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5강-여호수아 18장 11절(베냐민 땅)20190505-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여호수아 18장 11절입니다. 구약성경 347페이지입니다.
“베냐민 자손 지파를 위하여 그들의 가족대로 제비를 뽑았으니 그 제비 뽑은 땅의 경계는 유다 자손과 요셉 자손의 중간이라”
베냐민 지파는 인원수가 제일 작습니다. 시므온 지파가 인원수가 작고 그다음 지파가 베냐민 지파일 겁니다. 그런데 그 땅을 제비 뽑았는데 그 제비가 요셉 지파와 유다 지파 중간입니다. 중간이니까 자기 양쪽에 강하고 뭔가 유명세를 떠는 지파들 사이에 낀 존재가 되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열두 지파를 만들 때 똑같이 균등하게 피자 나누듯이 똑같이 나눈 것이 아니에요. 각자 맡은 역할에 따라서 좁은 땅을 가질 지파가 있고 넓은 땅을 가질 지파가 있습니다. 각 지파가 독자적으로 할 역할들이 부챗살처럼 필요한 적재적소에 끼어 있으면 부챗살을 활짝 펼 때 비로소 그게 이스라엘이 이스라엘의 가치를 드러내는 겁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이 누구의 이름이냐 하면 바로 장차 오실 예수님의 이름이 이스라엘이에요. 그럼 이스라엘의 하는 기능이라 하는 것은 예수님의 하시는 기능을 이스라엘 국가라는 형식을 통해서 미리 보여줬다고 보시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이 어떤 기능을 해야 하느냐는 것은 장차 예수님이 이 땅에서 무슨 일을 하셨는지와 관련이 되어 있지요.
예수님은 무슨 일을 하셨느냐 하면 죄인을 불러서 의인 되게 하셨습니다. 자기의 십자가의 피로 용서함으로써 의인 되게 하셨습니다. 죄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하나님과 합류할 수 없고 영원히 함께할 수 없고 죄인들은 거룩한 분과 함께할 수가 없습니다. 대표적인 예로 야곱은 절대로 하나님과 함께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천사를 보내서 야곱을 함께할 수 있는 사람으로 변화시키는데 그 변화된 증거를 대라고 하면 야곱의 이름이 야곱에서 이스라엘로 바뀌는 거예요. 이름이 바뀌는 거예요. 그 바뀐 이름이 놀랍게도 야곱 본인이 골라잡은 것이 아닙니다. 야곱의 원래 이름은 아버지가 지어줬겠지만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은 아버지가 지어준 것이 아니에요.
혈통이 지어준 이름이 아닙니다. 혈통을 초월하시는 분에 의해서 지어진 거예요. 그런 이름 하나쯤은 우리가 있어야 합니다. 그런 이름이. 사실은 그런 이름이 있습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다른 이름으로 구원받을 이름을 준 적이 없다”라고 사도행전에서 그렇게 하는 것은 “내가 너희를 구원하겠다” 뭐로? “이름으로 구원하겠다”라는 이 말이거든요.
이름으로 구원하겠다면 달랑 이름만? 아닙니다. 이름이 주어진다는 것은 그 이름, 주의 이름에 합당한 존재로 내가 책임지고 변화시켜서 이끌어내겠다는 겁니다. “너는 너의 이름이 있겠지만, 알기 쉽게 말해서 너는 육에 속하니까 야곱의 이름이겠지만 기어이 야곱 같은 김머시기, 야곱같은 이머시기 있겠지만 나는 전부 이스라엘로 통일시키겠다”라고 하시는 겁니다. 이 일을 주님께서 하시겠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렇게 하시겠다는 무슨 근거나 보장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라고 하신다면 하나님께서 이야기하시죠. “주의 이름을 불러라. 주의 이름이 바로 네가 합류할 분의 이름이고 곧 너의 이름이다”라고 하시는 겁니다. 주의 이름이 우리 자신의 이름이에요. 주의 이름 안에서 구원받거든요. 주의 이름으로 구원받는 거예요.
주의 이름이 우리를 변화시켜 주시는 겁니다. 무엇에 부합되도록? 주의 이름에 부합되도록 변화시켜 주는 거예요. 그래서 다시 한번 정리하면 예수님의 오신 이유가 뭐냐 하면 우리 인간의 육의 이름을 예수님 자신의 이름으로 자신의 품고 있는 영광과 모든 본질과 속성으로 품어주는 일을 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기존에 우리가 내 이름 가지고 내 자존감을 가지고 살아가면서 내가 품었던 것은 주의 이름에 의해서 사정없이 파쇄되고 깨어지는 겁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에 있어서 베냐민 지파가 해야 할 역할이 뭐냐 하면 이스라엘이 사라진다면 어떤 이유로 사라지는가를 보여주는 역할을 하는 겁니다.
사사기 21장 6절에 보면 “이스라엘 자손이 그 형제 베냐민을 위하여 뉘우쳐 가로되 오늘 이스라엘 중에 한 지파가 끊어졌도다”라고 되어있어요. 열두 지파인데 열한 지파가 되었어요. 하나가 끊어졌습니다. 이건 뭔가 징검다리를 건너는데 다리 하나가 끊어진 거예요. 대게 먹는데 제일 긴 다리가 없어진 거와 마찬가지죠.
이건 뭔가 온전한 이스라엘이 안 되는 겁니다. 나머지 열두 지파 가지고 대충하면 되는 거 아니냐고 할지도 모르는데, 아니에요. 각자 역할이 들어있기 때문에 숫자로 열하나를 열둘로 정렬할 수는 있습니다만 양의 문제가 아니고 질의 문제예요.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에 어떤 문제가 일어났는데 그 문제로 인하여 그 문제가 어떤 역할을 하느냐면 이런 경우에 더이상 이스라엘을 이스라엘로 볼 수 없다는 역할을 베냐민 지파가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기능을 하는 겁니다.
여기 신약에 오면 예수님의 버림받으심과 같다고 보시면 돼요. 하나님의 아들이고 메시아지만 죽임을 당하고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오히려 버림을 받는 기능을 예수님이 보여주는 것과 같은 거죠. 유다 지파와 요셉 지파는 열두 지파에서 가장 위세를 떨고 있는 가장 지역이 넓은 두 지파인데 그사이에 낀 존재, 일종의 경계선이라 할 수 있는데 베냐민 지파가 부여받은 지역은 경계선이 있는 지역이에요.
따라서 이 지역은 베냐민이 독자적으로 붙잡을 수 있는 땅이 아니고 변천하는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 한쪽에는 유다에 속하다가 한쪽에는 요셉에 속하다가 언제든지 한쪽에 흡수 통합될 수 있는 위치에 놓여 있습니다. 경계니까요. 경계선이니까. 북쪽 이스라엘과 남쪽 이스라엘로 나누어지는 여러분도 아시죠.
그때 베냐민 지파는 유다 지파에 속합니다. 북쪽 이스라엘에 속하지 않아요. 따라서 이름도 유다 나라와 베냐민 나라가 아니고 그냥 유다 나라예요. 있으나 마나가 되는 겁니다. 흡수 통합되어 버렸으니까요. 사무엘상 9장 21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사무엘에게 사울을 왕으로 삼으라고 할 때 21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사울이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이스라엘 지파의 가장 작은, 가장 작은 지파 베냐민 사람이 아니니이까 또 나의 가족은 베냐민 지파 모든 가족 중에 가장 미약하지 아니하니이까”라고 하는데 가장 작고 미약한 것이 사울 왕이에요.
백성들은 어떤 대단한 왕을 원했지만, 하나님께서 허락한 왕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데 뽑아 세워주시는 겁니다.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 이건 누가 봐도 대통령감도 아닌데 대통령 된 사람 여럿 있지요. 미국의 트럼프, 한국의 노무현, 부엉이바위 위에 올라가 사라진 사람, 상고 나왔다고 무시당하고 서울대 법대 출신 아니라고 무시당한 사람, 개천에서 용난 사례를 보여준 사람, “이쯤 하면 막가자는 이야기죠?”라고 해서 유명해진 사람, 그게 바로 사울 같은 입지죠.
그 모습과 입지가 마치 요한복음 7장에서 갈릴리에서 메시아 온다고 하니까 유대인들이, 소위 정권을 잡은 정권 친화력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그런 시시한 갈릴리에서 뭐 대단한 인물이 나오느냐?”라는 식으로 예수님을 개무시했잖아요. 바로 그러한 기능들이 육의 눈에 보이는 이 세계 속에 보이지 않는 사건들이 계속 터져 나오는 겁니다.
이걸 좀 어려운 말로 함축해서 말하면 원리가 서사가 된다는 공식입니다. 서사라 하는 것은 사건을 말하죠. 사태 또는 사건. 그런데 불쑥불쑥 터져 나오는 사건은 이게 우연처럼 보이지만 하나의 숨겨진 원리가 따로 있었고 그 원리에서 뭔가 돌발적인 우리가 예상 못 한 사건이 터져 나오는 거예요.
그래서 이스라엘 역사라 하는 것은 원리는 계속 숨어있고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사건이 이스라엘로 하여금 노선변경을 계속해서 유도해 나가는 겁니다. 설교 처음으로 다시 돌아가 봅시다. 우리는 육에 속한 이름을 가지고 있어요. 우리는 나름대로 내 살 궁리, 내 영역, 나는 이렇게 산다는 계획이 다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천국 갈 거라는 그런 거.
그런데 제가 분명히 이야기합니다만 하나님께서는 현재 이런 인간을 안 받습니다. 왜냐 하면 우리는 야곱에 속하기때문에 받지를 않아요. 받지를 않기 때문에 이것을 이스라엘로 바뀌게 해야 하는데 바뀔 때 예상 못 할 사태가 일어나는 겁니다. 그런 사태가 그냥 불쑥불쑥 일어나서 이거는 정형화되지 않지만 이게 오히려 원칙이 있어요.
이제부터 그 원칙을 설명하겠습니다. 그 원칙을 설명하는 예로써 저는 출애굽기 2장을 들겠습니다. 출애굽기 2장 11절에 보면 “모세가 장성한 후에 한번은 자기 형제들에게 나가서 그들이 고되게 노동하는 것을 보더니 어떤 애굽 사람이 한 히브리 사람 곧 자기 형제를 치는 것을 본지라”라고 되어있는데 잘 들어보세요. 이것과 베냐민 지파, 한 지파가 끊어진 것과 관련성이 있어요.
잘 들어보세요. “치는 것을 본지라, 좌우를 살펴 사람이 없음을 보고 그 애굽 사람을 쳐 죽여 모래 속에 감추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모세가 애굽적인 교육을 받았다고 볼 수 있지요. 모세가 애굽 공주의 아들이지만 히브리서 11장에 보면 믿음이 있었다고 되어있어요. 그러니까 이중국적자라고 볼 수 있어요. 사람들 보기에는 애굽 사람이지만 정신적으로는 히브리 사람이죠.
그게 쉬쉬하고 가만히 있으면 돼요. 다시 말해서 누가 봐도 우리는 안동 권씨, 경주 이씨, 우리는 육에 속한 대한민국에 있습니다. 그러나 잠복 되어있는 창세 전에 예정된 사람은 이게 그냥 육의 사람, 세상 사람으로 하나님이 방치하지 않습니다. 돌발적인 사태를 일으켜서 우리의 숨겨진 본색이 툭 튀어나오게 만들어 버렸어요.
그게 뭐냐 하면 어느 순간 모세가 하나님의 약속의 백성에 더 치중해서 살아간다는 겁니다. 모세가 자기 형제가 애굽 사람에게 억압을 받는 것을 봤어요. 구타하고 폭행했겠죠. 이것을 보고 참지 못해서 애굽 사람을 쳐 죽여서 묻어버렸습니다. 조폭도 이런 조폭이 없죠. 묻었을 때 이건 뭐 자기가 뿌듯한 정의로운 일을 했을 거라고 여겼죠.
그리고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일, 주의 일을 했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그러나 그는 무엇을 극복하지 못했느냐 하면 힘으로 남을 쳐서 굴복시키는 그 쾌감은 느꼈지만, 정말 자기 목숨마저 포기해야 한다는 것은 두렵고 겁이 나서 도망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교묘하게 모세로 하여금 좌우를 봤을 때 아무도 없었는데 거기에 산악지대 자가용에 블랙박스가 있었는지 골목에 CCTV가 있었는지 걸렸어요. 소문이 나서 이제는 버틸 수가 없습니다.
성경의 원리는 이겁니다. 육에 의한 CCTV에다 그 CCTV를 감싸는 CCTV, 두 개의 CCTV를 달아놨다고 성경 내용은 그렇게 보시면 되는 겁니다. 기존의 CCTV에서는 이 세상의 악이 이겨요. 마귀가 이깁니다. 세상이 이깁니다. 그리고 불신자가 이겨요. 그들이 이기고 이긴 게 부럽죠. 거기에 상대적으로 나는 사는 게 사는 게 아니고 차라리 죽는 게 낫지 이렇게 사는 건 인간도 아니라는 좌절할 수밖에 없는 요소들이 있지요.
또 하나의 CCTV를 보라고 하나님께서는 일부러 기존의 CCTV에 대해서 그 CCTV에 우리가 얼마나 깜짝깜짝 놀라는지를 보여주는 겁니다. 엘리사라는 선지자에게 사환이 있었는데 그 사람이 게하시라는 사환인데, 그 사람이 어느 날 보니까 수많은 적, 아람 군대가 완전히 선생님 있는 곳을 포위했어요. 자기들은 이미 죽었다 싶죠. 왜냐 하면 자기는 기존에 CCTV 안에서만 감시받고 살았기 때문에.
육의 한계입니다. 오늘날 모세와 똑같아요. 지금 모세의 한계를 보여주는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벌벌 떨고 있을 때 엘리사가 기도를 딱 해주니까 저쪽의 숫자보다 이쪽 엘리사와 함께 있는 숫자가 더 많아요. 여기서 모티브를 얻었는지 모르겠지만 지금 천만 관객 돌파했다는 어벤저스 4 영화에 보면 이 장면 나와요. 우주 최고의 악마가 공격할 때 이쪽은 숫자가 얼마 안 돼서 전부 얻어터지고 빌빌거리고 있을 때 갑자기 응원군이 나타나 승리한다는 내용입니다. 마치 엘리사의 은혜와 같은 거죠.
이게 예수님이 하신 일 중에도 포함이 되어있습니다. 빌라도는 CCTV가 하나밖에 없어요. 대중들이 나를 어떻게 보는지에 대한, 오늘날 정치꾼들이 보는 CCTV와 똑같아요. 국민들이 어떻게 나를 보느냐에 대한 거. 국민들의 표만 따내면 대통령 정권 유지할 수 있다고 하거든요. 빌라도가 큰소리쳤습니다. “내가 너를 놓아줄 권세도 있고 풀어 줄 권세도 있다”라고 하니까 예수님 하시는 말씀이 “주께서 허락하지 않으면 내가 잡히지 않는다. 내 나라의 천사가 너보다 더 많다”라고 하시는 거예요.
스테반 집사는 나중에 성령 받아서 그것보다 더 높은 단계로 이야기합니다. “주여, 저들의 무지함을 용서해 주옵소서. 저들이 얼마나 철이 없으면 정치적 힘과 세상적 힘 가지고 으스대는데, 주여 저들의 철딱서니 없음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그들은 마지막 때를 모릅니다. 끝을 모릅니다. 그들은 주의 이름을 모릅니다. 주의 재림을 모릅니다”라는 거죠.
여기서 다시 중간 점검에 나서면 이렇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반드시 육의 한계를 도출하는 과정을 거친다는 거예요. 나의 한계. 내가 “하나님을 믿습니다. 믿습니다”라고 하지만 모세와 똑같아요. 우리는 단 하나의 CCTV에 몸 둘 바를 모릅니다. “네가 지난여름에 한 일을 내가 다 안다”라고 하면 벌벌벌 떨죠.
여러분, 주께서는 미리 다 압니다. 제가 오전 설교에 그렇게 이야기했잖아요. 우리가 어떤 짓을 해도 이미 주님의 익숙함이라고요. “호들갑 떨지 말고 가만있어라. 내가 이미 다 아는데”라고 하시는데 죄를 지었다고 호들갑 떨고. “네가 뭐 죄를 안 지을 줄 알았느냐? 오늘 낙담했다고? 너는 낙담이 주특기야. 뭐 특별히 안 하던 짓을 한 줄로 아느냐?네 맘대로 살아. 네 맘대로. 네 맘대로 살아도 내 맘대로야”
맘대로 살면서 나의 한계가 이거라는 것을 매일같이 끄집어내야 해요. ‘아, 이것이 모세가 주먹질 한 짓이구나’라는 것, ‘이렇게 착한 일 하고 주의 일을 하고 사니까 하나님 살려주세요’라는 이게 뭐예요? 앞뒤가 안 맞는 일이잖아요. ‘주여 저들의 철딱서니 없음을 용서하소서’라는 스데반집사 같은 고백이 나와야 하는데 CCTV를 달랑 하나만 생각한다고요. CCTV를 감시하는 또 하나의 CCTV가 하늘에 달려 있습니다.
자, 이게 베냐민 지파와 관련 있다는 말은 사사기 21 베냐민 지파와 그 외의 모든 지파가 한바탕 붙습니다. 그럴 때 그 나머지 열한 지파가 베냐민 지파에게 시비를 걸면서 명분을 찾는 게 뭐냐 하면 베냐민 지파는 나쁜 짓을 했기 때문에 우리가 너를 조져도 너희는 주의 뜻인 줄 알고 감수하라는 식으로 어떤 정의로움을 앞장세웠습니다.
문제는 베냐민 지파의 범죄로 인하여 나머지 열한 지파가 모세가 애굽에서 했던 자기 한계성, 자기가 주의 일을 했다고 착각한 한계성을 베냐민 지파를 통해서 그들은 완전히 들통났다는 겁니다. 자기는 착하고 악을 응징한다는 아주 고상한 명분이 주의 일인 줄 알았어요. 참 이 대목이 상당히 어려운 대목이에요.
그 대목을 해석하기 이전에 사사기 1장부터 먼저 보겠습니다. 사사기 1장 21절에 보면 “베냐민 자손은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여부스 족속을 쫓아내지 못하였으므로 여부스 족속이 베냐민 자손과 함께 오늘까지 예루살렘에 거하더라”라고 되어있어요. 이 베냐민 지파가 땅을 차지했지만, 땅에서 해야 할 일을 다 못하고 있었어요.
자기 한계에 이른 거죠. 그리고 땅을 부여받았다면, 우리가 어떤 재산이 있고 가정이 있다면 뭔가 한계를 도출하기 위한 하나님의 전략입니다. 네가 소위 너다운 거, 자신이 나답게 살기 위해서 이렇게 되는 게 잘되는 거라는 것은 한 개의 CCTV 앞에서 너 자신이 어떻게 비춰지고 있는지를 네가 스스로 보란 말이죠.
허겁지겁 내가 이것이 있어야 내가 산다고 우겼던 그것조차도 우리는 감당을 할 수가 없어요. 우리는 내 목숨이 부지되지 못할까 봐 안절부절 어쩔 줄을 모르는 것을 첫 번째 CCTV를 통해서 주께서 훤하게 다 보고 계십니다. “이 세상에 속한 인간아, 세상 속한 방법으로 네가 구원 안 되지? 그지?”라는 것을 보여주는 거예요.
베냐민 지파가 악을 행한 것도 마찬가지지만 그 악을 응징해서 하나님께 온전한 이스라엘 되겠다는 그 사사기에 남아있는 열한 지파도 똑같이 마찬가지예요. 그래서 베냐민 지파는 2만 5천이 죽었는데 저쪽 연합군은 4만이 죽어요. 소위 정의로운 연합군 쪽을 더 많이 죽여버립니다. 전쟁통에. 그래서 나중에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 베냐민 지파를 칠까요, 말까요?” 결국에는 자기 한계성을 드러냅니다. 우리가 과연 베냐민 지파를 응징할 만한 자격자가 되는지 안 되는지 우리는 모호하다는 겁니다. 베냐민 지파는 인간은 스스로 모호한 존재, 경계선에 있는 존재, 내가 세상에 속했는지 천국에 속했는지 늘 스스로 자신을 점검할 때는 매일같이 모호할 수밖에 없어요.
주를 사랑한 것 같지만 실상 행동하는 거 보면 목숨 부지하기 위해서 안절부절 어쩔 줄을 모르는 거죠. 가만히 있을 때는 주를 찬양한다고 하지만 뚝 누가 건드리면 그 여파를 하나님께 원망하는 것은 아주 빠르죠. 하나님에게 짜증 내기에 급급합니다. ‘왜 나를 힘들게 하십니까? 왜 저를 고통스럽게 몰아세웁니까?’라고 할 수밖에 없죠.
그러니까 제가 방금 설교한 내용에서 어떤 해결책이라는 것은 도출할 수 없습니다. 해결책은 도출될 수 없어요. 그러면 해결책은 어떻게 하느냐. 제가 아까 이야기한 사울 왕을 통해서 다시 한번 보겠습니다. 사무엘상 9장 21절 “사울이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이스라엘 지파의 가장 작은 지파 베냐민 사람이 아니니이까” 아니냐는 말은 묻는 말로 다시 고쳐 말하면
“나는 이스라엘 가장 작은 지파입니다. 내 가족은 베냐민 지파 모든 가족 가운데 가장 미약합니다. 따라서 내가 왕 될 수 있는” 쉽게 말해서 “내가 구원될 수 있는 요소가 전무하다는 것을 저에게 알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라는 이것이 천국의 백성다운 고백입니다. 이게 오래 가지는 않습니다. 나중에 교만해서 다윗을 죽이려고 하죠.
그러나 그 순간, 그 찰나적인 순간에 사울은 참된 이스라엘의 대표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정말 이스라엘의 왕 다운 고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왕의 이름 주의 이름으로 바뀐 순간에 터져 나올 찬양입니다. “나 자신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주께서 선택하지 않으면 나는 어느 구석에 숨어있어서 있는 둥 없는 둥 할 수밖에 없는 그런 처지에 있는 것이 합당합니다”라는 고백.
어떤 사람의 이야기를 제가 이걸 가지고 여러분 실생활에 나름대로 적용을 해보겠습니다. 어떤 60대 되는 남자가 자기 친구들 중에 혼자 된 의사 친구들이 많아요. 사별하든지 이혼하든지 해서. 그래서 자기 친구들에게 “여자를 소개해 줄까?”라고 물으니까 그 의사 친구들이 하는 말이 자기 나이에서 평균적으로 70%를 곱하기 한 나이를 원해요. 남자 나이 60세 같으면 42살 되는 거죠.
그러니까 사울과는 완전 반대적 사고를 가지고 있는 거죠. 사울의 고백과는 정반대돼요. 주의 이름과 정반대되는 인간의 솔직한 인간의 자기 이름이죠. 의사다 이거죠. 의사니까 기왕 재혼하는 거 늙은 모습은 보기 싫고 일단 30% 빼고 가자는 거죠. 적정선 42살이고 좀 더 어려도 괜찮고. 이걸 들으면 우리는 ‘아이고, 인간아...’라고 막 욕하죠. 하지만 그 인간이 나는 아닌가요?
모든 인간은, 타인은 나를 대표하는 사람이에요. 이 세상 전부가 출렁거리고 넘실거리는 그 모습들이 뭡니까? 잘난 맛에 살아가잖아요. 어느새 우리가 길들어졌어요. 우리도 전부 잘난 맛에 살아가잖아요. 잘난 맛. 그런데 더 큰 문제는 그게 한계인 것을 우리가 인정을 안 한다는 거예요. 그게. 내 구원을 내가 막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인정을 못 하고 있는 거예요.
감사한 것은 주님께서 사태를 일으켜서 어떤 원칙에 입각한 서사구조, 계속 사건 사태를 일으켜서 우리로 하여금 바뀌도록 한다는 거예요. 내 이름이 아니고 주의 이름으로 바뀌어야 하는데 그게 어떻게 바뀌느냐 하면 그냥 그러려니 하고 살아가던 이런 인생에서 미리 내가 이런 인간인 줄 몰랐죠. 모세처럼.
옳은 일 하면 도와줄 줄 알았죠. 안 도와주시는 거예요. 왜? 못난 놈을 왜 도와주십니까? 안 도와주시는 하나님, 나를 죽도록 내치시는 하나님. ‘주여 그래도 그 조치가 합당합니다’라는 이 고백, 이것이 바로 십자가에서 버림받았던 예수님 죽는 그 순간에 예수님의 성령의 고백, 그 고백이 진짜 천국과 지옥의 경계선으로서의 성도의 마지막 해야 할 역할입니다.
그 역할을 여러분은 웃으면서 감사함으로 기꺼이 수행하시길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잘난 체하는 것이 이제 버릇이 되고 말았습니다. 자기 잘난 재미로 사는 것이 당연한 줄 알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주의 변화시키시는 주께서 하는 모든 계획이 다 틀어졌습니다. 주여 이런 인간이 바로 우리 자신의 한계인 것을 새롭게 시작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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