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519우리교회 오후설교 민수기 35장 9-15절(도피성) -오용익 목사-
하나님 말씀 보겠습니다. 민수기 35장 9절부터 15절까지입니다. 제가 읽겠습니다.
9절, 여호와께서 또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10절,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그들에게 이르라 너희가 요단을 건너 가나안 땅에 들어가거든
11절, 너희를 위하여 성읍을 도피성으로 정하여 그릇 살인한 자로 그리로 피하게 하라
12절, 이는 너희가 보수할 자에게서 도피하는 성을 삼아 살인자가 회중 앞에 서서 판결을 받기까지 죽지 않게 하기 위함이니라
13절, 너희가 줄 성읍 중에 여섯으로 도피성이 되게 하되
14절, 세 성읍은 요단 이편에서 주고 세 성읍은 가나안 땅에서 주어 도피성이 되게 하라
15절, 이 여섯 성읍은 이스라엘 자손과 타국인과 이스라엘 중에 우거하는 자의 도피성이 되리니 무릇 그릇 살인한 자가 그리로 도피할 수 있으리라
사람들이 무슨 일을 하다가 잘못되면 하나님을 대뜸 원망하기 쉽습니다. “내가 이렇게 최선을 다했는데 하나님이 나를 안 도와주신다.” 이렇게 말하기가 쉽습니다. 설교하는 저도 늘 마찬가지입니다. “열심히 한 것 같은데 잘 안 되면 하나님이 날 왜 안 도와주나?” 그렇게 했던 생각이 듭니다. 그것은 자기 일방적인 생각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자기가 일방적으로 이렇게 정해놓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최선을 다한 사람을 도와주신다. 내가 최선을 다하면 하나님이 도와주신다. 그렇게 자기가 일방적으로 미리 하나님의 뜻을 정해놓았기 때문에 이게 문제인 것입니다.
오늘 성경에서 우리가 읽은 이 도피성이라고 하는 것은 약속의 땅에 있는 도피성입니다.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은요, 약속의 땅에 있는 하나님의 뜻은 다르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뜻이 시중에 유통되고 있는 그 뜻과, 여기 성경 약속 안에 계신, 이스라엘에게 약속을 주신, 그리고 거기에 함께 계시는 하나님의 뜻이 어떻게 다른지, 그걸 설명하기 위한 제도가 이 도피성제도입니다.
도피성제도의 시작은 이렇게 됩니다. 어떤 사람이 나무를 한다든지 하다가, 여기 “그릇”이라고 하는 것은 의도성이 없이, 라는 그런 뜻입니다. 신명기 4장에 41-42절에도 나오지만, 그릇하여 죽였다, 한국말로 보면 잘못해서 죽였다, 라는 그런 것이 아니고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이렇게 죽였다. 그런 뜻입니다. 도끼질을 하다가 도끼날이 빠져서 사람이 죽었다든지, 이렇게 발생한 그런 살인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시작한다는 것이 무슨 말일까요? 하나님은 처음부터 사람이 잘했는지, 잘못했는지 자체를 애초부터 볼 마음이 없으시다는 겁니다. 니가 뭘 행했는지, 니가 뭘 잘했는지 또는 니가 뭘 잘못했는지, 니가 뭘..., 그런 것을 아예 하나님은 볼 마음이 없으시다는 것입니다. 도피성 제도의 핵심은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시작하신 것입니다. 우발성으로 살인자가 발생하면 이 살인자는 어디에 가서 피하느냐 하면은 도피성에 가서 피하는 것입니다.
들어갔다가 나오는 거기에 도피성 제도의 핵심이 있습니다. 들어갈 때에는 제사장이 살아있을 때까지 그냥 살고요. 나올 때, 언제 나오느냐 하면은 대제사장이 죽기까지 거기에 살다가 대제사장이 거기서 죽으면 그 시점에 밖으로 나오는 겁니다.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은 그 나올 때 그 사람에게는 그전에 없던 새로운 공간, 새로운 영역이 생긴 채로 밖에 나온다는 것입니다.
어떤 영역이 생기느냐 하면은요, 바로 대제사장의 희생 안이라는 새로운 영역이 생겨서 그냥 멀건이 돌아다니는 것 같아도 그 사람은 어디에 가나 어디서 무엇을 하나 그 희생 안에서 돌아다니는 것이 되는 겁니다. 죽음의 혜택 안에서 돌아다니는 것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여기서 비로소 산다는 것이 뭐냐 하는 새로운 개념이 생겨나는 겁니다. 그 전에 산다는 것은 뭐였어요? 최선을 다해서 사는 그게 사는 것이었죠.
그런데 여기서는 산다는 것이 이렇게 되는 겁니다. 여기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게 하나가 있는데요, 만약에 도피성에서 대제사장이 죽기 전에 나오잖아요. 그러면 “죽여라! 죽여라!” 이게 성경의 앞뒤로 빽빽하게 들어있습니다. “죽여라! 죽여라!” 그러니까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 안에서 새로 생겨난 산다의 개념은 이렇게 되는 겁니다. 진작 죽었어야 되는데 살았다. 대제사장의 죽음 때문에. 진작 없어졌어야 맞는데 지금 살았다. 대제사장의 죽음 때문에. 이렇게 되는 겁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뭘 잘했는지 뭘 잘못했는지 그걸 묻는 것이 아니고요. 지금 니가 은혜가운데 있는데, 그 은혜, 그 삶, 그게 누구 덕에 사느냐를 묻는 겁니다. 누구 덕에 사는지. 어쭙잖게 우리의 행함을 주님의 행함과 견주지 말아야 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늘 내가 잘해서 산다는 것 때문에 은혜가 어디서 오는지 늘 놓칩니다. 주님의 희생 덕분에 산다는 것을 늘 잊지 않는 저희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