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오후설교

동쪽지파의 땅(수22;1-3) 190630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9. 7. 1. 07:11
2019-06-30 14:53:26조회 : 24         
   동쪽지파의 땅 190630이름 : 이근호 (IP:119.18.87.190)   

동쪽 지파의 땅(여호수아 22:1-3)

음성 동영상 Youtube 

 링크 : https://youtu.be/SkcJLpVJ9Mw, Hit:0
 이근호19-06-30 15:42 

동쪽 지파의 땅 

2019년 6월 30일              본문 말씀: 여호수아 22:1-3 

(22:1) 그 때에 여호수아가 르우벤 사람과 갓 사람과 므낫세 반 지파를 불러서 

(22:2) 그들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종 모세가 너희에게 명한 것을 너희가 다 지키며 또 내가 너희에게 명한 모든 일에 내 말을 너희가 청종하여 

(22:3) 오늘날까지 날이 오래도록 너희가 너희 형제를 떠나지 아니하고 오직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명하신 그 책임을 지키도다 

12지파 가운데 2와 2/1지파는 요단강 동쪽 땅에서 살게 됩니다. 이러한 그들의 요구는 모세가 살아 있을 때 모세보고 부탁했고, 모세는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모세는 죽었습니다. 과연 여호수아가 모세하고 맺은 약속을 들어줄까요? 여호수아의 관심사는 따로 있었습니다. 

그들이 땅을 차지하고 아니하고 보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주신 말씀에 있습니다.
말씀으로
전체 이스라엘이
하나로 통합되는 것
모세가 이스라엘에게 당부한 내용이라는 겁니다.
여기에 대해서 두 지파+ 반 지파는 흔쾌히 동의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원래 노리던 땅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자신이 원한 것을 원지 못하는 것이 나쁜 것이 아니라 도리어 원하는 것을 원는 것이 더 나쁩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마음의 한도가 들통 났기 때문입니다. 즉 “지금껏 나는 이것을 얻기 위해 일생을 달려왔습니다. 그러니 그동안 양보하고, 손해보고, 마치 남들에게는 희생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도 실은 희생이 아니라 투자였습니다.”가 되는 겁니다. 

여기서 목표와 목적을 분명히 합시다. 활쏘기 경기에 비유될 수 있습니다. 활쏘기에서 목표가 목적은 아니다. 목적은 쏘아 맞춘 새가 아니라 목적은 명중시킴으로써 점수를 얻는 것입니다. 그렇게 점수를 얻음으로써 목적은 달성됩니다. 사람은 자신이 얻고자 하는 것을 얻게 되는 그것이 자신의 목적이라고 여깁니다. 

이렇게 되면 목적을 쟁취한 자기 자신을 버릴 수가 없습니다. 자기 자신을 우대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자신의 만족스러움을 부정할 수가 없는 겁니다. 자신이 곧 자기에게 최종적인 것이 됩니다. 이러한 인간성이 약속의 땅에서는 배제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목적이 최종적으로 따로 마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사실만한 세상을 만드는 것이 

약속의 땅의 목적이요 이스라엘의 목적입니다. 

이스라엘 본인이 살만한 세상을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그저 하나님의 목적달성의 매개물에 불과합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이 달라는 것을 주시되, 

그 주신 것에다 새로운 의미를 부착해서 도로 뺏아 버리십니다. 

즉 인간의 것으로 고정될 수 있는 것을 주님은 주시지 않습니다. 

인간들이 자기 만족에 살도록 하시지 않습니다. 

인간성은 결국 배제되어야 합니다. 

인간의 힘으로 땅을 얻을 수가 없을뿐더러 

그 땅에서 사는 동안 지속적으로 내 것이라고 할 수 없게 조정하십니다. 


인간은 자기 한도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벗어나봤자 그것 자체가 새로운 한도로 자리 잡게 됩니다. 

인간들의 주인의식에 준한 행동을 하나님께서는 약속의 땅에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약속의 땅에 들어온 지파들은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하나님을 섬겨야 합니다. 

이는 곧 자신이 목적이 되는 그 한도를 넘어서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 한도를 넘어서는 소극적인 방법이, 말씀대로 바르게 살겠다는 다짐입니다. 

이 다짐이 엉터리요 실패가 되는 이유는 

인간이 자기 자신에 대해서 아는 바가 전혀 없어서 자신이 괜찮은 존재인 줄 압니다. 

하나님 말씀을 들리게 되면 인간의 마음 내부는 자극을 받아 작동케 됩니다. 
하는 선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원치 않는 악이 나와서 

그 금지의 법을 넘어서고 위배하는 즐거움을 누리게 됩니다

인간의 그 어떤 저항도 소용없습니다. 

인간들의 자체적인 평정과 협상과 공갈이라도 악은 멈추지 않습니다. 

제다가 복음을 전하면 분노의 얼굴을 들고 시선을 쏘아댑니다. 

여기서 원치 않는 싸움이 벌어집니다. 

땅 차지하기 위한 전쟁은 모든 게 마무리되었지만 

땅을 차지했다고 해서 진정한 전쟁은 멈추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그들 자신의 것을 담을 호주머니가 없어야 합니다. 

이미 하나님에 의해서 이스라엘은 무능력자들로 다루어집니다. 

일은 주님이 하시고 이스라엘은 혜택만 입은 자들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정리된 구조는 이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진정한 땅 주인이요 이스라엘은 그 하나님에게 땅을 빌려 쓰는 품꾼이라는 점이 나타납니다.
품꾼이라면 당연히 품삯을 내어야 합니다.

민수기 31:26-30을 보게 되면, “ 너는 제사장 엘르아살과 회중의 족장들을 더불어 이 탈취한 사람과 짐승을 계수하고 
그 얻은 물건을 반분하여 그 절반은 싸움에 나갔던 군인들에게 주고 절반은 회중에게 주고 
싸움에 나갔던 군인들로는
사람이나 소나 나귀나 양떼의 오백분지 일을 여호와께 드리게 하되
곧 이를 그들의 절반에서 취하여 여호와의 거제로 제사장 엘르아살에게 주고 
또 이스라엘 자손의 얻은 절반에서는
사람이나 소나 나귀나 양떼나 각종 짐승을 오십분지 일을 취하여 

여호와의 성막을 맡은 레위인에게 주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실제로 전쟁에 나간 군인들은 따로 있지만 그 전쟁에서 얻은 전리품을 가져 갈 사람은 여럿됩니다. 왜 그러합니까?
전쟁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서 인간성을 들어내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즉 천국은 예수님이 사시는 정주 여건에 맞아야 합니다. 

결코 인간들의 정주 여건에 맞아서는 아니되는 겁니다. 

최종적으로 고귀하고 소중한 것은 오직 예수님 뿐이어야 하는 겁니다.
인간들이 자기 몫을 달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예수님만이 차지할 권리가 있는 그 천국에
주님께서 자신이 원하시는 자들을 데려 들어가려면 선물을 주셔야 하는 겁니다.
행하지도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얻어걸리는 것이 있는 사람들이 천국 갑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과연 자신이 참으로 천국에 이미 들어와 있는 존재인지를 아는 방식은,
하나님께서는 ‘나의 것’이라는 것을 부지런히 걷어내신다는 사실을 알고있는가 입니다.
즉 주시고서는 빼앗는 반복적 과정을 통해서
참으로 우리 자신의 목적에 우리가 매여있는지
아니면 주님의 주되심이 유일한 목적임 에 동원된 자들인지를 알게 하시는 겁니다. 

뭐든지 들어오게 되면 우리 인간들은 다음과 같이 착각합니다.
“내가 하나님 보시기에 참으로 대단한 존재라서,
내가 꼭 필요한 존재라서 내가 원하는 것을 주셨다”는 식으로 말입니다.
하지만 실은 빼앗길 때 비로소 성도로서의 정체가 나옵니다.
“내보다 주님이 더 귀하고 나의 목적입니다”라는 고백이 나오게 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애초부터 우리가 아무 것도 없이 세상에 나타남을 잊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근호19-07-01 07:01 

241강-여호수아 22장 1~3절(동쪽 지파의 땅)20190630-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여호수아 22장 1~3절입니다. 구약성경 352페이지입니다. 

“그때 여호수아가 르우벤 사람과 갓 사람과 므낫세 반 지파를 불러서, 그들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종 모세가 너희에게 명령한 것을 너희가 다 지키며 또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일에 너희가 내 말을 청종하여, 오늘까지 날이 오래도록 너희가 너희 형제를 떠나지 아니하고 오직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그 책임을 지키도다” 

여호수아가 두 지파와 므낫세 반(반 토막 난 므낫세) 지파에게 이야기를 합니다. 여호수아가 이렇게 당부하고 그들에게 그들이 지목한 땅에 살도록 공고를 하는데 이것은 무슨 중대한 의미가 담겼느냐 하면 원래 르우벤 사람과 갓 사람과 므낫세 반 지파는 여호수아하고 약속한 것이 아니에요. 이건 모세와 한 약속이에요. 

그런데 이미 모세는 돌아가셨잖아요. 그러면 그 약속이 유효하냐는 문제입니다. 약속한 당사자가 죽었을 때 다른 사람은 그 약속을 준수할 의무가 사실은 없지요. 왜냐 하면 죽은 사람에게 묻지 왜 나에게 따지냐고 할 수가 있는 문제입니다. 지난번 대통령과 약속한 것을 이번 대통령이 지킬 필요가 없고 이번 대통령이 약속한 것을 차기 대통령이 지킬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 하면 “지금은 내 시대고 내가 권세를 갖고 있기때문에 옛날 사람은 잊어라. 내가 옛날 사람 시다바리 아니다”라고 자기 자존심을 내세울 수가 있거든요. 그런데 이 여호수아는 그 약속을 그대로 실행하고 준수합니다. 이것은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을 분명히 하자는 거예요. 이 본문에서 이 본문을 보게 되면

여호수아가 전에 모세와 약속한 그 땅을 너희 두 지파 플러스 반 지파에게 주겠다고 했는데
이 오늘 본문에서 빠져있는 대목이 있어요. 

어떤 요소가 빠져있느냐 하면 ‘너희들은 변함이 없지? 그지?’라는 하나님에 대한 충성이 돈독하고 독실하고 신실하다는 조건 하에 그 약속이 유지되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 쪽에서는 약속을 지켰는데 이 두 지파와 반 지파가 약속을 어겨버리면 이건 하나님에게 책임을 물을 수가 없어요. 그들이 잘못된 겁니다. 

그래서 2절에 뭐라고 되어있느냐 하면 “그들에게 이르되 그 요단강 동쪽에서 살기는 살되 조건이 있다. 여호와의 종 모세가 너희에게 명령한 것을 너희가 다 지키며 또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일에 너희가 내 말을 청종하여, 오늘까지 날이 오래도록 너희가 너희 형제를 떠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그 책임을 지키도다”라고 당부하고 그들도 그것에 대해서 수긍을 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변하지 않는다는 조건하에 지킨 율법이에요. 율법은 선한 겁니다. 문제는 선하지 않은 쪽이 선한 율법을 지키려고 할 때 이게 사단나는 거예요. 누가 선하지 않고 누가 한결같지 않으냐 하면 바로 율법을 대하고 말씀을 대하는 우리 자신에게 문제가 있는 겁니다. 우리는 형편 따라 언제든지 배신을 잘해요. 

그러면 하나님 입장에서는 율법을 줬는데
인간인 자기 백성들이 율법을 안 지켜버리면
하나님 쪽에서는 손해가 아니냐고 이렇게 생각이 되겠지요.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일을 망치는 쪽으로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러면 어떻게 일을 하시느냐 하면
율법을 주시되 그 약속의 땅에 살게 하시되
뭘 다 벗겨내시냐 하면 인간성, 인간성을 배제한 자체로
그다음부터는 그 땅에 걸맞은 땅에 부합되는 새로운 백성을
그들의 후손이 되게 주께서 조치하시는 겁니다. 

굉장히 하나님께서 치밀하시고 고맙지요. 두 이웃이 사는데 아버지 살아계실 때 이웃 간에 서로 친하게 지내고 상당히 사이가 좋았단 말이죠. 어떻게 친하냐 하면 아침마다 자기 앞마당은 자기가 청소하기 식의 암묵적 계약을 해서 아버지 살아계실 때는 아주 좋았는데 아버지 돌아가시고 어떤 집 아들이 술을 맨날 처먹고 와서 맨날 행패부리고 고래고래 고함지르고 부부싸움 할 때는 우리 친하게 지내자는 아버지 대의 약속은 안 되는 거예요. 

이건 하나의 가상인데, 그러면 마을의 화목을 위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일단 마을 사람들이 몽둥이를 들고 그 아들이 술 먹었을 때 때려 죽여버려야 하죠. 때려죽이고 말 잘 듣는 어떤 남자를 그 집에 대신 살게 하면 동네는 다시 아주 평화로운 동네로 전환됩니다. 제가 말해도 이건 말도 안 되는 소리죠. 왜? 그놈의 인권 때문에 말이 안 되잖아요. 

그러나 주님에게는 인권은 없습니다. 왜냐 하면 인간이 없기때문에 인권도 없어요. 인간은 죄인이지 인간이 아니거든요. 죄인에게 죄인권이 있습니까? 죄인은 저주받아야 해요. 심판받고 벌 받아야 하지 무슨 인권을 논합니까? 있을 수 없거든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죄인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받으시는 겁니다. 

저는

죄인인데 하나님인 나의 조치에 의해서 약속 속에 들어오는 사람이 되었다
는 그 결과를 놓고 주님께서는 굉장히 기뻐하는 거예요.
이러한 주님의 작업을 보다 알기 쉽게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목표와 목적이 다릅니다.

목표와 목적의 차이점을 예로 들면 옛날 사극에 보면 어떤 사람이 화살 쏘기를 해서 새를 잡아요. 참새를 잡는단 말이죠. 
그러면 활의 목표는 뭐냐? 활을 쏴서 새를 잡는 것이 목표예요. 

그럼 활쏘기의 목적은 뭐냐? 한 마리 잡을 때마다 점수가 일 점씩 올라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점수 올라가는 것이 목적이 되고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동원되는 매개물이 뭐냐 하면 새가 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율법을 완성하는 거예요. 

거기에 하나의 목표물로 동원되는 것이 뭐냐 하면 죄인입니다. 

하나님의 의는 

그냥 하나님 자체로써 의인이 아니고 죄인을 의인으로 만들어주는 그 솜씨가 있을 때만 그게 하나님의 의가 되는 겁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의를 위해서 주님께서는 인간 앞에 선악과를 심어서 죽게 만들었어요. 

죄라는 것을 발생시켰단 말이죠. 

하나님께서 허락하에 하늘에 있는 악마의 죄가 땅까지 확장되도록 그렇게 조치를 하신 겁니다. 

그게 하나님의 일에 실패가 아니에요. 그게 뭐냐 하면 예수님을 의롭게 하시기 위한 하나의 전략이었습니다. 

저는 이것을 인간성 배제라 하는데 철저히 인간의 개인적 욕구 같은 것은 배제되겠지요. 

인간성 배제에 대해서 이 인간세계에서 흔하게 일어나는 일이 뭐냐 하면 

여러분 생각하기에 가장 인간성이 말살되는 현장이 어디냐 하면 바로 전쟁터입니다. 

전부 다 뭐 대단한 것처럼 세상에서 잘난 체하다가 

전쟁터 가면 제복 하나씩 입고 총알받이로 그냥 나가는 거예요. 총알받이로. 

총 쏘지도 않았는데 폭탄이 와서 죽어버리고 갑자기 영웅 되고 그런 거 있잖아요. 

전쟁영화 가운데서 저거는 좀 말이 안 되고 웃기는 한국 영화가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식물학을 전공하는 박사과정에 있는 대학원 학생이 징집되어서 군에 가는데 

전쟁할 생각은 안 하고 ‘휴전선에 이렇게 희귀한 식물이 있다니’라고 놀라면서 식물채집하고 있는 거예요. 


남들은 전쟁하고 있는데 자기는 식물채집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나 평화 시기가 되고 전쟁이 끝나게 되면 몇 명이 고지를 탈환하고 이런 건 중요하지 않아요. 

세계적으로 유명한 것은 바로 희귀식물을 채집해서 그 DNA를 추출해 희귀병을 낫게 하는 신약을 개발한다면 

그 사람은 최고의 국가의 명예를 드높인 사람이 되는 거예요. 

그러나 전쟁 중에는 그런 사적이고 개인적인 것은 말살당합니다. 그건 도저히 용납이 안 되죠. 

그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모든 인간성은 배제당하는 거예요. 

지금 하나님께서 여호수아를 우리에게 펼쳐 주시는데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지금 우리에게 뭐라고 요구하느냐 하면 

‘모든 인간성을 쥐지 마라. 

네 사적인 영역에서 하나님 믿고 내 개인적으로 어떤 이득이냐를 따지는 것은 전혀 하나님 앞에 안 통한다’

라는 사실을 우리가 이 본문을 통해서 알아야 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사적인 인간적인 요소가 배제된다면 남는 게 무엇인가? 

우선 우리의 인간적인 사적인 요소를 사적이라고 하지 말고 

오늘 말씀대로 “너는 마음을 다하여 정성을 다하여 뜻을 다하여 하나님 말씀을 지켜라”

라고 하면 그다음에는 말은 잘하죠. “예”하고 잘하죠. 

하지만 그걸 지키라고 해서 지킬 인간들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뭔가 지키라고 한다는 것은 잠자고 있는 우리의 악마성을 오히려 자극하는 개기가 돼요. 

“탐내지 마라”라는 말씀이 오는 순간 

우리는 그때부터 말씀을 모를 때는 가만히 있었는데 

말씀이 들어오게 되면 우리가 탐내는 사람으로 작동하게 되어있습니다. 

이것은 인간성이 나빠서가 아니라 인간 자체가 그래서 그래요. 

인간 자체는 율법이 옆에서 와 주고 하나님의 말씀이 와 줘야 

자기가 죄 덩어리인 것을 비로소 아는 겁니다. 

그러면 자기 죄를 모르려면 어떻게 하면 되느냐면 

성경 안 보면 돼요. 복음 안 듣고 말씀 안 들으면 돼요. 

그러면 자기는 늘 잘난 사람이에요. 대단한 사람이에요. 

그러나 성경만 들이대면 ‘왜 나는 착한 사람인데 자꾸 윽박지르냐’라고 

복음을 전하는데 자기는 윽박지르고 있다고 오해를 하는 거예요. 

바짝 긴장해서. ‘그래그래 나 죄인이다. 하지만 내가 모든 것이 나쁜 건 아니잖아’

라고 발악을 하고 발작을 일으키는 거죠. 


그 죄인의 증상이 갑자기 돋아서 등장하거든요. 

오늘 본문은 그걸 약간 대규모 적으로 보여주는데, 

다시 설명하면 요단강 서쪽에는 원래 본토 이스라엘 땅이에요. 지금도 이스라엘 땅이고. 

지금 요단강 동쪽에 요단강을 지중해 쪽이 아니고 한국 일본 쪽인 아시아 쪽으로 

이 동쪽에는 지금은 바로 요르단이라는 나라가 있어요. 

지금 여기 있는 사람들이 요르단에 살고 있는데 요르단 나라 있고 그 위에 전쟁하는 시리아 나라 있고 

좀 더 위에 올라가면 사우디아라비아 있고 저쪽으로 가면 이라크 있고 해요. 

그 지역으로 볼 때 이렇게 생각하시면 제일 쉬워요. 

내가 원하는 것을 갖지 못하는 것이 나쁜 것이 아니고 

하나님 보시기에 내가 원하는 것을 가진 것이 더 나빠요. 

왜냐면 자신의 현재 자신의 한도가 노출되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카드 한도가 10만 원밖에 안 남았는데 친구가 식당에 와서 밥 사달라고 해서 갔는데 

밥값이 인당 5만 5천 원 나와서 폼은 내야 하겠고 카드는 멋있게 잡아당기며 긁었는데 

“한도 초과입니다”라고 할 때 친구 앞에서 우사 당하겠지요. 

하나님께서 지금 르우벤 사람이 사는 땅과 갓 사람이 사는 땅과 므낫세 반 지파 사람에게 

약속의 땅을 지급하는 것은 우사 당하게 하려고 그런 거예요. 

내가 원하는 것을 내가 얻었다고 하는 순간 

그게 뭐냐 하면 마음을 다하여 뜻을 다하여 충성을 다하여 절대로 하나님을 섬길 수 없는 존재인 것을 

우리가 드디어 들통나는 겁니다. 

인간의 자기 한도가 드러난 거예요. 

‘나는 하나님의 뜻이고 뭐고 나는 나 살 땅만 있으면 나는 최고로 좋겠다. 끝!!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지만 나에게 다른 거 더이상 요구하지 마세요. 나는 이걸로 족합니다.’

라고 마치 하나님이 자기 요구 들어주는 그런 분인 줄 알고 자기 본색을 그냥 다 드러낸 거예요. 자기 본색을. 

이 므낫세 사람들의 태도가 오늘날 우리들의 태도와 동일합니다. 

이 므낫세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는 민수기 32장에 보면 그게 나와요. 

땅에 가축이 많으니까 좋은 땅 먼저 선점하겠다고 전쟁하기도 전에 모세에게 “저 땅 주세요. 저 땅 주세요.”라고 

르우벤과 갓 지파와 므낫세 반 지파는 같이 합세해서 두 지파 플러스 반 지파가 합세해서 그 땅을 차지한단 말이죠. 

“우리가 원하는 것을 위해서 전쟁하겠습니다”라고 하는 거예요. 

그게 바로 네 한도가 드러난 거예요. 자기 한계가. 

왜 천국에 우리 원하는 것이 끼어들어야 하죠? 

교회 올 때 내가 원하는 것을 왜 교회에서 기도 내용으로 포함이 되어야 합니까? 

아침에도 이야기했지만 성도라 하는 것은 이미 발가벗음이 다 노출된 사람이에요

주머니가 없어요. 뭐 더 챙길 주머니가 없다니까요. 

성도는 내 것 챙길 주머니를 하나님이 용납을 안 해준 사람들이에요. 

주님의 일에 편입되었으면 되었지 따로 내 일이 있어야 할 하등에 이유가 없는 거, 그게 성도입니다. 

성도의 목적이 뭔지 알아요? 성도의 목적은 그리스도의 의를 드러내면 그만이에요. 

물론 그 목적을 위해서 목표, 뭐 땅값이 오른다든지, 승진한다든지, 아이가 공부를 잘한다든지, 

이런 것들이 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활 쏴서 새 잡는 것밖에 안 돼요. 

주께서 원하는 것은 줘 놓고 빼앗아 버리는 거예요. 

그 뺏기는 즐거움이 여러분에게 있습니까? 없지요? 그러니까 강제로 뺏는 거예요. 

즐겁든 안 즐겁든 관계없이 강제로 빼앗아 버려요. 

줘 놓고 그리스도보다 더 소중한 것이 없음을 알려주기 위해서는 

우리가 원하는 것을 줘 놓고 

우리는 겸손하게 ‘아이고, 됐습니다. 아이고 주님 감사합니다. 글쎄 이게 내 소원이었잖아요’라고 하는데 

후딱 빼앗아 가버리면 ‘왜 줘 놓고 빼앗아 갑니까?’라고 

욥의 아내처럼 삐져서 “주신 자도 하나님이요”라고 남편은 말하는 데 아내는 동의 못 해요. 

뺏을 것 같으면 주기는 왜 줘서 기분 붕 뜨게 만드느냐는 말입니다. 

그게 살아계신 하나님이에요. 인간이 만든 우상 예수와 완전히 다릅니다. 

우상 예수는 내 소원대로 들어주지만 진짜 살아계신 하나님은 나의 모든 것을 발가벗겨 놓는 하나님이에요. 

아예 호주머니를 없게 한다니까요. 옷을 입어야 뭐 축적할 곳이 있지요. 아무것도 없는데요 뭐. 

그리고 마지막에는 내 목숨까지 가져가잖아요. 

이게 어디 내 목숨입니까? 주님 주신 기한이었죠. 

빌려준 것 다 봤으면 다시 반납하러 주님 찾아가는데 왜 우리가 닦달 내며 ‘엄마야’ 하고 있단 말이죠.

 한가지 예를 들면 우리가 성경 보기 전에 이 말씀을 꼭 드리고 싶어요. 

우리 마음가짐의 문제가 어디에 있는지 모르면서 성경을 보면 설교도 뭐도 다 소용없습니다. 


광주 혁신주택에 어떤 사람이 평생을 알뜰살뜰하게 20억을 모았어요. 많이 모았지요? 

20억을 모아서 혁신 도시에 5층 상가를 하나 분양받았는데 상가 분양가가 40억이에요. 

그래서 어떻게 했느냐 하면 20억을 은행에 대출받았습니다. 

은행에 20억 대출받고 자기 20억 보태서 샀단 말이죠. 

샀는데 20억은 분양받아서 1층부터 5층까지 분양해서 돈 갚고 

나머지 하나는 자기가 세놓고 살려고 나름 계획을 한 거예요. 

그런데 분양이 하나도 안 돼요. 왜냐 하면 전입하는 인구보다 전출하는 인구가 더 많으니까. 

아이 안 낳지요. 지방 도시 사람들은 서울로 나가지요. 그래서 사람이 없으니까 분양이 안 되거든요. 

분양이 안 되니까 임대로 바꿨습니다. 임대로 바꾸니까 임대도 안 나가요. 

그래서 이자가 한 달 500만 원이에요. 500만 원 감당이 안 돼서 

20억 가지고 평생을 편하게 먹고 살려고 했던 사람이 

남편은 나이 들어서 경비원으로 아르바이트 뛰고 여자는 우울증 걸려서 약 먹고 있어요. 

이게 왜 분양이 안 되는가 전문가에게 물어보니까 정주 여건이 안 되는 거예요. 정주 여건. 

거기에 계속해서 정주할 여건들이 마련되지 않은 거예요. 병원이나 학교 같은 것들, 

그것도 학습 수준 우수한 아이들이 모일 그런 조건들이 안 돼 있는 거예요. 

결국은 인간은 뭐냐 하면 이 땅에 정주할 것을 목표로 살아가는 거예요. 

이게 인간의 한도입니다. 카드 한도 같은. 

르우벤과 갓 지파와 므낫세 반 지파가 모세와 더불어 있으면서 

오늘날 우리가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우리가 느끼는 감정을 유감없이 성경에 쫙 묘사하고 있습니다. 

‘내 살면 됐지 뭘 더 원해? 밥 먹고 살면 됐지’라고 하는 게 약속의 땅입니까? 

아니죠. 그걸 들춰내는 거예요. 잘라내는 거예요. 

그게 약속의 땅의 취지가 아니고 그걸로 끝나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그래서 그 할아버지는 마이다스 손 되려고 하다가 마이너스 손 돼버렸어요. 

그럼 하나님의 방식은 뭐냐? 이게 어렵습니다. 

하나님의 방식은 이렇습니다. 쉽게 하겠습니다. 

하나님께 월세를 드리는 거예요. 방법은 하나님께 월세를 드리는 건데, 

그게 뭐냐 하면 그 땅에서 월세를 드림으로써 

이 땅은 내가 정주할 땅이 아니고 주님이 계실 땅이고 

따라서 그 땅의 모든 요건은 내가 단독적으로 나 밥 먹고 살고 행복을 위해서 주는 요건이 아니라 

주님이 주되심을 드러내는 여건 속에 

그 당시 이스라엘 열두 지파가 말려든 거예요. 

조건이 뭐냐 하면 

모든 인간적인 요소는 완전히 거덜 낸다는 조건 하에. 인간성은 철저히 배제한다는 조건 하에. 

인간성을 배제한다는 말은 ‘나는 이렇게 되었으면 좋겠습니다’라는 

인간의 모든 소원과 목표와 목적을 전부 다 훼손시키고 없애버리는 조건 하에 

우리는 주의 나라 하나님의 약속의 나라에 들어가 사는 거예요. 

그래서 설명하면 길어지니까 여기 민수기 31장 25절부터 제가 한번 읽어 드릴게요.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너희는 제사장 엘르아살과 회중의 족장들과 더불어 

이 사로잡은 사람들과 짐승들을 계수하고, 

그 얻은 물건을 반분하여 그 절반은 전쟁에 나갔던 군인들에게 주고 절반은 회중에게 주고, 


전쟁에 나갔던 군인들은 사람이나 소나 나귀나 양 떼의 오백분의 일을 여호와께 드릴지니라, 

곧 이를 그들의 절반에서 가져다가 여호와의 거제로 제사장 엘르아살에게 주고, 


또 이스라엘 자손이 받은 절반에서는 사람이나 소나 나귀나 양 떼나 각종 짐승 오십분의 일을 가져다가 

여호와의 성막을 맡은 레위인에게 주라”라고 되어있어요. 

이거는 뭐 손 벌리는 사람이 한 둘이 아니에요. 전쟁은 용사들이 했는데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이 많아요. 

전쟁에 참여하지도 않는 사람들끼리 전쟁했다고 치고 

그들에게 네가 받을 것과 동일하게 그들의 몫으로 돌리라는 말이에요. 

왜 이렇게 되느냐 하면 장차 천국을 악마와의 전쟁에서 승리할 주님께서 

그 천국을 자기만의 세계로 만드는 것이 아니고 자기만 홀로 그 천국에 홀로 사시는 것이 아니고 

자기에게 영광을 돌리는 사람들을 같이 천국에 넣어주기 위해서는 

누가 분배를 해야 하냐면 주님의 얻은 것을 분배해요. 

그 주님의 얻은 것이 뭐냐 하면 

인간들이 자기 정주 여건에 맞는 것을, 원하는 것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영광을 가리지 않는 것들로 우리에게 선물로 은사로 주시는 겁니다. 

그게 바로 천국이에요. 천국이 뭐냐고 물어보신다면 

예수님의 얻을 것을 받아 챙긴 자들이 천국을 알고 들어갈 수 있어요. 

안 믿는 사람들이 ‘천국이 얼마나 살기 좋으냐?, 잔디밭은 있느냐?’라고 묻거든요. 

주님에게 얻은 것이 있는 사람이 천국 가는 사람이에요. 

예를 들어서 아파트 같으면 주님이 주신 거예요. 아이들도 주님이 주신 거예요. 개도 주님이 주신 거예요. 

모든 것이 주님이 주신 거예요. 

왜? 내게 항상 언제든지 달라고 한다면 ‘주께서 주셨습니다’라고 

주께 돌려 드릴 수 있는 자세가 되어있는 사람이 이미 천국에 도달한 사람입니다. 

교회 했는데 개척교회 교인 수 5명도 안 되고 하는데 

5명이 되든 3명이 되든 5천명 돌려보내기보다 3명 돌려보내기가 쉽지 않습니까? 

어차피 나를, 내 명예를 위한 내 정주를 위한 교회가 아니잖아요. 

이 땅에서 살기 위한 교회가 아니란 말이죠. 내 자존심과 명예를 위한 교회가 아니잖아요. 

그런 인간적인 것을 걷어 내는 작업이 오늘도 매일같이 우리 하루하루를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이 땅에 정주할 생각하지 말고 천국에 정주할 생각하라는 거죠. 

그 요건은 달라고 하실 때 줄 수 있는 사람, 달라고 할 때 얼마든지 줄 수 있는 사람. 

누가 달라고 합니까? 목사가 달라고 합니까? 목사 지가 뭔데? 지가 십자가 진 것도 아닌데 자기가 왜 달라고 해요. 

그럼 누가 달라고 하느냐? 

주께서 매일같이 달라고 하실 거예요. 

주님 앞에 목숨을 드리는 마음가짐으로 우리가 받은 것을 

주께서 쓰시겠다면 ‘쓰시옵소서’라고 하며 주님께 내맡기는 삶, 

이것이 인간적인 것이 배제된 삶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세 들어 있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내 것인 줄 알았습니다. 천국에 임대차 계약한 것을 이제는 알게 해주시고 우리의 모든 것은 주께서 주신 값으로 우리가 살고 있음을 한시도 잊지 않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