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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들의 방문(욥2;11-13) 191215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9. 12. 16. 17:48
2019-12-15 14:51:12조회 : 28         
   친구들의 방문 191215이름 : 이근호 (IP:119.18.87.190)   

친구들의 방문(욥기 2:11-13)

음성    동영상 youtube

 링크 : https://youtu.be/ztSD22s5RW0, Hit:0
 이근호19-12-15 15:37 
친구들의  방문

2019년 12월 15일                  본문 말씀: 욥기 2:11-13

(2:11) 때에 욥의 친구 세 사람이 그에게 이 모든 재앙이 임하였다 함을 듣고 각각 자기 처소에서부터 이르렀으니 곧 데만 사람 엘리바스와 수아 사람 빌닷과 나아마 사람 소발이라 그들이 욥을 조문하고 위로하려 하여 상약하고 오더니

(2:12) 눈을 들어 멀리 보매 그 욥인줄 알기 어렵게 되었으므로 그들이 일제히 소리질러 울며 각각 자기의 겉옷을 찢고 하늘을 향하여 티끌을 날려 자기 머리에 뿌리고

(2:13) 칠 일 칠 야를 그와 함께 땅에 앉았으나 욥의 곤고함이 심함을 보는고로 그에게 한 말도 하는 자가 없었더라

친구라는 관계는 공통 바탕을 갖고 있다는 인식에서 맺어집니다. 이야기나 의견이 서로 통하는 사이라는 말입니다. 욥이 하나님의 허락 하에 고난을 당하기 전에 친구는 의레이 욥과 자신들과 말이 통한다고 짐작하고 찾아옵니다. 하지만 13절에서 그들은 ‘말 문’이 닫혀버립니다. 즉 그들이 미리 생각한 사태가 아니었던 겁니다.

이것은 욥과 자신들의 연결이 단절되어 있음을 감지하게 됩니다. 전에 자신들이 알던 그 욥이 아니었던 겁니다. 여기서 우리는 왜 하나님께서 그 지경으로 몰아넣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욥의 세 친구는 자기 눈 앞에 펼쳐져 있는 욥의 상태를 인간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답변으로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사람은 자기를 구심점으로 할 때, 궁금한 것, 혹은 호기심을 주는 것에 대해서는 먼저 질문을 하고 그 다음에 타인이나 하나님으로부터 해답을 얻는 식으로 살아갑니다. 자신을 이 세상에 맞쳐나가야 생존에 유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런 인간들의 방식에 호응하지 않습니다.

먼저 해답을 내리시고, 과연 어느 인간이 이 하나님의 답에 부합되는 질문을 할 수 있는지를 보십니다. 지금 친구들 앞에 앉아있는 욥은 ‘하나님이 내려주신 해답’입니다. 이 답은 과연 친구들의 마음으로 적절하게 맞는 질문을 할 수 있을까요? 만약에 적절한 질문을 못한다면 이는 욥의 자리와 친구의 자리가 연결되지 않고 끊어져 있다는 말입니다.

욥과 연결되는 자리는 하늘나라 천상 회의입니다. 스가랴 3:1에 보면, “대제사장 여호수아는 여호와의 사자 앞에 섰고 사단은 그의 우편에 서서 그를 대적하는 것을 여호와께서 내게 보이시니라” 즉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종을 대적하는 사단도 같이 있어 세상 변화를 주도한다는 것이 인간들 입장에서 낯설게 마련입니다.

인간들이 생각하는 신은 악마가 없는 신의 세계입니다. 악마가 더 이상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그런 하늘나라를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신의 세계를 구상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참된 하나님의 세계를 가로막기 위한 사단의 술책입니다. 소위 이 땅의 모든 교회들을 통해서 사단은 신자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신자를 훼방하기 위해 ‘교인들’을 양상하고 있습니다.

어떤 효심이 지극한 아들이 늙은 어머니를 위하여 늙은 여자로 변장하여 운전면허증을 따주다가 들통난 사건이 있었습니다. 설사 그 사람이 어머니가 운전면허증을 소지했다고 해도 거리에 차 몰고 나가겠습니까? 아무리 교회가 천국행 티켓과 신분증들을 발급해주어서 막상 천국 가는데 아무 쓸모없는 증에 불과합니다.

왜냐하면 신자(信者)가 되지 못하고 교인(敎人)으로 머물기 때문입니다. 일반인과 교인 사이에는 하등의 단절이 없습니다. 교인들은 오늘 본문에 나오는 욥의 친구들처럼 운명론자들이요 신의 주권을 강조하는 자들입니다. 모든 일이 신의 뜻대로 일어나고 이루어진다는 겁니다. 욥의 친구들이 이 사상으로 무장되어 있는 자들입니다.

신을 극대화하고 극진히 섬깁니다. 그러나 모조품입니다. 가짜 장미다발입니다. 종이로 만든 장미와 같습니다. 욥의 친구들이 생각하는 욥은 자기들과 의사소통을 평소에 원활하게 잘 이루어지는 좋은 친구로 알고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병 위문차 온 겁니다. 얼마나 대단한 의리입니까?

교인과 신자의 차이는, 그 가운데 죽음이 들어 있지 않다는 차이입니다. 즉 교인들은 메시야가 죽었다는 소식은 알고 있습니다. 그 죽음으로 천국가는 길이 있다는 것은 압니다. 그러나 본인들은 전혀 위험하지 않습니다. 아니, 그들은 위험이 오는 것치 아마 하나님쪽으로 가는 길이 아니라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위험한 길은 나쁜 자들이나 가는 길로 간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예상 밖으로 친하고 의로운 욥이 그 위험한 덫에 매여 있습니다. 이럴 때 기존의 자기들 신학으로 해명할 방법이 없습니다. 이처럼 구원의 길이란 인간들의 상식에서 볼 때 없는 이론처럼 느껴졌을 것입니다.

욥의 친구들은 왜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자기네들 입장과 욥의 입장이 차이나게 했는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자리가 하나님과 단절된 자리인지도 모르고 있습니다. 욥은 비록 친구들과 그리고 가족들과의 관계는 끊어졌어도 하나님과의 관계는 지속되고 있습니다. 즉 일반인과 교인의 관계는 영속되지만 교인과 신자의 관계는 끊어져 있습니다.

인간들의 지식 정보 획득으로 교인은 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신자는 불가능합니다. 신자가 하나님이 제공하신 ‘죽음의 모습’이 있어야 합니다. 즉 인간이 ‘산자’는 것은 재산과 가족과 건강에 둘러싸여 있는 모습이 정상적이라고 여기게 됩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살아 있다’고 여기는 것이 교만일 줄을 모르고 있습니다.

사람 안에 죽음의 흔적이 박혀 있지 아니하면 사람은 교만하게 되어 있습니다. 아무리 평소에 겸손을 표방한 자라 할지라도 돈이 생기면 딴 짓하게 되어 있습니다. 지금 욥과 세 친구 사이에는 ‘빈 공간’으로 남겨져 있는 것이 아니라 ‘반(反)-공간’의 기류가 흐릅니다. 인간들은 자기 세력을 넓혀보기 위해 자꾸만 빈-공간, 곧 여지를 남기게 됩니다.

그 빈 공간에 새로운 여지가 들어오게 되면 자신은 보다 발전했다고 자부합니다. 욥의 친구들도 평소에 이렇게 살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도 이런 식으로 살았습니다. 쉽게 말해서 자신들은 신자라고 자부하지만 어디까지 교인에 불과한 겁니다. 교인은 얼마든지 만들어낼 수가 있습니다.

기존의 영속성을 유지한 채, 가족의 정(情)으로 친구의 정(情)으로 얼마든지 관계를 유지할 수가 있습니다. 단절은 없습니다. 모자람이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신자가 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특수한 존재로 만들기 위해 친히 찾아드시는 수밖에 없습니다. 즉 하나님 없이 하나님에 대해서 아는 자와 정말 하나님에 대해서 알고서는 기존의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니었다고 말하는 것과는 다른 겁니다. 

욥의 세 친구는 욥과의 거리를 줄어보고자 평소에 남들을 측은히 여기는 것들을 행하므로서 자신의 순수함과 배려감을 충분히 보여줍니다. 그것은 일주일 밤과 낮으로 지새면서 말입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대화 끊어짐’입니다. 천상과 연결된 것은 인간이 감히 끼어들 수가 없는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날 성도들로 하여금 세상이 하나님과 끊어짐 있음을 알리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19-12-15 19:57 
9강-욥기 2장 11~13절(친구들의 방문) 20191215-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욥기 2장 11~13절입니다. 구약성경 762페이지입니다.

“때에 욥의 친구 세 사람이 그에게 이 모든 재앙이 임하였다 함을 듣고 각각 자기 처소에서부터 이르렀으니 곧 데만 사람 엘리바스와 수아 사람 빌닷과 나아마 사람 소발이라 그들이 욥을 조문하고 위로하려 하여 상약하고 오더니, 눈을 들어 멀리 보매 그 욥인 줄 알기 어렵게 되었으므로 그들이 일제히 소리질러 울며 각각 자기의 겉옷을 찢고 하늘을 향하여 티끌을 날려 자기 머리에 뿌리고, 칠 일 칠 야를 그와 함께 땅에 앉았으나 욥의 곤고함이 심함을 보는 고로 그에게 한 말도 하는 자가 없었더라”

여기에 욥의 친구 세 사람이 오죠. 원래 욥의 친구는 네 명인데 마지막 제일 젊은 사람은 네 번째 나타납니다. 네 번째 나타나서 욥과 그리고 하나님과 그 네 번째 친구가 한 부류에 속하고 여기 세 친구는 욥의 고난에 동참할 수 없는 거리가 있는 다른 부류로 처음부터 규정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 11절에 보면 ‘친구’라고 되어 있어요. 친구. 친구는 이 세상에서 영속성을 갖고 있죠. 친구 사이에는 서로 통하는 게 있다는 조건 하에 서로 친구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13절 마지막에 보면 “그에게 한 말도 하는 자가 없었더라”라고 되어 있어요. 친구 사이라면 얼마나 수다를 많이 떨었겠습니까? 할 말도 많고. 그런데 친구라는 자격으로 나왔는데 서로 통할 수 있는 말이 없어요. 말문이 닫힌 겁니다. 과연 언제까지 친구 할 거냐는 문제가 생깁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 욥을 통해서 보여주는 것은 욥은 특수한 특별한 존재라는 겁니다.

욥이 얼마나 아프냐, 고통스러우냐가 아니라 욥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욥에게 찾아왔을 때 그 욥의 자리가 흔한 기존 인간의 자리와는 완전히 단절된 특별한 의미가 담긴 자리로 새롭게 태어납니다. 이것은 오늘날 성도라 하는 것은 내가 훌륭하게 되고 내가 잘되는 것이 성도가 아니고 그전에 일반인들과 함께했던 그 자리가 이제는 다른 자리가 된 거예요.

특수한 자리가 우선이고 그다음에 나입니다. 예수 안이 우선이고 우리는 예수 안이라는 그 자리를 드러내기 위해서 우리 자신이 거기에 뽑혀서 거기에 들어간 거죠. 따라서 내가 구원받았다가 아니라 ‘이 자리에 내가 올 수 없는데 어떻게 왔지?’라는 질문이 합당합니다. 기존에 인간들은 말 트면 같은 자리인 것을 확인할 수 있어요. 그러나 성도가 되어버리면 기존의 인간들과 말을 터놓고 소통할 수가 없습니다.

기존의 세상에서는 자기가 궁금한 것을 이렇게 먼저 질문하고 답변을 하게 되죠. 그러나 욥기의 특징은 하나님께서 먼저 답변을 하고 그 답변에 맞는 질문 형식을 네가 이 땅에서 만들어 내는지 한번 보자는 겁니다. 못 만들어내죠. 만들어 낼 수가 없어요. 그래서 욥의 친구들은 말합니다. 자꾸 ‘어떻게’를 반복해요. ‘어떻게 이런 일이’,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있는가.’

자신의 아는 지식과 논리를 총동원해도 안 돼요. 지난 시간에 이야기했듯이 욥의 친구들은 운명론자입니다. 운명론자라는 말은 쉽게 말해서 모든 것을 하나님이 다스린다는 것을 인정하는 그런 사람들이에요. 운명론자. 한국 같으면 개혁주의 신학자들이죠. 모든 것은 하나님의 주권,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진다는 거예요. 이거는 뭐 알라 이슬람교와 똑같죠. “모든 것이 알라의 은혜입니다”라는 것과 똑같은 거죠.

하나님에 대해서 이제는 최종적인 하나님의 마지막 제시하는 비밀까지 섭력하고 알았다고 여겼고, 그렇게 여겼는데 막상 이 땅에 하나님이 준비해 놓은 특수한 사람의 현자에 가보니까 할 말을 잊어버린 거예요. 말이 통하지 않는 겁니다. 다른 동네 사람 같아요. 그들은 신학과 신학으로 서로 의견소통이 되는 줄 알았어요. 그 신학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몸이 아픈데. 하나님께서 일으킨 그 고통과 그 낯선 환경을 인간이 신학 가지고 어떻게 그걸 해명할 수가 있습니까? 단절의 상태인데요.

그래서 욥의 이 모든 모습은 하늘의 뜻과 인간의 뜻이 단절되어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밝힙니다. 그리고 그 단절이 이유가 있어요. 인간은 자기 위주이기 때문에 자기 빼놓고 나머지를 뭐로 보느냐 하면 대상체로 보죠. 대상체로 보게 되면 그건 하나의 물건이 되는 겁니다. 인간으로 보지 않고 물건으로 보는 거죠. 저거 죽으면 보험금 얼마나 타겠나. 하나의 물건이 돼요.

그러나 욥을 통해서는 특수한 욥을 통해서는 뭐냐 하면 물건이거나 교환되거나 거래될 수 없는 게 욥을 통해서 발산됩니다. 그게 희생입니다. 욥의 마지막에는 욥이 친구들을 위해서 희생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욥 안에는 뭐가 들어 있느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이 들어있는 겁니다. 거래 대상이 아닌 거예요. 십자가 전할 테니까 교회 만들어 달라는 이런 거래는 통하지 않습니다.

십자가를 상품으로 걸 테니까 하나님께서 많은 사람으로 이 교회를 채워 달라는 이런 거래도 성립이 안 돼요. 주님이 십자가 졌기 때문에 우리도 십자가 지겠다는 이것도 안 돼요. 우리의 십자가를 주님의 십자가에 보탤 수 없어요. 추가될 수 있는 용도가 아닙니다. 희생해 봐야 그건 까부는 거예요. 까부는 거. 까불이 알죠? 얼마 전에 잡혔는데. 그냥 까부는 거예요. 그냥.

모조품이죠. 그건. 신의 주권에 십자가 집어넣어서 만들어내는 건 가짜 신이에요. 가짜 메시아이고 가짜 신학입니다. 그건 모조품이에요. 어떤 브라질 사람이 있는데 아주 효심이 지극한 사람이에요. 연세 많은 어머니가 운전면허 시험에 통과 못 할 것 같으니까 자기가 어머니로 변장해서 늙은 여자로 분장했어요. 얼굴은 비슷하니 닮았으니 엄마 옷으로 입고 엄마 화장하고 가발 쓰고 해서 남자가 여자 분장을 해서 운전면허를 쳤는데 들통났어요.

제가 그 토픽을 보고 생각한 건 운전면허를 가졌다고 쳐도 그러면 과연 어머니가 차 몰고 거리에 나오겠습니까? 블랙 아이스에 미끄러져 사고 나서 죽을 수도 있는 문제고. 운전면허증이 본인을 구원하지 못해요. 왜냐 하면 가짜기 때문에. 교회가 가짜 면허증을 계속 남발하는 겁니다. “예수님이 대신해서 죽었기 때문에 여러분은 믿기만 하세요”라고 하면서 운전면허증에 ‘믿기만 하세요. 믿습니다’만 칸에 체크 하면 운전면허증 나오는 거예요.

그런데 욥 봅시다. 욥은 그런 식의 하나님은 욥이 또 일가견이 있잖아요. 하나님이 어떤 분인 줄 너무나 잘 알잖아요. 머리로. 그리고 욥은 자기가 복 받은 것도 다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생각했고 얼마나 남들 보기에 참 겸손합니까? 욥은 자기가 고난 오기 전에 하나님 믿는 것이 전혀 위험한 길인 것을 인정할 수가 없었어요. 하나님 믿는 것은 예수 믿는 것은 위험하지 않다고 본 거예요. 그냥 설렁설렁 가도 천당 간다고 생각한 겁니다.

난데없는 이런 고난과 아내까지 배신하고 자식 다 죽어버리고 이렇게 자기 자존감 같은 모든 재산이 하루아침에 다 날아갈 줄은 상상도 못 했죠. 욥은 끝까지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겠다고 버티죠. 버티지만 인간의 한계에 이를 수밖에 없습니다. 제가 고등학교 때 담임선생님이나 학교 선생님들을 우리가 기억한다고요. 쭉 기억할 때 그 선생님들은 전부 다 눈치껏 ‘나를 존경해라. 너를 위해서 이렇게 애쓴다’라고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담임선생님들이나 학교 선생님들이 전부 다 속물 같아요. 속물.

뭐 아이들에게 내놓을 것도 없어요. 자기 월급 받아서 밥 먹고 살기 바빴던 것 같아요. 이제는 말합니다. 그 담임선생님 가운데 속물 아닌 사람이 없는 거 같아요. 순수하게 아이들 잘 가르쳐서 아이들이 미래의 일꾼으로 성장하기를 바라며 가르치는 사람도 있겠죠. 그러나 그게 마치 뭐와 같으냐 하면 오늘날 교회 목사가 교인들에게 “나는 여러분들을 위해서 모든 정성과 진정성을 가지고 순수함을 가지고 여러분 구원받기를 위해서 애쓰고 있습니다”라고 했을 때 주님 보시기에 그 말을 하고 있는 목사가 속물로 보이지 않겠습니까?

“너는 모조품만 계속 남발할 뿐이다”라고 하시는 거죠. 전에 울산 강의에서 그런 이야기 했던가요? ‘Paper roses’라는 팝송인데 종이 장미란 뜻이에요. 남자가 장미 꽃다발을 줬는데 나중에 남자의 음흉한 마음을 눈치챈 여자가 하는 말이 “당신이 준 것은 그냥 종이로 만든 장미에 불과하다”라고 하는 거예요. 종이로 만든 장미에 불과하다는 거예요.

왜 하나님께서 욥이라는 사람에게 특별한 돌발적인 사태가 일어나게 하십니까? 이런 사태가 일어나는 것은 평소에 인간이 하나님께서 어떤 말씀을 주시고 자기 양심에 어떤 식으로 하더라도 인간은 자기 분수를 모르고 자기 주제를 모르는 상태에서는 모든 것이 환상에 불과한 신, 환상에 불과한 현실관만 꾸역꾸역 계속해서 뱉어낼 뿐이에요. 다른 것은 아무것도 못 내 놉니다.

오늘날 이 욥의 세 친구를 이렇게 보시면 되는 겁니다. 신자인 적도 없고 신자가 뭔지도 모르고 신자 되기를 아예 생각도 안 하는 오늘날 소위 신학교 교수나 목사들 또는 장로들 생각하면 딱 맞아요. 신자가 뭔지를 한 번도 경험해 본 적도 없고요. 그냥 착실한 교인, 성실하기 짝이 없는 교인이죠. 교인이기 때문에 무엇을 시도하느냐 하면 신자인 척을 하는 것에 대단히 노력합니다. 특히 목사들.

그 사람들은 예수님 뭐라고 하면 반응 없다가 교회 뭐라고 흔들기 시작하면 갑자기 정신이 거기에 다가서 방어를 하죠. 예수보다 교회가 더 좋은 사람들이에요. 목사들에게는 그것이 자기 자존심과 생계에 관한 문제기 때문에. 특히 자존심. 자기가 주의 종이기 때문에 교회 있는 것은 당연하다는 거예요. 그런데 교회가 하나도 없어 보세요. 자기 정체성이 날아가 버리잖아요. 그러니까 교회가 있어 줘야 자기가 목사가 되니까 무조건 교회 붙들고 있는 거예요.

모든 설교가 교회로부터 와서 교회로 말미암아 교회로 끝나요. 모든 설교가. 한 번도 신자인 적이 없어요. 신자 아닌 체 신학교 갔고 거기서 얼추 해도 신자 대우받는다는 것을 그들은 요령으로 터득했고 끝까지 그들은 신자 아닌 자로서 사람들을 교인으로 만들려고 했어요. 그러면 사람과 교인과 신자 차이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오늘 욥의 내용이 그거예요. 일반 사람과 교인 사이에는 얼마든지 친구 될 수 있어요.

주일날 교회 나왔다가 월요일에 친구 만나고 이게 그렇게 낯설고 어색합니까? 전혀 어색하지 않아요. 주일날 교회 와놓고 월요일에 친구 만나려고 하니까 막 소름돋고 두드러기 생기고 이렇습니까? ‘아이고, 나도 이제 세상 바람 한번 쐬어보자’라는 식으로 아주 기다렸다는 듯이 반갑다는 듯이 “친구야, 잘 있나?”라고 하며 시작해서 자슥 이야기, 돈 이야기, 아파트 이야기, 보험 이야기 같은 수다가 시작됩니다. 아무 저항성을 못 느껴요. 껄끄러움이 없어요.

교회 와서 복음 이야기 들으면 전부 다 침묵이에요. 묵언 수행하듯이. 가만히 있다가 세상 이야기하면 기다렸다는 듯이 터져 나오죠. 왜냐 하면 그게 바로 일반인과 교인 사이에는 하등 단절이 없습니다. 단절이 없어요. 남편이 교회 다니기 때문에 아내가 교회 나오고, 아내가 교회 나오기 때문에 남편이 교회 나오고, 자식들이 나오니까 부모 따라 나오고, 부모 나오니까 자식들 따라 나오고, 전부 다 그냥 정으로, 초코파이 정으로 다녀주는 거예요.

하등 단절과 관계없어요. 가정의 화평이 전부예요. 교회 왜 안 나오고 다른 교회로 바꾸느냐 하면 가정이 화평하기 위해서예요. 나는 가정 믿는 신자지 예수 믿는 신자가 아니에요. 내 가정은 나의 자존심이에요. 나의 모든 것이에요. 나의 모든 것은 가정이에요. 그리고 남자에게 있어서 모든 것은 재산입니다. 그리고 남녀 구분 없이 모든 것은 기본적으로 자신의 건강이에요.

아프면 부끄러운 거예요. 아프면 남들 만나는 모임에 못 가요. 아프면. “너 췌장암 4기야?”라고 물어보면 이제 교회도 동창회도 못 나와요. 아프면 친척 결혼식도 못가요. “얼굴 보니 핼쑥하니 뭐 암이라도 걸렸나?”라고 물어보면 곤란해요. 아프면 부끄럽고 가정이 불화하면 부끄럽고요 그리고 돈 없으면 부끄럽기 짝이 없죠.

하나님께서는 욥에게 세 가지를 다 날아가게 합니다. 건강, 가정, 돈, 다 날리게 합니다. 누가 부끄러워하는가. 전에 욥과 친구였던 그들이 못 알아봅니다. 여기 본문에 보니 “눈을 들어 멀리 보매 그 욥인 줄 알기 어렵게 되었으므로” 욥을 만나기 전에는 어떤 같은 자리니까, 단절이 아니니까, 지평이 공간이 같은 공간이라고 여겼기 때문에 멀리서 만나기 전의 욥이 각인되어 있어요. 욥의 이미지가 머리에 새겨져 있다고요. ‘저럴 때 욥이다. 욥 답다’라는 거.

사람은 그냥 만나는 것이 아닙니다. 뭔가 인식이 있어서 그 인식과 비교하고 대조하면서 타인을 만나요. 인간은. 예를 들면 주일날 아침에 전화 와서 “우리교회 예배 시간 몇 시입니까?” “11시입니다” “그러면 처음 가서 잘 모르는데 버스는 몇 번 타고 갑니까?” “몇 번 탑니다”라고 이야기할 때 전화 목소리 들어보니 50대 여자이고 침착하니까 아마 뭔가 가정이 화평하고 돈에 그렇게 궁색 떨지 않고 이미지는 어떨 것 같고 뭐 이런 예상이 나온다고요.

그런데 막상 11시에 예배 참석하면 “누구십니까?”라고 하며 모를 때 인간은 항상 자기가 만드는 그림이 있어요. 그 그림과 대조하면서 사귈 거냐 말 거냐를 결정하고 같은 공간에 넣어 줄 거냐 말 거냐를 결정하는 거예요. 다시 말씀드립니다. 인간은 먼저 자기가 질문을 던져요. 상대방에게. 상대방은 사물이고 먼저 질문을 던져요. 내 편에 넣어줄까 말까를 결정짓기 위해서.

인간이 먼저 하나님 앞에 묻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먼저 해답을 줘버려요. 해답을 줘버리고 어느 인간이 이 해답에 맞는 질문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재주가 있는지를 보십니다. 아무도 없죠. 아무도 없어요. 참 성경은 심오합니다. 스가랴 3장 1절에 보면 “대제사장 여호수아는 여호와의 사자 앞에 섰고 사단은 그의 우편에 서서 그를 대적하는 것을 여호와께서 내게 보이시니라”라는 이 짧은 문장이 하늘 나라에서 천상 회의하는 거거든요.

여기에 하나님의 대적자가 있다는 사실은 이 선지자가 천상회의에 하나님께 초청을 받은 사람이니까 하늘나라에서 하나님의 일이 어떻게 추진되는지를 알아요. 그러니까 선지자들이 땅에 내려와서 땅의 위협과 공갈에 넘어갈 이유가 없죠. 피식하고 그냥 웃는 거예요. 땅은 하늘에 계획된 대로 진행될 뿐이에요. 주기도문에도 나오잖아요.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고.

땅은 모든 고유의 시도와 의미가 아무 의미 없는 거예요. 자기중심이기 때문에. 이건 묵살되어도 괜찮아요. 내가 나를 묵살해도 상관없어요. 이게 자기 부인이에요. 중요한 것은 나에게 내 뜻이 얼마나 남아 있느냐가 아니라 주님의 뜻이 얼마나 아직도 활동하고 있느냐가 중요한 겁니다. 이게 그냥 되는 것이 아니고 욥처럼 내리쳐버려야 해요. 하나님께서 그냥 특수한 존재로 만들어 버려야 해요. 그

 러면 그걸 만드는지 안 만드는지 어떻게 아느냐. 여기서 기존에 친구라고 평소에 잘 통하는 사람과 대면하면서 갑자기 없던 거리감이 발생합니다. 거리감. 빈공간이죠. 인간은 자기 옆에 빈공간을 남겨두고 나에게 잘해주는 사람을 계속 채우고 교체하고 바꾸고 또 채우고 하면서 항상 이렇게 교체하듯이 하는데 친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옛날 욥이라면 친구라고 인정하겠는데 와 보니까 못 알아봐요.

그러면 욥의 친구들 입장에서 욥은 빈공간이 아니고 그게 적대 공간(반 공간)이 되는 겁니다. 유대인들이 메시아를 기다렸는데 오실 메시아는 빈공간, 그들이 소망했던 메시아의 자리를 채우시는 분이 아니고 그 빈공간에서 메시아를 기다린다는 그 자체를 대적하는 공격하는 그런 분으로 오셨어요. “내가 온 것은 화평을 주러 온 것이 아니고 검을 주러 왔노라. 불을 지르러 왔노라. 너의 집안 식구가 너의 원수가 된다”

집안 식구들은 화기애애하죠. 친구도 그런 친구가 없습니다. 막히지 않아요. 대화가. 단 그 누구도 복음을 모른다는 조건 하에. 그러나 복음을 알아버리면 그다음부터는 대화가 서서히 막히기 시작하면서 낯설게 돼요. 그런 말 듣거든 여러분은 이렇게 이야기하세요. “내가 봐도 내가 낯설다. 내가 봐도”라고. 이건 인위적으로 내가 조작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그러면 욥의 친구에게 하나님께서 욥을 통해 보이고자 한 것은 뭐냐 하면 죽음의 모습이 빠져버리면 인간은 교만하게 되어 있어요. 지금 욥의 친구들은 요새 같으면 삼위일체 신학, 조직신학, 기독론, 등등 다 알고 있는 신학교 출신들이에요. 운명론자예요. 신의 주권, 신학론에 대해서는 빠사한 도사들이죠. 뭐가 빠졌어요? 내가 죽어 마땅함이 빠졌어요. 죽음이 빠져버렸어요.

죽음이 빠지니까 이건 자기가 겸손에 겸손을 다해도 그게 교만이에요. 겸손에 겸손을 다해도. ‘나는 낮아져야 한다. 더 낮아져야 한다’라고 하는 게 교만이에요. 주께서 작용하는 데로 작용할 뿐이지 우리의 질문과 답변은 주님과 해야 하지 옆 사람에게 호응 얻을 이유가 없잖아요. 내가 스스로 나 자신을 자꾸 모조품으로 만들어 나가시는데 그건 주님의 십자가 죽으심이 빠진 상태이고 결국 우리는 모조품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의 본심은요 교회 오래 다닌다고 본심을 아는 게 아니에요. 사람에게 목돈 한번 생겨 보세요. 본심 확 드러납니다. 사람은 아무리 점잖아도 돈 생기면 딴짓하게 되어 있어요. 지금 여러분들이 돈이 안 생기니 무슨 말인지 모르지만 돈 갑자기 생기면 반드시 딴 짓 합니다. ‘내가 이럴 줄 몰랐다’라고 하는데 당연히 몰랐죠. 평소에 신학으로 둘둘 말아서 복음으로 둘둘 말아서 자기가 산사람이라고 우기니까 그게 신자가 아닌 거예요. 교인인 거예요.

다시 말씀드립니다. 보통사람과 교인과 영속성이 있어요. 교회 와서 정 나누고 교회 와서 하나님 찾고 성경 보면 교인 됩니다. 신자가 아니에요. 신자라 하는 것은 죽음만이 나의 자랑거리예요. 죽음만이. 내가 죽었다는 거 외에 더 이상 자랑할 것이 없어요. 보험들 필요도 없어요. 이미 죽었는데 무슨 보험을 들어요. 주께서 나를 죽게 하셨다는 거, 또는 죽으신 분이 내 안으로 들어옴으로 말미암아 이제는 내 인생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사용하시는 인생만 여기에 작용할 뿐입니다.

그러면 주님이 나를 대상으로 보는 것을 감사해야지 내가 천당 가기 위해서 예수님을 어떻게 조작하고 예수님을 어떻게 해보겠다는 식으로 하나님을 대상체로 삼으면 안 돼요. 주님이 그냥 나를 대상체로 삼아서 움직여 나갈 때 세상에서 그게 선지자의 모습이고 욥의 모습이잖아요. 세상 무서워할 필요 없고 두려워할 필요도 없어요. 그들이 뭘 안다고요. 그들이 세상에 대해 뭘 알아요. 죽음도 모르면서. 자살하는 사람도 있지만 구태여 우리가 자살하지 않더라도 결국 다 죽습니다. 그걸 약간 앞당겼다고 보잔 말이죠.

돈 있고 자식 있고 자기 건강해도 죽는 순간에 돈 없는 사람 되고, 자식 없는 사람 되고, 건강 하나도 없는 사람 되거든요. 그걸 미리 앞당겨 주시는 고마우신 주님. 이게 세상을 아는 진짜 지혜자가 아닐까요.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나를 위해 만들어진 공간에 주께서 십자가로 오셔서 우리가 얼마나 일방적으로 자기를 꾸미며 모조품으로 살아가고 있는지를 깨닫게 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우리 안에 욥이 들어오게 해주시고 주님이 들어오게 해주셔서 주님보다 더 소중한 것이 없음을 날마다 깨닫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