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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생의 밤(욥3;1-4) 191222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9. 12. 23. 13:16
2019-12-22 14:58:27조회 : 38         
   탄생의 밤 191222 이름 : 이근호 (IP:119.18.87.190)   

탄생의 밤(욥기 3:1-4)

음성 동영상 Youtube

 링크 : https://youtu.be/MwWBOPUIZqo, Hit:1

 이근호 19-12-22 15:42 
탄생의 밤 

2019년 12월 22일                본문 말씀: 욥기 3:1-4

(3:1) 그 후에 욥이 입을 열어 자기의 생일을 저주하니라

(3:2) 욥이 말을 내어 가로되

(3:3) 나의 난 날이 멸망하였었더라면, 남아를 배었다 하던 그 밤도 그러하였었더라면,

(3:4) 그 날이 캄캄하였었더라면, 하나님이 위에서 돌아보지 마셨더라면, 빛도 그 날을 비취지 말았었더라면

사람이 아무리 고생해봤자 구원 안됩니다. 그것은 약속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천국은 약속의 세계입니다. 곧 인간이 조성한 세계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이 조성한 세계란 어떤 세계일까요? 그것은 인간들로 하여금 죽음에 근처도 안 가게 한 상태에서 구원되는 세계입니다.

즉 지금 욥의 친구들 눈에 욥의 상황이 참 이상스럽습니다. 기이합니다. 욥의 친구들 입장에서는 곱게 하나님 믿으면 마음씨 고운 하나님께서 곱고 평화로운 생애를 허락하시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욥의 친구들의 주장은 이러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무죄한 이를 심판하지 않으신다. 그리고 비록 죄를 지었더라도 하나님에게 용서를 구하면 용서를 받을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욥에게 당부하기를 하나님에게 불경스러운 저항을 그만두라고 참견합니다. 욥의 친구들의 잘못은 신의 대상화한다는 겁니다. 대상화한다는 것은 참된 신이지 가짜 신인지 자기쪽에서 판단할 수 있기 위해서는 필히 자신과 하나님 사이에 거리나 간격이 확보되어야 한다는 식입니다.

그러나 욥은 그런 거리감이 전혀 있습니다. 욥 자체가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경작지같은 곳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되면 욥은 참으로 자신이 살았는지 아니면 죽었는지 하는 것조차 판단하기 힘들어집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악마에게 허락하여 욥으로 하여금 삶과 죽음의 경계선까지 몰아붙입니다.

이것은 욥을 통해 인간 탄생의 초기화를 보여줍니다. 물건 같으면 재료만 있으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흙에서 만들어질 때는 ‘사건’이 일어나야 합니다. 단순히 인간이 죽어 흙이 되는 것으로 인간의 탄생을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마치 바비 인형의 팔 다리가 떨어져나가면서 그들을 다시 조립하거나 붙이면 그만일 겁니다.

그러나 바비 인형의 내부를 예리한 칼을 잘라내는 것은 다른 이야기입니다. 사람의 인체가 다치거나 부러지면 정형외과에 가면 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인간으로 나타남을 성사시킨 사건을 파헤칠 수는 없습니다. 인간은 단순히 사물덩어리가 아닙니다. 사건이 담겨 있습니다.

피노키오는 목각인형에서 천사가 영혼을 불어넣어 사람이 된 겁니다. 출생의 비밀이 있지요. 마찬가지로 사람에게도 출생한 때는 비밀스러운 사건이 있습니다. 욥이 고집하는 것처럼 단순히 다시 태어난 그 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습니다. 인간 내부에 잠겨 있는 사건은 인간이 몸부림친다고 해석될 것이 아닙니다.

이미 인간은 죄에 담겨 있는 채로 살아갑니다. 그러면서도 본인을 정상적인 인간이라고 간주합니다. 다음과 같은 앙케이트 조사를 통해서 인간이 어떤 식으로 죄에 포위되어 있느냐를 간접적으로 파악할 수가 없습니다. 곧 사람들이 교회 나오는 한계점을 살피는 겁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어떤 행동이 죄가 되는지 궁금합니다.

그러나 욥기를 통해서 아는 것은 ‘내가 어느 편에 속했느냐’로 밝혀집니다. 하나님의 약속과 함께 있으면 의가 되지만 하나님의 약속이 빠진 쪽에서 살면, 거기에서 무얼하든지 죄가 됩니다. 다음의 앙케이트 항목들은 사람들이 약속이 아닌 쪽에 서 있음을 말해줍니다. 앙케이트의 물음은 다음과 같습니다.

(2016년 가톨릭 신문사에서 가톨릭 신자들을 조사한 것)
“당신이 신앙생활을 계속하면서 성당(교회)에 출석하는 이유는?”입니다.
마음의 평화와 위로를 얻기 위해 교회에 나옵니다.(56.8%)
인격 수양과 성숙을 위해 교회에 나옵니다.(29.9%)
하나님의 현존 체험으로 인하여 교회에 나옵니다.(29.9%)
영원한 생명과 구원을 얻기 위해 교회에 나옵니다.(28.2%)
오랜 신앙 습관으로 교회에 나옵니다. (14.9%)
교회의 가르침과 설교 말씀이 좋아서 나옵니다. (14.6%)
가족들이 교회에 나오기를 원해서 교회에 나옵니다. (6.9%)
재물과 건강과 성공을 기대하면서 교회에 나옵니다. (6.6%)
교인들과의 친목화 교제를 위하여 교회에 나옵니다. (6.6%)
교회 안 나오면 죄책감이 들어서 교회에 나옵니다. (4.0%)

이 모든 문항에 해당되지 않는 이유가 뭘까요? 그것은 자기 동일성을 포기하도록 하나님께서 이끄셨기 때문입니다. 즉 죽음이 자신의 동질성이 그만 깨어진 상태를 말합니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는 경험한 동일한 나로 인정됩니다. 하지만 내가 죽어버리면 여기서 지금껏 나의 동질성에 입각한 경험은 사라지고 다른 조치에 취할 타인에 의해 다루어집니다.

이게 죽음 상태입니다. 즉 여전히 나의 동질성을 유지하면서 살아있는 내가, 장래에 더 나은 상황을 기대하면서 교회 다니는 것은 중도 ‘나의 죽음’이 누락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아무리 교회 다녀도 자기 부인(否認)이 성립되지 않는 상태입니다. 여전히 주도권이 본인에게 있는 삶이 됩니다.

자기 동질성이 계속 유지되면, 교회에서 무슨 이야기를 듣고, 무슨 말을 해도 다 나 유리한 깃으로 해석될 수밖에 없습니다.  즉 하나님을 눈으로 보고 귀로 들었던 제자들이 결국 예수님을 버리고 각자 뿔뿔히 헤어지는 경우가 이 시대에 반복적으로 발생한 바가 됩니다. 하나님은 욥을 초기화시킵니다.

다시 죽음으로 돌아간다 할지라도 동질성을 잃고 돌아가야 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욥으로 하여금 ‘자기 동질성’의 극한 지점까지 몰아세웁니다. 오늘 본문에서 욥은 밤을 언급합니다. 자신이 출생했던 그 밤 말입니다. 밤은 욥의 무능력함과 동시에 자신이 주도권을 갖지 않던 때입니다.

이스라엘 하나님의 언약에서 밤은 야곱이 직접 하나님의 천사와 만났던 때요(창 32:21), 국가 이스라엘이 처음 만들어진 때입니다.(출 12:42) 그 밤은 곧 ‘여호와의 밤’입니다. 이 밤은 하나님과 인간이 만나도 기어이 죽지 않는 밤입니다. 하나님에 의해서 다시 살림을 받던 그 밤입니다.

욥에게 일어나는 현상은 인간 출생의 비밀을 간직한 사건이 일어난 경계선을 보여줍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안에 하나님의 비밀이 간직한 자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 19-12-23 07:58 

10강-욥기 3장 1~4절(탄생의 밤) 20191222-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욥기 3장 1~4절입니다. 구약성경 762페이지입니다.

“그 후에 욥이 입을 열어 자기의 생일을 저주하니라, 욥이 말을 내어 가로되, 나의 난 날이 멸망하였었더라면, 남아를 배었다 하던 그 밤도 그러하였었더라면 그 날이 캄캄하였었더라면 하나님이 위에서 돌아보지 마셨더라면 빛도 그 날을 비취지 말았었더라면”

욥이 자기 태어난 생일을 저주하는 대목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귀로만 듣고 예수님 제자들에게는 눈에 보이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아무 소용없다는 사실이 오히려 참 놀랍게 느껴지죠. 우리 평소의 모든 생활은 눈으로 보고 귀로 들으면 얼마든지 믿을 만한 그런 마음이 갖춰진 것처럼 생각하는데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이미 예수님이 오셔서 실험을 다 해봤어요.

제자들에게 보여주고 많은 사람들에게 나타나고 식사도 같이 했지만, 인간들의 삶은 인간 세계에 머물고 하늘나라와 어떤 접촉점도 성립되지 않았다는 것이 십자가를 통해서 확실하게 확인되었습니다. 십자가 사건은 인간들이 하나님을 버렸고 하나님 입장에서는 인간을 떠나 결별한 사건이 십자가 사건이에요. 영원히 인간은 하늘나라에 갈 수 없고 하나님은 인간을 받아들이지 않더라도 상관없는 그런 관계가 되고 말았습니다.

사람들이 저에게 많이 묻습니다. “목사님 죄가 무엇입니까?”라고 물으시는데 저는 이렇게 답변하겠습니다. “어느 편에 서십니까?”라고 묻고 싶어요. 내가 지금 지은 것이 죄인지 아닌지를, 본인이 지은 것이 죄인지 아닌지를 물어서는 안 됩니다. 어떤 분이 그런 질문을 했어요. 제 설교를 들었는지 “성령을 받으면 술을 안 먹습니까?”라고 질문을 하는 거예요. 자기는 한 달에 한 번밖에 안 마시는데 성령 받고 난 뒤에 술 끊어야 하는지 질문하셨어요.

그분은 2년마다 한 번씩 질문하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술 먹으나 안 먹으나 죄라고 답변해 드렸습니다. 성령을 받고 내가 어떻게 되느냐는 없어요. 내가 어느 쪽에 속했는가를 확인해 주는 게 성령입니다. 어느 쪽에 속했는가. 이것을 신약 적으로 설명하게 되면 나는 약속이 성취된 쪽으로 속하고 있느냐 아니면 약속이 없는 쪽에 속하고 있는가를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걸 아는 다른 쉬운 방법은 부부와의 대화나, 누구와 이야기 할 때 복음이 나오는 대화인지 복음이 없는 대화인지를 확인해 보면 되죠. 전광훈 목사가 뭔가를 외칠 때 복음이 나오는지를 보세요. 그리고 그걸 반대하면서 전광훈은 돈밖에 모른다고 KBS방송국에서 방송을 했는데 그 방송국에서 하는 비판 속에 복음이 들어있는지 한번 들어보세요. MBC에서 복음이 나오든가요? MBC 복음방송입니까? JTBC에서 복음이 나오든가요? 이 세상에서 학교에서 복음이 나오든가요? 기업에서 나오든가요? 군대에서 복음이 나오든가요? 아니면 교회에서 복음 나오든가요? 안 나오죠.

왜 앉아 있는지 모르겠어요. 그 교회에. 복음도 안 나오는데 도대체 무슨 시도를 하려고 무슨 의도로 앉아 있습니까? 결국은 뭐냐면 나는 착하다는 거예요. 세상은 악해도 나는 착하다는 거예요. 이건 그 자체가 죄예요. 죄라고 하는 것은 나는 착하다 안 착하다가 아니라 지금 내 옆에 무엇이 함께 있느냐가 중요한 겁니다. 내가 홀로 얼마나 위대하냐 대단하냐 순결하냐가 문제가 아니에요. 욥기 3장을 시작하면서 끝까지 욥의 세 명의 친구들이 주장하는 것이 딱 둘로 나뉘었습니다. 뭐냐 하면 ‘하나님은 무죄한 자를 심판하지 않는다’라는 거.

욥의 친구들의 주장입니다. 무죄한 자를 심판해버리면 하나님이 모순된다는 거예요. 하나님은 의로운 분이기 때문에 무죄한 자를 심판하지 않는다는 것이 하나님이라는 거예요. 욥의 친구들의 사고방식은 여전히 선악적 사고방식 안에서 빠져나오질 못합니다. 선악적 자체가 죄고 그건 그와 함께 있는 것은 생명나무 없는 곳, 그곳에 그가 앉아 있는 거예요. 생명나무가 없는 곳에 앉아 있으니 말하는 모든 말속에 생명나무 요소가 안 나오죠. 복음이 안 나오는 거예요.

‘나 훌륭합니다. 참 당신 훌륭합니다. 귀합니다. 참 착합니다’라는 것은, ①내가 들어가는 모든 것은 복음이 아니에요. 그것 듣고 되게 좋아하지 마세요. “당신은 참 대단합니다”라고 할 때 “그거 복음 아닌데요”라고 왜 한 마디 쏘아붙이지 못합니까. 내가 훌륭하다는 것은 복음이 아니에요. “당신 구원받겠습니다”라는 것도 복음이 아니에요. 내가 구원받는 것이 복음이 아니에요.

②복음 이야기는 예수님 이야기지 내 이야기가 아닌 거예요. “당신은 저주받습니다”라고 하면 “예~저주 받습니다~예~예”라고 하면 됩니다. 내 이야기 들어가는 것은 결정적 기준이 아니기 때문에 뭐라고 이야기해도 괜찮습니다. 욥이나 친구들은 아직 구약적 인물이기 때문에 신약적 사실을 모르죠. 욥의 친구가 첫 번째 말한 것은 ‘무죄한 자를 하나님이 심판하지 않는다’이고 두 번째 주장이 뭐냐 하면 ‘용서를 구하면 용서받을 수 있다’입니다. 욥에게 “욥아, 네 죄를 인정하라”라고 친구들이 이렇게 들이미는 거예요.

그 친구들의 주장에 대해서 욥이 일방적으로 거부하진 않습니다. 욥이 이야기하는 딱 하나입니다. “너희들이 내 자리 앉아 봤어? 네가 눈으로 보고 네가 귀로 듣고 네가 경험한 하나님과 지금 내가 경험하는 하나님과 경험상 다르다”라고 하는 겁니다. 누구를 보고 이야기하는 것은 이것은 하나의 대상이 되기 때문에 내가 관찰하는 대상이 되는 거예요. 판단의 대상이 되는 거예요.

그러나 욥은 지금 자기가 자기를 판단해야 하는데 판단할 수 있으려면 건강한 내 모습과 내가 같이 공존하면 건강한 내 모습은 정상이고 아픈 것은 비정상이라고 할 수 있는데 지금 자기 몸이 전부 다 같이 망가지고 있는 거예요. 지금 얼마나 망가지는지 1절부터 보면 “그 후에 욥이 입을 열어 자기 생일을 저주하니라”라고 되어 있는데 자기 생일을 저주하는 것이 욥의 평소 취미였고 본심이 아니었어요.

다시 말해서 욥은 지금 죽음이 무엇이라는 것을 맛보고 있습니다. 어렵게 말씀드리면 ③죽음이라는 것은 자기 동질성이 깨지는 것입니다. 해체되는 것이 죽음이에요. ‘어제와 오늘은 동일하다. 내일과 오늘은 동일할 거다. 밥을 먹는 나와 잠을 자는 나는 동일한 나다. 길을 걷는 나와 차를 타는 나는 동일하다’라고 할 때 우리는 죽은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거예요.

그런데 죽게 되면 살아있어서 남의 장례식을 구경하는 나와 내가 죽어서 내가 관에 묻힌 내가 동일하다고 둘 다 경험할 수 없다는 거예요. 경험이라는 것은 동일한 내가 늘 이어져야 경험이 되는데 나의 죽음을 내가 경험할 수 없잖아요. 경험한다는 것은 ‘그래서 나는 똑같아. 똑같아. 내가 만약 미국 여행 가면 미국에 여행가는 나나 한국에 있는 나나 똑같아. 똑같아’라고 늘 하다가 딱 죽는 순간이 되면 내 죽음을 경험하는 순간 지금까지 있던 그 경험과 내가 죽는 쌩뚱맞는 경험 사이에는 이건 연결점이 없는 거예요. 끊어져 버린 거예요. 나의 동질성이 끊어진 것을 죽음이라고 하는 겁니다.

만약에 그래서 우리가 예수를 믿을 때 내가 죽고 믿어야 한다고 하면 정말 예수 믿을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만약에 동질성을 믿으면서 예수 믿으면 ‘나는 예수를 몰랐다. 어느 교회에 갔는데 복음 전하고 십자가도 있더라. 그 순간 십자가 믿는 내 모습이나 십자가 믿기 전에 내 모습은 동일하다’라고 하면 그 사람은 전혀 죽지 않은 사람이에요. 전혀 안 죽은 사람입니다.

그러면 나는 죽고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산다는 말을 100번 1000번 외쳐도 그건 자기와 상관없는 말이 되고 말아요. 수련회에서 강의할 것을 미리 말해도 될까 싶지만, 특별히 말씀드리면 이 금식이라는 것이 뭐냐 하면 밥을 안 먹는 거잖아요. 사실은 밥을 안 먹는 것이 아니고 입을 닫는 거예요. 말을 안 하는 거예요. 살아있다는 것은 어떤 경우에 살아있느냐 하면 내가 말할 상대가 있을 때 살아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부부가 같이 살다 보면 나이 연세 많아 남편이 먼저 죽고 나면 남아 있는 할머니는 살아도 산 것이 아니에요. 날마다 잔소리할 대상이 사라져버렸어요. 사람이 살아있다는 것을 뭐로 아느냐 하면 벽을 보고 살아있다고 하지 않습니다. 누군가 이야기할 대화 상대가 있을 때 내가 살아있다는 것을 느끼거든요. 그래서 사람들은 자기가 안 죽기 위해서 대화 상대를 얻는 방법중 하나로 개나 고양이를 키웁니다.

개나 고양이를 키워서 개나 고양이가 귀여운 것이 아니고 내가 살아있음을 부지런히 개와 고양이와 대화하면서 확인하고 싶어서 개나 고양이를 키우는 겁니다. 어떤 집에 다섯 마리 키운다면 그만큼 다섯 마리와 이야기하고 싶어요. 한 마리로는 성이 안차고. 그래서 부부 사이에 대화 끊기 거든 개나 고양이를 키우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내가 말을 하고 말을 하는 순간에 나는 말하는 나와 말의 내용과 동일하게 유지하며 살아 있기 때문에.

인간은 말을 하면서 대화하면서 언어를 사용하면서 살아있지 언어 없는 인간은 죽은 인간이죠. 그래서 금식이라는 것은 ‘하나님 저 죽었습니다. 저 말 안 하고 안 나대겠습니다. 주님이 알아서 하세요’라는 겁니다. 그래서 에스더는 금식하는 겁니다. 스스로 자기와 자기 사이를 자기 행동과 자기 기대 사이를 끊어버리는 거예요. 이게 금식이에요.

그래서 신약에서는 금식을 언제 하느냐 하면 주님이 없을 때 금식해요. 이 말이 뭐냐 하면 예수님이 없으면 너는 산자가 아니고 살아도 강아지 열 마리랑 놀아도 너는 죽은 자라는 말입니다. “어떻게 내가 없는데 네가 살 생각을 다 하냐? 어떻게 머리가 그렇게 돌아가느냐?”라고 하시는 거죠. 어떻게 옆에 예수님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살았다고 우길 수가 있느냐는 겁니다. “너는 나와 대화하고 대화하는 의미에서 비로소 살아있는 것으로 존재하는 거야”라고 하시는 거예요. 성령께서 늘 그런 것을 가르치거든요.

④무엇이 죄가 아니냐 하면 바로 약속과 함께 있는 것이 죄가 아니고 약속 편에 있지 않으면 다 죄가 되는 거예요. ‘나는 세상 사람들이랑 노는 것이 재밌더라’라고 하면 그게 뭐예요. 세상 사람들이 나를 살아있다고 증명해주니까 그게 즐겁다는 거예요. 그러면 “그게 뭐가 죄입니까?”라고 하시는데 약속이 빠졌잖아요. 약속. 대화할 주님이 빠졌잖아요.

저에게 그런 질문 하시는 분들이 있어요. “목사님 복음 알고 난 뒤에 기도가 끊어졌습니다”라고 하시는데 제가 기도 끊으라고 했습니까? 왜 기도가 끊어졌느냐 하면 평소에 나 살아있음의 확인을 사람과 이야기하면서 ‘나 어때? 나 어때?’라는 질문의 바닥에 어떤 것이 있습니까? ‘나 어때? 나 괜찮지?’라는 것을 확인받기 위해서 상대방을 들볶듯이 대화를 한 거예요.

“당신은 밥 먹으면서 왜 말을 못 하나?”라는 것은 반찬이 맛이 있는지 맛이 없는지 이야기를 하라는 말이죠. 그러면 밥하는 사람으로서는 그 대답으로 자신이 살아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죠. 밥을 먹는데 “밥 먹자”라고 하고 대화가 끊겼어요. 그러면 이게 부부인가 싶고 왜 사나 싶고 그러겠죠. 대화가 끊어졌다는 말은 주님과 함께 천국에 사는 방식을 잃어버렸다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지금 강제로 욥은 초기화가 됩니다. 컴퓨터에 초기 설정같이 초기화시키는 거예요. 어려우면 바비인형을 칼로 잘라 보세요. 바비인형이 팔다리가 부러지면 그냥 갔다가 붙이면 되죠. 그러나 바비인형의 배을 칼로 잘라서 솜을 들어내는 것과 그냥 외형적으로 보이는 팔다리 고치는 것과는 달라요. 인간이 팔다리 부러져서 정형외과 가는 것과 교회 가는 것과 달라요.

정형외과는 팔다리 부러진 거 고치고 주사 맞고 접합하고 깁스하면 돼요. 그러나 ⑤복음 앞에 선다는 것은 바비인형의 배를 칼로 도리듯 인간의 내부를 도려내는 겁니다. 인간은 사건으로 만들어지기 때문에 인간의 초기로 돌아간다는 것은 그때 그 사건으로 되돌아가는 것을 말하는 거예요. 그 사건으로. 이것을 누가 싫어하느냐 하면 이것을 악마가 싫어해서 계속 그걸 저항하는 겁니다. 욥의 친구들은 뭐냐 하면 인간은 인간이니까 이제부터 바르게 살면 된다는 거고 지금 내가 바르게 살면 미래에 천국 가고, 바르게 못 살면 지옥 가고 모든 게 내가 하기 나름이라는 것이 욥의 친구들 생각이에요.

그러나 하나님께서 욥에게 오늘 본문에 보면 자기가 자기 생일을 저주한다는 말이거든요. ⑥자기를 초기화시키게 되면 도대체 인간이 인간일 때 재료가 어떤 것이냐를 묻는 것이 아니고 무슨 사건이 있었는가를 묻는 겁니다. 이게 참 어려운 이야기죠. 아담이 흙에서 아담 될 때 무슨 사건이 일어났는가를 묻는 거예요. 다시 과거로 돌아갈 수 없는 입장 아닙니까. 과거로 돌아갈 수 없는데 하나님께서 욥을 통해서 “보자~”라고 하면서 과거를 해쳐 보는 거예요. 출생의 비밀이 뭐냐는 거죠.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피노키오가 이웃 사람들 보기엔 인간이에요. 그러나 피노키오가 처음 출생했을 때 피노키오는 출생의 비밀에서 결코 사람이 아니었고 목각 인형이었다는 것을 피노키오 아버지만 알아요. 직업이 목수인데 자식이 없어요. 자식 대용으로 인형을 만들어 놓고 자기에게 자식 없음을 슬퍼하고 있는데 그 착한 목수의 마음을 알고 천사가 날아가서 뾰로롱 하니까 목각 인형이 산 사람 되었다는 것이 피노키오 출생의 비밀 아닙니까.

그처럼 사건이 일어나야 해요. 인간의 동질성은 백날 해봐야 자기 동질성밖에 이어가질 못하는데 여기에 ⑦이 세상에 없는 다른 타자성, 타인이 개입했다는 사건의 흔적을 찾게 되어야 우리가 거듭날 수 있습니다. 처음에 초기화된 우리가 인간이 인간일 때 초기에 있던 그 사건이 반복해서 내 안에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발견할 때 그게 성도의 입장인 거예요. 그런 사건이 일어나게 되면 지금 내가 여기 있는 내가 정상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가 강제적으로라도 다 밝혀내야 해요.

정말 면도칼로 내 안의 내부를 째보고 싶어요. 내 안에 도대체 무슨 괴물이 들었는지. 그게 어떤 괴물인지 어떤 괴물이 들어있는지 제가 이 시간에 여러분에게 알려 드리겠습니다. 우리 안에 어떤 괴물이 들어있는지 지금부터 앙케이트 조사 들어갑니다. 다음 중 여러분이 해당되는 부분에 체크 해주세요. 2016년 가톨릭 신문사에서 가톨릭 신자들을 조사한 것인데

“당신이 신앙생활을 계속하면서 성당(교회)에 출석하는 이유는?”입니다.

마음의 평화와 위로를 얻기 위해 교회에 나옵니다.(56.8%)
인격 수양과 성숙을 위해 교회에 나옵니다.(29.9%)
하나님의 현존 체험으로 인하여 교회에 나옵니다.(29.9%)
영원한 생명과 구원을 얻기 위해 교회에 나옵니다.(28.2%)
오랜 신앙 습관으로 교회에 나옵니다. (14.9%)
교회의 가르침과 설교 말씀이 좋아서 나옵니다. (14.6%)
가족들이 교회에 나오기를 원해서 교회에 나옵니다. (6.9%)
재물과 건강과 성공을 기대하면서 교회에 나옵니다. (6.6%)
교인들과의 친목화 교제를 위하여 교회에 나옵니다. (6.6%)
교회 안 나오면 죄책감이 들어서 교회에 나옵니다. (4.0%)

여러분은 이 중에서 무엇 때문에 오십니까? 이게 다가 아니라면 ⑧여러분들은 왜 교회 나오시고 왜 하나님 찾습니까? 바로 거기에 대한 정답을 욥이 답변해 줍니다. 욥은 찾는 게 아니에요. 찾게 되면 집에 있는 나와 교회 있는 내가 동질성을 유지하기 때문에 이거는 가짜입니다. 내가 잘 되기 위해서, 천국 가기 위해서, 구원받기 위해서, 인격 성숙을 위해서, 하나님이 내게 나타나심을 위해서, 그리고 하나님이 내게 나타나심은 욥 친구들의 체험입니다. 이건 욥이 아니고 욥의 친구들이 체험한 거예요. 나중에 나와요. 하나님의 신이 자기에게 와서 계시를 줬다는 게 있어요. 계속해보면 오랜 신앙 습관, 가족들이 원해서, 가족의 화평을 위해서, 재물 건강 성공에 대해서 받아놓고 가만있으니 미안해서 감사하려고, 서로 친하게 지내기 위해서, 교회 안 가면 죄책감 들어서 그렇다는 거예요.

참고로 제가 전에 있던 교회는 촌에 있는 교회입니다. 촌 교회에 교인들이 왜 오느냐 하면 집안 식구들이 다 모였기 때문에 가야 해요. 농사 지을 때 혼자 못 짓잖아요. 협동해야지 않습니까. 협동하기 때문에 촌에서 교회 간다는 것은 교회 옮긴다는 게 힘들어요. 이미 아는 사이인데요. 놀러 가면 같이 돈 내고 놀러 가야죠. 빠질 수가 없어요.

아침마다 늘 얼굴 마주하는 사람인데요. “안녕하세요, 이단님”이라고 할 수 없지 않습니까. “그 교회 왜 나왔습니까?” “이단이라서 나왔습니다”라고 해놓고 만나면 “요번에 일하는데 같이 품앗이할까요? 이단님”이라고 하면 말이 안 되잖아요. 이단이라고 못 붙이잖아요. 안면 있어서 그렇게 못한다고요. 인간은.

그러니까 인간이라는 것이 교회 오고 예수 믿는다는 것은 결국 뭐냐 하면 결국 동질성을 유지하기 때문에 욥의 친구처럼 되어요. 욥의 친구들이 있는 곳은 지옥 가는 쪽이에요. 그러나 욥은 천국 가는 쪽입니다. 이건 남들이 문제가 아니고 남 핑계 대고 무엇 때문에 그렇다 할 것이 아니고 내 자체가 주님 말씀의 경작지가 되어야 해요. 하나님은 직접 나에게 쳐들어 와서 나의 동질성을 주님이라는 이타성이 낯선 분이 와서 나를 박살을 내야 하거든요. 내 안에서.

따라서 교회 왜 갑니까? 성당 왜 갑니까? 정답은 내가 안 가고 싶어도 ⑧주께서 그렇게 하게 만들었다는 것이 정답이에요. 왜 천국 갑니까? 주께서 이렇게 보내신다는 것이 정답이에요. 거기서 내가 들어가면 안 돼요. 내가 기도해서 들어간다고 하면 안 된다는 말이죠. 당신 아내는 왜 교회 안 나옵니까? 주께서 못 나오게 하시네요. 교회 나오게 하려고 악을 써도 못 나와요.

딱 나오려고 하니까 친구 만나러 가버리고 하여튼 모든 조정 자체가 복음이 없는 곳, 복음이 안 들리는 곳, 그곳에 머물러 있으라고 주께서 간절하게 간절하게 부탁해서 그들은 지옥 가는 겁니다. 본인이 지옥 가고 싶어서 가는 것이 아니고. 말리고 있어요. 얼마나 이것이 감사할 일입니까. “복음 듣고 안 듣고 내 마음대로다. 교회 가고 안 가고 내 마음대로다”라고 하는데 거기에 내 마음 대로가 들어갔다는 말은 내 동질성 나는 유지하겠다는 말이고 나는 안 죽었다는 말과 똑같은 거예요.

지금 욥도 본인이 무슨 경험을 하느냐 하면 죽음과 삶 사이에 경계선까지 지금 주님께서 몰아넣어 버렸어요. 다시 말해서 악마가 그렇게 했거든요. 하나님의 허락하에 악마가 그렇게 했단 말이죠. 그러면 욥은 일종의 모험가예요. 인간의 시초성, 초기성, 인간이 초기될 때 ⑨인간은 어디서부터 나오는가에 대한 대답은 ‘없는 데서 만들어졌다’라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죽음에서 만들어졌다’가 답이에요.

이게 어디에서 나오느냐 하면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이 그걸 말해주는 겁니다. 없는 데서 만들어졌다면 주님께서는 인간을 지옥에 안 보내야 합니다. 그런데 인간을 지옥 보내는 거 보니까 없는 데서 만들어진 것이 인간이 아니고 죽은 데서 살아나야 부활 되어야 그게 인간인 겁니다. 그게 천국 가는 인간이에요. 하나님이 원하는 인간은 죽음에서 죽은 자인데 주님의 영으로 되살아나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⑩그 부활의 영을 두 자로 성령이라고 합니다. 성령을 받아야 부활의 세계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 작업이 한 참 이루어지는 사람, 이루어지는데 내가 원해서도 아니고 그런 게 내게 유리해서도 아니에요. 그냥 못살게 굴어요. 그냥 가만히 두질 않아요. 내버려 두질 않아요. 그렇다면 교회 목사 설교자가 해야 할 일은 뭡니까? 딱 하나밖에 없는 거예요.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는 말만 쏟아 내야 합니다.

자칫하면 이걸 알아들어서 올 수가 있어요. 그러면 가짜가 천국 갈 수도 없는 사람이 천국 간다고 착각하게 만드는 그 책임을 목사가 지면 안 되잖아요. 그냥 말하면 안 되고 발을 동동 구르면서 “제발 좀 오지 마시라고요. 여기는 함부로 오는 곳이 아니라고요. 여러분의 자존심, 여러분의 체면을 위해서라면 올 곳이 못 된다고요”라고 말해야 해요. 세상에서 살던 식으로 ‘나 괜찮지. 나 어때. 나 잘났지’라는 생각으로 말 들으려면 오지 마세요. 와서는 안 됩니다. 오지 말라고 안 해도 알아서 다 나가니까 얼마나 감사한지요.

여전히 동질성, 예수 모르는 ‘나’가 예수 믿고 난 ‘나’로 구원받는다는 식으로 계속 ‘나’가 살아있다면 그건 주인이 바뀐 거예요. 내가 여전히 내 주인인 거예요. 나 천국 가는 이익을 얻기 위해 교회 온 것밖에 안 됩니다. 그것을 설교자가, 지금 본문에서는 욥이 자기 스스로 괴로워하면서 그걸 밖으로 내뱉고 있습니다.

그 뒤에 나오는 말들은 뭐냐 하면 “그 날이 캄캄하였었더라면, 하나님이 위에서 돌아보지 마셨더라면, 빛도 그 날을 비취지 말았었더라면”이라고 나오는데 그걸 한 마디로 축약해 버리면 이 세상에 어떠한 자연 변화도 약속으로(을?)

 만들어 낼 수 없다는 겁니다. 약속은 예수님이 가져다 줘야 하는 거고 복음은 예수님이 가져다 줘야하는 것이지 인간이 어떤 고난과 아픔과 고생을 아무리 결집해 봐야 그건 구원받는 근거가 될 수 없습니다.

지난 수요일에 말씀드린 걸 잠시 이야기해 볼까요? 송판을 가지고 송편이라고 열 번 이상을 이야기해서 죄송스러운데 송판이 두 짝이 있는데 사람들은 자기 고상함과 품위 있음과 고결함과 우아함에다가 거기에 뿌리를 박아요. 교회는 왜 나오느냐 하면 좀 우아하게 살고 싶고, 고상하게 살고 싶고, 순결한 인간이 되고 싶어서죠.

그러나 ⑪진짜 뿌리는 뭐냐 하면 예수님 십자가 피에 뿌리를 박아야 하는데 이건 고상하고 괜찮고 품위 있는 곳에 뿌리를 박다 보니까 나중에 마지막 심판 때, 모래 위에 집을 지은 것처럼 싹 쓸려서 다 날아가 버리는 거예요. 뿌리를 밑에까지 내리지를 못 했어요. 십자가 피에서 시작해야 할 것을 가지고 괜찮은 나부터 출발한 거예요. 교회 안 나오다가 교회 나온 나.

거기에 뿌리를 박은 들 무슨 소용이 있어요. 그런 하나님은 욥의 시작을 어떻게 합니까? 오늘 본문 3절에 나옵니다. “남아를 배었다 하던 그 밤”이라고. 이 밤으로부터 해서 욥이 이스라엘의 역사와 연결됩니다. 하나님의 언약과 연결된 고리가 뭐냐 하면 욥이 태어났던 밤이에요. 왜? 이스라엘이 밤에 만들어진 민족이기 때문에.

출애굽기 12장에 보면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올 때 밝은 대낮에 나오지 않았습니다. 밤에 나왔어요. 왜 밤에 나오느냐. 그것은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가진 야곱이 언제 천사를 만났느냐 하면 얍복 강에서 밤에 천사를 만났거든요. 그때 이름이 바뀝니다. 출애굽기 12장 42절에 보면 “이 밤은 그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심을 인하여 여호와 앞에 지킬 것이니 이는 여호와의 밤이라”라고 바로 출애굽기 12장 42절에 ⑫“여호와의 밤”이라는 죽음의 세계가 이 역사 속에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으로 침투할 때 여기서 두 패가 나눠지죠.

하나님의 약속이 없는 쪽과 약속이 생긴 쪽, 새로운 약속이 있는 쪽이 병행해서 중첩해서 이 세상에 등장했습니다. 오늘날 십자가를 통해서 십자가의 밤, 십자가의 약속이 있는 그 세계와 십자가 없는 복음이 없는 세계가 둘이 병행해 있습니다. 우리가 어느 쪽에 속했는지 그것은 주께서 우리를 어느 쪽에 속하고 있음을 확인해 주는 그런 사태가 우리 일생 가운데 계속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께서 하시던 그 모든 것이 우리 시초화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다 보여주시니 감사합니다. 주께서 죽으실 때, 그것이 바로 생명이 죽음 안에 있는 것을 모르고 마냥 살면 그것이 생명인 줄 알고 천국인 줄 알았습니다. 이제는 죽고 약속과 함께 더불어 사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