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오후설교

르우벤(수13;5-6) 190303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9. 3. 4. 07:53
2019-03-03 14:54:12조회 : 20         
   르우벤 190303이름 : 이근호 (IP:119.18.87.190)   

르우벤(여호수아 13:5-6)

음성 동영상 Youtube

 링크 : https://youtu.be/iU4_ePcB57U, Hit:0
 이근호19-03-03 15:55 
르우벤 

2019년 3월 3일                본문 말씀: 여호수아 13:15-16 

(13:15) 모세가 르우벤 자손의 지파에게 그 가족을 따라서 주었으니 

(13:16) 그 지경은 아르논 골짜기 가에 있는 아로엘에서부터 골짜기 가운데 있는 성읍과 메드바 곁에 있는 온 평지와 

약속의 땅에서 땅을 분배받는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이 마치 얻을 자격이나 권리가 있는 것처럼 오해해서는 아니됩니다. 그 전에 가나안 땅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이 이스라엘을 환영해서 그저 비워준 것이 아닙니다. 맹렬하게 저항했고 그들은 이스라엘 하나님에게 패배한 겁니다. 그래서 그들이 쫓겨난 겁니다. 

그렇다면 르우벤 지파가 땅을 갖는다는 것은 이 맹렬한 전투에 참전했다는 것으로 충분한 자격이 되지 않느냐고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민수기 1:21에 보면, 르우벤 지파가 내놓은 군인의 숫자가 46,500명이었습니다. 이들의 헌신적이 참여로 약속의 땅을 차지하는데 기여했다고 여길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거기에 합당한 지분을 얻을 자격이 된다고 여길 겁니다. 하지만 이런 사고방식이 근시안적입니다
. 복음이란 큰 그림을 차원에서 볼 때, 그들 르우벤 지파는 퍼즐의 한 조각을 차지할 뿐입니다. 그들은 감히 들어설 수 없는 세계에 들어선 겁니다. 넘볼 수없는 이상한 나라에 들어온 겁니다. 

그 세계 안에서 영원한 ‘나의 것’이란 성립되지 않습니다. 도리어 과감하게 자신들의 미래와 목숨까지 내놓아야 마땅합니다. 왜냐하면 불가능함만이 작렬하는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르우벤은 언약의 사람, 야곱이 맨처럼 내놓은 야곱의 얼굴입니다. 하나님께서 야곱과 언약을 맺었다는 단지 그 이유 때문에 르우벤은 약속의 땅에 들어가야 합니다. 

더 정확해서 말해서, 르우벤이 들어서므로서 약속의 땅이 비로소 구성된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르우벤은 야곱 언약의 어떤 영속성을 품은 채 ‘약속의 땅’을 구성하는 걸까요? 창세기 35:22에 보면, “이스라엘이 그 땅에 유할 때에 르우벤이 가서 그 서모 빌하와 통간하매 이스라엘이 이를 들었더라 야곱의 아들은 열둘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자 그렇다면, 르우벤의 야곱의 언약에서 어떤 위상에 있을까요? 언약이란 필히 자식이 생산되는 방식으로 그 성취성을 보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시기를 네 자신이 하늘의 별같이 번성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창 15:5) 따라서 야곱에게 자식이 생긴다는 것은 그냥 자연스러운 현상이 아닙니다. 

창세기 29:32에 보면, “레아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르우벤이라 하여 가로되 여호와께서 나의 괴로움을 권고하셨으니 이제는 내 남편이 나를 사랑하리로다 하였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르우벤’ 그 자체로는 ‘보라 아들이다!’는 겁니다. 그러나 그 내용에다 성경은 다음과 같이 해서 내용을 넓힙니다. “여호와께서 나의 괴로움을 권고하셨다”고 하면서 레아가 고백합니다. 

즉 자녀가 없다는 것은 복이 끊어졌다는 말이요 하나님께서 버림받았다는 겁니다. 반대로 자녀가 생겼다는 것은 하나님의 지속적인 관심과 사랑의 대상이 된다는 말입니다. 자식은 인간들이 요구한다고 해서 생겨나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인간에게 있어 ‘없음’이 그 출발점이 되기 때문입니다. 

‘없어야 하는데’, 혹은 ‘없어도 되는데’ 왜 여기 있느냐를 질문을 하나님에게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마땅히 주세요’라고 할 입장이 못된다는 사실에 우리가 눈을 뜨여져 있어야 합니다. 인간은 태어나기 전까지는 ‘없는 존재’입니다. 따라서 ‘없는 존재임’을 바닥으로 삼읍시다. 

없어야 하는데 있다고 한다면 여기에는 필히 하나님의 계획이 담겨져 들어왔다고 생각하는 것이 언약적으로 옳은 생각합니다. 창세기 35:22에서 르우벤이 빌하와 통간했다는 소식을 아버지 야곱이 들었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다고 해서 과연 르우벤을 이 약속의 땅에서 제외될 수 있을까요? 없습니다. 

그것은 그가 약속의 지파 가운데서 장자의 입장에서 ‘바닥’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49:3-4에 보면, “르우벤아 너는 내 장자요 나의 능력이요 나의 기력의 시작이라 위광이 초등하고 권능이 탁월하도다마는 물의 끓음 같았은즉 너는 탁월치 못하리니 네가 아비의 침상에 올라 더럽혔음이로다 그가 내 침상에 올랐었도다”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분명히 야곱이 밝혔듯이 르우벤은 아버지 야곱의 능력입니다. 곧 언약의 결실입니다. 이는 르우벤에게 새삼스럽게 책임을 묻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르우벤이 일으킨 일 자체가 하나님의 언약의 큰 그림을 만드는 구성요소가 된다는 겁니다. 즉 르우벤이 그런 짓을 해야만 한다는 겁니다

일종의 르우벤은 언약 세계 안에서만 비로소 발견되는 ‘인간성의 바닥’을 보여주는 기능을 하게 된 것입니다. 보통 이 세상에서 ‘바닥’이라고 자부하는 것은 인간 자신의 일종의 시방건짐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근시안적으로 살아가는 존재들이 자기 나름으로 충분하게 비참한 지경을 생각했다고 여기면서 설정한 그 바닥의 수위가 실은 현실적으로 대단히 높은 법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누구나 근시안적이기 때문입니다. 자기만의 세계에 갇혀 살다가 조그마한 봉창으로만 제한된 범주 안에서 바깥을 내다보고 자기를 평가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젊은이들은 나름대로 겸손하게 산다고 설정한 그 바닥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얼마나 건방지게 높은 생활을 염두에 두었는냐가 나중에 판명되기 마련입니다. 

언약 안에는 필히 ‘바닥의 바닥,’ ‘최종 바닥’이 마련되어야 합니다. 아버지의 요소가 세상에 나오는 방식은 자식의 태도를 통해서 나타납니다.  즉 인간의 더러운 본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조차도 극복하는 요소가 언약 안에 담겨 있다는 말입니다. 성도의 본질은 빌립보서 2:8에 나옵니다.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예수님께서 인간이 모르는 바닥을 유일하게 가셨습니다. 그리고 그 마음을 품으라고 하십니다. 이렇게 되면 성도는 예수님을 잉태하는 숙주가 됩니다. 이게 바로 천사들도 부러워하는 복입니다. 

왜 천사가 마리아보고 축복했는지를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성도 자체가 언약의 구성요소로 가담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천사가 대답하여 가로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리라”(눅 1:35)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안에 불가능함이 담겨 있음을 영광스럽게 생각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19-03-03 21:36 
226강-여호수아 13장 15~16절(르우벤)20190303-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여호수아 13장 15~16절입니다. 구약성경 340페이지입니다. 

“모세가 르우벤 자손의 지파에게 그들의 가족을 따라서 기업을 주었으니 그들의 지역은 아르논 골짜기 가에 있는 아로엘에서부터 골짜기 가운데 있는 성읍과 메드바 곁에 있는 온 평지와” 

르우벤 자손이 받은 땅이 15절에서 23절까지 쭉 나와 있습니다. 땅을 하나 차지했다는 거죠. 하지만 사사기에 가서 이 땅은 제일 먼저 이방 민족, 암몬 자손에게 다 빼앗기게 됩니다. 어쨌든 그때는 그때 일이고 지금은 일단은 약속의 땅 근처에 땅을 마련했습니다. 한번 생각해 봅시다. 이 땅에서 우리가 거처가 있다는 것이 당연한 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어요. 

그런데 주기도문에 뭐라고 되어 있느냐 하면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달라고 했습니다. 주기도문에서 일용할 양식을 달라고 한 것은 우리가 얻었다가 아니라 주께서 주셨다는 이야기를 우회적으로 표현한 거예요. ‘주께서 일용할 양식을 오늘도 주셨네요. 왜 주십니까?’라는 질문을 할 수 있어야 해요. ‘주님, 우리에게 왜 이 땅에 살게 하십니까?’ 그런 질문을 할 수 있어야 해요. 그런 질문을 안 하면 이방인 기도가 됩니다. ‘더 주시옵소서’가 돼버려요. 

마치 밭을 갈 권리가 있는 것처럼 그런 착각을 하죠. 그렇게 되면 그 사고방식은 뭐냐 하면 자기밖에 모르는 근시안적이라는 이야기를 합니다. 근시안적. 아주 코앞에 있고 눈앞에 있는 것만 아는 거예요. 그것만 쳐다보고 사는 겁니다. 우리 연세 좀 든 사람이 젊은 사람들보고 ‘철딱서니 되게 없다’라는 소리 하죠. 그게 무슨 뜻이냐 하면 바로 코앞에 있는 것만 생각하는 거예요. 빨간 스포츠카 타고 돌아다니고 남은 시끄러운데 음악 크게 하고. 근시안적이에요. 아주 짧은 거거든요. 

그런데 남 욕할 게 아니죠. 결국, 인간이라 하는 것은 누구나 다소 차이는 있지만 근시안적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주신 거예요. 이스라엘을 통해서 그들이 가지고 있는, 이스라엘이나 우리나 똑같으니까, 그들이 가지고 있는 근시안적인 사고방식이 어떻게 큰 그림 속에 하나의 퍼즐 조각으로 그들이 박힐 수 있었는가 하는 것을 선배 되는 이스라엘을 통해서 먼저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겁니다. 

그들이 훌륭했었다? 아니요. 그들이 침착했었다? 아닙니다. 그들은 성실했다? 아닙니다. 그들은 책임감 있게 움직였다? 절대 아닙니다. 그냥 약속의 땅을 주신 겁니다. 왜냐 하면 약속의 땅에 있었던 원주민들은 그렇게 만만한 자들이 아니었어요. 나가 달라고 나갈 사람들이 아니고 부탁한다고 부탁 들어줄 사람이 아니에요. 

제가 오전 설교에서 그런 이야기 했지만, 이 세상은 절박함과 살벌함밖에 없다고요. 왜냐 하면 자기 자신만을 챙겨야 하니까. 자기 자신이 우선이니까. 절박함이에요. 그래서 유명한 영화 대사 가운데 이게 있잖아요. “뭐가 중한디?” 곡성에 나온 영화 대사죠. “뭐가 중한디?” 세상에 중요한 것이 뭐가 있느냐는 겁니다. 

내가 살아남는 거 외에는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어디 있느냔 말이죠.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사는 거예요. 내가 사는 게 중요하지 남 살리는 거 중요하지 않습니다. 내가 사는 거란 말이죠. 그러니까 이건 근시안 적이 되고 가까운 것에만 욕심낼 수밖에 없죠. 과연 그런 근시안적 인간들이 천국을 만들고 하늘나라를 만든다면 그건 하늘나라가 될 수가 없어요. 

아마 하나님도 죽여버렸을 거예요. 그래서 그들 이스라엘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죽임을 당했습니다. 너희들 손에 죽임을 당했거든요. 그게 오늘 설교에 핵심이 됩니다. ‘바닥’. 인간은 자기 바닥을 몰라요. 그래서 평소에 인간들이 세상에 나가면서 자기 바닥을 너무 높이 설정해 놓습니다. ‘나는 이 정도 내려가면 자살할 거야’라고 높아도 너무 높이 바닥을 설정해 놓은 거예요. 

바닥을 설정할 때에 자기가 평소에 성장해 오면서 자기 자아 정체성(Identity)이라고 하는데 자기 정체성 안에 꽉꽉 차 있는 욕심을 근거로 해서 여유롭게 자기 딴에 바닥을 잡은 게 뭐냐 하면, “어머님, 아버님, 적어도 결혼하는 작은 아파트 15평짜리라도 신혼집은 아파트 하나 가지고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그저 뭐 결혼할 때 아무것도 해달라 소리 안 할 테니 2억5천만 원 하는 집 하나 마련해 주시면 좋겠습니다”라고 하거든요. 

자기 딴에 바닥으로 아주 겸손에 겸손을 다해서 이 정도, 2억 5천 하는 아파트 하나면 아주 없다시피 시작해서 둘이 열심히 살겠다고 하는 거예요. 2억 5천짜리 집 하나만 해달라고 하는 거예요. 부모입장에서 기가 차죠. 자기 신혼 때는 비키니 옷장, 참 여러분에게 오랜만에 이야기합니다만, 가스버너 하나 딱 들고 부엌도 없이 거기서 둘이 같이 산다는 그것만 족해서 살았는데 무슨 전세도 아니고 집 하나 마련해 달라고 하니 부모가 이야기하죠. “아이고, 내가 아들 낳은 것이 죄다.” 

아들 낳은 것이 죄예요. 그럼 딸 낳아서 보상받아야 하는데, 이게 아들이기 때문에 그렇게 해야 한다는 그런 법칙은 또 어디서 누가 만들었어요? 아들이니까 집 해주고 딸이니까 다른 거 해준다는 거. 그러니까 젊은 사람들이 너무나 철딱서니 없다는 것은 쉽게 말해서 자기 바닥을 모르는 거예요. 

어떤 사람이 이런 이야기 했습니다. 자기 고생한 옛날이야기 하면서 어떤 장벽이 있을 때 나는 도저히 뚫을 수 없는 장벽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 장벽을 보고 다른 사람은 좌절하겠지만 나는 마음을 단단히 먹고 그 장벽을 뚫을 수는 없어도 그걸 기어 올라가는 담쟁이는 될 것이라는 의지를 다졌다는 이야기가 나왔어요. 김종환이가 이야기 한 겁니다. 

꾸역꾸역 찰싹 붙어서 올라가면 언젠가는 그 높은 담도 그 담쟁이의 강력한 생명력으로 넘어갈 수 있지 않겠는가 하는 거예요. 그 김종환 씨가 놓친 게 있어요. 담이 같이 높아진다는 사실을 몰랐어요. 우리가 뛰어넘을 수 있을 거 같으면 담쟁이처럼 되는데 얼추 올라갔다 싶으면 담이 전에보다 더 높아져 버리는 거죠. 

전에는 방 하나만 있어도 둘이 산다고 했는데 지금 30대 신혼부부는 집 한 채 소유는 아니라도 전세라도 부모가 마련해 줘야 부모 값을 한다고 그렇게 나름대로 바닥을 설정했습니다. 그러나 그 인간들은 바닥에 바닥을 모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로 바닥에 바닥을 몰라요. 빌립보서 2장 5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너희는 예수의 마음을 품으라” 예수의 마음. 

그게 어떤 마음인데요? 뭐 착한 거요? 훌륭하게 사는 거요? 아니에요. 예수님만이 근사하게 보이고 그럴싸하게 보이는 인간의 제일 밑바닥, 아무도 가지 못할, 갈 수 없는 그곳에 주께서는 먼저 선점해서 가 계셨습니다. 그리고 오라는 거예요. “이 마음을 품어라. 오직 십자가에 죽어 마땅한 마음을 품어라. 네가 바닥을 계산해? 네가 바닥을 계산할 그런 능력이 되느냐?” 

바닥은 주님이 계산하는 거예요. 지금 바닥을 쳤겠지. 증권 시세 보면 바닥을 치고 올라갔다고 하는데, 뭐 IMF 터져 봐야 주식 갖은 자체가 돈 가진 자체가 재앙이 되는 걸 알아요. 베네수엘라 보세요. 돈 가진 것이 재앙이에요. 현물이 없이 돈 가진 것이 재앙이에요. 종이 조각 가지고 뭐 할겁니까? 인플레가 200만 프로 뛰었는데요. 

약속의 땅이라고 하는 것은 지금 땅에 거주한다고 다가 아니에요. 좋아들 하면 안 돼요. 지금 여기 거주하는 르우벤 지파의 인원수가 43730명이에요. 그리고 전쟁에 나갔던 인구수가 46500명이에요. 이들이 전쟁에 나갔으니까 자기 지분 가질만한 자격 되겠지요? 그래서 “전쟁에 나갔으니까 지분 주세요. 우리도 그만큼 기여했으니 내 권리 있습니다”라는 식으로 한다면 이거는 약속을 전혀 이해 못 하는 겁니다. 

전쟁했고 수고했으니까 수고비 정도로 자기 지분의 땅을 가지는 것이 당연하지않은가? 우리가 겉에서 보면 그렇게 보입니다. 육적으로 보게 되면. 그러나 르우벤 자손을 보게 되면 하나님의 바닥이 어떤 것이냐를 보여줍니다. 창세기 35장 22절에 보면 “이스라엘이 그 땅에 거주할 때에 르우벤이 가서 그 아버지의 첩 빌하와 동침하매 이스라엘이 이를 들었더라” 통간 하매. 

자기 친엄마는 아니고요, 그 친엄마의 여종도 아니고, 자기 엄마가 또 있거든요, 그 엄마의 여종과 통간 했다는 이야기를 이스라엘 야곱이 그걸 들었습니다. 그 들었던 여파가 창세가 49장 마지막에 열두 아들 지파 축복할 때 그것을 그대로 거기에 적용합니다. 야곱이 뒤끝 있습니다. 그때의 일을 잊지 않고 있어요. 그런데 이것이 인과응보 차원이 절대 아닌 것을 여러분이 아셔야 해요. 

49장 3절에 보게 되면 “르우벤아 너는 내 장자요 내 능력이요 내 기력의 시작이라”라고 되어 있어요. 문맥은 아주 간단하게 되어 있습니다만은 인간이 감출 수 없는 인간의 본성을 대변해 주고 있습니다. 부모가 자식을 낳게 되면 남자도 그렇지만 특히 여자가 더 그러는데요, 이건 타고 났어요. 자식에게 모든 것을 몰빵합니다. 다 퍼붓습니다. 자식에 대해서. 

왜냐 하면 이건 생물학에서 동물들에게 어미의 본성으로써 그래야 이 자연 세계가 새끼를 계속 낳게 되지, 만약에 어미마저 돌보지 않으면 멸종하기 때문에 자연의 이치라고 하는데, 자연의 이치라고 하는 것은 네 자로 무슨 뜻이냐면 ‘모르겠다’라는 뜻이에요. 모르겠다는 뜻이에요. 제가 아침에 이야기했지만, 인간을 창조했다는 말은 창조부터 출발한 것이 아니고 다시 근원으로 되돌아가야 한다는 말입니다. 인간이 없었던 곳으로. 

없었던 곳이 뭐냐, 주님이 계시는 곳으로 되돌아가야 해요. 그것 때문에 피조물을 만든 거예요. 고무줄이 늘어나는 것은 고무줄에게 독립하라는 것이 아니에요. 손 놔봐라. 다시 쫙하고 다시 원래 위치로 가지요. 우리는 없는 존재거든요. 없는데 있게 된 것은 있음을 쥐라는 말이 아니고 있음 속에서 창조자의 창조 원리를 담아내라고 잠시 잠깐 우리가 이 땅에 살게 하는 겁니다. 

따라서 르우벤이 그 서모와 통간 했다는 것, 간통했다는 것, 이것도 잘못했다거나 나쁜 짓 했다고 생각한다면 여러분 성경 잘못 보신 거예요. 그랬어야 했던 거예요. 참, 죄를 부추겨도 이렇게 잘 부추길 수가 없습니다. 그랬었어야 하는 거예요. 누구의 이름으로? 그것도 장자의 이름으로. 

장자라는 말이 나와서 하는 말인데 장자나 둘째나 다 같은 자식이니까 손가락 깨물어서 안 아픈 손가락 없다 하는데 그건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이에요. 자식 열 명을 낳아도, 장자 한 명을 대체 못 합니다. 그게 부모가 몰입해서 장자에게 다 준거예요. 둘째가 부모를 섬겼다 하고 셋째 딸이 12년 동안 치매를 다 봉양했다고 하면 ‘이쯤 해서 부모는 나에게 유산을 더 많이 주겠지? 부모도 양심이 있으면 나에게 뭔가 더 큰 유산 남기겠지?’라고 자식들이 생각한다면 이 장자 몰빵의 위력을 몰라서 그래요. 

장자는 뭐 전부 다 집안 말아먹고 사업한다고 다 털어먹고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놓고 빈털터리로 형제들 괴롭히니까 그리고 평소에도 부모님이 너는 내 자식 아니라고 호적에서 판다고 나가라고 했으니 아마 지분 분배할 때 장자에게는 안 줄거라고 생각한다면 엄청난 오산이십니다. 모든 재산은 큰아들에게 다 갑니다. 제사 지내주기 때문에. 

큰아들이 나의 대체물이에요. 큰아들 없는 나는 없어요. 큰아들 살았으면 나는 살아있는 거예요. 그걸 가지고 뭐라 하느냐면 “너는 내 장자요 내 능력이라” 나는 안 죽었다는 말입니다. 장자가 있는 한 나는 안 죽었다는 말입니다. 동생들은 장자 중심으로 뭉치라는 거예요. 동생들은 그러죠 ‘장자 꼬라지 하고는...’ 부모입장에서 생각 못 하는 거예요. 

부모에게는 장자와 장녀가 곧 자기 자신이에요. 실제로 장녀와 장자는 좀 달라요. 동생들과는. 부모 생각하는 게 남달라요. 이런 이야기 하니까 내가 웃음이 나는데요. 엄마가 사는 집을 처리하는데도 장자는 눈물을 흘려요. 이제는 세금 나오기 때문에 명의를 바꿀 때 마지막 인감도장을 내면서 “동생들아 이 인감도장 못 내겠다. 내가 이거 주면 어머니의 끈과 마지막 이별하는 거 같아서 가슴 아파서 못 내겠다.” 하거든요. 결국 찍어 놓고. 

그 형님이 얼마나 애먹였는지 돈 벌면 그 형님 다 주고 형님은 다 털어먹고 또 주면 또 털어먹고 그래도 부모에게는 장자밖에 없습니다. 세상에 창세기 49장이 실감 나요. 둘째 아이 임신했다고 칩시다. 그러나 아이를 갖을 수 있을지 없을지 하며 낳게 된 첫째 아이의 기쁨이 둘째 아이 낳았다고 그게 둘째 아이에게 가는 게 아니에요. 첫째 아이에게 그대로 살아있어요. 둘째 아이 아무리 재롱떨어도 소용없어요. 첫째 아이가 최고예요. 

부모뿐만이 아니고 첫째 아이를 지켜보았던 모든 할아버지 할머니부터 친척들까지 마찬가지예요. 그게 장자입니다. 그 장자가 형제를 대표해요. 대표하는 작자가 통간한 거예요. 왜? 바닥이기 때문에. 훌륭한 사람은 천국 가고 나쁜 사람은 지옥 간다고요? 우리의 장자가 누구입니까? 예수님이잖아요. 예수님이 어디 갔습니까? 저주받았어요. 십자가에서. 

우리의 바닥입니다. 우리가 감히 근접할 수 없는 바닥이고 우리 인간을 창조하실 때에 그 장자 중심으로 그 저주 중심으로 우리를 창조했다는 사실을 어느 인간도 받아들이기 힘든 거예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축복 주려고 창조한 것이 아니고 예수그리스도에게만 복이 갈 수 있도록 우리를 시다바리로 만든 거예요. 

건물 지을 때 원래 본체 있고 중간에 보조 있는데 보조로 만들어 놓고 보조를 털어내는 거예요. 마치 조각품이 조각을 만들 때 안에 동상 만들 때 그 안에 다른 물질 집어넣어서 다 털어내잖아요. 석회질 같은 거 다 털어내고 석고 다 털어내고 하잖아요. 지금 우리 안에 누구 있느냐를 묻는 거예요. 네 안에 너만 있느냐 아니면 예수님이 들어있느냐를 묻는 겁니다. 

주께서 만드시는 영원한 인간은 죽었다가 살아나는 경험을 가져야 해요. 씨앗이 있어야 해요. 창조의 잉태라는 창조의 씨앗이 있어야 해요. 한 알의 밀알이 있어야 해요. 그 밀알이 우리가 하지 못한 거 해 내신 분입니다. 죽었다가 사흘 만에 살아나는 거. 우리가 이 성경을 보면서 이게 조금도 트릭을 쓰거나 술수를 쓸 수 없어요. 왜냐 하면 르우벤 자손이 실제로 땅을 가졌기 때문에. 

제가 이스라엘 가면서 지금 지나서 생각해 보니 왜 예루살렘이 가면서 어디서 그렇게 충격을 받았느냐 하면 이게 실제 예수님의 부활이 실제 상황이라는 거예요. 쉽게 말해서 이건 목숨 걸어도 소리 안 난다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 죽으심과 부활. 이게 하나의 소설 같으면 그냥 읽고 집어 던지는 거예요. 소설이니까. 지어낸 만화책이니까. 전설이기 때문에. 

사람이 한평생 살면서 자기 목숨 걸 때 있다는 것만큼 행복한 것이 어디 있겠어요. 이거 집적대고 저거 집적대고 뭐 음식점 해보다가 인테리어 해보다가 이거 집적 저거 집적했는데, 백종원이 이야기입니다. 그게 아니고 지금 이게 내가 그냥 착각하는 게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망상을 꿈꾸고 있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울었어요. 예수님 시신이 누웠던 돌이 있거든요. 하도 만져서 반질반질해요. 그런데 어떤 북유럽 사람이 엉엉 울어요. 거기에서. 내가 이렇게 진실 된 것을 앞두고 거짓된 세상 유행과 남들 뒤꽁무니 쫓아다니면서 헛짓하는 것이 너무나 후회스러운 세월들을 보낸 것을 생각하면서 우는 거예요. 이미 우리는 확정 되었는데. 아직도 헛바람, 봄바람에 빠져서 이쪽 바람 불면 이쪽으로 저쪽 바람불면 저쪽으로 계속 허황된 거 찾아다녀요. 

실제로 분명하고 확실한 것은 우리가 바닥에 참여해야 한다는 사실, 우리가 설정한 바닥은 아직 바닥 근처도 안 갔습니다. 더 내려가야 해요. 그래서 여기 3절에 보면 “위풍이 월등하고 권능이 탁월하다마는” 마는. ‘마는’이라고 했어요. 4절에 보면 “물의 끓음 같은즉 너는 탁월하지 못하리니 네가 아버지의 침상에 올라 더럽혔음이로다 그가 내 침상에 올랐었도다” 

이거는 뭐냐 하면 근시안적으로 보지 말고 대규모로 보게 되면 예수 안에서 벌어진 일입니다. 신약에 예수 안에서. 예수 안에서는 어떤 자들이 올 수 있다? 아버지 침상에 올라서 통간한 자도 축복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인 것을 르우벤이 보여주고 있으니 인간의 바닥을 보여주고 있으니 우리는 “나는 안 그랬어요~”라고 하지 마세요. 

나와 상관없다고 하지 마세요. 장자입니다. 장자가 갖고있는 DNA나 둘째 셋째가 가지고 있는 DNA나 동일한 DNA예요. 장자는 대표해서 보여준 겁니다. 창세기 29장에 보면 야곱의 두 부인이 나오고 경쟁적으로 자식 11명을 낳고 나중에 마지막 한 명 더 낳아서 12명 낳습니다만 거기에 제일 먼저 태어난 자손이 르우벤입니다. 르우벤에 대해서 뭐라고 했느냐 하면 이렇게 되어 있어요. 르우벤이라고 하고 따로 설명했어요. 

르우벤이라는 뜻은 ‘보라 아들이라’는 뜻인데 32절에 보면 “레아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르우벤이라 하여 가로되” 원래 르우벤 뜻은 아들이란 뜻이에요. ‘벤’이라는 뜻이 히브리어로 아들이란 뜻이에요. 그런데 뭐라고 추가를 했느냐 하면 “여호와께서 나의 괴로움을 돌보셨다”라고 했어요. 

그러니까 이게 뭐냐 하면 인간은 자식이 없으면 괴롭다는 거예요. 이걸 풀이하게 되면 정말 우리가 우리 안에 그리스도가 없으면 괴로워야 해요. 나만 덜렁 있는데 좋다고 휘파람 불면 안 돼요. 왜냐 하면 이것이 어려운 말로 ‘언약’이기 때문에. 언약이 침투해서 내 안에서 새끼를 까요. 이걸 두 자로 뭐라 하느냐 하면 ‘숙주’라고 합니다. 숙주. 

숙주라 하는 것은 세균이라는 병원체가 자기 집을 대신해서 남의 집에 들어와서 새끼를 까고 자기는 도망치는 것을 숙주라 하거든요. 우리는 주님을 잉태하는 주님의 숙주입니다. 주님을 우리 몸을 이용해서 자기 자신을 새끼 깐 거예요. 피조물로서는 자존감 존엄성 스타일 구기겠지만 피조물은 그 역할이 천사도 부러워하는 영광된 역할입니다. 

다른 엄청난 거 기대하지 마세요. 복 달라고 하지 마세요. 그냥 숙주 된 것만도 천사들이 와서 “와 부럽다. 네가 그리스도를 잉태하다니. 얼마나 좋겠느냐”라고 천사들이 그래요. 실제로 천사들이 예수님 잉태한 마리아보고 그렇게 부러워하고 좋아했습니다. “복되도다” 여러분 뭐 재산 많아서 복되었습니까? 몸 아프다가 건강해져서 복되었습니까? 뭐 때문에 복된 거예요? 

그리스도가 미천한 계집을 사용해서 숙주로 사용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잉태했으니까, 세상에 하나님을 잉태했으니까 이게 얼마나 그 운반체로써 영광스럽습니까? 유명한 연예인이 안아만 줘도 소녀들이 좋아서 눈물을 주룩 흘리는데, 주님께서 우리 속에 들어올 때 우리는 뭘 몰랐느냐 하면 너무 시건방졌어요. 왜냐면 독자적으로 나는 남에게 안 지려는 그런 고집 같은 것을 우리가 이 시대에서 배웠습니다. 

이 세대가 우리에게 가르친 것은 네가 고집 있어야 한다는 그것을 가정에서나 사회에서나 학교에서나 교회에서 그걸 우리에게 계속해서 사주했어요. 그게 우리는 납득이 된 거예요. 우리는 원래부터 한 고집들 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걸로 격려받고 한 거예요. 그런데 실제로는 그런 게 아니고 바닥을 모르고 우리 자신을 계속 모르고 있는 거예요. 우리 자신이. 

우리가 무엇을 위해서 만들어졌다는 그 기능과 용도를 우리가 몰랐던 거예요. 남에게 기 안 죽으면 되는 줄 알았어요. 그게 인간 성공인 줄 알고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마리아가 예수님 잉태해서 얻어 챙긴 것이 뭐가 있어요? 낮에도 그런 이야기 했습니다만 제가 수련회에서도 이야기하고요. 사랑의 반대말은 미움이 아니고 힘이었다는 점에서 깜짝 놀랐다는 겁니다. 

사랑의 반대는 힘이에요. 미움은 사랑과 같이 있어요. 밉다는 사랑이 있어야 미움이 생기니까. 사랑의 반대말은 미움이 아니고 힘이란 말이죠. 왜? 힘이 있을 때는 사랑이라는 것도 하나의 에피소드에 지나지 않아요. ‘힘이 있는데 그 까짓것 사랑 그거는 오락이지’라고 치부되어 버려요. 여기서 사랑을 알려면 힘을 쭉 빼야 합니다. 쭉쭉 힘을 빼야 해요. 힘을 빼고 주께서는 사랑을 위해서 자기 자신을 깨버렸습니다. 

이 땅을 줬다는 것은 얻을 수 없는 땅을 얻은 거예요. 물론 에덴 동쪽이지만. 그 땅을 통해서 그들은 뭐를 아느냐 하면 사랑이 분사된다는 말을 했잖아요. 분사. 뿌려진다는 거요. 사랑은 깁스해도 뿌려질 거고, 온몸을 깁스해도 사랑이 뿜어져 나올 거예요. 사랑을 생각할 때 이렇게 생각하시면 제일 편합니다. 초등학교 아이들 하교 길에 교문에 한번 서 있어 보세요. 아이들이 쏟아져 나오지요. 

사랑은 말릴 수가 없습니다. 입이 근질거려서 뭔가 이야기를 해야 해요. 뭐가 터져 나온다고요. 그거 보면 우리교회 교인들은 성질도 참 침착해요. 입을 꽉 다물고 입에 깁스한 거 같아요. 사랑이 있으면 이 사랑을 언급 안 하고는 있을 수가 없어요. 사랑이 나오는 거예요. 사랑이 나와야 하는데 힘이 막 나와요. 자기 자랑이 힘이 나온다면 도대체 이게 숙주인지 아니면 독자적으로 주님 이용하는 건지 분간이 안 되잖아요. 

그것은 아직 우리가 바닥을 안쳐서 그래요. 꼭 우리가 고생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재산 다 날리라는 말이 아니고 십자가가 있으면 그 앞에 필수적으로 우리는 피를 보고서 죄인일 수밖에 없어요. 우리는 죄인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모든 게 하교 길에 아이들 나오듯 우리 몸에서 사랑만 감사와 고마움만 분사되는 겁니다. 이게 바로 주기도문에 내용이에요. 

그 까짓것 용서해 주지 뭐. 겉옷 달라 하면 속옷 던져 주지 뭐. 오른뺨을 치면 왼뺨 내 주지 뭐. 왜? 나는 바닥이니까. 이것이 바로 숙주의 기능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그저 얻은 게 아니고 그저 양식 받은 게 아니고 그저 한평생 산 것이 아니고 주님의 희생 바닥 위에 십자가의 공로를 증거 하라고 숙주로서 살게 하신 것을 감사합니다. 남만 보고 죄지었다고 욕할 것이 아니라 아직도 그 바닥에 이르지 않는 우리 자신을 책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