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강의

개체와 말씀세계 190909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9. 9. 11. 17:39
2019-09-09 16:14:47조회 : 152         
개체와 말씀세계 190909이름 : 이근호 (IP:119.18.87.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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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윤범 (IP:119.♡.174.75)19-09-11 15:53 

20190909a 부산강의 : [시편]21(14편)-개체와 말씀세계
(강의:이근호 목사)


질문, 이것도 중요하기 때문에 녹음할 거예요.

첫째 사망, 둘째 사망이 예수님의 십자가와는 결정적이죠. 왜냐하면 내 몸 같으면 첫째 사망, 둘째 사망, 첫째 부활, 둘째 부활 없어요. 그런데 내 몸을 다루는 것은 아담의 몸 안에서 다뤄지는 거고 성령이 임하게 되면 분명히 아담의 몸인데 주님의 몸으로 간주해버려요. 그럼 우리의 몸은 뭐냐 하면, 예수님의 몸이 이 역사 속에서 어떠한 양상으로 드러낼 거냐를 표현하는데 우리의 육체가 필요한 거죠. 보이지 않는 몸은 어떤 내용들을 담고 있는지를 전개하는데 있어서 우리 눈에 보이는 육체가 꼭 필요한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첫째 부활이 체험이 되는 게 아니고 그냥 다뤄지는 거죠. 다뤄지고 뒤돌아보면 주께서 그런 식으로 묘사했다는 거예요. 내가 나를 그렇게 묘사할 권한도 없고 자격도 없어요. 살다 죽으면 그만이에요. 그런데 주님이 일방적으로 이건 첫째 부활이야, 둘째 부활이야, 이거는 첫째 사망, 둘째 사망이라고 규정하는 것은 우리 몫이 아니고 주님의 일방적인 선언입니다. 그걸 말씀의 세계라 해요. 우리는 인간의 세계에 있거든요. 인간의 세계에 있는 것을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말씀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다시 정리하게 되면,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첫째 부활, 둘째 부활, 첫째 사망, 둘째 사망이라는 것은 말씀의 세계에서 일방적으로 우리를 그렇게 규정하는 겁니다. 우리의 체험이나 경험으로 뽑아낼 수 없어요. 우리의 체험이란 것은 내 몸이 유지될 경우와 유지되지 않는 경우 딱 두 가지밖에 없거든요. 이 몸이 그대로 유지되는 것과 아파서 죽는 것, 두 가지 경우밖에 없잖아요.

두 가지밖에 없으면 이 몸이 있는 것과 없는 것 사이, 그걸 죽음이라고 하잖아요. 우리는 아무리 따져도 죽음이 하나밖에 없어요. 그런데 성령께서 우리 몸을 무슨 몸으로 바꾼다고 했어요? 주의 몸으로 바꾸죠. 주의 몸으로 바꾸면 우리 몸에는 없는 게 주의 몸엔 있어요. 그게 바로 부활이에요.

여기서부터 어려운 게 뭐냐 하면, 인간의 몸으로 부활을 이해하려면 경험되지 않습니다. 경험되지 않으면 상상하게 돼있지요. 이 몸이 죽으면 부활된다. 이건 상상이라니까요. 실제가 아니고 우리의 욕망이고 욕심이 되죠. 우리 몸이 생생하게(별로 생생하지도 않지요^^) 살아있을 때, 살아있는 경우가 이미 보람상조가 처리한 상태, 관 속에 누워있지요. 자식들이 와서 입관, 하관하고 있는 그런 상태, 우린 다 듣고 있지요. 이 사이를 이걸 죽음이라 하거든요. 숨 끊어진 상태를 죽음이라 한단 말이죠. 우리가 경험하든지 체험하는 건 이것밖에 안 돼요.

그러면 성경에서는 부활이란 게 나오잖아요. 요한계시록이나 고린도전서에 부활 나오지요. 부활 나오니까 체험되지 않은 여기서 상상력이 동원되는 거예요. 이건 허구지요. 그냥 욕심이에요, 욕심. 되면 좋겠네. 부활되면 억수로 좋겠다. 그뿐이에요. 실재 아니에요. 난 예수 믿고 교회 다녔으니까 부활되겠지. 누구 마음대로? 지 착각이지.

이런 현상이 왜 일어나는지 제가 설명해드렸습니다. 인간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는 반드시 점선으로 표현해요. 없는 거예요. 없는데 과거와 현재가 경험한 기억으로 자기가 구성을 하지요. 자기가 그냥 정해버려요. 자기가 정하니까 이것은 나만의 부활이에요. 이방인적입니다. 이스라엘이 집단적인 부활이 아니고 나만의 부활이에요. 다니엘에 나오는 죽은 자가 살아나는 것은 이스라엘이 살아나는 것이지 개인이 살아나는 것이 아닙니다.

에스겔 47장에 성전에서 물 나오지요. 특정 개인을 향합니까, 이스라엘 전체를 향합니까? 이스라엘 전체를 향하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너 잘났다, 나 잘났다 할 수 없어요. 생명의 물을 받으면. 요한복음 4장에서 사마리아 여인이, 나 구원받았다고 했어요, 메시아를 알았다고 했습니까? 메시아를 안 거죠. 나만 구원받았다가 아니라 메시아를 안 거예요. 그리고 이스라엘은 메시아를 기다린 거예요. 메시아는 이스라엘을 건지는 것이지 나만을 건지는 게 아닙니다.

나부터 출발하는 것은 너무나 이방적 사고방식이에요. 사적구원, 개인구원. 모든 교회가 개혁주의신학 자체가 개인구원부터 시작하기 때문에 이단적입니다. 솔직하게 이단이라 하고 싶은데 ‘적’이라고 하나 붙여주는 거고 그냥 이단이에요. 왜? 나의 구원만 하기 때문에. 거기서 새끼 친 게 뭐냐? 구원파잖아요. 구원론, 구원파. 당신 언제 구원받았습니까, 부터해서 기존 교회 전부 다 구원에 관한 거예요. 성경과 관계없어요.

없으니까 허전하잖아요. 그러니까 마저 채우려고 하는데 어제 낮 설교에서 이야기했지만 십자가 앞에서 남아있는 미래는 없다. 십자가가 최종성, 마지막 종결이기 때문에 미래가 없어요. 그걸 종말이라 합니다. 미래가 없다니까요. 예수님께서 십자가가 미래를 밟고 있는데 미래는 없어요. 모든 미래는 십자가로 다 소환되기 때문에 따로 나만의 미래를 설정할 권한도 없고 설정할 필요도 없어요. 십자가로 끝내기 때문에.

그러면 내 미래가 없어지고 십자가로 소환되려면 그 가운데서 우리 자신은 어떻게 돼요? 우리 자신은 죽으면 되지요. 내가 죽으면 나의 미래도 신경 쓸 필요 없잖아요. 예수님의 기도 가운데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란 말이 나오지요. 여러분 기억나십니까? 시험에 들지 말게. 나에서 우리로 가야 되는데 자꾸 나로 가려하는 거예요. 시험이란 단어가 어디서 나오느냐? 광야에서 나온 거예요. 광야에서 너희 조상들이 무슨 짓을 했는가? 그게 시험입니다.

그럼 시험이 되려면 이 세상 환경이 광야로 바뀌어야 되겠죠. 광야로 바뀌면 본색이 드러나겠습니다. 어디로 돌아가자? 애굽으로 돌아가자. 시험이란 방향성이 이야기하는 겁니다. 우리가 알던 그 시절이 좋았다는 겁니다. 그리고 미래는 우리가 알던 이미 경험한 상상한 미래가 있을 것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이 동행하시니까 애굽보다 더 잘 살게 하시겠지. 광야 같은 것을 없을 거야, 아마. 가자마자 멋있을 거야, 라고 생각했던 그것과 하나님께서 제공한 그 광야란 사막 같은 환경과 대비해볼 때 본색이 본능적으로 톡 튀어나오지요. 내가 이러려고 교회 나왔나, 하는 식으로.

광야란 애굽에 살던 자아를 죽이는 장소에요. 죽이시는 하나님이라니까. 죽으라고 광야에 집어넣었는데 우리는 그냥 사는 게 아니고 옛날식으로 살았으면 좋겠다. 주님은 네가 옛날식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영생 얻으라. 우리는 옛날식이 좋습니다. 맨날 싸움이 그 싸움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어제 오후에도 그런 설교했지만 교회 나와서 그냥 성경 알 필요도 없이 하나님 저기 계시고 열심히 빌면 복 받는다. 왜 그렇게 간단한 걸 놔두고 자꾸 성경 봐야 되느냐? 귀찮다. 열심히 기도해서 응답받고 복 받을래. 그쪽으로 갑시다, 라는 생각이 계속 나오게 마련이에요.

그러나 왜 성경 봐야 됩니까? 거기에 광야 나오고 이스라엘 나오거든요. 이스라엘 나오고 집단적으로 어떻게 대들었으며, 이방인 나오잖아요. 이방인들은 얼마나 개인주의냐. 이방인들은 개인적인 지혜를 원하고 개인적인 지식을 원하거든요. 유대인들은 집단적인 기적을 원하지요. 그러나 사도 바울에 있어서 구원의 능력은 어디서 나옵니까? 어리석은 십자가지요.

아까 집사님 들어올 때 목사님 장난치며 못 들어오게 했잖아요. 돌아가라 이 말이죠. 여긴 올 데가 아니다. 우리가 그것을 시험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진정한 시험의 해석은 바로 네가 살던 데로 돌아가라. 거기에 정들었고 몸에 배였잖아. 네가 모르는 하지도 않은 짓을 왜 하려고 하냐는 거죠. 그것은 주께서 이끌어줬기 때문에 하는 거예요. 성경을 봐야 된다는 거예요.

성경을 보면 뭐가 좋으냐? 바로 우리가 알던 세계에서 어느 세계로 들어갑니까? 말씀이 세계로 들어가요. 말씀의 세계에 들어가면 첫째 부활, 둘째 부활 없어요. 이건 주님 몸에 해당되는데 나한테는 그냥 상상의 세계일뿐인데 이게 상상이 아니고 이미 들어온 게 돼버려요. 이미 미래가 나한테 덮쳐버렸어요. 생소한 미래에요. 낯선 미래.

낯선 미래가 되면서 우리에게 익숙한 미래는 과거, 현재가 바탕으로 해서 미래가 상상되잖아요. 점선이니까 미래는 없는 거예요. 없으니까 억지 부려서 채우는 거죠. 나는 앞으로 이렇게 될 거야. 천당 갈 거야. 그런데 천당은 가는 게 아니고 덮쳐버리면 생생한 천국이 돼버리면 동시에 뭐가 날아가 버리느냐 하면, 과거에 나는 사적으로 개인적으로 이렇게 살았다는 것이 무의미해져버리죠.

나는 어느 동네 살았고, 학교는 어디까지 나오고, 재산은 얼마 모았고, 아파트 사고, 그것 자체가 그것 한다고 해서 그게 구원과 무슨 관계있어요? 아무 관계없어요. 나는 남자다. 나는 여자다. 나는 장애자다. 몸이 아프다, 안 아프다. 그게 의미가 없다니까. 그래서 십자가만 자랑해요. 구원받는 것도 십자가만이 아니라 구원되고 난 뒤의 상황도 십자가만 자랑해요.

홀라당 십자가만 이용하지 말고. 천당 가서 나대로 살아야지. 그렇게 되선 안 됩니다. 그건 상상에 불과하고. 실제는 십자가를 알아버리면, 십자가 알고 자살하란 말이 아니고, 나에게서 더 이상 자랑할 게 없다는 것이 홀가분해져야 되지요. 내가 자랑할 것 없고 굳이 자랑한다면, 내가 죄인 중에 괴수 외에는 자랑할 게 없다.

그러면 죄를 자랑하면 과거의 죄냐? 아니지요. 왜냐하면 계속 살게 하시면서 거기서 매일같이 내가 모르는 새로운 죄가 발굴이 돼요. 발굴된 그 죄들을 보게 되면 이건 죄 아닐 거라 한 죄도 목록에 쓰레기처럼 계속 쌓이게 돼요. 내가 죄가 아니란 것도. 그 중에 예수 믿어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겠다는 것도 죄로 들어가 버려요. 모든 게.

그러면 죄 아닌 게 뭡니까, 물으면 죄 아닌 걸 찾는 그게 죄에요. 죄 아닌 게 없는데 죄 아닌 걸 찾겠다는 의도가 바람직하지 않다는 말이에요. 뭔가 수상한다 이 말이죠. 만약에 죄 아닌 것을 찾게 되면 우리는 또 그 죄 아닌 것을 담지, 그걸 담아서 유지해야 될 부담을 또 갖게 돼요.

나 예수 믿고 착한 사람 됐는데 이것 잃어버리면 주께서 얼마나 섭섭해 할까? 그렇게 돼버리면 계속해서 그 죄 아닌 것이 의인데 그 의를 담아내는 그릇으로써 내 가치를 포기할 수 없으니까 그 다음부터는 내가 어디까지 잘 나가고 훌륭한지 부질없는 싸움을 하는 거예요. 이것은 무슨 식이냐 하면, 옛날 애굽에 선악으로 나를 따졌던 그 시절로 돌아가기 때문에 광야에서는 또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자. 다시 말해서 시험에 빠진 꼴이 돼버립니다.

그 시험에 빠진 꼴을 그동안 누가 잘 가르쳐왔던가요? 교회에서 그렇게 하지요. 예수 믿었으면 똑바로 살아야지. 어떻게 세상 사람과 똑같아. 그게 영광되겠어. 믿음으로 구원받지만 영광은 여러분의 행함에 달려있습니다. 그런 소리를 얼마나 들었어요. 그리스도 형상을 본받아야 되고 빛과 소금이 돼야 되고. 낮엔 해처럼 밤엔 달처럼 그렇게 살 순 없을까~

우리가 모델로 여겼던 해와 달 다 폭파되는데? 요한계시록 안 본 모양이라. 해도 맛이 가고 달도 맛이 가버렸어요. 모델을 죄를 지고 가신 주님 외에는 없어요. 모델을 왜 찾아요. 모델을 찾겠다는 말은 나를 괜찮은 인간으로 계속 붙들겠다는 것밖에 안 되잖아요. 그래서 자아를 유지시키는 게 시험입니다. 자아를 놔야 되는데 계속 붙들고 가겠다는 것이 바로 주기도문에 나오는 시험 들게 하지 마옵시고. 주의 몸인데 자꾸 내 몸으로 자꾸 빼돌리는 이 악마의 짓을 용서 하옵소서, 라고 해야 되겠지요.

시편 14편과 무관하게 아닙니다. 여전히 시편 14편은 어렵구요. 시편은 스토리가 없어요. 스토리가 없고 남의 체험이거든요. 다윗의 체험 아닙니까. 참 얼마나 어려운지 문장과 단어를 나열할 테니 어느 정도 어려운가 보세요. 우리가 여기 있는데 누가 앞에 있단 말이죠. 묻습니다. 너는 왜 없지 않고 있느냐? 내 눈앞에 나타났느냐, 이런 뜻이거든요. 너는 왜 없어야 될 자리에 네가 앉아 있느냐? 무슨 의미냐? 내 쪽에서 이쪽으로 질문하는 거예요.

참 어렵지요. 너는 왜 없지 않고 있느냐고 하는 거예요. 이건 응용실습하면 돼요. 오늘 집에 가서 남편 앉아 있으면 물으세요. 당신은 왜 없는 존재인데 앉아 있지? 너, 누구한테 배웠나. 오늘 낮에 공부하러 갔더니만 이상한 소리하고 있네. 너는 없어야 되는데 왜 있지, 라고 할 때 상대방은 이렇게 해야 정답입니다.  정답이 뭐냐 하면, 너는 나를 왜 관찰하느냐? 지금 이 질문과 답변에서 공통점을 끄집어내보는 거예요. 이거는 서울법대 시험보다 더 어렵습니다. 서울법대로스쿨 교수라도 못 풀어요.

여기서 공통점을 찾아야 돼요. 공통점은 자기만의 밀폐된 공간을 갖고 있는 거예요. 이걸 개체라고 하는 거예요. 과연 성경이 인간의 개체를 인정했는가 하는 겁니다. 인정하지 않았어요. 인간의 세계에서는 오고가는 질문이 이거에요. 너는 왜 없지 않고 있느냐, 평소에 이런 말 안 하지요. 자칫하면 폭력사태 일어나는데 하지만 속은 이거에요. 여기서 전부 다 파생된 이야기가 나옵니다.

“당신, 나와 결혼해서 얼마나 행복하게 해줬어?” 이 말이 이 말이에요. 없지 않고 이왕 있으려면 있을 값을 하라는 겁니다. 그냥 있지 말고 돈 좀 벌어오라 이 말이죠. 제가 언젠가 가혹한 70대 이야기한 적이 있는데 할머니 나이가 72이고 남편 나이가 76인데 할머니가 할아버지한테 이렇게 묻는 거예요. 당신 돈 벌어 와라. 돈 벌어오지 않으면 반찬도 없다. 제목이 가혹한 할머니.

뭐냐 하면 당신이 내 앞에 있으면 그냥 있으면 안 되고 있는 값을 하라 이 말이죠. 있는 값 못해? 그런데 너는 왜 내 앞에 없지 않고 있느냐고 진지하게 묻는 거예요. 남들은 다 산에 가서 자고 있는데 너는 왜 아직도 방 안 있느냐? 네 친구들 다 공동묘지에 고이 자고 있는데. 그런 질문이 어디서 나왔습니까? 개체에서 나왔지요. 그 개체가 그냥 공간이 아니고 어떤 공간입니까? 밀폐된 공간이에요.

나는 너를 관찰할 수 있으되 너는 나를 관찰하면 안 돼. 나는 너를 관찰할 수 있는 권한이 있지만 너는 나를 관찰하면 안 돼. 그런데 그것을 반격해서 답변이 뭡니까? 너는 왜 나를 관찰하느냐, 이렇게 되지요. 결국 이 두 사람은 있지만 서로 개체 둘이 있지요. 개체 둘이 있음으로 이거는 영원히 합치되거나 일치되거나 한 마음이 될 턱이 없어요. 아무리 어떤 수를 해도 우리 속에는 너는 왜 없지 않고 있느냐? 다시 있으면 있을 값을 해라.

다시 말해서 이런 질문, 너는 없지 않고 있느냐, 할 때는 2번 답변이 뭘 요구하느냐 하면, 나는 당신을 위해서 있습니다. 이런 답변을 요구하고 싶은데 상대방이 바보입니까, 쪼다에요? 너는 나를 관찰하면서 왜 관찰하는 것을 시비 거느냐? 이 말을 내가 하고 싶어. 너는 왜 있는데? 이게 누구 말하고 있어? 서로가 으르렁거리고 있어요.

개체가 밀폐된 공간이기 때문에 새로운 나의 외부공간과 내부공간을 철저하게 인간은 개체는 구분 짓습니다. 외부공간을 쉬운 말로 외부 환경과 나의 내부 환경. 그런데 지금 평소에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뭘 이야기해요? 외부 환경, 외부공간을 이야기하는데 제가 오늘 시편 14편으로 이야기할 것은 인간의 내부공간, 내부 환경에 대해서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도 자기 내부에 공간이 있다는 생각을 못하기 때문에.

나 자체, 예를 들어서 볼링공 안에 공간이 있습니까? 당구공 안에 공간이 있어요? 외부에서 보면 딱딱해 보이고 공간이 없어 보이잖아요. 딱딱한 야구공 그 안에 공간이 있거든요. 우리는 내부 공간은 어느 빈곳이 없고 나의 욕망으로 꽉 차있다고 여깁니다. 그런데 내부에 빈 공간이 있다는 것은 이건 성경을 통해서 알게 됩니다. 우린 그게 없다고 생각해요.

그러면 내부공간을 굳이 언급해야 되는가? 인간들이 개체가 내부공간을 따질 때 저건 나한테 유리한 공간, 불리한 공간. 한국의 좌빨 때문에 못 살겠다. 슬슬 캐나다 이민 갈까, 이런 식으로 내 환경이 사회주의, 공산주의 될까 겁난다고 이민 갈 생각할 때 이것은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내 내부 공간의 의식이 그대로 외부에 반영되어 나온 거예요.

외부공간이 있고 내부공간이 없는 게 아니고 딱 들어붙은 게 아니고 외부를 생각할 때 유리한 외부인지 불리한 외부인지 이미 자기 내부 안에 유불리를 따로 구분 짓고 있기 때문에 그 성격이 그대로 바깥으로 튀어나온 거예요.

아가씨들이 결혼할 남자를 사귈 때도 그냥 사귀는 게 아니에요. 아까 이야기한 것처럼 저 남자 그냥 남자 같으면 커피 집에 앉아 있을 이유가 없지요. 그러나 선본다고 앉아 있을 때 똑같은 질문이에요. 당신은 내 앞에 등장 안 해도 되는데 왜 등장했지요? 했을 때에 그런데 그 남자가 갑자기 케이크 하나 시켜서 들고 오더니만 이것 드시라고 했는데 뭔가 씹히는 게 있어. 다이아?

이 귀한 다이아를 바치듯이 내 몸을 바치겠습니다. 그런 것을 여자가 이미 상상을 했다면 남자가 진짜 케이크 들고 오게 되면 남편으로 받아주겠습니까, 안 받아주겠습니까? 안 받아주지요. 왜? 그런 남자 한둘이 아니기 때문에. 요새 아가씨들 까다로워요. 이미 나왔던 경우의 수는 내 내부 공간을 만족시킬 수가 없어요. 이미 드라마에서 많이 봤기 때문에. 직장 생활한다고 남자들의 드라마를 안 봐서 드라마에 나온 그것 괜찮다고 그것으로 들이대다간 퇴짜 맞는 거예요.

그냥 추상적으로 이야기하는 것보다 성경을 보면서 이야기합시다. 시편 14편 보기 13편 1절 봅시다.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나를 영영히 잊으시나이까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언제까지 숨기시겠나이까” 갑자기 다윗 속에 뭐가 들어왔어요? 본인으로 꽉 차야 될 내부공간이 갑자기 다윗은 누굴 찾고 있습니까? 여호와를 찾는 거예요. 외부공간에 있는 게 아니에요. 야, 어렵다. 중요하다.

여호와가 외부공간에만 계신 게 아니고 그러면 그건 신자 아니고 여호와가 어느 공간에 있어요? 내 내부공간에 여호와가 되는 거예요. 다윗의 이야기가 어려우면 쉽게 귀찮더라도 요한일서 잠간 봅시다. 요한일서 4장 13절,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 제가 쉽다고 했지만 이 말처럼 어려운 게 어디 있어요.

다시 할게요. 내 안에는 나밖에 없어요. 목사님, 뭔데 그렇게 장담합니까? 제가 장담하는 이유가, 남편이든 아내든 누굴 만나게 되면 그 사람에 요구하는 게 있어요. 뭐냐 하면, 당신은 나를 위해서 존재해야 된다는 요구사항이 있다는 말은, 순수하게 나는 나만 있다는 뜻이에요, 그게. 당신은 날 위해 존재해야 돼. 왜? 날 위하면 당신에게 약간의 수고와 헌신할 용의가 있기 때문에. 왜 그런데? 나는 개체니까. 절대적인 개체니까.

이렇게 태어난 거예요, 우리가. 이 땅에 19xx년도 주민등록번호에 따라 태어날 때에 아담의 복사물로 태어나거든요. 아담의 복사물 안에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악마의 정신, 악마로부터 계속 사주 받아야 될 연결고리가 같이 장착되었어. 칩이. 추적기가 우리 안에 포함되어서 악마의 지령과 지시에서 못 벗어나요. 악마가 뭐냐 하면, 하나님께 대들고 반항했던 자가 악마입니다.

그 반항심이 우리한테 있는 거예요. 따먹지 마라. 그거는 반항의 대상이죠. 따먹으면 어때, 이러거든요. 하지 마라. 옳다구나 하자. 그 말은 악마가 준 심성이 뭐냐 하면, 나는 최종 절대자로 나를 이미 확정지었다는 겁니다. 그러면 내 앞에 누가 없지 않고 나타나게 되면, 너는 나에게 무엇을 줄꼬? 이렇게 되는 거예요. 하나님 흉내 내면서. 신처럼 흉내 내야 되니까. 너는 무엇 때문에 내 앞에 등장했는고? 그 말은 내 내부가 바깥을 보고 외치는 거예요. 사람의 말은 자기 내부에 담긴 말을 쏟아내잖아요.

그런데 똑같은 인간인데 똑같이 아담으로 가면서 “여호와여 나를 영영히 잊으시나이까” 이 말은 뭐냐? 다윗 속에는 지금 다윗만 있는 게 아니고 다윗은 초정하지도 않은 인사가 등장해서 엉망진창이 된 거예요. 뿐만 아닙니다. 14편 1절 봅시다.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왜 하나님을 거론합니까? 지금 다윗이 목이 마르고 아픈 것도 아니고 밥이 없어서 화내는 게 아니고 바깥 환경이 하나님이 없다 하는 그런 분위기 때문에 화가 난다는 거예요. 여러분도 화가 납니까? 바깥에 하나님이 없다는 소리가 유행되기 때문에 화가 난다면, 바깥 풍경을 그렇게 봤던 내 마음은 어떤 마음이에요?

누가 그렇게 서러움과 불평을 유발했습니까? 내가 아니죠. 우리는 남들이 날 위하기만 바라지 그런 마음 없어요. 그런데 이게 나한테 이익도 안 되고 나한테 실익으로 돌아오는 것도 없는데 이 세상에 하나님 없는 것에 화가 난다는 말은 그 마음이 바로 다윗을 움직이게 하는 거예요.

어제 제가 한 낮 설교 끝에 보면 나오지요. 정중동, 고요함 속에 움직임이 있다. 고요함이 있고 속에 꼼지락거리는 움직임이 있다. 사도 바울 경우에는 속에 누가 있습니까? 나는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니까 그리스도가 일하게 하셔서 온갖 데 다 가고 온갖 번잡스러운 일 다 했어요. 로마 가는 것도 자기 뜻이 아니었잖아요. 속에 나침반이 있어서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우리에게 들어오신 우리 가운데 계신 분이 한 고집하거든요. 이걸 이사야 9장에서는 하나님의 열심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열심이 내 열심보다 우세해요. 천국 가는 것은 빼박이고요 당연히 가는 거고 곱게 못 가게 만들어요. 내 개인적으로 천국 가면 속 편하겠는데 예수 믿고 기도원에 도만 닦다 가면 되는데 그게 아니고 주님께서는 뭔가 질질 흘리고 간다 할까요.

우리 어릴 때 노란 알루미늄 도시락에 김치를 넣어주면 바깥에 비닐로 싸야 되잖아요. 옛날에는 비닐이 귀했는지 비닐로 안 싸고 버스 타고 가다 몇 번 밀리면 내부에 있는 도시락이 흔들리면서 김칫국물이 질질 새잖아요. 김칫국물이 가는 데마다 핏자국처럼 가방 들고 가면 뚝뚝 떨어지고 있단 말이죠. 질질 새게 돼있어요.

예수님의 열심을 질질 새게 돼있단 말이죠. 나는 조용하게 살고 싶어. 아주 소박하게. 여기 아파트 있잖아. 85층. 한 채만 마련하고 딴 건 욕심도 안 내요. 벤츠나 아들 벤츠하고 두 대 해서 그냥 조용하게 살고 싶어. 태풍 올 때 파도나 내려다보면서. 그런데 가만두질 않는다니까요. 가는 곳마다 질질 새게 해요.

우리는 이렇게 살고 싶어. 이게 아니고 탄식하면서 세상에 왜 이렇게 하나님 믿는 자 없노. 그 소리 듣고 남편 하는 말이 쓸데없이 니가 걱정 왜 하노. 그렇지요. 걱정할 이유 없어요. 그럴 당위성도 없고. 주께서 질질 새게 하는 거예요. 내 열심이 아니고 주의 열심이에요. 나도 절제해야 돼, 조정해야 돼. 하지만 현장에서 이래선 안 된다고 했을 때 그것을 안 했을 때 남는 건 뭔가?

무엇을 안 하게 되면 남는 게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나는 정당하다. 이게 큰 병이거든요. 악마거든요. 나의 가치를 나에게 회수하는 그러한 스스로 시험에 들어요. 나는 이 정도까지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나는 이 정도까지 함부로 살지 않았습니다. 큰일 날 뻔했네. 시험에 들 뻔했구나. 이런 식으로 하는데 그래서 남는 건 뭐냐? 찢어져야 되는데 이게 봉합이 돼버려요. 봉합이 되면 새끼 개체, 개체 속에 내가 지킬 만한 새로운 가치 있는 새끼 개체를 또 내가 생산하고 말았어요.

뭘 피하면 뭘 만나듯이 큰 것 피했다고 했는데 귀신 피해서 도망쳤다고 했는데 귀신이 이미 내 안에 들어오고 말았어. 그 귀신은 늘 말합니다. 완전하라, 완벽하라. 완전하지 않으면 니 인생 사단 난 건 다 니 책임이다. 네가 행동 허투루 해서 그렇다. 또 나에게 결단을 요구하고 나의 책임과 나의 올바른 선택을 강요하는 거예요. 네가 똑바로 살면 영광인데 똑바로 살지 않아서 영광이 안 된다고.

그러나 다윗 같은 경우에는 나라는 보자기가 찢어져버렸어요. 주님의 열심이 질질 샌다니까요. 정말 여러분들이 인생 살면서 힘들 때는 그냥 힘들다하지 말고 물어보세요. 주여, 그 다음 순서는 어떻게 됩니까? 또는 주의 지시는 뭡니까? 주의 지시가 뭡니까, 라고 할 때 성령 받으면 응답을 주시는데 그 응답은 딴 게 아니고 응답은 이렇게 나와요.

구조적으로 나오는 게 뭐냐 하면, 너는 이렇게 했다, 이렇게 했다가 아니라 나와 너 사이에서 너는 종의 위치라는 시키는 대로만 하면 되는 네 가치, 네 의미를 따로 챙길 필요가 없는 그 구조 자체를 우리에게 제시하는 게 응답이에요. 주어진 것만 해도 감사하고 고마워해라, 이것들아. 쓸데없이 걱정하지 말고.

이런 환경, 이번 조치, 내가 제대로 해야 되는데. 제대로 하지 마. 시키는 대로 해. 제대로 하는 것과 시키는 대로 하는 것이 다릅니다. 옳다/그르다와 다르다가 다른 것처럼 우리는 옳고 그름이 아니고 달라야 돼요. 옛날 내가 했던 그 개체와 다른 개체가 있어야 돼요.

따라서 지금까지 제가 이야기한 것은 뭐냐 하면, 시편을 통해서 성경을 통해서 이야기하는 것은 이미 주님께서 다윗이 대표자니까 성도한테 성도의 허락도 없이 이미 침투했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그런데 침투는 그냥 침투하는 것이 아니고 어떤 세계를 몰고 침투하는데 그게 뭐냐 하면, 말씀의 세계입니다.

그러면 주님의 오기 전에 이 세계가 뭡니까? 바로 나의 세계지요. 나의 세계를 좀 더 분석해 들어가 봅시다. 나의 세계는 항상 반복해서 정리를 하게 돼있어요. 인간은 항상 반복해서 수습하는데 급급합니다. 수습해야 그게 나의 세계로 되돌아오기 때문에 그래요. 흩어진 조각들을 모아야 내가 안심이 되는 세계, 이게 애굽적인 세계, 주님의 없는 세계거든요. 내가 나다울 때 뭔가 느긋함을 느끼는 거예요.

이걸 가지고 어려운 용어를 쓰겠습니다. 개체 안정화에요. 개체 안정화 작업이에요. 집안에 식구가 양말 함부로 벗어놓으면 출근하고 애 학교 가고 난 뒤에는 빨리 양말을 제자리에 세탁기에 넣든지 해야 되겠지요. 그게 개체 안정화 작업이에요. 그리고 개체 안정화 작업하면서 이걸 죄 짓고 있다는 생각을 아무도 안 하고 있어요. 버릇이죠. 당연한 거라고 여기죠.

그래서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인간이 지옥 가는 것이 가장 안전 빵이고 안전해요. 왜? 아담의 죄기 때문에 그냥 지옥으로 중간에 누가 와서 저쪽으로 밀치지 않는 한 조용하게 살다가 조용하게 지옥 가는 거예요. 우리네들 어른들처럼. 교회 나와 준 우리들 어른들처럼. 교회 나와서 지옥 가는 거예요. 왜? 교회 가도 끝까지 자기 개체 세계니까. 나의 세계니까, 개인구원이니까. 말씀의 세계를 가본 적이 없어요. 교회에서 말씀을 들어본 적이 있어야지. 없는데. 시편만 열댓 번 봤을 거야. 그것 아무 의미 없어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과연 이 세상에 주님의 말씀이 우리 성도에게 어떻게 주의 말씀 속에 속했다는 걸 눈에 띠게 하느냐? 간단하게 아주 쉬운 방법이 있어요. 이건 아무도 안 가르쳐주는데 가르쳐줘야겠네요. 길거리에 이런 게 있지요. ‘임대’ 여러분들이 이걸 붙일 때 반드시 임대하게 된 사연이 있어요. 그리고 이걸 쳐다보고 있는 나의 사연도 있어요. 얼마나 장사가 안 됐으면 이걸 임대 놓겠습니까.

그리고 이 사람이 이 가게를 처음 열 때 돈을 수천만 원 또는 수억까지 투자했을 때 그것 본전도 못 뽑고 하도 장사가 안 되고 경제가 어려우니까 임대 내놓은 거예요. 그럴 때 이 사람의 사연은 찢어지지요. 그러면 길 가던 사람이 임대를 봤다 칩시다. 저 가게 나왔네? 나도 이제는 애 키울 만큼 키웠으니까 내 하고 싶은 장사해볼까? 내 사연이 여기에 추가가 되지요. 이쪽이 죽든 말든 간에. 이왕 급하게 내놓은 것 시세보다 싸겠지. 그 틈을 노려봐? 내가 이 가게 해서 퀼트라든지 빵가게라도 해볼까하는 거예요.

여러분들 여기 올라오면서 봤지요. 영수의 집 밥인가 가게, 그것 때려치우는 것 봤습니까? 장사 안 돼서 다 때려치우는 거예요. 어떤 집이 장사 안 되면 그냥 보지 않습니다. 유심히 그 사연을 상상하는 거예요. 왜? 그게 바로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애굽의 실상이기 때문에. 그런데 장사 때려치우는 사람이 이 세상에 하나님 믿는 사람 없어서 화나서 때려치웠습니까? 그리고 임대 놓은 것 보고 시세 물어보려 들어갔을 때 하나님 믿는 사람 없어서 화나서 장사하려 합니까? 아니지요. 아니라 이 말이죠.
 
하나님 말씀은 어디 있느냐? 바로 여기에 우리가 눈독을 들이고 여기에 신경을 쓰고 있다는 자체가 하나님 없는 세계 속에 우리가 정신이 팔려서 집착을 하면서 한 통속으로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임대’라는 단어 속에서 우리가 얼마나 말씀이 현실과 동떨어진 채 살아가고 있는가를 알려주는 거예요. 모든 것이 시그널, 신호가 되는 겁니다.

온 천지가 말씀의 세계에요. 말씀에 입각해서 볼 때 장사해서 망했다, 안 했다가 본인들에게 얼마나 심각한 문제입니까? 성경이 귀에 들어와도 화낼 거예요. 나쁜 목사라고 지난 토요일 욕 얻어먹었지만. 지가 괴로워서 전화해놓고 나보다 나쁜 목사라고. 약 먹고 죽으라 했으니.

모든 세계가, 십자가 앞에 다른 세계는 없어요. 십자가가 완성이고 없는데 우리는 그런 게 눈에 들어오는 게 아니고 남이 못 될 때에 더불어 얻는 기쁨 같은 게 있어요. 남이 망했을 때. 그것도 그냥 망하면 기쁨이 덜 한데 쫄딱 망하면 굉장히 기분 좋아요.

그러면 묻습니다. 여러분은 누구와 사귑니까? 아까 요한일서 봤잖아요. 사귐 없어요. 요한일서 1장 봅시다. 말씀이 굉장히 현실적이죠. 무지무지 현실적이에요. 요한일서 1장 3절에,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그 다음에 뭐라고 돼있어요? “함께”

아버지 하나님과 예수님이 사귄다는 것은 우리가 얼추 짐작은 되는데 하나님이 인간과 사귄다는 것은 상상이 안 되지요. 왜? 우리 눈앞에는 임대, 그게 확 다가오기 때문에. 해운대 고층아파트, 그게 확 다가오거든요. 사귀는 게 기뻐요, 고층아파트 공짜로 주는 게 기뻐요? 질문하는 내가 나쁜 놈이다.

사귐 없어요. 미쳤다고 사귀어요. 나만 절대적인데 왜 사귀어요. 너는 나를 위해서 존재하는 거예요. 그쪽은 그런 나를 관찰하고 나는 그걸 관찰하고 서로 관찰하면서 주목하면서. 그러니까 다시 이야기합니다. 개체와 개체 사이에는 사귐이 가능하다, 불가능하다? 불가능하죠. 그렇다면 이 불가능을 극복하고 그걸 성사할 수 있는 방법은 어제 오후설교 끝부분에 이야기했습니다.

불가피성이에요. 불가능하거든요. 불가능의 대체는 뭐냐? 가능으로 못 바꿔요. 불가능이니까. 못 바꾸지만 주께서 하게 하시면 돼요. 내가 주님을 초청하는 게 아니고 주께서 쳐들어오시면 되는 거예요. 아버지와 아들의 사귐이 그게 범위가 확대되어서 나한테 쳐들어오는 거예요. 쳐들어오게 되면 아까 이야기했습니다.

인간의 몸은 외부 환경과 내부 환경으로 돼있고 내부는 자기가 바짝 내부공간이 있다 하지만 사실은 우리가 못 느끼고 딱딱한 나와 유들유들한 외부 환경으로 보거든요. 그러면 이것이 어떤 조건이냐 하면, 내가 살아있다는 조건 하에 그렇단 말이죠. 주님께선 이걸 뭐로 바꿉니까? 이 인간을 죽여 버리죠.

인간이 생각한 죽음은 죽고 난 뒤에도 관 속에 있는 나를 상상하거든요. 사실은 상상하는 이게 반칙이에요. 이 죽음을 앞당겨서 이 안에 꽂아 넣습니다. 그러면 나의 외부 환경은 주님의 외부 환경이 되고 나의 내부 환경은 주님과 사귐이 되는 주님과 함께 있는 내부 환경이 되는 거예요. 성령이 오게 되면 사귐이 있으니까.

그게 뭐냐? 첫째 부활이에요. 이미 죽었지만 함께 있다는 이유 때문에 부활한 걸로 봐요. 이 몸이 주님의 몸이 된 순간 주님이 활동하는 주님의 몸이니까 주의 부활의 몸 또는 그걸 성경에선 성전이라 해요. 하나님의 성령이 있는 성전이 되고 마는 겁니다. 우리가 주의 몸이 됐을 때 바깥 외부 환경은 뭐냐? 성경에서 찾아야지요. 아까 임대라도 괜찮은데 우선 성경을 거쳐서 왜 임대가 주님의 일인지를 봅시다.

출애굽기 1장 15절 누가 읽어보세요. “애굽 왕이 히브리 산파 십브라라 하는 자와 부아라 하는 자에게 일러 가로되 너희는 히브리 여인을 위하여 조산할 때에 살펴서 남자여든 죽이고 여자여든 그는 살게 두라” 지금 히브리인들이 하나님 믿는 사람이잖아요. 요셉의 후손들이죠. 후손들인데 하나님이 가만둡니까, 아니면 바깥 외부 환경이 있습니까? 말도 안 되는 폭력이, 바로 왕의 폭력이 있지요.

그러니까 우리가 주님이 들어온 순간 산 속에 기도하러 가는 게 아니에요 우리 바깥에 말도 안 되고 우리 뜻대로 안 되게 죽여 버리라는 강력한 그런 환경을 주의 불가피성으로 주께서 이미 설정을 해놓은 거예요. 그러면 그 외부 환경의 고난과 핍박을 받는다면 이건 내가 받는 고난인 동시에 누가 받는 고난입니까? 주님과 함께 받는 고난인 동시에, 10분 쉽시다.

 한윤범 (IP:119.♡.174.75)19-09-11 15:54 

20190909b 부산강의 : [시편]21(14편)-개체와 말씀세계
(강의: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하겠습니다.

출애굽기 1장에서 갑자기 국가가 등장하지요. 그러면 국가가 하나님 약속과 함께 있는 히브리인들을 쳤다는 말은 이것은 바깥의 환경이 무슨 뜻이냐 하면, 인공적 장치가 되는 겁니다. 이게 국가에요. 인공적이다, 인위적이죠. 그러면 아까 시편 14편에서 세상은 뭐라 합니까? 하나님은 없다 하지요. 없다 할 만 하지요. 세상에서는 제2의 자연을 인공적으로 만들기 때문에. 이게 국가고, 현실 같으면 과학 아닙니까. 그게 종교고 과학이고 예술이고 그거잖아요.

예술의 이름으로 국가법의 이름으로 죽는 수는 있어도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죽는 것은 성령이 아니면 안 됩니다. 다윗이나 선지자 아니면 안 되거든요. 모세도 하나님을 위해서 살지 않았어요. 모세가 애굽인을 치고 하는 것은 인공적인 장치, 국가 속에서 히브리인들만의 국가를 은근히 정치적으로 만들고 싶어서 애굽인을 쳐서 죽인 거예요. 일종에 독립운동을 한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선 그걸 인정했습니까, 인정 안 했습니까? 긍정적으로 안 봤지요. 오히려 지명수배 당해 도망 다니게 만들었단 말이죠. 양 치게 만들었어요.

그러면 근본적으로 모세가 출애굽에서 하나님 믿는, 그러니까 그들은 하나님 믿는다고 생각해요. 하나님 믿는 히브리인들을 못 살게 구는 것이라면, 하나님이 함께 있는 민족을 못 살게 군다는 것은 하나님 쪽에서 나와서 해결해주셔야 된다고 생각하지요. 그 생각이 자기들로서 건전하고 이건 하나님이 생각해도 인정할 만한 생각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과정에 있어서는 전혀 하나님께서 인정 안 해줄 때 모세의 문제점은 뭐였던가요?

바로 외부 환경은 모세 내부 환경의 반영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린 거예요. 그 외부 환경이 부럽고 우리도 그런 힘을 가진 국가가 되고 싶다, 라는 요소가 모세 내부에 있는 한 그 모세 내부 환경은 주님의 말씀의 세계에서 부정당해야 됩니다. 그래서 모세로 하여금 실패케 하고 도망치게 만들었지요. 이 상황을 다시 정리해봅시다. 이 상황이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상황이에요.

우리가 성도라 칩시다. 성도라면 우린 남한테 간섭받지 않고 살고 싶어요. 그런데 갑자기 직장 다니는 성도에게 상사가 나쁜 짓, 그러니까 횡령이라든지 세무조사 있기 때문에 빨리 이중장부를 만들라고 지시가 왔습니다. 성도는 하나님을 원망할 수밖에 없어요. 왜냐하면 하나님 말씀대로 산다는 것은 불의를 거부하고 돈을 사랑하지 않고 주께서 가신 것처럼 낮에 해처럼 밤에 달처럼 그렇게 사는 것으로 돼있는데 이 환경을 누가 이렇게 조성했습니까? 하나님께서 이런 지시를 따랐어요.

처음부터 입사할 때 과장이란 사람이, 여러분들이 입사한 것은 서류조작하기 위해서 이중장부하기 위해서 한 것입니다. 이렇게 입사 안 시켜요. 열심히 회사를 위해서 두루뭉술하게 이야기해요. 그 회사를 위해서가 무슨 의미인줄 몰라요. 목사가 부교역자 뽑을 때 교회에 충성하는 것이 하나님께 충성하는 것이다. 당회장 잘 모시고, 할 때 두루뭉수리에요. 실내용은 하나도 없어요.

목사 보좌하면 밥이나 먹고 사는 줄 알았지요. 부교역자가. 그런데 나중에 교회가 부패해서 목사 축출하는 패와 이 목사님을 당회장해야 되는 파, 2층에서는 목사 지키는 사수 파, 아래층 교육관에서는 축출 파, 바깥에는 경찰. 양쪽에서 장로들은 부교역자 불러서 어느 편에 설지 본심을 똑바로 내라고 서로 압박을 가할 때, 하필 애가 셋이네. 고신 측인가? 하여튼 고신 측 목사들 애가 많아요.

애가 셋이 되니까 주께서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는데 사모님은 애 젖 주고 있으면서 “몰라. 나, 당신과 결혼한 이유, 당신 알지? 책임지라.” 책임지란 말이 뭡니까? 돈 벌어오란 말 아닙니까. 결국 사모가 요구하는 것은 교회 일에 말려들지 말고 계속 교회에 버틸 생각하라. 이것보다 더 어려운 일이 어디 있어요. 교회가 둘로 쪼개질 판에. 어느 편에 서냐 말이죠. 목사 편에 서면 목사와 같이 잘리게 돼있고, 장로 편에 서면 목사가 배신자라고 욕하게 되고. 딜레마 아닙니까. 모순.

그러면 목사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참 재미있지요. 너 내 편에서 서서 이참에 돈 뜯어내서 같이 나가자. 개척교회 하게 되면 부교역자 해줄게. 드디어 목사가 나의 존재 가치를 인정하는구나. 아까 배운 데로 당회장 목사가 없지 않고 있음은 내 개체를 위함이라. 물론 자기 개체 안에서 아이 셋과 사모까지 포함해서. 그래서 나가는데 목사가 하는 말이, 자기가 나가면 여기 반대하는 사람 이백 명 따라 나온다 했거든요. 그런데 개척교회 하니까 따라 나온 사람 서너 명 나와요.

왜 안 따라 나옵니까? 돈 내야 되니까. 2층 홀 빌리는데 돈 누가 내는데? 교인들에게 돈이 우선이지 무슨 진리가 우선이고 무슨 목사가 우선이에요. 돈 낳고 사람 난 거예요. 오랜만에 바른 소리한다, 지금. 왜? 돈이 있어야 내 개체가 사니까. 내 개체가 우선이지 남 개체가 우선이 아니잖아요. 몸이 건강해야 교회도 나오지 몸 아픈데 무슨. 내 개체가 우선인데. 돈이 안 오니까 교인 네 명 나왔단 말이죠. 그러다 양심에 걸려서 몇 명 더 나와 열한 명 됐는데, 열한 명도 둘러보더니만 희망 없다고 다섯 명 더 나가버렸어. 그러면 월급 없으니까 종용히 불러서 너도 알아서 나가라고 해요. 그럼 이러려고 내가 나왔나, 하지요.

세상 악하다 하는데 지금 그 부교역자에게 주어진 모든 환경은 뭐냐 하면, 그 부교역자 내부 환경이 외부 환경과 내부 환경이 지금 한 통속이 되었다는 것을 까발리는 겁니다. 외부 환경은 인공적이죠. 인공적인 말이 어려우면 인위적이죠. 내 개체가 사는 방법을 내 안에서 스스로 만들어내는 방법이에요. 자기 사는 방안을 내 위주로 만들어내는 거예요.

돌아가는 현실이 중요한 게 아니고 나한테 실익이 있느냐는 쪽으로 살아가는 그 방식을 외부 환경도 그러했고 내부 환경도 그러했다는 사실입니다. 그 목사가 신학교 때 신학을 배우고 복음을 배우고 십자가 알아도 현실 교회에서는 아무 짝도 소용없다는 것을 알게 돼요. 내 자체가 인위적이고 인공적이었구나.

그런데 재미나는 것은, 이게 재미나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만 다시 본문 봅시다. 아까 출애굽의 권력은 누가 마련한 겁니까? 하나님께서 마련한 거예요. 누구에게? 하나님의 약속이 있는 백성들에게. 그냥 도 닦도록 놔두지 않는단 말이에요. 그런데 그 당회장 목사가 쫓겨 가면서 시편 14편을 설교한다고 칩시다. 위층에서. 아래층은 반대하고 있고. 위층에 수호 파들 한 이백 명 되는데 그 사람들 다 따라 나올 줄 알았지. 바보같이.

뭐라고 설교하느냐 하면,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이렇게 설교했다고 칩시다. 그럼 설교내용이 어떻게 돼요? 설교내용이 복음입니까, 복음 아닙니까? 복음 아니지요. 제가 어제오후 설교 때 교인들이 속아 넘어가는 게 목사가 저렇게 복음 전하니까 그 목사 복음 믿는 줄 알고 있어요. 복음을 믿기 때문에 저런 설교가 나올 수밖에 없다. 논리가.

복음 알기 때문에 복음적이 나오지 복음 모르면 나올 수 없다고 철썩 같이 믿었는데 나중에 그 목사가 67 돼서 교회에서 나가라 하니까 갑자기 복음 없고 내가 얼마나 공로자인데 따지고 큰 거 두 장 써라, 한다고 했지요. 그동안 구명조끼가 목사한테 있는 줄 알았는데, 왜? 있으니까 복음적으로 나오지. 복음은 나오는데 본인은 복음이 없어.

그러면서 내가 언급한 목사 이름이 있지요. 김성수 목사. 입만 떼면 복음인데 본인은 자살. 이게 무슨 뜻이에요? 앞뒤가 안 맞아. 복음을 안다는 것은 내가 자살할 권한도 없음을 알아야 돼요. 다시 말해서 내가 살 수 있는 권한을 주께서 주신 적이 없다. 주님은 내 개체를 개체라고 인정한 적이 없어요. 이거는 아담의 죄 때문에 나한테 태어날 때 가진 거예요. 아까 태어난 아기 보셨지요. 나단이, 우리 손자. 토실토실하니 개체거든요. 아이고, 잘 생겼다. 지 식구니까 잘 생겼지.

개체를 주께서 인정한 적이 없습니다. 이 개체가 문제성이 많아요. 이 개체는 하나님이 없이 산다는 것은 곧 개체가 인위적으로 자기 사는 방안을 늘 새롭게 구상해야 돼. 매일같이 만들어내는 게 뭐냐? 나를 살리는 방안을 매일같이 생각하는 겁니다. 길에 임대 나오면 나아도 오십 넘었는데 가게해서 용돈 벌이나 해볼까. 남의 임대해서 망한 사연은 무시하고 내가 들어가면 장사 되겠네. 목 좋고. 어디 있느냐 하면, 바로 시외버스정류소 바로 앞입니다. 임대 있어요. 2층에. 여기 삼분의 일만한데 저기서 뭘 하면 되겠나, 생각했어요. 혼자서.

밤에 주무실 때 외부에서 소리 들리지요. 멀리 지나가는 오토바이나 차 소리 들릴 거예요. 인간은 소리 속에 갇혀있습니다. 내가 유발하지 않은 소리 속에 있습니다. 그 소리가 외부 환경입니다. 내가 활동하게 되면 그 소리가 다 묻혀버려요. 내가 활동할 때는 내게 필요한 소리만 들려와요. 선풍기, 냉장고 팔사람, 이런 소리만 들리고, 갈치 왔어요. 제주도 갈치 왔어요. 그것만 들리는 거예요. 내게 필요한 것만 뽑아서 속아내서 하는 겁니다.

이게 뭐냐? 인위적으로 개체를 내가 스스로 안정화 시키는 방안을 내가 생산해내고 있다는 겁니다. 이것은 개체의 세계요, 말씀의 세계가 아닙니다. 악마의 세계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여기에 와서 사귀자고 덤벼듭니다. 그러면 바깥 환경 외부 환경은 내가 미처 발견하지 못한 성질을 그다음부터 보게 돼요. 하나님이 보는 눈으로 세상을 보게 되는 시선 바뀜이 일어나는 겁니다.

전에는 내 이익 차원에서 세상을 보고 주어진 환경을 그렇게 받아들였던 내가 주님의 눈으로 보게 되면 우리는 무엇으로 구분되느냐 하면, 주님의 눈으로 볼 때 인공적인 것, 다른 말로 하면 인위적인 것과 하나님이 주신 것과 차이 나죠. 인공적인 것은 애써야 됩니다. 하나님 주신 것은 아까 이야기했지만 불가피성,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거예요.

내 몸이 아픈 것부터 해서 태어나면서 살아온 인생 환경이 불가피성 속에 소급해서 포함돼요. 지금 예수 믿을 때부터 불가피성이 아니고 내 스스로 살려고 애썼던 그것조차도 아니 창세전부터 이미 예정됐어, 우리가. 우리가 천국 가는 것은 불가피하게 예정된 거예요. 어쩔 수 없는 거예요. 빼박이라니까. 빼도 박도 못해요.

그런데 우리는 어떤 성경을 보면서 뭘 느끼느냐 하면, 내가 날 살리는 인위적인 방식을 동원해서 자꾸 변신과 변화를 추구하는데 그건 횡에서 횡으로 변화되는 것뿐이거든요. 횡에서 종으로 변화되질 못해요. 종은 수직적이고 횡은 바로 수평적 옆이잖아요. 교회 와서 기도해서 인간답게 살자. 변화되자. 술 끊고 담배 끊고. 해봐라. 해봤자 옆에서 옆으로 옮기는 거예요. 같은 동네라니까. 그럴싸해 보이고 윤리적으로 보이고 도덕적으로 보이고 남들 보기에는 신앙 좋은 것으로 보이지만 어떤 사태가 일어나고 궁지에 빠지면 다시 도로 이리 와버려요.

담배 끊은 지 십 년 됐지만 이번 사태를 보고 한 대 피워야 되겠다. 남자들 그런 말도 안 되는 핑계 있지요. 도저히 못 참겠다. 한 대 피워야 되겠다. 담배 끊어봐야 다시 돌아와요. 같은 횡으로 지형적인, 같은 지형에 놓임은 달라짐은 없습니다. 그 지형에 갇혀서 거기서 거기에요. 인간은 안 바뀝니다. 아들아, 교회만 가주면 휴대폰 사줄게. 애들은 교회 가줍니다. 휴대폰을 바라보면서.

따라서 횡에서 종으로 옮기려면 그 방식예수님이 가셨던 그 길을 답습하는 수밖에 없어요. 예수님의 가신 길은 성령에 의해서 가는 겁니다. 성령에 의해서 가니까 예수님은 버림받은 자가 돼요. 이건 자기 부인이죠. 내 뜻대로 마옵시고, 이게 성령에 의해서 가능해요. 그럼 내 뜻은 뭐냐? 내 뜻은 여기 나왔잖아요. 내 뜻은 인위적으로 나를 개체로 유지하는 것. 개체가 개체답게 사는 것, 그게 전부지요.

주님께서 십자가 지시면서 뭐라고 통보하느냐? 너는 저주받았다. 율법에 의해서 저주받고 율법의 완성은 십자가잖아요. 갈라디아서 3장에 나옵니다. 모든 율법을 항상 지키지 아니하면 저주 아래 있다. 주님이 그 저주 안에 들어가서 십자가 졌다. 먼저 십자가 질 환경이 마련되고 난 뒤에 율법이 와서 쫙 깔아놓고 그 저주 아래 예수님이 뛰어든 거예요.

뛰어들어서 나온 결실이 뭐냐? 십자가에요. 그걸 갈라디아서 3장 1절에 십자가가 눈앞에 보인다 했지요. 그 십자가 안에 함축된 내용을 풀이한 것이 율법과 결부되는 겁니다. 십자가가 저주인 이유는 그전에 이미 이 세상은 율법 아래 있다는 조건 때문에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키 신장 나이 성품 인격 묻지도 따지지 않고 무조건 저주에요.

저주를 저주라 하고 약 먹고 죽으라 한 게 뭐가 나쁜 목사입니까. 달래고 어른다고 구원되는 게 아니에요. 그거는 고린도전서 2장에 보면, 구원이란 사람의 말로 되는 게 아니고 성령의 임함으로 되는 것이고 구슬리고 달래게 되면 그 사람은 자기가 자기 살기 위해서 교회 올 수도 있고 휴대폰 받기 위해서 교회 가줄 수 있어요.

무슨 말이냐 하면, 저주가 사랑이다, 이 말입니다. 내가 있던 곳이 저주였음을 아는 그게 사랑이고 그 사랑을 퍼질러 놓은 것을 사귐이라 합니다. 주님, 제 앞에 없던 주님이 나타납니까? 너를 저주하려고 나타났다. 뭐로요? 십자가로써. 십자가 주님 홀로 진 게 아닙니까? 아니야. 너와 같이 진 십자가야. 제가 요청한 적, 주문한 적 없는데요? 주문 안 해도 불가피성으로 내가 이미 널 위한 십자가로 준비해놓고 찾아오신 거예요. 찾아오시게 되면 성도고 안 찾아오면 불신자고 그렇지요.

고린도후서 5장 봅시다. 제가 지금 심하게 과격하게 이야기하는 게 아닙니다. 있는 그대로 말씀드리고자 애쓰고 있는 거예요. 저를 욕하지 말고 사도 바울을 욕하세요. 고린도후서 5장 14절에 보면, 여러분 아는 이야기니까 그냥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넘쳤기 때문에 뭐라고 하느냐 하면, 한 사람이 죽었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죽었다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사도 바울이 지금 주님의 사랑으로 완전히 뒤집어써있어요. 사랑의 말로 하는 게 뭐냐 하면, 너 죽었어. 너, 돼졌어. 이 말입니다. 살아있는데? 주님이 죽었다는 말은 모든 인간이 다 죽었단 말이죠. 그러면 어떤 사람이 구원받느냐는 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에요. 내가 구원받고 네가 구원받는 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고 예수님이 죽었다는 게 중요한 문제에요.

이 중요한 문제가 바꿔치기 돼야 되는데. 내가 천당 가는 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서 모든 걸 하나님이 하나님답게 완성했다는 사실이 내가 천당 가는 것보다 더 중요한 사실로 내게 장착, 각인돼야 된다 이 말입니다. 그건 인력으론 안 돼요. 인간으로선 자기 부정이 안 되기 때문에 그건 도저히 안 되고 성령이 오게 되면, 아서라 이거나 먹어라, 하고 그냥 주는 거예요.

너는 네 것만 챙기지 그 위에다 이것 챙겨봐라. 주님께서 널 위해 죽었다는 사실. 너 천당 가는 게 자랑이 아니고 이게 자랑거리야. 주님의 십자가가 자랑거리야. 십자가 이용해 먹는 게 자랑거리가 아니고 십자가 그 자체로 자랑거리가 종결돼야 돼요. 주님 십자가 앞에서 내 자랑거리는 혜택이 되게 하시고 그냥 내 자랑이 되지 않게 하옵소서. 구원받은 자랑이 십자가를 가리지 않게 하옵소서. 이렇게 될 때 성령 받은 사람 맞잖아요.

물에 빠진 놈 건져내놓으니까 내 보따리 내놓으라는 식이 되면 안 되지요. 관심사가 엉뚱한 데 있잖아요. 그런 이야기가 에스겔에 나옵니다. 이건 여러분 번거로우니까 찾지 마시고 제가 읽어볼게요. 에스겔 3장 17절, “인자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족속의 파수꾼으로 세웠으니” 이 파수꾼이란 단어, 파수꾼이 뭐냐 하면, 아르바이트 학생이거든요.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인자야 내가 너한테 어떤 말을 달아두겠는데 네가 전한 말을 안 들으면 그 사람들은 망한 인간들이고 네 말을 듣게 되면 그거는 내 백성이다. 문제는 파수꾼인 네가 문제인데 네가 내 말하는데 있어서 필히 어떤 현상이 일어나느냐 하면, 히브리인들에게 뭐가 있다고 했어요? 애굽 국가라는 인공적인 체제가 만들어졌지요.

가만있습니까, 공격합니까, 히브리인을? 산파로 아들을 죽이라 했잖아요. 공격했잖아요. 이런 상황이 왔을 때 겁을 내서 말을 네가 제대로 안 하게 되면 그 책임을 파수꾼인 너한테 묻겠다. 에스겔 3장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성도는 파수꾼이거든요. 그걸 목격자라 하는데 목격자를 우리말로 번역하면 순교자입니다. 같은 뜻이에요.

목격자가 순교자에요. 죽는 게 중요한 게 아니고 내가 볼 걸 봤으니까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것이 바로 순교자거든요. 이거는 주께서 보게 하셨으니까 일부를 본 게 아니고 전체를 다 보게 하셨으니까 이제는 죽음도 나한테는 중요한 사항이 안 돼버렸어요. 죽음보다 더 귀한 걸 봤으니까. 죽음이 이걸 전하는데 지장될 상황이 아니에요. 나 죽는 것이 아무 일도 아니에요.

다들 그렇게 살아가니까 새삼스럽게 말할 필요도 없고. 여러분 사실 때 오늘 뭐 재미있는 것 하다 죽을까, 이렇게 생각하세요. 오늘도 슬퍼하며 죽을까, 이러지 말고. 이왕 죽을 것 오늘도 후회 없이 위시리스트, 뭘 또 신나게 해보고. 오늘 서핑 해볼까. 해운대 바다에서. 해보고 죽자. 이왕 알 것 알았으니까.

어제 낮에 했지요. 죽은 자가 산 자의 모든 수법을 안다고. 죽은 자와 산 자는 대화가 안 됩니다. 죽었기 때문에 이미 최종성이 와있기 때문에 무슨 짓거리해도 다 시시한 일, 살려고 하는 미친 짓이라고 뻔히 다 눈에 보이는데.

횡으로 백날 변해도 안 돼요. 적어도 종으로 수직으로 가야 되는데 수직으로 간 사람의 특징이 뭐냐 하면, 간 사람을 측정하는 공식 같은 걸 만들어낸다면 이겁니다. 너의 의보다 더 귀한 것 있거든 제시해보라. 정답은 여러분 압니다. 누구 의입니까? 예수님의 의, 하나님의 의죠.

불신자들은 복음 모르는 자들은 이걸 제시 못합니다. 왜냐하면 모든 하는 일이 나는 정당하다에 다 모이게 돼있어요. 왜 정당함을 강조하느냐 하면, 본인만이 아는 이게 있어요. 수치심을 자기의 정당함으로 덮으려고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런 것은 우리 성도라면 그런 통박을 다 알아요.

남편, 아내 하는 짓거리 보세요. 특히 맨날 아들 하지만 아들 하는 짓거리 보세요. 어떻게 그렇게 핑계가 많은지. 하여튼 전부 다 잘못한 건 모르겠다하고. 딸이 한 것도 모르고 마누라 한 것도 모르고. 그럼 지는 뭐고. 그럼 하숙 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그 이야기가 평소에 우리의 모습 아닙니까? 하여튼 내 수치심이 폭로된다 싶으면 기억나지 않는다, 모르겠다. 나는 어떻다, 전부 다 이런 식으로.

이게 평소에 인간들의 인위적이고 인공적인 모든 행위는 결국은 하나님 앞에 설 때만 노출되는 그 수치심을, 뭐가 수치심인지도 몰라요. 하여튼 무조건 나와요. 그것이 혹시 바깥으로 나올까 싶어서 바깥으로 나오면 내 개체가 놀림감이 되잖아요. 견딜 수가 없어요. 차라리 자살이 낫지. 명예를 훼손시켰을 때 마지막 남은 나의 잘남을 유지하는 유일한 방법은 자살이에요. 저 사람은 잘못을 알고 장렬하게 죽었대. 무슨 장렬한 엔딩을 원해서 자살을 다할까.

제 이야기가 아니고 가룟 유다 이야기입니다. 가룟 유다가 왜 자살했습니까? 스승님을 팔아먹었다는 그 수치심을 애써 남자다움으로 모면하려고 그 짓한 거예요. 최순실 그분이 감옥에서 하고 있는 일이 뭐냐? 회고록 쓰고 있어요. 뭐 자기를 부인하기 위해서 회고록 씁니까? 아니면 변명하기 위해서? 변명하지요. 나는 국가에 기여했다. 나쁜 놈 때문이다.

바로 출애굽기 1장에서 모세가 실수한 대목이 뭡니까? 우리는 정당한데 애굽이 나쁘다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성도를 그냥 두지 않겠지요? 그럼 어떻게 하겠습니까? 인간이 자기 수치심을 그걸 토치카, 방어벽을 쌓지요. 이것 뚫릴 때 이걸로 대치하고, 이것 뚫릴 때 이걸로 대치하고 하여간 어쨌든 간에 나는 정당하다, 정당하다.

이걸 잘 보여주는 사람이 치매 걸린 어르신네들, 집안의 어른들, 엄마, 아빠들. 그 존경심. 몸 아파보세요. 기어이 요양병원 안 가겠대. 왜? 그 미친놈하고 같이 할 수 없다고. 자기도 미쳤으면서. 날 환자 취급하지 마라. 내가 어떤 아버지인 줄 알잖아. 이 무슨 고집이에요. 힘주어 모든 고집에 고집은 그때 그날에 다 몰려요.

몸 아픈 것도 자식들 앞에서 그동안 존경스러운 아버지 상이 와장창, 그것도 화가 나지만 자식들 수발들어야 된다는 것도 화나니까 남은 버티는 것은 뭐냐? 어른다움의 자존심으로 버티는 거예요. 제 아내가 치매 걸린 어머니를 모실 때 고마워야 되지 않습니까? 감사해야 되지요. 감사하다는 말 한 마디도 안 하고 고맙다는 말 한 마디도 안 해요.

이걸 당사자 앞에서 해야지 남 보고 두루뭉술하게 하지 말고 우리 며느리 나한테 너무 잘해준다, 이러지 말고. 이것은 며느리 칭찬하는 것이 아니고 며느리의 고마움을 알 정도로 내가 얼마나 대견하냐 이 말이에요. 그걸 당사자에게 해야지요. 그러나 당사자에게 절대로 안 해요. 왜? 시어머니는 시어머니 값을 하거든요. 오면 잔소리부터 하는 겁니다. 너, 옷차림 그러면 돼? 단정하게 해야 돼. 치매 걸려 끝까지 돌아가시면서 어른 행세 할 도리 다하고 가는 거예요.

대우받는다는 그 수치심이 자기 정당성에 흠집을 내니까. 여러분 부모한테 이야기하는 게 아니고 여러분 자신도 나이 들면 그리 될 가능성이 있을 수 있어요. 없기를 바랍니다만. 자식 보고 요양 간다 하지 말고 부-탁합니다. 알아서 가세요. 알아서 먼저 가세요. 좀 팔뚝 까지거든 요양병원 가세요. 나라에서 보조 나옵니다. 알아서 가야 돼요. 나 살던 이곳이 좋다. 좋은 줄 누가 모릅니까, 다 알지요.

딸은 딸대로 힘들고 직장 다닌다고 핑계 대며 안 오는 며느리는 안 오면서 미안하고. 며느리도 자기 정당성 있잖아요. 며느리 값 안 했다면 수치심 들잖아요. 집안 식구 하나 아프니까 온 식구 내부가 다 들쑤셔내. 주님의 멋진 작전입니다. 잘난 며느리, 잘난 딸들 누구 하나 아프니까 잘난 것 다 달아났어요.

아버님, 못 찾아봬서 미안해요. 우리 아들 고3인 줄 아시죠. 아들 고3이라 못 오겠다는 거예요. 오십만 원 보냈습니다. 고맙다. 없는 너희들 쓰지 왜 보냈냐. 한 달 보내고, 형님과 이십오만 원씩 갈랐어요. 앞의 말과 뒤에 말이 또 달라요. 결국 문제는 돈 문제에요.

주께서 찾아올 때 사귀자고 이렇게 안 옵니다. 토치카, 방어벽 이중 삼중 완전체로 갑시다. 일곱 개의 방어막, 방어벽이 있어요. 이것 뚫리면 이곳으로 피신하고, 이것 뚫리면 이곳으로 피신하고 나는 정당하다, 나는 정당하다. 주께서 한꺼번에 다 뚫어버려요. 이게 뭐냐? 사도 바울이 말하기를 십자가가 눈앞에 보이거늘. 죽은 인간, 살아있으니 산 걸로 보이냐. 애초부터 넌 죽었어요. 죽은 인간이 숨 쉴 만하니까 자기 정당성이 막 튀어나오는 거예요.

그 때문에 내가 죽었잖아요. 하나님이 낚싯대로 건질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이 땅에서 비참한 죽음을 죽은 이유가 방어벽을 뚫기 위해서 하는 거예요. 물론 성령께서 그렇게 하게 하신 것. 뚫어서 직접 바로 닿은 거예요. 주사가 길어요. 너~무 길어요.

남자가 남자인 척하면서 울어선 안 돼. 남자는 세 번만 울어야, 뭐 나라 잃을 때, 부모가 잃을 때. 참고 있다가 하도 아내가 괴롭히니까 술김에 남자라는 이유로 묻어두고 싶은 그 세월이 너~무 길었어. 남자의 심정을 알아챈 유일무이한 한국 최고의 가요는 <남자라는 이유로> 조항조가 불렀던. 아직까지 그 노래에 대항할 노랜 없어요.

남자라는 그 오기 때문에 계속 울고 싶어도 여자 같이 우네, 그 소리 듣기 싫어서. 왜? 그게 자기 정당성이 깨지니까. 남자로 수치 안 당하려고 누르고 술로만 달래다가 나중에 터져버린 것이 뭐냐 하면, 찔찔 울면서 내가 너와 산다고 얼마나 힘든지 아느냐, 울고 싶어도 참는지 너는 여자라서 모르지? 남자는 다 알아. 울고 싶어도 안 우는 것.

그렇게 잔소리해댈 때 여자의 대응책은 이미 마련돼 있습니다. 이건 여자 분들은 알고 있지만, 남자가 울면서 자기 고생담을 늘어놓을 때 그걸 차갑게 잘라내는 아주 멋진 문장이 있어요. “내가 니끼가.” 이 한 마디에 남자는 갑자기 중지가 돼버려요. 처음부터 너는 오해하고 있었구나. 너 지금 착각하고 있구나. 나, 네 꺼 아니야. 내 인생 따로 있어. 밥이나 먹자.

갑자기 남자 이야기 왜 나왔나. 남자의 착각은 뭐냐 하면, 내가 여자한테 잘해주면 저 여자가 내 것 될 거라고 착각한 거예요. 남자의 영원히 치료되지 않는 고집인 거예요. 왜? 남자다움은 연약한 여자를 책임짐으로써 남자다움의 정당성이 따로 창고에 확보된다고 생각한 거예요. 여자는 한 번도 남자 것이라고 생각해 본적이 없습니다. 그렇지요? (예) 그때는 예 아니라 ‘아멘’해야지. 여긴 교회니까.

시편 14편 봅시다. 선을 행하는 자 없어야 돼요. 주님이 외부 환경으로 해서 내 내부 환경으로 들어옵니다. 다윗의 내부 환경은 예수님이 바깥세상을 보는 것과 똑같은 시선으로 보게 되는 거예요. 예수님이 이 땅에 왔을 때 하나님이라 하지 말고, 구약이지만 신약에 완성이 돼야 되니까 구약에서 신약을 뽑아내야 해답이 있어요. 구약만 쳐다보면 해답이 없어요.

예수님이 이 말씀을 가지고 옵니다. 그러면 무슨 세계입니까? 이게 말씀의 세계에요. 말씀의 세계는 쉽게 말해서 지금 우리 안에 남자든 여자든 뭐가 살아있다? 시편 14편을 완전히 활어처럼 펄펄 뛰게 만드는 거예요. 이게 아까 누구 열심? 하나님의 열심. 이건 본의 아니게 도시락 김칫국물처럼 질질 새고 있어요. 신경 안 써도 되는데 세상이 너무나 인공적이라는 사실. 그냥 가만있는 인공이 아닙니다. 누굴 공격합니까? 나의 내부에 있는 인공을 공격하기 위해서 주께서 허락한 인공이에요. 남 욕하지 마라. 너도 마찬가지야. 너도 언제 하나님 생각했느냐, 말이죠.

어제 제가 낮 설교하면 두 번 반복한 게 있어요. 제가 너무 은혜 받아서 그래요. 에베소서 4장 20절에 보면, “너희는 그리스도를 이같이 배우지 아니하였느니라”라는 그 대목에서 이건 성경에 나오는 대목임에도 제가 충격을 받은 게 우리가 평소에 예수님께 배울 생각을 안 해요. 우리는 부자한테 돈 버는 요령이라든지 친구 가운데 갑자기 떼 돈 번, 주식 투자 뭐했고 땅 어디 사놨고 그런 것 보고, 그리고 <스카이캐슬>, 남의 애는 뭘 해서 공부 잘했는지, 수학성적 올랐는지 그런 걸 적극적으로 배우길 원하지 언제 주님한테 배울 게 있습니까?

주님을 자꾸 멀리하고 싶어요. 나한테 가까이 하기 싫어요. 베드로처럼 도망치고 싶어요. 그런데 사도 바울은 토치가, 방어벽을 뚫고 들어오니까 우리 예수님한테 이렇게 배웠지요? 뚫고 들어가요. 세상에서 사는 방법을 배웠잖아요, 라고 뚫고 들어가요. 그건 이미 나는 죽은 몸이고 주의 은혜로 산다는 그걸 배웠잖아요, 라고 뚫고 들어온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는 주님한테 배웠다고 할 때 오늘 다윗 같은 경우엔 뭘 배웠습니까? 배울 것도 없어요. 이미 주님께서 우리 안에 들어와서 주님이 세상을 볼 때 하나님이 아니고 주님입니다. 이 땅을 밟았던 그분입니다. 이 땅에 인간들이 사는 인공적인 세계에 하나님은 어떤 식으로 살았느냐? 어떻게 통과했느냐?

그게 시편 14편에 예수님의 고백이 미리 나왔고 이 고백이 다윗 속에 장착돼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이후에 이 고백이 우리 안에 김치 반찬 도시락으로 들어와 버렸어요. 우리 뜻대로 안 돼요. 시편 14편이 우리보다 우세합니다. 세상을 볼 때 다음 대통령은? 이렇게 보지 않고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하는 그런 요소가 눈에 띠게 돼요. 이제부터는. 그게 눈에 띤다는 것은 내 안에 누가 계시다? 시편 14편의 주인공이 말씀 자체로 살아있는 거예요. 시편 14편이 활어가 되어 내 안에 살아있는 거예요. 우리는 움직이는 말씀이 사람이 됩니다.

그렇다면 그 다음 진도 나가봅시다. 사귐이란 주님의 현존성을 드러내는 방식. 여기에 성도의 사귐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도의 사귐부터 하지요. 성도의 사귐은 너, 나를 드러내는 게 아니고 우리 가운데 누가 계시다? 주님이 현존하고 계시다. 그냥 현존합니까? 주님이 무슨 세계를 몰고 왔습니까? 말씀의 세계를 우리 앞에서 드러내는 방식이 사귐이니까 성도는 개인주의로 나가면 안 되고 말씀 안에서 복음으로 교류해야 된다 이 말입니다. 그걸 교회라고 이야기합니다. 교회라는 단어를 하기 위해선 긴긴 시간이 필요한 거예요. 그냥 교회는 아닙니다. 모여 봤자 개체에요. 개인의 욕심만 있어요.

이제는 14편 이해됩니다. 긴긴 시간 끝에 다 와야 이해돼요. 여기 2절 봅시다.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 살피사” 이제 제가 해석합니다. 굽어 살필 때 기준이 있지요. 예수님이 게신가를 보여주죠. 네가 얼마나 똑바로 살았는지 보는 게 아니고 주께서 관찰할 때 그냥 관찰하면 우리가 개체가 돼요.

이제는 개체가 아니고 우리 안에 사귐이 있으니까 네 안에 주님의 사랑이 있는지를 보는 거예요. 아까 구명조끼가 있는지를 보는 거예요.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구원이 되는 그 구명조끼. 유월절의 어린양의 피가 있는지 보는 겁니다. 왜? 그 피가 말씀의 완성이니까. 모든 말씀은 피에 다 수렴되니까. 피로 인하여 시편 14편이 전개되니까.

보니까 있어요, 없어요? 있는지 질문을 던지고 답변을 3절에 합니다. “다(all) 치우쳤으며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 선한 말씀의 완성을 말하고 ‘함께’라는 것에 우리도 포함해서 집어넣읍시다. 내 자랑할 수 없는 거예요. 왜? 저들이나 나나 똑같은 인간이니까.

이건 누구 시선입니까? 예수님께서 나 빼놓고 다 율법의 저주 아래 있음이 마땅하다고 보는 시선이 우리 내부 환경의 핵심부분으로 자리 잡기 때문에 그래요. 주여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 사귐을 통해서 아주 편하게 이야기해요. 고요함 속에서.

안마의자 있잖아요. 아이고, 시원하다. 주여 아무도 없습니다. 주님 보시기에 아무도 없습니다. 아이고, 왜 이리 시원해. 좋습니다. 주여 함께 죄를 치울 자 아무도 없습니다. 이걸 안마의자에서 나와서 꿇어앉아 하지 말고, 안마의자에서 시원하다는 단어와 동반해서 해주시기 바랍니다. 어우 시원하다. 주여 아무도 없습니다.

주께서 이미 용서한 사람에게는 내 몸이 아니고 내 인생이 아니고, 안마의자 누구 마련하신 거예요? 주께서 마련하신 거예요. 왜 하셨습니까? 쳐다보고 구경하라고? 전기세 아끼라고? 아니죠. 마음껏 즐기라고. 죄인에 대한 혜택입니다. 그 혜택도 괜찮은 혜택이죠. 범사에 감사하라. 모든 일에. 골라골라 잡지 말고 감사할 것만 고르지 말고 모든 일에 안마의자 앉듯이 그렇게 앉아서 하세요.

또 안마의자 앞에서 하려 하는데 손자가 와서 할머니 이것 까부세요. 하려 하는데 그것도 주께서 손자 주셔서 하게 하시는 거예요. 그러니까 범사에. 손자가 괴롭혀도 혼자 있더라도 관계없이 범사에 감사해야 됩니다. 이게 사귐이에요. 그래서 요한일서 다 안 봤습니다만 사랑 안에는 □가 없다. 두려움이 없는 거예요. 두려움은 미진한 것이 있을 때는 두려움으로 다가오거든요.

그러나 내일 돼봤자 죄인데 뭐. 의인 될 가능성은 없고 내일 돼봤자 주께서 또 방어벽 뚫고 내 수치심 들통 나게 할 건데요. 수치심 들통 날 것도 없어. 이미 들통 다 났어요. 죽는 이유가 다 드러났는데 뭘 더 감춰요. 그래봤자 죽을 거예요. 엄마, 나 백점 맞았어. 그래봤자 죽어. 엄마, 서울대학 먹었어. 그래봤자 죽어. 엄마, 나 법무부장관 됐어. 그래봤자 죽어.

4절 봅시다. “죄악을 행하는 자 … 여호와를 부르지 아니하는도다” 아까 인공적이니까 늘 인공적인 것은 인공적으로 연결되니까 주님한테 신경 쓸 여유가 없어요. 또 머리 싸매야 나를 위한 새로운 법칙 같은 걸 계속 제정하는 거예요. 눈만 뜨면 제정해요. 오늘도 무슨 법칙을 만들어서 어떤 질서를 만들어야 돈이 들어오는지 그것만 생각하는 거예요.

5절 봅시다. “저희가 거기서 두려워하고 두려워하였으니 하나님이 의인의 세대에 계심이로다 너희가 가난한 자와 경영을 부끄럽게 하나” 이게 바로 인공적인 것의 후유증이 아닙니까. 가난한 자나 부자나 다 죄인이에요. 문제는 이스라엘은 균등해야 되거든요. 다 같이 들어올 때 지파 숫자대로 땅을 넓혔어요. 갈렙과 유다는 약간 공로가 붙어서 땅을 분배했는데 땅 분배가 엉망이 되고 말았어요.

땅을 주면 뭐합니까. 호세아, 아모스, 예레미야에 가면 누구 차지가 됐어요? 그걸 부자가, 그걸 지주라 하지요. 왜 지주가 되느냐 하면, 땅에 농사를 지었는데 농사가 되려면 약속의 땅에 제 때에 비가 와야 돼요. 가뭄 들고 흉년 들면 안 돼요. 그런데 가뭄이 들고 흉년이 들었다는 말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이 바알한테 가있고 여호와를 버렸기 때문에 징벌로 받았거든요. 율법에 의하면 벌 받게 돼있으니까.

가뭄 드니까 땅의 소산이 없지요. 땅의 소산이 없으니까 먹을 게 없잖아요. 그러면 여유 있는 자금 누가 있느냐 하면, 지도층에 있는 거예요. 지도층은 왜 땅 없이도 돈을 벌었는가? 이 사람들이 이방민족과 무역을 시도하면 이방민족의 종교도 수입했어요. 마누라도 데려오고. 마누라는 친정집이 잘 사니까. 이스라엘 주변의 특징이 다 잘 살아요. 희한해. 다 애굽들이에요. 제2, 제3의 애굽들이에요.

그러니까 이 사람들은 무역해서 여윳돈이 많고 그 돈으로 땅을 헐값에 사들이고. 그러니까 여윳돈 많은데다 플러스 또 여윳돈이 생기는 거예요. 왜? 이자 받아먹으면 되니까. 그러니 빈부격차가 점점 더 심화되는 겁니다. 그걸 흔히 요샛말로 자본주의라 하지 않습니까. 인격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 사람이 가진 자본이 돈이 그 사람의 신용도를 의미하는 거예요.

난 당신을 믿습니다. 인간을 믿으면 안 되지요. 당신에게는 부도 날 위험성이 적다는 것을 나는 믿습니다. 그래서 당신한테 돈을 빌려주고 당신의 말에 내가 신임을 하겠습니다. 돈 없는 인간은 인간이 아닙니다. 돈 없는 남편은 남편이 아니지요. 그건 이혼 후보감이에요. 이혼 0순위입니다.

나중에 퇴직해서 돈이 없으니까 60대 남자가, 여보 어디 가, 하다가 얻어맞아 입원했다는. 내가 어디 가든지 네가 그걸 함부로 묻느냐 말이죠. 남자들은 옛날에 많이 벌어줬잖아. 니 자식새끼들한테 다 들어갔다. 나라도 벌어야지. 어딜 따라와. 또 어딜 함부로 전화질해. 니가 왜 내 위치를 알려 해. 강아지와 남편은 그저 안 떠나려고 떠나면 안 된다고, 하는 그런 것. 그게 뭐냐 하면, 인간이 부자 아니라도 부자를 지향하고 있습니다.

끝으로 말씀드릴 것은 이 세상은 왜 하나님이 없느냐? 방향이 지옥을 향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약속이 없는, 약속하신 십자가 없는 곳을 태생적으로 우리는 이 몸이 좋아하기 때문에 차라리 이렇게 생각하세요. 예수 믿는 것이 비정상이다. 이건 예수 믿는 것이 정말 기적이라고 봐야 돼요. 다윗의 이런 고백이 기적이듯이 그런 기적이 앞으로 여러분들을 주도하고 이끄실 겁니다. 왜냐하면 미리 온 천국이고 미리 온 부활이기 때문에.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과 더불어 우리 자신을 보았습니다. 우리가 세상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께 배울 생각 없고 주님께 배울 생각 손톱만큼도 없는 우리들 그러나 함부로 들어오셔서 주의 불가피성으로써 주의 말씀의 안목으로 세상을 보게 하시니 이 기적이 내 목숨보다 귀한 줄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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