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2강-여호수아 22장 10~12절(단)20190707-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여호수아 22장 10~12절입니다. 구약성경 354페이지입니다.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과 므낫세 반 지파가 가나안 땅 요단 언덕 가에 이르자 거기서 요단 가에 제단을 쌓았는데 보기에 큰 제단이었더라, 이스라엘 자손이 들은즉 이르기를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과 므낫세 반 지파가 가나안 땅의 맨 앞쪽 요단 언덕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속한 쪽에 제단을 쌓았다 하는지라, 이스라엘 자손이 이를 듣자 곧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실로에 모여서 그들과 싸우러 가려 하니라”
이스라엘 내부적으로 서로 의견 차이가 있다고 서로 오해들을 하고 있었습니다. 다른 것이 아니고 요단 동편에 나왔던 가나안 본토가 아니고 강 건너서 남의 땅에 기거하기를 원했던 두 지파 플러스 1/2 지파인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과 므낫세 반 지파가 단을 쌓았다는 소식을 나머지 아홉하고 반 지파가 듣게 되었습니다.
듣게 되었을 때 그들은 격분해서 “이스라엘에서는 이럴 수 없다. 쳐들어가서 우리가 싸우자”라고 하는 그 대목입니다. 이 대목에서 우리가 간단하게 알아야 할 것은 이겁니다. ‘왜 다른 단은 안되는가? 왜 다른 제단은 안되는가?’라는 거예요. 달리 말해서 두 지파 반이 세웠던 단은 왜 안 되고 실로에 언약궤 있는 그 장소는 되는 이유가 뭐냐 하는 겁니다.
그 당시 사람들에게 있어서 하나님과 인간의 유일한 매개, 연결 통로는 둘이어서는 안되고 오직 하나여야 한다는 것이 철두철미했습니다. 이방 민족과 이스라엘의 차이가 뭐냐 하면 이방 민족은 하나님과 다른 민족들 사이에 연결 체제가 없어요. 막혀있습니다. 막혀 있기 때문에 그들은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어요.
그게 그들의 세계관이고 요즘 말로 하면 그들의 신학이었습니다. 옛날부터 지금까지 신학이라 하는 것은 뭐냐 하면 인간이 하나님을 찾아가는 방법이 신학이에요. 인간이 신을 찾아가는 방법. 그렇다면 제가 문제를 낼 테니까 여러분이 한번 속으로 답변해 보세요. ‘인간은 하나님께 갈 수 없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인간을 구원한다는 신학은 옳은 신학이냐?’라고 질문을 던집니다.
인간 쪽에서 나아가는 것은 하나님께 도달될 수 없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 하나님 쪽에서 오셨다는 신학의 주장은 옳은 주장이냐는 겁니다. 정답을 말씀드리지요. 옳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계신 데 인간은 못가니까 하나님께서 왔다고 하면 이건 정답이 아니고요. 정말 제대로 안다면 아예 하늘이라는 자체가 천국 자체가 인간에게는 없다가 되어야 합니다.
인간은 인간 쪽에서 갈 수 없으면 무조건 없는 거예요. 인간이 모르면 없는 겁니다. 우리 인간에 대해서 제대로 알아야 해요. 인간은 자기가 경험해서 손으로 만져서 없는 것은 없는 거예요. 눈으로 볼 수 없는 건 없는 거예요. 우리는 정직해야 해요. 정직하지 않으면 가짜이고 거짓된 믿음을 가지고 자꾸 믿음이라고 하는 겁니다.
교회가 교회 되려니까 없는 천국을 자꾸 만들어 내서 있다고 가정하고 믿자고 하는 것이 교회가 되어버려요. 하나님 저기 계시고 삼위일체가 계시다는 것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기때문에 그 성경대로 일단 걸쳐놓고 우리는 그분과 연관해서 생각하자는 건 인간적인 생각이에요. 그게. 그 생각 자체가 인간적인 생각이라고요.
왜냐 하면 우리가 납득가기 때문이에요. 우리가 이해가 되기 때문에 그래요. 우리가 이해된다는 것은 어디서 나온 이해냐 하면 ‘선과 악’ 그걸 두 자로 ‘지식’이라고 하는데 우리가 아는 지식으로 안다는 거, 우리가 아는 지식으로 납득가는 천국은 어떤 멋진 구조와 시스템이든지 가짜가 되는 겁니다. 제가 괜히 이야기하는 게 아니에요.
예수님의 십자가는 누구 신학 때문에 죽었다? 유대인의 신학 때문에 죽은 겁니다. 그럼 유대인의 신학은 뭐냐? 인간은 하늘나라 갈 수 없는데 하나님의 은혜로 간다는 것이 유대인의 신학입니다. 그게 유대인의 신학이에요. ‘다른 민족은 그런 기적을 준 적 없다. 우리 민족에겐 그런 기적을 줬다’라는 기적. 유대인들은 기적을 원하거든요.
그 기적이 뭐냐 하면 ‘우리에게 홍해를 건너게 하고 요단강을 건너가게 하고 약속의 땅을 주셨다. 이에 기적이다. 우리는 기적을 받았으니까 그 기적을 무시하지 말자. 그 기적의 가치를 무시하지 말자. 모세가 하나님을 만난 그것을 무시하지 말자.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친 그것을 무시하지 말자. 그 모든 것이 축적되어서 오늘날 우리 이스라엘을 구원한다는 것이 하나님의 명백한 손에 잡힌 증거다’라는 것이 유대인의 신학이에요.
돈 모아서 이스라엘을 한번 가봐야 하는데요. 제가 낮에도 이런 이야기 했습니다만 이스라엘에게 배우란 말이죠. 이스라엘이 어떤 신학을 가졌기에 그들이 망했는지를. 그들이 망한 것이 남의 이야기가 되면 안 돼요. 망했기 때문에 우리가 배워야 해요. 망한 것을 나 몰라라 하면 자기는 하늘에서 툭 떨어지는 인간입니까? 아니거든요. 이스라엘이 얼마나 하나님께 잘하려고 했어요.
사울이라는 사람이 얼마나 율법대로 살려고 노력했습니까? 사울이라는 사람이. 예수님 만나기 전에. 그러나 예수님 만나고부터 사도바울은 뭘 알았느냐 하면 소급해서 십자가가 뭔가를 알게 되었어요. 내가 주님 만났고 너도 만나자는 게 아닙니다. 십자가는 누굴 만나고 안 만나고 관계없이 십자가는 여전히 유효하다는 겁니다.
에베소서 2장에 보면 십자가 안에서 이미 인간은 갇혀 있는 거예요. 어디에 갇혀 있느냐 하면 갈라디아서 3장에 보면 죄에 갇혀 있는 겁니다. 사도바울의 편지 하나하나를 들어보면 항상 기본은 뭐냐 하면 갇혀 있다는 거예요. 로마서 1장 26절에 보면 버림받았고 내어 버려두셨다는 거예요. 네가 어떤 환상과 망상으로 치장을 하고 포장을 하든지 내 버려두는 거예요.
갇혀 있으면 인간은 어떻게든지 갇혀 있는 티를 내게 되어있습니다. 갇혀 있는 티가 뭐냐 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위한 하나님이라는 티를 반드시 내게 되어있어요. ‘나를 구원해야 하나님답다’라는 이런 티를 꼭 내게 되어있어요. 그러나 정작 만났던 사도바울은 절대로 그럴 수 없어요. 이거는 뭐냐 하면 ‘내가 몰랐던 사실을, 내가 선악과 따먹고 몰랐던 사실을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주여’라고 이렇게 되는 겁니다.
내가 못 가는 데 하나님께서 구원하려고 누구 보낼 줄 알았다는 그런 게 아니에요. 그런 정도는 이미 유대인들이 다 갖추고 있는 겁니다. 유대인들이. 한국 교회의 신학에서 문제점이고 이단인 이유가 유대인들이 하는 신학에서 못 벗어나서 그래요. 유대 바리새인 신학이 오늘날 한국 개혁주의 교회를 있게 한 신학이에요. 장로교 신학이에요.
그들의 예정론이 오늘날 칼빈의 예정론과 똑같아요. 사람들은 뭐 별다른 줄 알고 있어요. 유대인 망했다면 이 한국 교회도 망한 거고 유대인이 이단이면 우리 교회도 이단이고 다 이단이에요. 인간은 이단 외에는 할 재주가 없어요. 이단적인 모습 외에는 내놓을 게 없다니까요. 그래서 구원은 주님이 구원하지 인간이 뭘 알아채서 구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 단이 뭐냐? 두 개의 단이 있다는데 여기 공격하겠다는 아홉 지파 반도 오해했고요, 두 지파 반도 오해한 겁니다. 우리에게 단이 있다는 것은 하나님께 연결 체제가 갖추어졌다는 건데 그 연결 체제가 인간이 연결 체제를 갖추었다는 그 사실을 공격하리라고 이스라엘은 감히 생각도 못 했어요. 예상도 못 했습니다.
여러분들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아십니까? 십자가가 나를 심판했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아십니까? 이 사실을 알리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광야에서 이스라엘에게 불뱀이 찾아오게 했고 불뱀에 물리게 했고 모세가 높이 들어 올린 게 상당히 신기합니다. 뭘 높이 들었느냐 하면 놋뱀을 쳐들었어요. 나를 물어뜯은 놋뱀을 쳐들었다고요. 구리로 만든 놋뱀을.
이건 십자가가 뭐냐 하면 나를 물어 죽이게 하는 요소가 들어 있는 사건이 십자가 사건이에요. 교회 한 50년 다녔잖아요. 그러면 오늘 십자가를 안다는 말은 50년 다닌 것을 물어뜯는 그 십자가를 알아야 십자가를 아는 거예요. 돈 많이 바쳐서 예배당 지었잖아요. 그러면 우리가 십자가를 안다는 것은 예배당 지었던 그 돈, 헌금한 나를 물어뜯는 십자가가 십자가예요.
오직 십자가 물어뜯는 십자가 현장에는 나는 없고 물어뜯는 십자가 이빨 자국만 남는 게, 그게 우리의 증인이에요. 그게 십자가라고요. 자꾸 십자가 믿는다고 구원되는 것이 아닙니다. 물어뜯겨야 해요. 십자가에게 물어뜯겨야 해요. 사람은 행동하게 되면 행동으로 끝나는 게 아닙니다. 행동하게 되면 반드시 실적과 업적이 남게 되어있어요.
공부하면 공부한 티가 남게 되어있고 아이를 키우면 애가 장성한 것이 남게 되어있고요. 외손녀 키우면 외손녀 티가 남게 되어있어요. 사진 팍팍 찍어서 보내고 이쁘다고 하고 그렇지요. 반드시 티가 남게 되어있어요. 모든 게. 그러나 내가 죽으면 그 흔적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지금 눈감고 관속에 들어가 누워있는데. 그 많은 흔적도 나 눈 감으면 같이 없어지는 겁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뭐냐 하면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어떤 매체가 있어야 한다는 그런 우리들의 은밀한 요구마저도 그것이 죄에 불과하고 악마의 욕심에 불과하다는 것을 일깨워주기 위해서 십자가를 신약에 배치하고 제단을 언약궤를 구약에 배치한 겁니다. 그렇게 배치한 거예요. 사람이라는 것은 기억이 있어서 자기가 살게 되면 그 살았던 장소를 자기의 기념물로 여기게 되는 겁니다.
사람들은 흔히 말하죠. 사기당하면 사기꾼 나쁘다고요. 그러나 그 앞뒤를 비춰보세요. 사기 치는 사람만 나쁜가요? 과연 그럴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사기당한 사람도 은근히 원했어요. 사람이 남을 사기 칠 때 그 사람이 은근히 원하는 것을 치고 들어가는 겁니다. 전화 걸어서 상대가 “누구십니까?”라고 물으면 “지금 괜찮은 부동산 개발하고 있는데 투자하시렵니까?” 그 전화를 하루에 두세 번씩 저에게 왜 하는 걸까요?
부동산 회사에서 왜 전화하는 거예요? ‘당신이나 나나 돈 버는 거 재미로 여기며 살잖아. 아닌 척하지 마. 다 알아. 인간은 똑같아’라고 하는데 그렇거든요. 언약궤가 있는 제단의 의미는 ‘제단이 있다. 제단을 쌓았다’라는 것이 의미가 아니고 그 앞에서 우리는 없어지고 지워지고 소멸되고 사라진다는 의미를 품고 있어요.
지금 오늘 본문에 있는 두 지파와 므낫세 반 지파와 단이 왜 문제가 되느냐 하면 그 단을 세움으로써 그 단을 통해서 우리가 이 땅을 점유할 만한 자격이 있고 권리가 있다고 자기를 생생하게 돋보이게 하기위해서 단을 쌓는 거예요. 어떤 단을 쌓는 것은 단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 단 주변에 우리가 있다는 것을 자기 존재 증명, 자기 존재 기념을 위해서 단을 높이 쌓는 겁니다.
그것이 나쁘다면 실로에 언약궤 있다는 것도 동일하게 언약궤 백날 있어 봐야 그런 안목과 동일한 안목으로 아홉 지파 반이 그렇게 생각하는 데요. 똑같은 거예요. 그렇게 언약궤를 세워놔도 언약궤 의미를 모르거든요. 언약궤에 대해 다시 말씀드릴까요? 언약궤라 하는 것은 언약궤 있음으로써 그 주변의 우리는 소멸되고 사라지는 것이다.
옛날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렇게 보지 않았습니다. 언약궤가 있음으로써 우리가 이 땅을 점유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고 복 받을 만해서 복 받았다고 이스라엘이 잘못 생각했단 말이죠. 그러면 이 언약궤가 가만히 있는 언약궤가 아니고 언약궤가 어떤 효력을 내는 겁니다. 어렵게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인간은 혼자 있을 때 인간은 자꾸 상상해요. 상상하기 때문에 그 인간이 혼자 있을 때 상상하는 나는 내가 아닙니다.
그럼 진짜 인간이 뭐냐. 인간이 움직일 때 그때 여분의 기운으로 나타나는 게 자기 자신이에요. 움직일 때. 그러면 인간은 언제 움직입니까? 남을 만날 때, 타인을 만날 때 움직이죠. ‘나’라는 것은 ‘나 + 남’의 합이에요. 내가 혼자 토굴에 앉아서 이게 ‘나’라고 하지 않습니다. 내가 누굴 만나요. 누굴 만나게 되면 나는 그 사람 앞에서 가만있을 때는 안 나타나는 본성이 타인을 만나면서 그게 계속 토하듯이 계속 뭐가 나오게 되어 있단 말이죠.
사람을 만날 때마다 나오는 위장의 내용물이 다 달라요. 사람을 만날 때마다 내놓는 내용이 다 달라요. 그걸 다 합산해 보잔 말이죠. 그게 바로 혼자 있을 때 상상하는 ‘나’가 아니에요. 진짜 나예요. 사람이 혼자서 상상하게 되면 무슨 좋은 상상인들 못 하겠습니까? 온갖 좋은 거 상상 다 해요. 나는 이런 인간이라고. 직접 누군가를 한번 대면해 보세요.
제일 먼저 나오는 것이 안 지려고 하죠. 너보다 덜 무식하려고 애쓰죠. 자존심 투쟁하죠. 자랑거리 내놓지요. 저쪽에서 자식 자랑 나오면 이쪽에서 준비된 자랑 나오고 저쪽에서 아파트 자랑 나오면 이쪽에서 부동산 자랑 튀어나옵니다. 저쪽에서 돈 버는 이야기 나오면 이쪽에서 더 많이 벌었다는 부동산 이야기 나오죠.
그게 싫다고 집에 가만히 있으면 혼자 도사 됩니다. 가만있으면 자기가 훌륭한 사람 돼버려요. 주께서는 가만두지 않습니다. 계속 나와 똑같은 지저분한 사람을 만나게 하십니다. 왜 그렇게 하시는가? 언약궤의 의미는 네 죄를 알고 그 죄를 용서받으라는 것이 언약궤가 아닙니다. 이미 용서해 주고 그다음부터는 슬슬 팔 걷어붙이고 “네가 어떤 인간인지를 여러 사람 만나게 해주마. 네가 혼자 있을 때는 천하의 신앙인이지. 이 사람 저 사람 만나게 저기 칠성 시장에서 과일 한번 사게 해줘? 어디 사업 한번 하게 해줘?”라고 하시는 거죠.
우리가 얼마나 돈에 약한지 복음 오면 복음에 고개 숙이다가도 돈 오면 돈에 약하게 돼 있어요. 돈에만 약한가요? 자식 하나 학교에서 한 번 왕따 당해봐요? 우리 악마적 본심 다 튀어나오는데요? 주께서 그렇게 자꾸 우리를 건드리는 겁니다. 건강할 때는 천하의 신앙인이죠. 한번 아파보세요. 정신없지요.
저는 뉴스를 보면 다슬기 잡다가 죽었다는 소식을 자주 듣거든요. 그래서 제가 생각했죠. 이상하게 다슬기 잡는데 왜 죽지? 제가 다슬기 좀 잡아 봤거든요. 많이 잡지는 못하지만. 다슬기를 잡아보면 한 마리 있잖아요. 그 한 마리만 잡고 집에 가려고 하는데 그 옆에 뭔가 또 시커먼 거 있으면 집에 갈 수가 없어요. 또 잡아야 해요. 그러니까 다슬기 잡기가 뭐냐 하면 거기에 완전히 매몰되는 거예요. 계속 줄지어 있어서 매몰돼요.
인생이 이런 겁니다. 한번 재미 봤잖아요. 그러면 못 빠져나옵니다. 계속 연결 연결 고리로 되어있어서 돈이 보이는데 그걸 놓을 수가 없어요. 돈이 눈앞에 보이는데 놓을 수가 없어요. 주일이고 뭐고 없어요. 돈이 보이는데 계속해야 해요. 저 기회를 놓치면 두 번 다시 기회 안 온다고 생각하고 아는 사람 있으면 뭐 또 있을까 아는 거 연결하고.
언약궤라 하는 것은 언약궤 하나 알아놨으니까 이제 구원되었으니까 이제 내 맘대로 산다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멈추는 것은(STOP) 언약궤가 쥐고 우리가 언약궤에 놀아나는 겁니다. 모세가 놋뱀을 들었다는 말은 네가 놋뱀에 물렸다고 서러워할 것이 아니라 그 무는 뱀이나 물린 우리나 똑같은 뱀 새끼에 불과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나타날 때 주님이 가만히 있지 않고 움직였어요. 주님이 가만히 있으면 주님이 스타가 되고 하나님이 되고 영광스러워요. 그러나 주님이 움직여 버리면 주님은 뭐냐 하면 저주받은 보통 인간보다 더 못한 비리비리한 존재가 돼요.주님이 움직이니까. 왜 움직일 때 그렇게 되느냐 하면 환경 자체가 주님조차 하나님조차도 이 땅이 죄인의 모습으로 만드는 환경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물리학의 양자론에 보면 질량은 어디서 생기는가? 질량이라는 것은 힉스장이라는 곳에 어떤 물질이 가게 되면 이게 뻑뻑하게 만들어요. 어떤 저항을 줘서. 그 저항의 무게가 질량이라는 거예요. 보이지 않는 힉스장이라 것이 있는데 이게 쉽게 하면 뻑뻑한 죽, 젤리 같은 곳에서 쇠 구슬을 굴리면 속도가 안 나잖아요. 그 방해 양이 질량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덩치가 크면 질량이 많이 나가고 덩치가 작으면 질량이 적게 나오고 하는 거예요. 물론 부피와 연관된 것이 아니고 밀도와 연관되지만요. 이 세상이 뭐로 꽉 차 있어요. 혼자 있으면 도사예요. 천하의 기독교 신자예요. 그러나 움직여 보세요. 이상하게 얽히고설킨 것이 빡빡하게 굳어져 가요. 그러면 거기서 우리가 뭘 나타내느냐 하면 ‘아, 우리가 이 죄 많은 세상의 일부 구나’를 깨닫게 되는 겁니다.
독일에 우리나라처럼 동독과 서독으로 나누어진 적이 있습니다. 나누어진 적이 있는데 그때 동독에서 서독으로 넘어가지 말고 자본주의 좋아하지 말라고 국가에서 사회주의 개혁의 일환으로 공공 주택을 많이 지어가지고 그걸 헐값으로 동독 주민들에게 주었어요. 동독 주민들은 그렇게 헐값으로 주는 것도 모르고 자유를 달라고 하면서 장벽 넘었다가 가시에 찔리고 난리도 아니었죠.
그런데 지금은 동독과 서독 사이에 베를린 장벽이 완전히 없어졌죠. 그리고 베를린에서 집값이 갑자기 상승했습니다. 그 상승의 이유가 뭐냐 하면 인구는 일 년에 오만 명씩 베를린에 들어오는데 주택을 계속 헐값에 주려면 그만큼 베를린시 재정이 돼야 하는데 재정이 되려면 세금을 더 모아야 하기때문에 반대가 있어 재정을 모으지 못하니까 그 공공 택지를 민간 업자에게 넘겼습니다.
넘기자마자 이 민간 업자가 은행에 이자가 얼마 안 되니까 부동산 투기의 대상이 되어서 임대료가 높아진 거예요. 높아지니까 전에 그 아파트에서 월 25만 원에 살던 사람들이 전부 다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다 쫓겨났거든요. 이게 무슨 이야기냐 하면 내가 헐값에 편안하게 살려면 국가라는 것에 그만큼 재정이 넉넉해야 하는데 재정이 넉넉하려면 세금을 많이 떼서 가져가야 해요. 이게 제가 지금 모순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나라가 잘되려면 나라가 돈이 있어야 하는데 나라가 돈 없으면 민간 업체에 넘겨야 해요. 그러면 민간 업자는 그걸 투자하거든요. 투자라는 것이 뭐냐 하면 ‘미래에 돈 법니다. 돈 부어 넣으세요.’라고 하는 것이 투자란 말이죠. 따라서 미래에 돈 벌기 싫거든 나가 죽으라는 이야기예요. ‘돈 욕심 없거든 차라리 죽어버려라’라는 이야기입니다.
나라에 욕할 것이 아니고 이 자본주의 욕할 것이 아닙니다. 근본적으로 우리는 모순된 세계에 살고 있습니다. 나를 위한다면 남이 죽어야 하고, 남을 죽이면 내가 살고, 그만큼 자기는 정당하다는 겁니다. 내 사는 거 중심으로 무조건 정당하다고 우기는 거예요. 그러면 이미 유산 받아서 대대로 부자 집안은 어떠냐. 대대로 부자는 예외상태를 요구합니다.
예외상태라는 것은 법적인 모든 것이 정지된 상태, 법 위에 있는 상태를 말하거든요. 그 사람들이 부자기 때문에 세금을 많이 냅니다. 그러면 나라는 나라의 장래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그렇게 부자의 말을 들을 수밖에 없고 어려운 사람들은 어려운 사람대로 계속해서 분리시켜 줘야 하는 거예요.
이스라엘도 마찬가지예요. 이스라엘이 그 땅에 살게 되면 이건 도 닦는 것처럼 그 땅에 가만히 살고 율법만 읽으면 되는 게 아니에요. 그들은 그 땅에 살면서 계속해서 주변 나라의 공격을 받습니다. 그러면 제 아까 이론대로 인간은 자기로부터 뭔가 움직여야 해요. 다슬기 잡으면 안 돼요. 계속해서 시키는 대로 움직이게 되면 자기의 몰랐던 죄 성, 그냥 내가 살면 된다는 죄 성이 계속 나온다는 말이죠. 계속 나오는 거예요.
그러니까 오늘 본문에서 여호수아가 싸우러 가자고 할 때 “싸우지 마라”고 했어요. 너희나 우리나 똑같은데 뭘 싸우냐는 말이죠. 그들은 뭘로 변명하느냐 하면 우리가 우리 자신의 하나님을 따로 섬기기 위해서 단을 쌓는 것이 아니고 실로의 언약궤를 우리가 믿는데 다만 우리가 이스라엘 백성임을 기념하기 위해서 단을 쌓는 것이니 너무 예민하게 굴지 말라고 합니다.
자신들은 하나밖에 없는 언약궤를 믿으니까 싸우지 말고 그냥 돌아가라 하니까 나중에는 흐지부지되어서 돌아가요. 22장 뒷부분에 이야기가 쭉 나옵니다. 그러니까 이 이야기를 왜 여호수아에서 이렇게 하느냐 하면 사람은 배고플 때 어려울 때 하나님 찾지만 일단 자기의 거처가 고정되어 있고 이만하면 살겠다 싶으면 그다음부터는 자기의 본색이 드러나게 되어 있단 말입니다.
하나님이고 뭐고 간에 미래의 내가 부자가 되는 거, 이거 외에 다른 관심사가 있을까요? “우리는 그렇지 않습니다”라고 하지 말고 그냥 “아멘”하세요. 우리가 그렇지 않다고 하는 것은 아직도 우리가 무지해서 그래요. 아직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라서 그렇다니까요. 우리는 내가 뭘 믿어서 그런 게 아니에요.
주께서 자신의 십자가를 증거 하려고 우리로하여금 뱀 같은 것들 속에 얽히고설키고 빡빡하게 이 세상을 살게 하십니다. 죽을 때까지. 뭐 연금 탄다고 이제 됐다 하시는데 연금타도 소용없어요. 자식들이 뭔가 일 저지르면 끝납니다. 또 뭐 나름대로 거부하게 되면 모순 관계가 되어서 자식이 삐지면 안 되기 때문에 나쁜 엄마 될까 해주고 또 돈 주면 성질 버려서 또 돈 달라고 할 고 뻔한 거고.
그러니까 인간은 이 세상 자체가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뭔가 내가 사는 데 적합하지 않아요. 내 몸 하나 유지할 수 없는 게, 그냥 죽으라고 주신 땅이에요. 인생은 뭐냐 하면 죽는 연습입니다. 죽는 연습이 우리 인생이에요. 이왕 죽는 거 제대로 언약을 알고 죽어야죠.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를 주님의 사랑 앞에서 없어지게 사라지게 하옵소서. 그러나 그것이 내 방식이 아니라 주께서 주시는 방식 앞에서 우리는 죄인이며 주의 은혜로 살아왔음을 늘 감사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