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망 관련 영화를 볼 때마다 늘 마지막은 인류의 씨가 존속될 희망인 주인공이 캡술이나 우주선에 실려 살아남는 결말이 많다. 다 죽었더라는 거의 못 본 것 같다. 그런 영화를 보면서 늘 마음속에 스스로 묻는 질문이 있었다. 세상이 멸망하기 직전인데 딱 한두 사람만 살 수 있는 우주선이 있다면 거기에 타는 사람이 되고 싶은지 아니면 남아서 함께 소멸되고 싶은지.
살면서 누구를 만나든 자기중심적 사고관에서는 나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사람은 없고 나 또한 그들에게 피해를 주면서 살아가는 인간 중 하나로 치부됨을 부정할 수 없다. 각자의 입장에서 자기 자신만 지키고 보호하고 싶은 것이 사람 마음이고 버릴 수 없는 생존본능이니까. 그래서인지 지구 종말에 대한 영화를 볼 때마다 남아서 죽는 사람들보다 마지막까지 살아남아 그 모든 모습을 끝까지 지켜보는 주인공이 왜 이리 측은하게 느껴졌는지 모르겠다. 무슨 꼴을 더 보려고 저렇게 악착같이 육신을 지키며 살아남고 싶을까. 이게 자신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 생각인 것이 막상 그 상황이 된다면 나라는 인간도 어떤 악착같은 모습이 나올지 알 수 없기에, 마음이 향하는 방향성은 있으나 ‘나는 이렇게 해야지’라는 생각을 한 적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특정 바이러스에 대한 공포가 주변을 가득 채우고 우리 가족만은 안전하게 살아남아야 한다는 악착같은 이기심이 팽배해진 요즘 복음이 참 감사한 이유는 늘 할 수 없는 일들뿐인데 우리가 책임지고 할 수 있는 일이 하나도 없음을 계속 증거 해주고 더 나아가 사람이 알 수 없고 할 수 없는 이유가 진짜 현실은 혈과 육이 아닌 사람 속의 영과 하나님의 영의 아심과 하심의 결과뿐이라는 것을 밝히 드러내 주시기 때문일 것이다.
세상에 눈을 돌리면 모든 것은 혈육만 있고 출발점은 항상 나 자신이지 나를 꿰뚫고 진짜 자신을 조종하는 배후는 감지되지 않는다. 내가 나에게 집중되어 해석하는 악한 영이란 단어는 그저 나쁜 양심 정도로 해석될 뿐이지 영적인 세상은 상상할 수도 없고 오히려 영적이라는 말이 참 어색하고 무당 같은 용어처럼 다가오는 이 꺼림칙한 느낌조차도 내가 나에게 집중되어 이성적 논리를 발휘하고 있는 순간이다.
그러나 사람의 사정을 사람이 알지 못한다고 말씀은 말한다. 오직 사람 속에 있는 영이 사람이 왜 그러는지를 알고 그 영이 주는 마음으로, 심어주는 가치로, 격려로 우리가 길들여 있고 그것이 자연스럽고 마음이 편할 뿐 그 영을 스스로 인지할 수 없다. 하나님의 사정을 알고 있는 것 또한 하나님의 영뿐이시고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나타나심이 있기 전까지 하나님의 일을 인간 스스로 알 수 있는 길 또한 없으니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선은 영적이 것을 완전히 배제하고 스스로 자기 자신을 미래를 개척해 나가야 할 운명의 주체로 내세우는 것이다. 실체를 가리는 허상의 생성 도구가 바로 운명이다.
단단하게 구축되어있는 선악의 가치관에 포위되어 있으니 듣고 익히는 모든 것들이 그 막에 걸려 왜곡된 해석을 만들어 낼뿐 제대로 들릴 수도 알 수도 없다. 그러니 불확실한 미래를 희망적으로 바꾸기 위해 자신이 진취적으로 움직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강박적 생각에 쫓겨 사는 것 외에 달리 할 일이 없다. 그런데 어디서 난데없이 돌멩이가 날아와 자신을 쳤을 때 그리고 자신이 지금껏 추구하던 것들이 와장창 무너져서 배후를 가리던 막이 찢어졌을 때 대면하는 진짜 자기 모습이 악마일 때 그 상황에 무슨 천국 소망이 있고 구원이 있겠는가.
더이상 살려두시지 말고 그대로 소멸시키심이 마땅하고 합당하다. 어린양의 희생으로 만드신 십자가 안에 죽음의 자리를 만들어주신 것만 감사할 뿐이지 더는 바람도 원함도 없다. 그리고 더 나아가 아무 생각도 없다. 이전과 달라진 모습이 전혀 없이 똑같은 더러운 모습으로 살게 하시는데 자신의 힘으로 결코 넘을 수 없는 틈을 인식하게 하신다. 이전에 그 틈은 공포이고 두려움이고 어떻게 하든 메워서 보이지 않아야 잠시라도 안정감을 느끼는 틈이었다면 이제는 그 틈을 비집고 올라와서 어떤 더러움의 한계도, 죄의 한계도, 죽음의 한계도 뛰어넘는 생명 나무의 위력에 포위되는 세계이다. 무시 받고 손가락질받는 주변의 시선이 지적이 대수롭지 않다. 더 나아가 자신의 자책도 반성도 시시한 일이다.
이제 돌멩이가 날아와 틈을 만들어주셨으면 더이상 우리가 신경 쓸 것이 뭐가 있냐고, 왜 주 안에서 악한 영과 싸워야 하냐는 의문을 던져본다. 이 썩어질 육체를 입고 있는 한, 이 세상에 머물러 있는 한 그 벌려있는 틈을 어떻게든 스스로 메우도록 부추기는 악한 영의 간교한 유혹은 계속될 것이고 또 계속되어야만 하고 악마의 계교에 말려들 수밖에 없는 죄인임을 알게 하시는 자리가 성도를 통해서 만들어지고, 친히 악한 영과 싸우고 계시는 분이 누구신지가 그 자리를 통해 증거되며 주님의 승리만 찬양하는 결과물들이 주 안에서 주님의 때까지 계속 생산된다.
“나 하늘나라 왕자님에게 웨딩드레스 받았다” “오늘 밤 제 목숨 거둬가실 거죠”...주님의 사랑을 입었음을 알면서도 결국 안다는 것을 믿지 못하고 미지의 x에 더하기 1을 하며 여전히 남아있는 미진함을 계속 느끼게 하던 육의 껍질이 거둬지고 항상 그리던 생명 되시는 주님과 그분의 약속 성취로만 가득 채워진 그 설렘이 그 자랑질이 부럽다. 다 필요 없고 우리 엄마 좀 찾아 달라는 아이가 어딘가 계신 건 알겠는데 정신없이 찾아 헤매던 여정을 마치고 엄마 품에 안길 날을 이미 확신한 듯한 기쁨이 부럽다. 어차피 내가 한 것 아니니 맘껏 해보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는 모습이 질투 나는 것이 아니라 아름답다.
어떻게 하면 그 사랑을 영생을 얻을 수 있는지 묻고 싶지 않은 건, 인간 쪽에서는 알아도 알 수 없고 설령 알려준 방법대로 똑같이 시도해 본다 해도 얻을 수 없는 주님의 은밀한 선물이기 때문이다. 주님의 증인은 자신이 어떻게 증인이 되었는지 알려주는 사람이 아니다. 그냥 휘둘리는 대로 당하고 쏟아지는 대로 뱉는다. 자신이 설령 그 말로 모욕적인 대우와 무시를 받더라도 스스로 관리할 수도 없을뿐더러 처음에는 왜 그런 반응들을 느껴야 하고 당해야 하는지 본인도 모른다. 소속이 달라졌고 휘둘림을 받는 영이 달라졌다는 것은 그저 비췰 뿐이지 애써 설명할 필요도 이해시킬 필요도 없다.
성도와의 교제라는 허울 좋은 말에서 멈추지 말고, 눈에 보이는 사람에게서 멈추지 말고 그 사건의 진짜 주체, 자기 마음 다 가져가신 주님만, 다른 거 다 필요 없고 주님만 있으면 된다는 그 주님만 의지하는 것이 불가능한 일이어서, 성도라는 증인을 뚫고 나오는 주님의 일하심이 나타나는 것은 참 귀하고 귀하다. 나타나고 드러나는 것이 말하는 당사자가 아닌 낯선 제3의 누군가를 비취는 몸부림인 것이 고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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