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해 여름에는 몰랐습니다.
그 해 여름에 들은 이야기들이 진짜 현실인것을, 들을때 조차 잘 실감하지 못했더랬습니다.
두고 두고 살면서 이게 진짜 현실임을 더욱 더욱 절감하게 되겠지요.
정말 그리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여름에 함께 들었던 수련회 강의중에서 제 6강을 다시 나누고 싶어서 올립니다.
겨울수련회도 공지되었습니다.
그 해 겨울의 예비된 은혜를 고대하면서요.
제 6강. 다 끝났다.
이번시간에는 <요엘> 선지서를 하겠습니다.
별로 안유명한 선지서입니다. 1270쪽에 있습니다. 별로 안유명 하기 때문에 그 안에 들어 있는 내용도 별게 없다고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요엘서의 내용이 그대로 사도행전에 나와 있습니다. 사도행전에 나와있는 요엘서의 내용들은 요엘서 2장 28절부터 32절까지의 내용이 나와 있습니다.
(요엘 2:28)
“그 후에 내가 내 신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것이며”
<예수님의 일하심의 새로운 전개방식>
사도행전 2장에 보면 갑자기 놀라운 예상치도 못한 변화가 예수님의 제자중심으로 예수님이 승천하고 난 뒤에 남아 있는 사람들에게 희한한 일들이 벌어집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떠났다고 해서 예수님의 일이 중지되었다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연속성을 계속 유지하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이 떠나고 난 뒤에 예수님만이 예수님의 일을 한다는 그런 인식에서 벗어나서, 예수님에게 붙잡힌 사람들도 연속적으로 예수님의 일을 하고 있으니까, 그들의 말을 사람이 지어낸 말로 안 들으면 되겠다는 식으로 사도행전이 정리가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방금 제가 이야기 한대로 그들이 이야기한 것은 사람이 지어낸 말이 아니고, 주님께서 지금 일하고 있는 것이 다만 말하는 사람이 제자들이라는 그 차이뿐, 그들의 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그대로 들어 있어서 예수님처럼 그들이 말씀한다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상당히 신기한 이야기죠. 그렇게 되면 예수님의 영이 들어 있는 사람은 그 가치가 갑자기 업그레이드가 되고, 상당히 높은 가치를 받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것은 마태복음 10장에서 이미 예언을 했는데요. 사람들에게 체포될 때에 명심을 해라. 어떤 명심인가 하면, 본인이 이야기를 하면서도, 이야기하는 사람이 내가 아님을 성령이 들어 있는 사람만이 그것을 안다는 겁니다.
(마태복음 10:18-20)
“또 너희가 나를 인하여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리니 이는 저희와 이방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19 너희를 넘겨 줄때에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치 말라 그때에 무슨 말할 것을 주시리니 20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자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
그것을 일반화시키고 싶은 유혹이 불쑥 불쑥 들겠지요. ‘내가 어떻게 하면 그런 능력을 행사할 수 있을 것인가?’ 라는 상당한 유혹거리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시므온이라는 사람은 돈을 주고 그 능력을 얻고자 하다가 혼이 났습니다. 아주 혼이 났어요.
왜냐하면 ‘성령의 능력이 임하냐? 안 임하냐?’ 하는 것은 성령을 받은 본인도 알지만, 또 알고 있는 집단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악마, 마귀였습니다. 마귀는 사람을 알아보는데 귀신입니다. 천재예요. 도사입니다.
그래서 성령을 받지도 않았으면서 남이 성령 받은 것 흉내 내는 사람들, 연기하고 연출하는 사람들을 쉽게 골라내고 가려내지요. 악령이 이 땅에서 활동하도록 허락하시는 것은 이런 깊은 뜻이 있습니다.
어쨌든 사도행전 2장은 “예수님의 일하심의 새로운 방식의 전개”라고 보면 됩니다. 예수님이 일하심이 곧 예수님이 그냥 손으로 만지면서 육체로부터 전도하면서 했던, 예수님이 실제로 땅을 걸어 다니면서 했던 그런 방식이 다른 형태로 바뀌었다는 것 뿐, 예수님은 계속해서 우리에게 말씀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변동사항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일반 사람들은, 예수를 한물 간 과거의 인물, 연개소문이나 주몽정도로 압니다. 이제는 잊혀 져도 상관없고,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그런 존재로 간주하는 거예요. 예수님은 그런 불신자들을 아주 더 부끄럽게 만들기 위해서 이제는 예수가 하나가 아니라 천이되고 만이 될 수 있는 그런 가능성을 내보이고 있는 겁니다.
손오공이가 하나이면 참 다루기 쉬운데 손오공이 한 천 마리가 되어 버린다면 참 다루기 곤란하지요. 〔매트릭스 3〕에 보면 그 스미스 요원들이 왜 그리 많은지. 이성희 집사1)님처럼 안경하나 뒤집어쓰고, 전부 다 이리 저리 피하면서 돌아다니는데 당해 낼 수가 없는 거예요. 하나를 죽였다고 해서 예수님의 말씀이 멈추는 게 아니잖아요. 그것이 성령의 역사입니다.
<요엘의 성취 - 성령이 임한 사람의 등장, 선글라스 낀 스미스 요원?>
그런데 왜 예수님이 가시고서는 계속해서 예수님이 일 안하시고 예수님을 대신해서 왜 성령이 임한 사람이 등장하느냐는 것은, 바로 <요엘>선지서의 내용을 예수님이 주의 이름으로서 성취상황에 세상을 놓이게 하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겁니다.
<요엘> 선지자가 이야기 한 것이 다 성취되었다는 것이고, 빈말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도행전에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렇게 예수님 그대로 한다면 그 당시 유대인들이 “아 요엘 선지서의 말씀을 예수님이 다 이루었구나!”라고 동의할까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그들은 이 세상 역사에서 어떤 신기한 일이 일어나고 그들이 이야기 하더라도 예수님과 관련된 일을 하면 그들은 전부다 거부해버립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입장에서는 어쨌든 예수님은 메시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무조건 예수님을 메시아로 보지 않기에, 예수님의 복음 전하는 것을 성령의 역사로 보지 아니하고, 그것은 예수에 의한 광신도들의 작당에 불과하다고 생각들을 해 온 겁니다.
<성경해석을 주도하는 성령 - 영적해석이냐 육적해석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서 약간 복잡하게 또 하나의 문제가 등장하는 것을 살필 수 있습니다. 뭐냐 하면 예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도, 복음을 전하는 것도 성령의 일이지만 그것이 성령의 일인지 아닌지도 해석해 내고 판단해 낼 수 있는 것도 성령이 임하지 아니하면 그것이 성사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복음을 담게 하는, 자기의 것도 아닌 주의 것인데, 그 안에 성령이 계셔서 복음을 말하게 하는 것도 성령의 일이지만, 그 성령의 이야기를 알아듣는 그것도 성령의 일이라는 거죠. 성령께서는 말하는 것과 해석 전체를 다 통제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요한일서>에서는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너희들이 내말을 들으니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고, 만일 어떤 사람이 사도의 말을 듣지 않는다면 사도의 말을 듣지 않는다는 그 이유로 인해서 이 세상에 속한 사람이다”
(요일 4:5,6)
“저희는 세상에 속한 고로 세상에 속한 말을 하매 세상이 저희 말을 듣느니라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였으니 하나님을 아는 자는 우리의 말을 듣고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한 자는 우리의 말을 듣지 아니하나니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이로써 아느니라”
즉 사도의 말을 듣는 사람은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고, 사도의 말을 듣지 않는 사람은 세상에 속한 사람이라는 판단 기준을 제시하고 말았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을 대신해서 새로운 권위가 부각됩니다.
그것은 바로 사도죠. “사도”. 이 사도로 말미암아 성경말씀이 완성이 됩니다. 늦게 오신 분이 얼굴이 빨갛게 되어서 오셨는데 어디 다녀오셨기에 저렇게 빨갛게 되어 오셨나 모르겠는데 성령 받았기 때문인가요?
그래서 사도가 죽고 난 뒤에는 성경말씀이 없지요? 없습니다. 마지막 성경책은 사도요한에 의해서 기록되고 끝납니다. 그러면 사도가 없는 상태에서 복음을 담게 하는 것은 성령이 할 것이고, 그 사도가 전했던 성경말씀을 해석하고 이해하는 것도 성령이 아니고서는 해석이 불가능하게 됩니다.
<성경해석은 주의 영이 임해야만 풀어지는 이름의 비밀 - 여호와가 주예수로!>
이로써 성경과 그 해석은 여전히 감추어진 비밀로 존재하게 됩니다. 성령이 아니면 그 비밀을 헤쳐 낼 수가 없어요. 이렇게 감추어 진채로 들을 귀 있는 자만 듣게 해서 자기백성을 골라내는 방식은 <다니엘>에도 나오는데, 거기에는 숫자풀이로 나옵니다. “1290일의 해석을 하느냐” 이렇게 되는 거죠.
그러면 왜 해석이 비밀이 되느냐? 해석이 비밀이 되는 것은 바로 주님께서 하는 모든 일이 비밀스러운 일로 진행하기 때문에, 같이 비밀스러운 그 통로로 마중을 나가지 아니하면 그 해석은 계속 비밀로 되고, 그것은 풀 수 없는 것입니다. 어쨌든 <요엘>선지서 에서 이미 예수님을 통해서 성취가 되었습니다.
(요엘 2:32)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 이는 나 여호와의 말대로 시온산과 예루살렘에서 피할 자가 있을 것임이요 남은 자중에 나 여호와의 부름을 받을 자가 있을 것임이니라”
여기에 보면 문자적으로는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습니다만 예수님의 제자들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지 않습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여호와의 이름이 주 예수의 이름으로 바뀌어서 “주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자가 구원을 얻는다” 고 되어 있습니다(행 2:21).
그래서 유대인들은 “그래서 너희가 엉터리라는 거야”라고 나오고, “너희가 여호와의 이름이 예수이름으로 바뀐 것을 모르기에 성령에 속하지 않은 거야”라고 하면서 유대인과 기독교인이 완전히 쫙 구분지어 집니다.
여호와에서 예수님으로 바뀌는 것이 인력으로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게 인력으로 되지 않기 때문에 사울이라는 사람이 기독교 신자를 학대한 것을 우리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울이라는 사람은 스데반 집사를 죽이는 일에 동조했고, 주동까지 했고, 그 뒤에 많은 사람을 잡아 죽였으며, 그 가족들까지 잡아 죽이고 계속 죽이기 위해서 체포해 나가는 그 사울의 용감한 행위에 대해서 충분히 우리는 종교적으로 이해를 합니다.
왜냐하면 여기 <요엘>에 따르면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되어있기에 여호와라는 이 이름은 고정되어야 하고 달라져서는 안 된다는 거죠. 그런데 예수쟁이들은 뭐냐 그 여호와가 주 예수 그리스도로 달라졌다고 아예 우기는 거예요.
가만히 있는 성경에서 여호와의 이름을 빼버리고, 자기가 신봉하는 신인 부활했다고 하는 예수를 집어넣어 놓고 하는 말이 “그러니까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완성되었다”고 막무가내로 우기는 겁니다. 그런 식으로 우기는 고집쟁이들에 대한 대처는 미를 들고 조지는 식으로 하는 수밖에 없지요? 그런 고집쟁이들은.
왜냐하면 하나님의 일에 방해세력 일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울이 그들을 잡아 죽이려고 가다가 다메섹에서 진짜 주님이 나타날 때 사울은 그분이 바로 하나님인줄 알았습니다. “주여 누구십니까”라고 합니다. 이게 앞뒤가 안 맞습니다.
“주여 누구십니까 이게 말이 됩니까?” “근호야 네가 누꼬?” 이게 말이 됩니까? 이게 똑같은 소리 아닙니까? 주는 주지 뭡니까? 그런데 그 묻는 취지를 예수님이 아시죠. “하나님은 누구십니까”라고 할 때 “나는 나다”라고 대답하신 것은 여호와께서 하신 답입니다.
“본인은 본인이야” “나는 나다” 이 말이죠. “나 여호와는 스스로 있는 자다”라는 이것이 공식인데, 여기서 “나는(주는) 네가 핍박하는 나사렛 예수다” 즉 “나는 얼마 전까지도 지상에서 생존했던 실존인물 예수다”고 했을 때 사도바울은 모든 구약성경을 다 뒤집어 버리고, 해석을 새로 하는 겁니다.
어떻게 뒤집냐 하면 “나는 해석할 자격이 없는 사람인줄 이제 알았습니다.”라고 하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해석은 주의 영이 임해야 해석할 수 있지, 나는 해석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육적해석과 영적해석>
그래서 사도가 그 해석이 불가능한 나를 일컬어서 “육”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등장시킨 것입니다. “육”이라는 개념은 근육질 혹은 삼겹살이라는 뜻으로 사용을 하면서도 육이라는 개념은 거기에 머물지 않고, 영을 받지 않은 모든 것을 가지고 육이라고 하는 겁니다. 영을 받지 않은 모든 것이 다 육입니다.
사도요한도 마찬가지입니다. “육은 육이요 영은 영이니라”(요 3:6)고 해서 육과 영을 구분합니다. 이제부터 모든 구약성경 신약성경 전부를 육으로 해석하지 말고 영으로 해석하라는 새로운 성령의 요구가 도착하는데, 이렇게 되려면 육의 해석이 뭔지를 알고 있어야 “아하 그것은 아니라는 말 이지요” 라는 말이 성사가 되는 겁니다.
육의 해석에 대해서는 우리가 따로 연구할 필요 없이, 성령 받지 않고 해석해 내는 모든 것이 다 육의 해석입니다. 간단한 문제지요. 더 간단하게 말해서 사도바울이 <갈라디아서>와 <로마서>에서 해석한 대로 구약성경과 예수님을 해석하지 아니하면 그 모두는 다 육의 사람이고 저주받을 사람입니다.
이 말을 달리 이야기 하면 “내가 전하는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찌어다”는 (갈라디아서 1: 8)의 말씀에 함축되어 정형화 되어 있는 것입니다.
성령을 받지 않은 모든 것이 육의 해석이라면, 그러면 ‘성령 받은 해석은 뭐냐?’ 라고 할 때 사도바울은 “내가 받은 해석만이 성령 받은 해석이고 그 외에는 해석이 아니다”고 합니다. 베드로의 해석, 사도요한의 해석 등 여기에 대해서 사도바울이 따로 점검 받을 필요 없을 정도로 그들도 나를 인정했다는 겁니다.
실제로 베드로 후서에서 베드로 사도가 바울사도에게 뭐라고 합니까? “사도바울의 편지는 함부로 풀 것이 아니고 성령에 의해서 풀어야 된다.”고 합니다(벧후 3:15,16). 성령에 의해서 풀었다면 그 결론이 <로마서>, <갈라디아서>의 결론과 일치가 될 때 비로소 성령 받은 해석이라고, “딩동댕”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제가 아까 육의 해석과 영의 해석, 양쪽을 다 알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육의 해석에 대해서는 그 정보가 나무 많아서 우리가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십자가복음을 모르는 해석은 다 육적인 해석입니다.
다시 말해서 사도 바울이 전하는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그것은 성경 어느 구절을 대든지 간에 육적으로 해석한 그 열매가 사도바울과 다른 복음이 튀어 나오게 하는 원인 제공이 되는 것입니다. 상당히 논리적으로 단출해요.
제가 말은 길게 했지만 매우 간단한 겁니다. 사도바울과 일치되지 않은 복음을 전하면 전부다 육적인 해석입니다. 얼마나 간단해요. 그런 육적인 해석에 대해서는 어떤 사람이 그것을 알 수 있느냐 하면, 사도바울과 동일하게 영적인 해석을 갖고 있는 사람만이 ‘아 저것은 이단이다’고 판단할 수 있게 됩니다.
왜냐하면 사도바울과 같은 성령을 받아야 만이 사도바울의 복음에 대해서 동의를 할 수 있습니다. 만일에 성령을 받지 아니하면 사도바울의 복음에 대해서 동의가 되지 못합니다.
<주의 이름이란 아담의 이름과 전쟁하는 이름>
그렇다면 사도바울의 해석, 사도바울의 복음이 뭐냐 하면 “주의 이름으로만 구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게 얼마나 어려운 이야기인지 지금도 이 “주의 이름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이 이야기로 책을 내도 몇 권을 써야 되는 이야기입니다.
“주의 이름으로 구원 받는다”는 이 짧은 문장 속에는 이 구원은 우리에게 주어져 있지 않고 항상 우리와 상관없게 되어 있다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구원이란 주의 이름만이 가지고 있는 것이기에, 주의 이름 외에 다른 사람의 이름에는 구원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주의 이름만이 독점적으로 구원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 주의 이름이 주의 이름만으로 우리에게 구원을 넘겨다 주면 비로소 우리는 구원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완전히 주의 이름, 우리이름이 아닌 주의 이름이기에 우리 이름, 아담의 이름은 완전히 구원에서 배제되는 거예요. 구원받고 싶어서 구원되는 것이 아니고 구원받고 싶다 할지라도 주의 이름이 제공해야 만이 구원이 되지, 다고! 다고! 하면서 졸라댄다고 해서 주님이 주시는 것이 아니에요.
주의 이름에 의해서만 구원이 된다는 사실의 하나의 증거로서 고백되어지는 사람은 요엘 2장 32절의 완성태, 즉 성취된 상태에 합류된 사람이라고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요엘 2:32)을 해석하라고 하면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에 대한 해석인데 “이것이 오늘날 어떤 모습으로 되어 있습니까” 라고 물을때 “성령을 받은 사람에 한해서만 여호와의 이름이 아니고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만 구원이 주어지고 그렇게 받을 때만 구원이 성립 됩니다”라는 것이 정답입니다.
“왜 여호와의 이름은 안 됩니까?”라고 묻는다면 여호와의 이름을 여호와의 이름으로 해석하는 것은 전부다 육적해석이기 때문입니다. “왜 당신이 함부로 그렇게 단언하십니까?” 바로 사도바울이 한때,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여호와의 이름을 여호와의 이름으로 그렇게 우기는 것이 정당하다고 하면서 많은 사람을 핍박했습니다.
그런데 성령을 받고 난 뒤에 여호와의 이름이 아니라, 자기가 핍박했던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구원받는 줄을 알아서 요엘에 나오는 2장 32절의 말씀을 예수 이름으로 다 바꿔 버렸습니다.
따라서 성령을 받지 아니하면 그 바꿈에 대해서 동의를 못하기에 그 사람은 여전히 육적인 사람입니다. 여기서 “여호와의 증인”은 떨어져 나가 버립니다. 그 밖에도 떨어져 나가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고 많이 떨어져 나갑니다.
첫 번째는 여호와의 이름이 주의 이름으로 바뀐다는 그 점을 성령의 역사와 연관 지어서 말씀드렸고, 두 번째로 왜 주의 이름으로만 구원이 되느냐 하면, 주의 이름이 하는 일이 있는데 그 일이란 거룩한 전쟁입니다.
주의 이름이란 전쟁의 용사입니다. 주의 이름의 특징은 주의 이름을 가지고 개입하는 그 현장에는 반드시 전쟁이 벌어지게 되어 있고 그 전쟁의 상대자는 뱀의 자손 곧 악마입니다. 영적전쟁입니다. 특히 “폰라드” 같은 신학자가 잘 밝혀 놓았는데, 그것을 “거룩한 여호와 전쟁”이라고 합니다.
“목사님! 왜 우리가 우리이름으로 주의 이름을 불러서 구원을 못 받습니까?” 우리는 이미 영적 전쟁의 주체자가 되지 못하고 마귀에게 사로잡혀 있는 포로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전쟁의 주체자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전쟁을 벌일 입장도 못되고 갇혀 있는 입장이고 전쟁을 벌여서 갇혀 있는 포로된 것을 자기편으로 빼내주는 것은 주의 이름이, 그 이름을 걸고 하는 전쟁 외에 이 세상에 다른 전쟁은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의 적이 누군지를 몰라요. 우리는 원수 두는 것을 싫어해요. 우리는 서로 좋게 지내기를 원하지, 철천지원수가 있다는 것은 우리의 윤리에 상당히 부담이 됩니다. 사람이 얼마나 인간성이 더러웠으면 원수와 적들이 많겠나 하는 식이 되거든요.
사람이 얼마나 좋으면 그 사람에게는 적들이 없고, 참 성질 좋고 남들이 다 좋아한다는 식이 되고요. 이렇게 되면 그 사람은 거룩한 전쟁에 속했는지 안했는지에 대해서 좀 구분 좀 지어야 되지요. 구약성경에서 이름이 개입되는 것은 반드시 전쟁을 벌이게 됩니다.
<주의 이름으로 벌인 전쟁의 양상 - 쉿!>
주의 이름에 대해서 우리가 어디까지 알아야 하느냐 하면 ‘하나님의 이름으로 벌이는 전쟁의 양상이 어떻게 이루어지느냐’까지 알아야 되고 구약성경전체가 다 뒤집어 져야 합니다.
자 그렇다면 여러분에게 이 전쟁 이야기를 할 때, 제가 쉽게 여호와 전쟁이 있었던 멋들어진 사례를 제가 이야기 하겠습니다. 여러분이 다 아는 겁니다. 그것은 다윗과 골리앗의 전쟁장면이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이 승리하면서 하는 고백이 있는데 사무엘상 17장 47절에 보면 “또 여호와의 구원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로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붙이시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아주 짧은 문구로 되어 있는데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뭐라고 되어 있지요?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전쟁은 여호와께 속했다는 말이죠.
내가 악마를 이기고 싶다고 해서 나선다고 전쟁에 넣어주지를 않아요. 왜냐하면 전쟁은 순수하게 여호와께만 전담된 것입니다. 그쪽이 전담반입니다. 수사전담반 따로 있듯이 전담반 저쪽이에요. 전쟁은 그쪽 소관이에요. 여호와 소관입니다. 우리 소관이 아니에요. 우리가 이 땅에서 힘들게 살면서 어렵다고 해서, 우리가 전쟁 벌여서 그 전쟁의 힘으로 우리가 구원된다 하는 것은 성경에 없는 소리입니다.
(역대하 20:15)을 한번 봅시다. 여기는 한수 더 뜹니다. “야하시엘이 가로되 온 유다와 예루살렘 거민과 여호사밧 왕이여 들을찌어다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말씀하시기를 이 큰 무리로 인하여 두려워하거나 놀라지 말라 이 전쟁이 너희에게 속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 다음에 (역대하 20:17)절을 다 같이 읽겠습니다. “이 전쟁에는 너희가 싸울것이 없나니”
야아! 정말 이거 믿음이 있는 것인지, 완전히 자포자기 하는 것인지 도무지 구분이 안됩니다만, 여호사밧이 이스라엘의 지도자로서 국가를 보위해야 할 책임자가 말을 너무 함부로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적들이 연합군을 형성해서 막강한 대군이 밀려 왔는데 기껏 한다는 소리가 - 물론 여호사밧이 한 것도 있고 제사장이 한 것도 있지만 어쨌든 다 동의 한 거죠 - “이 전쟁은 우리에게 속한 것이 아니고 여호와께 속했기에 우리가 할 게 없다”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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