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오후설교

자기를 미워하라(요12;20-26) 190519 정석훈

아빠와 함께 2019. 5. 25. 08:22
2019-05-24 22:12:54조회 : 18         
20190512우리교회 오후설교 요한복음12장 20-26절(자기를 미워하라) -정석훈 목사-이름 : 이미아 (IP:122.43.170.138)

20190512우리교회 오후설교 요한복음12장 20-26절(자기를 미워하라) -정석훈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요한복음 12장 20절에서 26절 말씀입니다. 제가 읽어드리겠습니다.

 

20절, 명절에 예배하러 올라온 사람 중에 헬라인 몇이 있는데

21절, 저희가 갈릴리 벳새다 사람 빌립에게 가서 청하여 가로되 선생이여 우리가 예수를 뵈옵고자 하나이다 하니

22절, 빌립이 안드레에게 가서 말하고 안드레와 빌립이 예수께 가서 여짜온대

23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24절,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25절,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

26절,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저를 귀히 여기시리라

 

예수님께서 명절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는 중에 헬라인 몇이 예수님을 뵙고자 합니다. 이 사람들은 헬라인이지만 아마 어쩌면 유대교로 개종했을지도 모르겠죠. 예수님을 뵙고자하는데, 그 이유가 성경에 나오지 않습니다. 뵙고자 할 때는 뭔가 예수님을 믿고자 한다든지, 그 목적이 성경에 이렇게 드러나면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참 좋은데, 그냥 뵙고자 한다. 그러면 우리는 추론하죠. 아, 예수님을 찾아뵙고 예수님을 믿고자 하는 이런 마음으로 예수님을 뵙고자 했지 않느냐? 라고 우리들이 생각할 수 있지만, 성경은 그런 것을 기록하지 않습니다.

 

기록하지 않고, 이들이 예수님을 뵙고자 요청할 때, 예수님께서는 “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라고 이렇게 답변을 하시는 거예요. 우리들의 관심은 사람에게 관심이 있거든요. 나에게 관심 있고. 그런데 헬라인 몇이 뭐 유월절 날 성지순례 왔는지 모르겠지만, 하나님께 보이려고 왔는지 모르겠지만, 예수님을 뵙고자 할 때 예수님께서는 그 헬라인 몇이 예수님을 찾아뵙고자 하는 것을 무엇과 연결시키느냐 하면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과 연결시킵니다. 그것이 바로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인자가 영광을 얻는다는 것은 우리들이 잘 아시다시피 부활이 아니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이죠. 그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분이 주가 되셔서 그 주님 되신 분이, 이 헬라인, 이방인조차도 구원하는, 유대인들뿐만 아니라 이방인들도 십자가로 그들을 다 뭉개버립니다. 유대인이 되었든 이방인이 되었든. 이건 구약에 약속된 것이죠. 그래서 십자가를 위해서 주께서 자기 주되심을 증거 하기 위한 도구로써 헬라인 몇이 예수님을 뵙고자 하는 거예요. 역할을 하고 있는 거예요. 이게 희한한 일이 아닙니까?

 

우리는 보통 일을 할 때 이게 주의 일이다, 라고 생각하고 일을 하고 싶어 하잖아요. 인식하고 싶어 하고. 보통사람들은, 여러분은 안 그러시겠지만, 보통사람들은 목사가 하는 일은 주의 일이라고 생각하고 성도들이 하는 일은 주의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거든요. 우리는 안 그렇잖아요. 여러분들은. 그런데 성경은 그렇게 보지 않죠. 주의 일은 주님이 홀로 하시지, 거기에 우리가 뭔가 개입해서 주의 일을 하고 못하고 하는 그런 게 없단 말이에요. 중요한 것은 주께서 긍휼의 그릇으로 사용한다고 했을 때에, 그 사람이 하는 일이 주의 일이 되는 거예요.

 

헬라인이 구원 받았는지 안 받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성령 받은 자들의 움직임을 보면 자기들의 어떤 의도와 바람과 계획과 상관없이 주께서 그 사람들을 이렇게 사용을 하시죠. 십자가에 달린 주님이 예수님임을 증거 하는 도구로 사용을 합니다. 자,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24절에 보면,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이렇게 말씀을 하셨어요.

 

그러면 이 말씀은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다는 이 말씀과 연결시킨다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그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고 난 뒤에 많은 열매를 맺듯이, 이방인들도, 유대인들뿐만 아니라 주께서 택한 백성들을 많이 구원한다. 이런 식으로 예수님께서 말씀하고 있다는 것은 누구나 다 잘 알고 있죠. 근데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생각해야 할 것은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지는 이 이야기를 예수님께서 언급하는 목적이 있습니다.

 

목적이 무엇인고 하면 세상을 창조할 때 이 모든 피조물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그 영광 받으실 것을 증거 하기 위해서 만들어졌어요. 단순히 우리가 이 땅에서 밀을 뿌려가지고 그 밀이 썩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이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과학적 논리잖아요. 확인할 수 있는. 그런데 주님은 그렇게 보는 것이 아니라 이것은 십자가의 영광을 통한 자기 백성을 만드는 그 과정을 보여주기 위한 하나의 그림자라는 거예요. 그래서 이 역할이 끝나면 불태워버립니다.

 

제가 이 이야기를 언급하는 이유는 헬라인도 마찬가지고 뭐 제자들도 마찬가지고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그 예수님께서 만유의 주님이 되심을 증거 하기 위한 하나의 도구라는 것이죠. 그래서 이 세상조차도 불로 타기 위해 차곡차곡 마르고 있다는 거예요. 마른 장작처럼. 예수님이 자기 죽으심을 통해서 많은 열매를 맺는, 그 이야기를 말씀하시면서 그 다음에 우리가 생각해야 되는 것은 뭔가 진보되는 이야기가 나와야 되는데, 예수님께서 말끝을 확 꺾어버립니다.

 

어디로 꺾어버리느냐 하면은, 25절입니다.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 이건 분명히 예수님 자신의 생애를, 자신의 영을 받은 자, 그건 모르죠. 누군지. 그들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지금 하시는 말씀입니다. 이 이야기가, 제가 꺾었다고 하는 이유가 뭔고 하면은 구원받고자 하는 자들에게는 이 말씀이 굉장히 불편한 말씀이에요.

 

성경을 구원론으로 봐서, 나 복음 알았으니까, 나 진리 알았으니까, 나 십자가 알았으니까, 나 천국 백성 맞죠? 나 이렇게 살아도 천국 들어갈 수 있죠? 라고 하는 사람들은 이 말씀을 읽지 않습니다. 왜 안 읽느냐 하면은 소싯적에 많이 해봤잖아요. 내 행위를 가미시켜 봤거든요. 그 행위가 구원 얻는데 도움이 됩니까? 안 됩니까? 안 되잖아요. 십자가 피로 구원 얻는 것을 알기 때문에 이런 말씀 자체가 사실은 무용지물이 되어 버렸습니다.

 

제가 오전에 다락방이야기하고 뭐 신천지도 마찬가지고. 하나님의 교회도 마찬가지고. 어디가도 그들의 공통점은 성경말씀을 자기들이 필요한 것만 뽑아내고 나머지는 다 버리자는 논리에요. 우리는 안 그렇습니까? 행위가 들어가 있는 말씀은 다 버리고, 행위가 안 들어가 있는 말씀만 혹시 취하지 않느냐 이거에요. 그러면 그게 무슨 하나님의 말씀이에요?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다고 할 때에는 이 말씀의 일점일획이라도 다 살아서 십자가에 피 흘리신 예수그리스도의 주 되심을 증거 하는 말씀으로 지금 움직이고 있는데, 구원론 중심으로 있는 그들의 모습을 보게 되면 말씀들을 뺄 걸 다 빼버리죠.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많은 열매를 맺는 것은 내가 받아 들일만 합니다. 왜? 구원 얻는데 도움이 되기 때문에. 그런데 뒷부분의 말씀은 상당히 거북한 말씀이에요. 왜냐하면 시제가 현재로 되어 있거든요. 제가 한번 읽어드릴게요. 이렇게 되어 있거든요. 헬라어 본문에 보면.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현재에요. 현재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현재 잃고. 그 다음 뒷부분에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 이 세상에서 미워하는 것은 현재고 보존하는 것은 미래에요.

 

보통 교회에서는 이걸 가지고 어떻게 합니까? 여러분! 여러분이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주님이 어떻게 한다고요?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생명을 잃어버릴 것이고, 이 생명은 영생에 대한 생명이잖아요. 그리고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 얻도록 보호하니까, 여러분! 자기 생명을 미워하세요. 그러면 영생하도록 보존합니다. 이게 보통 일반교회에서 하는 이야기잖아요.

 

근데 인간이 무슨 수로 자기 생명을 미워해요?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서 많은 열매를 맺었다면 이제 그 열매 속에 성도가 담기잖아요. 담기면, 방금 이런 말씀이 필요할까요? 필요하지 않을까요?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로 죄용서 했잖아요. 죄용서 했으면 자기 생명을 미워하고,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이 과정, 이 과정이 필요합니까? 필요하지 않습니까? 사실 필요 없거든요. 구원론 입장에 들어가 보면. 그러니까 주님이 우리 구원하기 위해서 온 게 아니에요. 십자가의 피 공로를 온 세상에 퍼트리기 위해서 오셨어요. 온 우주에 십자가의 피 공로만을 자랑하도록 만들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거예요. 물론 그 중에 긍휼의 그릇이 있고 진노의 그릇이 있겠죠.

 

그래서 예수님께서 하신 이 말씀은 둘로 쪼개는 말씀이에요. 둘로 쪼개는 말씀. 만일 앞에 말씀을 갖고, 아, 예수님이 한 알의 밀로 땅에 떨어져서 죽으셔서 그 십자가의 피 공로로 구원 받았으니까, 나 괜찮죠? 라고 하는 자는 그 뒤에 보면 그 말씀에 걸려버리죠. 벌써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입니다. 영생하도록 보존을 못해요. 그러면 반대로 나는 내 생명을 미워했습니다, 라고 하는 사람이 있다고 칩시다. 여러분은 생명을 미워합니까? 사랑합니까? 저는 설교할 때 늘 질문을 하거든요.

 

미워한다고 쳐봅시다. 자기 생명이 밉죠. 그렇죠. 미워하면 십자가가 필요 없습니다. 아니, 나는 나를 벌써 부인하고 있는데 십자가가 왜 필요해요? 예수님의 말씀은 십자가 안에 가두기 위한 것입니다. 자기 백성에 대해서. 이 성경에 보면 ‘십자가 안에서’라는 표현을 보기 힘들잖아요. 혹시 보셨어요? 십자가 안이라는 것을. 성경에 보신 분이 있습니까? 없는 것 같죠. 에베소서에 있습니다. 헬라어 성경을 보면 ‘엔en'이라고 나와 있어요. 십자가 안에서. 십자가 안에 자기 백성. 한 알의 밀이 떨어져 썩어서 죽으심을 당해서 맺은 열매를 어디에 집어넣는고 하면 십자가 안에 집어넣어버려요.

 

십자가 안에 집어넣어버리면 어떤 상황이 발생되는고 하면 그 외부는 피만을 자랑하도록 할 수밖에 없는 그러한 어떤 것들로 내부가 가득 차게 되죠.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뭔가 자기 구원을 챙기고 영생을 챙기려고 하는 자들은 이 말씀에 다 걸려 넘어지게 만들어버립니다. 우리는 이 말씀에서 못 벗어나요.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보존하고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린다는 이 두 가지 말씀 속에 우리는 곡예를 탄다고 할까요? 같이 있는 거예요. 같이.

 

언제 그러면 이 말씀은 이루어지느냐, 성취되느냐 했을 때는, 분명히 사도바울의 경우에는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경우가 있었죠. 맞죠. 미워하는 경우가 어떻게 발생했느냐를 들어가 보면 그 말씀은 예수님의 말씀의 성취입니다. 성령을 주셨기 때문에 자기 생명을 미워했어요. 그러니까 자기 생명을 미워한 본인 자신은 부인이 되죠. “내 생명을 미워했으니까 나는 구원 얻었어. 나는 복음 알아.” 이게 아니라 나는 내 생명을 미워한 그 원인이 십자가 지신 그분이 그렇게 하게 하셨다는 자기 부인이 이루어짐과 동시에 이게 시간이라는 속에 살잖아요. 이미 우리는. 여전히 시간 속에 살거든요. 주께서 완성하셨지만.

 

그 시간 속에 살면서 시간이 지나면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것이 어떻게 바꿔치기 당하느냐 하면은 또 그게 의롭다고 바꿔치기를 당합니다. 바꿔치기 당하면서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로 바꿔져버려요. 어느 순간. 그리고 또 말씀에 해당되죠.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지옥가도 마땅하다. 아니 이렇게 가든 저렇게 가든 지옥가도 마땅한, 십자가 지신 주님이 홀로 다 했다는 이 결론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성경 자체가. 이게 막사는 거예요.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것도 막사는 것이고,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것도 막사는 거예요. 구약과 신약의 차이가 있습니다. 구약의 막사는 것은 율법대로 안 지키는 것이 막사는 것이었어요. 구약을 보게 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망한 이유는 율법을 지키지 않고 우상숭배 하죠. 그야말로 망나니처럼 막사는 인생이죠. 그래서 그들은 멸망당했습니다. 사실은 그들의 모습이 누구의 모습인고 하면 이방인의 모습이죠.

 

우상숭배를 왜 했습니까? 이방나라를 보니까, 이야! 우상숭배를 하고도 우리보다도 훨씬 강력한 힘과 권세와 영광을 누리더라. 그래서 우상숭배를 한 거 아닙니까? 그래서 망했어요. 그런데 그 과거역사를 누가 알고 있는가 하면 유대인들이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구약역사를 알고 있어요. 아, 예, 성경을 보니까, 역사를 보니까, 계시죠. 그걸 보니까 우리가 망한 이유는 말씀대로 살지 않아서였더라. 그때부터 그들은 죽자 사자 말씀을 지키죠.

 

이 빌립보 3장에 보면 바울이 이야기를 하잖아요.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고 베냐민 지파고 난지 팔일 만에 할례를 받았고. 여기서 우리가 유심히 봐야 되는 것은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다는 거예요. 이거 감히 말을 못하죠. 예수님께 온 그 부자청년도 어릴 때부터 십계명을 다 지켰다고 할 때에, 우리는 아마 “뭐 웃기고 자빠졌네. 뭘 어릴 때부터 지켰어?”라고 하겠지만, 아닙니다. 지켰다니까요. 에이, 목사님 그건 아니지 않습니까? 그게 아닌 게 아니라니까요. 바리새인을 너무 얕잡아보면 안 됩니다.

 

바리새인 때 예수님께서 죽으셨다는 것은 인간의 의가 가장 극에 달했다는 겁니다. 인간의 의가 그 이상이 안 나옵니다. 아니, 목사님 안 지켰잖아요? 그건 우리 입장이고요. 그들에게 물어보면 지켰다니까요. 어떻게 지켰습니까? 율법을 어떻게 지키는지 그 조항들을 만들어가지고 그렇게 사는 거예요. 인간은 그럴 수밖에 없거든요.

 

예수를 믿습니다, 라고 할 때에, 아까도 누가 질문을 했잖아요. 십자가를 믿는다고 할 때에 어떻게 믿는지 설명을 해보라고 하세요. 아마 여기에 몇 십 명이 앉아있지만, 이야기하라고 하면 다 다른 이야기를 할 거예요. 그런데 그 다른 이야기를 다 끌어 모아서 지킨다고 하는 것을 한번 생각해보세요. 그럼 그거 의롭지 않겠습니까?

 

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구약을 연구를 했죠. 구약에 약속은 있고, 메시야가 약속이 되어 있고, 그 메시아를 맞이할 방법은 율법대로 살면 그 메시아가 와서 자기들을 환영해서 메시아 왕국을 건립해서 이 세계 열방 중에 뛰어난 유대국가가 되어서 모든 열국들이 자기들께로 경배하러 온다. 예수님께서는 정반대로 해석을 하지만. 그렇게 생각을 한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을 그들은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 버렸습니다.

 

예수님을 죽인 요인이 두 가지가 생겼죠. 하나는 무엇인고 하면, 하나는 율법대로 살지 않아서, 이것은 헤롯왕 계통이죠. 본디오빌라도 계통이고. 그런 자들은 율법대로 살지 않는 입장에서 예수님이 싫었고. 반대로 바리새인과 그 서기관들의 입장에서는 말씀대로 살았기 때문에 예수님이 싫은 거예요. 이 두요소가 합쳐진 자리가 십자가 자리입니다.

 

인간은요, 두 가지의 본성이 고스란히 담겨있어요. 자기가 신이기 때문에 지 맘대로 살고자 하는, 하나님이 주신 법, 율법 없이 살고자 하는 그 욕망이 꿈틀꿈틀거리고, 동시에 그 욕망이 새롭게 변신을 하는 거예요. 그 변신하는 과정이 하나님이 법을 주면 그걸 지켜내겠다는 것이죠. 이 두 가지가 예수님을 죽인 원인이죠.

 

그래서 교회 오면, 우리가 교회 오면 무엇이 하나님을 섬기는 예라고 표현을 합니까? 말씀대로 사는 것이, 율법대로 사는 것이, 주님을 경외하는 것이고 섬기는 것이다. 이렇게 우리가 어릴 때부터 교회 다닌 사람들은 배워왔단 말이에요. 그럼 그것만 십자가의 원수 짓입니까? 그거 안 하는 것은 십자가의 원수 짓이 아니에요? 성경에는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했는데, 기도하는 것은 나쁜 짓이고 기도 안 하는 것은 의로운 짓입니까?

 

제가 우리 교인들한테 그러거든요.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그럼 대개 어떤 사람은 기분 나빠해요. 아니, 말씀인데 왜 말씀 안 듣느냐고. 아니, 왜 기도합니까? 제가 그런 이야기하면서 물었어요. 여러분, 평소에 살면서 바라는 것 없습니까? 바라는 것 없어요? 차를 타기만 해도 좀 빨리 왔으면 좋겠다, 라고 기도하고 앉아 있잖아요. 지금 누구를 위해서 기도합니까? 자기를 위해서 기도하면서 기도 안 한 대요. 기도 안 하는 것이 의로운 것이라고 생전 처음 들었어요.

 

십자가 앞에서 죄로 드러나는 것이 의로운 것이지, 어떻게 기도 안 하는 것이 의롭고 말씀 안 보는 것을 또 자랑스럽게 여기는지. 복 있는 자는 말씀을 주야로 묵상한다고 했는데, 에이, 목사님 그거 구약인데요? 구약. 아예 찢어버리세요. 말씀을. 왜 말씀을 주야로 묵상합니까? 그 십자가의 사랑의 넓이와 높이와 길이와 깊이를 알아가게 하기 위해서 말씀을 주신 거잖아요. 그 말씀은 그냥 언어입니까? 인간들은 언어라고 생각하잖아요. 언어가 아니에요. 십자가 지신 그분이 성령을 주셔서 기록한, 그리스도의 영을 받은 사람이 기록한 말씀입니다.

 

그래서 일점일획이라도 이게 빼지 말라는 이야기에요. 그 모든 말씀 속에 십자가의 피 공로를 자랑하기 위한 요소들이 담겨있다는 겁니다. 이 세상에서 모든 게 결판이 난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고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

 

근데 제가 아까 설명을 드렸는데, 빨리 말씀드려서 다시 말씀드리면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리는데, 이 잃어버리는 시제가 언제인고 하면 현재에요. 성경이 진짜 희한합니다. 아니, 목사님 헬라어가지고 그거 장난치지 마세요. 장난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이 보이지 않는 세계를 보이는 세계에서 언어를 통해서 말씀하고 계시거든요. 우리 죽어서 천국과 지옥이 결정이 됩니까? 아니잖아요. 이 세상에서 결정되잖아요.

 

지옥 간 부자 한번 보세요. 지상에서의 사고방식이 지옥에 가서도 똑같은 사고방식을 갖고 있잖아요. 얼마나 자기 생명을 사랑합니까? 사실은 이 말씀은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해당사항이 없는 말씀이에요. 왜냐하면 믿지 않는 자들에게 이 이야기를 백날 이야기해도 아무 소용이 없죠. 그러면 믿는 자들에게 이 말씀이 해당사항이 있는 말씀이잖아요. 그런데 믿는 자들이 이런 말씀을 읽을 때 어떤 식으로 읽느냐 이게 중요하거든요. “에이, 저 사람들은, 믿지 않는 사람들은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야. 그러니까 저 사람은 영생을 못 얻을 거야.” 이런 이야기를 하라고 이 말씀을 주신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자기 백성, 주께서 십자가의 피로 만든 자기 백성의 삶이죠. 삶. 달리 말하면 행동입니다. 행위. 이 행동 속에서 끄집어내고자 하는 바가 있어요. 십자가의 피공로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주신 거예요. 인간은 이미 정보라는, 선악을 아는 지식이 있기 때문에 이 말씀을 읽게 되면 아무리 복음을 알아도, 뭔가 모른다 하더라도 이 말씀에 대한 해석이 되기 시작하고 그 해석이 내가 어떻게 살아야 된다, 라는 것까지에도 영향을 미치게 되어 있어요.

 

읽으면 무시하든지, 안 그러면 이 말씀대로 살려고 하든지, 말씀을 찢어버리지 않는 이상은 이 말씀과 동행하게 되겠죠. 그렇게 되면 우리는 이 말씀 앞에서 죄인으로 드러날 수밖에 없습니다. 이 말씀이 왜 중요한가 하면은요, 현재라는 말을 했잖아요. 이 이야기가 뭔고 하면은 인간은 선악을 아는 지식을 알게 되었거든요. 그래서 인간은 무슨 사고방식으로 자리 잡고 있느냐 하면은 아는 것이 진리라고 생각해요. 아는 것이. 1년 전에 배운 것이 나한테 영생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과연 그럴까요?

 

그래서 제가 오전에 설교시간에 말씀드렸잖아요. 풍랑에서 건짐을 받아도 소용이 없어요. 군대귀신이 쫓겨나는 것을 봐도 소용이 없어요. 열두 해 혈루증 병에 걸린 그 여자가 깨끗하게 낫는 것을 목격해도 소용없습니다. 야이로의 딸이 살림을 받아도 소용이 없어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살려놓고 뭐라고 합니까? 쉿! 명령을 내립니다. 말하지 말라! 에요. 성경이 희한하죠. 그 앞부분에서 군대귀신이 들린 자는 집에 가서 일일이 다 이야기하라고 해요. 그리고 열두 해 혈루증 걸린 여자는 못 가게 붙들어서 모든 사람에게 이야기를 다 하게 하고. 왜 이 야이로의 딸을 살린 것은 왜 이야기 못하게 합니까?

 

증거 하게 하시고 안 하게 하시고, 이 일도 주님께서 하시는 일이고. 동시에 증거 해서 복음을 들을 자와 듣지 못하게 하는 자도 주님께서 알아서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사건을 보면, 여러분이 이 사건을 다 들었잖아요. 그러면 여러분은 어디를 취하고 싶습니까? 모든 사람 앞에서 받은 은혜, 이 십자가복음을 외치고 싶습니까? 안 그러면 예수님의 명령에 의해서 “이거 이야기해도 못 알아들으니까 이야기하지 마!” 그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까? 지금 그것 때문에 이 사건에서 그 이야기를 해놓은 거예요.

 

자기를 위한 구원을 받은 자들은 주께서 증인 세우기 위해서 불렀다는 것을 개무시해버립니다. 그래서 어디로 가는고 하면 집으로 가죠. 집으로, 라는 것이 누가복음 8장에 나와요. 집으로 가라. 근데 그 집이 어떤 집인고 하면 동네를 지나다니면서 예수님께서 자기가 행하신 일을 낱낱이 고하는 집이에요. 왜 예수님께서 말씀하실 때 이 세상을 표현을 했는고 하면은 이 세상이라는 자체가 어두움이에요. 어두움. 어두움이라는 세력은 가만히 있는 세력이 아닙니다.

 

언제 어두움이 발악을 하는고 하면은 십자가의 피 공로를 이렇게 외부로 표출할 때 발악을 해요. 핍박을 면하려면 이 세상에서 말 안 하면 돼요. 복음이야기 안 하면 돼요. 자기 몸속에 가만히 담아두기만 하면 돼요. 담아두기만 하면. 담아서 뭘 하면 되는가 하면은 성불하면 돼요. 성불. ‘날마다 죄인임을 알아, 죄인임을 깨달아, 그러면 핍박이라는 것은 없어.’ 근데 성경에 보면 이 두 가지의 요소가 동시에 있죠. 사도바울을 보게 되면 자기 내부에서 싸움이 일어나서 자기가 완전히 무너지는데, 그 무너진 내용이 외부로 표출되기 시작해요.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다. 표출하니까, 이 내부싸움이 외부싸움으로 그대로 연쇄적으로 일어나는 그런 사건들이 발생하는 거예요. 사람들이 자기 생명을 미워하고 사랑하는 이 개념이, 아까도 그런 이야기를 했지만, 이 복음은 목사들한테는 정말 싫은 복음이에요. 이 십자가복음은. 근데 교인들한테는 이 십자가복음이 되게 좋아요. 목사들은 이 십자가복음을 외치면 모든 것을 잃게 되어 있어요. 친구를 다 잃어버립니다.

 

왜냐하면 이 목사 친구는 대부분 대학원에서 형성된 친구들이거든요. 근데 이 복음을 외치면 친구들 다 잃어버려요. 뭐 까지 잃어버리느냐 하면 생존여건까지도 다 잃어버려요.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대학원까지 다 나와서 라이센스를 땄는데, 그 라이센스를 써먹을 자리가 없어요. 그래서 이 신학생들이 복음을 들으면 다 도망가잖아요. 별로 안 남아있습니다.

 

근데 교인들은 잃을 게 없어요. 왜? 복음을 들으니까 잃을 게 없죠. 평소에 그렇게 살았으니까. 이제는 어쩌면 더 핍박을 안 받아도 되고, 더 봉사를 안 해도 되고, 더 기도를 안 해도 되고, 모이기를 힘 안 써도 되고. 자기 생명을 사랑하고 미워한다는 이 말씀에서 벗어날 인간 아무도 없습니다.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니까, 지가 목사니까 그렇게 이야기한다고 하지만, 그런 이야기가 아니고요. 목사가 되었든, 누가 되었든, 이 말씀에서 못 벗어나요. 못 벗어난다고 할 때에는 “나 안다.”라고 나오면 안 돼요. 이 말씀 속에 휘말리는 겁니다. 성도는.

 

안다, 라고 하는 것은 관념화되어 버리죠. 근데 사건이라는 것은 실제 사건 속에서 일어나죠. 사건 하나하나 속에서 주께서, 성령께서 역사하시면 조금의 사건조차도 나를 사랑하는구나. 조금의 사건조차도 나를 미워하도록 주께서 역사하셨구나. 그것을 주께서 알게 하시죠. 이 말씀에서 어떻게 벗어납니까? 성도가. 근데 관념화되어버리면 “나 그거 알아!”가 되니까 이 말씀을 떠나버리죠.

 

26절,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저를 귀히 여기시리라” 이 나를 섬긴다는 말은 종이 된다는 것이거든요. 이것도 현재고, 나를 따르라는 이것도 현재입니다. 예수님을 섬기려면 예수님을 따라야 됩니다. 그 따르는 길이 어느 길이에요? 십자가의 길이죠. 이 말씀을 묵상하게 되면 내가 마귀새끼라는 것이 들통 나지 않을 수가 없어요. 어느 누가 예수님을 섬기면서 예수님을 따르겠습니까?

 

그런데 주님은 이 들통 난 그를 어떻게 사용하느냐 하면은 주님이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로 끌고 가버리셔요. 들통 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들통 나는 것으로 끝나버리면 고난이 없어요. 이 세상에서 미움이라는 자체가 생기지 않습니다. 사도바울에게 예수님께서 찾아오셔서 자기가 들통 났죠. 자기가 바로 군대귀신 들린 자. 정말 악령에 씌인 자로 확 들통 났잖아요. 들통 나니까 주님이 들통 난 인간을 끌고 다니기 시작하죠. 들통 나게 하신 목적이 뭡니까? 십자가의 피를 증거 하기 위한 들통 냄이죠. 그래서 끌고 다니면서 십자가를 증거 하게 하죠.

 

누구를? 죄인 괴수를 끌고 다니면서 증거 하게 하니까, 이 땅에서 어떤 일이 발생하는고 하면은 예수님께서 당했던 그 십자가사건, 그 고난사건을 그대로 반복하게 되어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볼 때는 그냥 사도바울이 매 맞는 것이었고 미움 받는 것이었는데, 주님이 보시기에는 그 미움 받고 매 맞는 것이 예수님을 미워했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으로 주님이 간주하신다는 사실이에요. 독특합니다. 구조가.

 

그래서 주님은 자기 백성의 그 행동 있죠. 삶의 여정, 그 과정 속에서 십자가사건을 반복시키고 있다는 사실이에요. 반드시 주님은 우리의 몸을 그 자리에 집어넣어버립니다. 집어넣어서 어떻게? 주님이 이 땅에서 살았던 그 공생애의 생애를 그대로 반복하게 하는 거예요. 우리가 느낄 수도 있고 못 느낄 수도 있어요. 그건. 느끼려고 자꾸 하는 것이 문제죠.

 

그러나 어쨌든 주님께서는 자기 이름을 위해서 자기의 피로 구원한 자기 때문에, 자기 이름으로 구원한 그 자는 자신의 인생으로, 구원받은 자 인생으로 사는 인생이 아니라 구원받은 분의 인생으로 살게 한 인생으로 계속해서 바꿔치기 하는 그 여정 속에 집어넣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악마는 계속해서 우리를 고정시키려고 합니다. 제가 오전에 ‘멋진 신세계’ 책이야기를 했는데, 멋진 신세계가 왜 만들어졌는고 하면은 그 총통조차도, 뭐 그런 이야기가, 소설이 있는데, 그 총통조차도 이 인간적인 세계를 알아요. 그런데 인간 본능이 무엇을 요구하느냐 하면은 안정을 요구해요. 안정을. 안정적인 사회, 안정적인 가정. 애가 공부를 하다가 내려가면 온 집안이 초상집 같은, 저희 집만 그런가 모르겠네요. 아니, 그렇잖아요. 인간들은 그런 안정을 원하거든요.

 

구원파가 왜 먹힙니까? 그 안정권속에 넣어주거든요. 근데 주의 말씀은 안정권속에 안 넣어줘요. 이게 독특합니다. 이단의 특징은 뭐냐 하면은 안정권속에 집어넣어서 더 이상 나는 변화하지 않아. 나는 무슨 일이 와도, 환난이나 위험이나 기근이나 적신이 와도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가 없어. 그런 즐거움으로 살아요. 근데 그런 사람에게 환난 줘보세요. 믿음 다 날아갑니다. 그 말씀의 의미는 환난 자체가 주께서 사랑하신다는 그 증거로서 주신 환난이에요. 주께서 겪게 하시는 환난이죠. 위험이나 칼도 마찬가지고.

 

성도를 보면, 오전에도 그런 이야기를 했지만, 그냥 풍랑이 이는 대로 그냥 사는 거예요. 왜냐하면 십자가 지신 분이 다 이루었잖아요. 그러면 얼마나 즐겁습니까? 사는 게. 아까 기도제목이 가라하면 가고 오라하면 오고. 뭐 잴 게 뭐가 있어요? 아, 이거 십자가를 전할지 말지, 그건 우리가 몰라도 돼요. 십자가를 전한 거니까 이건 내가 해야지. 교회 밥하는 것은 성도를 사랑하는 거야. 성도를 사랑 안 해도 밥해도 돼요. 우리는 뭔가 자기가 결정해서 하려고 한다 이 말이죠. 계속해서 생각해서. 자기가 신이에요. 신.

 

교회오고 싶어서 오신 분이 지금 몇 명 되는지 모르겠어요. 주일만 되면 복음이 듣고 싶어서 미쳐가지고 빨리 화장하고 한 열시쯤 돼가지고 와가지고, 정말 복음 듣고 싶어서 온 그 간절함으로, 근데 그렇게 안 와도 돼요. 또 그렇게 오셔도 돼요. 주님이 살아계시잖아요. 왜 우리의 행동을 갖고 주님의 십자가의 피로 일하시는 일들을 부인하려고 하느냐, 이 이야기입니다.

 

26절,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이렇게 이야기하니까, “골로새서에 나오는 하나님의 우편의 자리가 거기에 있으니까 예수님을 섬겨야지.” 그런데 그 자리가, 그 자리로 가기 전에 이 땅에서는 십자가 안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리스도 안. 그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이 사도행전에 수두룩하게 나오는 거예요.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에 그야말로 그들은 자기 생명을 미워 안 하려고 하는데, 미워하는 상황으로 몰아가버리죠. 그게 은혜 받은 자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보면서 “주님을 섬기기위해서 주님께 가야지.” 이럴 필요가 없습니다. 이미 주께서 환경을 다 조성해놨어요. 거기에 우리는 끌려 다니면서 이 백부장의 고백을 하면 됩니다. “주께서 벌써 다 십자가를 증거 하기 위해서 이 상황을 살게 하셨네요.” 그러니 이 상황 속에서 그냥 사시면 돼요.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내가 말씀을 판단할 능력도 없고, 지킬 능력도 없고, 말씀이 우리 가운데 역사하셔서 그 말씀이 목표하는 바를 반드시 이루어내심을 말씀을 통해서 보았습니다. 주님, 우리의 삶이 이 말씀 속에 담겨있다는 사실을 늘 기억하게 하셔서 내가 주도권을 갖고 행세하는 인생이 아니라 주께서 이미 다 이루심속에 우리를 담았다는 사실을 늘 기억하며 무엇을 해도 이 십자가의 사랑을 증거 하는 그 삶임을 믿고 감사하는 인생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