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5강-여호수아 13장 8절(요단 동편 땅)20190224-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여호수아 13장 8절입니다. 구약성경 340페이지입니다.
“므낫세 반 지파와 함께 르우벤 사람과 갓 사람은 요단 저편 동쪽에서 그들의 기업을 모세에게 받았는데 여호와의 종 모세가 그들에게 준 것은 이러하니”
모세가 준 것이 아니고 사실은 하나님이 그들에게 주고자 약속을 했습니다. 조건은 뭐냐 하면 사적으로 받는 것이 아님을 인정할 때만 받습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어떤 지파가 받을 때 사적으로 우리땅이라는 생각을 가지지 않으면 주겠다는 겁니다. 왜냐 하면 전체 이스라엘에 준 땅이지 각 지파의 자격으로 받은 땅이 아닙니다. 전체 이스라엘에게 준겁니다.
이스라엘 지파가 열두 지파인데 사실 레위 지파까지 열세 지파가 됩니다. 그 열세 지파가 따로따로 놀아서는 안 되고 하나의 이스라엘이라는 집합체에 묶여있는 거예요. 그럼 이스라엘은 어디 있느냐? 없지요. 이스라엘은 없어요. 대학에 가보세요. 대학은 없어요. 대학생이 있고 교수 있고 교직원이 있고 대학교 교정이 있을 뿐이지 대학은 없어요.
국가도 없어요. 국민 있고 공무원들 있고 군인들이 있지 국가라는 것은 눈에 안 보여요. 국가라는 것이 색깔이 뭡니까? 뭐 태극기는 있지만, 국가 색깔은 없지요. 실체가 없어요. 실체가 모인 곳에는 반드시 실체를 초월하고 대표하는 표상이 있게 마련이에요. 대표자가 있어요. 문제는 하나님께서 그렇게 표상적으로 다룬다는 거예요.
개별적으로 다루지 않는다는 겁니다. 내 자격으로 구원되는 그런 법칙은 하나님이 주신 적이 없습니다. 이스라엘이라는 조건 하에 우리에게 주시는 겁니다. 이스라엘을 뭐라고 하느냐.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해요. 그러면 이스라엘은 하나님 아들의 표상이 돼요. 하나님 아들은 예수님이고 그 예수님이 어떤 분이고 앞으로 예수님의 세상이 어떤 세상인 것을 미리 앞당겨서 구약에 보여준 것이 이스라엘입니다.
설교 다시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개별자인 자기나 개인은 안 된다는 겁니다. 소속을 묻습니다. “너 어느 소속이야?”라고 그걸 물어요. 우리는 소속을 물으면 어떤 느낌이 드느냐 하면 자유 박탈이라는 식으로 느끼는 거예요. 나는 하고 싶어도 못하고 갇혀 있음 같은 이런 뉘앙스가 있는데 구약에는 이스라엘에 소속되어 있지만, 신약에는 예수님께 소속되어 있어요. 왜냐 하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거든요.
로마서 8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냥 건져 주는 것이 아니고, 이런 게 참 어려운데요, 그냥 너 구원받으라고 주는 게 아니고 신분적으로 분명히 해두고 구원을 받아요. “너희들은 율법의 종이었던데 아들의 영을 받아서 이제는 하나님의 양자가 되었느니라”라고 되어 있어요. 로마서 8장에. 그래서 자기를 구원해 달라고 하지 말고 일단 우리를 딱 집어서 어디에 집어넣느냐 하면 율법의 종이라고 집어넣어야 해요.
율법이 종이 된 것을 인정하는 한에서만 비로소 예수그리스도가 의미 있게 다가옵니다. ‘아, 못 지켰구나. 지킬 수가 없었구나’ 오늘 주일학교 설교를 다시 해보면 예수님께서 산상설교를 하는데 오른 눈이 범죄 했단 말이죠. 그러면 하나님의 처벌은 뭐냐? 1번 – 반성한다, 2번 – 회개한다, 3번 – 오른 눈을 뺀다, 몇 번입니까? 제가 그런 이야기를 했거든요. 왜 사람들은 3번을 안 하고 자꾸 1번이나 2번으로 때우려고 한다고.
주의 뜻은 오른 눈을 빼는 거예요. 그러면 오른 눈 빼고 나머지 눈으로 애꾸 되어서 왼쪽 눈으로 범죄 하면 그다음부터는 반성하거나 회개하는 게 아닙니다. 그냥 왼쪽 빼는 겁니다. 그러면 봉사 되어서 양쪽 귀에 나쁜 거 들리면 귀 자르는 거예요. 정육점에 가보면 고기 써는 전기톱 같은 기계 있지요? 아예 회를 떠요. 회를. 사시미칼로. 아무리 인간의 몸을 회를 떠도 그 떠 있는 부위 하나하나가 산 낙지가 돼서 죄로 살아있어요. 죄로. 육으로 난 것은 육으로는 안 됩니다. 뭐 하나 제거되고 자른다고 해서 나머지가 착하다는 보장 없습니다.
소속이라니까요. 개인적인 자기의 양심에다가 승부 걸지 마세요. 자기의 착함에다가 승부 걸지 마세요. 소속입니다. 네 소속이 어디인가를 묻는 거예요. 소속이 우리를 구원하거든요. 그러면 우리 보통 교회에서 소속이 어디인지 물으면 자기들 교회 소속해서 구원받는다고 하는데 성경에서는 기존에 있는 교회는 구원을 시킬 수 없다고 합니다. 왜냐 하면 눈에 보이기 때문에.
어떤 교회가 구원시키느냐 하면 유령교회가 구원시킵니다. 유령교회. 교회가 유령입니다. 뭐 개혁 쪽에 속하고 어느 교회에 속해야 세금혜택이 있고 그런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런 식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유령교회처럼 교회가 없는데 현상으로만, 그걸 어려운 말로 표현태라 하는데, 보이지 않는 교회의 표현태가 오늘날 성도가 되는 겁니다.
성도가 개인적으로 개별적으로 움직이는 것 같지만 모여놓으면 한 교회의 지체가,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는 겁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과 관련되어 있어요. 오늘 본문의 땅 정복과 관련이 되어 있어요. 오전에 제가 설교했잖아요. 이스라엘 역사는 하나님의 언약에 의한 역사라고. 거기에서 그들이 혹독하게 경험한 것은 뭐냐 하면 땅 있음과 없음에 대한 그 몸에 다가오는 절실한 아픔과 슬픔과 기쁨을 다 체험해야 해요.
땅이 없을 때의 서러움, 땅이 있을 때의 교만함, 그 양쪽을 다 경험해야 해요. 창세기 3장에서 인간은 땅에서 땅을 붙들어야 하고 땅에서 자기 터전을 가져야 하거든요. 창세기 4장에서 가인이 받은 벌이 그거예요. “네 땅이 없다. 네가 외지인이 되어라” 그게 벌이에요. 그게 사형이 아니고, 동생 죽였으니 너도 죽으라는 것이 아니고, 사형이 아니고 그 사형에 해당하는 벌을 지상에서 땅 없이 살아가야 할 인간의 아픔을 가인의 후예로 하여금 살아가야 하는 거예요.
그러면 가인의 후예가 세운 것이 최초의 도시국가예요. 최초의 도시국가. 추상적인 사회를 만든 겁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라고. 후대 사람인 세네카가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고. 정치적 동물이 아니고 사회적 동물이라는 거예요.
정치적 동물이라고 할 때는 가정을 떠나서, 그런 사적인 것을 떠나 공적인 것이 더 위대하다고 하는 것이 아리스토텔레스의 공적, 폴리스, 정치, 그것이 개인적인 이유보다 더 위대하다고 해서 아리스토텔레스가 그렇게 이야기했다고요. 다시 말해서 안중근 의사나 김구 선생은 개인적인 집안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나라, 민족을 살리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한 이것이 폴리스예요. 이게 정치적 동물이에요.
그러나 근대에 들어와서는 어떻습니다. ‘정치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내 가정, 내 사유재산, 내 재산을 지키는 것이 국가의 할 일이라는 겁니다. 이렇게 바뀐 겁니다. 그걸 가지고 근대 주체사상이라고 하는 겁니다. 이것은 단순히 철학이나 사상의 문제가 아니고 현재 220국 모든 나라가 옛날 자기 종족, 씨족을 중시했던 그런 사회를 포기하고 행정적으로 국가 중심 공화국 중심적으로 그렇게 세상이 달라졌어요. 이 현실을 제가 말하는 겁니다. 사상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현실을 말하는 겁니다.
북한에도 뭐가 있느냐 하면 인민 공화국이라고 해요. 인민 공화국. 공화국이에요. 각자의 목숨과 생명과 재산은 보호해 드리겠다고 그렇게 주장합니다. 세상에 그런 세상은 없습니다. 개인의 종교나 개인의 취미를 보장하는 그런 국가는 없어요. 중국, 북한 기독교 말살입니다. 가짜 교회 만들어 놓고 완전히 말살하는 동네예요. 이 세상에는 왜 그러냐 하면 개인주의이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그것을 성경에서는 미리 알아요. 그것을 뭐라 하느냐 하면 이방 민족이라고 합니다. 이방 민족은 자기 잘난 맛에 살아가는 거예요. 하나님도 자기가 만들고 자기가 선택하는 겁니다. 네 가정 잘되는 하나님을 하나님이라고 본 거예요. 그러나 이스라엘은 그렇지 않습니다. 찬송가 203장 3절 가사를 보면 이렇게 되어 있어요. “내 모든 근심과 내 모든 두려움” 그다음의 가사가 참 의미 있는데 “주 묻힌 무덤에 다 묻어 버렸네”
조폭 아닙니까? 삽으로 묻어 버렸다고 하는데. 여기에 이 가사가 뭘 의미하느냐 하면, 이 3절 가사가 뭘 의미하느냐 하면 예수님의 십자가 부활이 우리와 동떨어진 남의 이야기일 수는 없다는 거예요. 우리가 이스라엘과 하나의 아들이 되려면 뭔가 연관이 있어야 하고 관계지어져야 한다는 겁니다. 사람 정을 나누듯이 ‘저는 예수님을 사랑합니다. 믿습니다’라고 해서 될 문제가 아니에요.
“나는 예수님의 존재를 인정한다. 부활한 것을 인정한다”라고 지금 이렇게 한다고 엮일 문제가 아니고, “예수님을 믿는다. 믿씁니다”라고 ‘ㅆ’붙여서 될 문제가 아니고 예수님의 무덤 안에 우리의 근심과 모든 두려움이 거기에 묻혀 있다는 거예요. 우리 자신이 묻혀 있다는 거예요. 사실은 우리 자신이. 이미 우리를 죽은 자로 간주할 때, 자신을 죽은 자로 간주할 때, 비로소 그 죽음에서 예수님이 만들어 준 새로운 언약에 의한 새로운 자아가 여기서 생성되는 겁니다.
여러분 육체이탈이라는 말 들어보셨죠? 그림을 한 번 그려보세요. 어떤 사람이 침대에 누워 있는데 갑자기 희멀건 유령 같은 일어나요. 몸은 누워 있는데. 일어나서 주님께서 내 손 잡아 주소서 하듯 잡아서 데려간다는 이건 구원이 아니에요. 이건 아니라니까요. 있는 자아를 데려가는 게 아니에요. 예수님에 의해서 새롭게 구성된 자아는 그리스도에 의해서 만들어진 거예요. 새롭게 주어진 거예요. 고린도후서 5장에 나오는 이야기를 제가 하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서 땅을 정복하는데, 땅 없음에서 있음이 돼요. 있을 때 인간들이 개인적인 감정이 개입된다는 사실. 이것은 뭐냐 하면 언약 적으로 토해져야 될 거예요. 인간은 자기가 삼킨 것을 스스로 토할 수는 없어요. 자기가 죄지으면서 갖고 있던 사적인 감정은 뭐냐 하면 나만 잘되면 돼요.
제가 무슨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민수기 32장 이야기하는 겁니다.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은 그들이 약속의 땅에 오기 전에 가축들이 많았어요. 이제 그들이 약속의 땅인 가나안땅 근처에 오니까 가축들을 목축하기에 적당한 곳이 보였던 거예요. 여러분들이 가족이나 교회나 단체로 어디 놀러 갔을 때, 어떤 장소를 정해서 이건 내가 내일 놀러 갈 땅이라고 밤샘하든지 보초 세워서 있지 않고 ‘어, 땅이 좋네’라고 가보지도 않고 ‘그날 아침 가서 적당한 데 가지’라고 하면 어떤 오류를 범하느냐 하면 지금 그 좋은 땅 근처도 안 갔는데 마치 괜찮은 땅 있으니까 “아이고 목사님, 그냥 여기서 놉시다”라고 하는 거예요. 좋은 땅 근처도 못 가고 그 근처에서 놀다가 근처 자기 집으로 그냥 오는 수가 있어요.
그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이 마찬가지입니다.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과 므낫세 반 토막난 지파, 므낫세 지파가 있는데 그것을 둘로 나눠서 한 지파는 따로 다른 지파 따로 있어요. 같은 족속인데 이산가족 된 것과 같아요. 이 르우벤 지파와 갓 지파와 므낫세 반 지파는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도 않았어요. 들어가지도 않았는데 보니까 목축지가 많으니까 ‘야, 여기가 좋사오니’라고 눌러앉아 버린 거예요.
이게 뭐냐 하면 약속의 땅은 본인들 구원받으라고 준 땅이 아닙니다. 약속이 표현형처럼 약속이 약속을 드러내기 위해서 있는 땅이거든요. 천국에 우리가 들어간다는 말은 나를 구원하기 위해서 가는 게 아니고 바로 우리 몸을 통해서 천국을 발산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구원을 주신 겁니다. 마치 ‘삐’하고 소리 나는 주전자처럼. 주전자 올려놓으면 100도 넘으면 ‘삐’ 소리 나잖아요.
일종에 우리는 그런 주전자 같은 거예요. 뭔가 신호가 왔을 때, 시그널이 왔을 때 예수님의 이야기를 토해내는 그 역할을 하는 거예요. 또는 전화기 같은 거. 전화기가 하루종일 전화 안 오면 가만히 있어요. 그러나 전화 오면 난리도 아니에요. 만화 보면 전화기가 펄펄 뛰잖아요. 소식이 왔단 말이죠. 우리는 주님의 소식을 증거 하는 전화기나 소리 나는 주전자 같은 역할에 불과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하나의 단체에 그리스도 몸의 지체에 속해 있는 거예요. 이걸 저는 유령교회라고 하는 겁니다. 교회가 없는 것이 아니고 있어요. 있는데 은닉과 전시예요. 은닉은 숨겨져 있는데 앞에 전시될 때는 숨긴 것과 본질은 같지만, 우리가 세상적으로 전혀 달리 보이는 전시효과 같은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하나님은 성도를 이 땅에 계속 살게 하시는 겁니다.
어쨌든 간에 오늘 본문에 므낫세 반 지파와 르우벤 사람과 갓 사람은 요단 동편에 기업을 주었는데 사실은 이 기업은 약속의 땅에 편입되지 않습니다. 약속의 땅에 포함되지 않아요. 약속이고 뭐고 눈에 당장 ‘야, 여기 좋습니다’하고 넙죽 삼킨 거예요. 그리고 일단은 접어놓게 되니까 그 땅은 본인이 토해낼 수는 없는 겁니다. 그러면 그들은 약속의 나라에 포함이 안 되어 버리는 그런 결과를 낳겠지요.
그런데 그들이 좋았던 그 땅은 요단강 동편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역사를 여러분이 한번 머릿속에 그려보세요. 제일 밑에 죽음의 사해가 있어요. 위에는 갈릴리바다가 있습니다. 갈릴리바다인데 사해에 비하면 이거는 크기가 1/10도 안 될 거예요. 정확히는 모르지만, 하여튼 굉장히 작아요. 사해는 굉장히 큽니다. 그 사이에 요단강을 약속의 땅과 약속의 땅 아닌 것의 하나의 경계선이라고 봅시다.
요단강에서 동쪽으로 가면 약속의 땅이 아니에요. 요단강 서쪽은 약속의 땅입니다. 그래서 ‘요단강 건너서 만나리’라고 하잖아요. 요단강을 건너가야 약속의 땅이에요. 지금 르우벤 지파, 갓 지파, 므낫세 반 토막난 지파는 지금 약속의 땅에 못 들어가 있고 목축지가 좋은 그 땅을 차지하겠다고 먼저 자기가 찜했습니다. 그게 뭐가 문제냐 하는 겁니다. 그래서 그 근처에 살면 되지 않겠느냐는 것이죠.
사사기 11장에 보면 드디어 사단났습니다. 하나님께서 약속의 땅을 할 때 여호수아가 다 정복하지 못했다고 지난 오후 시간에 말씀드렸지요. 그 주변에 있는 나라들, 이방 민족들이 여기에 그대로 세퍼트처럼 포진되어 있습니다. 제일 이스라엘 남쪽에 에돔(야곱의 형, 에서의 족속), 그다음 모압, 암몬, 그 위에 아람(시리아 – 가버나움 영화의 배경 나라), 이렇게 네 나라가 동쪽을 야금야금 정복하도록 하나님께서 그렇게 조치했습니다.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갈라질 때 완전히 다 그들에게 삼킴을 받았어요. 이게 무엇을 의미하는 겁니까? 이스라엘에 복속되어야 하고 소속이 이스라엘 소속으로 되어야 하는데 이 사람은 자기 소속이에요. 소속이 없어요. 나는 내 소속이 끝이에요. 이게 한계예요. 나만 잘되면 그만이라는 거예요.
뭐 ‘하나님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인사는 넙죽 하지요. ‘아이고, 우리 가정 구원해주셔서 감사하고 복 주셔서 감사합니다.’ 절은 하는데 그 최종적인 귀결, 결론은 뭐냐 하면 역시 나 잘되었으니까 감사하는 거예요. 나 잘되었으니까. 그런데 나 잘된다는 것은 아까 로마서 8장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율법의 종이 된 거예요. 하나님은 종을 아들로 만들겠다는 거예요. 네가 언제까지 종으로 살래? 종으로 살면 저주와 지옥 외에는 아무것도 없어요.
다시 한번 정리해 드리겠습니다. 인간이라는 것이 자기 운명과 미래에 대해서 본인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에요. 이미 피조물인 이상 창조주가 어떤 결정지은 카테고리가 있어요. 분류방식이 있다고요. 율법의 종은 지옥으로, 하나님의 아들만 천국으로. 왜냐 하면 면 천국은 아들의 나라이니까 아들만 천국으로.
이거는 우리가 태어나기 전부터 창세 전부터 이미 일방적으로 정해놓은 거예요. 저보고 멱살 쥐고 따지지 마세요. 이건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정해놓은 거예요. 저는 그 소식을 그냥 ‘삐’하고 그냥 전하는 것뿐입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행복을 주냐 안 주냐 그런 거 따지지 마세요. 행복 주고 안 주고 편하고 안 편하고 이런 이야기 하지 마세요. 우리가 편하려고 사는 게 아닙니다. 행복 주려고 사는 게 아니에요.
하나님의 뜻은 행복이 아닙니다. 너의 현주소가 율법에 소속되어 있고 율법을 못 지키면 저주받는 거예요. 아까전에 주일학교 이야기를 마저 하면 오른 눈이 범죄 하면 빼어버리라고 할 때, 1번과 2번처럼 반성하라 회개 하라를 하지 눈을 안 뺀다고요. 그 정도로 우리는 율법을 못 지킵니다. 그래서 주일학교 설교를 이렇게 했어요. 출제하는 분이 우리에게 답을 요구하면서 결국 우리는 답변하는 필기물을 놔야 한다고.
풀다 보니 풀 수가 없어요. 빵점이에요. 사도바울의 모든 권면과 지시도 마찬가지예요. 산상설교뿐만 아니고, 전부 다 사도바울의 권면이 아니고 예수님의 권면입니다. 우리가 못 지킵니다. 지키지 말라고 준 책이에요. 지키지 말라고. 지켜봤자 선과 악의 사고방식 가지고 지키니까 그게 계속 악마의 늪에 함정에 깊숙이 빠져들어 가는 거예요. 몸부림치면 칠수록 착하게 살면 살수록 더욱더 자기 자신이 아까워서 행한 것이 아까워서 헤어나오질 못하는 거예요. 그동안 교회에 돈 바친 것이 아까워서 헤어나지를 못하는 거예요.
곧 딸 결혼식 하는데 그 교회 축의금으로 들어간 것이 아까워서 딸 결혼식은 치르고 축의금 다 챙기고 나오려는 예정이었습니까? 그런데 그 자체도 개별적입니다. 개별적. 소속이 아니고. 내 손해는 내가 만회한다. 나는 손해 안 보고 이익만 본다는 그 개별적 자세를 그대로 가지고 있잖아요. 그게 누구냐 하면 바로 르우벤 지파, 갓 지파, 므낫세 반 지파입니다.
사사기 11장에서 암몬이라는 나라가 하나님 지시에 의해 완전히 거기에서 지긋지긋하게 시달리게 만들어요. 원래 국경 마을은 그렇게 전쟁에 쉽게 노출되잖아요. 삼촌들 조카들 섞여서 그렇게 한방에서 잠을 잔 적이 있습니까? 저는 그렇게 자 봤는데, 찬바람 불 때 어린 조카들이 저쪽 추운 곳을 차지해요. 원래 구들방이 안쪽만 따뜻한데 바깥쪽은 얼음 얼고 안쪽은 뜨거워서 난리고.
그러니까 그 안쪽은 삼촌들 자고 조카들은 바깥쪽에 있는데 원래 경계선은 추워요. 제일 시달리는 곳이라고요. 못사는 동네의 좋은 점은 집값이 싸다는 것이고 나쁜 점은 범죄에 노출된다는 겁니다. 잘사는 동네는 낯선 사람 오기만 해도 개부터 시작해서 경비원, CCTV까지 사방에 있어서 외판원 하나 얼씬거리기 어려운데 못사는 동네는 맨날 싸우고 드라마 보면 꼭 사건은 이미 상점들 전부 다 문 닫고 어두운 골목에서 그 시장 골목에서 싸우고 난리 나고 하잖아요.
그러니까 이렇게 약속 안에 들어오지 못하고, 깊숙이 들어오지 못하고 양다리 걸치는 거, 이게 누구 이야기이겠습니까? 오늘날 우리 이야기 아니겠습니까? 우리 이야기예요. 양다리 걸치고. 그저 나만 좋다고 딱 해놓았는데 그 자리가 명당자리라고 여겼는데 그 자리가 묘수라고 여겼는데 악수를 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세상 생활에서 돈도 벌지 말고 아예 교회에서 기도원에 가서 살까요? 어떻게 할까요?’ 이렇게 생각하는데 여기서 약속이라는 개념을 한번 수정을 해봐야 해요.
사람이 배고픈 건 참아도 배 아픈 건 못 참거든요. 이게 뭐냐 하면 사람이 배고파서 못 살겠다고 하잖아요. 그건 인간이 자기 자신을 잘못 알고 있는 거예요. 배고파서 못 사는 것이 아니고 배 아파서 못살아요. 사촌이 논을 사거든요. 그러니까 세상에 깊숙이 사세요. 시달리세요. 하지만 그런 것들이 안 부러우면 되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우리 안에 들어있는 요소는 인간이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일방적으로 집어넣어 준 것이 있으면 세상에 어떤 성공을 했다 출세를 했다 해도 전혀 부럽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가져봤자 세상에 주님의 것이 성령이 임하지 않고 약속이 임하지 않으면 더 가져야 한다고 더 못 돼서 자꾸 남들 의식하면서 본인이 충분히 행복할 여건이 됨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자기 자신을 찔러서 불행을 유발합니다.
어떤 사람은 직장에 다녔는데 상사가 심한 질책을 했어요. 질책을 듣고 난 뒤에 10분 만에 사망했습니다. 이거 업무상 재해입니까? 손도 안 댔어요. 그냥 막 심하게 “그딴 식으로 하려면 나가! 사표 내”라고 했는데 그 사람이 10분 후에 성질나서 죽었어요. 이거 업무상 재해에 해당하는 겁니까?
우리는 누구를 욕하느냐 하면 너무 심하게 했다고 상사를 욕하는데 그거 욕하면 안 돼요. 10분 후에 죽은 사람이 얼마나 성질이 더러운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 사람이 죽기 전까지 평생토록 내 인생은 내가 간수하고 보호한다는 정신으로 살아온 거예요. 이방 민족입니다. 율법의 종이에요. 벌써부터 그건 죽기 전에 저주받은 거예요.
우리가 태생이 그래요. 우리가 삼킨 것은 아담으로부터 악령을 삼킨 것을 우리는 못 뱉어요. 오직 우리는 나의 위신과 나의 명예가 돈보다 밥벌이보다 더 중요해요. 고개 숙이고 굴욕적으로 할 거 같으면 우리는 사표 내버립니다. 그 정도로 우리는 성질이 더러워요. 도도하고 못 되었고 싸가지없고 정말 이 정도밖에 안 되는 겁니다.
이래가지고 천국을 가요? 주님께서는 약속을 집어넣어요. 약속을 집어넣으니까 이스라엘 백성이 적이라고 여기는 저 악한 아람, 모압이라는 그 ‘너’가 ‘나’가 되고 그 ‘나’가 ‘너’가 되는 거예요. 전쟁의 의미는 여기서 다른 지파는 오래 버텼는데 이 르우벤, 갓, 므낫세 반 지파는 이방 민족 가까이 있어서 다 죽었다는 것이 남의 이야기가 아니고 지금 우리 속에서 이 전쟁을 주께서 이미 완성하시고, 네가 약속의 자녀일 수가 없고 너는 이방 민족이었고 네가 치고자 하는 적이 바로 네가 적이었다는 거.
아군은 예수님 본인밖에 없어요. 예수님 본인이 이 인간이라는 적을 상대로 싸워 온 겁니다. 모든 인간은 율법의 종이기 때문에 그래요. 하나님의 아들은 예수님밖에 없어요. 그 전쟁을 미리 이스라엘의 여호수아 전쟁에서 보여준 겁니다. 주님의 자기정복이었어요. 우리가 감히 거기에 갈 수 없습니다. 이제 그것 때문에 희생하신 그 희생의 마음이 왔을 때 ‘주여, 제가 바로 목축지나 탐내고 나만 잘되고 나 혼자만 살면 그만이라 생각하는 적이고 예수님 앞에 적이었군요.’
그런데 아까 기도할 때 했지요. 이 말씀 예수님 안에서만 유일하게 용서가 있습니다. 용서는 예수님의 공로를 바탕으로 주는 거예요. 예수 믿었다고 주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자기 믿음을 우리에게 집어넣어서 우리가 이스라엘이 되는 거예요. 이제는 개별자 입장에서 혼자 살면 안 돼요. 다 같이 용서받은 겁니다. 개별적으로 다 잘난 사람들이죠. 하지만 용서라는 차원에 들어가면 몽땅 다 ‘너 잘났어. 나 잘 났어’가 아니라 주님 때문에 다 구원받은 거예요. 그게 바로 유령교회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그 도도한 성질, 진짜 배고픈 건 참아도 배 아프면 못 참는 이런 남과 비교하고 경쟁하고 대조하는 이러한 사고방식 이걸 버리지 못하지만, 주님의 십자가 앞에서 이게 바로 죄인 것은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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