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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바스의 등장(욥4;1-7) 200105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20. 1. 6. 17:12


2020-01-05 15:02:50조회 : 39         
   엘리바스의 등장 200105 이름 : 이근호 (IP:119.18.87.190)   

엘리바스의 등장(욥기 4:1-7)

음성       동영상 . 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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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호 20-01-05 15:50 
엘리바스의 등장

2020년 1월 5일             본문 말씀: 욥기 4:1-7

(4:1) 데만 사람 엘리바스가 대답하여 가로되

(4:2) 누가 네게 말하면 네가 염증이 나겠느냐 날지라도 누가 참고 말하지 아니하겠느냐

(4:3) 전에 네가 여러 사람을 교훈하였고 손이 늘어진 자면 강하게 하였고

(4:4) 넘어져 가는 자를 말로 붙들어 주었고 무릎이 약한 자를 강하게 하였거늘

(4:5) 이제 이 일이 네게 임하매 네가 답답하여 하고 이 일이 네게 당하매 네가 놀라는구나

(4:6) 네 의뢰가 경외함에 있지 아니하냐 네 소망이 네 행위를 완전히 함에 있지 아니하냐

(4:7) 생각하여 보라 죄없이 망한 자가 누구인가 정직한 자의 끊어짐이 어디 있는가

친구 사이에는 말하는 사이입니다. 하지만 그 말의 최종 의미는 말하는 본인의 가치를 더높이는 식으로 소급됩니다. 누구를 동정하고 위로한다는 것은, ‘결코 나는 저 사람과 같이 되지 않으련다!’는 집념의 표현입니다. 동정이나 위로라는 것은 자신과 상대방에 어떤 격차가 발생되어 있음을 인정하기에 생기는 감정입니다.

즉 ‘나는 위로해주는 자’, 혹은 ‘나는 동정해주는 자’가 되고 상대방은 ‘나의 위로나 동정을 군소리 말고 고맙게 여겨 마땅한 자’가 됩니다. 이것은 상대적 우월감을 나에게 가져다 줍니다. 이처럼 이 세상은 말을 통해서 쉴새없이 비교와 견줌이 발생됩니다. 사람은 자신의 몸 편하는 것이 최고입니다.

따라서 몸을 불편한 쪽으로 옮겨갈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데 엘리바스 앞에 지금 욥이 몸이 불편한 가운데 있습니다. 이는 곧 상대적으로 자신이 위로해 줄 입장에 있음을 감지합니다. 즉 이미 자신은 욥에게 승리하고 있는 입장인 것은 기정사실처럼 보입니다. 여기서 오는 우월감을 섞어서 엘리바스는 욥에 다가가서 말을 건넵니다.

그런데 욥기 처음에 보면, 욥에게 일어나는 일들은 모두 하늘나라에게 시작된 ‘내기’가 땅까지 파급된 겁니다. 욥 빼놓고서는 이 세상 어느 누구도 도저히 욥의 입장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생각에는 승산 있는 내기가 되는 겁니다. 상대를 알아야 이길 수 있는 가능성이 있지만 전혀 욥의 친구들은 욥에 대해서 알지 못하는 그런 처지를 의도적으로 하나님께서 조성해놓으셨습니다.

이렇게 되면 자연스럽게 욥의 친구들은 악마편이 됩니다. 하나님과 악마의 내기가 지상에서 욥을 중심으로 확대를 보이고 있습니다. 사람은, 자신의 죽음도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지만 그것보다 더 받아들이기 힘든 것은 자신이 ‘패배자’가 되었다는 인식입니다. 패배자가 되면 자신은 어떻게 살아도 무의미해져 버리는 겁니다.

이런 결과는 차마 인간으로서 용납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엘리바스의 입장에서 볼 때, 욥은 누가봐도 당연히 인생 패배자입니다. 한창 승리로서 살아가던 욥이 패배자로 확정된 처지를 보고 엘리바스가 위로해 주려고 욥에게 다가간 겁니다. 이는 곧 자신은 그 어떤 경우라도 ‘패배자’되고 싶은 마음이 추호도 없음을 간직하면서 말입니다.

예를 들면, 지금 ‘욥의 처지는 참으로 정당하고, 정당하기에 그런 고생을 한다’는 생각은 엘리바스 안에서 조금도 없습니다. 엘리바스가 알고 있는 원칙에 의하면 욥의 고난 이유는 단 하나로 요지부동적으로 마땅하다고 봅니다. 그것이 바로 4:7에 나오는 “생각하여 보라 죄없이 망한 자가 누구인가 정직한 자의 끊어짐이 어디 있는가”라는 충고입니다.

엘리바스는 욥에게 되레 다꾸칩니다. 욥의 생각이 그동안 인간들이 상식적으로 알던 주장에서 벗어났다는 겁니다. 그 자체가 잘못된 시도라고 엘리바스는 주장하고 싶어합니다. 뭐라도 하나, 왜 욥이 정당치 못하는지 그 증거를 찾아내므로서, 지금 본인이 옳다고 여기는 사상이 상대적으로 완벽함을 증명하고 싶어합니다.

엘리바스는, 본인이 욥이 현재 갖고 있는 심정을 충분히 이미 알고 있다는 식으로 조심스럽게 욥에게 말을 건넵니다. “죄가 있다면 이런 대우를 받을 리가 없다”는 겁니다. 이런 발언을 내놓은 엘리바스는, 본인이 결코 욥을 함부로 평가하고 있는 것이 아님을 미리 알려줍니다. 즉 “우리가 아는 욥은 훌륭했음”

이는 곧 평소에 엘리바스는 ‘욥은 훌륭한 자’라는 사실을 인정하시는 식으로 친구 사이가 된 겁니다. 친구를 평하기 위함이 아니라 엘리바스는 자기 자신에게 하자가 없음을 욥과의 친국관계에서 정립하고자 한 겁니다. 그런데 바로 이런 짓이 마귀짓이 되는 겁니다. 하늘나라에게 시작된 내기가 땅에서까지 확대되면서 이 세상에 깔려있는 평소의 악마적 경향성이 욥을 중심으로 자기 본색을 감출 수 없게 된 겁니다.

모든 인류에게는 어떤 공통점이 있다고 사람들은 말합니다. 즉 인간이라면 그 어느 누구도 부정 못할 진리성을 뽑아낼 수 있는 능력이 인간의 이성(理性)에게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뽑아낸 논리가 이것입니다. “인간이 곧 신(神)이다” 즉 인간은 선을 판단하고 띠로 뽑을 능력이 있다는 겁니다.

따라서 평화로운 세계를 건설하는 방법은, 신이 인간 속에 심어줄 것, 곧 최고의 도덕법을 소통의 장으로 삼는 것이다. 그 도덕법이란 바로 “나에게 해악이 되는 그 일을 타인에게 행하지 말라”입니다. 공통소스를 뽑아내면 그 누구도 이 절대 이성적 진리에 시비걸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바로 이러한 생각이 ‘발각된 악마의 생각’입니다. 온갖 좋은 생각들을 아무리 끌어모아봤자 인간은 욥을 중심으로 한 ‘하나님 내기’ 사실을 눈치채지 못합니다. 즉 자신들을 신으로 간주하기에 이런 발상 자체로 신의 내기에 말려들었다는 생각을 감히 하지 못하고 있는 겁니다.

그렇다면 욥의 생각은 무엇일까요? 열왕기하 2:11-12에 보면, “두 사람이 행하며 말하더니 홀연히 불수레와 불말들이 두 사람을 격하고 엘리야가 회리바람을 타고 승천하더라 엘리사가 보고 소리 지르되 내 아버지여 내 아버지여 이스라엘의 병거와 그 마병이여 하더니 다시 보이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엘리사가 자기의 옷을 잡아 둘에 찢고”

이 대목에서 ‘승천’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엘리야는 승천하고 있습니다. 결코 이 세상 인간들과 견주거나 비교하지 않습니다. 견줄 대상도 아니라는 겁니다. 이처럼 이스라엘 역사로보면 분명하게 이 세상과 ‘하늘의 성전’과 구분됩니다. 하지만 욥은 이스라엘 역사 이전이라서 하늘의 성전과 관련된 인물인지가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욥에게는 이러한 징후가 덮치고 있습니다. 욥은 결코 동정받을 처지가 아닙니다. 또한 동정해 달라고 요구하지도 않습니다. 그것은 알 수 없는 분과의 관계 때문입니다. 바로 이런 욥이 처한 상황으로 인하여 이 세상은 전혀 하나님의 의중에 무관한 사상이 지배하고 있음이 밝혀집니다.

승리자와 패배자 의식이 살아 있는 한 그 어떤 우아한 도덕과 윤리를 제시해도 그것은 악마의 소리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주께서 쓰시는대로 쓰되 그것이 나의 가치로 남겨지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 20-01-05 20:41 
12강-욥기 4장 1~7절(엘리바스의 등장) 20200105-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욥기 4장 1~7절입니다. 구약성경 764페이지입니다.

“데만 사람 엘리바스가 대답하여 가로되, 누가 네게 말하면 네가 염증이 나겠느냐
 날지라도 누가 참고 말하지 아니하겠느냐, 전에 네가 여러 사람을 교훈하였고 손이
 늘어진 자면 강하게 하였고, 넘어져 가는 자를 말로 붙들어 주었고 무릎이 약한 자를 강하게 하였거늘, 이제 이 일이 네게 임하매 네가 답답하여 하고 이 일이 네게
 당하매 네가 놀라는구나, 네 의뢰가 경외함에 있지 아니하냐 네 소망이 네 행위를 완전히 함에 있지 아니하냐, 생각하여 보라 죄없이 망한 자가 누구인가 정직한 자
 의 끊어짐이 어디 있는가”

욥의 친구들이 이제 등장합니다. 욥의 친구들에 배후에는 사탄 악마가 있다는 것을 우리가 잊으면 안 됩니다. 시중에 돌아다니는 악마, 영화나 드라마에 나오는 악마는 인간을 해롭게 하지요. 그러나 성경에 나오는 악마는 인격적으로 완성된 자입니다. 인격적으로 고매하고 존경받고 항상 옳은 이야기만 합니다.

예를 들면 성철 스님, 김수환 추기경, 그런 것이 바로 악마의 대변자로 보시면 됩니다. 기독교는 또 말하면 무슨 말썽이 있을까 싶어서 좀 그런데 한경직 목사, 주기철 목사, 이렇게 사람들에게 존경받는 목사, 사랑의 교회에 얼마 전 죽었던 그 사람도 마찬가지죠. 사람들에게 존경받는다는 것은 사람들과 공통성을 계속해서 그동안 보여줬다는 겁니다.

‘나는 저 사람처럼 되고 싶어’ 내가 지금 소망이 있다면 저 사람처럼 인자스럽고 인격적으로 훌륭하고 인간의 완성, 인격완성의 모델처럼 나타나는 사람, 우리 시대에 그런 사람이 있다는 것이 왠지 자랑스럽고 그분을 흠모하고 싶을 때 그건 악마를 흠모하는 중입니다. 악마를 사모하는 중이라고 보시면 되는 겁니다.

그러니 이 종교라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참 위험해요. 차라리 교회 안 다니면 지옥 가는 줄을 각오하겠는데 교회 옴으로써 천국 간다고 오해하도록 만들어 버렸죠. 여러분들이 욥기를 얼마나 자주 읽고 지금 다 읽으셨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욥기를 다 읽었다고 하는 사람들에게 묻고 싶은 것이 “욥 친구들의 문제점이 뭐가 있었습니까?”라고 묻고 싶어요.

욥 친구들의 발언에서는 인간의 능력으로 문제점을 찾아낼 수가 없습니다. 도리어 우리 내부에 ‘진짜 하나님을 잘 믿는 신앙인이라면 이런 발언들을 쏟아 낼 거야’라는 것을 누가 다 대신해서 보여주느냐 하면 욥이 아니고 욥의 친구들이 그걸 다 대신 말해주고 있습니다. 인간이 흠모할 만한 사람을 대신해서 이야기를 다 해주니 욥의 친구에 대해서 시비 걸 수가 없어요.

시비를 건다면 그건 욥이요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인간의 능력으로써는 욥이 하는 말 가운데서 어디 흠잡고 티잡을 곳이 없습니다. 왜 사람들이 유교 경전 있지요, 대학, 주자학, 부처의 경전, 그런 것들을 오랫동안 사람들에게 훌륭한 모범적 책들처럼 진실이 담긴 책으로 유지가 되느냐 하면 모든 인간은 본의 아니게 본인도 모르게 악마를 가장 이상적인 인물과 모델로 흠모하고 사모하고 본인이 그렇게 되고 싶어 하는 욕망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이게 성경을 아무리 봐도 우리는 이 성경이 악마의 말과 주님의 말을 분간도 못 하는 그런 위치에 있음을 우리가 자인해야 합니다. 예를 들면 욥기 8장 7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라는 요거 마귀가 한 말입니다. 이거 집에 액자 하지 마세요. 이거 집에 액자 걸어놓고 다단계 회사에서 액자로 걸어 놓는데 이게 뭐겠어요?

다단계 회사 같으면 ‘너의 시작은 미약하나 나중에는 창~~대하리라’라는 의미죠. 그래서 제가 아는 어떤 사람 이름이 창대예요. 교회 다녔단 말이죠. 욥기에 보니까 시작은 미약하나 나중은 창대하다는 말이 있으니 자기 아들이 창대하기를 기대해서 창대로 지은 모양입니다. 어느 부모가 자기 자식 이름을 ‘미약’이라고 짓겠습니까?

김미약, 최미약, 이렇게 이름 지으면 시들시들 앓다가 죽으라는 그런 욕을 하지 않는 한 미약 대신에 반대말이 창대거든요. 이름 얼마나 좋습니까? 창대. 그러나 악마와 가까운 이름을 보시면 되는 거예요. 이것이 어디에 나오느냐 하면 욥기에 바로 소알 사람 ‘빌닷’이라는 욥의 친구가 하는 말 속에 이게 포함되어 있어요.

그러니 욥기가 상당히 흥미로운 이유는 서로 대비가 되고 반대가 되고 결론적으로 말해서 하나님께서는 욥의 친구가 잘못되었다고 판정을 내린 입장이거든요. 욥의 마지막에 잘못되었다는 판정을 그렇게 제일 마지막에 하면서 그전에는 잘못되었다는 이야기 안 하고 그냥 욥의 친구들에게 하고 싶은 말 다 쏟아놓게 만듭니다.

다 쏟아놓게 만들어 놓고 분간해보라는 겁니다. 분간. 구분해 보라는 거죠. 욥의 말과 욥의 친구들 말 가운데서 어느 것이 진짜이고 어느 것이 오기인지, 진짜인지 가짜인지 한번 구분해 보라는 겁니다. 그런 구분할 실력 있거든 해보라는 겁니다. 그럼 요즘 같으면 뭐냐 하면 누가 이야기했는지는 감춰버리고 김수환 추기경, 성철스님, 법륜스님 이야기, 그리고 복음을 아는 사람 말 쫙 깔아놓고 이 중에서 진리 찾아보라는 겁니다.

카드에 적어서 쫙 깔아놓고 다음 중 성령 받은 사람의 카드를 골라보라고 하면 전부 다 악령 받은 사람 꺼 다 골라내요. 사람들이 이것에 대해서 왜 분간을 못 하느냐 하면 진리자체에 관심이 없어요. 내 편한 것에 관심 있어요. 내 편한 것에 관심 있으니 악마는 얼씨구나 하지요. 오늘 본문에 보면 “생각하여 보라” 욥아 네가 머리가 있거든, 대가리가 있거든, 그냥 폼으로 달고 다니지 말고 생각해 보라는 거죠.

“죄없이 망한 자가 누가 있느냐”라고 합니다. 정직한 자가 망한 적이 있는지 말해보라는 겁니다. 물론 욥에게 말로 했겠지만 만약에 옆에 있었으면 손가락으로 머리를 밀면서 말했을 거예요. 갑질하듯이. “야, 친구야 생각 좀 해봐. 죄없이 망한 자가 있겠어, 없겠어? 네가 이성이 있거든 생각을 좀 해봐”라고 생각 있거든 한번 해보라는 거예요.

인간의 모든 이성은 신이 부여한 하나님의 양심이라는 것이 있기때문에 어떤 인간도 관계없이 모든 인간은 공히 하나님이 주신 은혜가 담겨있다고 주장하는 철학자가 있었어요. 유명한 철학자인데 이름이 칸트예요. 칸트라는 사람이 인간 속에 있는 도덕률은 하나님이 친히 집어넣었기 때문에 이건 종교를 초월해서 자기가 도덕적으로 살게 되면 그것이 바로 신의 나라에 가는 사람이고 신의 뜻대로 사는 사람이라는 겁니다.

그 말, 그 정신이 현재 유엔의 정신이기도 한데요. 칸트의 사상이 현재 국제연합, 지금의 유엔까지 확산되었어요. 그것이 뭐냐 하면 인간을 타인을 수단으로 삼지 말고 타인을 목적으로 삼으라는 겁니다. 그걸 좀 더 풀어 말하게 되면 내가 싫어하는 것을 남에게 해코지하지 말라는 정신이에요.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야기 같지 않습니까? 이게 바로 부처의 이야기예요. 부처 이야기고 공자 이야기에서도 나와요.

이미 악마로부터 시험받아서 범죄한 인간으로서는 아무리 탐구하고 도를 닦아봐야 똑같은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인간보다 더 우월한 가치는 없다는 거예요. 인간보다 우월한 가치가 없으면 신이라는 것은 인간 속에 신이 있기 때문에 신이 곧 인간이요, 인간이 곧 신이라는 겁니다. 따라서 내가 판정하는 것은 곧 신이 내린 판정이기 때문에 우리가 내 판정에 의존해서 살아가게 되면 이것이 인간의 자기완성, 자아완성이라고 보는 거예요.

들어보니 굳이 복음이라는 것을 내놓지 않더라도 들어보니까 목사님이 마귀 말이라고 하니까 내가 그렇게 받아들이겠는데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평소에 그 사람의 말과 달리 사신 적이 있는지 제가 묻고 싶은 거예요. 그쪽에서 이야기하는 것과 불교에서 유교에서 이야기하는 것과 다른 생각으로 사신 적이 있느냐는 겁니다.

물론 지식으로 우리는 십자가와 주님 고난받고 자기를 비우고 낮추고 온갖 지식 다 동원하지만, 평소에 툭 치면 툭 나오는 행동요, 툭 치면 툭 나오는 행동, 그것은 바로 불교가 툭 나오고 유교가 툭 나오는 거예요. 마귀 생각이 툭 나오는 겁니다. 사람이 열심히 살면 살 수 있다는 거, 다 열심히 노력하면 살 수 있다는 그다음에 그 사람들이 빠뜨린 게 있어요. 뭐냐 하면 누구를 위하여. 바로 너 자신을 위하여. 그게 바로 마귀의 이야기예요.

어떤 사람이 5일 동안 잠복근무하면서 그 추운 날에 애를 써서 기어이 6천만 원을 벌었어요. 6천만 원의 소득을 5일 동안 고생해서 벌었어요. 6천만 원이나 벌었으면 그만큼 고생한 보람이 있지 않겠습니까? 아마 자기 집에 자식이 있다면 그 노력을 할 때 자식이 뭐라고 했겠어요. “아빠~힘내세요~우리가~있잖아요~”라고 용기를 북돋웠을 거예요. 그 사람이 누구냐 하면 이름 없는 천사가 갖다 준 6천만 원을 노리기 위해서 무려 5일 동안 잠복근무한 사람이에요.

인간은 도둑놈도 노력하지 않고서는 6천만 원을 훔칠 수가 없습니다. 훔쳐서 도망가다가 CCTV에 걸려서 전부 다 돈 쓰지도 못하고 잡혔는데 자기 집에서는 아주 훌륭한 아버지겠지요. 노력해서 6천만 원 얻으니. 사람들이 남들에게 피해를 주니까 그게 나쁜 사람이라고 하지만 이게 얼마나 거짓말입니까.

우리는 돈 벌 때 남에게 피해 안 줬던가요? 자기가 목적이 되니까, 내가 목적이 되니까, 내가 살기 위해서 좀 일하는 것은 전부 다 봐달라고 이야기하고 그걸 나쁜 짓이라고 하지 말라고 하고 남이 살기 위해서 나에게 약간만 피해를 줘도 그건 나쁜 짓이 되고 이게 얼마나 이기주의적인 사고방식입니까.

칸트는 말하기를 그렇게 싸우지 말고 통합하자는 거예요. 참 이 사람이 철이 없는 사람이에요. 싸우지 말자고 하다니.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싸우게 되어 있는데요. 지금 누가 시비 안 걸어줘서 안 싸우는 중이에요. 우리는 지금 휴전 중이지 안 싸우고있는 중이 아니에요. 잠시 휴전하고 있다가 누가 건드리게 되면 와락 하고 달려들어요. 교인들도 마찬가지고요. 지금 가만히 입 다물고 휴전 중인데 무슨 말 하게 되면 와락 달려들지요.

여기 데만 사람 엘리바스라고 나오는데 데만이면 에돔 사람이에요. 에돔은 버림받기로 작정 된 사람들이에요. 에돔은 야곱과 형제인데 저주받기로 작정 된 그 민족이 에돔 민족입니다. 에돔 민족 엘리바스가 이야기하는데 절차상 욥이 먼저 이야기학고 나중에 친구가 말을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욥기 1장에 하나님의 성소에서 이미 하나님이 악마와 대결상태가 지금 욥만 상대하는 것이 아니고 악마의 시험이 점점 더 범주를 스토리를 더 넓혀 가는 거예요.

그 넓혀 가는 스토리 과정에 조연으로 계속 뛰어드는 자들이 누구냐 하면 바로 욥의 친구들입니다. 욥의 시험이라는 것은 욥이 그냥 몸이 아픈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누가 시비 걸어줘야 해요. 그것도 곡해와 오해를 통해서. 결국 욥이 당하는 시험의 확장은 장차 오실 예수님이 당하는 시험의 확장과 같은 겁니다.

예수님이 광야에서 시험받으실 때 그냥 굶기만 한 것이 아니에요. 굶기만 하면 참을 수가 있지요. 그런데 약을 올리는 존재가 있다니까요. 약을 올려요.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이렇게 굶어야 되겠습니까? 밥은 일단 먹고 해야죠”라고 첫 번째 시험이 일단 굶을 때 굶더라도 밥이 우선이라는 거예요. 인간은 밥심으로 살아간다고 하잖아요.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이 “사람은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말씀으로 산다”라고 하시죠. 그러니까 옆에서 또 욥의 친구 같은 악마가 시비를 걸죠. “그래? 말씀? 이야기 잘했다. 그래, 말씀에 보면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면 여기서 뛰어내리면 천사들이 받들어 준다는데 네가 하나님의 아들인지 아닌지 시험해 보자. 뛰어내려. 뛰어내려”라고 하는 거예요. 담대함을 시험하기 위해서 뛰어내리라는 거예요.

옛날에 코자크 민족이 있었는데 폴란드 옆 흑해 쪽에 있는 나라 민족이었는데 역사적으로 용맹하기로 유명한 민족인데 그 민족의 남자가 듣기 제일 싫어하고 화내는 단어가 있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이 겁쟁이야’라는 말이에요. 이 ‘겁쟁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그다음부터는 그 말을 한 사람이 겁쟁이인지 그 말을 듣는 사람이 겁쟁이인지 여기에서 결투에 들어갑니다. 남성들의 무모함이죠.

어떻게 결투를 하느냐 하면 낭떠러지가 있는 계곡에서 말을 타고 그 계곡을 훌쩍훌쩍 뛰어넘는 거예요. 누구 하나 빠져 죽을 때까지. 결국 누구하나 말 타고 가다가 계곡에 빠져버리면 게임 끝나는 거예요. 나는 겁쟁이 아니잖아. 나는 겁쟁이 비겁한 자가 아니라는 거예요. 코자크 민족에게 그런 것이 있다는 것은 모든 인간에게 그런 게 있는 거예요.

그래서 욥의 친구가 욥에게 나서는 것은 일종의 결투를 신청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네가 착한지 내가 착한지 한번 시합해 볼까?’라는 하늘의 시합이 지금 땅까지 확장이 된 거예요. 땅에까지 확장된 겁니다. 그렇다면 욥의 대책이 뭐냐? 제가 아침에 운동하다 보면 플랭카드에 이런 문구가 붙어있어요. ‘4+1’이라고 해 놓고 ‘5일’이라고 해 놓고 그 옆에 남자의 우람한 상의 탈의한 근육질 남자의 사진을 박아 놓고 ‘4+1’에 ‘15만원’이라고 해 놨어요. 이게 뭐냐 하면 헬스클럽에 다섯 달 하는데 15만 원이라고 하는 겁니다. 많이 가격이 줄어든 거죠. 한 달에 3만 원이고 일시불로 다섯 달 것을 내야 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을 보고 저는 전혀 마음이 동하지 않았어요. 흔들리지 않았어요. 왜냐 하면 우람한 근육질은 제 스타일이 아니기 때문이에요.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악마의 시험에 넘어가지 않은 이유가 뭐냐 하면 예수님 빼놓고 모든 인간은 뭔가 이래야 내가 승자라는, 이래야 내가 남자답다는, 이래야 내가 이긴 자가 된다는 그 유혹 거리를 이미 주변에서 많이 끌어모은 중에 있었어요. 그러니까 마귀는 자신만만한 거예요.

그럼 오늘 시합은 뭐냐 하면 대만 사람 엘리바스가 욥에게 시비 건 것은 뭐냐 하면 누가 누가 착하냐 하는 거예요. 누가 누가 착하냐. 아침에 이야기했지만, 선과 악을 논하는 겁니다. 누가 누가 착하냐. 착한 사람끼리 또 붙는 거예요. 착한 사람끼리 붙으면 상대적으로 더 착한 사람이 있을 것이고 덜 착한 사람이 있겠죠.

이 엘리바스가 제시하는 이 내기가 욥기 4장 5장에 깔린 이유가 뭐냐 하면 지금 우리 마음에 이 엘리바스의 마음을 가득 차 있다는 것을 지금 암시하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 지금 욥 하나만 딱 두고 있어요. 욥 빼놓고 나머지 모든 인간은 욥의 친구나 그 나물에 그 밥과 똑같은 거예요.

시간은 미약하나 나중에는 창대하리라는 것이 무슨 말이에요. 내기에서 나는 이겼다는 거예요. 코자크 민족의 오기와 똑같은 겁니다. 성경은 우리 마음 밭을 완전히 뒤집어 놉니다. 완전히 다 전복시켜서 우리가 얼마나 헛된 세월들을 인생이라고 치고 헛된 세월들을 연속성으로 보고 있는가를 우리에게 까발려주는 겁니다.

그럼 여기에 대한 욥의 대책은 간단합니다. 스마트폰 없이 매뉴얼(사용 설명서)만 외우는 인간들이라고 보는 거예요. 스마트폰 사지도 않았는데 우연히 길에서 스마트폰 사용서를 주웠다고 칩시다. 그러면 그거 보면 지금 스마트폰 실행하고있는 중입니까? 원래 스마트폰 없는데 사용서가 무슨 소용이 있어요. 소용없잖아요.

인간은 이 인생, 내 몸이 어디에 소용되는지를 욥의 친구는 모르기 때문에 기껏 소용되는 데가 ‘나는 위대하다. 나는 대단하다’라는 곳에 자기 인생을 전부 다 사용하고 적용하고있는 중입니다. 나만 우수하고 나만 잘되게 되면 그것은 인생 잘 사는 것이라고 보는 거예요. 앞으로 욥의 친구들을 쭉 하면서 저는 기본적인 이 세상의 종교에 대해서 같이 언급해 줄 겁니다.

힌두교, 불교, 이슬람교, 기독교, 천주교, 이런 종교들의 이야기가 욥 말고 친구들을 통해서 갖추어진 조직과 이론 체계를 가지고 그들을 통해 펼쳐지고 있어요. 특히 욥의 친구들은 하나님의 계시까지 본 사람들이에요. 하여튼 종교에서, 오늘날 교회에서 은사 받았다는 둥 하나님의 계시 받았다는 둥 성령 받았다 하는 것은 욥의 친구들 속에 빠짐없이 다 나온다는 사실입니다. 욥의 친구들 속에.

마귀들의 갖고 노는 범주 안에서 놀고 있는 거예요. 인간이 체험했다는 모든 체험이. 그러면 욥의 체험을 친구들에게 아무리 설명해도 설명이 안 된다고 욥 쪽에서 자꾸 밀어내는 이유가 뭐냐 하면 너희들이 알고 있는 그 범위, 경계선, 그 바깥에서 일어나는 일이라고 보는 거예요. 욥은 본인이 확실치 않았지만 지금 와서 우리가 욥을 다 본 입장에서 욥이 그런 솔직한 고백을 하는 이유는 욥은 하나님의 성소 중심입니다. 하늘나라 성전 중심이에요. 붕 떠 있는 거예요.

열왕기하 2장 11절에 보면 거기에 엘리야와 엘리사 두 선지자가 같이 있는 대목이 나옵니다. 그걸 읽어 보면 “두 사람이 행하며 말하더니 홀연히 불수레와 불말들이 두 사람을 격하고 엘리야가 회리바람을 타고 승천하더라, 엘리사가 보고 소리 지르되 내 아버지여 내 아버지여 이스라엘의 병거와 그 마병이여 하더니 다시 보이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엘리사가 자기의 옷을 잡아 둘에 찢고, 엘리야의 몸에서 떨어진 겉옷을 주워 가지고 돌아와서 요단 언덕에 서서, 엘리야의 몸에서 떨어진 그 겉옷을 가지고 물을 치며 가로되 엘리야의 하나님 여호와는 어디 계시니이까 하고 저도 물을 치매 물이 이리저리 갈라지고 엘리사가 건너니라”라는 이 대목입니다.

열왕기하가 이스라엘 역사죠. 하나님의 이스라엘 역사. 이스라엘 역사는 위와 아래가 분명히 갈라져 있어요. 엘리야가 어디로 갔느냐면 엘리야는 바로 불수레 불말타고 하늘로 올라갔습니다. 이스라엘 역사에서는 그래요. 그런데 우리가 보고 있는 건 욥기예요. 시간이 중지된 거예요. 욥기라고 하는 것은 이스라엘 역사가 아닙니다. 아브라함 시대예요. 이스라엘 생기기 전의 이야기예요.

그때는 어느 게 진짜인지 가짜인지는 자기가 분명히 하늘나라 간다는 것이 아니라 그냥 난데없는 어떤 고난을 받는 사람이 등장하고 거기에 대해서 주변에 있는 친구들이 나름대로 화살 쏘듯이 계속 나름대로 해석을 하는 겁니다. 나는 이렇게 본다, 이렇게 본다, 이렇게 해석한다, 계속해서 자기 알고 있는 것을 해석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욥 하나가 고난받음으로 말미암아 본의 아니게 욥의 친구들은 평소에 나는 어떤 마음을 갖고 있었다는 것을 전부 다 토해내는 어떤 기회가 된 거예요. 만약에 여러분이 길을 가는 데 어떤 거지가 있습니다. 거지가 있고 불쌍한 사람들이 있을 때 왜 동냥합니까? 나는 때려 죽여도 동냥 받는 저 인간이 안 되기 위해서 동냥 주는 거예요. 불쌍하다고.

불쌍하다는 말은 나는 너의 처지가 아니니까 나는 지금 괜찮은 처지인 것을 한껏 자기는 즐기고 있는 거예요. 동냥 주므로 상대적으로 너는 내가 되기 싫은 꼴을 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건 자기의 우월감을 확보하는 거죠. 동냥 주고 동정함으로써.

욥의 친구가 똑같은 짓을 합니다. 욥의 친구가 지금 욥을 위로하러 왔죠. 여러분 위로한다는 것은 뭐냐 하면 상대방을 내식대로 통제하는 수단이 돼요. 위로할 때. 제가 예를 하나 들 건데 봉사하시는 분이 실제 그렇다는 것이 아니기때문에 곡해하시지 않으시길 부탁드립니다. 그걸 보니 예가 떠올라서 이렇게 들어봅니다. 만약에 두 사람이 형광등 가는 일을 한다면 한 사람은 헥헥 거리면서 사다리 올라가서 공사를 다 했어요. 그런데 다른 한 사람은 아래에서 “수고한다. 잘한다. 너 아니면 교회가 안 돼. 아이고 잘하네”라고 하면서 중간에 전화통화 하다가 다시 격려하다가 이러면서 계속 위로와 격려를 아끼지 않아요.

이게 뭐예요. 상대방을 갖고 논겁니다. 갖고 놀아요. “위로해 줬잖아. 격려해 줬잖아”라고 하면서. 격려를 왜 하는 줄 알아요? 때려 죽어도 격려받는 네가 되기 싫어서. 격려하는 나는 되고 싶지만 나에게 격려받는 너라는 꼴이 되기 싫어서 그냥 격려나 해주는 거예요. 그래서 위로해 주는 친구입니다. 지금 욥의 친구가 위로해 줘요.

뭐라고 위로하느냐 하면 욥을 띄워줍니다. “욥 너를 내가 평소에 봤는데 너 참 훌륭한 사람이다”라고 여기 나오죠. 3절에 보면 “전에 네가 여러 사람을 교훈하였고 손이 늘어진 자면 강하게 하였고, 넘어져 가는 자를 말로 붙들어 주었고 무릎이 약한 자를 강하게 하였거늘”이라고 나와요. 욥 친구 엘리바스가 말하기를 이렇게 말하는 거예요. 이 이야기는 평소에 우리가 늘 듣는 이야기니까 남의 이야기로 듣지 마세요.

엘리바스가 말하기를 “누가 네게 말하면 네가 염증이 나겠느냐 날지라도 누가 참고 말하지 아니하겠느냐”라는 말이 뭐냐 하면 지금 내가 친구랍시고 와가지고 거들먹거리면서 “욥아 너 참 안됐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너 기분 나쁘겠지. 너의 마음을 나도 안다. 너의 마음을 나도 아는데 나도 남이 나 아픈데 와서 위로하는 척하면 나도 기분 나빠. 나도 네 마음을 안다니까. 알지만 내가 참다 참다 못 참아서 내가 알지만 이제는 말한다”라는 뜻이에요.

그러니까 상대방을 말할 때 일방적으로 말하지 않고 친구니까 충분히 상대방 선에 서서, 역지사지하면서, 입장을 바꿔서 그 사람 입장이 되어서 그 사람을 충분히 이해하면서 내가 조심스럽게 말을 끄집어낼 때 너무 나를 탓하지 말아 달라는 거죠. “나는 이 세상 누구보다 친구니까 잘 알고 너 참 훌륭했어. 그런데 훌륭했기에 평소에 나는 네가 잘 되기를 바랐어. 그런데 네가 지금 이렇게 아파하는 것을 보니까 우리가 아는 이야기, 욥 너도 알고 나도 아는 이야기 같이 해보자. 사람이 죄 없는데 이렇게 아픈 사람은 없는 거야”라고 아주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끄집어내는 이런 경우 저나 여러분이나 얼마나 많이 들어왔습니까.

그게 배후에 악마가 그 짓 한다는 것을 여러분은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악마가 그 짓 하고 있는 거예요. 우리가 예수님 이야기할 때 예수 믿지는 않고 예수님에 대해 아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예수님은 훌륭한 분이다. 그분의 희생으로 우리는 죄 용서받았다”라고 하는 사람들 얼마나 많습니까. 하지만 그 사람의 인생은 결코 넓은 길이지 좁은 길이 아니에요.

이게 바로 악마가 복음에 대해서 가리기 위해서 택한 백성을 혼란스럽게 하기위해서 인간이 알고 있는 모든 죄를 다 끄집어내서 성도의 앞길을 주님의 십자가가 안 보이도록 그렇게 조치한다는 그것이 오늘날 현실입니다. 우리 자신에게 중요한 것은 이겁니다. 우리는 성소를 봐야 해요. 위아래가 갈라졌다는 것을 봐야 하고 우리의 소속이 땅이 아니고 하늘에 있는 겁니다.

그래서 이건 말로 표현이 안 되고 그냥 삶으로 주께서 우리를 욥처럼 사용해야 비로소 그동안 얼추 인간이 이성으로 깨달은 모든 것이 얼마나 헛짓이고 마귀 소리인 것을 우리는 살아가면서 새롭게 겪어야 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대충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 바르게 살면 천당 가는 줄 알았습니다. 사람이 할 수 있는 착한 일 하게 되면 주께 영광 돌리는 건 줄 알았습니다. 마귀가 놓은 함정이고 덫인 줄 몰랐습니다. 십자가로 가지도 않으면서 십자가를 안다고 우겼던 저희들 실제로 주께서 우리를 성령을 통해서 자기 부인, 십자가에 동참할 수 있도록 이끄신다는 것을 믿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