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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위인의 성읍(수21;1-3) 190616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9. 6. 17. 17:16
2019-06-16 14:52:12조회 : 31         
   레위인의 성읍 190616이름 : 이근호 (IP:119.18.87.190)   

레위인의 성읍(여호수아 21:1-3)

음성  동영상 Youtube

 링크 : https://youtu.be/ihCASvqxgbQ, Hit:4
 이근호19-06-16 15:41 
레위인의 성읍 

2019년 6월 16일          본문 말씀: 여호수아 21:1-3 

(21:1) 때에 레위 사람의 족장들이 제사장 엘르아살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자손의 지파 족장들에게 나아와 

(21:2) 가나안 땅 실로에서 그들에게 말하여 가로되 여호와께서 모세로 명하사 우리의 거할 성읍들과 우리의 가축 먹일 그들을 우리에게 주라 하셨었나이다 하매 

(21:3)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명을 따라 자기의 기업에서 이 아래 성읍들과 그들을 레위 사람에게 주니라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레위지파인들과 함께 산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 줄을 알아야 합니다. 사람들은 혼자만 모든 영광을 받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죽음’과 함께 살고 있음을 알지 못합니다. 즉 ‘죽음’이란 그들의 삶이 끝나면 찾아오는 줄로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에서는 죽음은 그들과 늘 함께 ‘살아’ 있었습니다. 

즉 ‘죽음이 지금 자기네들과 함께 살아 있음’을 드러내기 위해 그들은 살아 있는 겁니다. 시편 49:16-17에 보면, “사람이 치부하여 그의 집의 영광이 더할 때에 너는 두려워하지 말지어다 그가 죽으매 가져가는 것이 없고 그의 영광이 그를 따라 내려가지 못함이로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죽음의 위력은 돈의 가치와 명예의 가치를 용납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죽음으로 인해 생사가 상호 연결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삶의 생애와 죽음의 생애가 이어져 있습니다. 이런 일반적인 이야기가 이스라엘에서는 레위인의 거주를 통해서 명시화된 겁니다. 레위기 25:29-33에 기재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쉬운 표현하면 이러합니다. 

“성벽 안에 사는 사람이 집을 팔았으면, 일 년 안에는 언제든지 그 집을 다시 살 수 있으나 만약 일 년 안에 그 집을 다시 사지 않으면, 성벽 안의 그 집은 산 사람의 것이 되어 자손 대대로 그의 것이 된다. 또한 희년이 돌아와도 원래의 임자에게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성벽이 없는 마을의 집은 토지와 같이 여겨라. 그런 집은 다시 사들일 수 있으니, 희년이 돌아오면 그런 집은 원래 임자에게 돌려 주어라. 레위 사람은 성벽 안에 있는 집이라도 언제든지 자기 집을 다시 살 수 있다. 레위 사람에게서 집을 샀다 하더라도 레위 사람들의 성 안에 있는 그 집은 희년이 돌아오면 다시 레위 사람들의 것이 될 것이다. 레위 사람들의 성 안에 있는 집은 레위 사람들의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성은 이스라엘 백성이 레위 사람들에게 준 성이다 ”는 겁니다. 

즉 성 안의 토지에 대해서 사람들은 1년 이내에 사고 팔수 있고 또 산 사람은 희년이 되어도 계속 자기 자손의 땅이 된다는 겁니다. 그러나 성 밖의 토지에 대해서 희년 원칙이 강력하게 적용되어서 희년(50년 째 되는 해)가 되면 원래 토지 주인에게 돌려주어야 한다는 겁니다. 

이 사실과 비교해서 레위지파의 성읍은 보다 영원성이 보장됩니다. 레위 사람이 성 안의 토지나 집을 구입하고자 한다면 이미 샀던 사람이라도 자기 권리를 포기해야 한다는 겁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땅 자체를 둘로 구분 짓습니다. 성 안에 있는 토지와 성 밖의 토지를 구분 짓습니다. 그리고 그 토지 소유에 대해서도 일반지파의 사람과 레위지파 사람을 구분합니다. 


이런 차별대우는 이스라엘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생존보다 레위인들의 생존을 하나님께서 더 우선시해서 신경 쓰신다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차별의 근거는 어디서부터 일까요? 히브리서 7:10에, “이는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을 만날 때에 레위는 아직 자기 조상의 허리에 있었음이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영원한 제사장을 이스라엘의 중심축으로 삼는 조건 하에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만들었다는 겁니다. 그들이 오늘 본문에서 약속의 땅에 들어와서 땅을 달라고 하고 있습니다. 레위인이 일반 지파 곁에 살아 있다는 것은 곧 영원한 제사장이 자기 땅에 살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는 제사장적 본질을 지닌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동행하신다는 표시는 ‘언약궤’로서 설명이 됩니다. 언약궤의 지상의 이동경로를 통해 이스라엘의 본질을 보여주는 대목은 사무엘상 5-6장에 나옵니다. 언약궤가 가는 곳마다 말썽을 일으킵니다. 이는 언약궤의 가치를 받을 만한 민족들이 아님을 말해주는 겁니다. 

그렇다면 언약궤를 받을 만한 민족이란 제사장 체제가 갖추어진 나라이어야 합니다. 그 민족이 바로 이스라엘 민족입니다. 다윗이 기럇여아림에 머물고 있는 무서운 언약궤를 자신이 있는 예루살렘이 데리고 오려는 이유는 잠시 오벧에돔의 집으로 이동시켰던 언약궤로 인하여 오벧에돔 집이 복을 받았기 때문입니다.(삼하 6장) 

이처럼 언약궤의 제사장 그룹의 만남은 이스라엘의 복과 번창을 가져다 주는 겁니다. 그리고 언약궤의 이동은 제사장이 아니면 이동할 수 없다는 사실이 웃사라는 사람의 죽음을 통해서 충분히 확인된 바 있습니다.(삼하 6:7) 따라서 제사장과 일반인과의 동행이라는 것은 언약궤의 가치를 드높이기 위함입니다. 

달리 말해서 제사장의 할 일은 ‘악의 보편성’에 관한 증거들을 계속 생산하기 위함입니다. 이미 인간들의 악하고, 인간들이 하는 행사는 다 악의 보편성의 일부입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자기만 행복하면 그만입니다. 인간들의 일상이 이런 식으로 사람들을 안일하게 파묻히게 합니다. 

즉 제사장의 존재나 언약궤의 존재 가치를 항상 무관심하고 무시하는 성향을 계속 보이게 됩니다. 교회는 가게가 아닙니다. 손님들이 와서 기웃거리면서, “혹시 이 교회는 나를 천국보내 줄 수 있어요?”라고 묻는 곳이 아닙니다. 교회는 가족입니다. 쉽게 말해서 교회는 ‘큰 집’입니다. 

제사 지내는 큰 집입니다. 우리 성도의 존재 근거를 쉬지 않고 발산하는 곳입니다. 죄인이기에 언약궤의 가치가 빛이 나는 겁니다. 우리 자체의 가치는 그 언약궤 앞에서 죽어야 합니다. 부정되어야 합니다. 현대인들은 모든 것을 분해해서 본질을 찾아내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죽은 시체를 부검해 보세요. 과연 거기서 죄라는 것이 나올까요? 안 나옵니다. 그냥 물질만 나올 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아무리 인생을 살아도 자기 자신이 누군지 모르고 갇혀 있는 꼴로 사는 겁니다. 하지만 우리 곁에 언약궤, 즉 예수님의 십자가가 있다면 우리는 일반적인 악의 일부로서 존재하고 있음을 압니다. 

영적인 생활이라는 것은 육을 무시하고 육을 벗어나는 생활이 아니라 육과 더불어 그 육이 뿜어내는 죄를 십자가 피와 연결하는 것입니다. 영원한 제사장이신 예수님의 희생을 드러내기 위한 그 영원이 우리의 일생은 앞과 뒤를 자른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인생을 통해서 예수님이 특별 대우받기를 원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19-06-16 22:25 
239강-여호수아 21장 1~3절(레위인의 성읍)20190616-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여호수아 21장 1~3절입니다. 구약성경 350페이지입니다. 

“그때 레위 사람의 족장들이 제사장 엘르아살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자손의 지파 족장들에게 나아와, 가나안 땅 실로에서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사 우리가 거주할 성읍들과 우리 가축을 위해 그 목초지를 우리에게 주라 하셨나이다 하매,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자기의 기업에서 이 성읍들과 그 목초지들을 레위 사람에게 주니라” 

여기 2절에 보면 “모세에게 명한 대로”라고 되어 있으니까 모세가 그 전에 살아 있을 때 레위 지파에 대해서 어떤 조치를 하라는 것이 어떤 내용인지 우리가 알아야 되겠지요. 레위 지파에 관한 하나님의 법을 통해서 우리는 땅의 두 종류와 그리고 사람의 두 종류를 알 수 있어요. 

땅의 두 종류는 뭐냐 하면 성안에 있는 토지와 성 밖에 있는 토지가 구분된다는 겁니다. 레위기 25장 29-33절에 보면 성안에 있는 토지와 성 밖에 토지에 대해 나오는데 쉽게 표현하면 이렇습니다. “성벽 안에 사는 사람이 집을 팔았으면, 일 년 안에는 언제든지 그 집을 다시 살 수 있으나 만약 일 년 안에 그 집을 다시 사지 않으면, 성벽 안의 그 집은 산 사람의 것이 되어 자손 대대로 그의 것이 된다. 또한 희년이 돌아와도 원래의 임자에게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성벽이 없는 마을의 집은 토지와 같이 여겨라. 그런 집은 다시 사들일 수 있으니, 희년이 돌아오면 그런 집은 원래 임자에게 돌려주어라. 레위 사람은 성벽 안에 있는 집이라도 언제든지 자기 집을 다시 살 수 있다. 레위 사람에게서 집을 샀다 하더라도 레위 사람들의 성안에 있는 그 집은 희년이 돌아오면 다시 레위 사람들의 것이 될 것이다. 레위 사람들의 성안에 있는 집은 레위 사람들의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성은 이스라엘 백성이 레위 사람들에게 준 성이다”라는 겁니다. 

즉 성 안의 토지에 대해서 사람들은 1년 이내에 사고팔 수 있고 또 산 사람은 희년이 되어도 계속 자기 자손의 땅이 된다는 겁니다. 그러나 성 밖의 토지에 대해서 희년 원칙이 강력하게 적용되어서 희년(50년 째 되는 해)가 되면 원래 토지 주인에게 돌려주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렇게 구분하는 이유가 어디 있느냐. 희년이라는 가치의 의미를 드러내기 위해서 그렇게 구분해요. 그러면 그 가치를 좀 자세히 이야기하면 레위 지파의 성읍은 보다 영원성이 보장됩니다. 레위 사람이 성안의 토지나 집을 구입하고자 한다면 이미 샀던 사람이라도 자기 권리를 포기해야 한다는 겁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땅 자체를 둘로 구분 짓습니다. 성안에 있는 토지와 성 밖의 토지를 구분 짓습니다. 그리고 그 토지 소유에 대해서도 일반 지파의 사람과 레위 지파 사람을 구분합니다. 


땅의 두 종류가 결국 레위인과 그렇지 않은 지파의 차이를 하나님께서는 부각하려고 하는 겁니다. 이것은 다른 지파가 사는 땅도 중요한 땅이지만 특별히 레위 지파가 사는 땅이 다른 지파에 있는 사람들을 살릴 수 있는 내용이 포함된 땅이라는 겁니다. 사람이 자수성가하면 기분 좋아요. 하지만 “네가 자수성가해서 사는 게 아니야. 다 내 덕이야”라고 하면 기분 굉장히 더럽지요. 굉장히 나쁩니다. “네가 뭔데?”라고 나오죠. 

우리는 타고난 악마의 성품이 뭐냐 하면 모든 일은 내 공로 내 덕으로 돌리고 싶어요. 그래서 “나도 좀 했잖아”라는 말을 들으면 그 사람이랑 결별하고 싶고 헤어지고 싶고 결국은 혼자 살고 싶어집니다. 그래야 결국은 모든 영광이 나에게로 다 쏠리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나의 계획이 실패로 끝나는 경우가 어떤 경우냐 하면 내가 스스로 서려고 하다가 본의든 본의 아니든, 나에게 피해를 주는 사람이 나타났을 때 그때는 완전히 자기 계획이 무산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죠. 

어떤 가정이 굉장히 성공했는데 감추고 싶은 게 있어요. 자기가 그 사업에 매진한다고 자식을 돌보지 않아서 자식 하나가 정박 아가 된다든지 자식 하나가 뭔가 사고를 당할 때는 드라마에 나오는 회장님이 다른 건 다 큰소리치는데 그 자식만 보게 되면 기가 팍 죽는 거예요. ‘아이고 네 인생 내가 조져놨구나...’라는 생각이 드는 겁니다. 

삼성그룹에 이건희 회장의 딸이 있었는데 뉴욕에 가서 죽지요. 자기 딸인지 아닌지 그런 설들은 놔두고 그 부유한 재산가가 딸아이 정신 온전하게 못 한다고 할 때 얼마나 자책감이 느껴지겠습니까? 그처럼 인간은 이미 어떤 존재라는 것을 하나님이 익히 아셔요. 그 옆에 레위인을 보냅니다. 인간은 자기 스스로 내가 대단한 존재인 것을 늘 확인하고 싶어해요. 

그런데 레위인이 옆에 딱 붙어 있을 때 그 계획인 완전히 좌절되는 겁니다. ‘이 약속의 땅, 천국이죠, 약속의 땅이라는 것은 내가 노력한다고 들어갈 수 있는 땅이 아니구나’라는 것을 레위인이 옆에 있음으로써 계속 절감하고 또 확인하고 또 확인하는 거예요. 사람이 어려울 때 교회 나오고 편하면 교회 안 나올 때 그러면 자기 본색을 그대로 드러낸 거잖아요. 

편할 때 교회 안 나오잖아요. 내가 알아서 잘 사는데 교회 아쉬울 게 뭐 있느냔 거죠. 그러니까 교회라는 것을 잘못 오해하고 있는 겁니다. 여러분 교회는 가게가 아니에요. 가족이에요. 패밀리입니다. 이게 큰집입니다. 세상 말로 해볼까요? 큰집에서 제사 잘 들여서 우리가 복 받는 거죠. 

형제들이 있으면 큰아들이 제사 지내서 계속 큰아들이 제사 잘 들이면 나머지 둘째 아들 집에 오면 봉투에 돈 넣어와서 “형수님 애쓰세요. 돼지고기값, 소고기값 하세요”라고 하면서 주잖아요. 그냥 맨손으로 와서 잔소리하고 제삿밥만 먹는 그런 밉상 동생이 어딨습니까. 큰집인데. 말로만 큰집이 아니고 진짜 큰집이잖아요. 

레위인은 큰집이에요. 이게 오늘날 교회라는 것은 우리의 정신적 지주라고 편하게 생각하지만 성경대로 합시다. 교회는 언약궤가 있는 곳이에요. 이게 구약의 언약궤가 어떻게 이동하면서 어떤 효과와 변화를 일으키는가를 성경에서는 이스라엘을 통해서 보여줍니다. 사사기 5장과 6장에 보면 언약궤가 가는 곳마다 말썽이 일어나요. 그게 참 재밌잖아요. 언약궤라는 것이 있는 곳에 왜 말썽이 일어나는가. 

그 지역이 있을 곳이 아니기 때문에 말썽이 일어나는 겁니다. 언약궤는 천국에 고정되어야 하지 지옥에 있으면 안 되잖아요. 그러면 언약궤가 지옥을 떠나서 천국 가는 그 코스가 바로 길을 모르는 우리가 천국 가는 길이 어디지 할 때 언약궤가 지나쳐가는 그 길이 우리의 가는 길이고 성령께서 그 길로 우리를 몰아넣고 인도하십니다. 

언약궤가 간 길, 거기가 주님이 가신 길이에요. 왜냐 하면 주님은 새 언약의 완성이니까요. 주님이 가신 그 길, 언약궤가 간 그 길을 이스라엘이 외면하면 안 되죠. 홉니와 비느하스가언약궤를 놓치고 그들은 죽어요. 죽을 때 언약궤가 일부러 이스라엘 사람 손에서 블레셋 사람 손으로 빼앗김을 당하게 되는데요. 그건 그동안 이스라엘이 언약궤를 무시해도 무지무지하게 무시한 거예요. 

정작 자기의 생명은 내 노력과 내 지혜와 내 애씀과 내 삶의 투쟁에서 나온 것이 아니에요. 오히려 그렇게 생각한 그것이 진짜 생명을 무가치하게 내쳐버린 겁니다. ‘그런 쓸데없는 거’라고 이런 식으로 생각한 거예요. 고마운 분은 주님이죠. 주님께서 그런 인간을 내칠 수도 있는데 기어이 언약궤가 자기 고장을 찾아올 수 있도록 그렇게 이끄십니다. 

기럇여아림이라고 언약궤가 한바탕 소동을 일으키고 너무 무서워서 블레셋 나라가 이스라엘 나라 경계선에 언약궤를 방치를 해요. 오늘 여호수아 같은 경우에는 아직까지 그런 다윗 시대가 아니기 때문에 지금 어디 있느냐 하면 실로에 있어요. 오늘 본문에 실로에 나와서 그렇게 부탁한다고 하는데 그들이 실로에 언약궤를 세우고 난 뒤에 그들이 확인할 것은 얼마나 잘 먹고 잘사느냐가 아니라, 언약궤의 가치를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이 땅에 그걸 표출해 내느냐입니다. 

‘언약궤는 중요하고, 언약궤는 중요하다’를 우리가 평소에 살면서 얼마나 매일같이 발산하고 증거 하는지가 언약궤와 이스라엘 사람들의 관계성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어떻습니까? 사람이 사는 목적과 이유를 우리는 너무 놓쳐버렸어요. 그놈의 20세 이하 월드컵이 뭔지 밤새도록 하고 좋기는 치킨집만 좋고 치킨집만 대목 봤지요. 그게 뭐라고. 

사람이 자기 자신을 모르기 때문에 그러한 언약과 예수님의 살과 피가 상관없는 것에 계속 기웃거리고 살아갑니다. 그것 가지고 대화의 주제로 삼고. 노골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여러분 돌아가신 분이나 옆에 아시는 분 중에 돌아가신 분 부검 한번 해보세요. 시체 부검하면 거기에 뭐 나옵니까? 아무것도 안 나와요. 결국 우리는 그 죽은 인간, 아무것도 아닌 인간을 위해 살아온 거예요. 

부검할 때 정량분석, 정성분석 하거든요. 백날 정량분석, 정성분석 해 봐도 “사인은 모르겠습니다”라고 하죠. 사인은 늙어 죽는 것이 사인이겠지요. “세월과 시간이 죽였습니다”라고 하는 데 그건 근원적인 죽음의 이유를 몰라서 그래요. 죽음의 이유는 로마서 6장에 나온 것처럼 우리 죄로 인해 죽었는데 문제는 부검해서는 죄가 안 나온다는 이야기입니다. 

결국 모른다는 겁니다. 몇 년을 살았는데 계속 살아 봤자 몰라요. 왜 사는지 왜 죽는지도 모르고요. 자기 자신에 대해서 전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여기에 레위 지파에서 특별하게 그들의 위상을 보장해 주고 있습니다. 이제부터 어려운데요, 그러면 레위 지파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이냐 하면 그것은 바로 언약궤와 관련된 언약궤에 담긴 가치를 주변에 보여주기 위해서 레위 지파가 있는 겁니다. 이건 아까 제가 말씀드렸고요. 

그걸 심도 있게 하면 이렇습니다. 죄의 보편성 찾아내기. 죄의 보편성이라는 것이 뭐냐 하면 이 세상이 사고 사회라는 겁니다. 이 세상을 규정하는 핵심적인 단어는 ‘사고’입니다. 무슨 사고? 하나님이 인간에게 살해당하는 사고. 이 세상은 사고로 덮혀 있습니다. 모든 일어나는 일들. 인간들이 아무 잘못 없고 인간성 좋은데 갑자기 죽더라. 왜 죽었는가? 

주님의 십자가 때문에. 그 십자가 사고를 알려 주기 위해서, 인간은 이미 죽었다는 사실을, 죽었는데 아닌 척하며 시간 끌고 있는 것을 폭로하기 위해서입니다. 백 명이 죽어도 왜 죽었는지를 부검해봐도 안 나타나요. 죽는 이유는 예수님이 이 땅에서 죽었기 때문에 세상은 죽어야 하는 겁니다. 

세상에서 태어난 자는 세상과 더불어 함께 멸망 당하고 죽어야 하는 겁니다. 저는 이것을 사고사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사고로 죽은 거예요. 인간이 대들어서 죽인 겁니다. 그러면 그다음 이야기는 간단합니다. 그러면 인간은 왜 대드는 겁니까?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과 이스라엘 백성의 약속의 땅에서 이제는 발산해 낼 거예요. 

하나님이 정해놓은 법을 위반해서 죽는 거예요. 율법에 의해서 그들은 저주받아 마땅한 겁니다. 로마서 3장 18절의 말씀처럼. 율법에 의해서 그들은 법에 위반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죽이기로 이미 확정지어 놓은 겁니다. 이렇게 이야기 해서는 여러분들이 정말 가슴에 와 닿지 않을 거예요. 그러면 와 닿는 이야기를 할게요. 

어떤 사람이 교회 왔다. 복음을 들었다. 이제 예수 믿는다. 난 성령 받았다고 자부하고 싶다. 그러면 그때부터 그 사람은 영적인 사람이라고 스스로 생각해서 영적인 일을 열심히 할 거예요. 고상한 일을. 그 사람은 근원적으로 큰 오해를 하고 있었던 겁니다. 영의 일은 육의 일을 멀리하는 고상한 일이 영의 일이 아니에요. 

다시 자기 육으로 돌아가는 겁니다. 내가 이 세상의 악의 보편성에서 아무리 빠져나오려고 해도 주께서 못 빠져나오도록 그렇게 나에게 새로운 일거리와 사태로 계속 나를 몰아세운다는 거예요. 주님은 미친 주인 같아요. 나는 멀쩡하고 싶어요. 영적으로 경건하고 싶고, 거룩하고 싶고, 훌륭하고 싶고, 우수한 존재가 되고 싶어요. 

그런데 주님이 나를 구원하신 이유는 악의 보편성에서 너도 한몫한다는 것을, 그것의 일부라는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서 우리를 이 땅에 살게 하는 겁니다. “그러면 레위인은 누가 합니까?”라고 하시면 레위인은 주님이고, 주님이 제사장이에요. 주님이 영원한 제사장 되어야 해요. 우리 성도가 하는 것은 제사장이 아니고, 제사장이 하는 기능과 역할과 연루되어있는 사람이죠. 

거기에 성경적 근거가 있습니까? 근거 대겠습니다. 히브리서 7장 10절. 그냥 듣기만 해보세요. 이게 얼마나 어려운지 그냥 듣기만 하세요.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을 만났을 때 레위는 아직 자기 조상의 허리에 있었음이라”라고 되어있어요. 이거 수능 문제 내고 싶어요. 정말 이 말이 무슨 의미인지 노량진 학원가에 가서 도곡동 학원 많은 곳에 가서 인문학 강사들에게 이거 한번 물어보세요. 이게 무슨 뜻인지. 

분명히 한글로 되어있어요. 헬라어 찾을 필요 없어요. 헬라어 히브리어 찾는 사람은 언어학을 모르는 사람이에요. 원어라고 캐봐야 자기 선입감만 되비쳐 나올 뿐이지 절대로 거기서 진리는 안 나오게 되어있어요. 인간은 언어 자체에서 진리를 못 뽑아내요. 뽑아낼 수가 없어요. 그냥 자기주장이 옳다는 것을 핑계 댈 뿐이에요. 

다시 읽어볼게요.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을 만났을 때 레위는 아직 자기 조상의 허리에 있었음이라” 참 성경이 단출하죠. 스스로 단절되어 있음을 인정하지 않으면 풀어낼 수 없는 해석입니다. 서울대학 나온다고 되는 게 아니에요.멜기세덱은 제사장입니다. 어떤 제사장? 영원한 제사장. ‘영원’이 뭐냐? 시간을 앞과 뒤로 끊어내는 것을 ‘영원’이라고 하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시간이라고 하는 것은 시간 자체가 흐르기 위해서가 아니라 영원을 묘사하기 위해서 모형과 그림자로써 이 땅에 시간이라는 것을 허락하고 창조했다는 그 말이에요. 시간의 앞뒤를 끊어내는 것이 영원의 솜씨예요. “영원은 얼마나 깁니까?”라고 묻지 마세요. “영원은 누구십니까?”라고 물어야 해요. 영원은 주님이 영원하신 분이에요.  

주님이 알파요 오메가예요. 주님을 위한 창조였고 주님에 의한 마감이었습니다. 그래야 세상 모든 것이 그리스도로 통일되거든요. 시간은 그분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거예요. 따라서 시가의 본질은 뭐냐 하면 십자가가 시간의 성질이고 본질이에요. 지금 이런 이야기에서 뭐가 빠졌느냐 하면 ‘나’라는 이야기는 다 빠져있는 거예요. 

‘내가 뭘 했습니다. 내가 뭘 합니다. 앞으로 어떻게 할까요? 앞으로 내 운명은...’이라고 하는 나와 관련된 것들은 다 빠져있어요. 제가 오늘 아침에 일어나서 보니 축구가 1대 3으로 졌다고 하길래 참 잘 된 것이라고 했어요. 사람이 일등 하면 안 돼요. 일등 하게 되면 그다음부터 뭐 병역 혜택 주니 마니, 상금은 얼마니, 이제부터 유럽축구에서 누구는 부르고 안 부르고, 도대체 축구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고 앞으로 그 집안이 호강하느냐 마느냐에 전부 다 언론이 거기에 초점을 맞춰요. 

선수들 축구 못합니다. 이제는 축구 끝났어요. 이제는 호강하는 것만 남아있어요. 주님께서 우리교회 교인들 부자 안 되게 하신 것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왜냐 하면 주님은 우리를 너무 잘 알아요. 악의 보편성 중에 하나예요. 아까 제가 예배 시작할 때 한 본문요, “저가 죽음에 가져가는 것이 없고” 돈이 있어도 돈 있는 사람을 겁내지 말고 부러워하지 말라는 그런 이야기예요. 

왜? 죽음이 기본이니까. 영원은 나의 시간과 나의 출생과 나의 죽는 날짜를 끊어버려요. 누가? 주님이. 왜? 본인이 하겠다는데 왜 우리가 나서요. 본인이 알아서 죽이겠다는 거예요. ‘생일 축하합니다’라고 백날 하는 건 좋은데 시작과 끝은 주님을 위해서 시작했고 마감도 주님께서 마감하는 겁니다. 

그중에 이야기, 멜기세덱 이야기에서 우리는 빠져요. 멜기세덱이라는 영원한 제사장인 주님께서 레위인들을 태어나기 전에 아브라함 허리에, 그 족보에 두게 하셨단 말이죠. 왜? 레위인이 있어 줘야 우리가 시건방을 안 떨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네가 농사짓는 거 좋고 다 좋은데 레위인이 제사 안 드리면 다 끝났어.”라고 하는 이게 바로 약속의 땅의 본질이에요. 

우리는 지금 약속의 땅에 들어갔고 그게 지금 영원한 나라에 들어갈 사람입니다. 자, 인간이 달라져야 한다면, 뭐 어떻게 달라져야겠어요? 맥가이버 칼 있죠? 원래 스위스 칼인데 그냥 맥가이버 칼이라고 해요. ‘다기능 툴’이라고 해서 콜라병 따는 것도 있고 온갖 도구들 달려 있잖아요. 우리는 그 맥가이버 칼의 일부에 속합니다. 

옆에 있는 인생 너무 부러워하지 마세요. 맥가이버 칼에 달린 툴을 그때 그때마다 필요에 따라 주님께서 알아서 사용하실 거예요. 왜? 가족이니까. 가족이라고 해서 다 키 크고 다 똑같지 않잖아요. 다르잖아요. 그러나 그걸 묶어 내는 것이 가족이라는 겁니다. 가게는 뭐냐? ‘혹시 이 교회가 나를 천당 보내주는 곳일까? 계십니까? 주인님! 천당 보내주면 헌금할게요.’라고 하는 건 가게죠. 가게. 

종교단체가 가게입니다. 그러면 그 사람 집은? 자기 집구석이 있겠죠. 후딱 왔다가 후딱 가버려요. 저기 문을 떼어버리든지 막아버리든지 해야지. 교회 왔다가 후딱 가버려요. 제가 의존교회에서 그런 이야기 했거든요. 의존교회에서 강의하면서 왜 사람들은 교회 오는 것을 자기 일상 중에 하나라고 보느냐는 말이죠. 

‘오늘은 교회 갔다가 월요일은 딴 데 가야지’라고 일상 중의 하나가 교회 가기가 되어 버린 거예요. 그건 일상이지 신앙이 아닙니다. 일상에 매몰되면 안 됩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하느냐. 내 직장이 교회이고 내 집이 교회라고 여겨야 해요. “나 교회 다닌다”라고 하면 안 돼요. 그냥 교회 그 자체예요. 어디 가도 그냥 교회예요. 화장실 가도 목욕탕 가도 그냥 교회예요. 

내 자체가 교회고 맥가이버 칼 안에서 못 빠져나오고 거기 그대로 있는 가족입니다. 이 가족을 하면서 뭘 뽑아내느냐 하면 악의 보편성을 뽑아내는 데 계속해서 레위인들이 가르치죠. 제사장과 레위인들은 가르치는 사람들이거든요. 제사장과 레위인들은 남에게 율법을 가르치는 사람이거든요. 

하나님께 받은 율법을 계속 가르치니까 그 율법을 받은 주변의 다른 지파들이 이걸 감당하기 힘들어요. 왜? 계속 잔소리와 지시와 명령이 주어지니까 나름대로 지키려고 지켜봤자 못 지키는 겁니다. 지킬 수가 없어요. 그리고 뭐냐 하면 변명과 핑계로 일관할 수밖에 없는데 그게 바로 악의 보편성이에요. 

그걸 왜 못 지키느냐? 나만 챙기고 싶어 하니까. 나만 행복하면 그만이니까. 그걸 율법이 오기 전까지는 몰랐죠. 나는 나름 하나님께 성의를 다 표하고 있다고 하는데 막상 율법이 한두 개 오게 되면 지키면 그만이지만 그다음부터는 계속해서 부가되거든요. 우리 정체가 드러날 때까지, 우리가 못 지킨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할 때까지, 계속해서 율법이 주어지니까 레위 지파의 제사 없이는, 레위 지파나 그들의 존재 없이는 우리는 어디를 가더라도 생명 없음을 느끼는 거예요. 

전남 고흥에 마늘 농사가 씨앗 품종을 잘못 심어서 흉작이 되었다는 겁니다. 그 뉴스를 보고 사람들이 말하기를 “참 안 됐다. 그 마늘 농사가 얼마나 힘든데...”라고 말하지만 우리나라 가운데 유일하게 환호성을 부르는 데가 있어요. 의성 마늘. 같은 노동을 해도 마늘이 흉작이 되면 이게 생산량이 줄고 그러면 단가가 높아져서 의성 마늘은 비싼 값에 팔 수가 있습니다. 이게 바로 인간의 행복이라는 겁니다. 악의 보편성이죠. 

제발 좀 죽어줘. 나만 살게. 가족도 마찬가지지만 ‘제발 좀 죽어줘. 나만 살게’라는 마음을 율법을 통해서 계속해서 조금씩 우리에게 쳐들어 왔다가 마지막에는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에게 다 보여줬습니다. ‘이제 너 고백도 하지 마. 내가 다 알아.’라는 식으로 우리에게 이야기해줍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디 허리에 있느냐 하면 예수님의 허리에 속해서 예수님 아니었으면 우리는 구원 못 받습니다. “이 세상에 돈이나 영화가 아니라 예수님보다 귀한 것이 없음을 이 순간 알려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우리가 말하면 주님께서 “너 그 순간뿐이지? 내일 되면 또 알려줄 거야.”라고 하시며 매일 알려주시기를 우리가 원합시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제사장이 살던 그 땅, 그냥 땅이 아니라 생명을 보여주는 땅, 그냥 땅이 아니라 우리가 얼마나 죄인인 것을 밝히는 땅인 것을 저희들이 이제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 중심으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