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이것이 인간 세계의 부부의 연을 맺는 상식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한 이야기라 그 비밀이 너무도 크다고 강조하신다. 범죄한 아담의 세계에서 태어나고 자라서 익힌 어떠한 것으로도 이 말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것이 눈에 보이는 글자로 적혀있다 하더라도, 외국어도 아니고 모국어로 친절하게 설명한다 할지라도.
방법이 아예 없지는 않다는 희망적(?)인 메시지를 전달해 주신다. 말씀이 너를 다시 낳아주시면 된단다.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실 때만(야고보서 1: 18) 하나님의 살아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만(벧전1:23) 가능하다고 하신다. 좀 더 현실적으로 표현하면 동침하기 전에 아기가 태어나면 되고, 불임여성으로 출산할 수 없다는 확실한 선고를 받고 나서 임신이 되면 된단다.
궁금했었다. 왜 천국은 시집도 안 가고 장가도 아니 가는데 아들의 나라의 절정은 하늘나라 혼인 잔치로 묘사되고 주님은 신랑이고 성도는 신부가 되는 이야기가 있는지. 천사들은 결혼도 없는데 혹시 예수님이 신부가 필요하시면 많은 천사 중 하나를 고르시면 될텐데 굳이 신랑(주님)이 신부를 만들어 신부(성도)와 결혼을 하셔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의문이 있었다.
무엇을 원하셔서 하나님은 이런 연출을 하고 계시는지 이제 성경의 말씀이 스스로 말씀대로 이루어가시는 경로로 우리를 몰고 가신다.
지금의 아담 세계 말고 범죄하기 전의 아담을 대조하다 보니 여자가 없었던 때가 있었다. 그때의 그 상태가 하나님 보시기에 심히 좋으셨다. 그런데 아담에게서 무언가 만들어지는데 그냥 대충 흙으로 만든 것이 아니고 아담 속에서 가장 아름답고 가장 귀한 가장 아담다운 부분을 취해 만드셨다. 아담이 한눈에 여자가 자신임을 알아보고 그 여자를 사랑한다. 아니 그 여자를 통해 표현되는 자신을 사랑한다. 둘이 되려야 될 수가 없다.
이제 아담이 여자를 자신이라고 하지 않고 하나님이 주신 ‘저 여자’라고 하는 그때 이후의 세상으로 다시 컴백하니 지금의 남자와 여자, 남편과 아내, 결혼, 사랑이라는 말이 하나님이 뜻하는 말씀과는 전혀 일치되지 않는 용어로 바뀐다. 남편은 여자가 자신이긴 하나 죽음의 요소가 빠진 자신이기에 그저 소유물이고 아내는 남편을 사모하기를 원하고 남편이 자신을 이끌어 주기를 원하나 이상하게 이 남자가 그 남자가 아닌 거 같고. 서로 알 수 없는 원초적 원한을 품고 늘 ‘너 때문이야’라는 원망의 화살을 날릴 준비가 잠재되어 있다.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라는 말씀을 깨닫게 하신다.
결혼이라는 제도가 얼마나 절묘한 하나님의 전략이신가. 이 붙을 수 없는 두 요소를 붙여 놓으셨으니 인간 세상에서 하나 됨과 사랑이 불가능성이라는 것을 혹독하게 체험하게 하시고, 자신의 더러운 심보 다 들키게 하시고, 세상에 대한 미련 버리게 하시고, 마음을 다른 곳으로 향하게 해주시는 계기가 되게 하시니. ‘결혼이 너희가 생각하는 그런 결혼이 아니야...’라고.
여자의 머리가 남자이고 남자는 반드시 여성을 경유해야만 그 여성 안에 있는 자신의 어떤 것(주님의 형상)을 발견한다는 시스템이 유일한 남자이신 예수님을 통해 이루어진다. 그 남자는 여자를 위해 필히 목숨을 버려야 한다. 그것도 이미 세상과 간음하여 너덜너덜 걸레가 되어있는 여자를 자신의 신부로 만들기 위해 죽으셔야 한다. 인간적으로는 기가찰 일이고 영적으로는 기이한 일이다. 그냥 쓰레기는 딱 불 속에 던져 태우면 깔끔하게 해결될 일인 듯 보이나 주님의 주되심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은 섬세하고 심오하다. 그래서 알 수 없다.
알 수 없는 말씀 세계에 따르면 분리된 것이 다시 결합 되는 원리로 역행해서 오시는 분이 계셨고 예수님의 결합 원리에 참여되는 자들, 이용되는 자들이 주되심의 효과로 발생 된다. 아담에서 남자와 여자로 그리고 새 아담으로의 절차, 다시 말하면 아담 – 하와 – 자식 순으로 여자의 후손이 등장하시는 것은 범죄한 아담 세계에서는 하나님의 뜻을 이 절차에 담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순서는 자식 – 하와 – 아담이다. 여자가 먼저 자식을 통해 규정되는 데 그건 그 안에 생명이 없는 상태, 불임, 죽은 자궁, 비어있음에서 자식이 잉태되면서 여자가 규정되고, 남자는 자식 있음이 자식 없음으로 깨닫게 하실 때 그 자식을 통해 자아가 부정되는 자리에서 자기가 없는 자리에서 여자의 죽은 자궁에 합류된다. 그 죽음의 비어있는 공간 속으로 잉태된 생명이 들어와 주실 때 여자는 교회(예수님의 신부)가 된다. 주님은 신부를 보며 자기 자신을 보시고 너는 바로 내가 사랑하는 나였다고 말씀해 주신다. 성도라는 존재는 효과로 발산됨 만으로 충분하다. 주님이 계시매 나는 없어도 되는 존재라는 사실이 얼마 기쁘고 감사한 일인가.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요 14: 20)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