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법 딱딱한 이야기가 될 수 있는 성경에 잠시 쉼을 주는 드라마 같은 말씀으로 생각했던 에스더. 바사라는 나라에 포로로 잡혀간 아리따운 여인이 왕의 총애를 입고 왕비가 된다는 꿈같은 이야기. 도대체 그 미모가 어떠하였기에 왕이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심히 아름답다고 했을지 그 미모를 상상으로 그려보며 그나마 제법 쉽고 가볍게 읽었던 말씀으로 기억하는데 왜 첫 시간부터 머리에 쥐가 나야 하는지 의문을 품고 말씀을 듣는다.
바사 나라의 쓰임과 이곳에 왜 이스라엘이 포로로 잡혀가는지 이유를 드러내기 전에 선행 작업이 들어간다. 하나님의 일하심에 핵심 요소는 ‘없다’이다. 성전이 없고, 유대민족이 없고, 공간이 없다. 없음이 있는 자리에서 하나님이 쉬지 않고 열심히 일하심이 나타난다. 이 없음을 마련하기 위해 모든 것을 만드시고 철저히 뜻대로 이용하셨다.
없음이 있기 위해 있음의 작업을 허락하신다. 터(땅), 사람, 그리고 그 사람들을 힘으로 아우르는 남성성으로 형성된 국가가 있다. 또 하나의 대조되는 나라가 있는데 땅은 약속의 땅이고 백성은 언약 백성, 그리고 주어진 율법의 영향력 아래 성전을 유지하는 국가, 이스라엘이 있다.
쉽게 이해하기는 ‘이 두 구조가 대립하며 싸우는데 결국 언약 백성이 구원받더라’라고 해주면 딱 좋은데 방향을 잡기가 힘든 갈림이 생긴다. 다시 약속의 땅으로 돌아가 성전을 건축하는 성전형 성전 부류와 이방 나라에 남겨져 철저히 없음을 유지하는 비성전형 성전 부류. 그리고 더 이상한 건 하나님은 이 비 성전형 성전 부류를 통해 일하신다. 성전이 보이지 않아도 하나님의 다윗 언약의 영속성이 유지되고 보이지 않는 성전이 지어질 언약 성취 과정이 멈춘 적이 없음을 증명하는 표징이 에스더라는 말씀을 통해 만들어진다.
에스더가 있는 바사라는 나라는 바사 백성만 있고 유대 민족은 없다. 하나님의 작전에 말려들어 예수님을 표현하도록 만들어진 생명의 칩이 창세 전에 언약 백성 안에 심겨있는데 그들이 하나님의 그 숨겨진 언약을 놓쳤고 그 언약의 주인을 바라고 찾지 않았다. 겉으로 보기에는 열심히 하나님을 찾고 섬기는 모습이나 그것이 오히려 철저하게 비언약적 세계의 모습이고 그들과 한통속이 되어 살고 있기에 언약을 보호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찢으시고 멸망시키시고 포로로 보내셨다. 언약을 잃으면 저주고 심판뿐임을 이를 통해 보이시며 오히려 이스라엘 없음의 상태에서 하나님의 일에 차질이 생긴 것이 아니라 원래부터 홀로 활동하셨던 주의 일이 뚜렷하게 나타나는 계기가 된다. 모형을 깨고 그 안에 계신 실체가 다윗 언약의 완성을 위해 활동하시니 보이는 그래서 소유할 수 있는 가짜 성전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진짜 성전의 이루어짐이 흘러나온다.
힘을 갈급하는 세계, 무한성을 어떻게 하든 자신의 손아귀에서 주무르고 싶어하는 남성성의 세계를 다루기 위해 하나님은 여성성을 이용하신다. 이미 남성의 전체성에 완전히 종속되어 어떤 주체성도 없어 보이는 여성. 하나님 승리의 무기는 예측 불가, 소유 불가, 지키기보다 손을 놔버리는 무대책, 힘의 반대적 성질인 여성성이다.
전체성에 손상 가는 것을 위협으로 느끼는 남성성의 세계는 완벽에 완벽을 기하는 방어 시스템을 갖추고 무한이 유한으로 드러나는 미흡함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즉시 자체 복구를 하려는 시도를 멈추지 않는다. 이 완벽성에 흠을 내는 역할이 여성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공백을 통해 활발하게 하나님의 작전이 수행된다. 일하심의 핵심은 구별작업이다. 존재하지 않으나 나타나시는 하나님을 인지하게 되는 개기는 갈라지고 구분되며 충돌하는 사건 현장이고 갇힌 공간에서 빠져나감을 경험하는 언약 계통(모르드개)과 여전히 갇혀 자신이 신의 행세를 하는 비언약 계통(하만)이 구분되며 비언약적 존재가 그 마음에 품고 있는 언약에 대한 강력한 반발이 드러난다. 도륙, 전멸, 몰살.
유대인이 있음이 되고 이스라엘이 드러나야 할 때는 이스라엘 자체가 희생물의 역할을 해야 할 때이다. 죽음을 표현하기 위해 있음이 필요기 때문에. 모르드개가 하는 일은 뭘 해도 하만의 분노를 유발케 하는 일뿐이고 막상 그 일 처리는 대신자 에스더에게 떠넘긴다. 에스더는 언약을 품은 희생자의 모형으로 악의 중심부로 들어가야 한다. 이스라엘 백성은 에스더가 말한 금식의 의미를 알고 자신이 이미 죽은 자로 왕에게 나가는 것처럼 그들도 그 절망과 죽음에 참여 된 하나가 되어야 한다. 그들이 무능자로 하나 되었기에 그들은 함께 평안에 놓일 수 있다. 이 죽음 안에서 하나님은 예측 불가로 일하신다. 왕이 법을 뛰어넘어 금홀을 내밀 줄을, 절대적 존재인 왕이 사랑에 끌려 에스더와 한 마음이 될 줄을, 하만이 아닌 모르드개가 높임을 받을 줄을, 그리고 언약 민족의 죽음의 자리가 비언약에 속한 자들의 죽음의 자리가 될 줄을 누구도 예측 못 했다. 예측 못 해야 하는 것이 하나님의 비밀이다. 마치 바사에서 벌어지는 사건의 시작이 비언약 계통의 계획과 움직임으로 일어나는 것 같지만 제비를 뽑는 방식에서 이미 처음부터 사람들의 손을 벗어나 마지막 결과까지 사람들의 손으로 이루어진 것이 하나도 없게 하시는 하나님의 작업만 있었다.
언제나 주인공은 마지막 타임에 등장한다고 했던가. 이제 이번 주제의 주인공을 소개할 때가 되었다. 주인공은 악마이다. 악마님이 얼마나 지혜가 출중하고 대단하신지 인간들은 그 앞에 꼼짝도 할 수 없고 철저하게 그들의 꼭두각시로 움직일 수밖에 없기에, 국가라는 허상의 중심부를 파고들어 희생이라는 중심축을 박아 넣으시고 주의 자리에 등극하시어 그 주인공을 제압하시는 분은 예수님뿐이시다. 언제? 이 세상 거룩의 중심부가 죄의 원천임이 밝혀지고 죄로만 충만할 때, 멸망의 가증한 것이 드러날 때, 바로 그때가 주님의 타이밍이다.
타이밍의 주인이 온전히 증거되는 순간은 우리가 악마와 결속된 자임을 고백하면서 철저히 주님의 모조품 역할로써 ‘나는 가짜고 나를 통해 보여지는 그분’이라는 고백이 무시로 튀어나오는 사건이 그리고 십자가가 반복되는 순간이다.
비밀을 아는 예외적 존재는 이미 전체의 무의미를 알기에 유일한 의미이신 분에게 속해 있으니 무의미의 세상에 매이는 것은 없다. 정의, 거짓, 불의, 양심, 선과 악, 체면이 가짜에게 무슨 소용이 있고 의미가 있겠는가. 오히려 무한에 예속되지 않고 무한의 성질을 소유하려는 욕망을 갖은 채 행하는 것이라면 정직도 선행도 거룩도 믿음도 하나님 앞에서는 심판의 대상이다.
그래서 모두는 심판의 대상임을 부인할 수 없다. 부분이 전체를 알 수 없듯이 안에 속해 있으면서 바깥에서 내려다보는 관점을 어느 인간도 스스로 가질 수 없다. 이 가상세계에 희생물이 들이닥쳐 관통해 주실 때 비로소 나와 세상이 가짜임을 알게 될 뿐이니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아래로 아래로 계속 추락하는 일뿐이다. 혹시 정말 혹시 추락하는지도 모르고 떨어지다가 예수님의 살과 피로 지어진 그물에 덜컹하고 걸렸다면 그때가 영문도 모르고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때이고, 죄밖에 내세울 것 없는 자임을 알 때이고, 대신 치러 주심의 용서 앞에 감히 할 말 없을 때이다.
자신에게 당연함은 내려감이지 걸림이 아니기에. 자신이 어디서 건짐을 받았는지 그리고 자신의 정체가 뭔지 하나하나 발각당하는 사건을 주께서 반복해서 연출해 주심에 무익한 종, 무능자, 탕자로 머물며 기뻐하고 감사하는 일이 숨 쉬는 이유에 전부가 되게 하시기를 바랄 뿐이다.
에필로그 법을 따르고 있다는 판단은 예측 가능성과 함께 자신에게 질서, 안정감, 힘으로 되돌아오지만, 법에 제압당하면 법 자체만이 유일한 질서이고 그 속에서 함께 소용돌이치는 자들은 판단 불가, 예측 불가, 무질서를 경험하며 알 수 없는 고난을 겪는다. 그런데 그 고난이 자신의 고난이 아니라는 알 수 없는 말을 내뱉는 사람들의 만남을 통해 지금껏 나에게만 집중했던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게 하며 이 고난의 진짜 주인은 누구이신지 의문을 바라게 한다. 이것이 바로 위기이다. 어린양의 피로 자신들도 미처 알지 못했던 바로의 권세에서 분리되는 출애굽 사건이 그 한 번으로 종결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 성취의 쉼 없는 활동으로 계속 재현됨을 알게 하신다.
여기서 말씀이 이론화 되고있는 증상은 ‘아, 그렇구나’이다. 화가 나거나 이상한 생각이 드는 것이 당연한 반응이어야 하고, 어떻게 고통을 느끼는 당사자가 나 자신인데 여기서 진짜 고통받으신 다른 누군가가 있다고 우기냔 말이다. ‘나는 뭐란 말이지. 난 가짜란 말인가?’라는 욱함이 올라오는 것이 정상이다. 그런데 완전히 낙다운 되는 한방은 “너잖아. 그분을 죽인 자가. 그분의 고통의 근원을 품은 네가 죽였잖아...”
누구나 사철나무에 눈이 소복이 싸인 것을 보면 ‘예쁘다, 운전하기 힘들겠다, 눈이 내리는 원리는?, 눈의 결정체가..,’라는 자기 가치와 의미로 해석하는 태도가 자연스러운데 어떤 사람이 ‘아, 하나님은 살아 계시구나’라고 고백한다면, 이게 전율 흐를 상황이 아닐지.
자신을 헤아림의 자격이 있는 무한자로 여기며 자신이 누구인지를 스스로 정의 내리고자 답을 찾는 행위가 사람의 일반적 모습인데 존재하지 않는 무한자를 고백하며 자신을 그 하얀 눈송이의 하나로, 헤아림을 받을 대상 중 하나로 편입시키는 말이 나오니 찾지 아니한 자들에게 찾은 바 되고 묻지 아니한 자들에게 나타나시는 하나님의 자율성이 살아 움직임을 느낀다.
“내가 없으면 ‘0’이 되는 것이 아니라 ‘1’이 된다”라는 말이 나만 신기했나. 예전에 직장에서 만난 어떤 분과 이야기를 하다가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 너무 단순한 질문이 생각난다. “그러면 당신이 없어도 하나님은 존재하십니까?” 지금까지 한 말로 봐서는 당연하다는 말이 나올 줄 알았는데 “내가 없는데 하나님이 어떻게 있을 수 있어요? 믿는 내가 없으면 하나님도 없지...” 이번 수련회에서 생생하게 남는 건 달랑 이거 하나인 것 같다. 내가 있으면 존재하는 하나님 그러나 나타나지 않는 하나님이고, 내가 없어야 존재하지 않는 하나님이나 나타나심이 있다는 거. 그래서 하나님을 찾는 내가 있으면 하나님의 희생을 생각하는 내가 있으면 주님의 일하심은 없다. 없는 주님이 나를 죽음으로 만들어 주셔야, 없음으로 만들어 주셔야 주님의 일하심이 나타난다. 말하면서도 이해를 못 하고 있으니 이제 수련회 다시 가는 기분으로 동영상을 다시 봐야 할 때인가 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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