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민선

주 안에서

아빠와 함께 2020. 1. 6. 07:11
2020-01-06 01:02:15조회 : 7         
주 안에서이름 : 송민선 (IP:14.55.184.154)
어떤 요리사가 이런 말을 했다. “모두들 요리가 어렵다고 생각하시는데 세상에서 제일 쉬운 것 중 하나가 요리입니다. 제가 오늘은 아주 간단해서 누구나 할 수 있는 요리법을 하나 알려 드릴게요. 우선 냉동실을 열어서 아주 흔하게 볼 수 있는 재료인 양고기를 꺼내서 해동시킨 후 찬장을 열면 어느 집에나 볼 수 있는 바질 가루와 불포화 지방이 풍부한 호두오일을 꺼내서...” 채널을 돌리며 올라오는 생각은 딱 하나이다. ‘장난하나...’

롯이 소돔과 고모라가 불바다 된다고 할 때 누구도 믿지 않았고 식구들이라도 챙기고 싶어 좀 더 강하게 권했을 텐데 도리어 ‘농담’으로 여기며 웃었다. ‘장난하나...’ 뭐 이런 거 아니었을까. 오히려 신기한 것이 기생 라합은 여호와가 어떤 분이신지 이미 세상에 퍼진 애굽 탈출과 홍해사건 그리고 그 외의 소문들로 간담이 녹고 정신을 잃을 정도라고 했다. 그녀에게는 그 소문이 장난이 아니었다. 안 믿는 사람이 이상한가 믿는 사람이 이상한가. 그녀는 그 현장에 없었고 오직 소문으로만 이 모든 걸 들었는데 믿었고 나 자신도 지금 보지 않은 것을 그 말씀을 듣고 있다. 말씀을 들을 때마다 자신을 의심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자녀들에게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씀을 약속의 첫 계명으로 주신 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통해 부모가 이미 하나님 자식의 역할이 되어 받은 중요한 무언가를 자신의 자식에게 전해야 하고 그 자식은 또 그 후대의 자식들에게 이것을 전해야 하는 중요한 역할이 부모와 자식의 관계를 통해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하신다. 이것에 중요한 핵심은 그 전달의 통로들이 하나님이 주신 생명에 속해야 하는 것과 그 생명 안에 담긴 원리 원칙대로만 약속이 전달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약속이 인간 속 부모 자식 관계에서 정상적으로 전달 될 수 없음을 하나님은 아셨다. 인간들이 하나님의 원리 원칙을 지킬 자들이 아님을 아셨다. 하나님은 나 자신이 어떤 인간인지를 아신다는 것이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지 모른다. 우리에게 어떤 기대도 하지 않으시니 결국 영생하는 생명이시고 아버지와 참 아들의 관계를 보여주실 수 있는 진짜 아들을 이 땅에 보내신다. 아버지의 마음을 온전히 아시는 아들. 그래서 유일하게 아버지의 뜻에 복종하실 수 있는 약속의 성취자. 예수 그리스도.

그러면 두 분이 알아서 모든 것을 하면 될 일인데 왜 이 죄가 창궐하는 세상으로 아들을 보내셨을까. 하나님께서는 예수님만이 아시는 아버지의 마음을 함께 느끼게 할 양자들이 이 세상에 있다고 하신다. 그리고 그들이 스스로 하나님을 찾아올 수 없을 정도로 세상은 가망이 없고 양자를 찾아서 아버지의 마음을 전달해 줄 끈을 쥐고 계신 분이 주가 되신 주님뿐이시다. 이렇게 하나님이 주신 땅인 ‘주 안에’ 오직 하나님이 주님을 통해 만드신 자식이 들어감을 허락받고 주 안에서의 순종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순종이기에 모든 것이 ‘예’가 된다.

이제 자신의 욕망으로 점철된 자기 방식으로 주님에게 순종하고, 그 순종으로 남편에게 복종하고, 자식들은 부모에게 순종하고 더 할 수 없이 화목한 주님의 가정이라는 허상을 지우개로 싹싹 지우고 외형을 다 걷어버리고 다시 보자고 하신다. 주 안에 있는지 주 밖에 있는지, 하나님의 약속 안에 있는지 자신이 자체 생성한 약속을 믿고 사는지, 선악 구조 안에 있는지 쪼개진 사이에서 발생한 제 삼의 구조에 편입되었는지를 보자고 하신다.

나는 어느 쪽인지 섣불리 예측할 수 없는 이유는 제 삼의 요소가 인간 쪽에서는 스스로 만들 수 없다는 것이다. 둘째 아들이 집을 나가 아버지 주신 재산 다 탕진하고 집에 거지꼴로 다시 돌아왔을 때 인간 쪽에서 만들 수 있는 대립 구조는 착한 아들과 나쁜 아들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보시는 대립은 아버지의 마음을 몰랐던 맏아들과 죽었다가 살아난 잃었던 둘째 아들이다. 잃어버렸던 아들의 마음에는 하나님이 찾고자 하시는 그것, 자신을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할 수 없다고 고백하는 하나님의 마음을 담은 제 삼의 요소가 있었다. 인간의 겸손이나 선함으로 조작할 수 없는 요소.

이제 출발점은 부모도 없고 자식도 없고 가족이 없는 지점이다. 내가 없는 지점이다.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이 부모의 마음으로 친히 전하시는 복음 앞에 양자의 영을 받은 자들의 역할은 항상 주 안에서 하나님의 보증하신 것을 전달하는 용도로 매일 새롭게 생성되는 것이다.

이제 기생 라합처럼 간담이 녹고 정신이 아찔할 정도의 마음으로 하나님의 자율성을 찬송하며 감사해야 한다. 언제? 바로 지금 이 상황에서. 아버지가 생산해 주시지 아니한 모친이나 형제는 주님과 아무 상관이 없는 것처럼 우리도 나라를 배신하고 가족을 배신하고 부모를 배신하고 더 나아가 나 자신을 배신하는 마음이 우리 안에서 세미하게 느껴지고 내가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이미 주변에 낯선 어떤 모습이 자신을 통해 비치고, 그 입에서 자신도 깨닫지 못하고 한 말에 대한 반응들이 나타날 때 내가 한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일하심을 감 잡으며 감사하면 된다.

이상한 것은 그 감사는 내가 감사하고싶은 상황이 아닐 때 하는 감사이다. 어떤 분이 그러셨다. 사람들이 감사하다는 말이 너무 흔하고 식상하고 가식 같다고. 참으로 동의한다. 감사할 상황이 아닌데 감사하는 게 도리어 이상해서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이때가 바로 자신을 배신할 때구나. 내가 누구이기에 감사할 상황과 그렇지 않은 상황을 구분하고 있는지 그 마음을 배신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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