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7강-여호수아 19장 49~51절(땅과 백성)20190602-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여호수아 19장 49~51절입니다. 구약성경 348페이지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의 경계를 따라서 기업의 땅 나누기를 마치고 자기들 중에서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기업을 주었으니, 곧 여호와의 명령대로 여호수아가 요구한 성읍 에브라임 산지 딤낫 세라를 주매 여호수아가 그 성읍을 건설하고 거기 거주하였더라, 제사장 엘르아살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자손의 지파의 족장들이 실로에 있는 회막 문 여호와 앞에서 제비 뽑아 나눈 기업이 이러하니라 이에 땅 나누는 일을 마쳤더라”
약속의 땅은 세상의 축소판입니다. 그러면 그 땅만 있는 것으로 구성되지 않고 거기에 사람도 있겠지요. 약속의 땅이라고 생각하고 들어가서 거기 사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떤 입장과 어떤 처지에 있는가 하면 한마디로 말해서 본인들의 개성은 작살납니다. 인정받지 못해요.
약속의 땅의 특징은 약속의 땅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주변에 저주받고 멸망 받고 지옥 가야 할 백성들도 경계선을 이루고 접경지점을 이루고 있다는 점입니다. 약속의 땅 주변을 수상한 쪽이 완전히 포위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이게 무슨 상황이냐는 이 말이죠. 약속의 땅에 자기들만 살면 좋아요. 하지만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주변 나라들은 뭡니까?
왜 그들은 하나님께서 내보내지 않고 철수시키지 않습니까? 여기서 우리는 이 세상에 대해서 잘못 생각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가? 사람들이 묻습니다. “세상이 어떤 세상이면 좋겠습니까?” 그러면 “나만 잘되는 세상이면 좋겠습니다”라고 이야기를 하죠.
물론 노골적으로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별로 없고 두리뭉실 이야기하죠. “뭐 나라가 잘되고 기업이 살아나고 경제가 돌아서 돈이 잘 풀리고”라고 빙빙 돌려서 이야기하지만 결국은 뭐냐 하면 나만 잘되면 오케이 되는 나라를 원합니다. 그런데 그건 인간들의 잘못된 생각이고 착각입니다.
하나님의 생각은 뭐냐 하면 이 세상은 하나님의 원혼이 서려 있습니다. 원래의 분노가 서려 있는 세상이에요. 그 세상의 한구석을 치워 버린 겁니다. 새까만데 주님이 손가락 가지고 긁어버려서 새까만 땅이어야 하는데 거기에 약간 하얀 땅을 하나 마련해 놓고 거기에 복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일방적으로 만들어내는 겁니다.
원래의 저주가 넘실대는 바다 같은 세상뿐인데 원래 거기에 없던 섬 하나가 딱 올라왔다고 보면 됩니다. 그 섬은 모든 저주가 다 철수된 상태의 섬 하나 만들어 놓고 거기에 팻말 붙이기를 ‘약속의 땅’이라고 붙인 거예요. 그러면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저것이 만약에 약속의 땅이고 정말 이상적인 세계라면 그렇게 되는 조건이 뭐냐? 요건이 뭐냐?
요건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기거한다는 사실. 사람이 훌륭하다가 아니라 거기에 하나님이 기거한다는 거예요. 이런 이야기 하면 상당히 전설처럼 들리고 신화처럼 들릴 거예요. 오늘날 유치원 어린아이들에게 전래동화를 이야기하거든요. 그러면 그 어린아이들은 그 이야기 듣고 귀 쫑긋 세우고 잘 들어요. 까불다가도 가만히 있습니다.
전래동화에 보면 마귀도 나오고 못된 마귀할멈도 나오고 빗자루 타고 왔다갔다 하면서 돌아다니죠. 그러면 어떤 아이는 손들고 “요새는 빗자루 아니고 로봇청소기가 다 하는데요”라고 되지도 않는 질문을 하고 하는데 어쨌든 그 아이들에게 전래동화 이야기하고 전설 이야기하면 잘 들어요. 그런데 어른들에게 그런 이야기 하면 어른들은 그거 듣고 호들갑 떨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요즘 세상은 너무 타락했어요. 너무 어른스러워졌어요. 이 여호수아의 이야기가 하나의 전설, 전래동화 수준이 되고 말았습니다.
제가 독일에 갔을 때 아현 한인교회를 갔는데 교회인지 오락단체인지 분간이 안 돼요. 얼마나 신나게 잘 놀든지. 물론 말씀이 없으니까 그거로라도 위로를 받아야죠. 외지이고 외딴 섬 같은 곳인데. 수풀 속에 빈터 같은 자기들 만의 세계, 공동체를 이루고 있어요. 재미나게 놀아요. 그건 절대로 약속의 땅이 아닙니다.
약속의 땅의 특징은 바로 주변에 있는 밀려 나간 다른 이방인들이 살던 땅을 약속의 땅으로 바꾸었습니다. 그러면 이방인들이 어떻게 살고 약속의 땅은 어떻게 사는지 그 차이점에 우리가 눈을 떠야 해요. 이방인들은 어떻게 사는가? 자기 개성대로, 욕구와 욕망대로 살게 되어있어요. 욕구 욕망을 줄일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그 욕구 욕망을 줄여버리면 그걸 뭐라고 이야기하느냐 하면 불행이라고 이야기해요. 행복하지 않은 상태로 보는 겁니다.
그러면 행복이 뭐냐? 내가 잘되고 내 욕심이 만족 되는 상태를 행복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인간의 행복이라고 하는 것은 상당히 남을 겨누는 칼 같은 흉기가 되는 겁니다. ‘나 행복 할래’라고 하는 것은 내 행복 건들면 죽여버린다는 말고 같은 소리예요. “요새 교회 안 나오고 무슨 일이 있습니까?”라고 전화라도 할라치면 목사가 겁이 나서 못 해요.
흉기가 막 날라오거든요. ‘내가 가고 싶은 데로 가는 거지 왜 네가 전화질을 하고 난리야? 내 행복을 네가 뭔데 방해해?’라고 한단 말이죠. 옛날 우리나라 19세기 말에 평양의 교회 들어갈 때는 “아이고 주의 사자님이 전화를 다 해주시고, 세상에 이런 복이 어디 있는지”라고 했어요. 주의 사자님. 요새는 “혹시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전화하겠습니다. 아이고, 빨리 끊겠습니다”라고 하는 식이에요. 당신의 행복 구조에 제가 허락 없이 끼어들어서 죄송하다는 식이 되는 겁니다.
이방인의 특징은 뭐냐 하면 자기 개성대로 살아가고 자기 고집대로 살아가는 거예요. 그러면 약속의 땅 거주민은 어떻게 되는가. 제가 쉽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제가 중학교인지 고등학교인지 미술 시간에 뭐를 숙제로 받아서 했느냐 하면 큰 도화지에다 사람 모양을 다 그리는 거예요. 나무 모양도 그리고 집 모양도 그리고. 그냥 일차원적 평면이에요.
그냥 평면적 판인 도화지에다가 그림을 사람도 그리고 집도 그리고 나무도 그리고 개도 그리고 산도 그리고 해요. 사람 그리면 사람의 몸통 다리 다 그리고 입, 코, 귀 다 집어넣죠. 그걸 칼 가지고 가위 가지고 오려요. 오려놓고 그걸 평면과 수직 되도록 다 세웁니다. 요새는 초등학교도 그런 거 할 수 있죠. 세웁니다. 그러면 그건 하나의 우리 마을이 되죠. 우리 마을. 문제는 그 세워진 인간들과 개와 모든 것들이 전부다 동일한 종이라는 재료라는 사실이에요. 종이라는 동일한 재료.
주님께서 천국에 들어갈 때 약속의 땅에 들어갈 때 전부 다 뼈다귀로 만들어 놓았어요. 뼈다귀로 만들고 그다음에 말씀으로 그들의 영혼을 깨웁니다. 말씀으로 깨워요. 에스겔에서는 말씀으로 깨운다는 이게 중요한 문제인데 말씀으로 깨우게 되면 그들이 전부 다 한결같이 하나님의 군대가 되는 겁니다. 에스겔 30장에 보면 나와요.
그 작업을 인자되는 에스겔에다가 축약해서 집어넣는데 그게 뭐냐 하면 에스겔 3장 1절에 나옵니다. “인자야, 말씀을 책을 먹어라” 책을 먹어라. 먹다 먹다 이제 책까지 씹어 먹어야 하는 거예요. “인자야, 이 두루마리를 먹어 버려라” 뭐 맛있겠어요? 우리가 보고 있는 성경책을 뜯어 먹으라는 거죠. 뜯어 먹어라.
뜯어 먹으니까 입에서는 달아요. 입에서는 단데 이게 창자까지 내려가거든요. 창자에서는 이게 쓴 거예요. 이거는 내과에 한번 가봐야 할 문제입니다. 뭔가 속에 진찰받아야 할 문제가 있는 겁니다. 입에는 단데 속에는 써서 견딜 수가 없는 겁니다. 이건 무엇을 보여주는 것이냐 하면 현재 이스라엘의 처지와 내력을 보여주는 겁니다.
그들은 말씀 말씀 여호와 찾기는 찾는데 입에는 달아요. 하지만 그들의 본질 속으로 들어가면 그 말씀과 그들의 본질이 뒤틀려 있고 정반대 되는 입장에 있습니다. 그러면 에스겔 인자가 그들에게 증거 해야 할 예언은 뭐냐 하면 도대체 알기는 많이 아는데 성경 말씀은 많이 아는데 어떻게 해서 주님의 영광은 되지 못하는가?
그것은 네 속의 본질이 말씀과 대척이 되는 말씀에 대항하고 말씀에 위배 되는 요소가 작렬하고 있기때문에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 겁니다. 약속의 땅에는 약속의 땅에 걸맞은 동일한 재료로써 그 사람이 거기에 세워져야 하는 겁니다. 그 동일한 재료의 모델이 원천이 뭐냐 하면 그건 바로 에스겔 같은 선지자죠.
말씀을 그냥 먹는 거예요. 모세이고 여호수아죠. 모세 때는 모세이고 아브라함 때는 아브라함이고 다윗 때는 고난받는 다윗의 모습이 말씀이 가득 차 있는 모습입니다. 그럼 오늘날 우리는 어떠냐. ‘약속의 땅이라고 하는 것은 내가 죽어서 예수 믿고 가겠지.’라고 하지 마시고 하나님의 뜻은 약속의 땅을 이루는 겁니다.
우리가 구원받는 게 목적이 아닙니다. 우리가 구원받는 게 주님의 일이 아니에요. 내 개인적으로 주의 일을 한다면 이것도 나의 개성이 돼요. 아직도 내 행복을 노리고 나의 생에 만족을 따내려는 거예요. 그것은 저 바깥에서 하는 사람들이나 하라고 하세요. 주님께서 이스라엘 사람을 심어놓았는데 이건 정말 설명이 필요합니다. 시간이 가더라도.
아침에도 언급 했지만 이스라엘은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의 어린 양 때문에 넘어온 거예요. 그리고 그날 밤이었고. 그날 유월절 밤에 그들은 그들의 인생을 잠시 중지했습니다. 왜냐 하면 애굽 사람들은 그날 밤에 잠을 잔 사람들이 누구냐 하면 본인들이 잤어요. 개성 있는 본인들이 잠을 잤어요. 그런데 그 집안에 맏아들 죽고 대가 다 끊겼죠.
이스라엘 사람들이 뭘 목격했느냐 하면 밤에 우리는 밤이 되어서 쉴 수 있어도 하나님은 이 밤에도 뭔가 쉬지 않는다는 거예요. 인간이 잠잔다는 것은 인간이 나서서 행동할 수 없는 그런 시간 때를 말합니다. 낮에는 노동하지만 밤에는 노동이 정지돼요. 인간이 해내지 못한 거, 인간이 할 수 없는 거, 인간이 하고 싶어도 못하는 그 일을 하나님께서 해내신 거거든요.
그리고 그 해내신 것을 모델로 삼아서 모든 인간들에게 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르라고 했어요. 양의 피를. 나흘 전에 준비했던 양의 피를 거기에 바르라고 했단 말이죠. 그러면 모든 인간이 다 개성이 있고 성격이 다르지만 대표되는 것이 뭐냐 하면 어린양이라는 점에서 공통점을 갖고 있습니다. 어린양.
어린양의 죽음을 보고, 피를 보고, 이미 너희는 죽었다고 간주하고 난 다음에 나는 수직으로 오려서 하나씩 세우겠다는 거죠. 죽은 자인데 하나님의 언약 말씀의 완성 때문에 너희들은 내가 거처하는 약속의 땅에, 이 천국에 같이 살게 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역할을 해야 할 자가 이스라엘인 거예요.
그래서 이스라엘은 일종의 남들 보기에는 동시 통역자입니다. 저 하늘의 말을 듣고 무엇으로 토해내야 하느냐 하면 인간이 사용하는 인간의 말로 토해내는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 말씀 들을 때 토해낼 때는 항상 어떻게 하면 가능하다는 이걸 못 내놓지요. “이렇게 하면 여러분 성공할 수 있습니다”라는 말을 못 내놔요.
공통적인 것을 내놓아야 해요. 공통적인 거. 너 말고 너 말고 너 말고 우리, 주님이 대표가 되고 대신해서 하는 우리, 그 우리에 의해서 우리가 이렇게 약속의 땅에 살게 되었다고 이야기해야 하는 겁니다. 뻔한 이야기 이렇게 하게 되면 재미없지요. 쉬운 예를 들겠습니다. 아마 우리나라에 수만 명의 트로트 가수들이 있어요. 옛날에는 40대에 사업 망하고 난 뒤 트로트 가수 하는데 요즘은 30대에도 취직이 안 되니까 트로트 가수 한단 말이죠.
그러니까 줄줄이 트로트 가수 나와서 이거는 뭐 전부 다 이름도 없는 사람들이에요. 그런데 TV조선에서 그 사람들을 특별히 한 자리에 모았습니다. 미스 트롯이라는 프로그램을 만들어서 모았거든요. 한데 모은 거예요. 이게. 개인이 아니고 개인적인 활동이 아니라 하나로 모아놓는 프로그램을 만들었어요. 미스 트롯이라는 프로를 여러분은 아예 안 봤을 거예요. 말씀 보기도 바쁜데 언제 그런 걸 봤겠어요.
보면 송가인이 누군지 홍자가 누군지 아무도 몰랐죠. 송가인이 어디 사람인지 누가 알아요? 진도는 개랑 오용익 목사님이 유명하지 송가인은 안 유명하거든요. 뭘 알 수가 없었죠. 갑자기 그 프로 뜨고 난 뒤에 소문에 의하면 바깥에는 방탄 소년단 국내에는 송가인이라고 된 거예요. 갑자기 떠버렸어요. 갑자기. 정미애 이런 사람들, 김나희 이런 사람들. 후반기에는 미스터 트롯도 한다고 하는데 이제 쥐나 개나 다 튀어 나오게 생겼어요.
도대체 그들이 갑자기 평소에는 있는지 없는지도 몰랐던 그들이 갑자기 수직으로 세워졌습니다. 갑자기 떴어요. 이러면 물론 본인 실력이 좋으니까 좋다고 하겠지만 본인 실력으로만 그렇게 떴겠어요? 근본적인 바탕이 있어야 해요. 근본적인 바탕이 뭐냐 하면 내가 열심히 뛰어서 이 만큼 훌륭하게 되었다고 하면 안 돼요.
왜냐 하면 그전에도 이미 그런 걸 많이 했거든요. 열심히 명함도 돌리고 불러 달라고 사정도 했을 건데 그게 다 실패로 끝났거든요. 약속의 땅에 기획은 TV조선이 아닙니다. 주님이 하신 거예요. 약속의 땅 기획은 주님이 하셨고 문제는 어떤 사람을 모집하느냐 하면 과연 주님의 주되심을 증거 할 자가 누구인지를 주께서 기획하신 거예요.
그러면 개성은 죽여야 해요. 개성이 살아나면 안 됩니다. 그러면 이게 약속의 땅이 아니에요. 나는 누구 덕분에 살았다가, 누구 덕분에 살고 있고, 누구 덕분에 떴고, 천국에서도 떴다가 되는 거예요. 천사들도 부러워할 신분 되었다고 그렇게 되어야 한단 말이죠. 누구 덕분에.
그래서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바다 가운데 뭐가 없어요. 없는데 섬이 하나 올라온 거지요. 약속의 땅 하듯이. 쭉쭉 밀어내고 이방인 땅에 쑥 올라오면서 뭘 주시하느냐 하면 이방인이나 너희가 다를 바 없는데 왜 달라야 하는가를, 무엇이 달라야 하는가, 그 다르다는 것이 두 자로 ‘거룩’이라고 하는데 도대체 무슨 요소에 의해서 너희가 거룩하게 되었는가를 표시하는 것이 약속의 땅에 중앙 지점을 차지하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이렇게 되어있어요. 땅 분배를 하면서 51절에 이렇게 나오죠. “제사장 엘르아살과” 그다음에 여호수아가 나오죠. 그러니까 땅 분배에서 결정권을 가지고 있는 것은 누구냐 하면 제사장입니다. 제가 여러 번 이야기했습니다. 제사장은 죽음과 관련되어 있다고. 다시 말해서 ‘너희는 이미 죽었느니라’를 계속해서 확인하는 계속해서 확인해 나가는 그 작업을 약속의 땅에서는 반복해서 진행 시키는 겁니다.
그러면 죽었다는 것이 뭐가 죽었다는 것이냐. 이것을 제가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십자가를 예수님이 지시고 난 뒤에 주께서 십자가 졌을 때 이미 우리는 끝입니다. 무의미하고 의미 없습니다. 의미 없다면 우리를 그냥 천국 데려가든지 뭘 하든지 해야 할 텐데 의미 없는데 왜 우리를 이 땅에 살게 하느냐. 주께서 먼저 우리로 하여금 합격을 시켜요. 시켜놓고 그다음에 소급해서 우리가 어떻게 해서 구원되었는가를 증거 하는 자로 반복해서 그렇게 하게 만듭니다.
그렇게 될 때 계속해서 뭐가 되느냐 하면 계속해서 우리 공로로 내 의로움으로 하는 모든 것들이 계속 삭제가 되는 거죠. 죄에서 의로 옮기면서 어린양의 피로 갔잖아요. 그러면 그 피가 이스라엘 약속의 땅 중심부에 매일 같이 제사 드리면서 차지하고 있다면 오늘날 신약의 생활도 마찬가지란 말이죠. 그 어린양은 모형이니까 모형 실체의 완성은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십자가를 우리 가운데 두었다면 우리는 앞으로 뭘 하느냐 하면 그 십자가 질 수밖에 없는 그 정도로 우리는 내 뜻으로 내 의도로 천국 갈 수 없는 존재였음을 확인하는 그런 증거들을 매일같이 살아가면서 반복하게 하는 거예요. “그러면 목사님 우리에게 죄지으라는 말씀입니까?”라고 할 건데 우리가 생각하는 죄라고 하는 것은 내가 죄지을 때만 발생 되는 죄를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를 꽂아놓은 성도의 죄는 ‘아, 이것도 죄였어?’ 새삼스럽게 기분 좋게 즐기는 겁니다. 기분 좋게. 아, 이것도 죄였구나. 이미 합격을 했기 때문에. 내가 살아가면서 지은 죄가 아니라 내가 죄인인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계속 살아야 하는 거예요. 우리가. 내가 이 정도로 죄인인 것을, 죄를 더욱더 알기 위해서 주께서 허락할 때까지 계속 살아가야 해요.
그러니까 헝가리 유람선 우리가 타야 하는 거예요. 무서워서 안 타지 말고, 지금쯤 여행사 값 많이 떨어질 때 지금 신청해야 해요. 아무도 안 갈 때. 공동묘지였던 근처에 집값이 내려갈 때 사야 해요. 왜냐 하면 스스로 이제는 살 이유가 없어졌기 때문에. 내 힘으로 살 이유가 전혀 없어졌어요.
바로 약속의 땅에 하나님이 자기 백성으로 하여금 이방 민족을 옆에 두신 이유가 이것이 예수님 하나님 중심이라는 것을 자꾸 잊어버리기 때문에 그래요. 잊어버리고 그들로 하여금 내가 행복하면 이게 주의 축복이라고 보는 겁니다. 내가 행복하면. 하나님께 기도했더니 응답받았다. 하나님의 은혜로 내가 이만큼 잘 살았다. 내가 이런 좋은 집을 짓고 풍성하게 살았다고 할 때 그게 바로 죄라는 겁니다.
절에 다닐 때는 망했는데 교회 다니고 나서는 만사형통한다고 감사헌금 올라올 때 그 감사헌금 뒷면에 ‘목사님, 이것이 저의 죄입니다’라고 쓰시고 감사헌금 올리시기 바랍니다. 물론 내는 사람도 없지만. 그걸 예전에는 미처 몰랐지요. 감사헌금이 영광된다고 생각하지, 내 기쁨이 곧 주의 기쁨이라고 생각하지, 내 기쁨이 주의 슬픔인 것을 상상도 못 하지요.
주님의 기쁨은 하나밖에 없어요. “네 죄를 알지?” 그거면 돼요.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내가 지은 죄를 이야기하는 게 아닙니다. 내가 안 지었고 우리 조상님이 지은 죄를 우리가 지금 계속 밟아 가는 거예요. 찾아가는 겁니다. 신나죠. 신나. 놀이동산에 보면 중간에 연결 되서 뺑뺑이 도는 기구 있잖아요. 하늘을 뱅뱅 날아도 괜찮아요. 중간에 다 묶여 있잖아요. 묶여 있기때문에 더 타도 괜찮고 더 위로 올라가도 괜찮고. 결국 그 묶여 있는 것을 못 벗어나는 것을 아니까요.
약속의 땅에 심어놓은 사람은 도화지에 모양새를 그려놓고 주께서 수직으로 올렸는데 그것이 남과 비교할 필요 없이 똑같은 종이라는 재료라는 겁니다. 재료가 똑같아요. 전부 다 죄인이라는 점에서, 아담의 죄 안에 있다는 점에서 똑같은 재료입니다. 중요한 것은 네가 가짜인지 진짜 착각한 건지 어떻게 아느냐면 무엇을 증거 하는 지가 중요해요.
성령이 임하면 네가 땅끝까지 예수님 증인 되는 거예요. 하나님의 비밀은 하나님 이야기 아닙니다. 예수님 이야기가 하나님 비밀이에요. 창세 전의 비밀은 예수 이야기예요. 예수님은 십자가로 우리에게 나타났습니다. 그러면 우리 안에 뭐가 있느냐. 주님의 십자가 꽂혀 있으면 우리는 그야말로 막살면 되는 거예요. 막살기. 공격하지 말고 가드 내리고 그냥 막살기만 하면 되는 거예요.
왜? 어차피 의인은 안 나오기 때문에. 의인은 안 나오기 때문에. 그동안 의가 나와서 자기 방어한다고 애쓰고 수고들 했습니까. 그게 행복을 원하는 사람들에게 도리어 불행이었습니다. 내 자식 이렇게 잘 키웠다. 우리 손녀 이렇게 이쁘다. 막 자랑하고 싶어서 온 동네 다 이야기하고 다니고. 휴대폰 다 뒤지고. 그게 이미 죽은 어떤 자에게는 의미 없지만 우리는 그걸 합시다. 왜? 그게 죄기 때문에. 설교가 이상하게 끝나 버렸죠. 우리는 할 수밖에 없다는 말로 제가 결론을 대신하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어쩔 수 없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잘난 사람 천당 가는 것이 아니고 천하의 죄인을 구원했기에 죄인 행세를 할 수밖에 없음을 도리어 주께 십자가를 통해서 감사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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