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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하신대로(수11;10-15) 190113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9. 1. 17. 09:31
2019-01-13 14:56:31조회 : 68         
   명하신대로 190113이름 : 이근호 (IP:119.18.87.190)   

명하신대로 (여호수아 11:10-15)

음성 동영상 Youtube

 링크 : https://youtu.be/3MtZkPsMoF4, Hit:4
 이근호19-01-13 15:34 
명하신 대로 

2019년 1월 13일             본문 말씀: 여호수아 11:10-15 

(11:10) 하솔은 본래 그 모든 나라의 머리였더니 그 때에 여호수아가 돌아와서 하솔을 취하고 그 왕을 칼날로 쳐 죽이고 

(11:11) 그 가운데 모든 사람을 칼날로 쳐서 진멸하여 호흡이 있는 자는 하나도 남기지 아니하였고 또 불로 하솔을 살랐으며

(11:12) 여호수아가 그 왕들의 모든 성읍과 그 모든 왕을 취하여 칼날로 쳐서 진멸하여 여호와의 종 모세의 명한 것과 같이 하였으되 

(11:13) 여호수아가 하솔만 불살랐고 산 위에 건축된 성읍들은 이스라엘이 불사르지 아니하였으며 

(11:14) 이 성읍들의 모든 재물과 가축은 이스라엘 자손들이 탈취하고 모든 사람은 칼날로 쳐서 진멸하여 호흡이 있는 자는 하나도 남기지 아니하였으니 

(11:15) 여호와께서 그 종 모세에게 명하신 것을 모세는 여호수아에게 명하였고 여호수아는 그대로 행하여 여호와께서 무릇 모세에게 명하신 것을 하나도 행치 아니한 것이 없었더라 

성경은, 우리가 어떻게 하면 이 세상에서 살아남을 것인가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로 왜 아직도 우리는 살 가치도 없으면서 하나님께서 계속 살려내시는가에 관한 내용입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여전히 기회를 주시는 겁니다. 그 기회란 다름이 아니라 ‘내 뜻’이라는 것이 곧 ‘주의 뜻’이 아님을 알게 하는 기회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서 신나게 적들을 쳐부수는 이스라엘편에 서지 말아야 합니다. 도리어 애스라엘에게 철저하게 유린당하는 이방민족편에서 봐야 합니다. 이들은 오늘 본문에서 전멸당하게 되고 그동안 평생을 살면서 모아놓았던 모든 것을 다 빼앗기게 되는데 우리 자신이 이들 편에 있다면 필히 다음과 같은 생각을 갖게 될 것입니다. 

“왜 하나님은 나를 나답게 만드는 것들을 제거하시려하는가?”라고 말입니다. 흔히 말하기를 인간이 하나님에게 당하는 경우는 하나님에게 죄를 지을 경우라는데, 도대체 열심히 악착같이 세상에서 밤먹고 살겠다는 것이 뭐그리 진멸당한 죄가 된다 말인지 수긍이 되지 않을 겁니다. 

즉 우리 인간들은 하나님이 벌리시는 일들 앞에서 왜 일방적으로 심하게 당해야만 하는 대상인지 그 원인을 도통 모르고 있습니다. 죄 때문에 벌받는다고들 하지만 실은 이것은 거짓말입니다. 정확한 말하면 ‘우리가 모르고 있는 죄’ 때문에 우리가 일방적으로 당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그 죄가 무엇인지를 꼭 알아야할까요? 죄가 무엇인지를 알겠다는 의도도 내 인생을 개선해보려는 노력에 불과할 겁니다. 차라리 그렇게 생각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당하는 그 자체를 축복으로 봐야 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치고 들어오지 아니하면 우리는 우리 내부의 삶으로 굳어지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삶 자체가 전쟁입니다. 무엇과 무엇의 전쟁이냐 하며는, ‘나의 것’과 ‘나 외부의 것’ 사이의 전쟁입니다. 이 ‘나의 것’이란 결코 외부의 것으로부터 손상 입지 않으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나의 내부의 것은 내가 평생을 살아가는 보람이기 때문입니다. 즉 나에게서 나오고 나에게서 뿜어나오는 모든 것들은, 내 것 지키는 것이 유일한 할 일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내 것을 다치게 하고, 혹은 내 것을 확장하는데 방해가 되면 그 자체로 이미 나의 적이 되는 겁니다. 이게 바로 이스라엘이 오늘 본문을 통해서 공격하는 공격의 표적입니다. ‘나는 나로 인하여 산다. 이것 외 그 어떤 가치도 나는 용납하지 못하겠다’는 식으로 자기 벙커에 몸을 숨기고 버팁니다. 

이렇게 살면서 하는 말이 이러합니다. “내가 무엇이 잘못되었는가?”입니다. 오늘 성경은 바로 이런 정신자세가 하나님과의 전쟁에서 적이 되는 겁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로 이방민족을 공격케 하시는 것처럼 오늘날에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쳐들어오십니다. 그렇다면 주님이 노리시는 목표는 분명합니다. 

우리가 목숨을 걸고 지키는 바로 그것을 부수시키는 겁니다. 유일하게 사는 희망과 의미가 되고 이유가 되는 바로 그것을 노리고 공격해 들어오게 됩니다. 이렇게 해야지만 비로소 우리는 구원에 참여하는 바가 되는 겁니다. 그 이유는, 우리 자신이 천국에 합당한 자로 교체당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즉 우리 자신이 하나님에 의해서 깨어지지 않는 한 계속 우리 자신의 가치만 붙들고 있는 셈이 됩니다. 따라서 아무리 해도 놓을 수없는 나의 가치가 와르르 무너진다면 이는 참으로 귀한 복을 받은 겁니다. ‘내 뜻대로 되지 않을 때’ 비로소 우리는 내 바깥 세상에 대해서 뭔가 크게 착오를 하고 있음을 감지하게 됩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우리 인간들은 조용하게 자기만 행복하고 남에게 피해주지 않으면 괜찮은 삶이라고 여깁니다. 즉 전쟁이라는 것은 나의 세계에 발생되지 않아야 합당하고 여깁니다. 그러나 그것은 주님의 개입을 가로막는 악마로부터 깊숙이 뿌리까지 세뇌당한 결과입니다. 이 세상은 결코 ‘나를 위한 세계’가 아닙니다. 

나 놀기 좋아라는 세상도 아니요 나의 행복을 취하라고 허락한 세상에 아닙니다. 오늘 본문을 보세요, ‘쳐 죽이고’ ‘칼날로 베고’, 불 사르고‘. 빼앗고’라는 가혹한 광경이 연발해서 나오고 있습니다. 봐주는 것 없습니다. 인정사정 없습니다. 그래놓고 오늘 본문 끝에 가면, 이것들이 다 하나님께서 명하신대로 진행된 일이었다는 겁니다. 

내 뜻을 살리기 위한 전쟁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모르고 있는 하나님에 대해서 제대로 알라고 벌리신 전쟁입니다. 이 전쟁은 옛날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도 쉴새없이 일어납니다. 부모와 자식과 전쟁하고 부부사이에도 전쟁하고 형제간에도 싸움입니다. 이 싸움의 정신은 이러합니다. 

“네가 뭔데 내 영역을 건드리느냐?”입니다. 즉 세상은 가치는 나를 살리는데 있고 나를 행복하게 만드는데 있다고 억지를 부리는 싸움을 하고 있는 겁니다. 나 뿐만 아니라 모두가 각자의 가치를 지키고 양보못하겠다고 싸움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마치 이스라엘이 승리한 것처럼 보일 겁니다. 

아닙니다. 이스라엘이 승리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승리하신 겁니다. 진정한 승자는 하나님의 전쟁의 취지를 비로소 알게 된 사람입니다. 빵을 두 조각으로 쪼개야 앙코를 만날 수 있는 것처럼 나를 쪼개기 위한 주님에 의해서 우리는 산산조각 나는 그 현장에서, 그 폐허에서 우리는 비로소 전에 몰랐던 하나님을 뜻을 접할 수 있습니다. 

지금 하나님께서 우리를 살리시는 이유는, 우리에게 계속 기회를 허락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시비걸시고, 우리의 뜻대로 하지 못하게 하십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 내부를 불살라버리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우리의 일상은 남을 모방하는데 급급합니다. 즉 쓰레기가 다른 쓰레기의 모델이 되고 표준이 되어버린 세상입니다. 

자기 자신이 아무 것도 아니기에 더 이상 이익이냐 손실을 따질 입장이 못된다는 사실에 우리는 직면해야 합니다. 타인의 양보나 타인의 희생을 기대하지 마세요. 천국이란 손해 안 보고 희생 안하고도 갈 수 있는 나라가 아닙니다. 차라리 희생당해도, ‘희생 당했다’는 말조차 건방짐이 되는 존재가 바로 우리 자신임을 알 때, 우리 안에 용서라는 전리품이 찾아든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이 하시는 모든 일이 오로지 나를 위한 일이 아님에 동의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19-01-17 03:33 

219강-여호수아 11장 10~15절(명하신대로)20190113-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여호수아 11장 10~15절입니다. 구약성경 337페이지입니다. 

“하솔은 본래 그 모든 나라의 머리였더니 그 때에 여호수아가 돌아와서 하솔을 취하고 그 왕을 칼날로 쳐 죽이고, 그 가운데 모든 사람을 칼날로 쳐서 진멸하여 호흡이 있는 자는 하나도 남기지 아니하였고 또 하솔을 불로 살랐고, 여호수아가 그 왕들의 모든 성읍과 그 모든 왕을 붙잡아 칼날로 쳐서 진멸하여 바쳤으니 여호와의 종 모세가 명령한 것과 같이 하였으되, 여호수아가 하솔만 불살랐고 산 위에 세운 성읍들은 이스라엘이 불사르지 아니하였으며, 이 성읍들의 모든 재물과 가축은 이스라엘 자손들이 탈취하고 모든 사람은 칼날로 쳐서 멸하여 호흡이 있는 자는 하나도 남기지 아니하였으니, 여호와께서 그의 종 모세에게 명령하신 것을 모세는 여호수아에게 명령하였고 여호수아는 그대로 행하여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하나도 행하지 아니한 것이 없었더라” 

성경은 우리가 이 땅에서 얼마나 잘 먹고 잘 사는 지에 대한 내용이 들어있지 않습니다. 인간들의 관심사와 성경과 만날 수 있는 접촉점은 없습니다. 왜냐면 우리가 성경을 보거나 하나님 앞에 나올 때는 진공 상태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우리의 뜻을 가지고 나오거든요. 

그런데 우리의 뜻이라 하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축적된 뜻이라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에요. 나만 잘되면 그만이라는, 나만 행복하면 그만이라는 식으로 줄곧 우리는 양육 받아왔고 스스로 자기를 숙달시켜 온 겁니다. 

성공하고 싶다. 뭔가 번듯하게 내세울 것들을 나는 갖고 싶다. 남들이 나를 좀 우러러보고 부러워했으면 좋겠다. 돈 있으면 좋겠고, 인기 있으면 좋겠고, 세상에 귀한 것 좀 많이 가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죠. 

지난번에 장례식장에 가니까 어떤 조문객중 한분이 아는 친척인데 오랜만에 만났어요. 한국에 친구가 별로 없어서 제 아내를 집으로 초청했습니다. 초청하는 미끼가 뭐냐 하면 외교관 생활 30년 해서 진기한 것들이 그렇게 많다는 거예요. 진기한 것들, 뽐낼 수 있는 꺼리가 되는 거죠. 우리는 복음 외에는 내놓을게 없는데 그쪽 집은 진기한 것이 많답니다. 

돈, 인기, 세상 것, 그 세 가지는 누가 제공해 준 겁니다. 악마가 제공해 준거예요. 마태복음 4장에서 그렇게 인간은 길들여져 온 거예요. 산다는 것은 이 세 가지로 사는 거라고 그런 식으로 계속해서 세뇌 시켜 온 겁니다. 그게 우리 기억 속에 최면화 되었어요. 산다는 것은 이 세 가지가 함께 있는 것이라고. 

그래서 성경은 어떻게 살 것인가가 아니라 살아 있는 게 신기하지 않느냐고 묻는 게 성경입니다. 네가 세상 적으로 사는 것이 전부라고 아는, 네가 아직도 목숨 붙어 있다는 것은 보통 큰 은혜가 아니고 보통 큰 축복이 아닌데, 축복이 축복 되려면 하나의 큰 기회라고 봐야 해요. 봐주고 있는 겁니다. 당장 죽여서 지옥 보내셔도 되는데 계속해서 지연 시키고 있는 거예요. 기회를 주고 있는 겁니다. 

그 기회라는 것이 뭐냐 하면 바로 오늘 본문 여호수아에 나오는 내용도 그 중에 일부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본문의 내용을 보면 죽이는 자와 죽임을 당하는 팀이 나와요. 이건 이스라엘과 이방민족이라고 해도 되는데요. 이스라엘과 이방 민족이 전쟁을 한다는 내용에서 우리는 신나고 멋져 보이는 이스라엘 쪽에 서면 안 돼요. 

그거는 성경을 잘못 보고 있는 겁니다. 우리는 어느 쪽에 서야하느냐 하면 이스라엘에게 무참히 전멸 당하고 있는 이방 민족 편에 우리가 서 있어야 해요. 왜? 우리가 이방 민족이기 때문에 그래요. 이방 민족인데 그리고 우리가 잘 살고 있는데, 가족끼리 화목하게 살고 있어요, 큰 욕심 내지 않고 소박한 삶, 소소한 삶, 그저 하루 일해서 하루 사는 욕심 없는 삶을 사는데 이스라엘이 그것마저 죄라고 쳐들어오게 되면 우리에게 어쩌란 말입니까? 

나쁜 짓해서 얻어맞으면 “예, 내가 좀 욕심냈습니다.”하고 회개할 거리가 되는데 그다지 나쁜 짓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아요. 아무리 나쁜 짓이라고 파내 봐야 생각나는 나쁜 짓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진멸 당한다면 그것은 우리 자신에게 뭔가 문제가 있는 겁니다. 

제가 어디서 강의를 하면서 하나님께서는 전쟁을 하면서 전쟁하는 이유를 미리 알리고 전쟁을 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얻어터지고 난 뒤에 뒤 늦게 폐허에서 그 이유를 끄집어낸다고 했어요.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철없는 어린 아이가 자기가 장난감을 가지고 놀다가 장난감이 우연히 찬장 밑으로 들어갔어요. 그런데 아이는 찬장이 얼마인지 접시가 얼마나 비싼지 모르고 자기 장난감을 찾겠다고 다 뒤집었단 말이죠. 

아이가 다 뒤집고 난 뒤에 엄마가 퇴근하고 와 보니까 접시란 접시는 다 깨지고 찬장 유리도 다 깨지고 엉망이 되어 있어요. 아이를 불러 호통을 칩니다. “너 왜 이랬어?” 답은 하나예요. “장난감 찾으려고 그랬는데, 엄마, 걱정 하지마. 내 것 찾았어.”라고 해요. 자기 것 찾았다는 거예요. 자기가 한 짓이 얼마나 엉망진창인 줄 모르고. 

엄마가 패지요. 두둘겨 팰 때 그 아이는 자기가 맞아야 될 이유에 대해서 도무지 모르겠어요. 나는 내 인생만 살 뿐이었어요. 그것도 충실하게. 내가 공들여서 얻은 내 소유를 끝까지 지키겠다는 그것밖에 없는데 왜 엄마는 패는지 모르고 “엄마, 왜 때리는데?”하면 “너는 네 인생만 생각하나? 내 인생은 생각 안 하나? 이 접시하고 찬장은 내가 너 낳기 전 시집 올 때 혼수로 받았는데 다 날렸다. 너 크면 돈 벌어서 다 갚아라.” 자식은 말합니다. “갚겠습니다.” 하지만 절대 안 갚습니다. 돈이나 안 가져가면 천만 다행이지 갚기는 뭘 갚아요. 

전쟁이라는 것은 구태여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의 거창한 전쟁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매일 싸우고 있습니다. 내 것이 남들에게 넘어가지 않도록, 내 것을 남들에게 빼앗기지 않도록, 내 것 지키는 것만도 엄청난 노력을 해야 해요. 내 것 지키는 것만도 모든 것이 싸움이에요. 그 싸움을 통해서 우리는 뭘 하느냐하면 나의 세계와 절대로 내 것이 될 수 없는 세계, 두 진영으로 구분 된 사실을 압니다. 

내 것을 내가 지키는 것과 절대로 내 것이 될 수 없는 그런, 나와 경쟁 관계에 있는 세력, 나 외에 세계, 물론 내 것이 될 가능성이 있는 것은 봐줍니다만, 그 싸움을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유발시킨다는 사실을 알아야 됩니다. 그 싸움을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내가 옳다고 여겼던 나에게는 너무나 옳고 나에게는 진리답고 나에게는 착한 일이라고 여겼던 그것이 저쪽의 안목으로 봐서는 절대로 착한 일이 아니었고 이거는 진멸 당해 마땅한 죄였다는 것을 아는 안목을 새삼스럽게 내 안으로 집어넣기 위한 싸움을 하나님은 유도하신다는 겁니다. 

전쟁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니고 일부러 전쟁을 부추기는 세력이 따로 있다는 사실, 그리고 그 분이 바로 우리가 믿는다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나에게 평화를 주지 않아요. “내가 온 것은 평화를 주러 온 것이 아니고 완전히 불란을 일으키러 왔다” 아빠와 아들과, 엄마와 딸과,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나와 나 자신이, 나와 나 외의 인간이 매일 같이 보이지 않는 알력과 싸움을 합니다. 

그 보이지 않는 싸움이 내 밖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고 내 안으로 침투하기 위한 싸움이 벌어집니다. ‘나는 옳았는가? 내가 예수 믿고 천당 간다는 것이 나의 과도한 시늉에 불과한 것은 아닌가? 내가 나를 천당 보내기 위해서 나에게 억지로 정신적으로 굳게 내가 조작한 것이 아닌가? 하나님이 주신 것이 아니라 내가 만든 것이 아닌가? 생산한 것이 아닌가?’라고 말이죠. 

열심히 기도해서, 봉사해서, 교회 봉사해서, 그래서 내가 엉터리임에도 불구하고 위로 삼아 내가 갖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야 돼요. 이번에 수련회에서 아가에 대해 하는데, 대부분 참석을 못하기 때문에, 주께서 못하게 하셨기 때문에, 말이 좀 길어 졌는데, 모든 사랑은 나를 위해서 내가 임의로 조작한 겁니다. 

상대방의 의사를 묻지 않고 내가 일방적으로, 자기가 사랑한 거예요. 그게 바로 내 인생의 사랑 ‘Love of my life', 퀸이 부른 노래가 그거 아닙니까.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데 당신은 의미를 모르고 있잖아요. 내가 당신을 사랑할 때 이건 내가 좋으려고 당신을 사랑했기 때문에 Bring it back, 돌려 달라는 겁니다. 나에게서 가져간 그 사랑 돌려 달라는 이야기예요. Bring it back, 내 사랑 돌려줘~ 

자식이 엄마에게 “엄마, 엄마가 빼앗아간 내 인생 돌려줘”하고 또는 부모가 자식에게 “내가 너 키운다고 얼마나 애 쓴지 모르냐? 네가 부모에게 보답하는 게 기껏 이것밖에 안되냐? 너에게 나간 밑천 돌려줘. 네가 네 인생 멋대로 살아? 그럼 나는? 너에게 모든 것을 투자한 나는? 모든 기대를 건 나는?” 

가정은 전쟁터여야 합니다. 안 그러면 인간이 안 됩니다. 안 그러면 사람이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 대 인간의 전쟁을 해서 승리자도 없게 만들고 패배자도 없게 만들어요. 승리자와 패배자는 어디서 하느냐 하면 전쟁하면서 비로소 거기서 발견 됩니다. ‘아, 내가 얻어 맞을 만 했구나’ ‘아, 내가 저쪽을 칠만 했구나’ 

그냥 점잖게 도 닦는다고 교회에서 새벽기도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고 교회는 도 닦는 곳이 아니에요. 내가 깨어지는 곳이에요. 내가 깨어지려면 이질적인 요소가 내 허락도 없이 내 안에 들어와야 합니다. 내 인생은 내가 곱게 간직하고 싶은 충동이 있어요. 본능입니다. 허락도 없이 내 안에 쑥 들어와서 내가 곱게 유지하는 찬장, 접시, 이거 있어야 내가 버틴다고 하는 마지막 최후의 보물까지 전부다 깨져 버려야 해요. 

그걸 가지고 매를 미리 맞는다는 뜻입니다. 매를 미리 맞아요. 어차피 주께서는 오전에 이야기 했던 것처럼 하나님께서 은혜 주신 것은 그냥 두시지 않는다고요. 그게 심판용이라고요. “내가 은혜를 줬는데 너는 그것을 네 것으로 돌려놓았잖아. 내가 가만히 있을 거 같냐?” 하시면서 빼앗아가 버리죠. 매를 미리 맞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전쟁 주신 것을 고맙게 여겨야합니다. 가정에 전쟁이 있어야 가정이 나의 최후 보류가 아닌 것을 철들어 깨닫게 되는 겁니다. 자식에게 실망을 해봐야 자식이 나의 유일한 희망이 아니라는 것을 일찌감치 깨달아요. 그리고 더 깨달으려면 어디까지 깨달아야 하냐면 내가 나에게 실망을 해줘야 합니다. 내가 나의 희망이 못 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해요. 

오직 나를 만드신 주님이 희망이지 그 만들어진 피조물이 대상이 될 수는 없는 겁니다. 그래서 교회는 내 것 챙기기 위해 오면 안돼요. 내 것 유지하려고 오면 안 됩니다. 깨지기 위해서 와야 해요. 부서지기 위해서. 지난 낮에 그런 이야기 했잖아요. 오늘날 사람들이 방황하는 것은 자기 목숨 바칠 곳을 찾지 못해서 그래요. 목숨을 걸 데가 없어요. 

어디에 목숨을 바쳐야 하냐면 내가 목숨과 바꿔도 내가 허락되고 넉넉할 정도로 괜찮은 것이 와요. 내 목숨보다 귀한 것이 왔을 때는 우리는 주지 말라고 해도 아낌없이 모든 것을 몰빵 할 수 있어요. 거기에 올인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계속해서 헤매게 됩니다. 계속해서 떠돌이 생활로 방황하는 겁니다. 

교회 갔다가, 천주교 갔다가, 절에 갔다가, 무교 되었다가, 술 먹었다가, 술 끊었다가, 술 끊어도 마찬가지고, 담배 피우다 끊어도 마찬가지고, 뭔가 마음 둘 곳이 없는 거예요. ‘내 마음 갈 곳이 없어’가 되는 거예요. 그런데 그것은 목적이 잘못된 거예요. 뭘 쥐려고 하고, 나는 멀쩡하고, 나는 안 다치면서 손해 안보고, 나는 희생 안당하고, 희생 안하고, 손해 안보고 천당을 가려고, 천국 가려고, 주님 만나려고 생각하는 겁니다. 

주님 가신 길은 주님 스스로 다친 길이고, 스스로 피 흘린 길이거든요. 우리는 다리에 쥐도 안 나려고 해요. 멍도 안 들려고 해요. 내가 나를 포기할 수 있어야합니다. 내가 나의 욕심에 질려 버려야 합니다. 처음에는 내가 내 욕심에 다 들어 주려고 “걱정 하지마. 내가 기도해서 응답 받아서 내가 너에게 필요한 것 줄게”라고 하는데 그것마저 다 헛수고이고 망상이에요. 

거짓된 교회에서 가르친 속임수, 사기라는 사실을 여러분은 언제쯤 알아챌까요? 꼭 보이스피싱에 걸리 때 정신 차리렵니까? 보이스피싱보다 더 고단수가 교회입니다. 하나님 이름 팔아먹고 돈 버는 곳이 교회예요. 지난 오후수업에 이야기 했잖아요. 내가 안간 되는 것은 내가 교회 시키는 것을 한다고 되는 게 아니에요. 내가 원치 않는 것이 나를 덮치는 겁니다. 

일종의 신데렐라 같은 경험을 하는 거예요. 내가 살던 고향 말고 내가 안 살던 고향, 그 고향이 나에게 갑자기 덮쳐서 환경 교체가 일어나요. 환경 교체. 내가 살던 고향은 남들을 모방하는 거예요. ‘저 사람처럼 되었으면 좋겠다. 나는 언제 저 사람 따라 붙나?’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그 세계인데, 그거는 그 안에서 뺑뺑이 도는 세계, 가봐야 그 사람들 고민 없는가하면 다 고민 있어요. 조현민이라는 사람 아십니까? 한진그룹 딸인데 그 사람이 6년째 미국 사람이라는 거예요. 얼마나 고민 되겠어요. 지금 한국사람 되려고 얼마나 애 쓰고 있겠어요?(제가 지금 비꼬는 겁니다.) 그러나 미국 사람이에요. 환경이 여차하면 미국으로 튀면 그만이라는 거예요. 환경이 미국 사람이에요. 한국사람 아니고. 

주님의 작전은 이겁니다. 한국이든 캐나다든 미국이든 중요한 것이 아니고 하늘나라 백성이 되는 게 중요하다는 겁니다. 하늘나라 백성이 되는 게. 그러나 인간들이 성경을 안 듣고 복음도 안 듣고 아무것도 말씀에 대해서 접하지 않으면 그 모델 되는 표준 되는 나의 표준형을 세상에서 추출해요. 저 사람처럼, 저 사람처럼, 저 사람처럼. 

우리 아이들 잘 키워서 서울 의대 보내는 것, 그것 노력하다가 베란다에서 뛰어내려 죽고 그런 경우도 있잖아요.(드라마 이야기입니다) 이 모든 것을 세상 쪽에서 축적하는 거예요. 그러나 이 세상에는 우리의 영원한 영생은 없습니다. 그러면 어디 가면 됩니까? 교회도 마찬가지로 자본주의예요. 자본주의는 하나의 장사하는 곳이에요. 그러면 어디가면 됩니까? 

이건 나의 내부가 갈등을 일으키고 전쟁을 일으키게 되어 있어요. 내 속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전혀 없고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대로 우리가 주님 앞에 침략 당하고 침노 당해야 해요. 침노하는 그곳에 하나님이 같이 딸려서 같이 들어오게 되죠. 침략하는 곳에. 

그러면 침노하고 침략하게 되면 우리는 뭐가 되느냐 하면 졸지에 오늘 본문에서처럼 이방민족이 됩니다. 그 이방 민족이 되면서 우리가 뭔가 평소에 ‘들어오지 마세요. 이건 내 영역이고 내 땅이고 내 나와바리입니다. 이건 내 가치와 명예와 체면을 걸고 지키고 있는 땅입니다’하다가 그 사고방식으로 인하여 전쟁을 벌이게 되는 낯선 존재, 낯선 경우, 낯선 사건을 맞닥뜨리게 될 것입니다. 

그 쳐들어오신 분이 누구냐 하면 나의 모든 것을 빼앗아 가려는 우리 주님이십니다. 우리 주님이에요. 주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공으로 간주해서 교체하려고 해요. 그런데 교체하려고 오신 분을 우리는 적으로 간주하고 오인해서 정말 요새말로 총으로 쏴 죽여 버린 거예요. 그게 바로 무슨 사건이냐 하면 총으로 쏴 죽여서 엎어진, 우리를 구원하러 오셔서 엎어진, 피 흘린 그 문턱이 십자가 사건이 일어난 곳입니다. 

우리는 매일같이 우리 인생에 십자가 사건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 벌어져야하고 또 벌어지고 있습니다. 내 이익을 얻기 위해서 손해 안 보려고 내가 과도한 억지를 부렸던 그 모든 사건이 십자가 사건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성도라 하는 것은 ‘아, 내가 공격의 대상 이었구나’라고 아는 순간 그 사람은 빼앗기든 안 빼앗기든 관계없이 쳐들어왔기에 깨달은 것을 담게 된, 드디어 생성하게 된 새로운 존재로 변화되는 거예요. 

주님이 나에게 뺏던 더 주던 관계없어요. 이건 욥하고 똑같은 거예요. 모든 걸 빼앗기든 모든 걸 주던 간에 더 이상 내 인생의 주인은 내가 아니라는 것을 절감하게 된 겁니다. 절실하게 된 거예요. 그러면 그 분은 이런 고물 같은 거 있으면 교체하면 되잖아요. 옛날 쓰던 세탁기, 드럼세탁기 같은 것이 들어온다면 옛날 쓰던 대우세탁기는 내놔야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드럼세탁기 들어온 것을 모르는 어린 아들이 “아니, 이 아저씨 도둑놈인가? 왜 우리 세탁기 가져갑니까?”라고 버티게 되면, 버티는 정도가 아니고 막 손가락 깨물고 그러면 피나죠. 그게 십자가 피죠. 그렇게 깨물면서 강력한 저항을 하는 거예요. 누가 승리해야 하느냐 하면 내가 승리하면 안 돼요. 인생에서. 

항상 내가 승리하지 아니하고 내 것을 뭉개려는 쪽이 승리하실 때에 우리는 도리어 그것을 감사하고 고마워하고 동의할 수 있는 마음이 생긴다면 그것은 내가 예상 못한 새로운 마음이에요. 내 인생이 그냥 망가져도 나는 좋다는 희한한 마음이 생기는 거예요. 시합 나왔는데 예선까지 했는데 본선 못 나갔다. ‘아, 감사해라’라고 그게 돼요? 그거 하려고 학원까지 다녔는데 그게 됩니까? 

내 것이 뭉개진 것에 대해서 도리어 감사하는 마음 돼요? 그게 바로 나보다 나를 이기신 주님이 우리에게 남기신 선물입니다. 내 뜻대로 모든 것이 거부당한 그것만 곱게곱게 창고처럼 내 안에 저장해 두려는 것, 이것은 나의 승리의 전리품이 아니고 나를 향한 주님이 나를 기어이 다른 세계로 보내려는 주님의 승리의 전리품 우리 안에 쌓여 있어야 해요. 

기도하세요. 그리고 왜 기도가 응답되지 않는 가를 기도하는 과정에서 전쟁이 일어나야 합니다. 헌금하시고 낸 금액만큼 손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될 때 왜 나의 정성과 헌금이 왜 하나님께서 안 받는가, 이게 뭔가 내가 노리고 있는 의도가 있는가, 이거 바쳐서 30배 이상 더 소유하겠다는 기어이 내 인생은 내가 책임지겠다는 그 고집스러움, 그 고집스러움을 어떻게든 뚫려서 그걸 뚫어서 어떻게든 그 안에 예수님의 승리만 담기게 하려는 노력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어떤 대목이 있느냐 하면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9절에 보면 “쳐 죽이고” 10절에 보면 칼날로 쳐 죽이고 11절에 보면 “호흡이 있는 자는 남기지 아니하였고” 12절에 보면 “칼날로 진멸하였고” 그리고 13절에 보면 “하솔을 불살랐고” 14절에 보면 “탈취하고 호흡이 있는 자는 남기지 아니하였고” 그래놓고 15절에 뭐라 하냐면 “하나님의 지시대로 된 결과 이니라”라고 되어 있어요. 이 모든 것이. 

우리가 교회 와서 성경을 볼 때 뭘 보십니까? 지금 우리가 누구 편에 섭니까? 설교 처음부터 다시 하겠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볼 때 우리가 어떻게 살아남는가를 성경은 알려주지 않지요. 살아남고자 하는 것은 나만의 뜻이 아니고 모든 인간이 다 갖고 있는 거예요. 나만 행복하면 그만이고 나만 잘 먹고 잘살면 그만이고 나만 성공하면 그만이라는 생각을 누구나 다 갖고 있어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하나님 쪽에서 오신 분은 뭐냐 하면 그냥 피를 흘리고 있는 거예요. 지금 그분이 너무 오버하고 있는 거 아니에요? 그분이? 하나님답게 선물보따리 들고 와야지 왜 피를 흘립니까? 이게 나와 하나님의 뜻이 근원적으로 틀어져 있다는 거예요. 이게 안 맞는 거예요. 교회 와서 고집부리지 마세요. 이게 안 맞아요. 

교회 예배당에 십자가 왜 꽂혔습니까? 뜻이 안 맞다는 거예요. 너 때문에 내가 죽었다는 거잖아요. 그러면 우리가 할 것은 하나밖에 없어요. 내가 고집스럽게 나의 행복과 성공과 남이 나를 부러워하는 것을 그걸 계속 유지하세요. 이렇게 할 수밖에 없어요. 내가 이말 밖에 안 나오는데 그걸 계속 지속하세요. 지속하시고 그것만 지속하지 마시고 그것과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조해 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어느 정도로 엉터리며 내가 얼마나 지옥 같은 세상에서 헛짓하고 있는지를. 

주님 뜻을 본받아서 이웃을 사랑한다는 그런 되지도 않는 생각은 아예 하지마세요. 그렇게 성공한 인간은 없습니다. 남을 위하고 예수님 십자가 지고 그렇게 하는 인간은 없습니다. 이 세상의 어떤 인간도 뭐가 신앙대로 살았고 헌신했고 하는 거 다 구랍니다. 그거. 그 사람 혼자 있을 때 잡생각하고 음란한 생각 다 해요. 

그러니까 사람을 너무 미워하지 마세요. 이 세상에 어떤 영웅도 없고 모든 인간은 똑같아요. 어떤 인간도 쓰레기입니다. 다만 쓰레기 인데 그 안에 뭐가 담겼느냐가 중요해요. 십자가 피만 담기면 그것이 주의 명입니다. 그 명대로 한 사람 그게 새로 살아남는 이스라엘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언제까지 철없이 살 겁니까? 남 모방하고 흉내 내고 나 저 사람처럼 살면 좋겠다, 더는 욕심 없겠다고 하지만 쓰레기가 쓰레기를 보고 흉내 내는 이 엉망인 세상에서 주께서 오셔서 십자가 피를 흘려주셔서 정신 차리라는 엄명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저희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