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1-27 15:06:04 조회 : 29
전쟁과 기업 190127 이름 : 이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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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기업(여호수아 11:2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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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19-01-27 15:48
전쟁과 상속
2019년 1월 27일 본문 말씀: 여호수아 11:21-23
(11:21) 그 때에 여호수아가 가서 산지와 헤브론과 드빌과 아납과 유다 온 산지와 이스라엘의 온 산지에서 아낙 사람을 멸절하고 그가 또 그 성읍들을 진멸하였으므로
(11:22) 이스라엘 자손의 땅 안에는 아낙 사람이 하나도 남음이 없고 가사와 가드와 아스돗에만 약간 남았었더라
(11:23) 이와 같이 여호수아가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신 말씀대로 그 온 땅을 취하여 이스라엘 지파의 구별을 따라 기업으로 주었더라 그 땅에 전쟁이 그쳤더라
구원을 설명하는 데 있어 ‘전쟁’이 동원되는 것이 요즈음 시대에 이상스러울 겁니다. 왜냐하면 구원이란 ‘교회’라는 종교단체가 사람들을 등록시키므로서 성사되는 것으로 알고들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등록되는 식이라면 그 사람이 평생에 살아온 모든 것이 말끔하게 부정당하지 않게 됩니다.
즉 평소에 일상에서 자기가 자기를 살리기 위해 버티는 방식을 그대로 천국가는데도 적용시킬 것이 뻔합니다. ‘나의 것’을 못 놓겠다는 식으로 살아가게 되면 그것을 키울 생각을 하게 마련입니다. 내가 나의 것에 공들여서 그 안에서 내가 계속 ‘나답게 살아가겠노라’고 버티는 겁니다.
바로 이런 식으로 이스라엘이 살아왔기 때문에 그들은 멸망당하는 꼴을 당한 겁니다. 즉 성경을 모른다면 ‘행함으로 복을 따내겠다’는 정당화됩니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 성경을 봅니다. 거기에 전쟁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는 전쟁없이는 구원이 없다는 말입니다. 평소에 인간들이 전쟁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전쟁을 하게 되면 ‘내 것’ 다치기 쉽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내 것이 커지는 것으로 하나님의 복을 확인하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이스라엘과 전쟁을 치르는 이방민족들의 삶의 방식입니다. 바로 이런 삶의 방식 때문에 이방민족들은 그들이 대대로 살던 땅에서 쫓겨나고 이스라엘에게 멸망당해야 했습니다.
이 말은 곧 ‘누구든지 약속의 땅에서 살려면 약속을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는 조건에 충족되어야 하는 겁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는 ‘전쟁’이라는 방식을 가지고 구원을 설명하는 겁니까? ‘구원’이란 어디에서 어디로 빠져나오는 상황을 두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디에 눌려 살고 있는지를 알야겠지요.
우리와 사는 방식과 다르게 이질적으로 사는 집단에 우리 눈 앞에 나타나지 아니하면 우리는 자신이 사는 것이 전부요 정상이라고 여깁니다. 겉모습으로 쉽게 판단하면, 이스라엘은 여호와 하나님이 함께 계시고, 이방민족은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는다는 식으로 구분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과 함께 있었다는 그 이스라엘마저 자신의 하나님에 의해서 멸망되었다면 그 이유와 원인에 대해서 규명되어야 할 것입니다. 로마서 9:31-33에 보면, “의의 법을 따라간 이스라엘은 율법에 이르지 못하였으니 어찌 그러하냐 이는 그들이 믿음을 의지하지 않고 행위를 의지함이라 부딪칠 돌에 부딪쳤느니라 기록된 바 보라 내가 걸림돌과 거치는 바위를 시온에 두노니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나라로 가는 길에 필히 ‘거치는 돌’이 놓여져 있습니다. 그 용도는 모든 인간의 행함을 좌절시키는 겁니다. 인간들의 행함은 행함으로 멈추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잘남으로 과시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천국을 지키기 위한 전쟁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마치 인간들이 매일같이 자기 것 지키기 위해 전쟁을 벌이는 것처럼 말입니다.
천국은 ‘상속’되는 식으로 주어집니다. 이 ‘상속’에는 일방적으로 하나님께서 전쟁을 치러시고 얻었던 그 땅을 전쟁에 참여한 자들에게 할당하셨습니다. 이럴 때 사람들은 ‘우리들은 땅을 소유했다’는 식으로 나설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전쟁의 와중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결코 ‘내 것’ 같은 것이 용납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보면, 이스라엘은 ‘분할된 땅’을 분배받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이 기업이 신약에 들어오게 되면 땅과 땅 사이의 분할되는 것이 아니라 아예 이 세상에서는 ‘내 땅’이라는 것이 성립되지 않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특정한 땅이 기업이 아니라 예수님이 현재 가 계신 바로 그곳이 천국이기 때문입니다.
즉 성도는 이 땅 중에서 그 어떤 땅도 자기 땅이 성립되지 않습니다. 전에 이스라엘이
십자가의 가치란 ‘부딪힘’을 통해서 성립합니다. 행함으로 의롭다함을 얻고자 하는 인간들 앞에 마주 나와서 도리어 죽임을 당하는 사례가 바로 십자가입니다. 이 부딪힘이 곧 전쟁입니다. 하나님의 존재와 취지를 훼방하는 식으로 하나님과 함께 전쟁을 할 수 없습니다. 그 전쟁을 통해서, 자신들의 힘이 승리로 이끌지 않았음을 분명히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람이란 자신에게 일망의 희망과 가치가 있다고 한다면 ‘온전한 하나님의 사랑’을 그다지 달가워하지 않게 됩니다. 로마서 5:5에 보면,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주님의 십자가에 흘리신 피와 살은 유일한 천국의 길을 열게 하십니다. 인간의 그 어떠한 행위나 추가된 행위도 예수님의 피와 살은 용납하지 않습니다. 이처럼 천국 생활이란 천국의 원리를 설명할 수 있는 자들만이 할 수 있는 겁니다. 이는 절대적으로 ‘소유의식’을 인정치 않는 원리입니다.
천국은 나의 소유용이 아닙니다. 도리어 소유하려다면 여지없이 걸림돌에 깨어져버린 경험이 있어야 합니다. ‘내 것으로서의 천국’은 아예 없습니다. 우리가 천국을, 혹은 구원을 내 것으로 할 수 없는 이유는, 내 행함이나 힘으로 얻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천국가는 사람은 이 땅에서 자기를 위한 계획이나 목표를 세울 필요가 없습니다.
전도서 9:10에 보면, “네 손이 일을 얻는 대로 힘을 다하여 할지어다 네가 장차 들어갈 음부에는 일도 없고 계획도 없고 지식도 없고 지혜도 없음이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주님 보시기에 우리는 바보와 같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기업입니다.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은 나라 곧 하나님의 기업으로 선택된 백성은 복이 있도다”(시 33:12)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생존의 전쟁말고 영적 전쟁터에 우리가 놓여 있음을 느끼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
19-01-28 06:55
221강-여호수아 11장 21~23절(전쟁과 기업)20190127-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여호수아 11장 21~23절입니다. 구약성경 338페이지입니다.
“그때 여호수아가 가서 산지와 해브론과 드빌과 아납과 유다 온 산지와 이스라엘의 온 산지에서 아낙 사람들을 멸절하고 그가 또 그들의 성읍들을 진멸하여 바쳤으므로, 이스라엘 자손의 땅에는 아낙 사람들이 하나도 남지 아니하였고 가사와 가드와 아스돗에만 남았더라, 이와같이 여호수아가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신 대로 그 온 땅을 점령하여 이스라엘 지파의 구분에 따라 기업으로 주매 그 땅에 전쟁이 그쳤더라”
오늘 본문에 보게 되면 하나님께서 부동산을 주죠. 같은 지역이 있는데 그 지역을 분할 해서 나눠 주었습니다. 그런데 신약에 보면 현재 있는 땅을 분할 해 주는 것이 아니고 그게 어디에서 살든지 그게 재생산돼요. 즉각적으로 천국의 조건에 맞춰서 이게 북극에 살든, 몽골사막에 살든, 남극에 살든, 밀림에 살든, 어디든지 주 예수 있는 곳이 천국 되도록 그렇게 하나님께서는 달리 이야기합니다.
특정 지역에는 천국이고 그 지역에 안 들어오면 지옥이고 이런 게 신약에는 없습니다. 특정 집단, 특정교회, 특정 공동체, 공동체 안에 들어오면 천국이고 나머지는 지옥 가는 그런 건 없습니다. 그래서 이 공동체 운동이 엄청나게 위험한 운동이라는 것을 아셔야 해요. 어느 집단에 등록하고 회비 내고 하면 천국 가고 이런 거 없습니다.
감옥소, 교도소가도 천국이에요. 자유인이 되어서 지리산에서 약초 캐도 천국입니다. 그러한 변화를 우리가 읽어낼 수 있어야 해요. 오늘 본문을 통해서. 오늘 우리가 읽은 것이 구약이거든요. 구약은 땅 자체가 하나의 하나님이 보여주는 하나님의 연출하는 무대입니다. 이 무대가 신약에 보면 전 세계로 확장이 돼요.
그렇게 이스라엘 땅, 가나안 땅이 무대였다가 무대 범위가 넓혀지는 이유가 이스라엘이 하나님으로부터 범죄 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스라엘은 남아 있는데 그 이스라엘에 남아 있는 그 복음의 씨앗은 그 범죄로 인하여 오히려 전 세계로 확장됩니다. 마치 그 향수를 담은 보자기가 있는데 보자기가 찢어지게 되면 그 안에 있는 향수가 온 사방팔방 다 퍼져나가는 것처럼.
이스라엘이라는 국가 제도 안에, 법률로 만든 법률체제 안에서 하늘나라라고 규정했던 그 규정이 이제는 그 법을 넘어서서 찢어지고, 율법이 찢어지고, 법이 찢어지고, 옛 부대가 다 찢어져서 이제는 복음이 있는 어느 곳에든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기업이 되게 하고, 상속이 되도록 그렇게 조치를 했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이스라엘은 왜 망했는가? 이스라엘이 망한 이유는 사도바울이 로마서 9장 33절에서 분명히 이야기했습니다. 그들이 망한 이유는 단 하나예요. 그들이 행함을 의지했기 때문에. 참 요즘 들으면 참 충격적인 이야기입니다. 행함을 의지했기 때문에. 인간은 자기가 행동하게 되면 그것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행하고 잊어버렸다는 것은 그건 약간의 정신병이 있는 사람은 되는데 치매 같은 경우에 돌아서면 다 잊어버립니다. 그러나 인간은 약간 정상적이라면 절대로 뒤돌아서도 두 바퀴 뒤돌아서도 안 잊어버려요. 인간은 자기 한 것에 대해서는 집착이 있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자기 행동할 때 그냥 무심코 행동한 것이 아니고 내가 나를 다른 나로 재생산하는 용도로 그러한 목적을 가지고 행동했기 때문에 행동하기 전에 이미 목표를 노리고 행동해요.
내가 이 일이 끝나고 나면 얼마나 근사한 존재가 되어 있을까를 항상 염두에 두고 행동하기 때문에 잊으려 해야 잊을 수가 없습니다. 정신적으로 약한 사람 말고 대다수는 그래요. 그래서 목표가 있다는 것이 문제가 있다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이건 더이상 하나님이 필요가 없어요. 하나님이 주신다는 것도 빈말입니다. 자기가 만든 거예요. 하나님이 주신 것이 아니고.
사람들은 하나님과 관계 지을 때 하나님이 주신 것을 원치 않아요. 다만 하나님께서 약속만 하시고 그 약속을 따내는 재미를 저에게 허락해 달라고 요청한 식입니다. 기도하면 복 받는다고 할 때 그 기도하는 조건만 주신다면 기도해서 그 예상한 결과를 따낼 때 자기 자신이 얼마나 하나님과 한패이고 천국 백성이고 믿는 자라는 것을 티를 팍 내고 싶은 거예요.
그거는 구원이 아닙니다. 구원이라는 말이 흔한 말이 되었는데 그걸 좀 더 분명히 이야기하면 구출이거든요. 구출은 빠져나오는 겁니다. 그러나 인간은 절대로 자기 자리에서 빠져나올 생각을 애당초 한 적도 없고 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자기가 커지기를 원하지 이 껍데기 같은 나를 버리겠다는 생각을 어느 누가 갖겠습니까?
이제부터는 나는 나로 인해서는 안 살래. 그렇게 자기 자신을 내팽개치는 사람, 혹시 그런 사람 있거든 신고 부탁합니다. 그런 사람 없어요. 따라서 행함이라 하는 것은 늘 우리에게 하나의 우리 몸의 일부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그 행함 때문에 이스라엘 망한 거예요. 행함 때문에 망한 거예요.
사도바울이 말하기를 로마서 9장 33절에서 “내가 부딪치는 돌을 두었다”라고 하는 것은 부딪치는 돌을 두었다는 것은 간단히 말해서 이런 겁니다. 내가 가는 인생길에 장애물이 등장한 거예요. 장애물이. 우리는 내 인생길에 누가 장애물로 등장하게 되면 그냥 가만히 두고 싶은 생각 없지요. 그저 “귀신이면 물러가고 적이면 내게 항복하라”는 식이죠. 이렇게 돈키호테처럼 과장되게 행동하게 됩니다.
하루하루 살면서 우리가 걱정거리가 있다면 그겁니다. ‘오늘 하루는 내가 하고 싶은 일에 얼마나 많은 장애물이 등장하겠는가?’ 어느 드라마에 보면 그런 것이 나와요. 적들이 나타났습니다. 깜짝깜짝 놀라요. 알함브라궁전의 추억이라는 드라마에 보면 걸핏하면 적들이 나타나는데 왜 그리 적이 많은지, 아마 그 게임에 그 성격은 평소 우리 성격 심리상태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습니다. 아침에 눈만 뜨면 오늘도 적들이, 내 일에 방해꾼이 혹시 나타나지 않을지 염려하게 되죠. ‘오늘 놀러가는데 날씨 좋아야 할 텐데’ 날씨 안 좋으면 적들로 간주하죠.
그러면 이 부딪치는 돌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구원받기 위해서 좀 부딪치는 돌이 없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데 이게 우리가 발상의 전환이 일어나야 합니다. 부딪치는 돌에 가치가 있지 그걸 통과하는 나는 가치가 없어요. 십자가 자체를 위해서 우리가 존재하고 있는지 내 구원에 편리 하라고 십자가가 덩달아 붙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부딪치는 돌의 위력과 그것에 필수적인 것, 그 소중함, 그 부딪치는 돌에서 나오는 능력이 우리를 구원하는 거예요. 우리는 부딪치라고 인간이 되는 겁니다. 그래야 내 살과 내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영생이 없다는 말이 유효하잖아요. 혼자서 똑똑하고, 혼자서 교회 일 다 하고, 혼자서 잘나고, 혼자서 만사형통하고, 망하는 게 없고, 뭐든지 번창하고, 그러면 내 힘을 믿고 내가 구원받는 것이 되어 버려요.
내 힘과 내 노력과 내 의지와 참을성과 인내와 지혜와 덕과 자비하심 이런 거. 자기 자비하심으로 구원받습니까? 자기의 덕스러움으로 구원받습니까? 자신의 온유함으로 구원받는 거예요? 아니잖아요. 분명히 복음은 내 온유함과 내 성실함이 아니라 십자가입니다. 나에게 달려와서 나에게 부딪친 그것으로 인하여 내가 졸지에 나로 인하여 구원받겠다는 그 모든 것이 좌절되었다는 것이 이상하게 이것보다 더 기쁜 일이 또 있을까요?
누가 내 일에 브레이크 걸어서 좌절시킨다는 그것은 곧 구원시킨다는 것과 같은 이야기인 거예요. 구원은 좌절되어야 좌절되는 현장에서 비로소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거예요. 좌절되는 가운데서. 종교 기술 같은 거, 그런 거 발휘 좀 하지 마세요.
오늘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는 것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순탄한 길을 가게 허용하지 않습니다. 전쟁이라는 방식을 두시는 이유를 이제는 알겠죠? 그리고 그 전쟁이라는 방식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자기 실력 검증하려고 일부러 시비 걸어서 온 게 아니에요. 그거는 하나님께서 거침돌로 막아놓은 거예요.
너의 힘으로 적들을 물리칠 수 있는지 보라는 겁니다. 안 되지요. 될 수가 없지요. 할 수가 없어요. 우리가 사람이 사람에게 이야기하는 것은 그냥 참고로 들으면 그만이에요. 그러나 하나님께서 옆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그 앞에서 우리는 이미 죽은 목숨이 되는 겁니다. 주님의 지시가 오게 되면 하나님은 우리를 산자로 보지 않고 죽은 자로 간주해요.
왜냐하면 그 말씀 안에 십자가의 능력이 들어있기 때문에 그 십자가의 능력을 능력대로 본질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우리로 하여금 우리는 아무것도 한 것이 없다로 나타나야해요.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을 때, 다시 말해서 많이 용서받은 자가 많이 사랑하는 식으로 하나님께서 영광을 얻으시는 겁니다.
따지고 보면 여러분 오늘 한 것이 뭐가 있습니까? 교회 왔다는 아무것도 안 한거, 점심에 두루치기 먹는 거, 그거 아무것도 아니잖아요. 왔다 가서 구원되는 것도 아니고, 점심 먹었다고 구원되는 거 아니잖아요. 구원과 관련해서 우리는 매사에 일어나는 일이 아무 상관 없는 것을 하는 거예요.
오늘 설교를 다시 정리해 보겠습니다. 구원이라는 것을 설명할 때는 전쟁을 사용한다는 거, 거침돌을 사용한다는 거, 이거는 어떤 경우라도 만고의 진리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 같은 경우에 전쟁해서 그들은 혜택받잖아, 부동산 얻었잖아, 정착촌 얻었잖아, 그렇게 생각합니다.
지금 이스라엘은 약 50군데의 정착촌이 있습니다. 정착촌이라 하는 곳은 이스라엘 영내에 있는 곳을 정착촌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팔레스타인 땅에 있는 것을 가지고 정착촌이라 하는데 남의 땅에 들어가서 “이제는 우리 땅이다. 여기서 비켜다오. 이제부터 우리 이스라엘 군대가 여기서 장벽 치고 있겠다”라고 하는 곳이 약 50군데이고 거기서 이스라엘 사람들 50만 명이 살고 있습니다. 야금야금 먹어 들어가는 거예요. 정착촌. 베들레헴에도 정착촌 있습니다. 새 건물 잘 지어 놓았습니다. 거기에 비해 팔레스타인은 거지처럼 살고 있습니다.
이 정착촌이라는 것의 의미가 뭐냐? 오늘 본문 같은 경우에 정착촌은 산지에 있습니다. 그 산지에 있는 자손을 아낙 자손이라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 산지, 거기 21절에 보면 “그때 여호수아가 가서 산지와 해브론” 전부 다 산지에 있거든요. 정착촌을 건설한 겁니다. 쉽게 말해서 그들에게 나가라는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성경을 보게 되면 ‘야~ 신난다. 이스라엘 잘한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편이라 되었구나’라고 생각하지만 당하는 쪽을 한번 생각해 보세요. 여기 토착민들 생각해 보세요. 자기가 유구한 생활 동안 조상 대대로 그것들은 그들의 상속분이에요. 자기 등기로 된 토지, 자기 땅이에요.
자기 땅인데 이스라엘 사람이 와서 “여호와의 명령이다.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선지자 모세의 명령이다. 오늘부터 나가. 나가. 안 나가? 다 죽인다”라고 한다면, 여러분 그게 공정한 게임입니까? 제가 낮에도 이야기했지만, 구원은 절대로 공정하지 않아요. 이점부터 명심해야 해요. 공정할 생각 하시면 지옥에 가서 사세요.
공정함은 없습니다. 하나님 일에 공정함은 전혀 없어요. 그러면 내 마음대로 살겠다고 하는데 하나님이 내 마음대로 살게 하는 것도 없어요. 공정함도 없고, 내 마음대로 내 성질대로 사는 것도 없습니다. 그러면 뭐냐? 주님의 성질대로, 주님의 공정함에 우리를 초청하는데, 그 초청하는 것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바로 오늘 본문 23절 끝에 보면 나옵니다. 그걸 가지고 기업이라고 해요.
기업. 상속분이라고 해요. 그 상속분은 땅을 차지하는 땅만 차지하면 되는 것이 아니고 그 땅에 거주할 때는 하나님의 거져주심의 원리 원칙이 계속 살아 있는 조건 하에, 그 상속분을 계속 거기서 유지할 수 있어요. 거져주심이 계속 살아 있는 한 상속분을 거기서 더 유지할 수 있습니다. 덤으로 산다고 하죠. 덤으로 살 수 있어요.
그렇게 될 때, 그러며 그 땅은 이스라엘 땅이냐? 아니에요. 이스라엘 땅이 아니고 그러면 이방인의 땅이냐 하면 그것도 아니에요. 그러면 이방인 땅도 아니고 이스라엘 땅도 아니고 그러면 누구의 땅이냐? 보이지 않는 분이 소유주로 되어 있어요. 그러면 이스라엘은 뭐냐 하면 거기에 품꾼이에요. 임대차계약 한 겁니다. 그 임대차계약에서 계약금을 낸 것을 십일조라고 해요.
그러면 오늘날에는 계약금이 뭐냐 하면 예수님의 피와 살입니다. 예수님의 살과 피가 계약금이고 그게 십일조인데 그럼 그걸 누구에게 주느냐면 본인에게 내면 돼요. 왜냐 하면 본인이 그 기업에 결과물이기 때문이에요. 구약에는 내가 값을 치르고 살지만, 주님께서는 주님께서 값을 치르고 오히려 우리로 하여금 이미 값을 치렀다는 증거물로 우리를 이 땅에 데리고 사는 겁니다.
이 사람은 이미 십일조 다 냈다는 겁니다. 이 사람은 하나님이 필요한 모든 값을 다 치렀다고 성도로 내세우는 거예요. 좀 뻔뻔하죠. 뻔뻔해도 할 수 없어요. 어차피 게임은 공정하지 않으니까. 공정한 게임이 아니에요. 할거하고 받을 거 받는 게임이 아닙니다. 행함은 거침돌과 장애물에 의해서 전부 다 좌절되어야 해요.
자, 여기서 구원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정리하면 구원이라는 것은 두 가지로 설명될 수 있어요. 하나는 전쟁과 그 결과물인 기업, 상속분 이것으로 하나님의 구원을 설명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한 번 생각해 봅시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사랑한다. 사랑하게 되면 하나님이 이 땅을 그냥 무상으로 그냥 전쟁 없이, 아무 군대도 없이 하나님 혼자 가서, 다 차지해서 우리에게 그냥 넘겨주면 어떠냐? 그러면 괜찮지 않으냐? 이런 생각이 들겠죠.
성도는 구원을 내가 소지하는 것이 아니고 구원을 매일같이 설명해야 할 사람이에요. 이런 거 하나하나 다 바꾸려고 하니까 제가 지금 바빠요. 구원은 내가 소지하는 것이 아니고 천국은 내가 사는 곳이 아니고 지금부터 천국이 이런 나라라는 것을 내가 설명해야 할 기능인으로 초청받은 겁니다.
이렇게 부동산이고 동산이고 내가 뭔가 소유하면 일단 내 것 되었으면 내가 어떻게 써먹든 내가 그냥 써버리면 그만이잖아요. 그런데 성경에 나오는 전쟁을 통해서 받은 기업이라 하는 것은, 다른 상속분도 마찬가지지만, 그 땅을 땅의 성격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누가 설명해야 하는가 하면 땅의 거주자가 다 설명을 해야 해요.
아까 제가 다 설명을 드렸죠? 이스라엘 백성은 그 땅에 들어가서 이 땅은 어떤 내력으로 우리 것이 되었다는 것을 설명해야 하고 만약에 설명을 못 하게 되면 쫓겨나가야 해요. 나가야 한다고요. 옛날 구약 이스라엘은 어떤 의미에서는 좀 안 되었다 불행하다 할 수 있습니다. 왜냐 하면 한번 땅을 들어갔으면 그 땅에 계속 살면 되는데, 우리도 알다시피 그들이 가나안 땅에서 쫓겨났단 말이죠.
이제 억지로 1948년 2차대전 회담에서 차지했지만 쫓겨난 거예요. 그들은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으니까 그들은 자기 땅이 없고, 자기 땅이 없다는 말은 뭐냐 하면 유리하는 나그네처럼 흩어져서 살게 된 겁니다. 그렇다면 온전한 기업이나 이스라엘이라고 할 수 없죠. 우리가 구약을 보면서 신약과 연결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구약에서 이렇게 보게 되면 자칫하면 우리 자신이 소유하려고 하는 욕구, 본능을 구약이 옹호한 것처럼 그렇게 생각될 수가 있지요. 기도하면 땅을 주시리라 하는 그런 대목 같은 것이 대표적이잖아요. 기도하면 땅을 준다는 대목을 가지고 예배당과 교육관 짓고 주차장 넓히는데 기도하면 주께서 땅을 주신다는 거예요.
그러나 신약에 와서의 땅은 이 땅에 없습니다. 신약의 땅은 하늘에 있지 이 지상에는 땅이 없어요. 그래서 그러면 하늘나라 가면 되지 않겠느냐 하는데 지금 하늘나라 가는 게 관건이 아닙니다. 사람이 달라져야 해요. 사람이. 사람이 천국을 설명할 수 있고 하나님의 상속을 설명할 수 있고, 은혜를 설명할 수 있는 사람으로 달라져야 하죠.
그 달라지는 것이 뭐냐 하면 전에는 땅이 기업인데 구약이 진행되면서 이스라엘이 멸망하면서 무엇이 기업이냐 하면 바로 인간 자체가, 이스라엘 자체가, 하나님의 기업이 되는 겁니다. 시편 33편 12절에 보면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은 나라 곧 하나님의 기업으로 선택된 백성은 복이 있도다”
그러면 평범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기업이 되기 위해서 어떤 절차를 밟아야 하느냐 하면 내가 있으나마나한 존재라는 인색을 깨닫는 절차를 밟아야 해요.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아무것도 아닌 자를 주께서는 이렇게 하나님의 천국 백성 만들었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하는 겁니다.
혼인 잔치에 참석했던 사람이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처음에 초청장 보낸 사람들 아무도 안 왔어요. 그다음에 누가 오느냐. 아무나. 아무나 오라고 해서 아무나 왔어요. 길거리에서 놀고 있는 사람들 아무나 왔다고요. 그러면 그 천국에서 마련한 그 음식과 맛있는 것은 뭐냐 하면 그건 자기가 뭘 먹을 만한 행함이 없었죠. ‘내가 이걸 행했더니만 이걸 얻었구나’라는 소리를 해서는 안 되죠. 그래야 이 천국이 설명되는 곳이 되어요. 천국이 설명돼요.
로마서 5장 5절 말씀에 이런 말씀이 있어요. “소망이 부끄럽지 아니함은” 방금 제가 설교 쭉 하면서 생각하기는 여러분들이 ‘아 목사님 성경에 그런 말씀 나오는데 저도 압니다’라고 생각하실 수 있는데 알면 뭐 합니까? 그걸 목숨과 바꿔야지요. 방금 이런 이야기가 ‘성경에 이런 이야기가 있었구나’가 아니고 현재 내 목숨을 바꿔도 아깝지 않은 걸 쥐고 있어야 한다니까요. 그래야 내가 아무것도 아니잖아요.
‘아이고, 이 귀한 목숨, 귀한 목숨’하는데 안 귀해요. 아무것도 아니라니까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무것도 아닌 것에게 천국을 제공한 거예요. 천국을 설명하게 되면 기본 자질이 뭐냐 하면 나는 개코도 아무것도 아니라는 조건 하에 천국이 설명되어야 해요.
로마서 5자 5절에 “소망이 부끄럽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음 바 됨이니” 마음에 부음 바 되었다. 한번 부어 볼까요? 보자기 입구, 병 입구 열고 거기에 줄줄 넘치도록 부어 볼까요? 사랑을 넘치도록. 죄지은 것, 과거에 잘못한 거 그거 다 없어져요. 하나님의 의가 계속 부어지는 거예요.
그냥 죄지은 것만 용서하는 게 아닙니다. 그 레벨이 아니에요. “에라 먹어라” 해서 하나님의 의가 차고 넘치게 만들어 버려요. 이게 성령을 주신 사랑이에요. 두 번 다시 살려고 생각하지 말고, 뭔가 이것인가 생각하지 말고, 아무것도 아닌 개뿔도 아닌 것에다가 아닌 것을 빈 그릇 삼아서 거기에다 주의 사랑을 넘치도록 주시는 거예요. 넘치도록.
사도바울이 얼마나 넘쳤으면 못 먹고, 못 자고, 강도에게 쫓겨도 아주 신이 났어요. 우리 같으면 인생 조져놨는데, 어디 결혼을 해 봤습니까, 자식이 있기를 합니까, 남자로서 인생에 가장이길 합니까, 아무것도 없잖아요. 인생 조져 놓은 거잖아요. 그런데 이게 자기에게 주신 상급이라는 거예요. 아까 상속분이라는 게 하나님이 주신 보너스라고 보는 거예요.
심지어 자기 몸에 가시가 있다 할지라도, 그것 때문에 세 번 기도했을 때 주께서 “됐다. 너의 은혜가 네게 족하다” “아멘” 바로 그 사랑을 부어 받은 거예요. 오죽했으면 사도바울에게 미쳤다고 이야기하겠어요. 이거는 미친 거예요. 목숨과 주님의 약속과 바꾼 거예요. 약속을 공부하자는 게 아니라니까요. 약속 들어 보자는 믿어보자는 거 아니고 약속이 그냥 들어 온 거예요.
그럴 때 우리는 움직이는 상속이 되고 움직이는 약속 운반체가 되는 겁니다. 아까 기도할 때도 그랬지만 말씀을 지키지 마세요. 말씀을 지키면 자기 착취라니까요. 서울 의대 보내놓고 아이를 죽이잖아요. 이제 거의 끝나갑니다. 스카이캐슬. 3대째 의사 가문 만든다고 아이를 조지잖아요. 그거나, 오늘날 우리나 다를 바가 뭐가 있습니까?
나를 천국 보내려고 나를 아주 죽여버리고, 밟아 버리고, 이것도 하지 마라, 저것도 하지 마라, 그래야 네가 개선된다고 하죠. 뭐 혈액 개선제 먹습니까? 교회는 소위 잘난 자도 못난 재미로 살아가는 것이 교회여야 한다는 겁니다. 아무것도 아닌 재미로 살아가는 거.
전도서 9장 10절에 보면 이런 말씀 나와요. 아무것도 아닌 인간은 이 땅에서 아무 계획도 세울 필요 없어요. 뭐냐 하면 “네가 들어갈 그 음부는 일도 없고, 계획도 없고, 지식도 없고, 지혜도 없음이니라” 손 다 놓으라는 말입니다. 손 놓는 연습을 해라. 계획도 목적도 없는. 계획이 있어서 우리는 불안불안 한 거예요. 목적이 있어서 불안불안 한 거예요.
계획도 목적도 아무것도 없고. 왜? 등신이니까. 어디서 그게 등신인 것을 아느냐면 십자가 앞에서. 기도했습니다, 전도했습니다, 십일조 했습니다, 했는데 그게 십자가 앞에 다 깨져야 해요. 그딴 식으로 오지 말라는 겁니다. 어디 천국을 그딴 식으로 가요. 예수의 피와 살로 가는 거지. 예수의 피와 살을 먹고 가는 거지 어떻게 그딴 식으로 교회 봉사해서 천국을 갑니까?
그러면 이 땅에서 어떻게 살까요? 전도서가 말합니다. 낙이 없다 할 때까지 재미나고 즐겁게 살라고. “저는 기도하고 사는 게 재미나요”라고 하면 더이상 할 말 없고, 그건 정말 할 말 없는데 우리 자신을 안 믿는 훈련을 하시기 바랍니다.
이제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이 세상은 전쟁이에요. 영적 전쟁입니다. 내 영토가 얼마고 내가 인간답게 살라는 전쟁은 세상에서 지옥 가는 사람에게 하라고 하세요. 우리는 내 나라 지키는 전쟁이 아니고 주님께서 아무것도 아닌 나에게 거져 줬다는 천국 지키는 영적 전쟁 하셔야 합니다. 왜? 우리는 우리 자신이 이미 그 나라에 가연체이기 때문에, 그 나라의 열매이기 때문에, 그 나라의 결실 물인 열매이기 때문에.
이 땅에서 여러분 당당하고, 부끄러워하지 말고, 복음은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했으니까 부끄러워하지 말고, 당당하게 자책하지 말고 용감하게 살아가시기 바라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아무것도 아닌 것을 저희들이 말로는 이야기하지만 실제로는 자꾸 버티는 자신의 가치를, 남에게 상처받기 싫어하는 버티는 자세가 있습니다. 주여, 그 모습으로 인하여 주께서 십자가에 죽었다는 것을 결부시켜 생각하게 해 주시고, 주님 주신 것에 대해서 만끽하고 감사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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