물으시면 아니지요. “그럼 나타나신 하나님은 뭡니까?” 뭐냐고 물어볼 것 없이 예수님의 몰골을 한 번 보세요. 나타나신 하나님의 몰골을 한 번 보세요. 어디를 봐서 그 모습이 이 땅에서 복 받은 모습입니까? 이사야 53장에는 모든 사람이 그분을 외면했다고 되어있어요.
그런 예수님을 우리가 못 알아보는 이유는 우리가 정신이 엉뚱한 곳에 팔려있기 때문이에요. 내가 잘되고 잘 먹고 잘사는 데 팔려있다보니까 진짜 나타나신 하나님을 우리는 배제한 거예요. 오늘 본문도 욥의 친구가 가지고 있던 사고방식 앞에서 진짜 하나님이 욥을 통해서 나타나 있는데 욥 속에서 나타난 하나님을 발견해야 하는데 자꾸 욥의 친구는 욥이 엉뚱한 곳으로 가고 있다고 죄지었다고 오해를 곡해를 하고 있는 거예요.
오늘날 우리 마음가짐이 욥의 친구처럼 된다면 지금 이 자리에 주님 계셔도 우리는 쫓아낼 거예요. 마찬가지입니다. 시편 73편에 보면 이렇게 되어있어요. 사람들의 평소 사고방식이 얼마나 잘못되어 있는지 하나님에 대해서 제대로 모르면서 “저희는 죽을 때도 고통이 없고 힘이 건강하여 의인과 같이 고난도 없고 타인과 같이 재앙도 없나니”라고 되어있어요. 그러니까 고난도 없고 만사형통이에요. 가정에 우환도 없고 늘 태평하게 웃음소리가 이어지면서 아쉬운 것 없이 살아갑니다.
뭔가 틀어지는 것이 있어야 “봐봐. 하나님 안 믿으니까 벌 받는다”라는 말을 딱 집어넣을 수 있겠는데 그런 타이밍을 안 주네요. 아쉬운 것이 있어야 하나님이나 주님 십자가에 관심이 있지 그런 게 없는데요. 하는 일마다 잘 돼요. 땅 던져놓았는데 열 배 올랐어요. 주식 사놨는데 20배 오르고. 그렇지 않고 주식 사놨는데 폭락하고 아들이 회사 취직했는데 취직하자마자 두 달 만에 회사 부도났어요. 그럴 때 욥의 친구가 뭐라고 하겠습니까? “거봐. 믿음 생활 똑바로 하라고 했잖아”라고 분명히 이런 소리 할 거란 말이죠.
하나님은 지상 성도들이 행복하고 여유 있게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데 네가 그 뜻에 어긋나니까 네가 잘못되었다는 겁니다. 이런 잘못된 거 그거 어떻게 수정할 겁니까? 아이들이 엄마 보고 싶어 엄마 찾는데 거기에 무슨 논리가 필요합니까? 무슨 이유가 필요합니까? 엄마 어디 갔느냐고 찾는데 옆에 친척들이 “엄마 대신 인형 사줄게”라는 말이 아이에게 위로가 될까요? “엄마 대신 너 부자 만들어줄게. 엄마 대신 내가 만사형통하게 해줄게”라는 게 위로가 됩니까?
엄마를 찾겠다는 것은 엄마만 필요하지 다른 건 필요치 않아요. 여유가 있다면 인간은 자기 창조주를 찾지 않습니다. 사운드 오브 뮤직이라는 영화에서 일곱 남매가 엄마 없이 군인 아버지 아래서 아주 경직된 상태로 살았는데 수녀원 출신 마리아가 기타 하나 들고 가정교사로 들어와서 아이들을 엄마처럼 잘 키웠어요. 엄마처럼 잘 키웠는데 아이들 아빠가 옆 나라 유명한 유산 많은 남작 부인에게 눈독 들이고 결혼하려고 파티에 초대했단 말이죠. 그걸 보고 그 마리아라는 가정교사가 자기가 있으면 그 부부에게 부담된다고 생각해서 아이들과 의논하지 않고 수녀원으로 떠나버렸어요.
영화가 거기서 끝나도 괜찮아요. 아이들 키워줄 새엄마가 왔기 때문에 가정교사 역할은 끝났으니까 다시 수도원으로 돌아가는 겁니다. 그런데 아이들이 아빠에게 물어보지도 않고 새엄마에게 물어보지도 않고 모두 수녀원으로 가서 무작정 기다리고 있습니다. 엄마 보내 달라고, 우리 엄마는 여기 있다고. 그걸 누가 말립니까? “차 사줄게. 오토바이 사줄게”라고 해서 이게 될 일이에요.
하나님께서 그 사람에게 존재하는 게 아니에요. 나타날 때는 그냥 나타나기만 하는 게 아니에요. 이 세상 모든 것이 다 없다 할지라도 너는 나와 헤어질 사이가 아니라는 그 관계성을 거기에 심어주는 거예요. 그 관계성. 교회고 뭐고 필요 없어요. 가족이고 남편이고 아내고 자식이고 필요 없어요. 그 관계성을 심어주는 겁니다. 나도 주님 없으면 못살고 주님도 먼저 “나도 너 없으면 못 살겠다”라는 둘만의 은밀한 사랑의 관계가 이 세상의 어떤 유혹도 이겨내도록 만들어 버립니다.
엄마 보고 싶다는 것에 무슨 논리가, 철학이, 신학이 거기에 왜 들어갑니까. 거기에 교회 형식 같은 것이 예배 형식이 왜 필요해요. 그것뿐이잖아요. 주님 보고 싶어요. 나도 보고 싶다. 그거면 되었지 교회에서 뭘 더 원합니까. 이상 국가 건설 그런 거 생각하지 마세요.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 하나님 자신을 존재하시는 것이 아니고 나타내시는 이유가 뭐냐. 나타낼 때 고통 속에서 나타내는 이유는 고통 속에서 모든 것이 평준화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지금 욥의 친구가 말이 많아요. 되게 말이 많거든요. 자기 아는 거 다 털어놨어요. 존재하는 하나님이니까요. 그런데 이정도는 누구도 알고 있느냐 하면 욥도 알고 있어요. 욥도 알고 있는데 왜 욥에게 이런 잔소리를 늘어놓느냐 하면 욥은 지금 장차 오실 예수님의 고통과 평준화되어있어요. 예수님의 그 고통을 알지요. 그러나 욥은 아직 메시아 오기 전 인간이기 때문에 터무니없는 고통을 받은 거예요.
이상하다. 내 죄라면 하나님 보고 싶은 죄 밖에 없는데 나는 왜 이렇게 몸이 아프고 내가 뭐 특별히 잘못한 것도 없는데 자꾸 주변에서는 “기도 생활 똑바로 안 한다, 헌금 적게 했잖아, 십일조 안 했잖아, 너 한번 생각해 봐라, 죄를 어디서 지었는지 생각해 봐라”라고 자꾸 이렇게 윽박지르는 거예요.
미국에 어떤 돈벌이 하는 의사가 큰 범죄를 저질렀어요. 어떤 범죄를 저질렀느냐 하면 멀쩡한 사람보고 암이라고 해서 계속 약값을 빼낸 겁니다. 걸렸어요. 수십만 달러를 벌었어요. 멀쩡한데 자꾸 죄인이다, 죄인이다 해서 사람을 답답하게 만들어 버린 거예요. 양심이라는 이름으로. 엄마 보고 싶어서 엄마 보러 가는 것이 편한데 주님께서는 그 가운데서 고통 중에 있는 이유가 ‘주님께서는 존재하십니다. 하늘에 계시지요? 저도 여기 있습니다’라는 것이 아니고 고통 속에서 우리 둘이 다시 만나자는 겁니다. 고통 속에서.
내 처지가 내 환경을 새롭게 해석하게 되어있어요. 제가 군에 있을 때 전방에 있었거든요. 군에서 너무 훈련받는 것이 힘들었는데 야산에서 훈련도 받고 작업한다고 곡괭이 삽 가지고 치고 파고 하는 것이 너무 힘들어서 누워있는데 한 30센티미터쯤 하는 소나무가 하나 있어요. 전방 야산에 있는 그 소나무를 볼 때 굉장히 소나무가 곱게 보였어요. 왜냐 하면 신세가 처량한 내 신세에서 그 소나무가 굉장히 반갑고 이뻐 보였단 말이죠. 내 처지가 그러니까 처지를 같이 보는 거예요.
그리고 제대한 뒤에 다시는 그 동네 안 갔습니다. 이미 환경이 달라요. 집 근처에 소나무 이리 많아도 별로예요. 인간은 자력으로 주님을 찾아갈 재주가 없어요. 주님이 찾는 그 십자가 안으로 강제로 끌어당겨야 합니다. 그래야 나 잘났다가 다 떨어져 나가는 거예요. 어딘가에서 제가 우리 할아버지 이야기했거든요. 일본 가게에서 점원 하면서 돈을 모았거든요. 식구들은 많지 일제시대에 그렇게 살았는데 그때 전부 다 창씨개명 하라고 했어요. 우리 할아버지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창씨개명 했습니다. ‘나까무라’라고.
이게 뭐냐 하면 새 시대에 속한 기쁨이에요. “욕해라. 손가락질해. 나는 너희들과 소속이 달라. 나 이제 일본 사람이야. 뭐 어째서. 왜?” 이미 세상이 일본 세상이니까. 1945년 8월 15일 있을 거라고 아무도 생각 못 해요. 그때 당시는 1945년이 아니거든요. 해방되고 안 되고는 그때는 알 수가 없죠. 지금 중요한 것은 과거를 지금 현재 세탁해 버린다는 거예요. 과거 세탁이에요.
하나님께서 욥에게 나타나시는 분이에요. 내가 알던 하나님은 아니에요. 고통 가운데 욥의 과거를 세탁해 버린다는 거예요. 고통 중에서 친구들이 몰랐던 존재부터 출발한 그들이 몰랐던 새로운 장차 십자가의 고통에 같이 동참시키는 이런 하나님, 이 욥의 이름은 나까무라입니다. 거듭난 거예요. 새 이름을 부여받은 겁니다. 내 이름 아니에요. 고통의 이름에 섞인 이름으로 불러준 거예요. 너는 나와 같이 고생했다는 이름.
너의 이름은 너의 이름이 아니고 나의 고통이 들어있는 이름, 그 이름으로 너는 앞으로 살아야 하고 그 이름으로 너는 불리어야 한다. 십자가 안에서 너는 나의 백성이고 내 형제라고 불러주는 경험, 이런 경험을 욥의 친구들은 아무리 노력해도 알 수가 없습니다. 깨달을 수가 없어요. 그게 바로 고통을 벽으로 삼고 고통 있는 자와 없는 자로 차이를 만듭니다. 물론 욥에서는 육체적 고통이죠. 그러나 신약에 오면 육체적 고통은 아무것도 아니에요. 외롭고 쓸쓸하고 남들이 깜짝 놀라죠.
여러분이 상상해 보세요. 내가 죽었는데 관 뚜껑 열고 나와서 “여보 나 살았다”라고 할 때 남편이 반갑겠습니까? 기절하겠습니까? 기절하죠. 기절할만해요. 왜? 우리 자신도 나에게 기절할만하니까. 이 성경 보고 교회 나온 것이 간단한 문제가 아니에요. 안 해도 될 이야기입니다. 왜 하나님은 없으니까. 있더라도 조용하게 계시니까. 안 해도 될 일은 지금도 주께서 꾸준히 한다는 이것이 바로 주님의 십자가 증인의 대상이 되었다는 이 사실은 남이 놀랄 문제가 아니고 우리 자신부터 먼저 매일같이 놀라야 할 문제입니다.
남들이 말리죠. “이제 그 정도 했으면 교회 그만 다니지”라고 충분히 이미 많이 들었어요. 기존 교회 가서 이상적인 건설이나 하고 기도 많이 해서 복이나 따내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겁니다. 신은 존재하니까요. 하지만 존재하는 신을 버리고 그 하나님 버리고 나타나셔서 십자가 안으로 끌어당기는, 매일 같이 나타나셔서 주님의 고통이 너의 고통보다 더 소중한 것을 일깨워 주는 이런 하나님과의 은밀한 개인적인 관계 그분이 바로 우리 아버지십니다. 개인적으로 서로 소통해야지 남들 모방하는 식으로 더는 살지 마세요.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남들 신앙 흉내 내고 남들 하는 형식 따라 하지 말고 주께서 친히 인도하시는 그것이 얼마나 은밀한 사랑의 관계인 것을 알고 누구에게도 빼앗기지 않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