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이 창조되어야 하는 이유가 찢으심의 이유와 만나며 주님 심판의 시간이 태초부터 줄곧 움직여 예수님의 십자가 완성의 자리로 모아졌다. 창조의 완성이 도리어 세상을 인간을 찢을 이유를 함유한 채로 파괴의 모습으로 퍼져나가고 이미 완료된 안식의 의미가 마치 흐르는 듯한 시간으로 시간의 주인공을 향해 퍼져간다. 마치 열쇠를 담은 시간이 메신저처럼 순차적으로 사건을 모으며 자물쇠로 들어가면 마침내 문이 열리고 거기서 하나님의 완성된 창조, 다 이루심이 무엇인지 비로소 밝혀지는 것처럼. 시간은 주인공에게 도달한 이상 이제 시간의 순서적 흐름의 아니라 주인공 한분, 주님 한분, 하나만 있고 시간은 없다.
인간은 시간의 주인공이 자신이기에 시간이 다른 주인을 향해 가고 있다는 것은 알 수 없고 그냥 하루하루 가는 동일한 시간이고 오직 자신에게 의미가 생겼을 때 그 시간에 자체 의미를 부여한다. 그저 이렇게 경건하고 부지런한 삶을 살다가 죽으면 천국가는 시간으로 해석한다. 시간의 개념이 이 세상에 왜 존재해야하는지를 생각해 본적도없지만 생각할 수도 없다. 나를 위한 삶이 알고 보니 내가 사는 삶이 아니고 무언가의 꼭두각시 하수인 노릇을 부지런히 했음이 밝혀질 때까지는 인간은 인간이 무엇인지 그 실체가 무엇인지 알 수 없다.
예수님이 매정하게 가롯유다에게 차라리 태어나지 말았으면 좋을 뻔 했다고 말씀하실 때 누구나 한번쯤은 생각했을 것이다. 그럼 차라리 만들지 마시지...이런 생각은 언제나 자신은 사람이고 자신이 자신을 위해서 스스로 살고 있다고 생각할 때만 가능하다. 하나님에게는 없음이 아니라 텅텅 비어있는 어떤 그릇이 필요하시고 만들어진 물건이 쓰실 분의 용도로 마음껏 사용되다가 버려진 들 할말 없다는 생각을 상상으로라도 하고 있다면 그런 자신이 참으로 자신도 낯설고 이상할 것이다.
이젠 밝혀졌지만 인간의 용도가 바닥없는 쓰레기통이다. 그 안에 일곱 귀신 아닌 열두 군단 귀신이 들어가도 전혀 좁지 않은 바닥없는 통. 생각만 해도 끔찍한데 그 끔찍한 실체가 본인이라고 하면 믿고 싶겠는지. 그저 성경에서만 나오는 캐릭터로 마무리 짓고 싶고 착한 예수라는 분이 다 쫓아내 줘서 해피엔딩으로 끝난 느낌을 간직하고 싶은데 그건 착각도 보통 착각이 아니고 이제 찢어질 근거가 충분하니 그 찢으시는 분에게 집중하라고 하신다.
한때 두때 반때 – 하루 이틀 사흘 반나절 – 다시 살아나신 주님이 십자가를 기준으로 칼처럼 쪼개시고 찢으신 활동성이 성도를 통해 반복적으로 일어난다. 날카로운 십자가로 인간이라는 쓰레기통을 자아를 반으로 쪼개실 때 그 무저갱 속에서 기어 나오는 짐승의 정체를 보게하신다. 이 반 때 동안 성도는 정체가 드러난 악마와 마주하며 예수님만이 보셨던 마귀와 대면해야 하고 예수님이 겪으신 세상에서의 애매한 고난을 몸에 담아야 한다.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시고 심판할 자를 심판하시는 결정권을 가지신 왕이 주 되심의 영광을 이 세상에 남은 증인들을 통해 남아있는 여파처럼, 여진처럼 흘려 보내신다. 예수님의 3일의 완성됨이 기능과 효과로, 찢겨짐이 합당함을 시인하는 자들을 통해 반복적으로 관통될 때마다 부어주신 사랑이 무엇이었는지 대신 치러주심의 은혜가 무엇이었는지 의미가 깊이가 넓이가 변하고 조정된다.
성도는 계속 난감하고 애매한 역할을 담당하며 그 결국을 보여 주실 때 마다 주님의 사랑에 감사하고 즐거워 하며 주님의 결정이 참으로 합당하다는 고백 외에 할 것이 없다. 성도가 겪는 것이 아니고 성도 안을 주의 성전으로 삼으신 주께서 겪으시는 것이고 성도가 싸우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이름이 그 기능이 싸우신다. 주님의 멍에는 쉽고 주님의 짐은 가벼움을(마 11: 30) 만끽하게 하시며 성령의 인도하심이 늘 십자가만 향하게 해주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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