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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화목(수12;1) 190203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9. 2. 4. 09:09
2019-02-03 15:01:17조회 : 33         
   전쟁과 화목190203이름 : 이근호 (IP:119.18.87.190)   

전쟁과 화목(여호수아 12:1)

음성        동영상      Youtube

 링크 : https://youtu.be/qNwNdwcUOcw, Hit:3
 이근호19-02-03 16:14 
전쟁과 화목  

2019년 2월 3일           본문 말씀: 여호수아 12:1 

(12:1) 이스라엘 자손이 요단 저편 해 돋는 편 곧 아르논 골짜기에서 헤르몬 산까지의 동방 온 아라바를 점령하고 그 땅에서 쳐 죽인 왕들은 이러하니라 

하나님께서 전쟁을 벌리십니다. 분명 하나님의 힘으로만 승리가 주어집니다. 그런데 여기에 이스라엘이 참전해야 하는 이유가 뭘까요? 단순히 결과적으로 신나기 위해서입니까? 아닙니다. 도리어 두려움을 안겨줍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지혜와 능력을 초월하는 현장 속을 누비기 때문입니다. 

초월적인 결과는 인간으로 하여금 자족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의미에 대해서 새삼스럽게 생각하게 만듭니다. 스스로 뭔가 이룰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이 얼마나 큰 교만이며 하나님으로부터 적대적 입장임을 알게 합니다. 구약의 전쟁이 구약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에도 동일한 원리가 작용하는 전쟁이 있습니다. 

에베소서 6:12에 보면,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자, 과연 여기에 적용되는 전쟁의 원리가 구약의 원리가 동일한 지를 살펴볼 필요성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벌리는 전쟁의 마감은 ‘화목’ 또는 ‘화해’입니다. 그런데 이 ‘화목’은 이 세상에서 그리워하는 그 화목은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는 더불어 살고 싶어합니다. 단순히 친한 사람끼리 정나누며 사는 정도 아닙니다. 경제적으로 홀로 경작하고 홀로 살려고 애쓰는 것보다 공동체 내부에 분업작업을 통해서 수 십배 수 백배의 생산물을 도출하게 됩니다. 

경제적으로 삶이 풍성하게 되는 겁니다. 많은 여유로움 속에서 화목과 평화를 누릴 수 있다고 보는 겁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의 인식에 의하면 다툼이나 분쟁이란 넉넉지 않는 제한된 생산물 때문이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가족 공동체나 사회 공동체나 국가 공동체나 모두 이런 경제적 실익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더불어 전쟁에 나서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 아닙니다. 외롭다든지, 경제적 이익 때문이 아닙니다. 과연 인간이 무서운 하나님과 화목이 가능한가를 놓고 실험하시는 겁니다. 이 전쟁은 기존의 모든 인간들에 의해서 국가 공동체, 민족 공동체에 대한 말살을 시도하는 식으로 진행입니다. 

왜 기존의 인간 공동체가 하나님으로 일체 인정받지 못하는 겁니까? 로마서 3:23-25에 보면, 그 이유가 나와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고 되어 있습니다. 

즉 인간이 시도하고 생각하는 모든 것이 ‘하나님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과 판정 내려진 형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과 하나 되기 위해 조치가 취해지는데 그것이 바로 ‘그의 피로 말미암아’입니다. 구약 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서 취할 태도는 무서움, 곧 경외하심입니다. 

그런데 신약에 와서는 ‘피 앞에서의 자기 부정’입니다. 존재 자체가 더럽고 추한 것임을 인정해야 하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전쟁의 대상이 특정 공동체가 아니라 모든 각 개인들입니다. 자신이 자신의 적으로 간주해야 한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생각하는 새로운 공동체와 그 만드시는 과정은 에베소서 2:16-17에 나와 있습니다.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즉 새로운 공동체는 인간들의 정으로 맺어지거나 혈육으로 맺어지는 공동체가 아니라 예수님의 피로 나타나는 공동체입니다. 

인간들의 공동체 내부에는 각자 자기 잘남과 의로움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에 결국에 자신에게 실익이 없으면 그 공동체를 버리고 떠나게 마련입니다. 그렇게 해서 떠나 아무리 새로운 공동체를 형성한다 할지라도 금새 자신의 실익을 그 공동체 안에서 계산하기 마련입니다. 진정 하나님과 함께 하는 평안이 아니라 오로지 자기 평안을 위해 타인의 희생을 요구하는 일시적 평화입니다. 

주님께서 생각해두신 이스라엘은 ‘인간 부정’을 근거로 해서 조성되는 그런 이스라엘입니다. 신약에 나오는 ‘피’의 의미를 살려서 그 원리가 중심으로 해서 새로 조성되는 이스라엘입니다. 그렇다면 구약의 전쟁에서 ‘인간 부정’ 혹은 ‘인간 행함의 부정’의 의미를 어떤 식으로 마련될까요? 

여호수아 11:20에 보면, “그들의 마음이 강퍅하여 이스라엘을 대적하여 싸우러 온 것은 여호와께서 그리하게 하신 것이라 그들로 저주받은 자 되게 하여 은혜를 입지 못하게 하시고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대로 진멸하려 하심이었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진멸’조차도 하나님께서 일을 하시는 수순에서 빼놓을 수 없는 절차라는 겁니다. 

로마서 1:24에 보면,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저희를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 버려두사 저희 몸을 서로 욕되게 하셨으니”고 되어 있습니다. 필히 ‘내어 버려두심’이 일어나야만 합니다. 아무리 사람들이 구원되고자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내어 버려 두고자 하시는 의지를 이길 수가 없는 겁니다. 

즉 주님께서 ‘강퍅케 ’하시는 겁니다. 적극적으로 말입니다. 이런 내용은 출애굽기 7:22에서도 나옵니다. “애굽 술객들도 자기 술법으로 그와 같이 행하므로 바로의 마음이 강퍅하여 그들을 듣지 아니하니 여호와의 말씀과 같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어느 한 순간도 참된 이스라엘 만들기에 인간 스스로 조성되지 않게 하십니다. 

바로 오늘날의 영적 전쟁이라 것도 이 원리에 입각한 전쟁입니다. 인간들의 자기 행함이나 자기 의지나 자신의 열심 으로 주의 일이 되도록 용납하지 않습니다. 주의 일은 도리어 자기 부정과 부정을 통해서 연속적으로 진행케 합니다. 일방적으로 하나님께서는 뽑는데 대해 반감을 갖고 있다면 그것이 바로 영적 전쟁을 통해서 드러나는 ‘강퍅’입니다.  

세상적으로 세상이 이긴 것이 하나님의 전쟁의 승자의 모습이 아니라 도리어 “저같은 것 왜 챙겨주십니까?”라는 반문의 형식으로 하나님의 전쟁에 찬양해야 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겸손을 빙자의 교만의 실체를 저희들의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19-02-03 23:18 
222강-여호수아 12장 1절(전쟁과 화목)20190203-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여호수아 12장 1절입니다. 구약성경 338페이지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요단 저편 해 돋는 쪽 곧 아르논 골짜기에서 헤르몬 산까지 동방 온 아라바를 하고 점령하고 그 땅에서 쳐죽인 왕들은 이러하니라” 

“쳐죽인 왕들은 이러하니라” 사람을 사람으로 가치 있게 보지를 않습니다. 어디에서 그런 현상이 일어나느냐. 하나님의 전장에서 그런 현상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전쟁이 없다면 사람은 사람의 이유 때문에 가치 있는 게 되는 겁니다. 여호수아를 우리가 보면서 이스라엘 전쟁은 지금은 끝났다고 사람들은 그렇게 편하게 생각합니다. 

끝나지 않았습니다. 사도바울이 말하기를 영적 전쟁을 계속하고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의 싸움이 아니고 공중권세 잡은 영적인 이 세상 신과의 싸움을 계속 벌이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전쟁의 범위가 확산된 겁니다. 이것은 사람이 역사 속에서 내 영토, 내 가족, 내 노력한 거, 내가 평생토록 일궈 온 이 터전을 지키기 위한 인간 대 인간의 싸움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구약에 나오는 이스라엘 전쟁이 그냥 내 영토 지키기 전쟁이라면 누가 나쁘냐 하면 침략자인 이스라엘이 나쁜 자들이에요. 멀쩡하게 잘살고 있고 평화로움을 유지하고 있는데 이들이 와서 남의 땅, 가나안 토착민들을 공격하잖아요. 이 사람들이 나쁜 거예요. 사람들은 화평을 원합니다. 제발 좀 조용하게 살도록 놔두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요. 

그런데 과연 본인이 조용하게 살 수 있는 권한이 있는지에 대해서 어느 것도 참조하지 않고 묻지도 않아요. “나는 행복하고 싶습니다.” “왜 네가 행복해야 하는데?” “그런 건 묻는 거 아닙니다.”라고 하겠죠. 왜 내가 행복해야 해요? 왜 내가 조용한 인생이 되어야 합니까? 그것을 가지고 제가 지난 시간에 이야기했듯이 그것을 욕심이라고 했습니다. 욕심. 

욕심 때문에 자기 자리를 떠난 겁니다. 지금 인간이 나타내고 있는 것은 내 자리 아니라는 티를 다 내고 있어요. 이 자리는 내 자리 아니다. 내가 인생 살아가는 사고방식은 이것은 원래 하나님이 원하는 내가 아닌, 이거는 엉뚱하게 하나님이 싫어하는 쪽에서 강요하는 인간상을 가지고 우기고 있는 겁니다. 

억지를 부리고 있는 거예요. 아까 점심시간에 우리 이상규 집사님이 저에게 제안했습니다. 그렇게 목이 안 좋고 몸이 안 좋으면 좀 쉬시라고 그렇게 이야기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렇게 답변을 했습니다. 복음이라는 것은 내가 알고 그 자리 가서 전달하는 게 아닙니다. 그거는 강사지요. 강사. “여러분, 이거 모르죠? 내가 알고 있으니까 가서 전하겠습니다. 그러니 여러분들은 내 제자 되시고 나는 스승 되겠습니다” 이거는 일반 강사예요. 

나도 몰라요. 몰라. 하지만 그 현장에 가야 비로소 알아요. 그 현장에. 말씀으로 모인 그 사건 안에서 비로소 ‘아, 진리의 이런 면이 있었어?’라고 새삼스럽게 아는 겁니다. 뭘 알고 들고 가는 게 아니에요. 오히려 이런 거예요. ‘나 이런 것밖에 모르는데 이것밖에 모르니까 이것 대체할 새로운 것 주시옵소서’라는 마음으로 가는 거예요. 

왜냐면 지금껏 내가 그거 알게 되면 그것 자체가 내게 우상화되기 때문이에요. 내 자신이 이걸 안다는 자체가 내가 이제는 스스로 설 수 있다는 가능성을 자꾸 내비치는 거예요. 이거는 피조물답지 못한 거예요.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어떤 사건이 있을지 그거는 내 소간이 아닙니다. 

그 이유가 뭐냐? 그 이유는 단 한 가지입니다. 주님이 지금 살아있기 때문에 그래요. 주님이. 내가 살아있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살아있어서 그래요. 우리는 어디에 관심있느냐 하면 내가 살아있는 것에 관심이 있어요. 내가 살아있는 것에 관심있다보니까 이 살아있는 것을 건강하게 유지하려고 전력을 다합니다. 

어떻게 몸을 조심하고, 좀 쉬고. 그 쉰다는 게 뭐예요? 저는 쉬는 게 뭔지를 모르겠어요. 쉰다는 게. 쉰다는 게 뭐예요? 쉬려면 천국 가서 쉬어야 합니다. 이 땅에서는 쉴만한 곳이 없어요. 찬송가 백날 불러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이곳에 내 쉴 곳 없다고 말만 그러지. 쉬겠다는 것은 뭘 노리냐 하면 다음에 건강한 내 모습을 기대하고 있는 거예요. 

내가 아는 건강은 주께서 주셨을 때만 건강한 것으로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만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건강은 내가 관리하는 게 아니에요. 건강하고 싶다고 건강하고 안 죽고 싶다고 안 죽는 게 아니에요. 주께서 매일같이 은혜 주셔서 살아가는 겁니다. “네 건강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고 사람은 말씀으로 산다” 

우리가 건강해 보세요. 건강해서 어디에 써먹을 건데요? 놀러 갈 생각해요. 맛있는 거 먹을 생각하고. 자기 욕심을 긍정하고 자기 욕심을 구체화 시키는데 거기에다 전력을 다합니다. 에너지를 다 쏟아요. 그래서 남는 게 뭐냐? ‘나는 살만한 가치 있다. 으싸으싸’ 그것만 달랑 남았어요. 그것만. 그 살아있음이 누구의 살아있음을 가리느냐. 예수님의 살아있음을 가리는 겁니다. 

영적 전쟁을 할 때 사도바울이 자기 몸 아픈 것 가지고 얼마나 기도했는지 세 번이나 기도했어요. 이 뜻이었습니다. 건강해야 복음 잘 전한다. 철딱서니 없었지요. 그때는. ‘주여, 이 몸 가지고는 안되고 몸이 깨끗하게 나아야 깔끔하게 전할 수 있습니다’ 주님이 하신 말씀은 “네 은혜가 네게 족하다. 말씀을 전하고, 누구를 천당 보내고, 누구를 지옥 보내는 것은 네 소간 아니다” 

네가 말씀 전한다고 네가 한 명이라도 건질 수 있느냐. 한 명도 못 건집니다. 제자들이 건진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습니다. 주님이 다 건졌지요. 사도를 보내는 것은 사도 자신을 보내서 예수님이 하시는 일을 발산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 거예요. 

사도는 전쟁이라는 것을 압니다. 전쟁하는 이유가 뭐냐? 신약 성경에 전쟁하는 이유는 바로 기존에 모든 거짓 화목을 다 뭉게버리고 새로운 화목으로 일치시키는 거예요. 그것이 로마서 3장에 나와요. 로마서 3장 읽으면서 이때 화해는 화목은 무엇으로 뭉쳐진 연결된 화해인가를 여러분이 아셔야 해요. 로마서 3장 24~25절에 보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하나님이 말하는 평정이라는 거, 모든 갈등을 해소하는 것은 그냥 내가 존재한다는 존재에 관한 것이 아니에요. 사람이 존재 있고 내가 존재하고 네가 존재하고, 내가 있고 네가 있어 버리면 거기서 반드시 뭘 추구하느냐 하면 공동체를 추구해요.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을 뭐로 표현하느냐 하면 정치적 동물로 표현했어요. 사회적 동물. 인간은 홀로 못 산다. 외로워서도 못 살고. 

이게 분업화되어야 하거든요. 수렵시대 이후에 농경시대로 들어가면서 제일 먼저 일어난 경제적 현상은 분업이었습니다. 지금도 도시는 분업으로 세분화되어 있어요. 노가다는 지금 분업이 안 돼서 스리랑카, 네팔 사람들 지금 자꾸 들어와요. 아이들이 지금 그 일을 힘들어서 안 하니까. 미장이 같은 힘든 일은 안 하니까. 

일은 해야 하고 그래서 자꾸 취직하려고 베트남사람들 오는 거예요. 그게 세상이 분업화되어서 그래요. 공동체를 세우겠다는 거예요. 공동체. 국가라는 이름의 공동체. 교회라는 이름의 공동체. 그 안에서, 그 공동체 안에서 나보다 더 많은 힘에 둘러싸일 때, 우리는 내 존재의 안전망을 그만큼 형성한다는 겁니다. 

여러분 안전망 할 때 제일 먼저 생각나는 것이 뭐냐 하면 바로 경찰들의 순찰이잖아요. “벨을 누르세요. 신고하세요”라고 하는 게 안전망 구축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겁니다. 안전망은 공동체의 안녕을 위해서 그렇게 하는 거예요. 왜 집 문을 닫아 둡니까? 우리 집안만큼은 안전한 공동체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면 그런 모든 시도가 내 존재를 내가 지키기 위한 일종의 타인과의 싸움이죠. 가상적인 적과의 싸움입니다. 그러나 로마서 3장 24절 25절은 그런 평화는 거짓된 평안이고 그 공동체 안의 평안은 일시적이고 그것은 오래가지 못한다는 겁니다. 그것은 인간이 인간미를 몰라서 그렇다는 거예요. 인간은 공동체 위주로 하지만 그 공동체는 그 가운데 있는 나를 위한 공동체일 때만 일시적으로 공동체에 대해서 존중해 주는 겁니다. 법을 지키고. 

지금 미세먼지 때문에 아줌마들이 아이들 있거나 임신하면 캐나다 갑니다. 왜? 이 한국 공동체가 별로 맘에 안 들거든요. 중국에서 미세먼지 날아와서 중금속 들어있기 때문에 될 수 있는 대로 중국과 멀리 있는 나라, 중국과 멀어지는 나라, 산업체가 없는 나라, 공장이 없는 나라, 뭐 타잔 되면 젤로 좋고요. 

나에게 도움이 안 되는 곳에 내가 왜 있어야 하죠? 제가 여러 번 예를 들어서 이제는 식상한 예가 되는데 필드하키에서 한국 대표로 나가 올림픽에서 메달 딴 여자대표 선수의 자식이 서산인가 어디 청소년 훈련소에 가서 죽었을 때, 자기는 금메달 반납하고 미국으로 이민갔어요. 내 아이 하나 못 지키는 나라를 나는 믿을 수 없다고. 

그게 바로 공동체 내부에 분열이 일어나는 조짐이 있는 겁니다. 공동체 한다고 내가 시집왔다고 시집에 충성하는 그런 바보 같은 며느리 없잖아요. 잘해주면 잘해줄게. 이거잖아요. 시어머니가 떡국 한다고 계란지단 부치라고 했는데 옷 입고 나온다고 2시간 걸렸어요. 며느리가. 물론 가상 며느리지만. 며느리가 다할까요? 시어머니가 다 할까요? 이건 뭐 공동체 의식 없습니다. 자기밖에 몰라요. 

나에게 잘해주면 “우리 가정은 좋은 가정이야.” 자기에게 잘해주면, 자기 아이 봐주고 다해주면 “아이고, 우리 집이 좋다.” 이러고. 그거는 영원한 화목도 화해도 아닙니다. 조금만 삐지면요, 삐진다 하니까 십자가 마을 생각나는데, 조금만 자기 의를 건드리면 난리도 아니에요. 난리도. 

그런데 성경에 보면 3장에 영적 전쟁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아무도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해요. 개판이죠. 값없이 의롭다 하심으로 연결시키는 겁니다. 자꾸 내 편하기를 생각하지 말고 너와 나 사이에 무슨 증거를 내세울 수 있느냐? 내가 존재하는 용도는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에게 무상으로 주어진 그리스도의 의를 위해서 내놓는 것, 이것이 하나님이 기대하는 공동체예요. 

더 어렵게 나가 볼까요? 오늘 본문 여호수아는 제가 여러 번 이야기하지만, 적들을 물리치기 위한 전쟁이 아니고 이스라엘의 속성과 본질을 드러내기 위해서 전쟁이라는 그러한 상황을 동원 시키는 겁니다. 네가 이런 전쟁에 가서 이 왕들을 쳐 부셨는데, 해 뜨는 동쪽에서(헤르몬산) 그쪽에 민족과 왕들이 모두 살해되었는데(?) “어때? 신났어? 기분 좋았어? 아니지? 네가 누구인지 이제 알겠어?” 

하나님이 혼자서도 할 수 있는 그 전쟁에 이스라엘을 대동하는 이유는 하나님 전쟁의 차원을 유일하게 아는 그런 민족을 하나님께서 탄생시키기 위함이에요. 성경에서 말하는 교회라 하는 것은 가만히 놔두는 교회가 아니고 주께서 부지런히 난감하고 난처한 상황을 자꾸 유발하는 겁니다. 

우리교회 교인들도 사정 들어보면 전부 다 사연들이 깊어요. 아이가 감기들어서 밤새 찡찡거리는 것부터 시작해서 온갖 이야기, 불만, 불평, 곱게 살아가는 사람이 거의 없어요. 이제 나이 70쯤 넘어서서 “이제 아무 세상 염려, 아무것도 없겠다.” 그렇게 말씀하실지 모르지만, 혹시 또 모르죠. 집값 좀 내려갈지. 세상에 아무 염려, 근심 없는 사람 없어요. 

성도이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주께서 가만두질 않아요. 이 땅에 눌러앉도록 용납하지 않습니다. 저곳에 가야 하지 않습니까? 가려면 들썩들썩 떠나는 마음 가져야지요. 이 땅에서 잘 먹고 잘살고 싶은 마음 강제로 뜯어고칩니다. 미련 두지 않게 만들지요. 그럴 때는, 그 나라 갈 때는 발목 잡는 것에 메이지 않도록 발목 잡는 전쟁의 실체에 대해서, 전쟁에서 영적으로 승리케 하는 감각을 가져야 해요. 영적으로 승리케 하는 감각. 

돈 많아서 이기는 거 말고, 집안 잘 돼서 이기는 거 말고, 영적으로 승리하는 감각을 회복해야 하는데 그게 뭐냐 하면 이 세상은 죄밖에 없고 이 세상은 하나님이 원하는 의가 없음을 전쟁 가운데서 분명히 하는 겁니다. 사람이 자기 존재에 대해서 언급하게 되면 마치 그것이 자기 의인 것처럼 변질되고 말아요. ‘내가 얼마나 착하게 하고 얼마나 바르게 했기에 복음도 전하고 하느냐.’라고 자기도취에 빠지고 말아요. 

뭐 자기 아니면 천당 못가고 지옥 다 가는 줄 알고, 자기 말 안 들으면 지옥 가는 줄 착각 들을 해요. 착각 들을. 그래서 주께서 맺어준 그 의는 뭐라고 되었느냐, 에베소서 2장에 보면 상당히 어려운 이야기인데요, 정말 어렵습니다, 에베소서 2장 12절에 “그때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밖에 사람이라” 참 이게 말이 어려워요. 

도저히 현대인들에게는 이게 감이 안 온다고요. 약속의 언약에 밖에 있다는 말이 뭔지, 이스라엘 밖에 있다는 말이 무슨 말인지, 그리스도 밖에 있다는 말이 무슨 말인지.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라고 하는데 피로 가까워졌다는 말이 무슨 뜻이냔 말이죠. 

과학적 훈련을 받은 인간에게서는 가까워진다는 말은 여기에 피 대신 뭘 집어넣느냐 하면 자석을 집어넣어야 해요. 왜냐 하면 전부 다 물질적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가까이 있다는 말은 두 물질 사이에 서로 거리가 당겨졌다고 하는데 여기는 자석도 지남철도 아니고 예수의 피로 가까이 왔다는 거니까 피에서 무슨 당기는 힘이 나오는가 하는 생각이 들면서 이 논리 자체가 얼른 맘에 와 닿지 않을 거예요. 예수의 피로 가까이 왔다는 거. 

그리고 또 하나 우리가 여기서 약간의 불만이 뭐냐, 가까이할 때 피로써 가까이하지 말고 아예 하나로 만들면 어떻겠는지, 왜 가까이 또 이렇게 피가 들어가야 가까이 되느냐는 말이죠. 이걸 쉽게 하기 위해서, 예를 들면, 몰랐던 사이에 서로 온라인상에서 글만 주고받다가 서로 욕 몹시 하고 하다가 오프라인 카페에서 보니까 ‘사람 실물부터 괜찮네’ 이렇게 될 때 우리는 보통 뭐냐, 카페안에서 가까워졌다고 하죠. 이야기하다 보니 취미도 똑같아요. 사고방식도 똑같고. “우리 사귀는 거 오늘부터 1일 하자”라고 할 수 있거든요. 

그냥 소문 듣고 소개받아 직접 만나서 볼 때 가까이했다는 거예요. 그렇다면 “너는 유대인이고 나는 이방인이기 때문에 족보가 달라”라고 하면 까불지 말고 만나서 한번 이야기를 해보자는 말이죠. 그 이야기의 주제가 뭐냐 하면 예수의 피입니다. 예수의 피. 

네 교회 몇 명이고, 내 교회 몇 명이고 하는 그런 거 말고, 우리 가정 잘 되는 그런 거 말고, 예수의 피에 대해서 이야기하자고 할 때, 그 결과가 뭐냐 피로 가까워진 새로운 공동체의 탄생입니다. 그러면 아까 이야기했던 것처럼 왜 처음부터 하나 되게 하지 왜 갈라지게 하고 예수의 피로하느냐는 그게 또 어려워요. 

그게 여호수아, 지난번에 했지만 다시 상세하게 해보겠습니다, 여호수아 11장 29절에 보면 “기브온 거민 히위 족속 외에는 이스라엘 사람과 화친할 성읍이 하나도 없고 이스라엘 자손이 싸워서 다 점령하였으니” 하나님이 시키는 전쟁의 도구로써 이스라엘이 쳤습니다. 그다음 20절에 “그들의 마음이 강퍅하여 이스라엘을 대적하여 싸우러 온 것은 여호와께서 그리하게 하신 것이라 그들로 저주받게 하여 은혜를 입지 못하게 하시고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대로 진멸하려 하심이라”라고 되어 있어요. 

이 내용이 현대 사람들의 상식과 너무나 위반되기 때문에 제가 간편하게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내어 버려두사”의 원칙을 적용시켰다. 내어 버려두사. 여러분들이 전도하실 때 목표를 그 사람이 구원되기를 목표로 하신다면 애초부터 전도가 잘못되신 거예요. 전도하실 때 목표를 이렇게 잡으세요. 

주께서 내어 버려두는 사람인지 아니면 주님께서 챙겨주는 사람인지를 확인 한번 해보려고 한다. 아주 가볍게 욕심 없이 하세요. 뭐 고구마 전도, 여리고 성 포위하기, 이런 것 하지 말고 아주 가볍게 하세요. 저 사람이 내어 버려둔 사람인지. 그러니까 그 사람이 강력하게 교회가 싫다고 거부할 때 그 사람의 본심이 아니고 강퍅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살아계심이 제대로 절실하게 있는 겁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시면 내어 버려둔 사람이 반드시 생산되고 발생 되어야 해요. 교회 50년 정도 다니면 사람이 응어리 같은 게 있어요. 뭐냐 하면 내가 50년 교회 다녔는데 나만 달랑 남아 있고 교회 전도했던 사람들은 다 떠나버렸으니까 어떤 뭔가 자기 과업의 미흡하고 하나님의 나라 확장에 태만했다는 자책감을 가질 수가 있어요. 

그게 마귀가 그렇게 인간을 몰아넣는 거예요. 이제 거기에 구애받지 마시기 바랍니다. 내가 전도한다고 사람이 구원되는 게 아니거든요. 만약에 복음 전했는데 그렇게 되거든 오히려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찬양하시는 기회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주께서 강퍅하게 하시기 때문에 나의 말빨이 강퍅을 이기지를 못해요. 

주께서 문을 닫아버리고 내어버려 두겠다고 고집부리는데 내가 좀 아는 사이라고 정 나누는 사이라고 기어이 교회 와서 한자리 앉아 달라고, 복음 들어보라고 그런 보험 영업사원 하듯이 사정하려고 하지 마세요. 보험상 받아봐야 뭐 큰 교회는 냉장고라도 주지 우리 교회는 냉장고 주지도 않잖아요. 

하나님의 이러한 전략을 출애굽기 7장 22절에 나옵니다. 7장 22절에 보면 “바로의 마음이 강퍅하여 그들을 듣지 아니하니 여호와의 말씀과 같더라”라고 되어 있어요. 그리고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좀 이해를 해 주세요. 하나님은 다 아세요. 누가 지옥 갈지 다 아신다니까요. 

우리 성도는 우리가 새삼스럽게 추수하는 게 아닙니다. 우리는 주님이 앞장서서 추수하시고 우리는 그 뒤를 따라가서 지켜보는 구경꾼이에요. 구경할 뿐이에요. 50년 교회 다니면서 갖고 있던 전도에 대한 무거운 무게감을 이 순간 다 내려놓으시길 바랍니다. 교회 30년 다녔는데 전도 한 명도 못 했다면 잘하신 거예요. 정말 순종하신 거예요. 

여러분이 전도 안 했다고 지옥 갈 사람 누락되는 법은 없습니다. 괜히 마귀가 와서 우리를 들쑤신 거예요. 사람이 전도하게 되면 갑자기 자기 의의 게이지가 확 올라가요. 혈압 올라가듯이. 한 180쯤 올라가 볼까요? “나 전도 왜 이렇게 잘하지~” 이거는 정말 링거 맞아야 하고, 천식보다 더 심한 병입니다. 

이제는 이쯤 복음 알면 수고하고 무거운 짐 다 내려놓으세요. 이제는. 내가 시동 걸지 마시고 주께서 시동 걸어서 나에게 주님 하시는 일을 구경하게 하시는 거예요. 중요한 전쟁은 딱 하나입니다. 네가 살아있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살아있다는 거. 그리고 주님 살아 계심은 그냥 살아있는 것이 아니고 말씀대로 하신다는 거. 

이스라엘 백성은 전쟁을 통해 들어가야 합니다. 그리고 자기가 벌이지 않고 자기가 시작하지도 않은 전쟁 현장에 있어야 해요. 있어서 이상하게 대단한 적들이 자기 앞에 굴복당할 때 모든 영광은 주님께 돌려야 합니다. 절대로 우리가 그들을 소유했다 생각하면 안 돼요. 그 자체를 통해서 왜 우리는 버림받지 않았는가. 

왜 우리는 저들처럼 버림받지 않았는가. 우리가 저들보다 나은 게 하나도 없는데. 내가 더 착한 것도 없고, 주님을 생각하지도 않았는데, 왜 주께서 우리를 챙겨주시는가. 버려두심을 통해서 그 맞은편 들어주시는 그 현장을 보면 볼수록 주께 대한 감사는 더욱더 높아지고 고마움은 더 커지는 거예요. “주여, 버리셔도 되잖아요. 예수의 피 그런 이야기 안 들려줘도 되잖아요.” 

하나님과의 화목 먼저 하나님의 원하시는 천국 백성은 피로만 이야기하고, 하나님 의로만 이야기해요. 그러나 인간들의 습성은 같은 동료 인간들끼리, 같이 잘 나가는 인간들끼리 정보 교환하기 위해서 “나는 너 없이는 못 산다. 나는 너 없이는 못 산다”라고 이런 식으로 간사하게 붙어 있는 겁니다. 게 모임도 그렇고 동창회도 그렇고 모든 것이 서로를 이용하기 위해서 덜 외롭기 위해서 이렇게 붙어 있는 거예요. 

그런 화목과 화평은 오래 못갑니다. 오래간다 할지라도 결국 죽으면 각자 갈 길이 달랐다. 너는 지옥, 나는 천당, 다 헤어져야 하는 겁니다. 지금 이 말씀은 이스라엘보고 이야기하죠. 오늘날 이 말씀은 교회보고 이야기합니다. 지금도 교회 영적 전쟁합니다. 바깥에 어디 불교를 상대로 해서요? 아니요. 

교회 내부에 영적 전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 교회 잘 됩시다”라고 하면 백프로 마귀입니다. 이 교회 잘된다는 말은 성립이 안 돼요. 그저 그리스도의 피만 자랑하고 하나님의 의만 높입시다.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었는데 주께서 이렇게 날마다 내빼도 주의 의로 의롭다 해 주시고 내빼도 죄용서 해 주시고 그 놈의 죄용서는 한도 끝도 없이 죄용서 해 주시니 게으르기 짝이 없고 나만 생각하고 남모르고 나 잘되는 것만 생각하는 이 못돼먹은 성질머리 가졌는데 발목을 잡고 “나는 기어이 너를 챙길 거야. 나는 너의 목자가 되고 너는 내 양이야. 지팡이, 막대기 괜히 있는 것이 아니야. 결국은 내 나라에 도달하도록 하게 하고 말리라”라는 그런 이야기 주님의 이야기로 하나 되는 교회 되시길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얼마나 교만한지 알면서도 단독으로 혼자 안다고 자랑질했습니다. 십자가를 자랑한 것이 아니고 십자가를 안다고 자랑하는 내 자랑이 주께 상처를 주었고 시험에 들게 했습니다. 이제는 아무것도 아닌 것을 주께서 살아계셔서 주만 증거되게 하시는 이 놀라운 기적이 계속 펼쳐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