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강-여호수아 21장 43~45절(안식의 땅)20190623-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여호수아 21장 43~45절입니다. 구약성경 352페이지입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열조들에게 맹세하사 주리라 하신 온 땅을 이와 같이 이스라엘에게 다 주셨으므로 그들이 그것을 얻어 거기에 거주하였으니, 여호와께서 그들의 주위에 안식을 주셨으되 그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대로 하셨으므로 그들의 모든 대적이 그들을 당한 자가 하나도 없었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의 모든 대적을 그들의 손에 넘겨 주셨음이니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말씀하신 선한 말씀이 하나도 남음이 없이 다 응하였더라”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땅을 주셨다고 되어있습니다. 땅을 그들이 얻은 것이 아니고 주께서 땅을 주신 거죠. 따라서 그들이 땅을 소지하고 있더라도 항상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땅을 주께서 주셨다는 사실을 놓쳐버리면 안 됩니다. 땅을 차지했다고 그것이 천국 되는 건 아닙니다.
그들 수준에서는 그들이 고생한 지난날에 비해 나을지는 모르겠지만 이제는 오히려 하나님의 영원한 땅, 영원한 안식을 알리기 위해서 그들은 하나의 연극을 해야 할 연기자로서의 출발이 됩니다. 왜냐 하면 구약은 모형이고 그림자이기 때문에 그게 전부가 아니라는 뜻이죠.
지압이 건강에 좋다는 건 알지요. 그러나 공원에 가게 되면 뾰족뾰족한 자갈 깔아놓고 지압이 좋다고 운동하는 사람에게 지압하라고 하는데 저는 신발 신어도 아파요. 맨발로 가면 더 아픕니다. 약속의 땅, 결과는 좋은 곳이라는데 막상 그 땅을 밟으면 지압 이상으로 그 약속의 땅에서 뿜어 나오는 아픔 같은 것이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하나님께 그때그때 마다 원망과 불평을 해댑니다. 우리가 이러려고 이 땅에 들어왔습니까? 하나님이 약속했다는 것이 도대체 뭔지를 모르겠어요. 하나님이 누구신지 재고해 봐야겠다 할 정도로 그들로 하여금 불평불만이 광야에서뿐만 아니고 약속의 땅에서도 쏟아졌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광야에서는 불명만 할 뿐이죠. 왜? 둘러봐야 다 사막이니까 딴 데 눈 돌릴 여유가 없기 때문이죠. 하지만 약속의 땅은 광야의 연장입니다. 그들은 광야에서 불평만 한 것이 아니고 다른 신을 수입하죠. 그걸 직구라고 합니까? 외국에서 물건을 바로 당겨 수입하는 거예요. 이방 신을.
‘왜 그들이 이방 신을 섬겼을까’라고 여러분이 성경을 보며 굉장히 궁금했을 거예요. 그렇게 여호와께서 해줄 거 다 해줬는데 그 고마움을 모르고 그들이 배신해서 여호와를 버리고 바알 신을 섬기고 있다고 여러분이 생각하시겠지만 원래 그 땅이 바알 신을 섬기는데 맞춤인 거기에 적절한 땅이에요.
가나안 땅에 대해서 성경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너희들이 수고하지 않은 것을 너희에게 주겠다”라고. 그러면 그 전에 누가 수고한 적이 있다는 말이거든요. 누가 수고했겠어요? 원주민들이 수고했고 토착민들이 수고했는데 그들의 모든 수고는 어디서 나오는가 하면 그들이 바알 신을 섬겼다는 혜택으로 수고의 결실을 얻은 겁니다.
방을 구하는데 그 방에 방만 있는 줄 알았더니 방에 들어가 보니 전자렌지, 냉장고 등등의 옵션이 전부 다 갖춰있다는 말이죠. 그러면 그 냉장고, 드럼세탁기, 이런 것들은 옛날에 쓰던 사람들이 썼던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들이 살던 땅을 주신 이유는 동일한 삶을 살되 인간성 자체가 달라져야 하지 않겠느냐는 거죠.
사람이 어떤 몸짓이나 행동 말을 할 때 그냥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가치를 인정해 달라고 쏟아내는 행동들과 말이에요. 쉽게 말해서 나를 무시하지 말라고 내뱉는 것들이에요. 그런데 약속에 땅에 들어가는 이스라엘 백성은 오히려 그들의 사고방식은 ‘나를 무시하지 마라’가 아니라 ‘주님이여, 충분히 무시해 주시옵소서. 그래도 저는 고맙고 감사해요’라는 인간성으로 바뀌라고 이 약속의 땅을 주신 겁니다.
광야에서 들어갈 때는 그들이 그럴만한 자신감이 있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막상 그 땅에 가보니 욕심이 난 거죠. 그러면 왜 땅을 줬느냐가 성립하는데 그건 다시 옛날에 주신 하나님의 맹세한 것이 뭐냐는 겁니다. 맹세한 대로 안식을 주셨으며 맹세한 대로 대적을 물리쳐주시고 맹세한 대로 땅을 줬다면 그 안식이 뭐며, 그 맹세가 뭐며, 도대체 뭘 물리쳤다는 이야기인지 분명히 알아야 해요.
오늘 본문 44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열조에게 맹세하사”라고 되어있어요. 너에게가 아니고 너희 선조에게 맹세한 것을 이루었다는 겁니다. 그러면 맹세한 그 내용이 구체적으로 신명기 9장에 보면 나오는데 4절부터 읽어보겠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신 후에 네가 심중에 이르기를 내 의로움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서 나를 이 땅으로 인도하여 들여서 그것을 얻게 하셨다 하지 말라 실상은 이 민족들의 악함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심이니라, 네가 가서 그 땅을 차지함은 네 의로움으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네 마음이 정직함으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그러니까 네가 살던 땅에서 너의 의로움과 정직함을 뽐낼 생각은 애당초 하지 말라는 거예요. 오히려 뭐냐 하면 네 마음이 악했다는 겁니다. 악함에도 불구하고 왜 줬느냐, 우리가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왜 우리를 천국에 넣어줍니까? 그것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하신 맹세를 이루게 함이라”라고 신명기 9장 5절에 나옵니다.
이걸 다른 말로 이야기하면 너와 상대 안 하고 예수님만 보고 너를 천국에 넣어줬다는 거예요. 이제부터 네가 할 일은 그 고마운 예수님에 대해 감사하고 증거 하면 된다는 겁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업무가 간단하죠? 복잡하지 않습니다. “주님 덕분에 천국 가고 주님 덕분에 지금 이 땅에 살고 있습니다”라고 하면 됩니다. 그게 어렵습니까? 힘듭니까?
그러나 우리 주변을 미세먼지처럼 꽉 채우고 있는 이 세상은 뭐냐 하면 이겁니다. ‘네가 노력하지 않고 네가 애쓰지 않으면 너는 이 땅에 살 수 없다’라는 것이 꽉 차서 들어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뭐가 희망 사항이냐 하면 저 사람은 얼마나 일을 잘했으면 부자 되었을까? 저 사람은 어떻게 식당을 해도 성공한 식당을 하는가? 도대체 맛을 어떻게 내었을까?
전부 다 자기의 가능성에 대해서 계속 인위적으로 자기 자신을 살리는 거예요. 자기의 가능성을 위해서. 그게 바로 바알 신앙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천국 간다는 말은 거창하고 좀 무식하면 어때서 얼마나들 유식한지 그렇게 줄줄 외우면서도 막상 살아가는 모습은 바알 신앙인이에요. 바알 신앙인.
내 의로움과 정직함이 섞인 채 그것이 내 생존에 바탕이 되고 천국의 일부가 되어 섞이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 세상에서도 거기에 대해 문제 삼는 사람이 있어요. 제가 고등학교인지 중학교인지 그때 학생들 사이에 유행했던 시가 있습니다.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라는 시인데, 그때는 그 시가 무슨 뜻인지 잘 몰랐죠.
그 시를 제가 다시 그 끝부분을 읽어 드리겠습니다.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 시몬, 가까이 오라 우리도 언젠가는 가련한 낙엽이 되리라 이게 끝부분이에요. 네가 낙엽 밟을 때 무시하고 밟으면 낙엽은 와지직 부서지지요. 재미있잖아요. 낙엽 깨지는 소리가 그렇게 즐겁지만 가까이 와 보란 말이죠. 네가 밟았던 낙엽, 그것이 바로 너의 마지막 모습인 것을. 우리도 그런 모습이 될 것을.
제가 아가 강의를 하고 책을 냈습니다만 아가를 하면서 제가 제일 이상했던 것은 솔로몬이 술람미 여인을 아름답다고 보고 술람미 여인은 솔로몬을 아름답다고 보는데 저는 그래서 그것이 비현실이라는 거예요. 왜냐 하면 인간은 시간을 못 이겨요. 세월을 못 이깁니다. 피부에 균열이 생기고 아름다움이 계속 이어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아가에서는 아름답다고 했거든요. 그러면 도대체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도대체 왜 고정된 아름다움, 시간의 영향을 받지 않는 아름다움이 계속에서 사랑속에서 나오느냐는 거예요. 그것은 시간에 구애받지 않는 시간이 멈춘 상태에서 나오는 아름다움으로 인하여 우리가 사랑의 대상이 되는 겁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우리가 늙었다고 아름답지 않다고 이야기하지 않고 하나님이 보는 렌즈가 따로 있어요. “네가 어디서 무슨 짓을 하고 어떤 죄를 짓고 네가 어떤 악한 짓을 할지라도 내가 아름답다고 하면 그건 아름답고 내가 사랑스럽다 하면 사랑스러운 거야. 왜냐 하면 너와 나 사이에는 예수그리스도의 피라는 렌즈가 있기 때문에. 렌즈.”
그걸 오늘 본문에서는 맹세라고 하는 겁니다. 맹세. 도대체 신자라고 하면서 뭘 믿는지 모르겠어요. 아무리 신자라고 해도 신자라고 하는 자체를 믿지를 못하겠어요. 전부 다 자기 자신의 열심을 믿고 착실함과 조심스러움을 믿어요. 자신의 침착함을 믿는다고요. 사람이 하나님이 주신 맹세가 없고 언약이 없으면 뭐로 무장되느냐 하면 윤리와 도덕으로 무장합니다.
윤리와 도덕 그리고 철저함으로 무장해요. 철저함으로 무장해 놓고 그것을 지키기 위해서 자기 아지트 만들고 꼭꼭 숨습니다. 제가 유럽에 갔을 때 어떤 시계를 봤는데 때려 부수고 싶어요. 그 시계가 어떤 시계냐 하면 뻐꾸기시계예요. 시간만 되면 ‘뻐꾹’하고 얼굴 내밀고 얼른 다시 숨어버려요. 누구 약 올리는 것도 아니고 박살 내버릴까 싶죠. 네 낯짝을 어디에 숨기느냔 말이죠.
‘뻐꾹’하고 필요할 때만 나오고 다시 쏙 숨고. 자꾸 인간들이 왜 숨는지 모르겠어요. 뭘 어떻게 하려고, 뭐 잘났다고 숨어요? 윤리와 도덕으로 무장해서 그걸 지키려는 거예요. 인간 필생의 사업은 자기 것을 지키는 겁니다. 숙원사업이에요. 숙원사업. 나 이 정도 잘났다는, 의로워서 이 정도 살았다는 거. 뭐가 빠졌습니까?
하나님의 맹세, 그리스도의 약속이 다 빠져버려요. 그리스도의 약속이 빠지면 약속의 나라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말하는 안식은 뭐고 땅에서 말하는 대적은 뭐고 여기서 말하는 맹세의 완성은 뭐냐? 이제 그걸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그 약속의 땅에 그냥 곱게 들어가지 않고 자꾸 사건이 벌어져요.
사무엘하 6장 16절에 보면 그 약속의 땅의 내막이 하나의 상자와 인물의 마주침으로 인물에게 마음껏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의 박스인데 하나의 상자를 상자로 보지 않는 다윗의 안목이 나와요. 그 대목을 제가 읽어 보겠습니다. 사무엘하 6장 14절부터 보면 “다윗이 여호와 앞에서 힘을 다하여 춤을 추는데 그때 다윗이 베 에봇을 입었더라, 다윗과 온 이스라엘 족속이 즐거이 환호하며 나팔을 불고 여호와의 궤를 메어오니라”
다윗이 언약궤가 그동안 얼마나 무서운 상자인지를 깨달았어요. 이스라엘 진영을 완전히 엉망으로 만들어 놓았고 웃사라는 사람이 한번 언약궤를 붙들었다가 죽었잖아요. 웃사와 충돌해서 하나님이 진노하셔서 그 장소 이름을 베레스웃사라고 할 정도로 그 지명이 유명했어요. 언약궤는 무서운 상자다. 함부로 할 수 없다. 그런데 하나님은 언약궤와 함께 있거든요.
그러니까 이게 겁이 나서 어떤 경계선이 있었는데 오벧에돔 집에 두니까 오벧에돔 집에 복이 임하는 거예요. ‘이것이 양날의 칼 같은 것이구나. 제대로 언약궤를 이해하게 되면 무서움과 저주와 진노가 오는 것이 아니고 복이 올 수 있구나’라고 생각해서 다윗이 언약궤를 오벧에돔 집에서 다윗 자신의 성으로 데려옵니다.
오면서 다윗이 춤을 춰요. 춤을 추는데 춤을 너무 신나게 춰서 옷을 벗고 춤을 춘 모양이죠. 16절에 “여호와의 궤가 다윗성으로 들어올 때 사울의 딸 미갈, 그러니까 다윗의 아내가 창으로 내다보다가 왕이 여호와 앞에서 뛰놀며 춤추는 것을 보고 심중에 저를 업신여기니라”라고 되어있어요.
그리고 20절에 와서 본격적으로 미갈이 남편을 만나서 바가지를 긁습니다. “다윗이 자기 가족에게 축복하러 돌아오매 사울의 딸 미갈이 나와서 다윗을 맞으며 이르되 이스라엘 왕이 오늘 어떻게 영화로우신지 방탕한 자가 염치없이 자기의 몸을 드러내는 것처럼 오늘 그의 신복의 계집종의 눈앞에서 몸을 드러내셨도다 하니”라고 되어 있어요.
다시 말해서, “여보, 당신이 내 앞에서는 벗어도 되는데, 내 시녀들 앞에서 체면을 차리고 위신을 차려야지, 내 앞에서는 벗든지 말든지 괜찮은데 우리가 하찮게 보는 시녀 앞에서 당신이 옷 벗고 설치면 이 왕비의 체면이 뭐가 됩니까?”라고 이야기했지요. 이렇게 이야기하니까 다윗이 미갈에게 이르되 “여호와 앞에서 한 것이니라 나는 사람이 눈에 보이지도 않는다”라고 하면서 “나를 택하사 이스라엘 주권자로 삼으셨으니 내가 여호와 앞에서 뛰놀리라, 내가 이보다 더 낮아져서 스스로 천하게 보일지라도 네가 말한바 계집종에게는 내가 높임을 받으리라 한지라”
“내가 언약궤를 보는 그 안목, 내가 세상을 보고 약속의 땅을 보는 그 안목과 달리 너는 그야말로 하나님의 맹세와 언약은 보이지 않고 남들이 우리 가정을 얼마나 우습게 보는가에만 정신 팔려있다”라는 이 다윗의 이야기는 곧 하나님의 계시가 됩니다. “그래서 사울의 딸 미갈이 죽는 날까지 그에게 자식이 없더라”
우리는 이 시대 21세기에 지금 곳곳에 언약궤가 깔려있습니다. 주님은 지금도 실존하시고 살아계시고 움직입니다. 하나님이 어디 있냐고 찾지 마세요. 문제는 우리가 높아져도 너무 높아졌어요. 관심은 이강인, 손흥민, 류현진, 전부 다 우리는 맹세에 포함되지 않은 영웅적인 인간상, 다시 말해서 내가 되고 싶은 것을 미리 갖고있는 사람, 나의 삶의 모델 같은 것에 정신이 다 팔려있어요.
그리고 우리는 그처럼 되지 않을 경우에 수치를 느낍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게 아니에요. 십자가 앞에서 내가 발가벗는다고 해도 나는 그것을 오히려 감사함과 영광으로 느끼겠다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 왕이 가져야 할 태도가 아니냐는 거죠. 맹세를 아는 자의 참모습이 아니냐는 겁니다.
여러분은 이 땅에서 안식이니까, 안식이 평안이거든요, 여러분은 이 평안을 느낍니까? 여러분들은 이 땅에서 평안을 못 느낄 거예요. 왜? 그건 여러분들이 시건방지기 때문이에요. 오만해서 그렇습니다. 주님께서 지금 처지보다 더 엉망진창 낮춘다고 해도 우리는 십자가 피로써 감사해야 할 사람들이에요.
그게 약속의 땅에 지금 주님 앞에 놀아나고 있다는 하나의 증거입니다. 천국 가서 하나님 만날 생각하지 마세요. 이미 우리는 주님을 언제든지 만날 수가 있는데 문제는 우리가 너무 세상과 닮아 가려고 애를 쓰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언약에서 끊어지고 맹세를 몰라요. 그러면 이건 줄 끊어진 개입니다.
지금 개 시리즈가 몇 주째 계속되고 있습니다. 줄 끊어진 개는 그냥 동네를 배회할 뿐이에요. 저는 길 위에 사람들 보면 전부 다 배회하는 것 같아요. 줄 끊어진 개처럼 돌아다니는 것 같아요. 맹세에 묶이지도 않고 주님의 언약도 모르고 독립적이에요. 혼자 살아요. 혼자 어슬렁거리며 뭐 즐길 것 없는지 돌아다니는 겁니다.
자기를 묶어주는, 시간이 정지된, 시간을 초월한, 시간에 구애받지 않는, 일체 나의 잘못이나 그런 것을 묻지도 않는 단단한 줄 같은 것이 없어요. 인간에게 이게 없으니까 그저 주인 없는 개와 개들이 만나서 뭐 했다 하면 으르릉~으르릉~민주당 으르릉~ 한국당 으르릉~ 전부 다 고삐 풀린 개예요. 저는 그걸 악마의 용병이라고 하는데 악마가 원래 독립적이에요.
신처럼 되었기 때문에 그 악마의 용병도 주인을 똑 닮아서 그냥 풀어 놓은 독자적인 미친개 같아요. 개 시리즈 앞으로 계속할 거예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 살다가 이제 약속의 땅 들어오니까 이제 신이 났어요.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이제 안식 얻었다’ 그러나 그들은 얼마 가지 않아서 그들의 행세를 그대로 보여주게 되는 겁니다.
왜냐 하면 신명기 8장 14절 말씀 그대로입니다. 네가 거기에서 배부르고 잘 먹고 잘살고, 소위 세상 적인 편안이죠, 네 소유가 풍부할 때 뭐라고 하느냐 하면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고 여호와의 가치를 잊어버릴까 두려워하노라”
좋은 환경이 신앙을 돈독하게 하는 게 아닙니다. 좋은 환경이 이게 시험이에요. 지압해주는 뾰족한 돌 없이 그냥 평평한 곳으로 가면 본인이 아주 건강한 줄 압니다. 이 땅에서는 우리가 사실은 산자가 아니에요. 소급해 돌아보면 우리는 이미 죽은 자입니다. 죽은 자가 하나님의 언약이 살아 있음을 증거 하기 위해서 계속해서 살아 있는 겁니다.
그래서 배회하는 개들은 무엇이 인생의 정답이냐 진리가 뭐냐를 찾고 다니는데 인생에는 진리라는 것이 없어요. 우리도 그런 거 찾지 맙시다. 왜냐 하면 그냥 부딪치게 되어있어요. 인생은 예상 못 한 사태에 부딪치는 가운데서 자신이 얼마나 높아져 있는지를 자각하고 발견하는 것이지 내가 진리 알아서 어디 써먹을 건데요.
여러분 진리를 아는 것이 뭐 돈이 됩니까? 밥이 됩니까? 아무 쓸모가 없어요. 이 땅에서는 쓸데가 없어요. 미쉘린 식당이라는 곳이 있거든요. 세계적으로 맛집이라고 점수를 주고 하는데 저는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어떤 티비 프로에 보니까 송가인과 자기엄마가 미쉘린 식당에 가요. 제일 궁금한 것이 한 끼에 얼마 하는 지가 궁금했어요.
점심을 먹고 계산을 해보니 한 끼에 9만 2천 원이에요. 둘이 합해서 184,000원 나왔어요. 진도 촌사람이라 맛있는 것도 모르겠고 느끼하니까 뭐라고 하냐면 메뉴에도 없는 김치 좀 달라고 해요. 십팔만 사천 원. 집에 가서 양푼에다 고추장 팍팍 넣고 비빈 비빔밥 얼마나 먹고 싶었겠어요.
그런데 중요한 것은 미쉘린 식당 쉐프들도 자기들이 음식을 만들지만 따로 점심 먹을 때는 컵라면이 제일 맛있을 거예요. 우리는 우리 자신이 아무리 신앙으로 성경으로 포장을 해도 세상의 컵라면을 잊지 못합니다. 주님 주시는 그 사랑을 우리가 지식을 동원한다고 해서 그게 내 것이 되는 게 아니에요. 부딪쳐야 해요. 얻어 맞아야 됩니다. 꿇어 앉힘을 당해야 하고요. 좌절을 당해야 하고 낙엽처럼 밟히고 밟혀야 해요.
그 틈 사이에서 그 차이 남에서 우리는 진리를 압니다. 내가 나를 너무 우수하게 봤구나. 대단한 존재로 봤구나. 나는 나의 수치를 감추려고 했구나. 내가 낮아졌다는 낮아짐이 아직도 먼 상태구나. 우리는 아직도 세상을 의식하면서 주춤주춤 자신을 관리할 생각을 하고 있는 거예요. 끝까지 내 것 지키려는 필생의 숙원사업을 중지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게 오늘 본문에 나온 뭐냐 하면 아직 대적을 붙여주는 거예요. 우리에게 적을 붙여주는데 어쩌면 그렇게 그 적이 우리가 원하는 친근감이 있는지. 적이라고 머리에 뿔 달리고 귀신이 아닙니다. 내가 옛날에 한때 좋아했던 그러한 습관과 버릇들이 주님께서는 대적으로 나와 마주치게 하는 거예요. 우리는 피하지 맙시다. 얼씨구나 하고 하나님 잊어버리고 세상 적으로 나갑시다.
벌써 나갔지요. 매일같이 나갑니다. 우리는 매일같이 세상으로 나가지요. 복음이 뭐고 맹세고 언약이고 다 잊어버리고 쉽게 나가죠. 그러나 주께서 사랑하는 자에게는 주님의 맹세 때문에 우리로 하여금 안식의 땅은 아니지만 안식의 백성은 되게 하십니다.
우리로 하여금 수치 속에서도 내가 몰랐던 주님에 대한 새로운 감사와 고마움이 쏟아져 나와서 저 지옥 가는 사람들과 차이 남, 미갈과 다윗의 차이 남, 미갈은 어떤 인식으로 살아가고 나도 의당 그럴 수밖에 없는데 주께서 손을 대서 저 미갈과 같지 않고 다른 인간으로 변모시키는 그 분주하심과 그 열성에 우리는 주님 앞에 주님의 열심에 탄복하면서 주님의 살아계심에 찬양하는 저희들 되시길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조심스럽게 산다고 인간 되는 거 아니고 모든 것을 깨닫는다고 해서 그것이 진리의 전부가 아니라 세상 대적과 날마다 부딪칠 때 주님 원망하지 말고 우리 자신을 낮춰주는 기회로 여기고 감사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