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8강-여호수아 20장 1~3절(제사장의 부재)20190609-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여호수아 20장 1~3절입니다. 구약성경 350페이지입니다.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내가 모세를 통하여 너희에게 말한 도피성들을 너희를 위해 택정하여, 부지중에 실수로 사람을 죽인 자를 그리로 도망하게 하라 이는 너희를 위해 피의 보복자를 피할 곳이니라”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것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어떤 하나님이 정해놓은 땅에 들어가는 겁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은 사람이죠. 약속의 땅은 땅이고. 땅과 사람의 만남으로써 과연 하나님이 원하는 인간이 백성이 될 수 있느냐. 여기에 뭔가 추가해야 합니다. 땅과 사람 플러스 여기에 사건이 일어나줘야 합니다.
땅과 사람의 사건을 통해서 새로운 인간형이 수립되도록 하나님께서 그 땅 중에서도 특별한 의미를 담은 땅을 따로 지정해 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도피성이라는 곳입니다. 도피성을 성경 본문 20장 1~3절까지 읽었지만 6절까지 쭉 읽어보게 되면 나중에 살인자가 거기 들어가도 복수하는 사람이 못 따라오고 멈춰야 하고 나중에 제사장이 죽고 난 후에는 빠져 나와서 자기 원상 복귀해서 자기 생활할 수 있다는 내용입니다.
그건 오용익 목사님이 2주 전에 도피성 할 때 여러분들이 제대로 말씀을 잘 들었어요. 좀 짧기는 했지만. 그래서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그렇게 보게 되면 도피성의 주인공이 억울한 자가 하나님의 혜택을 입어서 그 억울함을 풀었다는 이렇게 인간이 주인공이 되어 버려요. 그러나 도피성의 주인공은 인간이 아닙니다.
여기서는 제사장이 핵심인물입니다. 너희들이 생각하는 제사장이 무엇을 만나느냐 하면 아주 이상한 사건을 만나요. 이상한 사건을 만나서 너희들이 아는 그 제사장이 실제로 약속의 땅에 부합되는 제사장으로 어떻게 부합되는지 어떻게 바뀌는지를 너희들이 알고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제사장이 있으므로 우리가 구원된다는 것은 얼른 보면 맞는 것 같지만 이건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렇게 접근해야 해요. ‘제사장 잘 만나서 우리가 살았다. 구원받는다’가 아니라 ‘우리가 도대체 제사장을 알기는 알까?’라고 해야 해요. 우리를 위한 하나님이 되면 우리를 위한 제사장이 되어버려요. 그건 하나님의 진짜 뜻과 다른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너희가 아는 제사장 자체가 잘못되어 있다는 겁니다. 지난 수요일에 그런 설교를 한 적이 있어요.
성경을 볼 때 우리는 성경이 필요해서 성경을 보지만 그 성경은 오히려 우리의 필요에 따라 답해주는 것이 아니고 성경 자체가 우리 자신을 문제 삼는 겁니다. 네가 성경을 볼 때 너는 문제없다고 순수하다고 하지만 사실은 순수한 것이 아니고 성경을 통해서 되받아쳐 오는 그 사건을 통해서 성경을 보는 내자신도 잘못되어 있다는 것을 전환 시키기 위해 성경이 활동하고 말씀이 활동하는 겁니다.
이 세상 살면서 사람들은 자칫하면 순정을 믿을 수가 있어요. 초등학생 여학생들이 잘 보는 만화를 순정만화라고 하죠. 순수 순정. 이 땅에 그런 것이 과연 있을까. 있을까가 아니라 그런 것이 있기를 원하고 있어요. 누가? 저나 여러분 인간들이 원하고 있어요. 마지막 희망 같은 것이 아직도 이 땅에 유지될 수 있기를 원하고 있어요.
그건 오해입니다. 이 세상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 거예요. 어느 정도 하나님은 귀하신 분이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잘해줄 것이라는 순정만화 같은 생각을 갖고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제사장 이야기하면 ‘제사장, 우리를 위해서 세우신 분’ 그리고 ‘메시아, 구원자이고 우리를 위해 오신 분’ 이렇게 자꾸 잘못되게 가는 거예요.
그런 관점을 계속 갖고 있게 되면 어떤 사람이 본의 아니게 남을 죽였다고 할 때 ‘아, 이거 너무 억울한데. 하나님, 살려주세요’라고 하는 거죠. “뽀빠이, 살려주세요”하는 것처럼. 이러면 “짜잔!!”하고 등장해서 “무엇이 필요 하느냐?” “우리가 억울한데요” “억울한 건 내게 맡겨라. 내가 풀어줄게. 자 이렇게 해라” “아, 역시 하나님 아니었으면 이 억울함을 못 풀뻔했어요. 정말 하나님은 좋은 분이야. 참 정말로 우리가 기대했던 하나님이야. 앞으로 잘 믿어야지” 이건 정말 순정만화 같은 이야기예요.
아테네에 파르테논신전에 구멍이 나 있는데, 신전 지붕에 구멍이 나 있고 구멍 밑에 우물이 있다는데 그게 뭐냐 하면 옛날 그리스사람들이 신을 믿을 때 오디션을 봤어요. 우리에게 좋은 선물 주는 쪽을 우리가 믿기로 인간 쪽에서 마음을 정한 겁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대하는 태도를 어쩌면 그렇게 적나라하게 잘 보여주는지.
두 명의 후보자 중에 포세이돈이라는 신과 아테나 여신이 등장했어요. 포세이돈은 삼지창을 콱 꽂으면서 “나는 이렇게 강한 무기를 갖고 있다. 어때? 나를 신으로 섬기면 너희들을 지켜주마”라고 한 것이 포세이돈이라는 신이고, 아테나 여신은 무엇을 주었느냐 하면 올리브 나무를 주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쑥덕쑥덕 의논한 결과 오디션 최종 승자를 아테나 여신으로 뽑아 세워서 세운 그 신전이 파르테논신전입니다. 유네스코 문화유산 제1호. 유네스코 마크가 파르테논신전 그림 안에 ‘UNESCO’라는 글자를 적어 넣은 거예요.
그게 옛날 그리스사람에게만 국한될까요? 오늘날 성경을 보는 우리는 해당되지 않을까요? 우리 자신의 문제점은 모르는 체 그냥 성의를 표시하면 주께서도 성의를 표할 거라는 안일한 생각은 해서는 안 됩니다. 왜 그러느냐 하면 자기의 목적달성이 되어 버리면 그다음부터는 하나님 믿고 예수 믿는 것이 말씀이 시들해져 버려요.
이제는 목적달성 했는데 구태여 주의 말씀 들을 필요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평소에 이야기했죠. 바라지 말고 기대하지 말라고요. 바라고 기대하는 그것이 주님과 우리 사이를 가로막습니다. ‘이거 원합니다. 이거 바랍니다’라고 하지 마세요. 그건 우리가 정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정해도 정합니다. 우리가 정한 것이 아니죠.
제가 땅과 인간의 만남에서 여기에 사건을 집어넣었는데 여기에 사건을 집어넣은 것이 큰 의미가 있어요. 땅과 사건을 안 집어넣으면 사람들은 뭘 가지고 하나님을 섬기겠느냐 하면 땅과 땅에 사는 사람 집어넣고 거기에 사람과 사건 대신 사물을 집어넣어요. 사물이 뭐냐 하면 제사 지내기, 제사법은 이렇게 하고, 제사 기구는 이렇게 만들어야 하고, 어느 장소에 가야 하고, 이런 것들이 전부 다 사물이거든요.
이 땅에 눈에 보이는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나와 우리끼리 이스라엘 사람이 있고 하나님은 안 보이는데 하나님의 법에 보니까 이렇게 할 때는 이렇게 하고 제사는 이렇게 드리라는 제사 규칙이 있고 제단 쌓을 때는 이렇게 쌓으라고 되어있으니까 이건 사물이라는 거죠. 유일한 인간인 내가 행동으로 나올 수 있는 것은 나밖에 없는 내가 인간이니까 행동할 것이 아닙니까. 실천에 옮기죠.
유일하게 실천자인 내가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 하나님이 시킨 대로 사물을 잘 정리하고 씻을 것은 씻고 꾸밀 것은 꾸미고 잘라낼 것은 잘라내고 그렇게 해서 하나님을 섬기면 간편하죠. 오늘날 교회가 그렇잖아요. 11시 예배, 오후 2시 예배, 하나님은 안 보이고, 보이는 것은 나밖에 없으니까 내가 성의껏 해서 내가 봐도 뭔가 좀 달라 보이는 행동을 하게 되면 그 행동은 하나님께 통하는 행동이라는 겁니다.
너무나 쉽게 갈 수가 있는 거예요. 그러나 사건은 그런 게 아니거든요. 사건은 물건이 아닙니다. 사물이 아니에요. 어떤 일이 터지는 거예요. 나무 대패하다가 대패가 툭 날아가서 저쪽에 어떤 사람이 죽는다든지 나무가 넘어져 죽는다든지 망치질을 하다가 망치가 빠져서 담을 넘어 옆집 사람이 죽는다면 그건 ‘이거 뽑아서 저 사람을 죽여야지’라는 이런 게 아니잖아요.
하나 보니까 죽었잖아요. 그러면 고의든 고의 아니든 죽었다는 말은 그 원인자가 누구냐 하면 나를 원인자의 출처로 삼아서 죽음이라는 사건을 유발한 거예요. 고의든 고의 아니든 간에. 우리 존재 자체가 이 땅에 피를 남기고 살인을 유발하는 요인이 될 수 있는 잠재성이 있다는 것을 주님께서 이야기하는 겁니다. 이 약속의 땅에.
‘약속의 땅에 들어갔다. 시키는 대로 해야지’라고 그렇게 생각하지 말라는 겁니다. 하나님이 싫어하는 살인이라는 사건에 네가 원인자로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땅이 무슨 땅이냐면 약속의 땅이에요. 자꾸 자기를 좋게 생각하지 마세요. 순진한 건, 순정 같은 거 하지 마세요. 어떤 CF가 있는데 오랜만에 의미 있는 CF가 있었어요.
어떤 여자 직원이 작업에 지쳐 쓰러져있습니다. 그러니까 사장님이 박카스를 한박스 사 와서 “자, 직원들 힘내자”라고 열심히 일하자며 박카스를 쭉 나눠주는 거예요. 그러니까 여자 직원이 책상이 팍 엎드리며 하는 말이 “사장님, 박카스도 좋지만, 직원 좀 더 뽑아주세요.” 박카스는 사물이지만 직원은 인물입니다. 회사가 스스로 자기를 디스하는(깍아 내리는)CF는 처음입니다. 자기를 낮추는 광고는 처음이에요.
“박카스도 좋지만 사람 하나 더 뽑아주세요. 힘듭니다.”라는 말이죠. 그다음에 광고가 뭐냐 하면 그렇게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사장이 아침에 또 박카스 한 상자 들고 서 있는 대목이 나와요. 직원 뽑는 것보다 박카스가 싸게 먹힌다는 그런뜻 인가요?
우리가 율법을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율법이 원래 전하고자 하는 일에 우리가 고의는 아니지만, 우발적인 살인자로 우리가 참여하는 대상, 후보감이 된다는 것을 잊지 마세요.
이것은 우리 뜻이 아닙니다. 우리 뜻이 아니라도 우리는 우리 뜻이 아니어야 할 존재로 이 땅에 태어난 거예요. 우리가 기대하거나 바랄 게 없는 존재로 우리가 태어나야 한다는 사실을 율법이 와서 우리로 하여금 본의 아니게 사람을 죽이는 사건에 휘말릴 때 우리가 생각했던 나자신에 대해서 다시 한번 수정이 필요한 겁니다.
율법을 통해서 나자신을 다른 인간으로 재수립해야 해요. 다른 인간형으로 재수립해야 해요. 그 인간형은 나쁜 인간이 좋아지는 것이 아니고 내가 말씀 지키는 인간에서 말씀에 휘말리는 대상으로서의 인간으로 바뀌는 것이 구원될 사람의 자기 정립입니다.
착한 사람 되는 것이 아니고 착하든 좋든 간에 그건 내가 다루고 탓할 문제가 아니라 어느 순간에도 말씀에 휘둘려 가고 있다는 거, 말씀 때문에 내가 존재한다는 거, 말씀이 우선이지 내가 우선이 아니라는 거, 그러한 관계 속에 놓여 있는 자기 자신을 발견하는 거, 이것이 약속의 땅에 합한 사람입니다.
그러면 이 낯선 사건, 예상하지 못한 낯선 사건이 왜 일어나는가? 일어나는 이유는 민수기 35장 16절에 보면 그것과 마주쳐야 해요. “만일 철 연장으로 사람을 쳐 죽이면 그는 고의로 살인한 자니 그 살인자를 반드시 죽일 것이요 사람이 죽일만한 돌을 손에 들고 사람을 쳐 죽이면 이는 고의로 살인한 자니 그 살인자는 반드시 죽일 것이요”라고 되어있어요.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어려우니까 잘 들어보세요. 이스라엘 사람들의 히브리 율법에 의하면 어떤 일가친척 가운데 누가 죽으면 다른 친척들이 그걸 방치하면 안 되고 반드시 복수해야 할 의무를 가졌어요. 여러분은 복수 한다는 것이 의무라고 하면서 강조하는 것이 좀 이상하실지 모르겠어요. 자기가 아는 친척 누가 죽어도 나 몰라라 외면할 수 있는 것이 오늘날 현대인들의 의식입니다.
세월호는 예외가 되겠습니다만, 아이들 죽었는데 몇 년째 우려먹고 있지만, 보통은 아이들 죽으면 보상금 받아서 누구에게 기여해버리고 아이 죽은 것도 주의 뜻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아요. 정부 붙들고 돈 내놓으라고 설치는 사람도 많지만 그렇지 않고 소수지만 ‘아이 죽은 것이 나라가 죽인 것도 아니고. 팔자려니’라고 마음 접는 사람도 있어요.
살인이 일어났을 때는 하나님이 귀찮다고 일가친척, 내 자식, 부모라도 그냥 두지 않고 반드시 살인 사건에 일가친척이 죽인 자를 찾아내서 기어이 복수 하라는 그 자체가 율법입니다. 그러니까 율법 사이에 인간은 압박감을 느끼는 거예요. 죽은 자는 반드시 죽이라고 하니까 도끼에 자루가 빠졌든, 톱 썰다가 전기톱이 날아갔든 간에 죽은자 입장에서는 반드시 어쨌든 간에 죽인 그 사람에게 복수 해야 할 의무가 있는 거예요.
저들은 의무이니까 쳐들어오죠. 이쪽은 본인 의사와 상관없이 죽였으니까 곤궁에 빠져 난처한 입장이죠. 그러면 서로 상반되고 모순되는 두 율법 사이에 안 끼어 있는 인간이 어디 있습니까? 율법을 지킨다고요? 말도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인간은 율법 자체가 상반되어 있어요. 율법 자체가 인간의 어떤 태도로도 그건 모순 되게 되어있어요.
한쪽을 지키면 한쪽이 위반되니까 이러한 위반 구조 속에 지금 이스라엘 히브리인들, 이스라엘 사람들은 말려든 겁니다. 못 지켜요. 율법은. 빠져나올 구멍이 없어요. 그 모순 속에서. 딱 잡아서 “너 우리 아버지 왜 죽였느냐? 그냥 망치질하다가 망치가 잘못 빠져서 죽였지, 죽일 의사는 없었습니다. 나는 당신 아버지 모릅니다” 그러면 죽은 아버지 아들들이 “네가 그렇게 말한다고 네가 책임을 면할 줄 아느냐? 네가 우리 입장 되어봐라. 내가 너의 아버지 죽였는데 그런 말 하면 너의 속이 편하겠는가?” “미안합니다” “미안하면 다냐?” “미안하면 다지. 어쩌란 말인가? 그럼 안 미안하다고 할까?”
양쪽 다 할 도리 다 한 거예요. 양쪽 다 인간의 한계를 다 드러낸 거예요. 둘 다 말씀 때문에 벌어진 사건 속에 두 사람이 서로 상반된 의사를 가지고 마주친 겁니다. 이건 인간의 한계를 보여주는 거예요. 해결점 없습니다. ‘아, 저 사람이 죽일 의사도 없이 망치에서 자루 빠져서 죽였구나. 그러니까 우리 아버지는 잘 죽었다.’라고 하는 것은 이론이고 실제 마음은 그런 게 아니거든요.
아버지 죽었다고 하면 실감 안 나죠. 그러면 사랑하는 손녀가 죽었다. 아, 이건 미칩니다. 손녀 없으면 말을 하지 마세요. 그 아이 때문에 사는데. 딱 까놓고 손녀 때문에 살 거든요. 제 이야기하는 건 아닙니다. 사랑하는 사람 있으면 그 사람 때문에 사는데 그 사람을 데려가 버리거나 누가 죽여 버리면 이건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실수니 고의니 이건 어줍잖은 핑계이고 이건 너 죽고 나 죽자는 겁입니다.
어떻게 인간이 감당됩니까? 죽었는데. 아버지가 있었는데 어떤 사람이 고의든 아니든 간에 죽였다는 것을 부재라 합니다. 사실 오늘 제목은 도피성보다도 제사장의 부재예요. 부재의 감정을 네가 아느냐고 묻는 겁니다. 부재의 감정. 애초부터 없었으면 부재의 감정도 없죠. 있다가 없어질 때 그 없어짐에 부재의 감정을 네가 아느냐는 겁니다.
제사장이 있을 때, ‘제사장은 뭐 아쉬울 때 찾지’가 아니에요. 아쉬울 때 찾는 것이 제사장이 아닙니다. 제사장이 있다가 없어질 때 그것은 억울하게 죽은 아버지에 대한 그 섭섭함과 그리움도 피해자의 아들과 같이 그것이 제거되어야 한다는 거예요. 고의가 아니어서 망치 날아가 죽인 사람은 자기 생각만 하는 거예요.
아버지 잃은 사람이 얼마나 아프냐를 생각하기보다는 “예, 미안합니다. 고의는 아니지만 참 죄송합니다”라고 하지만 자기 아버지는 살아 있잖아요. 자기는 안 아프고 망치만 날아갔다뿐이지 난 아픈 감정이 없어요. 그러나 망치 맞아서 자기 아버지 죽은 사람은 그 아픈 감정이 장례식 치른다고 해서 해소되는 것이 아니잖아요. 계속 남아 있잖아요. 그럼 무엇과 바꿔야 해요?
그 제사장이 살았다가 죽는 그 아픔과 자기 아버지 죽는 아픔과 바꿔 줘야 이 도피성이 함축하고 있는 율법을 이해하는 게 돼요. 그리고 자기들 아버지 죽인 인간은 제사장 죽으면 “제사장 죽었단다. 여호수아 20장 봐라. 제사장 죽고 난 뒤에는 나 죄 없잖아. 그전까지는 도피성 안에 피해있지만 죽고 난 다음에는 나를 탓하지 마. 복수하지 마. 율법에 복수하지 말라고 했어.”라고 룰루랄라 나와서 마음 놓고 돌아다니고 자신은 좋지요.
그러나 아버지 죽었던 일가친척들의 아픔은 뭘로 보상이 됩니까? 보상이 안 되죠. 보상이 안 되는 거예요. 예를 들어서 아버지 지만, 사랑하는 아내, 자기 자식, 남편이 죽었다고 생각해 보세요. 아무리 도피성 백날 해보세요. 그 섭섭한 감정이 사라지는지. 결국 이건 하나님이 죽은 사건에 약속의 땅 +사람 +사물이 아니라, 어떤 사건에 휘말리게 되면 과연 우리가 이 약속의 땅이 내가 선호해서 살만한 땅인지를 다시 한번 돌아봐야 합니다.
내가 천국 간다고요? 천국이 과연 살만한 땅인지 우리는 안 가봤으니 모른다고요? 지금 보여 주잖아요. 약속의 땅을 응축한 것이 도피성이에요. 그 도피성에는 우리가 가장 고귀한 것을 다 내어놓아야 해요. 오히려 뺏겨야 해요. “네가 이거 이거 좋아서 살았잖아. 이제 내가 빼앗아 갈게” 주님에게 빼앗김을 우리가 감당할 수 있어야 해요. 누가 감당합니까? 감당 못 합니다.
하나님 예수님보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우리는 더 좋아해요. 나 자신과 연관된 것을 더 좋아합니다. 그것을 하나님께서 빼앗을 때 어떻게 하나님을 용서합니까? 용서의 하나님이라고요? 내가 하나님이 용서가 안 되는데? 이야기를 찬찬히 나가 봅시다. 어떤 사람이 망치질하다가 망치 자루가 빠져서 아니면 도끼질하다가 도끼 자루가 빠져서 그 근처에 우리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지나가다가 죽었다 칩시다. 그런 사건이 일어났다 합시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생각하시는 그 살인 사건의 주범자가 누구냐 하면 도끼질하는 그 사람이 아니에요. 하나님이라고요. 그러면 고의가 아닌 그 살인자는 빠져야 해요. 그리고 그 자리에 누가 들어가느냐 하면 하나님 자신이 들어가야 해요. 그러면 가해자가 하나님이 되고 피해자는 누구냐 하면 가장 소중한 것, 무지개 꿈을 꾸던 그 집에 가장이 죽은 그 집안에 남은 가족들이 피해자가 되는 거예요.
하나님이 내 것을 빼앗아 가는 가해자가 되었을 때, ‘인간들아, 그런 신을 오디션에 뽑을 거야?’라고 물으시는 겁니다. 너희가 그런 하나님들 선택할 것이냐고 묻는 거예요. 땅 주고 우리 홍해 건너가게 하셨으니 좋으신 하나님이라고요? 그건 아직도 하나님을 제대로 몰라서 그래요. 나의 가장 귀한 것을 빼앗아 갈 하나님일지라도 그 하나님을 사랑할 용의가 되어있는지를 묻는 겁니다.
도피성의 주인공은 살인하고 구사일생으로 피하는 그 사람이 아니에요. 제사장이 주인공입니다. 하나님께 책임을 묻는다는 것은 곧 제사장에게 책임을 묻는 거죠. 제사장이 묻습니다. “억울하냐? 분하냐? 그럼 내가 죽을게. 내가 죽을게. 이 피해자 가족아, 복수 해야 할 의무가 있는 너희들아” 복수할 의무를 갖는다는 것은 율법대로 하겠다는 겁니다.
그들은 율법대로 복수하고 싶은 감정이 있고 율법이 그것을 부추기고 있고 율법이 율법에 충돌하는 거예요. 그 충돌 사이에서 충돌이 원만하게 해결점이 안 생기잖아요. 안 나니까 누군가 여기에 원활한 해결점을 제시해야 해요. 그 해결점이 안 난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인간 생각이고 진짜 해결점 자체를 우리는 몰라요. 해결점 자체가 뭐냐 하면 하나님이 출몰하시고 하나님이 퇴장하시는 거예요.
이 땅에 하나님이 스스로 와서 출몰하시고 스스로 알아서 퇴장하실 때 남겨진 것이 뭐냐 하면 그게 성도입니다. 새끼 깐 것이 성도예요. 내가 가고 싶은 천당 가려는 사람은 성도가 아닙니다. 주님이 찾아와서 주님이 알 까듯이 남긴 것. 그런데 그 주님이 어떤 주님이냐면 우리에게 화를 유발시키는 주님. 내 뜻대로 안 해주고, 내 소원대로 안 해주는 그런 주님. 이사 가는 날 수도공사로 막히게 하시는 주님.
우발적이거든요. 예상 못 한 사건들이 와서 나의 분노를 돋우시는 하나님. 우리는 뭔가 다른 하나님을 오디션으로 뽑고 있지는 않은지요. 올리브 주고 우물 주는 그런 하나님, 우리의 선택을 바라는 그런 하나님이 우상이고 헛된 겁니다. 그렇다면 그 해결점은 어떻게 생기는가. 예수님께서 제사장으로 오셔서 이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문제는 내가 일부러 저지른 문제라고 자기 문제로 가져가 버립니다. 자기 문제로.
제가 설교시간에 그런 이야기 했죠. 나쁜 사람에서 착한 사람으로 되는 것이 구원이 아니고, 나쁜 사람에서 좋은 사람 되어 볼까 하는 그것이 나를 모르는 점이고 말씀에 휘말리고 주님의 뜻에 휘말리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성도거든요. 그러면 우리가 약속의 땅에 왔고 이제 주님께 잘 살겠다고했다가 여기에 십자가 꽂혀 버리면 이게 뭐예요?
이건 내 소원 풀이해주는 약속의 땅이 아니라 주님의 자기 소원을 자기 약속을 스스로 드러내는 땅이 약속의 땅이죠. 내가 기대한 약속이 아니고 주님이 주신 약속이죠. 그러면 내 약속은 내가 접어야 해요. 그 접히는 사건에 휘말려야 합니다. 주여 내 뜻과 소원을 접어주세요. 나는 내 욕망밖에 남는 것이 없습니다.
이 세상 자체가 자기 욕망밖에 없어요. 어떤 노래 가사에 이런 내용이 있어요. ‘나이는 숫자, 마음은 진실, 연애는 필수, 결혼은 선택, 아모르 파티’ 이게 김연자가 부르는 ‘아모르 파티’라는 노래에 나오는 가사예요. ‘나이는 숫자, 마음은 진실, 연애는 필수, 결혼은 선택, 아모르 파티’ 운명을 즐기자는 그런 뜻이거든요.
이런 인간이 어떻게 달라집니까? 자기가 즐기고 싶으면 즐기고. 언제부턴가 대구에서 축제가 열리는데 축제 이름이 ‘치맥 파티’예요. 치킨 먹고 맥주 마시면서 축제를 즐기자는 거죠. 그 축제가 상 받았데요. 거기 가서 맥주 마시고 치킨 먹었다 칩시다. 인간이 달라집니까? 자기 갈증과 식탐만 좀 만족 되었을 뿐이죠.
인간은 안 달라져요. 그냥 모든 욕망만 발산하면서 인생을 살 뿐입니다. 그게 인간의 자기 모습이에요. 그게 한계에 부딪혀야 해요. 십자가. 십자가가 뭐냐? 예수님은 계셨다가 사라졌다는 그 부재. 왜 부재해야 합니까?
바로 모든 우리의 어설픈 이 꿈을 다 앗아가서 우리의 목숨을 지상에 남기지 않고 따로 하늘에 있는 약속 비밀 금고에 잘 보관해 있다고, 이 땅이 아니고 하늘나라에 우리의 생명이 있다는 것을 따로 챙겨주기 위해서 이 땅에 왔다가 우리의 허점을 다 드러내 주시고 십자가를 꽂아서 십자가의 생명으로 그 말씀의 완성과 마감으로써 우리 죄인을 부르러 오신 주의 뜻에 우리가 감겨 있고 같이 연결되어 있어요.
실과 바늘이 잘 맞아야 하잖아요. 잘 만났다는 뜻이에요. 이제는 내가 한 거 말고 주님이 행하신 사람, 그것이 진정한 도피성의 의미를 아는 사람입니다. 그것이 누구냐. 바로 베드로전서 2장 9절에 보면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요”
우리는 이 땅에 있다가 사라질 사람들입니다. 사라지면서 무엇을 남겨야 합니까? 오직 내가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만 남기고 사라집시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께서 하신 일, 그것이 헛수고가 아니고 공연한 것이 아니고, 그냥 한때 이벤트가 아니라 지금 오늘날 우리를 남겼다는 사실을 감사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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